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태웅] 결혼 부정기
평생 연인이야
3학년 시점
아직은 교복을 벗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신정이 지나 자유가 된 고3 학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합법적 음주를 즐겼다. 2월 초, 북산고 OB들이 개학을 앞둔 북산고 농구부 후배들을 미리 졸업 축하를 겸한 술자리에 초대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는 제법 곱게 취할 줄 알게 된 몇몇 선배들과 여전히 엉망인 한 선배, 그리고 아직 주량을 모르는 후배들이 흥겹게 잔을 부딪쳤다. 이리저리 튀기는 알코올 방울들 사이에 주황색과 노란색의 쨍한 색소가 섞여 들었다. 미린다 오렌지 향과 파인애플 향,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두 명분의 음료다.
"진짜 헤어졌었다고?"
정대만이 소리를 높였다. 손가락 끝으로 강백호를 몇 번이고 찌르며 삿대질을 해댄다.
"엉. 대만군이 조언해 준 덕분에."
서태웅이 퍼뜩 정대만을 쳐다본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니이, 난 잘 생각해 보라 했지! 누가 헤어지랬냐..."
"다 대만 군 때문이야."
강백호가 서태웅에게 고자질하듯 토로했다.
"우리 권태기인 것 같다고, 헤어지라고."
"내애가 언제!"
"호오."
서태웅이 브이자를 만든 손을 턱에 가져다 댄다.
"그럼 그날 결석한 것도..."
"대만 군 보러 간 거니까, 대만 군 탓이지!"
"얀마, 네가 멋대로!"
"시끄럽다. 정대만."
억울함에 술잔을 팍 내려놓은 정대만을 전직 주장이 말렸다.
"저놈 저거, 죄다 거짓말만! 결혼이라도 해봐라, 어떨지 훤하다!"
"뭔 소리야!"
이번엔 강백호가 발끈했다.
"난 결혼 안 해! 절대."
강백호의 느닷없는 비혼 선언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 쟤 취했냐?"
제일 취한 정대만이 채치수 귀에 쩌렁쩌렁 속삭였다.
"대만아. 백호랑 태웅이는 술 안 마셨어."
"아니, 근데..."
픽. 작은 웃음소리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서태웅이 웃었다. 그 서태웅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강백호를 보곤 웃었다.
"쟤도 취했냐..."
"작작해라."
북산고 농구부원들의 긴장감 어린 시선 속에서 서태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멍청이."
정대만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저게 지금 '멍청이♥'로 들린 것 같은데. 내가 취했나?
겨울방학 동안 그들은 주로 농구를 했다. 학교 체육관에서, 동네 농구 코트에서, 쉴 새 없이 농구공을 튕겼다. 그러고도 남은 시간엔 서태웅네 집에 갔다. 늘 가던 강백호의 집이 아닌, 서태웅네 집에 드나들게 된 데에는 강백호의 고집이 100퍼센트 작용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강백호가 씩씩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처음엔 조금 당황하던 서태웅의 아버지도, 이제는 익숙하게 그를 반긴다.
"응. 어서 와요."
"다녀왔어요."
"그래. 어서 와. 백호 군은 자고 가요?"
"넵!"
서태웅이 고갯짓으로 계단을 가리킨다. 강백호는 한 번 더 꾸벅 인사를 하곤 순순히 계단으로 향한다. 음료를 챙기는 서태웅의 옆에서 괜히 어슬렁거리다간 또 그에게 혼날 것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서서 이것저것 챙겼더니, 손님에게 일 시키는 거 아니라며, 서태웅의 아버지가 서태웅을 조용히 불러 나무랐다고 하였다.
'넌 인사만 하고 올라가 있어.'
