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태웅 / 하나루

[백호태웅] 사랑 부정기

친구도 아니라고?

  • 3학년 시점

강백호는 무언가 하나를 오래 해본 적이 없었다. 금사빠라고 하던가. 그의 그런 기질은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한번 꽂힌 음식이 있으면 일주일을 내리 먹다 어느 순간 질린다. 밤새 게임에 시간을 태우다가도 며칠 안 되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거세게 불타오르는 열정은 금세 전소되어 재만 남는다. 그 순간이 또 온 것 같았다. 농구가 재미없다.

강백호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농구공을 쳐다봤다. 깔끔하게 림에 들어간다. 시시했다. 예전엔 분명 몇천 개고 슛을 쏘면서도 흥분감만 고조되었는데, 이제는 좀 귀찮다. 강백호는 성의 없이 공을 퉁퉁 튕겼다. 체육관을 가득 채운 열정이 부담스럽다. 곧 윈터컵이라 다들 의욕이 가득하다.

"멍청이. 잠시 나 좀 봐."

서태웅이 강백호를 콕 찌른다. 아직 연습이 한창인데, 강백호를 데리고 체육관을 나선다.

"주장이랑 부주장 둘 다 자리 비우면 어떡하냐."

강백호가 툴툴거리면서 따라갔다. 서태웅은 체육관 뒤편 화단 앞에 멈춰 섰다.

"서태웅. 무슨 일인데."

"나 서태웅 아니야."

"... 뭐?"

"여우야."

귀찮다는 듯 서태웅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던 강백호가 그제야 서태웅과 눈을 맞춰온다. 서태웅이 입을 꾹 닫고 강백호를 쳐다본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강백호는 알았다. 지금 서태웅은 긴장하고 있다. 꾹 닫은 입을 오물거리는 게 보인다. 분명 볼 안쪽을 씹어대고 있을 것이다. 강백호가 볼을 톡톡 건드린다. 오물거림이 멈춘다.

"... 무슨 일인데."

"너 요즘 이상해."

"나?"

강백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내가 뭔가 했나? 아, 농구에 좀 질린 게 티가 났나. 나름 연습은 꼬박꼬박 나왔는데.

"왜 나를 서태웅이라고 불러? 너 요즘 쉬는 시간에 나 보러 안 와. 손도 잘 안 잡아줘. 그리고... 키스도 안 해."

"... 내가?"

강백호가 서태웅의 말을 곱씹는다. 내가 그랬었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너 농구에 집중 못 하지."

"... 어, 조금. 티 났냐?"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직하게 마주해오던 시선이 슬며시 내려간다. 아래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인다. 강백호는 별 말 없이 그 머리꼭지를 바라본다. 서태웅이 다시 시선을 마주해온다. 동공이 조금 떨린다.

"내가... 농구에 방해 돼?"

강백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게 무슨 소리지. 농구는 그냥 질렸을 뿐이고, 서태웅은... 아.

"질렸나?"

강백호가 중얼거린다. 서태웅은 그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다. 그저 눈만 계속해서 깜박이며 강백호를 쳐다본다.

"아니, 서태웅."

"... 응."

"잠시만. 내가 잘 모르겠어서."

강백호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인다.

"그... 아, 모르겠다. 나 간다. 내일 마저 얘기하자."

서태웅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왜인지 죄짓는 느낌이 들었다. 강백호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힐끔 뒤를 보니, 서태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강백호는 다시 제 행동을 곱씹어봤다. 내가 서태웅을 이제... 사랑하지 않는 건가?

내일 마저 얘기하자는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강백호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 고민해봤다. 애인이 질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랑은 처음이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결석했다. 지금 이 상태로 서태웅을 만나려니 부담스러웠다.

느지막히 일어난 강백호는 옷을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섰다. 조언이 필요했다. 서태웅과의 관계를 알며, 연애 경력도 있는 사람. 소거법으로 남은 건 단 한명이었다.

"만만쓰!"

강백호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대학의 정문 앞, 한산한 편은 아니었으나 우뚝 솟은 빨간 머리는 저 멀리서도 한 눈에 보였다.

"뭐, 뭐야, 강백호?"

하품이나 찍찍 하며 느릿하게 걸어오던 정대만이, 강백호를 발견하곤 걸음을 빨리한다.

"네가 왜 여기... 아니, 학교는?"

