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른] 댐마미아 2
대만이 꺼내려고 했던 손님용 식기는 결국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만을 기다리다가 창고로 간 태섭은 홀로 남은 태웅을 발견했고, 일그러진 태웅의 표정에서 일련의 사건을 짐작했다. 침울한 얼굴을 한 성인 남성은 마치 애인과 헤어진 고등학생 같았다. 상자를 들고나오며 태섭은 태웅의 어깨 아래를 툭 치는 것으로 위로를 전했다. 웃긴 일이었다. 애인을 공유하는 이들이 애인에게서 비롯된 슬픔을 서로 달래 주는 꼴이란.
식기를 씻으러 주방으로 가는 길에 식당 싱크대 아래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호열을 만났다. 태섭과 태웅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호열이 손에 들고 있던 공구를 슬쩍 흔들었다.
"물이 조금 새서."
"해결했어요?"
"뭐, 적당히."
호열은 들고 있던 공구를 자리에 두고 싱크대 하부장을 닫았다. 그러자 태섭이 싱크대 옆 협탁에 식기를 올려두었다. 호열은 먼지가 가득한 식기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름 호텔인데, 그릇이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요?"
"음식은 좀 준비한 모양이더라고요. 간단한 거." 호열은 찬장과 상자를 뒤지더니 커다란 그릇 몇 개를 꺼내왔다. "여기에 담아서 두면 되겠다."
호열이 자연스럽게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며, 자기가 대충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주위에서 기웃거리던 태웅은 태섭에게 자신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물어보았다.
"위에 의자가 없더라. 맞다, 대만선배 보면 사람 몇 명 초대했냐고 물어보고."
"네."
"저기 구석에 있는 와인이랑 음료도 전야제에 쓸 것 같으니까 가지고 올라가고. 호열...씨..."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어... 그래. 나는 음향 장비 있는지 찾아볼게. 식탁보도 깨끗한 거 있는지 찾아보고. 홀에서 쓰고 있는 건 낡았더라."
태섭의 능수능란한 지휘에 벌써 각자의 역할이 정해졌다. 태웅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역시 PG는 다르네요."
정확히 상황을 판단하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두고 움직이게 하는 이가 포인트가드였다. 태섭의 지시를 듣고 있으니, 꼭 코트 위에 있는 듯 했다. 태섭 또한 피식 웃었다.
"나머지 두 명 보면 작전타임 끝났으니까 빨리 코트로 복귀하라고 해라. 세 명으로는 힘들다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명헌과 마주한 태웅은 저가 들고 있던 와인 한 궤짝을 넘겨주었고, 태섭은 호텔 뒤편에서 홀로 땅을 파며 침울해하는 대만을 찾아내어 역정 냈다. 그래도 내가 형이자 선배인데, 하고 항변하는 입을 억지로 막지 않고 호텔에 밀어 넣은 게 태섭이 보일 수 있는 연장자에 대한 최한의 예의였다.
다섯 남자들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바쁘게 움직인 결과, 옥상은 전야제를 진행하기에 손색없을 곳으로 탈바꿈했다. 릴선으로 스피커를 이어 감성 가득한 노래를 틀고, 명헌이 마지막에 찾은 휘장을 둘러치니 꽤 그럴싸했다. 이렇게까지 멋지게 완성될 줄 몰랐던 대만은 감격스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전야제에는 ㅇㅇ이와 스카이의 친구, 대만과 가까이 지내는 섬사람들이 참석했다. 섬의 모두가 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인원수는 아니었다. 옥상은 금방 사람들로 북적였다. 초대된 모든 이들은 육지에서 온 네 남자들에 대해 물었고, 대만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수고했다는 칭찬에 대만이 하하호호 웃을 때마다 구석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은 눈살을 흘기며 불평을 내뱉었다.
"초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하라고 부른 거죠, 이쯤이면."
"대책 없는 건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네요."
"최동오도 부를 걸 그랬어."
