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른] 댐마미아

냉이 by 냉이

*남성 임신 및 출산이 가능하다는 전제설정 (관련 자세한 묘사X)

*맘마미아AU(등장인물의 나이 및 다공일수 주의)





바다 어딘가, 관광객의 발걸음이 뜸한 어느 한적한 섬. 

조용하던 일상에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주인공은 남녀 한 쌍이었다. 신부라는 글자 옆에 이름을 올린 정ㅇㅇ는 섬 내 유일한 숙박시설인 ㅁㅁ호텔 사장 정대만의 금지옥엽이었다.

ㅇㅇ은 결혼 후 남편 스카이와 육지에 갈 예정이었다. 벌써 신혼집을 마련할 지역까지 알아본 뒤였다. 육지에서 살다 온 대만은 언제나 ㅇㅇ에게 더 큰 세상을 보라고 권했었고, 스카이 또한 육지에서 거주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일평생 작은 섬에서 살았던 ㅇㅇ또한 세계일주라는 큰 꿈이 있었기에 육지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ㅇㅇ이 세계일주를 꿈꾸게 된 건 전적으로 대만때문이었다. 대만은 섬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 중이었다. 섬 내에서 유일한 호텔이었기에 관광객은 무조건 대만의 호텔에 숙박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ㅇㅇ은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마주했다. 육지에 대한 ㅇㅇ의 꿈은 무럭무럭 자랐고, 20살이 되자마자 떠나겠다고 했다. 대만은 어린 여자애가 홀로 떠나는 걸 반대했고, 그럼 ㅇㅇ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차마 거기까지 말리지 못한 대만은 제 통장 잔고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음 맞는 남성과 신혼여행 겸 세계일주를 떠나게 된 지금, 대만은 그 동안 모은 돈으로 ㅇㅇ에게 낭만을 선사할 예정이었다. 멋진 전야제와 소박하지만 나름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 중이었다. 게다가 육지에서 세계일주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여비와 신혼집 마련에 보탤 돈을 마련했다. 이만큼이면 어디 자랑해도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대만은 육지로 나갈 날을 기다리는 딸을 보며, 그저 웃었다.

곧 떠날 몸이니 ㅇㅇ은 조금씩 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창고 구석에 박혀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는 별다른 게 없었음에도 이상하게도 ㅇㅇ의 시선을 빼앗았다. ㅇㅇ은 홀린 듯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농구공이 들어있었다. 밑창이 닳은 농구화 한족, 나무 액자 한 개, 잡지 한 권, 일기장 한 권도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ㅇㅇ은 가장 먼저 액자를 꺼냈다. 유리 아래로 보이는 것은 인화지 뒷면이었다. ㅇㅇ은 이상하게 여기며 액자를 열었다. 사진은 나풀거리며 곧장 떨어졌다. 사진의 주인공은 대만이었다. 먼지로 뒤덮인, 빛나는 정대만의 한 때. 앳된 얼굴의 대만은 트로피를 든 채 환히 웃고 있었다. ㅇㅇ은 그제서야 대만이 청소년 시절 농구선수였음을 알았다. 잡지를 들춰보고서야 대만이 대학생 시절에도 농구선수였음을 알았다.

ㅇㅇ은 단 한 번도 대만이 농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ㅇㅇ은 일기장을 들고 망설였다. 왠지 열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아 망설이던 도중, 대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화들짝 놀란 ㅇㅇ은 가방 속에 일기장을 넣고 급히 창고를 나섰다.

그날 저녁, ㅇㅇ은 유독 일찍 제 방의 불을 껐다. 피곤해서 먼저 자겠다는 ㅇㅇ의 말에 대만은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 로비를 걸레질할 뿐이었다. ㅇ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랜턴을 켰다. 그리고 대만의 일기장을 넘겼다.

일기장의 서문은 이러했다.

그 새끼랑 다시 만나면 내가 개다.

ㅇㅇ은 한참이나 숨죽여 일기장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읽은 뒤, ㅇㅇ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뒤졌다. 반은 꼬깃꼬깃하게 접힌 편지지 다섯 장이 나왔다. ㅇㅇ은 잠시 고민하다가 펜을 다잡았다.

