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돌아왔다 下-2 (完)
명헌태섭(후카료)
그때 미야기는 스물두 살이었다. 4년제 대학 편입에 성공해서 한숨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작 두 시즌을 더 뛰면 드래프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짓눌릴 때였다. 신인 드래프트는 미야기의 마지막 기회였다. 하위 리그에서 부름을 기다리는 선택지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타지 생활을 일 년씩 연장한 장학생들에게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치명적인 일이었으니까. 살아남거나, 돌아가거나. 갈림길이 몹시 덥고 또 건조해서 미야기는 늘 목이 말랐다. 아니, 단순히 애리조나가 더웠을 뿐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해에는 사람도 날씨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모인 유학생들이 아우성을 쳤고 본래 여름밖에 없는 섬에서 태어난 미야기도 덥긴 덥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카츠는 운이 나빠서 그달 중 가장 더운 날 유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야기는 그를 걱정하느라 바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인데, 어디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관광은 하나도 못 하고 우리 집에만 처박혀 있다가 가는 거 아니야? 음, 그것도 꽤 괜찮은데….
쓸데없는 생각은 후카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멈췄다.
겨울이 돌아왔다
“후카츠 씨!”
그건 아주 낯선 광경이었다. 살갗이 하얗고 앞머리 조금을 겨우 기른 남자가 회청색 캐리어를 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는 건 늘 자신이었는데. 뒤바뀐 입장이 낯설면서도 신이 난 미야기는 멀리서부터 두 손을 휙휙 흔들었다. 곧 후카츠도 그를 발견하고 방향을 바꿔서 다가왔다. 캐리어를 잠깐 내려놓은 손이 미야기를 끌어당겼다. 덤덤한 얼굴 양쪽에 붙은 새빨간 귀 두 개를 본 순간 미야기는 그곳이 공항인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맞출 뻔했다. 좀 더 맞닿고 남김없이 들이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아마, 후카츠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그렇게 오래 자신을 끌어안고 놓지 못했을 것이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데려가고 싶은 곳 있냐, 뿅.”
이상한 문답이었다. 캐리어 손잡이 위에서 두 사람은 손을 겹치고 눈싸움을 했다. 미야기는 분명히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후카츠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캐리어와 가방을 혼자 들어버렸다. 입술을 한껏 내민 미야기가 투덜거리며 운전석에 올랐다. 대학 동기를 아무나 찍어서 빌린 차는 다행히 잘 굴러갔고 차선도 헷갈리지 않았다. 관광 안내에 소질이 없어서 애인한테 감옥이나 보여준 게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후카츠는 꽤 만족스러워했다.
“내 애인이 특이한 사람이라서 다행이네.”
“그냥 관광지, 뿅.”
“아무리 유명해도 감옥이잖아요. 아, 관광지가 아니라 데이트 코스를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후카츠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말했다.
“내 로망은 홈 데이트, 뿅.”
“…변태!”
정확히 세 시간 후, 두 사람은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누워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은 몸을 섞는 데 썼다. 여러 이유로 울상이 된 미야기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 “첫날부터 이게 무슨 파렴치한 짓이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곧 스튜디오 방음 상태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혼자 열을 냈다가 다시 진정하길 반복하는 애인이 우스웠던 후카츠가 키득거렸다. 목소리 좀 줄여 봐. 조금만 있으면 이 건물에 사는 모든 사람이 네가 안길 때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버리겠다, 뿅. 아니면 혹시 못 본 새에 그런 취향이 생겼어? 미야기는 발로 후카츠의 배를 밀어버렸다. 다른 사람들 알 게 뭐예요. 난 이미 같은 층 사는 놈들의 파트너 성별이랑 포지션을 다 안다고! 망할 놈의 아메리카!
한참 티격태격하고 울고 구박도 했더니 기운이 쪽 빠졌다. 미야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후카츠를 흘겨봤다. 나 물 가져다줘요. 당신은 손님 자격 박탈이야. 그는 입속으로 조용히 웃다가 물컵을 미야기의 입에 대 주었다. 미야기는 금세 무거워진 눈을 반쯤 감고 찬물을 마셨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짧게 침음했다. 빈 컵을 가져다 놓으려고 침대를 벗어난 후카츠의 등에 붉은 선이 사정없이 그어져 있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슬그머니 옆자리를 두드렸다.
“별로 안 아파.”
“그러면 옷이라도 좀 입어요. 보는 내가 더 아파.”
“더워서 못 입겠는데, 뿅.”
“해도 졌는데?”
농담이 아닌지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손등으로 땀방울을 닦아 준 미야기는 아무 공책이나 집어서 팔랑팔랑 부채질했다. 눈을 살짝 감고 연약한 바람을 맞던 후카츠가 말했다.
“여긴 안 추워서 좋네.”
난 언제나 네가 걱정됐거든.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에서 천천히 드러났다. 남들이 보기엔 단단한 금속 같은 눈이었는데, 미야기는 그가 다정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어디 가서 혼자 추위에 떨진 않을지.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내가 차를 끓여줄 수도 없는데. 후카츠가 고개를 숙여서 미야기의 뺨에 입 맞췄다. 미야기는 가까이 다가온 머리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고 웃음을 흘렸다.
“여긴 세상에서 가장 화창한 도시라고요.”
“그래도.”
“괜한 걱정을 하네.”
나 괜찮아요, 후카츠 씨.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후카츠가 방심할 때를 노린 것처럼 말했다. 후카츠 씨 말고, 카즈나리. 꿈의 문턱 앞에서도 헛웃음이 나왔지만,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응, 카즈나리.”