"쨌지!"

"어어... 그래. 당당하고 좋네."

"시간 있어?"

"야, 네가 여기까지 왔는데 없어도 만들어야지. 뭔 일 있어서 온 거 아니냐?"

강백호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그렇지. 만만쓰의 도움이 아주 절실하다구."

"그래. 일단 들어나 보자. 여기선 좀 그렇고... 밥은 먹었냐?"

"엉."

"오야. 그럼 카페라도 가자."

정대만이 앞장선다. 얌전히 따라오는 강백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다. 밝은 척하고는 있는데, 영 분위기가 이상했다. 정대만은 오늘 제출인 레포트가 있어서 밤을 새운 참이었다. 웬만하면 대충 처리하고 집에 가서 뻗고 싶었지만, 저런 얼굴의 후배를 그냥 돌려보내자니 불꽃 남자의 의리가 용납하지 않았다.

강백호가 빨대를 쫍 빨아들인다. 순식간에 컵의 절반이 비워졌다. 정대만은 아메리카노를 보기만 해도 속에서 신물이 나오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안 춥냐."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쫍쫍 잘도 빨아먹는다.

"엉. 목말랐어."

"그르냐."

정대만이 턱을 괴었다. 역시, 강백호의 상태가 이상한 게 맞다. 늘 과다하게 생기 넘치던 녀석이 영 맥아리가 없다. 기어코 음료를 끝까지 빨아들인 강백호가 털썩,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는다.

"나 어떡하지, 만만쓰으..."

으윽.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만 올려 정대만을 쳐다본다.

"서태웅이 질린 것 같아..."

"어... 서태웅이, 너한테?"

다행히도 강백호가 서태웅과 연인 사이가 된 건 정대만의 졸업 이후였지만, 정대만은 모교와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둘이 붙어 다니는 묘한 광경에 학을 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 염병 천병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나름 그 둘을 오래 본 지인 중 한 명으로서 강백호가 서태웅을, 서태웅이 강백호를 얼마나 애틋이 여기는지 알았다.

"아니. 내가... 말이 안 되지? 그렇지?"

강백호가 벌떡 상체를 든다. 깜짝아. 정대만이 몸을 슬쩍 물리며 중얼거렸다.

"뭐... 상상이 안 되긴 한데...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말이 된다고? 내가 서태웅을 사랑하지 않는 게?"

"강백호야..."

정대만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인생의 쓴맛을 혼자 죄다 본 것같이 아련한 눈을 한다.

"연애 과정엔 말이다..."

"어엉."

"권태기라는 게 있단다."

강백호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엉?"

"권태기는 어떻게 없애는데?"

정대만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만만쓰?"

"그걸 알면... 나도 헤어지지 않았지..."

강백호가 입을 쩍 벌렸다. 헤어진다고? 생각도 못 해본 발상이었다.

"백호야."

정대만이 목소리를 깔며 무게를 잡았다.

"잘 생각해야 한다. 서태웅이랑 헤어져도 괜찮을지, 걔랑 헤어져도 잘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봐."

나는... 괜찮을 줄 알았지...

정대만이 중얼거렸다.

"아니, 나는 헤어질 생각이..."

강백호가 말을 멈췄다. 어? 질렸으면 헤어져도 되는 건가? 강백호가 생각을 시작했다. 정대만의 충고대로.

서태웅이랑 헤어져도 잘 살 수 있을까. 강백호는 둘이 연인 사이가 되기 전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지금과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뽀뽀 못 하는 건 좀 아쉬울 수도. 하지만 헤어지면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벌써 헤어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만만! 고마워!"

강백호가 벌떡 일어났다.

"나 가볼게!"

뒤도 안보고 카페를 나섰다. 남은 정대만만 찝찝한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정리했다. 뭐가 고맙단 거지. 설마... 진짜 헤어지려나.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다는 걸 정대만은 이후 그들의 졸업 기념 식사자리에서 알게 된다.

겨울 해는 빨리 진다. 강백호는 서태웅 집 앞 담장에 등을 기댔다. 해가 진 지 한참인데, 아직 서태웅은 돌아오지 않는다. 부 활동이 끝날 시간은 이미 지났다. 강백호가 한숨으로 입김을 만들며 코를 훌쩍였다. 한 시간을 넘게 서있자니 암만 추위에 강한 그라도 슬 힘들었다. 그냥 내일 말할까. 강백호가 기댄 등을 떼어내려는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어둑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자전거가 다가온다.

