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셋, 둘, 하나

명헌태섭

00 by 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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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의 손은 따뜻한 편이었다. 여름 끝무렵 바다 근처에서 나고자란 사람다웠다. 밀려드는 바다의 파도가 종아리를 적시게 두고 모래 속에 발목까지 깊이 묻고 있으면, 따뜻하다가도 서늘한 감각에 자연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태섭이 몸서리를 쳤다. 으으, 하고 양 팔꿈치를 감싸서는 몇 번쯤 스스로 문지르며 발을 뺐다. 아무래도 물밑은 가만히 있기에는 견디기 어렵도록 차가운 편이었고, 그건 계절이 여름이어도 똑같은 이야기였다. 태섭이 숨을 깊게 마셨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 젖은 모래 위에는 깊은 뒤꿈치 자국이 났다. 뒤를 돌아보고 걷는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그는 한가하고 느긋한 태도로 오가는 파도를 흉내내듯이 몇 번을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물 속으로 전진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뒷짐을 지고 파도와 장난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자니 재미는 있다가도 없었고, 손가락에 걸친 신발 한 쌍만 등 뒤의 허리께에서 달랑거렸다. 귀찮은 신발과 그 안에 쑤셔넣은 양말 뭉치를 바닷물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에 대충 던져 놓은 태섭이 무릎께의 반바지를 추켜올리며 물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물높이가 높아질 수록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허벅지가 물살을 가르고 이제 허리께까지 축축하게 젖었을 때, 깊은 곳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간 태섭이 코를 쥐고 등을 웅크렸다. 바닷속을 딛고 섰던 발이 떴고 머리꼭지까지 깊이 잠겼다. 늘 하던 것처럼 눈을 뜰 필요도 없었다. 바닷속을 보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사방이 탁 트이고 제멋대로 흐르는, 바람이 아닌 것으로 꽉 들어차서 그의 헛헛하고 오롯한 몸 하나를 완벽히 고립시키고 가두는 순간이 필요했다. 시간마저도 정지한 것 같은 물속은 발만 담갔을 때보다 더 차가웠다. 등줄기가 짜릿하게 느껴졌다. 태섭은 숨을 꾹 참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물, 서른. 마흔을 넘고 순조롭게 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아?”

육십은 채우고 일어날 작정이었던 태섭의 몸이 급하게 끌어올려졌다. 물속에는 소리가 닿지 않아서 큰 손이 그의 가슴팍을 끌어안아 들어올릴 때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얼굴 위로 빛이 드리웠다. 눈앞이 밝아졌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입술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면 물속에서 쪼그라들어 있던 폐에 갑자기 공기가 채워져 기침이 여러 번 났다. 오랫동안 콜록댄 태섭이 간신히 눈을 떴다. 짠물이 눈꺼풀 사이로 들어가 따끔거렸다.

“누구, 아니, 왜…….”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푹 젖어 내려온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뚝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 보여 당황한 태섭이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말하려던 것도 잊고 엥? 하고 말끝을 높였다. 어째 몸이 붙들린 모양새가 익숙하다 했더니, 인터하이의 두 번째 경기 중에 당했던 인텐셔널 파울과 구도가 아주 똑 닮아 있었다.

“송태섭?”

“……뭐야. 산왕 4번? 그쪽이 여기 왜 있는데?”

“그건 내가 물을 말 같은데. 자기 발로 물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죽을 작정이기라도 했나.”

“일단 이거 놔 봐요.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보시죠.”

“깊은데. 빠지겠어.”

“여기 안 깊다니까요. 내가 아는데.”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서면 물높이는 높아 봐야 명치 즈음이었다. 손아귀 힘으로 명헌의 팔을 벗어난 태섭이 그렇지 않냐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비슷한 꼴로 젖은 명헌이 바짝 깎은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나지막이 뿅, 했다. 파도가 천천히 치면서 몸 위를 간지럽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축축해져서 신발과 양말만 빼고 장마에 우산 없이 나갔다 온 생쥐 꼴이 된 태섭이 지상으로 걸어올라와서는 상의를 모아 쥐고 물을 쭉 짜냈다. 발바닥에 모래알이 촘촘히 붙었고, 등이며 가슴 위로 몇 번이고 달라붙어 떼어내는 옷 사이로 바람이 통과해 여름답지 않게 시원했다. 다시 눈 위로 늘어지는 머리를 넘긴 태섭이 허리 밑으로 전부 젖어버린 명헌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골치가 아프고, 난처하고,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굳이 이렇게 젖을 필요가 없었는데.