목을 받친 단단한 팔과 품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냉기는 단순히 낯익은 풍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이, 최초에 있는 감각이었다. 이상하지. 어린 시절 내내 눈 구경 한 번을 못 해봤는데, 당신과 나란히 누워 있으니, 처음으로 여기도 내가 살아있는 집 같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고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 날 동안 그와 낯부끄러운 홈 데이트를 했다. 아침거리를 사려도 나오면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지나갔다. 처음 하루 이틀이나 부끄러웠지, 사흘째부터는 어차피 한국어도 모르니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후카츠는 관광에 관심이 없었으나 여기까지 데려와서 아무런 경험도 주지 않고 돌려보내긴 싫었다. 후카, 아니. 카즈나리. 우리 관광하러 가요. 등을 팍팍 두들기면서 차에 태우고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했다. 경로 검색에 6시간이 뜨는 걸 보고 포기할 뻔했지만, 어떻게든 도착했다. 협곡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험했다. 안전을 위해 난간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관광객들은 절벽에 덜컥 앉아서 사진을 찍곤 했다. 미야기는 현지인 가이드의 뒤를 따라가며 후카츠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등산 좋아해요?”
“그다지.”
“실내운동이 아니면 안 하는 거야?”
“그런 셈이다, 뿅.”
키득거린 미야기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럼, 아키타의 산에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 있어요? 조카이산에는 만년설이 있고 구름을 발아래에 둘 수 있다던데, 난 그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려 봤어. 앞장서던 가이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난간을 잡고 절벽 가까이 한 번 가보시겠어요?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라서 사진이 잘 나올 거예요. 그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비싼 몸이라 위험한 일 하긴 싫은데.”
“우리 아직 값싼 대학생이다, 뿅.”
“곧 비싸질 수도 있죠. 드래프트가 잘 되면.”
미야기는 물끄러미 내다봤다. 드래프트라는 단어에 걸린 무게가 조금 버거웠는데, 상대가 후카츠라서 그런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후카츠는 말없이 미야기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꽉 쥐었다. 비싼 몸들끼리 잘 잡아주자고, 뿅. 덕분에 깔깔 웃으면서 절벽 가까이 섰다. 고지대의 바람이 피어싱 박힌 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폐가 맑은 공기로 부풀어 올랐다. 그 건조하고 가파른 절벽에서 미야기는 조카이산을 상상했다. 야마가타현과 아키타현의 경계에 높게 솟은 산,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오키나와의 바다와 정반대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산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눈이, 쓰레기 같지 않았다.
당신과 같은 냄새가 날 테니까.
바다가 비가 되고 다시 꽁꽁 얼어서 곁으로 돌아오는 냄새. 몸 안을 깨끗한 공기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또다시 계절감이 모호해졌다. 천천히 눈을 뜬 미야기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후카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카즈나리.”
“응, 료타.”
새까맣던 눈동자는 햇볕을 받아서 조금 밝아 보였다. 벽이 하나 사라진 것처럼 그 안에 담긴 마음이 훤히 보였다. 선명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당신의 애정. 나를 정말로 사랑해 주는구나. 살면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미야기는 전에 없이 들뜨고 행복했다. 협곡의 공기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자꾸 둥실둥실 떠올랐다.
연인을 배웅하기 위해 찾은 공항에서 그는 후카츠를 두 팔로 끌어안고 마구 키스했다. 당신이 있으니 너무 좋아요. 카즈나리,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어.
“료타, 술 마신 것 같다, 뿅.”
“미운 말 할 거야?”
이제 한동안 못 볼 텐데…. 미야기가 아쉬운 마음에 눈썹을 늘어뜨리자, 후카츠가 품에 안겨 있던 그를 번쩍 들었다. 불시에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미야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눈썹도 한 번에 불쑥 들렸다. 놀란 기색을 겨우 숨기고 다시 뚱한 표정을 지은 미야기가 후카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투덜거렸다. 진짜, 당신 표를 뺏어버리고 여기서 계속 살게 하고 싶어요. 연애를 시작한 후로 처음 부리는 어리광이었다. 흔치 않은 투정이 귀여웠던 후카츠도 결국 표정이 누그러져서 작은 등을 토닥이며 전부 받아주었다.
“또 와요.”
“그래.”
“다음에는 더 오래 있어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뿅.”
“우리 여기서 살아요. 당신이 있는 게 좋아, 카즈.”
“그래, 그러자….”
미야기는 그 말을 조심조심 접어서 마음속에 넣었다. 협곡에서 마신 공기와 만년설처럼 불변하는 후카츠의 말이 그를 춥지 않게 했다. 그것을 연료로 삼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하여 이듬해, 미야기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다.
봐, 카즈나리.
당신이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그래서 난 기다려, 기다리는 건 잘하는 일이니까. 여기서 당신이 다시 오기를.
겨울이 오길 기다려….
꿈은 거기까지. 환상적인 해결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는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만 귓가를 울렸다. 안쪽에서 캡틴이 이제 두 시즌째를 뛰는 팀원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는 미야기를 발견하고 한 손을 번쩍 들어서 인사하더니,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곁을 지나가면서 보니 후배 녀석은 캡틴보다도 키가 컸다.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픈 게 일상인 곳이지만, 그의 체형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그는 북산으로 따지자면 강백호였다. 서태웅이 아니라 강백호. 에이스가 아니라 와일드카드. 다르게 말하면, 희망을 주는 사람.
스트레칭하고 있는 미야기에게 캡틴이 설렁설렁 다가왔다. 앉아서 팔을 뻗는 미야기의 등을 대충 눌러 주면서 말을 붙였다. 헤이, 미야기. 집에는 잘 다녀왔어? 뭐, 똑같지. 우리 아기는 키가 또 컸더라. 우리 애도 그래. 곧 덩크도 하겠다니까?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하게 허리를 숙인 미야기가 피식 웃었다. 캡틴과는 꽤 막역한 사이였다. 오래 함께하기도 했지만, 자식들 나이가 같아서 더 그랬고. 또 비슷한 시기에 헤어짐을 겪어서 더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년 드래프트는 우리가 이겼어.”
“흠, 동의.”
“올해는 플레이오프 진출로 안 끝나. 감이 딱 왔다고.”
작년부터 계속 나오는 소리였다. 벌써 들뜨지 않으려고 해도, 미야기의 팀은 확실히 상승 기류를 타고 있었다. 설레고 중요한 시기였다. 팬들의 기대감이 어마어마해서 한편으로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캡틴은 곧 농담을 접어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중요한 전력이야.”
