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재활병동 손님과 오렌지.

백호열

백호야. 나 더 이상은 못 하겠어.

하고서 문안을 와 한시간 째 조개처럼 입을 꾹 닫고 있던 양호열은 고개를 숙이다 못해 침대 매트리스에 머리를 박았다. 잘 넘긴 리젠트가 흐트러질 것이 뻔하다. 얇은 학생가방에 빗을 챙겨 다니며 틈 날 때마다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용을 쓰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백호는 문병 선물로 들어온 오렌지 자랑을 하다가 돌연 땅으로 파고들 기세의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엉? 동그랗고 어떤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뒷머리에 시선이 박힌다. 시간은 저녁으로 넘어가려는 오후. 문병의 끝자락 그 틈바구니에 갇혀서 양호열은 돌연 다 망가트릴 고해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더이상 너를 기만할 수가 없어. 네게 친구는 다 이런 거야 하곤 어물쩍 넘어가면서 어쭙잖게 애인행세를 하려는 걸, 네가, 그걸, 그러냐, 하고 받아주는 걸 보는 게 너무 괴로워서 정말이지 앞으로는 할 수가 없어. 이건 다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네가 모른다는 사실을 내 기회로 삼았어. 미안해.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짚을 수는 없겠어. 그래가 말하자면 진실로 네가 좋았어, 백호야. … 변명도 추접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네 공백을 어떻게든 내가 욕심을 내 봤는데, 정면으로 부딪혀볼 생각도 못 하고 치졸하게 곁다리로 끼려 들었네. 미안해. 입이 백개여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호열은 보조의자에 앉아서 손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깍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무릎 위에 움킨 손을 내려놓고 가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던가. 죄인의 가장 큰 자유는 자수와 고해라는 것을. 이대로 다 끝날 것이라는 음울한 비냄새와 그럼에도 나아갈 세상에 이런 거짓을 두른 채 보낼 수는 없다는 치열한 사고 끝에 꿈에서도 못 말하던 것을 뱉고야 만다. 아니. 이게 꿈인가? 잘 모르겠다. 사실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곧장 병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답잖은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서 좔좔 읊던 날들은? 그 모든 것이 어지럽게 그의 머리통 안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접싯물에 코라도 박고 죽고만 싶다. 실제로 죽을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매트리스에 박은 코에서 픽픽 바람이 새서 호열은 이것이 꿈이라면 아주 생생한 꿈일 것이고 현실이라면 이렇게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뒷머리에 닿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재보기를 포기했다. 강백호의 시선은 둘 중 하나다. 들뜨거나 뭔가 기울이거나. 전자는 바라지도 않고 후자면 다행이다. 호열이 불안해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강백호 제 삼의 시선이다. 그것을 마주했을 때 호열은 진실로 가슴이 쪼개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용서를 구한다는 명목 하 숙인 고개로 얼굴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호열의 발치에 그림자가 길게 졌다. 네모난 모양으로 조각난 노을이 붉은빛으로 일렁일렁거리면, 가슴은 물 없이도 익사하려는 것처럼 허파에 찬 거품이 푹푹 꺼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목구멍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백호는 아마 호열의 뒷머리를 계속 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드는 농구공만 한 머리통이 자신의 옆에 앉아서 고개를 폭 박고 있었는데, 이건 또 새로운 감각이다. 그러냐. 말을 툭 백은 뒤 백호는 손 안에서 굴리던 오렌지의 꼭지 부분에 엄지를 밀어 넣어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껍질과 과육 틈에 두툼한 엄지가 밀려들어오면 속절없이 껍질은 벌어지다 못해 손가락의 흐름을 따라 균열이 간다. 백호는 그대로 주욱 밀듯이 껍질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려낸다. 경계. 그리고 그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들고 경쾌하게 뜯어낸다. 남은 손을 오렌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힘을 주어 틀어쥐고 있었다. 속껍질의 흰 부분이 오렌지 과육에 덜렁덜렁 매달려 흔들린다. 공기에 시큼 달달한 냄새가 탁 퍼지면, 호열은 가만히 죽죽 뜯기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살가죽이 벗겨진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얼마나 그렇게 좍좍 벗기기만 했을까. 어쨌든 한 알만 벗긴 건 아닌 것 같다. 못 해도 두 알이나 벗겼으려나. 병실 벽면에 붙은 동그란 시계에서 차각차각 초침이 시간을 옮기는 시간을 들으며 호열은 내장이 젓갈이 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러다가 백호가 느슨하게 쥔 손의 손등으로 호열의 뒷머리를 가볍게 통 쳤다. 일어나 인마. 하여서 호열은 머뭇머뭇 일어났다. 역시나 왁스로 멋들어지게 고정시켰던 머리가 보란 듯 헤집어지고 눌려서 보기에 우스웠다. 백호는 먹기 좋게 오렌지 한 조각을 뜯어 호열의 입에 대어주었다. 백호야? 호열이 얼떨떨하게 오렌지와 짝사랑 상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상대는 완고했다. 먹으라는 양 입술에 꽉 눌러버리기까지 하는 통에 호열은 결국 어물거리며 입을 벌려 오렌지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호열은 참으로 꼬리 만 개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그것이 그의 타고난 기세를 죽인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좌우지간 앉은 꼴이 영 불안해 보였다는 말이다. 별 수 있나. 그는 항상 강백호의 앞에서 기묘하게 서툴렀다. 중요한 순간에 허를 찔리기도 하고 급하게 생각을 가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허니 오늘도 별다른 꼴은 되지 못한다.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던 마음이 지금이라도 농담이라 수습하자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으므로, 호열은 그저 재갈을 문 것처럼 오렌지의 한쪽을 문 채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뭐냐. 너 왜 안 먹어. 그리고 백호는 오렌지의 나온 부분을 꾹 눌러 호열의 입 안에 완전히 밀어 넣은 뒤 그가 제대로 씹는지까지 감시했다. 호열은 느릿느릿 턱을 움직였다. 얼마나 움직였냐면, 오렌지 과육이 곤죽이 되다 못해 침을 삼키며 꼴랑꼴랑 넘어가면 결국 씹을 것이 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그 기이한 공간감을 알아챈 백호는 호열이 오렌지 한 조각을 다 먹었을 즈음 또 하나를 떼어서 입에 넣고. 또 넣고. 또 넣고 했다. 친구가 사실 ‘나 너 좋아해서 별 짓 다 했어’라는 말을 면전에다 뿌린 것치곤 태평한 태도였다. 그러나 마냥 태평하지는 않았나 보다. 오렌지 네 조각째를 넣어주던 백호가 말했다. 혼자 재미 많이 봤냐. 호열은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오렌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나 오렌지로 고문당하는구나.