편지의 서문은 이러했다. 

앞발로 글 쓰기 힘들다.


*


결혼식 전야제 날 아침, 육지의 어느 항구.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도 아니고, 낯선 장소에서 만난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이라고는 전혀 맞지 않았던 남자들이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음이 여실히 보였다. 왜 여기 있지. 

"오랜만이에요, 선배."

"어, 태웅아. 미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잠깐 귀국했어요."

"왜?"

"초대받았거든요."

태섭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지로 누르며 물었다.

"어디에 초대받았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태섭이 부담스러웠는지 태웅이 눈매를 가늘게 떴다.

"선배는 왜 오셨는데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태섭은 입을 다물었다. 태섭의 기억 속 태웅은 반문 대신 꼬박꼬박 답을 하는 녀석는데 말이다.

"결혼식 초대받아서."

"저도요."

"누구."

"아시잖아요."

태웅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제 딸이에요."

"서태웅."

"대만 선배가 편지 보냈어요. 자기 딸 결혼식 오라고. 제 딸이니까 오라고 했겠죠."

태웅의 시선은 곧게 뻗어있었다. 국가대표부터 몇 년 동안 국내리그를 태웅과 함께한 태섭은 그의 시선이 익숙했다. 목표를 응시하고, 쟁취하는 자의 눈빛. 태웅의 이번 목표는 대만이었다. 태섭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했다. 서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정대만은 어쩜 변한 게 없냐고 내심 투덜거렸다. 물론, 태웅도 겉으로 티 내지 않았어도 태섭을 보자마자 대만을 원망했다.

태웅과 태섭에게 여기서 ㅇㅇ이 누구의 딸인지 실랑이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결혼식에 가야 면이 서지 않겠는가. 어차피 둘 다 이틀에 하나 있는 배편을 놓친 뒤였다. 태섭은 점점 멀어지는 배 뒤꽁무니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태웅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둘 다 전야제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결혼식이나 간신히 참여할 수 있으려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쉬이 움직이지 못할 즈음, 뒷편에서 배에 시동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기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시선을 느낀 남자가 태섭과 태웅을 흘끔 쳐다보며 소리쳤다.

"뭘 보냐."

태섭과 태웅은 산왕공고 출신 남자가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억지로 비집고 탄 배는 작은 어선이었다. 등치 좋은 남자 셋이 있으니 배가 유독 작아 보였다. 명헌은 자기가 빌린 배라며 두툼한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배 주인은 돈을 더 받을 수 있어서 태섭과 태웅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섬까지는 4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포문을 연 이는 이명헌이었다.

"그래서, 너네도 정대만이 초대했어?"

"뿅 안 붙여요?"

침묵 속에 노골적으로 섞인 감정에 태섭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요."

"아무튼, 좀 이상하다 싶어서."

"뭐가요?"

"너네에게도 자기 딸 결혼식 오라고 편지 보냈지."

"네."

명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단어를 고르는 듯 잠시 입을 다셨다. 

"20년 만에 연락한 이유가 딸 결혼식 참석이라니."

"좀 이상하죠?"

"독한 구석이 있어, 정대만은. 한 번 뒤 돌면 끝이라고. 이제와서 이런 감상에 빠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태섭은 옳타꾸나 싶어 얼른 말을 받았다. ㅇㅇ이 자신의 친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태웅과는 좀처럼 대화가 되지 않아 답답하던 차였다.

"편지로 보낸 것도 이상해요. 대만선배가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글씨체도 어색한데. 그런데 묘하게 편지 내용이 자세했어요. 저와 있었던 일을 썼더라고요."

"확실한 건 본인이 직접 쓴 편지는 아니라는거지."

"대필을 맡겼을까요?"

명헌은 태웅과 이러쿵저러쿵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가만히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태웅은 자리를 옮겼다. 배가 작아 몇 발짝 가지 못했지만, 후면부에 오니 모터 소리에 대화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들을 필요가 없었다. 태웅은 제 품 속의 편지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는 선배가 초대했다고 믿으니까요. ㅇㅇ이가 저와 선배의 딸인 게 분명하니까요. 따뜻한 과거의 편린이 태웅의 시야와 귀를 가렸다. 선배,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요.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세 남자는 모두 항구에서의 운명적인 조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없는 10대도, 낭만을 찾아 헤매는 20대도 아니었다. 삶의 풍파는 많은 감성을 깎아냈고, 이제는 동경할 그 무엇도 없음에도 그들은 기다렸다. 그들에게 정대만은 그런 남자였다. 풋내나는 낭만을 꿈꾸게 하는 소년.