“하? 당연하지.”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무너지면 안 돼, 미야기.”
미야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느리게 손을 내려서 무릎을 두드렸다. 그건 아마, 신이 조금 더 도와줘야 할 거야.
팀 주치의가 그에게 경고했다.
“재활에 들어가는 게 어때요.”
“재활? 은퇴를 잘못 말한 거 아닌가요?”
눈에 띄는 부상이 없다고 해도, 오랜 기간 서서히 닳은 연골은 한계였다. 주치의는 작년에 이미 연골 재건술을 권유했으나, 미야기는 그때도 지금도 단호했다. 당신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작년에 수술했다면 나는 우리 팀을 플레이오프에 못 보냈을 겁니다. 내 말이 오만한가요?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죠.
난 선수 인생을 사막에 다 바쳤으니까.
시즌이 시작하기 직전에 사와키타가 피닉스를 찾아왔다. 컨퍼런스가 달라서 자주 보기 힘든 친구인데, 예고도 없이 어쩐 일인지 몰랐다. 감이 귀신같이 좋은 녀석이라서 왔을지도…. 아무튼 사와키타는 딱 이틀 있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서 툴툴대더니 동그란 눈동자를 굴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빨대로 단백질 셰이크를 마시던 미야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뭔데. 눈 굴리지 말고 그냥 말해.
“너 혹시 후카츠 형이랑 사귀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혼자 이천 년대에 있냐? 사와키타가 두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니, 마츠모토 형이 근처 지나가다가 둘이 손잡고 나오는 걸 봤대서…. 그걸 대체 어디서 봤대. 몰랐어? 후카츠 형 본가랑 마츠모토 형네 집이랑 되게 가깝거든. 골치가 아파진 미야기는 손을 빼서 휘휘 내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사와, 나 아직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 없어.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에 사와키타가 화제를 조금 바꿨다. 가족 초청 이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의 가족은 이미 미국 시민권자인 사와키타를 따라서 미국에 오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을 정리하고 나면 정말로 모든 뿌리를 이곳에 옮겨 심는 것이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던 미야기가 불쑥 물었다.
“에이지, 너는 괜찮았어?”
“뭐가?”
“일본을 떠난 거 말이야.”
태어난 곳을 포기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어? 사와키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료타도 미국 적응하는 게 그다지 힘들진 않았잖아? 나도 뭐, 대학생 때나 향수병으로 고생했지. 인생의 절반을 여기서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그에게는 뿌리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사와키타는 자신과 조금 비슷했다. 성장 과정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농구를 정말 좋아하고 나아갈 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계산대에 가서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샐러드를 더 주문하고, 건강식이나 다름없는 샌드위치를 뜯어 먹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변하지는 않잖아.”
“그래?”
“응, 난 일본에서 태어났고 산왕 공업고등학교에 다녔는걸.”
미야기는 대답하지 않고 샐러드에 포크를 푹 꽂아 넣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하나씩 되짚었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카나가와에서 자랐다. 북산 고등학교에서 다시 한번 살아났고 아키타의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한 끝에 겨울을 만났다.
그러네, 만년설이 진짜 있네.
“고마워.”
“뭐가?”
“나 많이 아픈지 보러 와줘서.”
“윽, 티나?”
우리 캡틴이 그랬는데. 무릎 괜찮냐고 법석을 떨다간 쫓겨날 거라고. 나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단 말이야! 미야기는 포크로 그를 가리키며 얼굴에 다 티가 난다고 놀렸다. 넌 농구를 잘해서 다행이다. 금방 울상이 된 사와키타는 샐러드에 랜치 소스를 뿌려 넣었다. 친구 보러 왔다고 나름의 일탈을 한다는 게 소스 한 줌 더 뿌리는 거였다. 서른넷이 되어도 매번 식단 관리 때문에 괴로운 두 선수는 꾸역꾸역 식사량을 채웠다. 사와키타가 머무는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미야기가 말했다.
“이번에 붙게 되면 각오해.”
“자신만만하네?”
“응, 우리한테 좋은 카드가 생겼잖아.”
“우리도 이번 신인 드래프트는 괜찮았거든? 방심하지 마.”
“그래야지. 마지막이니까.”
사와키타는 호텔의 회전문 앞에서 망연히 멈춰 섰다. 미야기는 친구 앞에서 차마 비극적일 수가 없어서 그저 담담한 얼굴을 했다.
“완주를 빌어 줘.”
“…그럴게. 널 응원해, 료타.”
마음 정리를 끝낸 미야기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시즌에 임했다. 코트 위를 달릴 때는 언제나 어깨 위를 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모든 압박이 깃털보다 더 가벼운 눈송이가 된 것처럼 가뿐했다. 이번에야말로 구단이 기대하는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울이 온 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야기의 주기는 일 년에 두 번이었다. 중학교 때 형질을 깨달은 이후로 열병은 늦여름과 한겨울에 그를 찾아왔다.
열이 오르자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경기는커녕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차라리 입원을 택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매니저를 향해 농담했다. 돈만 있으면 호텔 방보다 병원 1인실이 낫긴 해. 적어도 내일 뉴스 헤드라인에 내 이름은 안 뜰 거 아니야?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 매니저가 병실 문을 닫아주었다. 그가 돌아가고 팀원들에게 한 차례 메시지가 쏟아진 후로 문병을 오거나 연락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야기는 혼자라는 사실을 마주해도 슬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외로움이 삶이었으니까.
분명 그랬는데.
새벽녘에 미야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환자복과 침대가 흠뻑 젖었고, 악몽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가로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여러 번 훔친 후에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달빛이 들지 않는데도 불을 켤 생각을 못 했다. 어둠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협탁을 더듬어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일본이 몇 시였더라. 잠깐 스친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야기?”
“…….”
“미야기, 미야기?”
왜 그래, 미야기. …료타. 그는 미야기를 몇 번이나 부른 후에야 허락을 구하듯이 이름을 불렀다. 미야기는, 그의 료타는 몸이 너무 아파서. 그게 너무 아파서 베개 위로 눈물을 흘렸다. 꽉 막혔던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를 겨우 꺼내놓았다.