그렇게 먹이고 먹고. 백호는 중간중간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절의 계절이란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수순이라는 것을 밟는 물건이기에 호열이 소여물 씹듯 우물우물 오렌지를 씹다가 공기를 씹을 때쯤 백호는 다시 오렌지를 넣었고. 그렇게 하나를 텅 비우고 나서 껍질을 잘 까놓은 말랑말랑한 오렌지를 다시 등분내기 시작했다. 호열은 그 뭉특하게 오렌지 물이 든 엄지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오렌지가 이렇게 시고, 달고, 심지어는 먹다가 체할 것 같은 과일이었구나를 통감하면서 깍지 껴 잡은 손에 땀이 스미다 못해 찰랑찰랑 채워지는 착각을 했다.

오렌지를 한 개 반 먹이던 백호가 말했다. 야, 호열아. 나 네가 그렇게 멋지게 말하는 거 솔직히 다 모르겠는데 이건 알겠다. 남이 주는 게 얼마나 맛있는 놈이든 주는 이유 알고 먹어야 맛있어.

침묵. 호열은 한참 씹던 것을 잠깐 멈추었다. 그것이 다 먹었다는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백호가 다시 오렌지를 뜯으려 해서 호열은 냉큼 과육을 목구멍으로 넘겨버리고 새 오렌지를 받아 물었다. 그리고 다시 먹이는 것의 반복이다. 오렌지 하나 반은 그렇게 길게 먹었는데, 남은 반은 얼마나 홀라당 먹었는지. 백호가 말을 해서인지, 자신이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어서인지, 아니면 순전히 오렌지가 맛있어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오렌지 맛있었냐?
어?
맛있었냐고.
으응.

호열은 백호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숨이나 참았는데, 아, 정말 죽고 싶었다. 열일곱을 앞에 둔 청춘에 좋아하는 소년에게 이렇게 구겨지다니 가오가 없다 못해 뿌리째 태워지는 것 같았다. 그간의 노력이 박살이 났다는 생각에 호열은 참으로 막막했다. 아, 인생아. 그렇게 죽상이 된 얼굴을 보던 백호가 코에서 핑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투의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짜식아, 생각이 너무 많아. 백호는 오렌지 껍질을 잘 모아서 저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림에 닿지 않고 들어가는 매끄러운 삼 점 슛 같은 흉내였다. 쓰레기 던지기였을 뿐이지만. 아싸. 백호는 한쪽 주먹을 한번 꾹 쥐었다. 그리고 다시 호열을 보았다. 너 내가 너한테 왜 이거 주는지 모르겠지? 호열은 마른풀처럼 창백하고 힘이 없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 무슨 그리스 희랍 시인의 구절도 아니고. 식은땀이 폭포처럼 흐르는데 정말이지, 강백호는 자신을 오렌지로 고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호열은 눈을 들어 백호를 보았다. 더 이상의 회피는 답이 없었다. 말 없는 호열을 보단 백호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것은 짓궂은 일을 할 때의 못된 웃음이었다.

투명한 공기를 가로지르는 노을은 사방을 또렷하게 내버려 두고 불자국만 남긴다. 호열은 그 위에 떠오른 즐거움의 표정에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나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백호야. 알려줘. 마지막 말은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양호열은 두려웠다. 차이는 게 무서웠고, 백호가 이상한 눈으로 볼게 싫었고, 하나하나 변명하는 게 피곤했다. 아. 아니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자신의 인생에서 훨훨 날아가버리는 게 두려웠다. 이대로 쪼그라들다가 어떤 잔재도 남기지 못해고 훌렁 떠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가는 숨처럼 뱉는 말의 끝에 다시금 호열은 죽고만 싶어졌다. 불타는 하늘이 속처럼 뜨거웠다.

백호는 오렌지의 새콤한 향이 스민 엄지손톱을 문지르다가 얇실한 얼굴을 하곤 호열을 보았다. 이 자식 이거 안 되겠네.라고 입을 털었다. 호열은 이제 기도하는 것처럼 맞잡은 손을 느슨하게 쥔 채 무릎 위에 올렸을 뿐이라서… 시선이 마주한다. 이제 호열의 눈이 아주 막막해지고 먼 호수를 보는 것 처럼 열기가 사그라들었을 때 백호가 다시 입을 열면.

그러니까 오렌지가 노을의 중앙자리를 꿰찬 색인 이유는 입 안에 노을을 물어본 경험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강백호는 거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오십통의 러브레터를 한줄한줄 정성껏 적을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일 테니까. 호열은 그 입에서 쏟아지는 시큼한 향내의 단어 틈에서 허우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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