태웅은 말없이 제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네 남자가 무어라 떠들던, 그들의 노고 덕에 전야제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특히, 너무 멋있다며 대만의 품에 뛰어들자 동시에 네 남자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ㅇㅇ와 스카이를 필두로 사람들은 춤을 췄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였다. 모두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벌겋게 무르익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취했는지, ㅇㅇ은 네 남자의 테이블에 찾아와 대만을 헐뜯는 친절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자신의 과거에 있는 대만을 꺼내놓았다. 미담은 없었으나 대만을 언급하는 목소리에는 지워내지 못한 애정이 묻어있었다.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한 이들은 그렇게 각자의 대만을 회상했다.
대만은 웃었다. 네 남자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떠들고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목을 가누지 못하는 듯 대만의 뒤통수가 뒤로 꺾였다. 테이블의 네 남자가 움찔거렸다. 대화 상대는 서로여도, 다들 대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함부로 대만에게 뛰어가는 이는 없었다. 긴장감 어린 침묵이 남자들을 감쌌다. 누가 대만의 곁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가 대만을 챙기던 이들이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호열은 침묵을 갈랐다.
"이번에는 저에게 양보해 줘요."
"어?" 태섭이 짧게 반문했다. "뭘?"
"말이라도 붙여보고 가야죠." 호열은 태섭과 태웅을 쓱 훑어봤다. "두 분은 심도 있는 대화 나눴으니까."
태섭은 덤덤한 시선으로, 태웅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명헌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시선으로 호열을 바라보았다. 호열은 자신의 몸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든 눈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난 이제 와서 잘해볼 생각 없어요."
"그건 모르는 거 아닌가요."
태웅이 날카롭게 대답하자, 호열은 그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인사만 하고 올게요, 적당히 인사만."
그대로 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에 연거푸 술을 마셨는지 조금 더 상기된 대만에게 다가갔다. 떠들고 놀던 대만은 호열이 다가가자 살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같이 나갈래요?"
"어, 엉?"
"내일 결혼식 때문에 또 정신없을 거 아녜요. 시간 좀 내주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노동했는데."
"아, 어. 그래. 저 잠깐 내려갔다 올게요. 다들 놀고 계세요."
호열과 대만은 일정한 보폭으로 옥상에서 내려갔다. 노랫소리와 반짝이는 전구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멀어졌다. 1층으로 내려와 호텔을 벗어나니 짙은 어둠이 깔린 길거리가 두 남자를 반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내려앉은 길거리는 옥상과 완벽히 다른 공간이었다.
"무슨 말 하게?"
대만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대만의 손가락은 움찔움찔거렸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도망치려고 했는지. 죄책감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호열은 대만이 안쓰러웠다. 그는 대만에게 한 줌의 원망도 없었다. 애초 무슨 사이였다고 원망을 한단 말인가. 고등학교 3학년과 1학년. 맞은 양아치와 팬 양아치. 친구의 동아리 선배와 동아리 후배의 친구. 고민이 많은 형과 곁에서 들어주는 동생. 대학생과 고등학교 2학년. 하룻밤의 온기를 찾는 남자와 기꺼이 온기를 나누어준 남자. 떠나간 이와 남은 이. 호열은 명명할 수 없는 관계에서 어떠한 권리도 얻지 못했다.
무슨 말로 포문을 열지 고민하던 그때, 호열의 눈에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흰색 바탕에 빨간색 포인트로 멋을 낸 오토바이였다. 딱 봐도 대만의 물건이었다.
"오토바이 타요?"
"섬에서 가끔 타. 자동차까지는 불필요해서."
"태워줄까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수 없이 했던 말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태워줄까요. 그 짧은 권유는 일종의 초대장과 같았다. 과거로부터의 초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대만이 답했다.
"내 건데."
"알아요."
"내가 너 태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난 술 안 마셨어요. 키 있어요?"
오토바이 손잡이에 걸려있는 헬멧은 하나였다. 호열은 대만에게 헬멧을 씌워주었다. 가만히 끈을 만지작거리던 대만은 헬멧을 벗어 호열에게 내밀었다.
