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주영] Miss Understander
첫업로드: 2023.05.10. 포스타입
식어가는 서늘한 바람이 하얀 커튼 사이로 나부꼈다. 손목 위에서 째깍이는 시곗바늘은 어느새 6시를 한참이나 넘긴 상태였다.
어쩐지 슬슬 배가 고프더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지. 풀이의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에 형광펜을 칠하던 찰나 교실 문을 넘어오는 익숙한 발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내 제 옆에 털썩 주저앉는 대만이 보였다. 어우, 죽겠다, 하는 앓는 소리도 빼먹지 않고서.
"오늘은 일찍 왔네? 내가 먼저 끝나면 응원 가려고 했는데."
"늦게 끝나는 날이 있으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태섭이 녀석, 곧 사람 하나 잡을 지도 모르겠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가 커다란 몸을 기울여 왔다. 어깨 위로 단단한 팔이 올라오고 익숙한 향기가 코 끝에 맴돌았다. 대만의 어머니와 함께 시내에 나갔을 때 제가 골랐던 향이었다. 그게 봄이었으니 그때 산 것은 이미 다 썼을 텐데. 같은 향을 또 산 건가?
"얼마나 남았어?"
"이것만 하고 갈 거야."
"금방 끝나겠네."
으응, 여전히 시선을 책 위로 내리며 대강 대답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이었더라? 사전을 뒤적여 단어의 뜻을 옮겨 적고 한참이나 답을 고민했지만, 곧 끝난다는 기대감으로 들뜬 탓인지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얀 건 종이고 새카만 건 글씨긴 한데.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주영의 눈에 교문 밖으로 멀어지는 학생들이 들어왔다.
비어가는 거리 위로 귤색의 햇살이 고요하게 물들고 차분한 저녁 공기가 슬며시 내려앉는 시간. 조금 전까지 푸른 빛을 뽐내던 나무들마저도 따스하게 젖어 든 세상. 그림처럼 빨려 들어갈 듯한 풍경 틈새로 먹먹하게 차오르는 적막.
다행히도 오늘은 그 사이에 들릴 듯 말듯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졌다.
피곤해서 그새 잠들었나? 자칫 그의 평화가 깨질까 주영은 가만히 멈춘 채 숨죽여 속삭였다.
"자?"
"아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른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거대한 정적 속 익숙한 그의 품 안에 스르르 고개를 기대었다. 왜? 제 존재를 각인시키듯 다시 한번 들려오는 대만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하도 얌전해서 자는 줄 알았어."
"너랑 같이 문제 풀고 있었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주영의 고개가 휙, 대만을 향했다. 생각보다 많이 가까운 나머지 그의 뺨에 입술이 닿을까 주영은 조금 몸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도 동그란 눈길에 묻은 약간의 불신이 느껴졌는지 그가 투덜거렸다.
"내가 1학년 문제도 못 풀까 봐? 4번이잖아."
"왜?!"
"여기 문장 잘못 끊었어."
단어 사이를 짚어내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끝에 주영은 탄성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풀었지? 대만이 가르쳐준 대로 다시금 선을 긋자 너무나도 쉽게 정답이 나왔다.
가뿐한 마음으로 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는 동안 역시 앉아있던 자리를 정리한 대만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요즘은 귀찮게 하는 애들 없어?"
"음, 누가 저녁마다 집에 데려다주는 덕분에 잠잠해."
"크흠, 잘됐네."
주영이 구겨진 교복을 단정히 하며 대답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뿌듯하게 웃은 그가 주영이 앉아있던 자리의 의자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먼저 천천히 교실을 나서는 발 끝에 따라오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었다.
"중식이가 네 얘기 자주 하던데. 친해?"
"중식이?"
자그마한 키에 곱고 선한 눈빛의 같은 반 남자아이가 눈에 그려졌다. 대만이 농구부에 복귀한 뒤 저와 같은 1반이란 이유로 사이에서 한동안 고생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몇 번 간식을 보답하기도 했고, 자신과 대만이 화해한 이후에는 그와 같은 농구부라서 곧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도 딱히 묻지 않은 대만의 소식을 몇 번 먼저 전해주었던 것 같다.
"친하지~ 근데 무슨 얘기?"
"그냥 뭐…. 이것저것 사소한 거? 쪽지 시험 1등 했다거나."
