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시리즈

적과의 동침

대만준호

1.


정대만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들은 말이 진짜 제가 이해한 말이 맞는지 싶어서. 하지만 눈앞의 프런트 스태프가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진짜로 팀 옮기세요?”

“무슨…?”

“조간 초판에 떴어요. 정대만 선수 워리어스로 간다고.”

그러면서 코앞에 불쑥 신문을 내민다. 거기엔 제 사진이, 아마도 나흘 전쯤에 찍힌 게 분명한 것이 실려있었다. A 호텔 라운지 바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모습. 대만은 엘리베이터를 눌렀고 머잖아 문이 열리면서 그것을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대만과 동행했던 이가 마치 모르는 척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대만은 그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앞으로 있을 일이 기대가 된단 의미로. 하지만 그게 이런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니까 이건 내가 권준호랑 데이트 하던 거지, 권준호네 팀으로 이적하겠다고 만난 게 아닌데?

 

2.

좋아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졸업 전. 하지만 마음이 이어진 것은 올 늦여름이었다. 8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송세월한 것엔 사실 큰 이유가 없었다. 그저 확신이 없어서 그랬을 뿐. 하지만 동료이자 친구가 된 관계에서 그보다 무서울 게 있을까. 좋아한다, 라는 고백 한 마디만으로도 친구가 아니게 될 수 있다. 대만은 대체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전적으로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따라주는 사람들이 있어 가능함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것도 그냥 따라주려고. 게다가 상대는 권준호였다. 맹하면서도 은근 단호한 녀석. 졸업 전 우연히 준호가 고백을 거절하던 모습을 목격한 대만은 그가 연인을 만들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제 마음을 전달하기엔 어려울 것 같단 확신이 섰다. 아무리 제가 밀어붙인다 해도 저 말랑한 알맹이 속에 같은 무게의 마음이 없는 이상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걸 보았기 때문이다.

8년간 줄곧 좋아했냐면 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게 맞긴 한데 굴곡이 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될 거 같지 않아서 몇 번이고 접어보려고 했다. 결과적으론 뜻대로 안 됐다. 덕분에 기어코 이어진 것이고. 사실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것도 자신이 죽어도 포기하지 못할 것이란 걸 그 오랜 경험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권준호가 유부남이 되어도 말이다.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대만아.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쳤는데도 준호는 대만의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보통 이러면 어디서 술 처마시고 와서 꼬장질이냐고 욕이나 퍼붓지 않나? 소주를 세 병 비우고 온 머리로도 대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나 다정한데 당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문제는 그 다정함이 저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란 것이었으며, 어쩌면 그걸 특권처럼 누릴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나 그 사람 봤다, 뿅. 대만과 대학 동기이면서 동시에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이명헌은 평소 말도 잘 안 걸면서 그날은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안경 선배, 뿅. 직전까지만 해도 별 반응도 않고 땀이나 훔치던 대만은 그 말에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권준호? 네가 준호를 왜 봐. 만났단 게 아니라 목격했단 뜻이다, 뿅. 아니 그니까 어디서 봤냐고. 호텔에서 봤다, 뿅. 뭐? 선보는 거 같던데 상대방이 미인이셨다, 뿅. 안경 씨도 아주 예의 바른 게 잘 어울렸다, 뿅.

대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3초가량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겨우 꺼낸 말이, 구라지? 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내가 그걸 왜 거짓말을 하나요, 하는 이명헌의 눈빛만 있을 뿐.

그때부터 대만의 마음속엔 불안이라는 씨앗이 심어졌다. 아니, 권준호가 선을 본다고? 말도 안 된다. 자기한테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며 열렬한 고백도 거절하던 녀석인데 결혼을 그렇게 할 리 없잖아? …라고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어느 정도의 효과야 물론 있었다. 최소한 권준호 면전에 너 결혼하냐? 고 불쑥 묻지 않을 정도로만. 근데 차라리 그렇게 물었으면 나았을까. 명헌의 말을 듣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났을 때, 대만도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결혼적령기의 여성과 마주 앉아서 두런두런 얘길 하는 권준호를.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을 후벼팠다.

대만은 며칠을 정신을 빼놓고 살았다. 마침 비시즌이라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커리어에까지 크게 영향을 줄 뻔했다. 아니 반대로 비시즌이라 더 정신을 못 차린 것일 수도. 코칭 스탭진이 단체로 걱정을 하고 있단 말이 나왔고, 결국 대만은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어야 함을 순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용기가 아주 나지는 않아서 소주 세 병을 병나발로 불어버렸지만 말이다.

결혼을 할 거란 말을 듣는다면 이 마음이 끝이 나긴 할까. 절 붙들고 서서 걱정스러운 눈을 한 준호를 보면서 대만은 다시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막연히 지금 이 상황이 갑갑하고 억울할 뿐이었다. 너는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내 마음을 놔주지도 않고, 나조차도 못 놓게 하는데. 그런 원망을 술술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말보다 다른 것이 더 빨랐다.