"생각해 보니까, 네 헬멧은 내가 썼잖냐."
"그랬나?"
"응. 그러니까 내 건 네가 써라."
"오." 예상외의 대답에 호열은 얼떨떨한 얼굴로 헬멧을 받았다. "고마워요."
대만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내밀었다. 호열은 가볍게 오토바이를 탔고, 뒷좌석을 탁탁 두들겼다. 대만은 자연스럽게 호열에게 밀착해 앉은 후, 호열의 허리를 껴안았다. 시동을 걸자 오래된 오토바이는 거친 배기음을 내뿜었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를 지르밟으며 바퀴는 끝없이 미끄러졌다. 진한 오렌지색의 동그란 가로등이 구불구불한 해안가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빛을 지나쳤다. 행선지는 끝없이 펼쳐진 밤바다였으며, 쏟아질 듯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이었다.
호열의 등 뒤로 대만의 가슴이 닿았다. 느껴지는 체온, 얽히는 심장박동. 사소한 모든 것들이 과거의 어느 날을 끄집어냈다. 이윽고 어깨 위로 자그마한 머리통이 기울어졌다. 그는 곁눈질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앞을 바라보며 달렸다. 나지막한 한숨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지나친 가로등이 모두 점멸하다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울지 않네요."
"이제 울 나이는 지났으니까."
혼잣말처럼 웅얼거린 말 뒤에 이어진 나지막한 대답. 낮은 목소리는 거친 바닷바람과 두꺼운 헬멧을 관통했다. 호열은 오토바이 손잡이를 다잡았다. 재빠르게 움직이던 바퀴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갔다.
대만은 쾌활한 남자였다. 솔직하고 순수했다. 인기가 많았으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존재 자체로 빛나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밝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남들처럼 대만도 우울과 슬픔을 느꼈고, 이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이는 호열이었다. 적당한 눈치와 적당한 거리감. 누구에게나 공통점을 향유하지 않은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대만은 호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관계의 시작이었다. 진솔한 대화 속에서 대만과 호열은 서로를 읽어냈다. 심중이 이어지자, 몸이 맞닿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호열은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대만이 호열의 팔을 베고 가진 포부와 목표를 조잘거릴 때, 호열은 그의 미래에서 자신의 유무를 가늠했다. 농구로 가득 찬 삶에서 호열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옆의 대만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열은 억지로 오아시스를 찾으려 애썼다. 대만은 그런 남자였다. 비관을 낙관으로 바꾸는 힘을 가졌다.
감히 미래를 꿈꾸었다. 호열은 대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원을 그리듯 관계의 종말은 시작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연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나타난 대만의 얼굴은 깊은 수심에 차 있었다.
'나 무릎이 아파.'
호열은 대만의 재발을 가장 먼저 들은 이였다.
대만은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농구가 하고 싶다고 흐느끼던 그날과 똑같았다. 호열은 그런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한참을 울던 대만은 밤을 지새우고 떠났다. 그 뒤로 대만의 연락 빈도가 확연히 낮아졌다.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차마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대만은 간헐적으로 호열을 찾았다. 몸이 부서지듯 안아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호열은 거절하지 않았다. 몸에 남은 자국이 다른 남자의 존재를 암시했지만, 차마 싫다 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대만은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잊고자 했다. 누군가 고통을 줘야 한다면 자신이 주고 싶었다. 호열은 대만을 위해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었다.
헌신에 무엇이 부족했을까. 호열이 알아낸 대만의 마지막 모습은 이불빨래를 걷으려고 나갔다는 옆집 사람의 증언이었다. 나부끼는 천자락을 잡고 그대로 하늘로 날라가기라도 한 듯 대만은 그렇게 사라졌다. 한 편의 문학처럼,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홀연히.*
그리고 대만은 한 통의 편지로 다시 호열에게 날라왔다.
"정대만 씨 다 컸네요."
"이제 대만 군이라고 안 해?"
"울 나이 때나 대만 군이라고 하는 거죠."