대만이 두 개의 가방을 주영의 반대쪽으로 몰아 들며 얼버무렸다. 중식과 그리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렇게 생각하던 주영은 불현듯 간식거리를 잔뜩 든 대만이 저를 찾아온 날이 기억났다. 도시락을 깜빡해서 매점의 주먹밥과 초코우유로 점심을 때운 날. 농구부 연습이 시작되기 직전 부리나케 달려왔었는데. 아마 그날도 중식이가 말했나 보다. 주영은 짐짓 새침하게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오빠가 먼저 알려달라고 닦달한 거 아니고?"
"그건 아니…! 아닐 걸?!"
최근엔 그런 적이 없다며 억울해 하는 대만의 모습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알았어 알았어, 부드럽게 그를 달랜 주영은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생각나는 대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도 가볍게 흥얼거리며, 정연하게 깔린 보도블록 중에서도 같은 색만을 골라 사뿐사뿐 발을 옮기다 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봄에 몇 번 물어보긴 했지."
"어쩐지."
무심코 중얼거린 대꾸에 뒤따라오던 대만이 속도를 높여 다가왔다. 뭐라 뭐라 보채는 것 같았지만 구름 사이로 번지는 노을을 올려다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잘 들리지 않았다. 꼭 불꽃 같은 색이 참 따뜻하구나. 그런데 오빠가 뭐라고 했더라. 그게 무슨 뜻이냐고? 으음, 그러니까아.
늘어지는 말꼬리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어느새 대만은 크고 다부진 손으로 깍지까지 끼고서 제 손을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오빠가 내 얘기도 많이 물어보고 자꾸 불러달라고 하니까. 고백하려는 목적이거나 이미 사귀는 중이거나. 아무튼 좋아하는 줄 알았대."
"그래서?"
"응?"
맞잡은 손이 재차 살랑거렸다. 뭐라고 했는데. 앞을 보고 있음에도 왠지 뺨에 닿는 대만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화답하듯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슬몃 웃음을 띠면서도 제법 진지한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답을 보채는 듯 진한 눈썹 한쪽이 위로 까닥였다.
"중식이는 친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얘기했어. 어렸을 때부터 알던 오빠 친구라고."
"……준영이 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등장한 이름에 심장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하면 더 걱정돼서 조금만 덜 생각하고 싶었는데. 꾹 눌러두었던 불안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질까 주영은 가만히 대만의 손을 놓고 과장되게 기지개를 켰다.
"조금? 아무튼 오빠가 그렇게 다정한 줄 몰랐대."
"짜식, 내가 얼마나 친절하게 챙겨줬는데! 거의 너 다음으로 많이 챙겼을 걸."
"이것저것 캐묻고 심부름 시킨 게 미안해서 보상한 건 아니고?"
"……."
풀이 죽은 자신이 신경 쓰였던 걸까? 다시금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흘러가는 대화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약속이나 한 듯 가벼운 핀잔에 구겨지는 대만을 보니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어쨌든, 오빠는 날 너무 신경 써서 탈이야! 그러니까 남들은 정말 좋아하는 줄 알잖아."
주영은 명랑하게 덧붙였지만 어쩐지 뒤가 조용하기만 했다. 못 들었나?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는 대만이 말없이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변덕을 부려서 짜증 난 건가? 조금 무서워지는 마음을 안고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간 주영이 대만의 팔을 조심스레 제 팔에 끼웠다.
"너무 놀려서 화났어?"
"……그렇지. 그러니까……."
"응?"
"아, 아니. 화가 났다는 뜻이 아니고."
스르륵 흘러내리는 가방들을 고쳐 맨 대만이 주영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왠지 조금 토라진 것 같은데, 잘못 본 걸까?
"내가 널 신경 쓰니까 정말 좋아하는 줄 안다며. 그거 말이야."
"아아."
또 내게 질린 것은 아니구나. 그 말에 마음이 놓인 주영이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태양보다 밝아진 가로등 아래로 말없이 발을 맞추다 문득, 주영의 머릿속에는 어떤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중식이는 왜 아직도 내 얘기나 오빠 얘기 전해주는 거지?"
"어어?"
"좋아하거나 사귀는 사이가 아닌 걸 알면, 굳이 전해줄 필요 없지 않나?"
이상해. 손 끝으로 가볍게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며 대만이 구시렁거렸지만 목소리에는 영 힘이 없었다. 물안개처럼 몽롱하게 피어오르던 잡념을 서둘러 걷어낸 주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하… 피곤해서?"