"그리운 얼굴들이네."

항구에서 만난 이는 호열이었다. 배편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기에 만난 얼굴. 호열의 얼굴을 모르는 명헌은 태섭과 태웅의 낯에서 분위기를 읽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대체 몇 명에게 보낸 거야, 정대만."

태섭의 한탄에 명헌은 즉각 대답했다. 

"최소 5명."

"지금 4명인데요, 한 명 더 있어요?"

"걔는 안 온대."

"누군데요."

"최동오. 셋이 대학 동기였어."

"하, 한 명이라도 안 와서 다행인가. 왜 안 온대요."

명헌은 동오의 표정을 상기했다. 편지를 받고 무너질 듯이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은 여전히 수려했다. 대만이 살아 있었음에 기뻐하며, 자신은 그를 만날 수 없다고 웅얼거렸다. 모든 걸 집어 던지고 대만에게 매달릴 게 분명하다고 자조하던 얼굴을 명헌은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명헌 자신도 아직도 놓지 못한 미련 한 줄기 때문에 가기 때문이었다. 

동오는 명헌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명헌이 차에서 내리기 전, 동오는 외모가 자기 친딸인 것 같으면 꼭 연락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한 술 더 떠서 친자확인 하게 ㅇㅇ이 머리카락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명헌은 실없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사랑해서."

여전히 최동오는 이명헌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연적이었다. 복잡미묘하게 바뀌는 명헌의 표정을 보며 태섭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우선 짐을 둘 곳을 찾아보자고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들에게 아는척 하며 다가왔다. 

"맞죠? 우리 아빠가 그렇게 잘생기지는 않았는데..."

나름대로 환영 인사를 건네는 여자애의 얼굴은 유독 싱그러웠다. 여자애가 누구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곱게 접히는 눈꼬리에서 모두가 같은 이의 환영을 보았으니까. 


죄송해요, 편지는 제가 보냈어요.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크게 놀라는 이는 없었다. 태웅만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가 폈을 뿐이었다. ㅇㅇ은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우연히 찾은 일기장과 일기장에 적힌 남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정대만이 만났던 남자가 다섯 말고 더 있었다고 밝혀지자, 태섭이 괜스레 머리카락를 쓸어넘겼다. 

편지를 보낸 이는 다섯이었다. ㅇㅇ은 일기장 속 달력에서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자를 특정했다고 말했다. 명헌이 달력에서, 하고 되물었다. ㅇㅇ은 머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어느날에 누구를 만났는지 잘 적어뒀더라고요. 이건 사실상 제 아버지의 문란함을 아버지의 전 남자친구들에게 고해하는 꼴이었다. 

ㅇㅇ은 네 남자를 호텔 창고로 데려갔다. 저녁에 몰래 방을 줄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떠났다. 전야제에서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소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막무가내로 초대하고, 짐짝처럼 창고에 넣어버리는 게 정대만 핏줄다워서 웃음이 나왔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ㅇㅇ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ㅇㅇ이 나가고 나서 10분 후, 정대만이 창고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호텔 구석에 있는 으슥한 창고, 그 안에 있는 수상한 남성 네 명. 정대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고, 그런 정대만을 가장 먼저 따라잡은 이는 서태웅이었다. 태웅은 뒤에서 대만을 움켜쥐듯 껴안으려 했다. 전직 운동선수가 온 힘을 다하여 부딪치니, 일반인이 바닥에 쓰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웅은 위에서 덮치듯 대만을 안았다. 잔뜩 질린 얼굴로 몸부림 치는 대만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예요."

그제서야 대만은 고개를 돌려 낯선 침입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태웅이에요."

대만의 몸이 멈칫했다. 팔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태웅은 강하게 대만을 껴안았다.

"선배가 평생 원온원 해주겠다고 했던 그 서태웅이요."