“카즈.”
후카츠는 미야기가 출국하자마자 딱 죽도록 바빠졌다. 고교 농구부원들에게나 감독에게나 여름의 전국대회는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심지어 산왕과 북산이 유력한 우승 후보로 나란히 거론되는 바람에 두 감독의 자존심까지 걸려 버렸다. 미츠이는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발을 시도했고 후카츠는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첫 경기는 아주 무난했다. 산왕을 만난 게 불운인 고교였으나, 후카츠는 방심하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강자의 1회전 탈락이 평생에 걸쳐 교훈을 주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이번에는 특별한 경험을 하진 않았다. 그의 선수들은 2쿼터에서 점수 차를 이십 점으로 벌렸고, 후반전에는 벤치에서 대기하던 선수들을 내보내서 전국대회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그리고 미나가와는 2회전에서 발목을 다쳤다.
선수 생명에 지장이 갈 만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깁스하고 안정을 취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여름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는 꽤 평온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농구부의 누구보다도 힘찬 목소리로 부원들을 응원하면서. 후카츠의 산왕은 바라는 대로 우승했다. 미나가와가 끝까지 그러길 바랐는지, 아니면 차라리 그러지 않길 바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 애는 라커룸에 혼자 틀어박혔다. 문 너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주장이 다른 아이들을 쫓아버리고 감독에게 달려왔다.
“감독님, 어떻게 해야 해요?”
걔도 당장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의 슬픔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걸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후카츠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 열여덟 살도 서른다섯 살도 타인의 감정 앞에서는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미야기가, 료타가. 어딘가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해가 지고 자정이 넘을 때까지 후카츠는 그곳에 있었다. 철제 의자에 앉아서 기세등등하게 팔짱을 끼고 문을 노려봤다. 덕분에 새벽이 깊은 후에야 밖으로 나온 미나가와는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귀신 아니다, 뿅.”
“귀, 귀신, 귀신보다 감독님이 백 배 무서워요.”
미나가와가 킁, 하고 코를 훌쩍이더니 절뚝이면서 걸어왔다. 후카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아. 네? 앉아, 뿅. 아이는 가시방석 같은 철제 의자에 앉아서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꼭 면접이라도 보는 모양새였다.
“진료 다시 보고 왔어?”
“네…, 재활만 잘하면 큰 문제 없대요.”
그래도 관리 잘해. 한 번 다친 곳은 또 다치기 쉽다, 뿅. 겁을 집어먹은 미나가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우물쭈물했다. 그럴게요. 그런데요, 감독님….
“왜?”
“저 윈터컵 나가도 돼요?”
“그러던가.”
“윈터컵도 나가고, 유학도 갈래요. 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빌었어요. 장학금 못 받아도 미국 보내달라고….”
“아버지가 무릎 꿇지 말라셨지?”
“어떻게 아셨어요?”
자기 학생을 빤히 바라보던 후카츠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애매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농구부원들이 이제껏 본 얼굴 중에서 제일 부드러웠다. 글쎄, 난 평생 내 피가 파란색인 줄 알았는데. 애 아빠가 되니까 정말로 별수 없더라…. 아주 지는 게 일상이야. 후카츠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뚝뚝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 올라가자.”
“감독님.”
미나가와의 눈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저 기어 올라갈 만큼 안 떨어졌습니다. 윈터컵도 우승해요, 우리.”
그는 감독의 손을 빌리지 않고 훌쩍 일어나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게 어떤 녀석과 너무 닮아서 후카츠는 결국 웃어버렸다. 건방져, 뿅. 학생이 우승을 말하면 감독은 그곳까지 등을 밀어줘야 했다. 어른은 아이들의 꿈에 책임이 있었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어.
아키타에는 첫눈이 빠르게 왔다. 남들보다 일찍 찾아온 주제에 떠나기도 싫어하여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머물 터였다. 대회 때문에 긴 출장을 떠나는 후카츠는 보상처럼 아이를 먼저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하면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선물을 잔뜩 사주고 휴가를 하루 내서 함께 외식했다. 유미는 여섯 살치고 장난감과 옷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대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묻자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라고 대답해서 후카츠를 무너뜨렸다.
우리 애는 지금 자기가 마흔 살은 된 줄 알아. 애들은 원래 다 이런 거야? 단체 메신저에 올린 말에 카와타가 답장했다. 야, 내 일곱 살짜리 조카는 슬슬 박사 학위도 생각하신다.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게 자라는 과정이야.
[귀여워 죽겠지?]
[응.]
위풍당당하게 거실을 가로질러 온 유미가 말했다. 아빠, 나 색연필 사 줘. 끝이 뾰족하고 색깔도 많은 걸로. 크레파스는 자그마한 걸 그릴 때 불편해. 빨간색이랑 노란색 사이에 색깔도 몇 개 없고. 꼬마 화가는 무척 진지한 얼굴이었다. 후카츠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대답했다. 빨간색이랑 노란색 사이에는 주황색 하나밖에 없지 않아?
“아빠는 진짜 농구밖에 몰라.”
“아빠 그림 못 그려.”
“그래 보여.”
아주 많은 색깔이 있어. 주황색도 더 빨간 주황색이랑 덜 빨간 주황색이랑 노란색 같은 주황색이야.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넥타이도 파란색이 아니야. 그게 파란색이지, 뿅.
“아니야. 회색을 닮은 파란색이야.”
“그래?”
“료타 아빠가 그런 걸 회청색이라고 부른댔어.”
후카츠는 문득 아이에게서 미야기의 조각을 발견했다. 그것은 수많은 후카츠 사이에 하나씩 끼어 있어서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유미가 클수록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재빠르게 방으로 뛰어 들어간 유미는 마음대로 옷을 골라 입고 나왔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원피스였다.
“유미, 추워서 소매 짧은 거 입으면 안 돼.”
“카디건을 두 개 입으면 되잖아.”