그 후로 서태웅은 그에게 그렇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강백호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서태웅네 특유의 포근한 향을 한껏 맡았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편안한 향기가 기분 좋게 그를 감싼다. 2층에 들어서면 짧은 복도가 보인다. 가장 앞의 방은 이미 취직한 지 오래인 형의 방, 복도 끝 제일 안쪽 방은 서울의 대학에 다니고 있는 누나의 방이랬다. 서태웅의 방은 그 사이에 있는 중간 방. 방문은 이미 반쯤 열려있었다.
커다란 캐리어가 강백호의 시선에 걸려들었다. 그는 괜히 꼴 보기 싫어 발로 툭툭 찼다. 빈 캐리어는 발길질에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는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보드라운 이불이 뺨에 닿았다. 서태웅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서태웅네 부모님은 좋은 분이셨다. 제집처럼 자주 방문하는 강백호를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당연하다는 듯이 식사까지 번듯이 차려주셨다. 여기에 오면 마음이 편해졌다. 강백호가 과거에 상상했던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에는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품에 쏙 들어오는, 새까만 머리가 찰랑거리는 아내가 맞이한다. 자식은 아들 한 명 딸 한 명이 좋겠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내를 쏙 빼닮았을 것이었다. 이름도 지었던 것 같은데 그건 이제 잊었다. 서태웅과 만나며 다 잊었다. 남자끼리는 결혼할 수 없댔다. 그렇다면, 강백호의 미래에 결혼은 없다.
"야. 뭐해."
서태웅이 쟁반을 들고 뚱하게 서 있었다. 보리차가 가득 든 유리컵 두잔 사이로 귤 여러 개가 이리저리 놓여있었다. 강백호가 서둘러 일어나 쟁반을 거들었다.
"주스는 없었어."
"어엉. 보리차도 좋아."
둘이 나란히 다시 바닥에 앉았다. 강백호는 귤껍질을 조각조각 뜯는 서태웅을 보곤 나머지 귤을 제 옆으로 가져왔다. 얼른 까서 한 조각을 입 앞에 들이미니, 별말 없이 오물거리며 받아먹는다.
"우리, 역시 이층집에서 살까?"
"저번엔 고급 아파트에 살자며."
강백호가 서태웅의 벌어진 입에 쏙, 귤 한 조각을 또 넣는다.
"생각해 보니까 그건 좀 낭만이 부족해."
"그런가."
"엉. 주택이 좋은 것 같다. 거실에 아주 큰 창을 내놓는 거야. 그 앞으로 작은 마당이 있고,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우린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고양이를 키우자. 너를 닮은 아주 까맣고 예쁜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좋지?"
"응."
"너랑 나랑 고양이랑. 셋이서 햇빛 잔뜩 들어오는 거실에서 낮잠을 자는 거야. 소파 위에서 같이."
"좁을 것 같은데."
"아니야. 엄청 커다란 소파를 살 거야. 그럼 셋이서 안고 자면 딱 편안할걸."
"흐음."
"침대도. 커다란 걸로 사자. 우리가 누워도 발 밑으로 공간이 남는 걸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런 거."
"그런 거 팔아?"
"... 돈 많으면 다 살 수 있어."
"호오."
서태웅이 그새 또 받아먹은 귤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강백호가 볼록해진 서태웅의 볼을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는다.
"우린 최고의 농구선수가 될 거잖아. 돈 많아."
"그렇지."
서태웅이 더 열심히 끄덕거린다. 그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시간. 강백호는 곧잘 둘의 미래를 그려보며 조잘댔다. 우린 결혼할 수 없으니까 평생 연인인 거야. 강백호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더랬다.
"아."
"엉?"
"내일 점심에 약속 있어."
"뭐?"
"저녁 전에는 끝나."
"뭔데? 무슨 약속! 내일 농구 안 해?"
"아침에 해. 저녁에는... 보고."
"해 지고 오는 거냐?"
"그건 아닌데."
"그럼 할 수 있잖냐!"
"흐음."
서태웅이 강백호를 잠시간 쳐다보며 뜸 들였다.
"모르겠는데."
"무슨 약속이길래!"
"넌 몰라도 돼."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딨냐!"