"킁. 왜 이리 늦게 오냐."

"... 강백호?"

서태웅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야. 너 왜 오늘 학교 안 왔어."

부루퉁한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강백호는 어깨를 으쓱하곤 손을 뻗어 서태웅의 목도리를 고쳐매 준다. 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서태웅."

강백호가 나직이 이름을 부른다.

"... 나 피곤해. 들어갈래."

"나 할 말 있어."

"싫어."

서태웅이 자전거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강백호가 붙잡은 팔은 차마 떼어내지 못했다.

"우리 헤어지자."

서태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 얼굴을 들지 않는다.

"... 그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답을 짜내었다. 하필이면 골목이 조용한 바람에 강백호의 귀엔 똑똑히 꽂혔다.

"빨리 들어가. 추워."

강백호가 잡았던 팔을 놓았다. 그러곤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다정한 말을 뱉어냈다. 서태웅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도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는다.

"킁. 그럼 나 먼저 갈게.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목욕 하고. 엉?"

끄덕. 작은 머리통이 또 끄덕인다. 강백호는 망설임 없이 뒤돈다. 끝났다. 생각보다 더 별거 없었다.


강백호는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잤다. 너무 푹 잤다. 늘 나가던 시간보다 10분은 더 늦게 출발해버렸다. 아. 서태웅 기다리겠는데. 날도 추운데. 강백호가 걸음을 서둘렀다. 뛰다시피 걸었더니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서태웅은 보이지 않았다. 강백호는 대문 근처를 기웃거렸다. 마침 서태웅네 아버님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시던 참이었다.

"아,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백호군? 태웅이는 한참 전에 나갔는데?"

"아... 그래요?"

서태웅이 벌써 가버리다니. 평소 오는 시간보다 겨우 일이 분 늦었을 뿐인데. 서태웅 없는 등굣길은 오랜만이었다. 혼자 걸으려니 심심하고 허전했다.

점심 시간. 웬일로 양호열이 강백호를 찾아왔다. 늘 옥상에서 만났는데, 의외였다.

"백호야, 밥 어디서 먹을까?"

양호열이 도시락을 흔들며 물어온다. 강백호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어엉? 무슨 소리냐, 호열아? 옥상에서 먹어야지."

"아아. 애들이 옥상에서 먹기로 했어. 우린 다른 곳 가야 해."

"애들? 누구?"

"구식이랑 용팔이랑 대남이랑 태웅이. 오늘은 내가 백호 담당이거든. 내일은 용팔이 차례야."

"아니, 호열아... 나 이해가 안 되는데..."

호열이가 되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너 태웅이랑 헤어졌다며."

"아... 서태웅한테 들었냐?"

"뭐, 그렇지? 그런데 태웅이도 우리 친구니까... 어쩔 수 없지. 따로 먹는 수 밖에."

강백호가 표정을 찡그린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니까! 왜 따로 먹냐!"

"... 헤어졌으니까?"

"그거랑 밥이랑 무슨 상관인데!"

"보통 전남친이랑 밥 먹진 않지."

슬슬 양호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답답함에 한쪽 입꼬리만 겨우 올리고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백호야. 너랑 밥 먹으면 태웅이 체해."

"... 왜?"

"네가 찬 거 아니야?"

"맞는데... 어떻게 알았냐?"

"누가 봐도 그래 보여."

"그르냐..."

"응. 일단 밥 먹으러 갈까? 나 배고픈데."

"어어... 그래."

강백호가 양호열 뒤를 터덜터덜 따라갔다. 그들은 매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었다. 서태웅은 몰라도 강백호는 조금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서태웅이랑 같이 밥을 못 먹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귀기 전에도 같이 먹었는데, 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강백호는 남은 수업 시간을 불편한 기분으로 흘려보냈다. 종례가 끝나고, 강백호는 다소 힘 빠진 걸음으로 서태웅네 반으로 향했다. 체육관을 가기 위함이었다.

"어, 강백호?"

뒷문을 열었더니 서태웅은 보이지 않고, 서태웅과 같은 반인 이용팔이 강백호를 반긴다.

"용팔아, 서태웅은?"

"부 활동 갔지."

"왜?"

"어... 종례 끝났으니까?"

