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른] 댐마미아 3

냉이 by 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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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유일한 성당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외로이 서 있었다. 

성당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돌계단에는 파도가 쓸고 바닷바람이 휘갈긴 흔적이 가득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돌계단은 불안하게 덜거덕거렸다. 명헌의 시선은 위태로운 돌계단을 지르밟고 올라가는 대만의 무릎에 머물렀다가, 자그마한 뒤통수에 닿았다.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걸어가는 대만의 등 뒤로 그림자가 이어졌다. 명헌은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대만을 쫓았다. 마치 어젯밤처럼. 

호열이 데리고 나간 이후로 대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호열이 전하기로는 피곤해서 먼저 쉰다고 했다.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는 더 놀고 들어가라는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 길로 명헌은 제 손에 있던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열과 태섭, 태웅에게 이제 자기 차례라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대만의 집은 호텔 맞은편 작은 건물이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빛 한 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명헌은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이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대만이 창문 너머의 자신을 애써 모른 척했기에, 명헌도 그러했다.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ㅇㅇ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문고리를 잡은 그 순간까지.

늦은 아침, 대만은 ㅇㅇ이와 함께 멀끔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머리는 뒤로 넘기고, 유행이 지난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다.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헤진 구두코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고, ㅇㅇ이의 드레스 밑단을 매만져주었다. 명헌은 차분히 대만이 자신을 아는 척 하기를 기다렸다.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즈음에야 대만은 명헌에게 우물쭈물 말을 걸었다. 어젯 밤 언질을 준 터라 ㅇㅇ은 명헌과 함께 성당으로 오라며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면사포 자락을 바라보던 대만은 입을 열었다. 성당은 저쪽이야.

성당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성당에 다다르기 전, 명헌은 대만을 불렀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대만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만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으나, 고개는 가볍게 주억거렸다.

명헌과 대만은 길에서 조금 빗겨 난 곳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명헌은 물었다. 누가 식장에 ㅇㅇ이를 데리고 들어갈 건지 알고 싶어. 한 차례 강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손끝이 시렸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대만은 죄인처럼 힘없이 머리를 떨구다가, 고개를 들어 정확하게 명헌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야. 그제야 명헌도 대만을 바라보았다. 

20년을 넘어 이어진 대화, 마주한 시선. 명헌은 올리브색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을 보았다. 그토록 그리던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명헌은 말을 이었다.

"…ㅇㅇ이가 또 다른 친부랑 함께 입장하길 원한다면?"

"걔는 다른 아빠 없어."

"나에게 너인 척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ㅇㅇ이야. 걔가 원하는 거라고."

"그럼 얌전히 하객석에 앉아있다가 떠나. 미안하지만 배웅은 못 해주겠다."

대만의 입술이 윗니에 살짝 짓이겨졌다. 기분이 상했는지 피부에 새겨진 세월의 굴곡이 더욱 깊어졌다. 가볍게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과 어색하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 참담함을 가장한 담담함에 명헌의 명치가 뻐근해졌다. 

"만약 친부도 원한다면?"

"니 애 아냐."

칼로 내지르듯 대만은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명헌은 타격받지 않았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대만과는 딱 하룻밤을 보낸 사이였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피임도 철저히 했다. 알고 있었지만,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 처녀 수태하신 성모 정씨 애지."

"니 말대로 내가 처녀 수태했다, 뭐!"

명헌은 자꾸만 애처로웠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이 이지러진 표정의 대만이 애처로웠고, 그런 대만에게 계속 마음이 가는 자신이 애처로웠다. 

"…곧 결혼식인데 얼굴 펴. 나는 내가 ㅇㅇ이 친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젯밤에 집 앞을 서성였어?"

"서성이기만 했잖아."

창문을 두드리지 않았잖아. 네 이름을 부르지 않았잖아. 

"잠은 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거든."

대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바다로 옮길 뿐이었다. 마치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 마' 라고 말하는 듯했다. 명헌은 기꺼이 무언의 압박에 응했다. 더 몰아가다가는 도망칠 게 뻔하니,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로 했다.

"얼굴 보면 나 닮은 구석이 없던데, ㅇㅇ이."

"눈,코,입 싹다 나 닮았거든."

"막무가내같이 구는 성격까지 닮아서 큰일."

"걔가 좀 그래. 그러니까 스무 살 되자마자 결혼하지. 뭐 이런것까지 닮았는지 몰라."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만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씩 웃었다.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 대신 느슨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쌌다.