-대만아, 너 울어?

취기가 오르는지 눈앞이 흐려진다 했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대만은 준호의 눈이 땡그랗게 놀란 걸 보다 제 눈을 만졌다. 준호의 말대로 축축한 게 손에 묻어났다. 그걸 인지하고 나니 이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대만은 툭툭 떨어지는 걸 보다 다시 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줄 몰라하며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썹 끝이 내려간다. 인상을 쓰는 얼굴도 귀엽다. 대만은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부터 떠오르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웃음이 나는데, 비틀린 입에서 나오는 건 웃음이 아니라 울먹임이었다.

대만의 고개가 준호의 품을 파고 들고 준호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냈다. 어깨가 축축해지고 절 붙든 대만의 손에 힘이 실리는데도 거부하지 않았다. 역시 뭔 말을 들어도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이 나니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권준호, 결혼하지마.

준호의 몸을 더 가까이 품에 넣으며 대만이 말했다. 응? 준호가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만은 하고 싶은 말을 마저 이었다.

-결혼하지마. 사람 하나를 5년을 넘게 삽질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너만 홀랑 결혼해서 잘 살면 다 되냐? 나도 좀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말도 못 하고 끝내는 짓 절대 못 해.

-아니, 대만아. 잠깐만 뭐라고?

한참을 붙잡고 울어도 떨어뜨릴 생각도 않더니 고백을 하려니까 저항을 한다. 그게 또 서러워서 대만은 더 준호를 끌어안았다. 아니, 대만아. 잠깐만 나 좀 놔 줘봐. 잠깐만- 하고 외치는 준호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지만 대만은 놔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좋아한다, 권준호.

마침내 그 말이 나오자 준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굳어지는 어깨가 거부의 뜻을 담고 있는 거 같아서 대만은 코끝이 다시 무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보다는 더 말해주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시도 널 안 좋아한 때가 없었어.

엄청나게 좋아했고 아마 앞으로도 좋아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결혼 같은 거 하지 말아 달라고. 자긴 포기를 몰라서, 네가 그런다고 이 마음이 포기가 될 리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네가 책임져 달라고. 쌩 억지임을 알지만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좋아한단 이 감정을, 오로지 좀 더 갖고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결혼은 하지 말아주라.

더 많은 말이 필요하단 걸 알지만 그 말을 끝으로 더 말할 수 없었다. 일단 다시 또 울컥 치솟는 것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어떤 말로 더 표현한다고 해도 자신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으리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만은 준호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며 아까처럼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뒤로 밀어보려 애를 썼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준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부터였다. 고요하던 숨소리가 마치 대만이 씩씩대는 것처럼 들떴다. 이어 킁, 하고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이게 자기가 낸 소리가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술과 북받친 감정에 절은 머리가 생각을 다 끝내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꽉 붙들고 있던 몸을 조금 떨어뜨리고 코앞의 준호를 살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어서 검은 정수리부터 보였다. 대만은 따라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 이제 빨개진 코와 눈이 들어왔다. 늘 단정하던 눈끝이 축축하니 젖어있다. 울어? 왜? 내가 그렇게 싫은가? 별안간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드는데 준호가 제 안경을 밀어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권준호, 너 왜 울어?

대만이 묻자 준호는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로 내가 싫어서 이렇게 우는 거야?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대만은 이제 어떤 말도 없이 울기만 하는 준호가 안타깝기 시작했다. 고백하는 자신이 싫어서 이렇게 우는 거라 생각하니 상처이긴 한데, 그래도 일단은 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준호를 끌어안아서 토닥여도 되나, 아니 그럼 더 싫다고 우는 거 아닐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허둥지둥 손만 움찔대다 결국 냅다 다시 준호를 품에 안았다. 한 손은 그의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준호의 어깨를 붙들었다. 손바닥을 넓게 펼쳐서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행히 준호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싫은 건 또 아닌가 보다 싶어서 대만은 조금 안도하면서 미안하단 말을 연신 속삭였다.

-네가 뭐가 미안해.

한참 만에 울음이 잦아든 준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에 네가 우니까…

대만이 우물쭈물 답하니 준호는 대만의 품을 살짝 밀어냈다. 매정하게 밀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간격을 조금 둔 것에 불과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대만은 순순히 물러나며 준호를 살폈다. 준호의 손이 젖은 얼굴을 닦아내고 안경을 바로 썼다. 그렇게 한참 만에 대만은 준호의 두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준호도 오랜 시간 끝에 대만에게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오해가 있어, 대만아.

준호는 다시 킁 하고 코를 삼키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운 건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런 거였어, 너 때문이 아니라.

-네가 왜 바보인데.

-그야…

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사람처럼 준호는 또 크게 숨을 들이쉬곤 입술을 꾸욱 물었다. 앙다문 탓에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그 순간 대만은 어쩐지 저 입이 그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해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절 거절하지 않는 그런 말 같은. 연신 자신이 싫어서 이렇게 우는 건가 하고 생각한 게 언제냔 듯이 그런 막연한 직감이 들었다.