어떻게든 입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한참 진땀을 흘렸다. 아빠가 만만찮게 목석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 졌을 터였다. 아이 옷을 갈아입히는 데 거의 한 시간을 쓴 후카츠는 너덜너덜해진 표정으로 차 열쇠를 챙겼다. 호수를 한 번 더 갈까. 다자와코를 좋아하던 미야기와 유미가 떠올랐지만, 모레부터 버스에 몸을 싣고 국토의 절반을 건너야 하는 직장인은 자꾸만 머뭇거렸다. 결국 후카츠는 아이를 데리고 시내의 식물원을 찾았다. 차로 딱 8분을 달리고 아이를 내려줄 땐 양심이 조금 아팠다. 그래도 유미는 열대 환경을 조성해 둔 식물원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6년 인생을 살면서 땅에서 솟은 파인애플을 처음 본 유미가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더운 지방의 노란색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밖으로 못 나가?
“응.”
“왜?”
“추위에 약해서, 뿅.”
“왜 약해?”
“여름밖에 없는 곳에서 태어났으니까.”
식물원 안은 따뜻하고 푸른 잎이 울창했다. 집에서 고작 8분 거리인데 바다라도 건넌 듯이 풍경이었다. 아마 미야기가 태어난 오키나와는 이곳과 좀 비슷하지 않을까. 자기 겉옷과 아이의 카디건을 팔에 건 후카츠는 도돌이표처럼 자꾸 질문하는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깥은 너무 추워서 저 꽃이 살아있을 수 없어. 금방 수긍한 유미는 거침없이 다른 구역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후카츠가 발을 떼기 아쉬워 느릿느릿 아이를 따라갔다.
식물관 곁에는 알록달록한 놀이터가 있었다. 주말을 맞이해 아이를 데려온 부모들이 한쪽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후카츠는 유미를 또래 애들 사이에 두고 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다른 부모들과 대화하지 않고 가만히 아이들을 구경했다. 유미는 원피스 자락을 꼭 붙잡고 미끄럼틀을 탔다. 그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남자애 하나가 아래로 내려온 유미한테 손을 내밀었다. 딸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것을 본 후카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수석에 앉은 유미에게 그 꼬맹이 이야기를 했다.
“너 오늘 처음 본 애 손 잡았더라.”
“아빠, 손은 아무한테나 있어.”
“그걸 잡는 건 다른 일이다, 뿅.”
나도 알아. 좋아하니까 잡은 거야. 그 남자애 본 지 한 시간도 안 됐으면서. 유미는 불퉁한 표정을 짓더니 아빠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건 상관없어. 일 초만 봐도 알아. 뭘 아는데? 유미는 기념품으로 사준 책갈피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보육원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랑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난 애들보다 걔가 더 예뻤어. 후카츠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주차장에 차를 넣었다. 현관 앞에 택배로 주문했던 색연필이 와 있었다. 잘 놀고 선물도 받아서 신이 난 유미를 진정시키는 일이 고역이었다. 제시간에 자러 들어가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끝에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자기 옷은 갈아입지도 못하고 침대 가까이에 구겨진 아빠를 말똥말똥 바라봤다.
“아빠.”
“응.”
“나중에 료타 아빠랑 또 가자.”
후카츠는 손을 뻗어서 유미의 눈가를 덮었다. 손등에 이마를 붙이고 가만가만 물었다. 왜, 벌써 아빠 보고 싶어? 유미는 아빠의 따뜻한 손바닥 아래에서 고개를 저었다. 료타 아빠랑 나는 인기 많은데 카즈 아빠는 맨날 혼자 있잖아. 그러니까 둘이 같이 있어. 어떤 사실은 어린아이의 눈에만 보이곤 했다. 멍하니 아이의 눈을 보던 후카츠가 쓰러지듯이 고개를 숙였다.
“유미, 유미가 좀 더 크면….”
“더 크면?”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면 료타 아빠랑 살래?”
미국에 있는 료타 아빠네 집에서 사는 거야. 그 집 엄청 멋있다, 뿅. 거기서 좋은 거 보고 좋은 거 먹고 그렇게 살겠니. 아빠의 손을 잡고 조물거리던 유미가 대답했다. 난 우리 집이 좋은데? 그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아빠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료타 아빠는?”
“료타 아빠도 좋아.”
“그런데 왜.”
“그래도 카즈 아빠가 제일 좋아.”
그리고 카즈 아빠는 농구밖에 몰라서 내가 챙겨줘야 해. 유미가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고 든든한 아군의 모습에, 후카츠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밤중에 후카츠는 짧은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그리고 그냥 식물원에서 찍은 아이 사진을 전송했다. 5분도 안 돼서 답장이 왔다.
[오키나와에도 식물원 있어요.]
[나 이제 추위 안 타.]
윈터컵 전날, 아이들에게 상대 고교의 경기 영상을 보여주고 주의할 점을 모두 이른 후카츠는 호텔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코치는 옆에서 한 개비를 겨우 피우더니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다며 먼저 들어갔다. 덕분에 여유로워진 그는 한 번 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밤하늘이나 구경했다. 구름 때문에 달이 뿌옇게 보였다. 한껏 흐린 하늘을 보니 내일은 이곳에도 눈이 올 듯했다. 미나가와의 발목 재활은 딱 예정만큼 걸려서 조급해하지도 느슨해지지도 않았다. 그 애는 다치기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유능했다. 그래서 기대가 됐다. 후카츠는 정말로 그가 먼저 떠난 이들을 따라서 미국에 가리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카즈.”
먼 곳에서 온 목소리였다.
“보고 싶어요, 카즈나리.”
여보, 당신과 우리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그를 기다렸으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길 바란 적은 없었다.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지만, 후카츠는 한마디도 못 했다. 아무런 변명도 위로도 생각나지 않았다. 17년 전에도 머물렀던 호텔 입구에 점점 더 많은 눈이 쌓였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동시에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냥 그들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갈 수 없고, 가야 했고, 외로웠고, 사랑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가 잠시 후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조용히 선고를 기다리는 그에게 미야기가 말했다.