“아니, 뭐, 내가 죽기라도 한대요? 그래서 그렇게 들어와서 잡은 거라고?”

“뭔가 잠수 중인 것 같긴 했는데 올라오지도 않고, 축 늘어져 있길래. 위험한 일인가 싶어서, 뿅.”

“고맙기야 한데 나 수영 잘 하거든요…….”

“여기가 무슨 네 집이라도 되나.”

“몰랐겠구나. 나 여기가 고향이에요. 오키나와.”

명헌은 놀란 듯이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했다는 티가 훤히 나서 태섭이 희미하게 웃었다. 몰랐겠지. 북산고 농구부원들도 아는 사람이 잘 없는데 겨우 같은 코트에서 공 한 번 같이 튀겨 본 저 멀리의 선수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물기가 남은 손을 바지춤에 대고 마저 툭툭 털어내면서 태섭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괜한 걱정이었다고요. 나는 숨도 잘 참고, 아까는 또 그러고 있고 싶어서 한 거니까. …그래도 그쪽, 젖게 된 건 미안해요. 내 책임이 맞는 것 같은데. 여벌 옷은 있어요?”

“없진 않아, 뿅. 숙소도 있고.”

“여행?”

“방학 중이라, 뿅.”

“학교에서 순순히 보내 줬나 모르겠네.”

명헌이 애매하게 눈썹을 구겼다. 그렇지만 그 말에 악의가 없는 것도 알아 그냥 어깨나 잠깐 으쓱이고 말았다. 그의 속을 읽은 것처럼, 태섭이 나쁜 뜻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습기 먹은 두터운 바람이 몸을 자꾸 불렸다. 항번처럼 펄럭이는 옷자락을 눌러 가라앉히면서, 태섭은 저쪽에 던져 두었던 신발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거라도 마른 채로 건졌는데 저 사람은 신발도 젖었겠네, 하면서. 그래도 태섭 자신에 비해 명헌은 상체가 덜 젖었으니 비슷한 셈이라고 치자고 생각했다.

“볼 거 없을 텐데, 왜 여기로 왔어요?”

“그냥. 사람 없는 데서 좀 쉬려고, 뿅. 아키타는 산이 많으니까.”

그렇구나, 하고 태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발을 구겨 신은 태섭이 자기는 보도블록 위에 올라서고, 명헌은 모래사장에 세워서는 긴 해안을 걸었다. 다 털어내지 못한 모래가 자꾸 맴돌아 태섭은 걷다 말고 자꾸 앞코로 바닥을 찼다. 명헌의 젖은 발은 아주 모래로 이루어진 신발을 신은 모양이었다. 낯선 감촉에 기분이 요상한 듯 그의 얼굴이 우스웠다. 소금기를 먹은 옷이 금세 빳빳하게 마르고 있었다. 버석거리기까지 하는 옷을 성가신 듯 털어낸 태섭이 멈췄다. 하나 펼친 손가락으로 골목 안쪽의 이층짜리 주택의 갈색 지붕을 가리키며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저기.”

“공교롭네. 나도 저긴데, 뿅.”

발꿈치를 들고 태섭이 가리킨 저 멀리를 바라본 명헌이 그에게로 눈을 굴렸다. 혹시 필요하다면 찾아오기라도 하라고 말해줄 작정이었는데, 숙소가 겹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태섭이 몸을 뒤로 젖혔다. 좁아서 이불 한 채나 겨우 펴고 접는 여관 이층 가장 안쪽, 태섭이 쓰는 방의 옆은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 있었다. 복도로 태섭을 안내하던 늙은 주인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 진짜요? 어제는 나만 쓴다고 했는데?”

“내가 오늘 와서. 너는 아침부터 나와 있느라 못 봤나 보지, 뿅.”

“이게 이렇게 겹치나…….”

“사흘 있을 거다, 뿅. 너는?”

“나는 나흘, 이었는데 어제 왔으니까 갈 때도 같이 가겠네요. 꼭 약속한 것 같게.”

“그러게.”

“일단 가요. 찝찝해 죽겠어. 갈아입을 옷 없으면 빌려줄 의향도 충분히 있는데 안 맞겠지.”

태섭은 앞서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바다 근처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르막이 조금 있는 편이었는데, 차근차근 올라가다 보면 뒤에서 엇박으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확했다. 걸어가는 자리마다 물자국이 동그랗게 났다. 태섭은 다리 사이로 그것만 넘겨다 보았다. 시야 끄트머리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까 보니 정말로 옆방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융통할 수 있는 돈으로는 짐을 전부 몰아넣어 싼 짐가방을 구석에 놓고 자기 몸만 누일 수 있는 곳으로 숙소를 찾는 게 전부였고,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태섭은 자기가 그랬듯이 명헌도, 기차에 몸을 실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져온 거라고는 등에 묵직하게 매달리는 백팩 하나가 전부였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알아맞혔다. 아까 물에 깊이 잠수했었는데, 다행히 열쇠는 주머니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열쇠고리도 달려 있지 않아 잃어버리면 찾을 방법이 없었다.