"태웅아."

대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뒤쫓아 온 남자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대만은 태웅의 볼을 쓰다듬었다. 전과 같은 감촉은 들지 않았다. 대만의 손도, 태웅의 볼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깃든 탓이었다. 차례대로 남자들이 대만 근처에 주저앉았다. 대만은 천천히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명헌, 태섭, 호열. 오래전 인연, 잊었던 사랑.  남자들은 대만의 시선이 닿자, 살짝 눈을 감았다. 대만 또한 남자들의 숨결이 제 몸에 닿자 눈꺼풀을 닫았다. 낮은 호흡이 섞이고, 체온이 연결되었다. 어색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기분. 감각은 혈관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이 순간, 그들은 20년 전 어느 날로 돌아갔다. 각자의 정대만을 마음에 품은 채.


차분하게 회포를 푸는 일은 사치였다. 당장 오늘 저녁에 전야제를 해야 했고, 준비는 제대로 끝마친 게 없었다. 대만은 바쁘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따른 이는 태섭이었다. 그는 만류하는 대만을 가볍게 무시하고 짐을 들었다. 단단한 팔뚝이 두 상자를 번쩍 들자, 대만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낡은 호텔에 엘리베이터 또한 사치였다. 목재 계단은 두 남자의 몸무게가 실릴 때마다 끼익거렸다. 대만은 조심하라는 말도 없이 성큼성큼 올라갔다. 같이 움직이는 내내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질 정도였다. 태섭은 그저 입술만 달싹이며 그 뒤를 따랐다. 

옥상에 도착한 태섭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최소한의 꽃장식만 되어있는 옥상은 어수선했으며, 썰렁했다. 태섭은 대만을 노려보았고, 대만은 슬쩍 눈길을 피했다.

"ㅇㅇ이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해 주고 싶어서."

"그런데 왜 이 꼬락서니에요."

태섭은 한심하다는 듯 대만을 흘겨보았다. 대만은 멋쩍은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누수 때문에 벽 깨고 힘들었단 말이야. 객실 말리고, 벽지 뜯은 뒤 다시 바르고, 커튼도 바꿨다고."

"공사를 직접 했어요?"

"육지에서 사람 부르면 비싸. 큰일은 아니어서 옆집 할아버지랑 배관만 좀 손봤어."

태섭은 시간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실감했다. 농구를 제외하고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었던 정대만은 이제 간단한 배관공사까지 할 줄 알았다. 젖은 천장 벽지를 걷어낸 후 새로운 벽지를 바를 수도 있었다. 태섭은 괜스레 코끝이 시큰하여 얼굴을 매만졌다. 

"나이 들더니 정대만 사람 다 되었네요."

"비단 나이 때문이겠냐."

"그럼요."

"호텔 유지비가 한두 푼 드는 게 아니다~"

"본인 소유 호텔이에요? 대단한데요."

"빚만 잔뜩인데 무슨. 대단한 건 너지."

상자 안에는 알전구가 들어있었다. 대만은 건전지를 넣고 전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시험한 다음, 철책에 걸어달라고 태섭에게 내밀었다. 태섭은 제 손에 든 전구를 내려다보았다. 전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깜빡였다. 최면과 같은 빛의 점멸은 태섭을 자극했다. 깜빡임 한 번에는 과거가, 두 번에는 감정이, 세 번에는 억눌렀던 억울함까지 모두.

"하필 또 옥상이네요."

"...아직도 아프다, 인마."

"엄살은."

턱에 있던 대만의 흉터는 세월에 의해 옅어졌는지 맨으로 보이지 않았다. 태섭은 문득 대만의 턱을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직 거기 있느냐고, 나의 흔적이 당신에게 남아있느냐고.

결국, 태섭의 입에서 나온 건ㅡ

"내 경기 봤어요?"

선후배 사이에서 으레 하는 안부였다.

"아니."

"거짓말. 그럼 내가 대단한지 어떻게 알았어요."

대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섭은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았다. 침울한 대만의 표정을 보며 태섭은 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미안하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오랜만에 바다구경하고 좋네요."

옥상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짭짤한 바닷냄새가 났다. 태섭은 고개를 들었다. 항구 너머에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잔잔한 바다 위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윤슬은 태섭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화려하게 반짝였다. 