“거긴 어때요?”
“…여긴 눈이 와. 보고 싶다, 료타.”
이제 후카츠는 그를 이해했다. 미야기에게 겨울은 후카츠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었다. 눈도, 추위도 마찬가지였다. 하얀색도 나를 부르는 호칭이며, 모든 겨울에 뿌연 입김 속에서 나를 떠올려 주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내 이름을 붙였다.
후카츠, 유미. 우리의 아름다운 겨울.
어김없이 올해도 겨울이 왔는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 그게 너무나 야속한데도 밉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마 우리가 영화나 동화는 못 되어도 소설은 되는 모양이지.
이건 내가 널 사랑하는 이야기인가 봐.
후카츠 료타.
여름, 여름이 끝났다. 매해 끝나는 것인데도 유난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평생을 여름 속에서 돌고 돌다가 끝내 떠난 듯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화창한 도시도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래봤자 그의 연고지는 사막이라서 길거리엔 티셔츠 하나를 대충 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천지였지만.
은퇴한 미야기는 관광지를 몇 군데 찾아다녔다. 언젠가 후카츠와 함께 들렀던 그랜드캐니언은 물론이고 국립공원과 박물관과 폭포와 우뚝 솟은 모뉴먼트 밸리를 찾아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가는 길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을 느리게 걷다가 관광객 한 무리를 마주치고 나면 확실히 기분이 나아졌다. 인파 속에서 여러 가이드가 각자의 여행사 깃발을 들고 외국어로 관광객들을 모았다. 개중에는 일본에서 온 무리도 종종 보였다. 다들 목에 커다란 사진기나 세련된 디자인의 필름 카메라를 걸고 있었다. 그들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혼자 얼쩡거리는 동양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협곡과 댐 앞에서도 그랬다. 묵직한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서툰 영어로 말을 걸었다. 선글라스를 곱슬머리 위로 올린 미야기는 일본어로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여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는 일행과 여러 자세로 사진을 찍고 그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고개만 끄덕인 미야기는 천천히 걸어서 차로 돌아갔다. 그 이야기를 사와키타에게 했더니 유학 삼 개월 만에 향수병이 온 장학생 같다고 평했다. 머리를 내리고 다녀서 그래. 바짝 올리고 있었으면 카메라가 아니라 펜을 내밀었을걸? 그 사람들 불쌍하다. 사인받을 기회를 놓쳤네. 그러게. 고등학생 때에도 안 거르던 왁스 칠을 왜 안 해? 음, 나도 슬슬 누가 어려 보인다고 하면 기분이 좋더라. 두 사람은 휴대전화를 사이에 두고 같이 웃었지만 조금 쓴 맛이 났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투덜거리던 사와키타가 말했다.
“료타, 그러지 말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놀아. 반평생 산 애리조나에 뭐 재밌을 게 있다고 근처만 빙빙 돌아?”
“거긴 뭐 다를 게 있어?”
“에이지가 있잖아.”
“오랜만에 디즈니랜드나 갈까. 음,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좋고.”
“에이지가 있다고!”
사와키타를 적당히 놀린 다음에 미야기는 정말로 로스앤젤레스에 몇 달간 머물 숙소를 잡았다. 그곳을 연고지로 한 사와키타와 같은 연고지의 다른 팀에서 뛰는 하나미치가 그의 호텔을 임시 아지트로 삼아버렸다. 얌전한 것 같아도 자기를 쏙 빼놓으면 득달같이 달려오는 루카와가 아래층에 객실을 잡아서 하루 묵고 가기도 했다. 훈련으로 바쁜 와중에 먼 거리를 달려온 게 웃기고 기특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미치에게 피자를 먹이던 미야기가 괜히 툴툴거렸다.
“우린 대체 왜 삼십 대 중반이 돼서도 바보 트리오를 못 벗어나냐.”
“료칭, 벗어날 생각 있었어?”
사와키타가 소파 아래에서 피클을 뜯다가 킥킥거렸다. 웃지 마. 지금 카에데 없어서 네가 세 번째 바보니까. 웃음을 멈춘 그는 슬픈 표정으로 피클을 집어 먹었다.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호화로운 호텔 방이 낡고 월세 저렴한 스튜디오처럼 느껴졌다. 말 그대로 미국에서 반평생 산 놈들이 다 바닥에 앉아 있어서 더 그랬다. 이제 코타츠보다 아일랜드 식탁을 더 좋아하는 미야기만 어이가 없었다.
“바보들아, 집에 갈 시간이다.”
“횡포다, 횡포.”
“여기 내 방이거든?”
금방 사와키타와 하나미치의 비시즌 훈련이 시작했다. 미야기는 어떻게든 호텔 방으로 기어들던 두 녀석을 몇 번 봐주다가 쫓아냈다. 체크아웃까지는 딱 이틀이 남았다.
또, 혼자였다.
슬슬 갈 곳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집으로? 안나의 메신저 프로필에 업데이트 표시가 붙어 있었다. 사진을 클릭하자, 예비 신랑과 팔짱을 낀 동생이 화면에 가득 찼다. 결혼식 때에 맞춰 돌아가긴 해야겠지. 그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지낼까. 가나가와에서 지내면서 달마다 비행기를 타고 아키타로 가는 거야. 그 사람과 유미를 매달 볼 수 있어…. 꿈은 아주 연약하게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 정신을 차린 미야기는 그것을 접어서 다시 마음속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미뤄뒀던 연락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세 바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외면하고 있었던지라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아주 바빴다.
체크아웃을 하루 앞당기고 사막으로 돌아왔다. 부름을 받아서 재학 시절의 코치를 만났다. 그는 이제 모교에서 감독으로 지내는 중이었고, 미야기가 선수로 성공한 후에도 가끔 연락했다. 미국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비교적 ‘선생님’ 같은 사람이라 언제나 달가웠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미야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감독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료, 여기야!”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내디딘 미야기는 무릎이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른 이유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에 세월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 그가 보는 자신도 예전처럼 어리고 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쩍 어른이 되어버린 미야기는 월세 저렴한 스튜디오를 다시 한번 떠나보냈다. 그에게 남자는 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당황한 미야기가 손을 내저었지만, 지도자 안목으로 번뜩이는 눈이 그를 쏘아봤다.