"그냥 궁금해서 왔어. 누가 너인 척 편지 썼는지 궁금하잖아."

"…정말이지?"

그 한마디에 명헌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대만을 응시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투명하면서도 어리숙한 면모를 보이는 건 장점이라 불러야 할지 단점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 짧은 문장에 모든 게 끝이 났다. 명헌은 인정해야만 했다. 대만에게는 명헌을 향한 어떠한 감정조차 남지 않았다는 걸.

"애초 우리가 무슨 관계였다고."

명헌은 툭 내뱉은 말은 창이 아닌 방패였다. 명헌은 되뇌었다. 정대만과 이명헌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노라고.

명헌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켓을 벗어 바닥에 깔고, 옷감 위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좀 앉아. 어차피 주례 신부 오려면 멀었잖아."

"비싼 옷 아냐?"

"엉덩이에 먼지 묻은 채로 식장 들어가고 싶으면 안 말려."

잠시 고민하던 대만은 냉큼 명헌의 재킷 위에 앉았다. 입술을 내밀고 삐쭉이는 모습은 대학 시절과 똑같았기에 명헌은 살포시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뭐. 그럭저럭."

명헌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자신은 꽁꽁 감춘 채 남의 사정을 캐내는 대만이 조금 괘씸했다.

"농구는 계속했어?"

"비밀."

"다른 사람 만났어? 애는 있어?"

"비밀."

눈자위가 점차 가늘어지며 언어보다 더욱 깊은 감정을 내비쳤다. 명헌은 자신을 흘겨보는 시선을 가볍 무시했다.

"뿅뿅거리더만 아직도 신비주의자 컨셉 못 버렸네."

"사실 수절했어. 집 나간 서방 그리며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잎을…."

명헌이 눈썹을 축 내리며 소매로 눈가를 찍어 누르는 시늉까지 하자 대만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비밀."

"와, 이명헌." 

"동시에 남자를 다섯 명이나 만나고 다녔으면서 궁금한 것도 많네."

"치사하게 복수냐."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복수라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  

명헌은 대만이 떠난 뒤의 자신을 곱씹었다.

정대만의 잠적은 팀에도 영향을 미쳤다. 감독과 코치는 '또?'라는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사람들은 선수 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잠수한 몇 선배들처럼 대만이 떠나갔다고 여겼다. 수군거림은 잠시였다. 감독진은 다른 선수를 지정했고, 이로써 팀의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명헌은 평소와 다름없이 패스했고, 공은 누군가가 받아 던졌다. 그 자리는 정대만을 위한 자리였으나, 정대만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경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되었다. 일상은 쳇바퀴처럼 덜그럭거리며 돌아갔다. 그러나 명헌은 해결되지 못한 감정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정대만은 명헌의 꿈속 주인공이었다. 

엄연히 명헌의 꿈임에도 그는 기어코 주연 자리를 차지했다. 으레 주인공이 그러하듯, 대만은 박수갈채와 함께 무대에 등장했다가 마법같이 사라졌다. 어느날의 명헌은 그와 잠깐이나마 어울릴 수 있는 조연이었으며, 어느날의 명헌은 그를 빛내주는 스태프였고, 어느날의 명헌은 사라진 그를 찾는 관객이었다. 유일하게 허락된 작은 의자에 꽉 끼어 가만히 눈으로만 발자취를 좇아야하는, 다수 중 하나. 명헌은 관객석에서 하염없이 막을 내린 무대를 바라보았다. 

진정 복수를 하고자 했다면.

무력한 기다림에 값을 받아내고자 했다면.

명헌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부모의 손을 빌리면 충분히 대만의 행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터였다. 어느 섬에 있던 기어코 찾아내어 머리채를 잡고 올라온 뒤, 대학 기숙사에 처넣을 수 있었다.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은 수없이 결심하고 단념하길 반복했다. 결국, 명헌은 대만을 찾지 않기로 했다. 농구에 대한 대만의 열망을 알았기 때문이며, 대만을 향한 제 감정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자신 또한 다른 이들과 같이 관객석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명헌은 대만을 멀리서 응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농구를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면, 기꺼이 보내줘야 하지 않겄던가. 그 뒤로 명헌은 꿈을 꾸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의 풍파가 여러 차례 명헌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대만의 이름은 명헌의 삶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잊은 줄 알았는데. 사라진 게 아니라, 시간이 덧씌워진 거였다. 정대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였으며, 그를 향한 감정은 남아있었다. 싱그러운 초록빛 풋풋함과, 벚꽃처럼 만개한 분홍빛 설렘을 지나, 정제되지 않아 새빨간 원색을 띄었던 분노까지. 모든 색은 지워졌어도 분노는 불티처럼 남아 가슴 속에서 이리저리 튀어 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20년은 지났음에도, 아직도.