불현듯 오늘도 고된 훈련을 수행했을 그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문제를 빨리 풀었으면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다 놓고 나눠 먹을 걸 그랬나? 생각해보면 그의 집을 지나쳐 저를 바래다주고 되돌아가기를 거의 매일같이 반복한 대만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거꾸로 그를 데려다주어야지.
난데없는 책임감을 느낀 주영은 옆구리에 끼워진 대만의 팔을 의욕적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을 소소한 이야기들로 채우기를 몇 분. 금세 어두워진 하늘 끝에 여린 초승달이 별과 함께 빛났다. 평소라면 대만과 함께 달을 향해 조금 더 걸었겠지만 오늘의 발걸음은 보다 이르게 그쳤다. 습관처럼 집을 지나치려다 멈춰선 주영을 인식한 대만이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오늘은 내가 오빠 데려다줄게. 먼저 들어가도 괜찮아."
"엥?"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이쪽을 바라보는 대만을 향해 주영은 씩씩하게 덧붙였다.
"아까 피곤하다고 했잖아? 게다가 내가 문제를 잘못 풀어서 더 늦어졌고. 그러니까 나도 오빠한테 뭔가 해주려고."
대만은 몇 초간 눈을 끔벅일 뿐. 말없이 묘한 표정을 짓고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의 어깨에는 아직도 제 가방이 들려있었다. 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도리어 대만은 그 손을 쥐고서 손가락을 하나, 하나, 천천히 접기 시작했다.
작게 쥐어지는 빈 주먹을 바라보다 고개를 드니 그는 어느새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의중을 알지 못하는 주영이 눈만 깜빡이는 사이 대만의 오른손이 동그란 머리 위로 올라앉았다. 커다랗고 다부진, 하지만 신중하고 다정한 손길.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는 것처럼.
허리까지 숙이고서 눈높이를 맞춰준 덕분에 그의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신경 써주는 거야?"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미소였다. 언제나 조금씩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유하게 풀려있는 미간, 그에 맞추어 부드럽게 휘어진 진한 눈매 역시 사뭇 낯설었다. 거기에 담긴 것은 MVP 시절의 자만도, 경쟁심에 타오르는 호기로움도, 의미 없는 장난기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정대만은 행복해 보였다. 이 오빠가 이렇게 웃기도 했던가? 여느 때보다도 온유한 그 얼굴이 평소보다 더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주영도 배시시,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스한 손길이 몇 번 더 머리칼 위를 스친 후에 그는 입을 열었다.
"쪼그만 게 겁도 없이. 해 다 졌는데 혼자서 어딜 가."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신의 컨디션보다 제 안전을 걱정하는 대만이었다. 오 분 거리 정도는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주영은 칭얼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됐다~ 너 혼자 보내고 내가 먼저 집에 들어가면 그날로 나 집에서 쫓겨나. 그리고,"
"그리고?"
바로 서서 흘러내린 가방 두 개를 고쳐맨 대만이 씩 웃었다. 아, 무슨 얘기를 할지 알 것만 같은 예감. 익숙한 장난기 어린 미소 위에 종전의 이유 모를 행복감이 그의 얼굴에 달빛처럼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신경 써주면 나도 착각한다. 하주영이 정대만 좋아한다고."
예상했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지겠다며 키득거리는 대만의 모습이 중학생 시절의 그와 겹쳐 보였다. 어쩜 3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을까! 뾰로통하게 그를 바라보며 주영은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이제 바로 결혼부터 얘기하진 않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어둠 속에 잠긴 나뭇잎을 흔드는 늦여름의 서늘한 바람 속에 그의 목소리가 실려 왔다.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지만 제법 진지한 느낌이었다. 장난, 맞겠지?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만 같은 모습에 조금 당황한 채 주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얕고 단순한 사고를 하는 탓에 그의 뜻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대만의 속마음은 유난히도 알쏭달쏭했다.
내가 그에 대해 놓친 것이 있나?
"온 김에 저녁이나 먹고 가. 너 오면 어머니가 좋아할 걸."
그렇게 말하며 대만은 제 어깨를 감싸 낯익은 현관 안으로 이끌었다.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이 오빠가 잘생겨 보이냐는 둥, 벌써 결혼 생각이 생겼냐는 둥, 장난을 건네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모르겠다. 호되게 방황하는 동안 밀린 오빠 노릇을 한다든가, 못 해준 만큼 배로 다정하게 대해줄 심산이겠지. 그도 어느새 속이 깊어진 탓일 거야.
개운하지 않게나마 생각을 마무리한 주영은 천천히 대만과 함께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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