-나도 널 좋아했는데 네가, 너도 나를 좋아했다고 하니까… 그게 바보 같아서 그랬어.

그리고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곧 확인받을 수 있었다.

 

3.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고 했는데.

대만과 준호는 쇼파에 나란히 앉아 한참 운 탓에 발갛게 된 눈에 얼음을 얹어놓고 있었다. 대만은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준호를 바라보았는데, 때마다 저를 좋아했다 말하는 준호의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 사실 대만은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니 참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덕분에 웃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준호만이 괜한 민망함을 느꼈다.

-내가 뭐 얼마나 웃었다고.

-한 열 번은 웃은 거 같아, 대만아.

-열 번까지는-

대만은 반박을 하려고 했으나 그제야 제가 꽤 많이 웃음을 흘린 걸 깨닫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럼 웃어야지 울어야 하냐. 그런 투덜거림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내진 않고 입만 한 번 삐죽였다. 그러자 이젠 준호가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도 웃네.

-그러게. 이거 웃는 게 당연한 거였네. 내일 엉덩이에 뿔나겠다, 나.

아프진 않겠지? 하고 끝까지 덧붙이는 준호에 대만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마지못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면 뭔 얼간이들인가 싶을 것 같지만 알게 뭐람. 어차피 이 집엔 저와 준호뿐이었으며, 남들이 그런다 한들 제겐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근데 그건 무슨 말이야?

그렇게 한참 서로만 보며 웃다가, 준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응? 대만이 뜻을 모르겠단 얼굴을 하자 준호가 부연했다.

-나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한 거 말이야. 누가 나 결혼한다고 했어?

아, 그거. 대만은 준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질렀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며칠 전 준호를 봤던 것도. 생각해보니 그걸 보고 바로 선을 본다고 생각한 게 이상한 일이었다. 연인처럼 앉아있던 것도 아니고 카페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웃으며 얘길 나눈 것이었는데.

-이게 다 이명헌이 이상한 소릴 해서….

-응?

저도 모르게 생각이 흘러나갔는지 준호가 고개를 가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어느새 눈에 대고 있던 얼음주머니는 내려놓은 채였다. 아직 불긋한 눈이 순하게 깜박이는 걸 보다가 뒤늦게 쏟아지는 민망함에 대만은 시선을 조금 피했다.

-네가 그… 선을 보고 다니는 것 같단 소릴 들어서 그랬…어.

-선? 맞선? 어디서?

-그 A호텔에서… 아니, 뭐 나도 며칠 전에 네가 거기에서 어떤 여자랑 얘기하는 거 보기도 했고.

-A호텔? 며칠 전?

준호는 눈을 굴리며 생각을 해보더니 곧 짝하고 손뼉을 마주쳤다. 그날이구나.

-아니, 그게 맞선처럼 보였다니… 그거 일 때문이었어.

-무슨 일을 주말에까지 하는데.

-엄밀히는 내 개인적인 용무인데… 이렇게 말하니까 좀 맞선 같이 들리네?

-…같이 들리네? 말이 좀 수상하다, 권준호.

대만의 눈이 가늘어지자 준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아, 다 정리되면 말하려고 한 거였는데.

-뭘 정리하는데?

-나 인사이동 되었거든. 자회사로 가는 건데 서류적인 부분은 이직이랑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그쪽 인사팀하고 얘기할 게 좀 있었어.

-인사이동?

대만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바로 프로리그 선수로 뛴 터라 일반 회사원들의 생활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사실 주변인들 대부분이 대만과 비슷한 상황이라 그가 잘 아는 회사원은 준호가 유일할 정도였다. 그래서 인사이동이며, 자회사 간 이동 같은 말이 쉬이 와닿지 않았다. 다만 막연히 그게 전부가 아닐 거란 느낌이 드는 것은 준호의 말이 꼭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단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호는 퀴즈를 낸다는 듯이 검지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어디로 옮기는 거냐인데, 어딜 거 같아?

대만은 고개를 가로 젓곤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그걸 알겠냐, 농구만 하고 사는데. 준호는 빙그레 웃었다.

-농구만 하고 살기 때문에 더더욱 알 수밖에 없는 곳이야. 어딘지 알겠어?

준호의 힌트에 대만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준호네 회사 이름, 그리고 농구. 간단한 도식 속에서 바로 답이 떠올랐다.

-워리어스?

-정답!

짝짝짝. 준호는 작게 박수를 치며 방긋 웃었다. 신이 난 얼굴을 보는 건 좋은데 일적인 부분은 잘 모르는 대만은 어리둥절한 게 컸다. 농구를 다시 하는 건 아닐 테고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단 걸까.

-아니, 뭐 어떻게 된 거야? 사무국 같은 곳으로 가는 거야?

-맞아. 워리어스 사무국에서 일할 거야, 앞으론. 사실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농구랑 더 밀접해진 셈이지. 잘됐지?

-내가 평가할 게 뭐 있어, 네가 좋음 된 거지. 아니, 너 이러는 거 보니까 잘된 거네.