"혹시... ㅇㅇ이가 네 딸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배 안 타요."

말허리를 썩둑 자르고 끼어든 문장은 앞과 맞지 않는 듯 했다.

"우리 아버지는 뱃사람이었어요. 거친 파도에도 뛰어드는 분이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었나 봐요. 어렸을 적 나도 그냥 돌진했잖아요. 어디에나, 뭣도 모르고."

"...형이 있어?"

"말 안했나. 말할 틈도 없었죠, 뭐. 우리 형도 농구선수였어요. 초등학교 때 농구부였거든요. 키가 컸어요, 우리 형은. 농구도 정말 잘했죠. 우리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을 거예요."

"그랬구나..."

"중학생 때, 농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모든 게 그냥 다 밉고 싫었어요. 유일하게 잘 하는 건 농구인데, 진짜 잘 하는지도 모르겠고. 자유투는 더럽게 안 들어가고. 그런데 어떤 형이 나타난거에요. 진짜 별거 안했거든요. 자기 실력 자랑하듯이 삼 점 슛 몇 개 넣고서, 저보고 실력이 아깝지 않냐고 하는 거예요. 웃기죠. 뭘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건 그 당시의 내게 꼭 필요한 격려였어요."

"송태섭."

"아버지와 형, 이름 모를 농구장의 그 형까지. 모두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태섭은 철책에 전구를 걸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전구는 태섭의 손을 떠나서도 환하게 빛났다.

"갑자기 사라진 거."

사라진 거. 대만은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사라진 거.

"아버지와 형은 배를 타고 나갔다가 바다가 잡아먹고, 그 형은 다음에 같이 하자고 해 놓고 그 길거리농구장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태섭은 적확하게 대만을 바라보았다. 대만의 눈을, 흔들리는 동공을, 그 안에서 죄책감에 무너지고 있는 모습까지 모두. 

"그래서 그 형도 죽은 줄 알았어요."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잠시 멈췄다. 건물 아래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거리를 울리는 자동차 배기음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은 거짓말같이 공간을 뒤덮었다. 대만은 고개를 푹 숙였다. 태섭이 엿보지 못할 만큼 깊게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저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더는 피할 구석이 없었다. 여태까지 피해 오지 않았는가. 과거의 인연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ㅇㅇ이가 누구 딸이어도 괜찮아요. ㅇㅇ이가 내 딸이라고 생각해서 온 거 아니에요. 단지, 살아있는 정대만을 보고 싶었어요. 그쪽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내 눈으로 봐야만 했다고요."

기어코 터져 나온 진심.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태섭의 상체는 움찔거렸으나, 표정의 변화는 미비했다. 눈물을 갈쌍이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태섭은 많은 부분이 마모된 사람이었다. 끊임없는 파도에 침식된 해안가의 절벽같이, 일평생 떠난 이들이 남긴 추억에 그는 끊임없이 담금질 되었다. 

"그쪽이 나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태섭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배를 타고 여기 온 이유는 그게 다예요."

대만이 이를 기민하게 알아챌 것임을 알면서도.

"...필요한 물건은 로비에 둬요. 가지고 올라올게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대만은 결국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태섭은 쓰게 웃었다. 

이것은 태섭이 유일하게 고치지 못한 버릇이었다. 



가장 먼저 ㅇㅇ을 붙잡은 이는 태웅이었다. 머뭇거리는 태웅을 ㅇㅇ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생일은 언제야? ㅇㅇ은 4월이라고 대답했다. 일기장은 어디 있어? 태웅은 일기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계속 일기장의 행방이 궁금했었다. ㅇㅇ은 다시 창고에 뒀다고 했고, 태웅은 다시 창고로 돌아갔다. 몇 개의 상자를 열어 본 뒤에 태웅은 원하던 상자를 찾을 수 있었다.

시선이 가장 먼저 꽂힌 것은 농구화였다. 대만의 고교 시절과 대학 1학년 시절을 함께 했던 신발. 태웅은 신발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신발의 상태는 양호했다. 태웅은 신발 표면을 더듬었다. 긁힌 자국, 밑창의 닳음 정도까지 완벽히 같았다. 정대만이 농구화를 강제로 벗어야 했던 그 시절과 말이다.