강백호가 충격받은 듯 굳었다. 나랑 같이 안 가고 먼저 갔다고?

"중식이랑 같이 갔어."

심지어 다른 사람이랑 갔다고?

"왜... 나랑 안 가고..."

이용팔이 대놓고 표정을 찡그린다. 상냥하게 입꼬리라도 올려준 양호열과는 다르다.

"태웅이가 너랑 왜 같이 가냐, 백호야."

"원래 같이 갔잖아!"

"헤어졌잖아 너네."

"그건 그거고!"

"그게 다야."

하아... 이용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용팔아... 그럼 나 이제 서태웅이랑 같이 밥도 못 먹고, 같이 체육관도 못 가?"

"엉... 강백호, 너 이제 태웅이랑 남이잖아."

"친구... 아니야?"

"친구는 무슨. 남보다 못하지."

땅땅땅. 이용팔의 입에서 선고가 내려졌다. 강백호는 서태웅과 이제 친구가 아니다. 그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연인이 아니게 되는 거지, 친구까지 아니게 될 줄은 몰랐다.

"백호야. 지각하겠다."

"어어... 가야지."

강백호가 천천히 교실을 나섰다. 충격에 뇌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서태웅이랑 남. 남보다 못한 사이. 단어들이 어지럽게 뇌 속을 헤집는다.

부활동 내도록 서태웅은 강백호를 쳐다도 안 봤다. 반면에 강백호의 눈은 서태웅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농구고 뭐고 온 신경이 서태웅을 향해있었다. 서태웅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강백호만 혼자 전전긍긍하며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강백호는 설렁설렁 튕기던 농구공도 내려놓고, 아예 체육관 구석에 기대 앉아 서태웅을 쳐다봤다.

서태웅이랑 내가 어떻게 남이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남 취급을 한 건 양호열과 이용팔 뿐이었다. 그러니 이건 분명 백호 군단의 아주 주관적인 생각일 뿐일 것이다. 강백호는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분명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것이다.

강백호가 다시 농구공을 집어 들려 할 때였다. 쿠당탕. 커다란 소음과 함께 여러 명의 비명이 들렸다. 강백호는 농구공을 내던지고 달렸다. 서태웅이 쓰러졌다.

"태웅아!"

오중식이 서태웅을 흔든다. 서태웅이 몸을 일으킨다.

"태웅아, 괜찮아?"

"응. 순간 어지러워서 넘어졌어. 배가 조금 아픈 것 같아."

강백호가 끼어들었다.

"보건실부터 가자!"

서태웅은 강백호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래, 태웅아. 보건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응."

강백호가 뻗으려던 손을 멈춘다. 그래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내, 내가..."

"아니야 백호야. 내가 갈게."

오중식이 상큼하게 웃으며 서태웅 대신 거절한다. 강백호는 어쩔 도리 없이 보건실로 향하는 둘을 멍하니 쳐다봤다.

오중식은 금방 돌아왔다. 강백호는 다리를 달달 떨며 체육관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서태웅은?"

"아. 보건 선생님이 안 계셔서, 일단 눕혀놓고 왔어. 잠시 짐만 가지고 같이 병원 가보려고."

"... 중식이 네가?"

"응!"

강백호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헤어진다는 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내가 갈게."

"어... 태웅이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 내가 갈게."

강백호가 뛰쳐나갔다. 이건 아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 끊임없이 떠오른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물며 보건실로 가는 데만 집중했다. 울 자격이 없었다.

서태웅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강백호는 조심히 침대로 다가갔다. 보건실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감기 걸려서 온종일 보건실에서 자던 서태웅. 그때 서태웅을 위해 담임한테 허락 맡고, 두유 사 오고, 약 먹이고. 그저 서태웅이 더 아파질까 걱정이 되어서 그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움직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못한다고 한다. 강백호는 하고 싶은데, 주변에서 자꾸 이제는 그런 거 못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서태웅까지도 강백호를 외면한다. 결국 강백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 여우야..."

떨리는 목소리로 서태웅을 부른다. 잠에 깊이 들지는 않았는지, 서태웅이 곧바로 대답해온다.

"너, 그렇게 부르지 마."

눈은 그대로 감은 채로 입만 움직인다.

"여우야..."

"그렇게 부르지... 야... 네가 왜 울어?"