프로농구 구단 하나를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회사 하나를 운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많은 매출이 발생해서도 그렇지만 돈이 그만큼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구단 대부분이 대기업이나 재정이 탄탄한 편인 보험금융사를 모회사로 두고 있는데, 워리어스를 운영하는 준호네 회사도 대기업 중 하나였다. 대만의 팀인 타이탄즈도 같은 사정으로 모기업이 국내 대기업 중 한 곳이었다.

두 구단 모두 모기업의 규모가 엇비슷해 구단 운영 규모 역시 차이가 크게 없었는데, 심지어 구단의 성적도 비슷했다. 차이라곤 연고지가 다르단 것뿐. 두 곳 다 97년, 대만과 준호가 대학에 진학한 해에 프로리그 창설과 함께 구단을 창립하였단 것마저 같았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두 구단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수들 개개인의 얘기가 아니라, 팀 대 팀으로서 서로를 의식하는 게 아주 컸다. 가령 팀 컨디션 난조라든지 대진운이 안 좋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주의 경기를 한 번도 못 이길 때가 가끔 있는데, 그때 한쪽 구단은 반대로 연승을 올리면 팀 분위기가 좀 더 뒤숭숭해지곤 했다. 대만이 드래프트 되고 뛰었던 첫 시즌에 있었던 일이기도 한데, 그때는 심지어 5연패에 연패 기록의 첫 스타트가 워리어스였어서 팀이나 팬들이나 분위기가 흡사 초상을 치르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니까 누구 하나 죽이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해서 초상을 치를 것만 같았다.

-근데 워리어스면 우리 팀이랑 가장 앙숙인데… 너 나랑 적이 되는 셈인데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거냐?

그때 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대만은 살짝 몸서리를 치다 문득 짖궂은 마음이 들어 농담 섞인 말을 꺼냈다.

-그전에도 같은 모기업 회사 다녔으니까 엄밀히는 원래부터 적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모기업만 같은 거지 워리어스 소속을 달진 않았잖아. 내가 우리 팀 소속이지 본사 전자 직원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니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같기도 하네가 아니라 내 말이 맞지. 아니, 너 나랑 그렇게 적이 되고 싶었던 거냐.

-아냐, 그럴 리가. 내가 너랑 왜 적이 되고 싶어해. …굳이 따지자면 똑같은 농구 카테고리에 묶여있고 싶었던 거지. 나만 대만이 널 좋아하는 줄 알았으니까.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는데 곧 준호의 귀가 빨개지는 게 대만의 눈에 띄었다. 눈물의 고백을 쏟아내고, 또 웃으며 장난을 치다가 이런저런 얘길 나눴으면서 다시 또 좋아하고 있었단 말을 하면서 부끄러워 하는 게 대만은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 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대만은 마음 같아선 준호의 붉어진 볼을 한입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귀도 발갛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큼, 하고 목만 가다듬었다.

-겨우 통했다 했더니 사실은 적이었습니다라니. 이거 뭐 로미오와 줄리엣 그런 거냐?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거 같기도 하네. 갑자기 로미오가 되었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정대만 선수?

준호는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쥐고 마이크처럼 대만의 입가에 가까이했다. 그 손과 절 바라보는 준호의 두 눈을 바라보다 대만은 두 손으로 준호의 손을 감싸 잡았다. 준호의 손은 대만의 손보다 약간 작았고, 두 손으로 잡은 덕에 대만의 손에 온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조금 손가락을 움직여 준호의 손을 펼쳤고 손끝과 손등이 드러나게끔 한 뒤 제 입술을 그 위로 내렸다. 짧게 한 번 붙었다 떨어지고, 그리고 다시 또 입술을 붙였을 때는 조금 더 시간을 두었다.

-그런 기분은 사실 잘 모르겠고…

놀라 움츠러드는 준호의 손을 대만은 좀 더 힘을 실어 잡았다. 그리고 눈은 이제 준호의 눈을 찾아 맞추었다. 대만도 준호도 시선이 마주하고 나서부턴 피하지 않았다. 숨만이 조금 들떴을 뿐이었다.

-그냥 너무 좋다, 준호야.

말을 마저 이은 대만은 한 손을 뻗어 준호의 얼굴을 감쌌다. 부드러운 볼이 손바닥에 감기는 동안 대만의 고개는 준호에게로 향했다. 코끝이 엇갈리듯 맞닿아 들어가면서 서로의 숨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숨이 맞닿으면서 서로의 두 눈도 감겼다.

 

4.