“생각해 볼게요.”
“미야기, 넌 할 수 있어. 새로운 전설을 써 봐.”
하지만 미야기는 ‘Can’이 들어가는 모든 문장이 지겨웠다. 모든 외국어가 지긋지긋했고 새로운 것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낡은 것을 다시 주워 모으고 싶지만, 아직 바람이 불었다. 바다 위를 스치며 파도를 일으킨 바람이 돛을, 그의 등을 여전히 밀고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기회가 생겼다. 더 새롭고,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속삭였다. 평생 여름을 돌고 돌았는데 아직도.
저녁에는 미국에서 볼 일 없는 원조 바보와 통화를 했다. 그래요, 맞아. 선배 4강에서 완전히 깨졌다면서요. 작년에는 사이좋게 한 번씩 우승하더니만…. 겨울에 다시 복수하겠다고? 미츠이 씨, 두 번째 윈터컵 우승에 성공하면 그냥 별명 바꾸세요. 음, 겨울에만 이기니까 눈꽃 남자는 어때요? 다음 해에 동창회를 해보자는 이야기와 쓸데없는 잡담을 한참 떠들었다. 슬슬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쯤에 미야기가 마치 끝인사 같은 어조로 말했다.
“맞다, 미츠이 씨. 저 무릎이 잘 안 움직여요.”
“…….”
발목도요. 아, 정말이지. 할 만큼 한 나도 이렇게 세상이 끝난 기분인데 선배는 이걸 어떻게 견뎠어요? 전화 너머의 미츠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야, 나한테 그런 걸 물으면 내가 무슨 염치로 대답하냐.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래도 말이야.
넌 그렇게 어렸을 때도 끝내 죽지는 않았지.
이번에도 그럴 거다.
정말 그런가?
바다 끝을 넘어서도 죽지 않을 생명력이 나한테 남아있나?
미야기는 끈질긴 감독한테 “다시 연락할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잠적했다. 두 달 후에 우연히 연락이 닿은 그가 불평을 터뜨렸다. 왜 기회를 마다하는 거야. 넌 좋은 포인트 가드였고, 농구가 너를 사랑했고, 분명히 코치 일도 잘할 거라니까! 안목이 높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기는 했다. 당장 미야기부터가 그의 선택에 신세를 많이 졌고. 결국 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견학이라도 해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잠적한 보람은 있었다. 한 차례 수술한 연골을 일상생활에서는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회복했으니까.
체육관에서는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오늘 연습 경기가 있나 봐요?”
“맨날 붙던 그놈들이야.”
혀를 내두른 미야기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에 걸쳤던 목도리를 풀어서 무릎에 올려놨다. 여기도 맨날 보던 그대로인데요. 십 년도 넘게 지났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손을 휘저어서 흘끔거리는 선수들을 쫓은 감독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야 그렇지. 골대가 낡아서 바꾸고, 바꾼 지 꽤 되어서 또 바꾸고, 해가 바뀌었다고 또 바꾸고 나니까 그냥 늘 똑같은 새 골대가 서 있는 거 같아. 미야기는 그의 말에 조금 동감했다. 미국도 그랬다. 여기 사람들도 전부 나이를 먹고 지는 해가 되고 새로운 혜성이 등장하는데, 돌아보면 늘 똑같이 낯선 모습이었다. 항상 같은 태양이 내리쬐고 사막의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서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아무것도 못 해, 료. 네가 뛰어난 선수긴 해도 직접 뛰는 거랑 코치 일은 너무 다르거든.”
“정말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군요.”
“나쁘지 않은 조건에서 말이지.”
머리가 하얗게 센 감독은 날카롭게 진지한 눈으로 그의 선수들을 살폈다. 미야기도 그 시선을 따라서 후배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슈팅 능력이 뛰어난 선수도 있었고, 훈련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기합을 넣어 주는 선수도 있었다. 옆에 선 친구보다 한 뼘은 작은 선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만큼 작진 않네.
이곳에서 미야기는 아주, 아주 작았다. 상대로 만난 팀이 조롱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작고 부족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어 올라왔는지…. 늘 우스갯소리로 너무 고생해서 할아버지가 된 후에도 이때 이야기를 할 거라고 떠들었는데, 글쎄. 생각보다 막연했다.
“어쩌면 감독님 말씀처럼 또 성공할 수도 있겠죠.”
“그래,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머지않아 시내의 다른 대학교에서 온 선수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하얀 티셔츠를 입고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이내 두 팀이 양쪽 코트로 나뉘어 들어갔다. 미야기는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가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대 팀 지도자들과 대화하던 감독이 도망가 버린 미야기를 발견했다. 앞으로 와서 봐! 여기서도 잘 보여요. 어깨를 으쓱한 미야기는 의자 앞으로 다리를 뻗고 편하게 기대앉았다. 감독 곁에 선 코치도 얼굴이 눈에 익었다. 미야기는 뒤늦게 그가 대학 시절 붙었던 팀의 젊은 코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학교로 왔었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코치 일을 했다면 18년이 넘었다.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게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이 학교의 신이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면. 고향의 어린 선수들에게 또 다른 꿈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미야기의 의무였다. 이미 그의 삶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체육관 문틈으로 학생 한 명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는 조금 소란스러운 안쪽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빠른 걸음으로 감독에게 다가갔다. 대화는 아주 짧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체육관에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미야기는 경기가 시작해 버리기 전에 감독을 붙잡았다.
“방금 나간 애는 누구예요?”
“아, 우리 선수.”
…였던 놈이지. 감독이 뺨을 긁적였다.
“유학생이죠?”
“맞아.”