농구화를 다시 내려놓고 일기장을 꺼내려는 순간, 창고 문이 열렸다. 또다시 정대만이었다. 태웅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는 사람이었다.

"너 왜 여기 있냐?"

"선배."

"아서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선배는 무슨."

말 편하게 하라는 대만의 말에 태웅의 눈가가 씰룩였다. 

"그렇지만 선배가 같이 늙어갈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요."

"그래, 내 탓 해라. 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바닥에 널린 상자를 열어보던 대만은 태웅의 앞에 있는 상자에 시선을 두었다. 상자 안 물건이 시야에 담기자, 반사적으로 대만의 인상이 구겨졌다. 태웅은 슬쩍 상자 뚜껑을 비스듬히 닫았다. 농구화, 농구공, 일기장, 사진. 모두 대만의 미련이자 빛바랜 꿈이었다.

"봤어?"

"남의 사생활을 엿보면 안 된다는 건 저도 알아요."

천연덕스럽게 태웅은 거짓말했다. 일기장이 대만의 손에 넘어가는 걸 지켜보며, 태웅은 아쉽다는 듯 쉽사리 눈길을 떼지 못했다.

"농구장 없어요? 원온원해요."

"저 농구공으로 뭘 할 수 있겠냐. 게다가 농구는 ㅇㅇ 가졌을 때부터 안 했어."

"왜요?"

"애 키워야지."

무심한 답변이었다. 옛날의 태웅이라면 그냥 넘겼을지도 모르나, 지금의 태웅은 짧은 문장 속에 담긴 깊은 시간과 노고를 읽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남성의 배태와 육아, 한부모 가정이라는 사회적 핸디캡은 대만을 이 섬까지 몰아냈으리라 짐작했다. 

"왜 농구를 포기했어요?"

그럼에도 태웅은 가까스로 물어보는 걸 택했고,

"왜 너를 포기했는지 궁금한 거 아냐?"

대만은 태웅의 손쉽게 속내를 읽어냈다. 

"미성년자 계속 만날 수 없다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이별을 통보한 사람은 선배예요."

너는 농구의 화신 같아. 

"나는 이해했어요. 정말 힘들었는데, 가까스로 인정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시 찾아가면 되겠지, 그때는 다시 나를 받아주겠지."

농구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딱 너 같을거야. 

관계의 시작은 부러움섞인 칭찬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절의 태웅은 대만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가볍게 대꾸했다.

선배는 농구를 좋아하니, 그럼 저를 좋아하는 건가요. 

귀 끝까지 화르륵 타오른 대만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거창한 처음과 달리 대만이 붙여주는 수식어는 점차 결을 달리했다. 귀염성 없는 남자친구, 건방진 녀석, 떼쓰는 고집불통, 농구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 태웅은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대만이 폭력처럼 쏟아낸 말은 모두 맞았고, 대만 주변의 남자들은 매력적이었다.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고도 태웅은 아직도 대만에게서 마음을 떼어놓지 못했다. 어서 밤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오늘 밤, 내일 밤, 수 많은 밤이 지나고 지나 어른이 되기를. 마음도 몸도 성숙해져서 대만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기를.

"그날 밤에 나를 찾아온 사람은 선배였어요."

아직도 태웅은 코끝을 찌르는 진한 술 냄새와 어깨를 짓누르는 대만의 작은 머리통의 무게를 생생히 기억했다. 인터하이가 시작될 초여름, 언제나처럼 대만은 급작스럽게 태웅을 찾아왔다. 

"선배를 참고 있던 나를 제멋대로 껴안고."

소음조차 가라앉은 새벽, 구름이 자욱이 깔린 밤하늘. 점멸하는 가로등 조명 아래 무뚝뚝하고 어리숙한 서태웅과 위태롭고 치졸한 정대만. 

"속삭이고,"

"입맞추고,"

"재촉하고,"

"애원하고,"

"떠났어요."

문득 깬 새벽, 차가운 옆자리를 쓰다듬으며 그대로 태웅은 아침이슬에 젖어 들었다. 