이른 아침부터 대만은 구단 사무국에 앉아있었다. 지난밤 경기가 끝나고 코칭스태프가 알려준 그 기사 때문이었다. 당연히 허위사실이라고 어제 바로 발표를 했지만 구단의 사정은 또 다른 법이었다. 일단 상황에 대해 들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머리론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기분이지. 어제까진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실 대만은 기분이 매우 저조했다. 확 그 기자 찾아가서 뒤집어 엎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선은 그런 식으로 확인도 없이 기사를 내보낸 것이 불쾌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쓰기 위해 저와 준호의 만남을 졸졸 염탐하고 있었단 게 대만의 속에 천불을 당기게 했다. 어떻게든 조져 놔야 속이 풀릴 거 같은데, 당연히 대만은 지금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니 그런 패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신인상을 타고 팀의 첫 플레이오프 진출 주역이 되어도 대만은 아직 일개 어린 선수일 뿐 달리 뭐가 없었다. 하물며 구단마저 절절매는 기자들을 상대로라면 더욱.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라고요?”

단장은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물어왔다. 성격 참 알만하네 싶었지만 대만도 길게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던 터라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북산에서 같이 농구 한 친굽니다. 그 친구 진로는 공부 쪽이어서 다른 길로 갔지만 대학 때에도 계속 연락하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절친한 친구인데 숙적 팀의 프런트 스태프가 되었어요?”

“걘 그냥 회사원이에요. 자회사 이동으로 프런트로 간 거지.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워리어스에 있는 제 대학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은 뭐가 됩니까?”

“선수들이야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렇고, 일반 회사원이었으면 다른 선택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정대만 선수가 친구를 잘못 사귀었단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죠.”

그러고 보면 워리어스의 윤대협이랑은 엄청 친밀하지도 않잖아요? 대학 바로 밑 후배인데도. 우스갯소리라며 덧붙이는 말이지만 꼭 뼈가 담긴 것 같아서 슬슬 대만의 미간이 좁혀들고 있었다. 이런 소리나 들을 거라면 때려치우고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뭐라 말한다 해도 들을 거 같지 않은데. 막말로 권준호와 사귀는 사이라 질러버려도 비슷한 대답만 들을 것 같았다.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실 거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저는 그 이상으로 말할 게 없어서요.”

“아, 기분 좀 상하셨나보네. 이해해요. 근데 아직 올 사람이 있어서요. 좀만 있다 가는 게 어때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대만은 단장의 말에 멈칫하고 단장을 바라보았다. 누가 더 온다고요? 하고 물음을 꺼내려던 찰나,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린다. 아, 왔나 보네. 이래라저래라 사람 부리는 게 일인 사람이면서 단장은 용케도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대만은 미간을 좁힌 채 단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준호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작 준호는 그런 대만과 눈을 마주치기보다 단장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게 우선이었지만. 워리어스 사무국 권준호 주임입니다, 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단장의 손을 맞잡고 나서야 준호는 대만과 눈빛을 마주했다. 쓰게 웃는 얼굴이 일단은 뒤에 얘기하잔 뜻을 담고 있었다.

준호는 대만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대만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단장이 앉으시죠, 하고서야 뒤늦게 따라 앉았다. 아무리 나중에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대만은 당장 준호에게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정대만 선수 얘기를 못 믿는 건 아니고, 이런 일에 모두 대면을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불편한 건 아니시죠?”

“아,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저희 구단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라… 아무쪼록 어제 바로 입장 내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사진에 나온 게 아니었어서 저희 확인절차가 좀 더뎠거든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준호는 숫제 공손하게 말했다. 반면 단장은 등을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붙인 채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데, 웃는 얼굴이긴 했어도 충분히 고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대만은 그 차이가 거슬렸으나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어 미간만 찌푸린 채로 잠자코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정대만 선수랑 고등학교 동창이시라고요.”

“아, 예. 같이 농구부에 있었습니다. 저는 식스맨이긴 했지만요.”

“안 그래도 정대만 선수가 그러더라고요, 이쪽이 진로가 아니었다고. 그래도 농구는 계속 좋아했던 거죠?”

“그렇죠, 아무래도. 대만이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지금 선수로 활동 중이니까요. 그 친구들 뛰는 거 보는 걸로 제 나름의 농구 인생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 혹시 그쪽 팀에서 북산 농구부의 재현 같은 걸 꿈꾸고 있었거나 한 건 아니죠?”

“예?”

“쉽게 말해서 우리 선수한테 친분을 활용해서 이적을 종용했다거나 그럴 계획이 있는 건 아니냐는 거죠.”

“아니, 그런 거 없었다고 말했잖습니까.”

준호가 답할 새도 없이 대만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짜증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위협적이었으나 단장은 눈썹만 잠깐 들썩일 뿐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만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걸 대체 몇 번을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없었습니다.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만 할 거 같으니 저나 얘나 여기 더 있을 이유 없을 거 같네요.”

“그거야 정대만 선수 입장이고, 나는 권 주임님 말을 듣고 싶은 건데요.”

“무슨 취조라도 하십니까?”

대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거에 놀랐는지 준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대만의 눈에 띄었다.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어서 대만은 인상을 팍 쓰는데 연신 앞만 보고 있던 준호의 고개가 그제야 대만에게 향했다. 준호는 다시 또 예의 그 쓰게 웃는 얼굴을 했다. 이번엔 아마도 그러지 말란 의미겠거니 싶어서 대만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훅 쉬었다.