"그런 게 있어."
"그런..."
춉. 서태웅이 강백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강백호는 하려던 말도 잊고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는 매번 처음과같이 반응했다.
"... 여우,"
쵸옵. 이번엔 입술이다. 전보다는 조금 길게 눌렀다 떼었다.
"이거 반칙..."
쪼옥. 다시 한번 입술. 힘껏 맞췄다 떼어내면서 찐한 뽀뽀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그만해?"
"... 아니."
서태웅이 손을 뻗어 강백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았다. 두터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니 바로 크게 벌려온다. 꽤 오랜 시간, 둘은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 귤맛."
서태웅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여우, 그거 다 네가 먹은 거거든!"
강백호가 이마를 약하게 콩 부딪쳐 온다. 곧 키득거리며 웃어버린다. 그 개구지고 기분좋은 웃음에, 서태웅도 따라서 작게 웃었다.
"내일. 너희 집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
"... 알았다구."
강백호가 저 너머에 박혀있는 캐리어를 힐끔 본다.
"우리 볼 날도 얼마 안남았는데... 너무한다, 여우."
"... 빨리 갈게."
"진짜지?"
"응."
강백호가 서태웅의 어깨에 이마를 비빈다. 그 품에 파묻혀 웅얼댄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서태웅이 팔을 들어 강백호를 감싸 안았다. 커다란 품이 벅차게 들어온다.
"나도."
강백호의 칭얼거림을 묵묵히 받아준다. 서태웅은 그의 불안을 잘 알았다. 그 원인도.
서태웅의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농구 소년들의 열정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서태웅네 아버님 표 계란찜에 밥을 비벼 오징어젓갈과 무말랭이로 밥을 두 그릇씩 뚝딱하고는, 둘은 집을 나섰다. 집 앞 공원은 휑했다. 빈 농구코트에서 몸을 풀고는, 손 시릴 새 없이 농구공을 튕겼다. 농구를 하고 있노라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여우야. 11시인데."
"아."
서태웅이 공원 중앙의 시계탑을 쳐다봤다. 11시가 조금 넘었다.
"가야 해."
"그렇겠지..."
강백호가 눈썹을 추욱 늘어트리며 애잔한 표정을 짓는다.
"씻고 갈 거야. 넌 집에 가."
"매정해."
"너희 집에서 저녁 먹자."
"... 뭐 먹고 싶은데?"
"오므라이스."
"알았어."
강백호가 미련 남은 얼굴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걸음을 뗀다. 서태웅은 강백호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집으로 향했다. 백호 군단과의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바삐 움직여야 했다.
강백호는 심심했다. 지루했다. 적적했다. 서태웅의 출국은 얼마 남지 않았고, 강백호의 미국행은 반년이나 남았다. 이제 곧 반년 동안은 만날 수 없기에 방학 내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태웅과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잠시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집에서 기다리라는 서태웅의 말에 착실히 집에 왔건만, 빈집은 서늘했다. 도무지 여기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백호 군단의 집에 연락을 돌려봤더니 외출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강백호는 그들이 있을 법한 곳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적당히 빠칭코나, 아니면 근처 패스트푸드점일 것이다.
평일 낮이라 시내는 한적했다. 그러지 않아도 눈에 띌 녀석들이었지만, 한산한 거리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다섯 남정네들은 튀어도 너무 튀었다. 낯익은 뒤통수들 사이로 삐죽 올라온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겨울바람에 나풀거리는 머리칼, 목에 꽁꽁 두른 베이지색 목도리. 서태웅이 틀림없었다. 약속이 있다더니, 그 대상이 백호 군단일 줄은 전혀 몰랐다. 저를 빼고 다 같이 만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강백호는 슬쩍 숨어서 그들을 뒤따라갔다. 빠칭코도, 패스트푸드점도 아닌 카페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기함을 토했다.
'저것들이 나 빼고... 여우랑!'