"여전하네, 너."

"너야말로."

바람이 불었다. 여전하다는 네 글자에 담긴 추억에 명헌은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만과 함께했던 시간을 곱씹었고, 대만 또한 그러한 듯 말이 없었다. 서로의 손이 가볍게 닿았다. 손가락이 가볍게 얽혔다. 간지럽고, 짜릿하고, 이 다음을 상상하게 했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명헌과 대만 그 누구도 선을 넘지 않았다.   

"언제 갈 거야?"

"결혼식 끝나고 가야지. 여기에 무슨 볼일이 더 있겠어."

"그치…."

"너는?"

"어? 나는 뭐… 호텔 계속해야지."

그 뒤로 대만의 입술이 여러 번 달싹였다.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동오는 뭐 하고 살아?"

"걔도 뭐, 잘 살아."

"계속 농구했어? 걔는 운동 그만둬도 잘 살 거 같은데.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했잖아."

대학 시절에도 대만은 어딘가 독한 구석이 있었다. 유한 얼굴에 가려진 굳은 강단. 동오는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박수갈채 속에 코트를 떠난 선수였다. 프로농구에 관심이 있다면 알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동오의 소식을 물어본다는 건 대만이 그동안 농구를 완전히 끊어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 독한 마음이 심장을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아니면 다른 남자의 안부를 물어서 그런가. 손가락이 닿기는 어려웠어도, 떼어내는 건 한순간이었다.

"도망갔으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네."

명헌은 유치해지고 싶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꽤 좋았는데, 기어코 망쳤다. 명헌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애틋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가도 티격태격 다투고 싶었다. 불평하고 싶지 않으나 자꾸만 탓하고 싶었다. 대만이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으며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명헌은 원망을 담아 대만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대만은 물수제비를 던지는 이였다. 자꾸만 파동을 만들어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다. 

"도망?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모르는 건 또 뭔데. 애 생겨서 도망친 거 맞잖아."

"그 뿐만은 아니었어."

대만의 손이 제 무릎을 감쌌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뻔했고, 명헌은 대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임신과 재발. 물론 개인의 삶과 선수로써의 삶에서 큰 일이었다. 그러나 평생 열망하던 농구를 포기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한 채 섬에서 홀로 살아갈 정도로 일인지 명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떠나자."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갑자기 터진 진심에 명헌은 당황스러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대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빌어먹을. 명헌은 다급히 대만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만. 나랑 살자는 소리 아냐."

"이거 놔."

대만이 손목을 거칠게 흔들었다. 명헌은 힘을 줘서 더욱 세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대만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게 둘 수 없었다. 더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객석에 앉은 이라 해도 말이다.

"ㅇㅇ이도 떠나니까 이 섬에 계속 있을 이유 없잖아."

"내 인생의 반을 여기서 보냈어."

"네 인생은 공간에 있는게 아니야. 과거에만 있는 건 더더욱 아니지."

"내가 선택한 내 삶이야."

"이름도 생소한 작은 섬에서 다 쓰러져가는 건물 보수가 정말 네가 선택한 삶이야?"

대답은 없었다. 명헌은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그저 대만의 손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을 뿐이었다. 몇 번 더 팔을 빼내려고 했던 대만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발끈했다. 주위를 인식하여 나지막하면서도 날 선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미 늦었다고, 이제 와서 농구던 뭐던 뭘 어쩌라고, 왜 너네는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을 몰아세우냐고, 혼자서도 ㅇㅇ이를 잘 키웠다고,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고, 너네 중 누가 친부인지 이제 궁금하지도 않다고,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포기하지 마."

명헌은 대만의 손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대만의 상체가 살짝 휘청이면서 기울어졌다. 명헌은 조심스럽게 대만의 손목을 놓으며, 제 품에 들어 온 대만에게 속삭였다. 

"너 정대만이잖아, 뿅."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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