“대만이 말대로 그런 얘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습니다, 단장님.”

준호가 단장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 명함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회계팀 소속이라서요. 선수 영입과 관련한 업무는 제가 보는 게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프런트에 들어간 지 3개월이라서 그런 권한도 저한테는 없고요. 사실상 제가 신입이거든요.”

그러면서 준호는 품 안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넸다. 공손한 자세로 건네는 준호와 달리 단장은 한 손으로 받아내는데, 그게 또 대만은 거슬려 괜히 제 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 소리에 준호가 도로 대만에게 고개를 돌리는데, 마주한 눈이 좀 참아봐, 하는 것 같아서 대만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회계팀…이라 적혀있긴 하네요. 내가 의심병이 좀 있어서 그런데, 이거 위장은 아니죠? 사실은 인재영입팀 쪽으로 발탁되었는데 위장용으로 만들어뒀다든지 하는?”

“하하, 설마요.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구단은 어디에도 없을 거 같은데요.”

“뭐, 그야 그렇죠. 그냥 농담 삼아 말해봤습니다.”

단장은 명함을 다시 살펴보곤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대충 넣었다. 그리곤 시계를 한 번 보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결에 준호도 같이 따라 일어나는데 그 틈을 타 대만은 바짝 준호의 곁에 붙어섰다.

“권 주임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둘 사이에 모종의 계약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라고 믿게 되네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그는 문 쪽으로 손짓하며 대만과 준호를 앞세우려 했다. 그걸 제지한 건 대만이었다. 대만은 엉겁결에 움직이려던 준호의 손목을 붙들고 멈춰 세웠다.

“그냥 여기서 파하시죠. 아직 점심 때도 아니고, 뭐 입에 넣을 기분도 아닌데.”

단장은 대만의 말에 눈썹을 긁적이더니 곧 어깨를 으쓱이며 수긍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아닌 게 커 보이는데, 편하실 대로 하세요. 내가 격조했으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만은 대충 고개를 꾸벅이곤 성큼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당연히 준호의 손목은 계속 붙잡은 채였다.

그렇다고 해서 대만이 준호를 끌고 가는 모양새가 된 건 아니었다. 대만은 제 걸음 속도를 준호의 속도에 맞췄고, 준호 역시 제 손목을 붙잡은 대만의 팔에 다른 쪽 손을 얹음으로써 대만에게 동조했다. 어쩐지 팔짱 비스무리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대만과 준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계단 층계참에 도착하고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리곤 곧장 서로 마주 안았다. 대만이 준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준호의 어깨에 묻었다. 숨이 크게 들이 쉬어지고서야 대만은 아까 전부터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너 여기 오면 온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놀랐어? 아침에 갑자기 연락받아서 알려줄 새도 없었네. 미안해.”

“네가 미안하다고 할 건 아니고.”

대만은 준호의 품에 좀 더 고개를 묻으면서 웅얼대듯 말했다. 그런 대만의 등을 감싸 안은 준호의 손이 가볍고 느리게 그를 다독였다.

어제 소식을 접하고 대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준호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회계팀인 준호는 기실 프런트 스태프하면 생각하는 위치보단 일개 회사원의 입지에 가까웠다. 때문에 경기 일정과 관계없이 출퇴근이 일정한 편이었고, 평일 경기 후 정리까지 끝났을 시점엔 대개 집에 있었다. 그냥 집에만 있을 게 아니라, 잘 준비를 끝낸 상태일 때도 많았다. 대만은 그걸 연애 2개월이 넘어가야 알았는데, 정규리그가 시작되고 한 달을 꼬박 대만에게 억지로 패턴을 맞췄던 탓이었다. 평일 경기 후 대만이 숙소에 돌아오면 근 열 한 시가 넘는데 준호는 대만이 그 시간에 맞춰 거는 전화를 받아주다가 수면부족으로 데이트 중간에 기절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토로했다. 말이 데이트지 실은 침대 위의 사정에 가까웠다. 대만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베개에 잠시 머리를 묻었던 준호가 그 채로 반나절을 꼬박 잠에서 깨지 않았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대만은 그 이후로 평일 경기 후에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제 그렇게 전화를 건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고, 나름 초조한 상황이기도 했다. 다행히 준호는 깨어있었고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했냐며 즐거워하는 목소리에 안도를 느끼면서도 지금 닥친 상황에 대해 전해야 한단 무거움을 느꼈다.

설명을 들은 준호는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우리 회사는 아마 무슨 일인지 모를 거야. 내가 그쪽 업무를 안 하니까 만난 게 나인 줄도 모를 테고. 회사에 연락해서 입장 빨리 나올 수 있게 말할게. 빠르게 파악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간략히 말한 준호는 피곤할 테니 얼른 자라며 다독이며 전화를 끊었고 그 뒤로 따로 준호와 연락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무실에서 난데없이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 김에 얼굴도 보네. 밤은 되어야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하하, 그러게. 근데 아마 오늘 저녁에 보진 못할 거 같아.”