강백호는 뒤따라 들어갈까, 건물 뒤편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여우가 집에 있으랬는데, 들어가면 따라온 것 같잖아! 조금 맞긴 한 데, 난 그럴 의도가... 아악, 왜 쟤네끼리 카페를 가? 나한텐 말 안 하고? 난 친구 아니야? ...안되겠다.'
강백호가 카페 입구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서태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결국 또 슬쩍 건물 뒤편으로 숨어버렸다. 서태웅은 혼자였다. 주머니에서 장갑을 주섬주섬 꺼내 끼며 홀로 도로 반대편으로 향했다. 강백호는 그 뒷모습이 멀어지길 기다리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갔다.
"너네, 뭐냐!"
저들끼리 즐겁게 희희낙락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곤 강백호가 삿대질하며 버럭 외쳤다.
"아."
"하아..."
"아이고야."
"... 백호야 일단 앉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을 뱉은 군단 친구들 사이에서 양호열이 강백호를 불러들였다. 요란한 등장을 한 탓에 몇 안 되는 카페 손님들의 이목을 끌어버려 곤란했다.
"어엉... 근데 너네!"
"비밀이야."
양호열이 빙긋 웃으며 강백호의 말을 잘랐다.
"딱 오늘까지만 비밀."
"... 뭐, 뭔데?"
"그런 게 있다, 백호야. 휴... 결국 오다니."
이용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니, 난 그냥 우연히 본 거거든! 따라온 거 아니거든!"
"알았으니까, 이제 가. 태웅이 오기 전에."
"싫어! 너네랑 약속이었으면 나도 같이 오면 되는 건데, 왜 나만 떼놓냐구! 안 가!"
"글쎄, 비밀이라니까?"
"그런 거 몰라!"
"비밀은 원래 몰라야 하는 거야."
강백호가 서글픈 눈망울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뭔데에... 나 빼고 비밀 만드는 거 너무해... 이거 그거냐? 왕따?"
"아니, 백호야..."
양호열이 이마를 짚었다. 왕고집 멍청이가 둔해 빠져서 힘들었다. 오늘만 비밀이고, 태웅이 보기 전에 가라고 했으면 대충 견적 나오지 않나?
"알아서 해. 태웅이가 속상해해도 난 모른다."
양호열이 강하게 나왔다. 군단 친구들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여우가 속상해해? 왜? 내가 아니라?"
"궁금하면 계속 있어 보던가."
"아아. 불쌍한 태웅이!"
"태웅이가 얼마나 열심히... 앗."
강백호가 슬슬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서운함이 가득 찼던 눈망울이 불안감에 떨린다.
"나, 나 일단 집에 갈까?"
"그럴래 백호야?"
"엉... 여우가 저녁 전에 온댔으니까..."
"맞아. 좀 있다 너희 집으로 간댔어."
"그래? 나 저녁 준비 못 했는데!"
강백호가 벌떡 일어난다. 해와 바람 작전이 통했다. 강강약약의 강백호에겐 강풍보단 햇볕이 답이다.
"나 간다! 나중에 꼭 뭔 일인지 말해주라!"
"아..."
강백호의 뒤통수에 친구들이 탄식을 뱉었다. 그를 설득하는데 시간을 너무 썼나 보다. 마침 돌아온 서태웅과 마주쳐 버렸다.
백호 군단을 뒤로하고 둘은 나란히 강백호의 집을 향해 걸었다. 강백호는 왁왁거리며 서태웅을 추궁하기 바빴다.
"그래서 뭐냐니깐! 그 꽃다발! 역시 고백받은 거지? 그렇게 커다란 꽃다발을... 누구냐! 거절했지?"
"하..."
"한숨? 하안수우움? 내가 너 그럴 때마다 얼마나 속이 타는 줄 아냐? 예쁘게 생겨서, 고백이나 맨날 받고 다니고! 이 여우야!"
"멍청이."
"왜!"
"자."