서태웅이 결국 눈을 떴다. 눈물범벅이 된 강백호와 눈이 마주친다. 서태웅이 인상을 마구 찌푸린다.

"... 여우야."

"서태웅."

"으응. 태웅아... 나 너랑, 끅, 남이 되기 싫어... 남보다 못한 사이는 싫어..."

서태웅이 말 없이 상반신을 일으킨다. 찌푸린 인상은 변함이 없다.

"몰랐어... 헤어지는 게, 끄윽, 이런 건 줄 몰랐어... 미안해 여, 태웅아..."

"......"

"난 너랑 밥도 같이, 흑, 먹고 싶고오... 등교도 같이 하고 싶어. 그리고, 킁, 체육관도 같이 오고 싶고, 걱정도, 흐윽, 하고 싶어어... 병원도, 원래 나랑 갔잖아. 내가, 크응,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 그거 다 못하는 거 싫어..."

서태웅이 인상을 편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강백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미안해... 여우야... 킁, 나랑 다시 사귀어주면 안돼?"

강백호가 엉망이 된 얼굴로, 발음도 조금 뭉개어가며 말한다. 서태웅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강백호의 훌쩍이는 소리만 보건실에 울려 퍼졌다.

"여우야아..."

"모르겠어."

"... 으응?"

"생각 해볼게. 내일 얘기해."

"내일?"

강백호가 멍하니 서태웅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응. 내일, 킁. 내일 꼭 얘기해야 해."

거절이 아닌 것에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욕심도 조금 내본다.

"근데... 병원, 내가 데려다주면, 히끅, 안 돼?"

"싫어. 가서 중식이 불러와."

"으응... 히끅."

강백호가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고는 돌아선다. 힐끔 다시 뒤를 봤다가 몇발짝 내디딘다. 또 힐끔. 다시 한발짝. 힐끔.

"야, 빨리 가."

"으응..."

강백호는 보건실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서태웅을 쳐다보고는 겨우 체육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백호는 잔뜩 긴장하며 등교했다. 서태웅이 같이 가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서태웅네 집에 들르기까지 했다. 물론 서태웅은 없었다. 조례 전, 서태웅네 반을 몰래 염탐해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고 쉬는 시간을 노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태웅은 자리에 없었다. 결석이었다.

강백호는 미칠 것 같았다. 얘기하기로 해놓고 결석이라니. 애가 타서 죽을 것 같았다. 종례까지 겨우 마친 후, 체육관에도 서태웅이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부 활동도 재끼고 서태웅을 찾아 나섰다. 서태웅의 집 근처를 샅샅이 뒤질 기세로 뛰어갔다. 그러나 뒤질 필요까지도 없었다. 서태웅은 뻔하게도, 농구 코트에 있었다.

"허억, 여, 여우야!"

강백호가 숨을 가쁘게 쉬며 서태웅을 불렀다. 서태웅의 그 소리에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깨끗한 폼으로 농구공을 던졌다. 림을 통과한 농구공을 주워 들고는, 뒤를 돌아본다. 숨을 고르고 있는 강백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너 학교..."

서태웅이 던진 농구공이 강백호의 말을 끊는다. 강백호는 얼결에 패스를 받듯 농구공을 잡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점프슛. 농구공이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림을 통과한다. 가슴이 뛴다. 짜릿하다. 깔끔하게 들어가는 슛에 기분이 고조된다. 아, 이 기분이었다. 강백호가 벌게진 얼굴로 흥분을 가득 담아 눈을 크게 뜨고 서태웅을 본다. 서태웅이 픽 웃는다.

"강백호."

"응, 여우야."

"나랑 사귈래?"

강백호가 달려든다. 서태웅을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았다.

"응, 응! ...흐윽, 사귈래..."

"... 멍청이."

서태웅이 등을 천천히 쓸어준다.

"넌 왕멍청이야."

"맞아... 끄읍, 여우야아... 사랑해."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을 쓸던 손을 멈추고 강백호를 꽈악, 마주 앉아줬다.


1편을 쓸 때부터 4편까지의 제목과 내용은 대충 정해놨는데, 이번 편은 정말 힘들었어요. 막연히 권태기가 온 백호 이야기를 쓰려고 했거든요. 근데 얘네의 권태기라니... 평생 염병 천병 살 것 같은 애들이라 상상이 잘 안되었네요. 다음 편이 마지막입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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