“왜?”

대만은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번 주는 평일 경기만 두 번이었고, 어제가 그 두 번째였다.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니 만나기엔 가장 제격인 날이었다. 경기 스케쥴이 나오면 어림잡아 만날 날을 맞춰왔고 오늘의 예정도 이미 보름 전에 말해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된다니.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회식이 잡히거나 했을 린 없을 테고. 대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니네 회사에서 뭐라고 했어?”

“아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수습은 해야 하니까.”

“뭔 수습을 해. 우리가 뭘 잘못이라도 했어? 웬 미친놈이 들러붙어서 확인도 안 하고 기사 쓴게 문제 아니냐고.”

“그야 그렇지만 불 난 집에 불은 꺼야 하잖아.”

준호는 이제 대만의 등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곤 고개를 빼꼼 빼어 대만의 뒤쪽과 제 뒤쪽을 두루 살피더니 대만의 등에 두었던 손을 올려 대만의 얼굴을 감쌌다. 금세 입술이 마주 닿았다 떨어진다.

“뭐냐, 이거.”

“하도 인상을 쓰고 있어서, 좀 풀라고.”

“고작 한 번으로?”

“한 번이면 되는 거 아냐? 대만이 너 얼굴 이미 다 풀렸는데.”

준호가 검지로 꾹 대만의 볼을 찔렀다. 사실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대만도 느끼고 있었다. 준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긴장했던 근육이 다 풀리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한 번으로 끝내기엔 아쉽기 마련이라, 대만은 억지로 입꼬리를 내리고 다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번으로 안 될 거 같은데.”

“억지로 무게잡지 말자? 미간에 주름 생겨.”

“뭐, 생기면 뭐. 안 생기게 하고 싶으면 빨리 다시 해.”

순 억지를 부리듯 대만이 고개를 들이미니 준호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는 얼굴에 따라 대만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지만 또 준호가 내뺄라 황급히 끌어내렸다. 결국 준호가 대만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다시 주변을 확인하고 입술을 맞대는 준호에 대만은 냉큼 그의 허리를 바투 잡고 맞닿은 입술 새 사이로 좀 더 깊은 호흡을 불어넣었다.

 

5.

그 해프닝의 수습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대만의 FA가 코앞이었던 게 많은 부분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같이 연루된 구단은 숙적 라이벌이었다. 이성적으론 수습이 되었다 해도 그 이외의 부분은 어떻게 해도 덮을 수 없었다.

대만의 팀에선 대만의 행적을 아닌 척 예의주시했고, 기자들은 대놓고 대만을 주시했다. 준호네 구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준호를 회계팀에 놔두느냐 이렇게 된 거 전략팀으로 옮기느냐로 갑론을박했고, 나아가 정대만을 진짜로 데려오는 것은 어떻겠냐를 두고도 말이 연신 나왔다. 그게 그 회사 내에서만 돌았으면 다행인데 하필이면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정확히는 부러 새어 나오게 한 것이다. 대만의 퍼포먼스는 신인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또 하필 동시기 FA 중 가장 흥행이 보증되어있던 건이니 뭐든 흘려서 판도 흔들고 대만의 의중도 떠보는 것이었다. 그 탓에 대만은 준호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제 구단과의 일을 떠나서, 준호가 자기네 회사 일로 대만이 난처한 상황에 있는 걸 보기 어려워했다. 그런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나랑 만나는 거 또 흘러 들어가면 네가 난처해, 대만아.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준호의 목소리에 대만은 숫제 괜찮다고 말했지만 준호의 성정으론 괜찮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만은 준호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채 매일 전화통만 붙잡고 애를 태워야 했다.

8년을 짝사랑했고, 겨우 마음이 통했다 싶었는데 이게 뭐람. 연애 초 3개월의 달콤함이 이제는 꿈 같을 지경이 되었다 싶을 즈음 결국 대만이 결단을 내렸다. 마침 정규리그가 끝나갈 즈음이어서 FA에 대해 좀 더 확정적인 얘길 해도 나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실 대만은 원래도 구단을 옮길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팀원이나 코칭 스태프와 전반적인 상성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뭣보다 굳이 옮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컸다. 돈 많이 벌고 이것저것 보장받으면 좋기야 하다. 하지만 대만에게 중요한 것은 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뚜렷하고, 계속 농구를 할 수 있느냐였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팀은 여전히 최적의 선택지였기에 굳이 다른 구단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대만은 조금 이르게 계약에 대한 의사를 소속 구단에 전달했고, 구단은 그의 재계약 의사에 두 손을 들고 반겼다. 어찌나 반겼는지 대충 조율이 끝나자마자 기사가 나갔을 정도였다.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이야 챔피언 결정전 이후가 될 것이라 아직 몇 달 남았다지만, 어쨌든 그 조율 덕분에 대만은 다시 준호의 옆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일이 생겼던 것은 겨울 초입, 일단락된 지금은 어느덧 봄이었다.

“내 안경… 왜 없지?”

