슬램덩크 드림

[대만주영] 소녀, 가출하다!

어느 날의 한가한 늦은 저녁,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 소녀는 마찬가지로 작은 주먹을 꾹 말아쥔 채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원인은 시도 때도 없이 제 볼을 찌르며 작은 키를 놀려대는 2살 터울의 오빠였다. 말로는 귀여워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엄마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둘러대는 말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냉장고에 남겨둔 제 초콜릿을 먹어놓고, "초콜릿은 먹어봤자 키 안 커."라며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기까지!

바닥에 닿지 않는 발로 허공을 구르고 한껏 화가 난 얼굴로 책상을 콩 내리친(엄마가 늦은 시간 아파트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했으니) 소녀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바보 같은 오빠에게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물론 지렁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튼, 과감하게 결단 내린 아이는 착실하게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 알림장, 공책, 필통과 색색의 사인펜, 그리고 실내화 가방. 거기에 이모네 집에 갈 때처럼 다음날 입을 옷가지도.

양말 두 짝까지 꼼꼼히 품에 끌어안은 잠옷 차림의 소녀는, 야무진 쪽지 한 장을 제 방 앞에 남겨두고서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그렇게 무석초등학교 1학년 하주영은 조막만 한 발걸음 하나하나에 분노를 담아 계단을 오르며 만7년 인생 최대의 일탈 — 첫 가출  — 을 감행한 것이다.


한편 같은 시각,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뒹굴거리던 대만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톡, 톡, 톡.

"…이거 티비 소리야?"

"응?"

"누가 문 두드렸는데."

"못 들었는데?"

벌떡 일어난 키가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지만 읽고 있던 잡지를 바짝 쥐어 든 손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하필이면 최근 학교에서 돌고 있는 괴담(혼자서만 귀신이 낸 환청을 들은 학생이 조용히 실종되었다는)이 스멀스멀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엄마와 아빠의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장난스런 기색을 찾으려 애썼으나 믿을 수 없게도 두 분은 정말 듣지 못한 눈치였다.

이럴 순 없어, 농구부의 최연소 득점왕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쳐놨는데! 스타팅 멤버도 되지 못한 채 귀신의 손에 끌려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년은 몹시 억울했다. 게다가 언젠가 처음 주전으로 뛰게 되는 날 주영이가 응원하러 와준다고 했다고……! 그래도 정말 나한테만 들렸단 말이야?

아버지를 닮아 잘생겼다는 진한 눈썹이 억울함 반, 두려움 반을 안은 채 팔자로 가라앉고 그 아래의 눈마저 약간 촉촉해지기 시작하던 그때,

똑! 똑! 똑!

또 들렸다.

이번엔 확실했다.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현관 앞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엄마아빠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으니 환청이나 귀신은 아닌 게 분명했다. 휴! 죄 없는 잡지만 구겨졌네.

"올 사람이 있나?"

"이 시간에? 정대만 책가방 미리 안 싸놓는다고 경찰서에서 잡으러 왔나 보다."

뜨개실과 바늘을 내려놓던 어머니가 툭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제 손아귀에 구겨진 낱장들을 조심스레 눌러 펼치던 대만의 눈이 다시금 커다래졌다.

"거짓말, 그걸 경찰서에서 어떻게 알아?"

"너 아침마다 준비물 두고 가서 맨날 갖다 달라고 하잖아~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경찰이랑 몇 번 마주쳤는데 결국 이렇게……. 어디 가?"

"바… 방에서 읽을 거야."

손님이 왔으니 거실이 시끄러울 거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소년은 잰걸음으로 방에 뛰어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늘상 짓궂은 엄마가 놀리려고 하는 말이겠지. 여태까지 책가방을 미리 싸지 않아 잡혀갔다는 초등학생의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틀림없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대만이 누구인가.

정씨 집안의 똘똘하고 용감한 원앤온리 외동아들,

그리고 저런 뻔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만일을 대비할 줄 아는,

무석초 농구부의 완벽한 유망주!

…뭐 그런 생각들로 두 번이나 놀란 마음을 애써 달래며,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표를 어디다 놨었지? 국어책에 끼워놨었나? 아니면 영어? 앞주머니? 거기 없으면 농구화 가방? 유인물이 들어있을 만한 곳을 죄다 뒤집었지만 그 작은 쪽지는 어디로 숨었는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정체 모를 방문객은 기어이 집안에까지 들어왔는지. 퍽 다정한 말투로 뭐라 뭐라 떠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틈 새로 흘러들고 실내용 슬리퍼가 거실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아냐, 아직 안 돼, 준비물을 빠뜨려 체포된 첫 초등학생이 될 순 없다고……!

"얘, 대만아!"

"가방 다 쌌어!"

결국 아무 책이나 마구잡이로 가방에 밀어 넣던 찰나 빼꼼히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엉망진창인 속이 보이지 않도록 가방을 붙든 손이 움찔거렸지만 거울을 보는 듯한 눈매에는 도리어 웃음기가 가득했다.

얘기가 잘 풀린 걸까? 그럼 나 안 잡혀가나?!

"알았으니까 나와 봐. 주영이 왔어."

주영이?

잔뜩 굳어있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만 혹여나 어머니가 저를 꾀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반가운 이름에 마음은 놓였지만 약간의 의심을 품고서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오자, 정말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책가방을 매고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는,

우리 학교 1학년 중에 가장 똑똑하고 귀여운,

가장 친한 친구의 가장 좋아하는 동생,

하주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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