"그렇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결말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굴고 싶은 감정을 자극하면서, 담백하면서도 질척거리게.
"그래도 대만 군이라고 불러줘."
"알겠어요."
"어서."
"대만 군."
호열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대만이었다. 19살과 20살, 성숙과 미성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선을 그리던 정대만. 삐뚤삐뚤한 선을 따라가던 양호열.
"응."
"울어도 괜찮아요."
"안 울 거야."
"왜요?"
"내가 무슨 염치로 다시 울어."
"그나마 정대만 씨는 양심이 있네요. 그쵸. 그렇게 사라진 주제에 뭘 잘했다고 울겠어요?"
느리게 깜빡이는 가로수 아래 오토바이가 천천히 멈췄다. 호열은 헬멧을 걸어 손잡이에 건 후, 오토바이에서 내려 대만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대만을 보았고, 빛 속에서 대만을 보았다. 앳된 얼굴과 세월이 깃든 얼굴이 교차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정대만 씨는 몰래 잠적하고, 호텔 경영도 하고, 미혼부로 혼자 애 키우는 사람이라 못 울어요."
"그러냐."
"하지만 대만 군은 그런 거 없거든요."
호열은 강박적일 정도로 피임에 신경 썼다. 그렇기에 호열은 편지를 받자마자 ㅇㅇ이 자신의 핏줄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챘다. 동시에 발신이 대만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그럼에도 이 섬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어깨 빌려주려고 여기 온 거에요. 대만군이 울 수 있게."
"양호열."
"내 앞에서만 울었잖아, 대만군은."
대만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대만군.
나는 부모의 사랑이 배제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나는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살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 영원한 수신인이자 발신인이 되고 싶었어요. 나에게 대만군이 그런 존재였어요. 동시에 대만군에게 내가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그러기에 당신의 현재와 미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죠.
대만군이 떠난 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당신을 기억했어요. 누군가는 당신을 그리워했고, 누군가는 잊었으며, 심지어 미워했어요. 당신과 명확한 관계였던 모두가 하나의 감정을 가져가고 나니 남은 게 없더라고요. 우리는 명명할 수 없는 관계였기에 나는 우선순위가 낮을 수 밖에요. 그래서 고독을 택했어요. 외로울 당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천천히 잊어갔죠. 시간의 풍파는 무형의 것까지 바래게 만들잖아요. 관성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던 내게 당신은 편지 한 통을 보냈어요. 발신인에 적힌 당신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그대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어요. 밀봉된 편지봉투를 뜯기까지 얼마나 고심했는지 당신은 영영 모를 거야.
편지를 다 읽은 후, 나는 그대로 무너지고 싶었어요.
편지지에 적힌 글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당신이 나와의 순간을 꾸며서 말했다는 건 알겠더라고요. 나는 당신의 웃는 얼굴 보다 찡그린 얼굴, 우는 얼굴이 더욱 익숙한데. 푸른빛의 순간이 타인의 기억 속에서라도 오색빛으로 남아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만군은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요. 결국, 당신은 나를 찾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난 이 정도에서 멈출게요. 고민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적당한 편지 상대 말이에요. 의무감이 없는 게 중요하죠. 당신이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위치에 있는, 혹여라도 다시 나를 떠나도 전처럼 내가 원망조차 할 수 없는 관계.
"나에게 대만군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부족한 편지예요."**
대만의 상체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대만은 호열의 어깨에 느릿하게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대만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어깻죽지가 미묘하게 척척해짐을 느끼며, 호열은 고개를 들었다. 깜빡이다 꺼진 가로등 위로 칠흑 같은 장막이 내려앉았다. 장막 사이사이에 수 놓아진 별이 평소보다 유독 반짝이게 빛났다. 영원히 닿지 못할 거리에서 빛나는 별, 손안에 있어도 곧 사라질 사람.
비로소 호열은 고독해졌다.
"편지 기다릴게요."
* <백년의 고독> 내용 참고
*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여행에서 패배한다> 문구 편집 후 인용 .. 문제되면 수정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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