부상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미야기는 더 묻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기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짧게 깎은 머리를 하고 한쪽 어깨에 낡은 가방을 멘 채로 처음부터 여기에 없던 사람처럼 사라진 학생이 자꾸 생각났다. 체격이 제법 좋던데. 어째서일까. 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어디서 왔고 이제 어디로 갈까. 골대 아래에서 리바운드를 따낸 선수의 얼굴이 그 학생으로 바뀌었다. 삼 점 슛 라인에서 뛰어오르고, 수비의 빈틈을 파고드는 선수들의 얼굴도 차례로.
그 애는 왜 포기했을까.
나는 포기하고 싶었던 이유가 아주 많았는데….
다음 순간 미야기는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미국 땅을 밟은 지 17년째, 이제야 외면하던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고 수없이 되뇌던 이 학교에서, 미야기는 자신의 다른 면을 찾아냈다.
그래, 포기하고 싶은 이유가 끝도 없었다.
너무 빠르게 달렸다. 너무 일찍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고, 날아올라서 타지에 떨어졌다. 낯선 땅에서 꿈을 이루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또 헤어져서 결국 혼자가 됐다.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들을 고작 서른 남짓에 모두 해치우고 나서야 미야기 료타는 자기 안의 평범한 욕망을 발견했다.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 내게도 있었다.
여전히 있다.
미야기는 아주 예전 일을 떠올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가슴 한편이 꽉 막혀 있었고, 경기는 말아먹었고, 기껏 따낸 출전 시간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벤치에 앉은 그는 초조하게 무릎을 두드리면서 코트를 바라봤다. 다시 코트로 나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써야 한다고 고집부릴 마음도 안 들었다. 꼭 필요한 성적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밤새워 영어 공부를 했더니, 스스로 인정할 만큼 몸이 무거웠다. 미야기는 그게 무엇보다 비참했다. 농구가, 저기에 있는데.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감각.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아주 흔했기 때문에.
그때부터였나? 한밤중에 전화기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말을 가다듬다가 끝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웃으며 전화를 끊었던 날부터, 나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외로웠을까? 그 시절을 박차고 달려 나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으나, 우리의 다리는 영원히 달릴 수 없다.
누구에게나 연소의 때가 온다.
그 마지막에, 누구의 곁에 몸을 눕힐지가 어쩌면 내가 욕심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휴대전화가 몇 번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현관문을 세차게 닫은 미야기는 옷방에 세워두었던 캐리어를 끌어냈다. 물건을 집히는 대로 쓸어 담고 가장 빠른 비행기의 남은 자리를 허겁지겁 구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기다리다가 이르게 뛰쳐나갔다. 차를 운전할 정신도 없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큰길로 달려간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아직 탑승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손끝이 떨리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달리기를 멈춘 후에도 계속 숨이 가빴다. 뺨 위를 감도는 혈색이 가실 줄을 모르고 눈동자가 전에 없이 어리석었다. 비행기 모드로 돌려놓은 휴대전화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던 미야기는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가장 익숙한 이름을.
후카츠 카즈나리.
나, 포기했어요. 이제 그래도 괜찮죠.
아키타는 폭설 한가운데에 있었다. 노시로 공항 밖으로 한 발을 디디자마자 눈보라가 머리를 엉망으로 뒤집어 버렸다. 공기까지 얼어붙어서 휴대전화를 움켜쥔 손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손끝이 자꾸 화면 위로 미끄러졌다.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찔러넣고 차근차근 걸어 나가면, 매번 굵은 눈발이 눈앞을 뿌옇게 가렸다. 그런데도 몸 안쪽이 온통 뜨거웠다. 심장이 끝없이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것처럼. 위태로운 눈길을 헤치며 계속 달렸다. 몇 번이나 발이 미끄러져도 절대 멈추지 않았다. 야트막한 언덕길에서 발목이 어긋나 무릎을 부딪쳤지만,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모든 사건이 과거가 됐다.
눈과 얼음의 냄새가 났다. 온 세상에서.
“후카츠.”
우산을 쓴 사람들이 눈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세찬 바람 때문에 우산을 놓치고, 모자를 꽉 붙잡고 추위에 떠는 사람도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이 불시에 켜졌다. 뿌옇게 번지는 불빛 아래에서 눈이 휘몰아치듯이 날아다녔다. 손등을 들어서 입술을 꾹 눌렀다. 파랗게 질렸을 게 뻔한 입술과 장갑 하나 없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달리고 부딪치기까지 했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사는 내내 자신을 먼 곳으로 끌어 올리기만 하던 바람이 이제야 같은 편이 되어준 듯했다. 미야기는 밧줄을 당기고 돛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계속, 계속 걸었다. 마침내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후카츠와 함께 고른 그 집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지레 걱정해서 허리를 단단히 받친 팔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들어섰던 집, 고향,
그리고 당신.
눈 속에서.
당신이 울고 있었다.
그리움만이 우리를 울게 했으니까. 겉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뛰쳐나온 후카츠는 뺨이 다 젖어 있었다. 아니, 뜨거웠던 눈물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살갗 위에 얼어붙었다. 머리채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얼음덩어리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둘 다 서로가 그렇게 엉망진창인 꼴은 처음 봤다. 가장 볼품없고 나약한 모습으로 상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길고 차가운 삶 가운데 조난된 사람들처럼 그렇게, 지치고 겁에 질린 채로….
미야기는 겨우 한 발짝을 더 걷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추위에 질린 입술이 달싹였다.
“우리 처음처럼 해볼까요.”
“그래, 그러자.”
함박눈이 너무 펑펑 내려서 꼭 눈밭에 빠진 것 같았다. 서로의 인영이 흐릿해졌다가 언뜻 비치길 반복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헷갈리지 않고 꾸준히,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얼마나?”
“영원히.”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차게 내리는 눈 속에서 두 사람은 몸을 천천히 겹쳤다. 그들에게 전혀 아름답지 않은 현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훗날 어리석은 결정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어느 날에는 또다시 서로를 상처입히고 용서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연약하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었다. 이제는 무너질 시간이다. 걸음마다 꿈이 하나씩 진다. 타오르는 열정이 떠난다. 영광스러운 여름이 끝난다.
모든 생명체가 잠드는 계절이,
겨울이,
돌아온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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