막 잠에서 깬 준호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협탁을 더듬대며 웅얼댔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대만은 크게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걸 꾹 누르며 준호의 손을 붙잡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눈이나 제대로 뜨고 찾아.”

“안경을 써야 눈을 제대로 뜨지…”

곧잘 대답은 하지만 여전히 잠에 젖은 목소리는 끝이 축축 늘어졌다. 그마저도 참 웃기다 싶어서 대만은 결국 웃음을 슬슬 흘리며 까치집을 진 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지난밤은 뜨거웠으면 했지만 사실 온통 잠투성이었다. 일단 대만이 경기를 마치자마자 준호의 집으로 향한 것이어서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태였다. 준호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쪽은 앞으로 있을 FA 시즌에 맞춰서 재정 상태를 검토하느라 볶이는 중이었다. 모기업에선 조금만 주겠다고 하고, 전략팀에서는 더 달라고 난리이니 숫자 계산을 전담하는 쪽은 가운데에서 들볶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감사시즌도 겹쳐 회계팀의 업무가 과중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 연속으로 야근을 했다는 준호는 어째 경기를 뛰고 온 대만보다도 상태가 나빠 보였고, 대만은 그런 준호를 붙잡고 뭘 하기보단 잠이나 자는 걸 선택했다. 준호는 원래 대만보다 잠이 많은 편인데, 예상보다 어제 잠든 시간이 더 일렀던 터라 대만은 아침에 일어나서 꽤 오랜 시간 잠든 준호를 구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김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안경을 빼돌리기도 했고.

대만의 손길을 잠자코 받던 준호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마른세수를 하곤 눈을 들었다. 가까이에 있으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라더니 제법 대만의 눈과 시선을 잘 맞췄다.

“안경 줘라, 대만아.”

“왜 나한테 그걸 찾아.”

“너 아니면 누가 있어, 안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얼른 줘. 그거 없으면 진짜 안 보여.”

잠깐 사이에 잠이 다 깬 것인지 준호는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좀 더 놀리고 싶었던 대만은 결국 투덜투덜 뭐라 구시렁대며 제 쪽 협탁으로 옮겨놨던 안경을 준호의 손에 쥐어주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아주 냉정하기 짝이 없어요, 권준호.”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안경이 있어야지. 없으면 네 얼굴 잘 안 보인대도.”

“그래, 이제 보이니까 어때?”

음. 준호는 대만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요리조리 뜯어보는 시늉을 하더니 톡톡 대만의 볼을 두드렸다.

“잘생겼네, 우리 대만이.”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는 준호에 대만은 참을 수 없단 듯 콕콕 입술을 내렸다. 이마, 콧잔등, 볼, 턱 어디 할 곳 없이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다가 입술에도 길게 제 입술을 맞대었다. 떨어지고 나선 눈을 올곧이 마주치며 서로 웃었다. 흐흐, 하는 바보 같은 소리가 저절로 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고, 그러다가도 다시 입술을 맞대었다.

FA 건을 얼추 마무리 짓는 동안 대만은 한 가지 일을 더 처리했다. 그것도 굳이 부모님께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면서까지. 바로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대학 때에는 대학 기숙사를, 프로 입단 후에는 구단 숙소를 줄곧 썼던 대만인지라 부동산을 알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도움이 필요했다. 사실 가급적이면 부모님한테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갑자기 집을 알아본다는 것에서 이유를 캐물을 것이 분명해서. 그런데 믿을 수 있으면서 그런 쪽으로 잘 조언해줄 사람으론 부모님과 준호 외엔 없었다. 그렇다고 준호에게 물어볼 순 없었다. 준호와 같이 살기 위해서, 혹은 준호와 같이 있을 공간이 필요해서 구하는 것인데 그걸 준호한테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는 수없이 대만은 부모님의 손을 빌렸고, 예상대로 이유를 말하라는 어머니의 닦달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부모님은 괜찮은 매물을 구해다 주었고 대만을 대신해 계약까지 해주었다. 나중에 소개만 해줘, 알겠지? 연신 대답을 회피한 대만에게 계약서를 가져다주면서 어머니는 그 말만 했다. 이미 무슨 생각으로 산 건지 다 아니까 때가 되면 보여달라, 그런 뜻이었다. 실은 고등학교 때 이미 본 적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만은 그냥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든 준호와의 관계가 좀 더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된다면 대만은 부모님에게 모두 말할 심산이었으니까. 다만 일단은 같이 사는 것에 대한 준호의 동의를 얻는 게 우선이었다.

준호에게 입을 맞추면서 대만은 그의 몸을 자신의 품 아래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딸려오는 몸이 안정감 있게 대만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일단은 재회를 조금 만끽하고 차근차근 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지, 하고 대만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생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집 계약이 곧 끝날 거라 새로 구해야 하는데 혹시 같이 살지 않을래? 라고 물으면 되지 않을까. 지난 몇 주 동안 준비해 온 질문을, 이 순간을 맘껏 누린 뒤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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