"나는 그 기억으로 살아가야 했어요. 그런데, 실상은 다섯 명 중 하나였네요."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 시간은 누군가의 부재에 상관없이 속절없이 흘렀다. 삶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고난과 감정도 시간과 같이 흘러갔다. 많은 것이 흐려졌고,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중요했던 것이 중요하지 않아졌고, 하찮았던 것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굳건히 태웅의 마음 한편을 지키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대만과의 기억이었다. 태웅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대만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과거에 끝난 인연이라지만, 사랑하는 이의 남자들을 만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라도 괜찮아요."

질투한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태웅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대만 주변의 사람들을 질투했었고, 자신을 떠난 대만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는 힘든 시기에 찾아 와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가까웠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무릎은 어때요."

"괜찮아."

잠시간의 침묵이 둘 사이를 메꾸었다. 태웅은 자연스럽게 제 머리카락으로 향하는 손을 애써 멈추었다. 어린 날의 버릇을 대만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태웅 또한 치열한 삶을 버틴 자였다. 농구선수로써의 전성기도 떠나보낸 어엿한 어른이었다.

"여기서 계속 지냈어요?"

"네가 친부라고 생각해?"

뒷골목 시절을 거쳤음에도 대만에게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티가 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은 쉬이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라커룸을 열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화장품, 구겨진 속옷은 누구나 같았으나 브랜드는 확연히 달랐다. 태웅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1학년 중 누군가가 대만선배 좋은 거 쓰네요, 란 말에 엄마가 그냥 준 건데, 라며 무심하게 답하던 대만을. 

대만은 충분히 좋은 병원에 갈 수 있었다. 훌륭한 의사가 집도하고, 완벽한 시설에서 재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무릎수술이던, 낙태수술던 말이다. 대만은 농구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물음은 태웅에게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 왜 정대만은 농구를 포기하고 잠적했는가. 

"농구 좋아해요?"

태웅은 물음으로 대만의 물음을 무시했고,

"나 혼자서도 잘 키웠어."

이에 화답하듯이 대만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태웅은 다시 곱씹었다. 왜 정대만은 농구를 포기하고 잠적했는가.

"아이가 생겼는데, 낙태는 못 했겠죠. 아니면 낙태할 수 없을 지경에서야 알아차렸던가요. 선배 좀 둔하니까."

"생물학적 친부가 누군지 궁금했던 시절은 지났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정말 누가 친부인지 모르거나 친부가 미성년자였던 거죠?"

대화의 방향은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내용은 사선으로 기울어져 서로를 가로질렀다. 그럼에도 태웅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대만의 눈동자는 올곧았다. 가슴에 비수가 박혀있음에도 대만은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그저 태웅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무릎 부상 재발, 의사가 말한 부정적인 전망. 선배는 더 농구 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을 거예요. 그런데 쉬이 포기는 못하겠고. 다시 도전하자니 실패할까 봐 두렵고. 그런데 마침 임신이라는 새로운 핑계가 생겼잖아요. 선배는 자신을 속인거예요. 확률이 미약한 재도약 대신, 임신과 육아를 선택해 스스로를 합리화한 거죠. 그런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도망친 거고."

태웅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닫힐 즈음에야, 대만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아도, 틀려도 상관없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면 아직 농구 좋아하는 거잖아요. 농구를 진짜 그만하고 싶어서 그만둔 건 아니잖아요."

농구공은 바람이 빠져 물렁거렸으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웅은 상자 안에서 농구공을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는 태웅의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 

"계속 원온원 상대 부탁드려요."

고등학생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태웅의 심장은 경기가 끝난 직후처럼 강하게 뛰었다. 작은 창고가 자기 심장 소리로 꽉 찬 듯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선배가 농구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일그러진 대만의 표정은 네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고등학교 후배인 네가 뭐라고, 어렸을 적 잠깐 만났던 네가 뭐라고 자신을 휘저어 놓냐고 소리치는 듯했다. 태웅은 대만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었다. 무슨 선택을 했던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딱 하나, 대만이 농구를 계속 좋아하기를 원했다.

대만이 계속 농구를 좋아한다면,

"그러면 아직 나를 좋아할 수 있는 거잖아요."

너는 농구의 화신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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