서태웅이 멈춰서더니 강백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사람도 없이 휑한 골목 어딘가. 이르게 지는 해에 담벼락이 주홍빛으로 물든 때였다.
"나? 내가 버리라고?"
"내가 주는 건데. 버리든가."
"...엉?"
꽃다발을 건네받고 굳은 강백호 앞에서 서태웅이 품을 뒤적거렸다. 두툼한 패딩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든다. 반질거리는 남색 벨벳으로 마감된 케이스가 서태웅의 손길에 입을 벌린다. 그는 그 속에서 얇은 은색 링을 꺼냈다.
"손."
서태웅이 왼손바닥을 내밀었다. 강아지에게 요구하듯 강백호에게 손을 요구한다. 강백호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손을 그 위에 올린다.
"멍청아, 반대 손."
"으응...."
꽃다발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고 왼손을 내민다. 두터운 손이 서태웅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려졌다. 서태웅은 조심스레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조금 헐거웠지만, 잘 들어갔다. 서태웅은 다시 반대쪽 품을 뒤적거려 똑같이 생긴 반지 케이스를 하나 더 꺼냈다.
"자."
"어어."
강백호가 멍하니 그걸 받아 들고는 서태웅과 케이스를 번갈아 본다.
"멍청이."
"응... 응?"
"넌 왕멍청이라서 몰랐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자끼리도 결혼할 수 있대."
"... 결혼, 할 수 있어?"
"응. 우리 미국 갈 거잖아. 결혼할 수 있어."
강백호는 잠시 심호흡했다. 너무 벅차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곧 떨리는 목소리로 서태웅에게 되물었다.
"... 우리 결혼 해?"
"해야지. 평생 연인 하기로 했잖아."
"진짜? 결혼해?"
"응."
"결혼할 수 있다고? 우리... 부부할 수 있어?"
"... 안할거냐?"
"해! 할 거야!"
강백호가 서태웅의 왼손을 뺏어 들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준다. 당연하게도, 딱 맞았다.
"너희 집 가서 할랬는데. 프로포즈."
"이거 프로포즈야? 아... 프로포즈. 결혼. 맞네... 프로포즈...."
"그래서 꽃다발도 사왔잖아."
"... 프로포즈는 내가 하고 싶었는데. 그거 로망 있었단 말이야."
"받는 로망은?"
강백호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태웅을 꽈악 안았다.
"생겼어. 지금."
"응."
"여우야,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서태웅을 품 안에 넣으니, 참았던 눈물이 퐁퐁 솟아난다.
"흡, 태웅아... 너랑 결혼할 수 있을 줄 몰랐어..."
"이제 알았잖아."
"응, 흐끅. 알려줘서 고마워어... 사랑해애애."
"응... 나도, 사랑해."
서태웅이 힘껏 마주 안았다.
"어때?"
"뭐가아..."
"반지 줬잖아. 반년 기다릴 수 있지?"
"응... 빨리 갈게에."
"기다릴게."
서태웅이 품에서 벗어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물범벅에 축축하고 짭짤한 맛이 났다.
"아, 나 저녁 준비 못 했는데."
"나가서 먹자."
"꽃다발 들고?"
"싫어?"
"아니. 손도 잡자."
"그래."
강백호의 오른손이 서태웅의 왼손과 맞닿았다. 부드럽게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서태웅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가 느껴졌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하자. 야외에서, 아주 따뜻한 봄에 말이야."
"좋아."
"농구부원들도 다 초대하자. 만만쓰한테 축가 맡기면 웃기겠다. 부케 대신 농구공 던질까?"
"응, 농구공 좋아."
"그렇지! 아주 멋지고 재밌는 결혼식이 될 거야."
손을 꼭 붙잡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둘을 또 미래를 이야기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들의 미래에 둘은 꼭 함께였고 최고로 행복했다.
드디어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네요. 백호와 태웅이는 영원히 함께 행복할 거라 믿어요.
다음엔 외전으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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