“씻고 좀 있다가 농구 한판 할래요? 여기는 야외에도 농구 코트가 있어서. 공이야 찾으면 되고.”

태섭이 방문 손잡이를 쥔 채로 물었다. 옆방 앞에서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고 있던 명헌이 고개를 들고 태섭을 물끄러미 보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 * *

 

 

역시 산왕의 주장, 국내 최고의 가드다웠다. 함께 겨루던 팀의 수많은 가드들을 절망에 빠트렸다던 단단한 수비는 인터하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더 침착해지면 침착해졌지.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공식적으로 은퇴해 농구공을 손에서 얼마쯤 놓고 지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빈틈을 감추고 몸을 숙인 명헌의 가슴팍을 밀어낸 태섭이 짜증스럽게 눈썹을 씰룩거렸다. 농구공이 손안에서 재빠르게 돌았다. 다리 사이를 엇갈려 공을 보내면서 손을 피하고 막힌 풋워크의 진로를 다른 곳으로 틀었다.

명헌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태섭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는 어디로 움직이건 전부 막아줄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 스스로를 향한 신뢰가 엿보여 태섭은 저 표정을 꼭 깨트려 주리라 마음먹었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도록 몸을 낮추고 명헌의 등 너머로 움직일 때는 자칫하면 패스를 강탈당할 뻔 했다. 겨우 공을 앞으로 가져와 손을 피했고, 명헌의 손끝은 아쉽게 공의 표면만 긁고 지나갔다.

“빨라졌네, 뿅.”

“당연하죠. 누구 덕분에, 연습 더 필요한 것 같아서.”

농구공을 노리던 명헌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태섭은 그의 표정을 아직은 전부 다 해독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명확히 알 것 같았다. 그는 즐거워 하고 있다. 뿌듯하고, 만족스럽고, 서슴없이 농구공을 빼앗고 뺏기며 손을 섞는 지금이 달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어느 누구 못지않게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명헌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본 것 같아 태섭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슛 정확도는 높여야 되겠다, 뿅.”

“알고 있어요. 아, 힘들다…….”

태섭이 코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전반이라고 치자면, 7 대 3. 간신히 잡은 슛 찬스에서 많이 튕겨나갔다. 그리고 명헌은 여전히 뚫리지 않는 벽이었다. 그의 농구 실력은 세월이 얼마나 흐른들 평생 녹슬지 않을 것만 같아서, 태섭은 눈을 찡그리며 가 닿을 주인 없는 짜증을 냈다. 저걸 얼른 뛰어넘어야 할 텐데. 그런 못마땅함으로 가득한 속내를 알아챈 것처럼 명헌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코트 바닥에 머리를 대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기지도 않는 태섭이 흘러가는 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농구, 계속 해요?”

“응. 대학에 가서도 하기로 했어. 그러지 않으면 산왕에 갈 이유도 없었고, 뿅.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그렇지만 하고 싶어요. 농구공을 쥐고 있으면 긴장이 되긴 해도 마음이 편하거든.”

“긴장, 뿅?”

태섭은 대답 대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볕에 잘 그슬린 얼굴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명헌을 돌아보았다. 태섭은 뭔가 잘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또 말을 고르듯이 혀를 빼물었다가, 눈썹을 반대로 일그러트리기도 했다가 하느라 바빴다. 명헌은 그걸 그대로 기다렸다. 바람이 가볍게 불었고, 입을 조금 벌리고 있으면 거기서는 바다의 짠맛이 났다. 눈을 뜨지 않아도 파도가 보였다.

“나는 겁이 많아요.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고, 손을 떨고, 헛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두려운 일에 사람들은 다 겁을 내는데.”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반응했으나 사실은 그렇게 민감하게 굴 일이 아니라는 걸, 명헌은 알았다. 태섭의 신체가 정신의 부담을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그는 말을 얹는 대신 태섭더러 더 말해 보라는 것처럼 턱을 치켰다. 태섭이 겨우 결심하고 꺼내기 시작한 알맹이가 강하고 화려한 껍데기 속으로 다시 숨어 버리지 않게, 자기 손으로 열고 그것들을 똑바로 내보이게.

“안 그런 것처럼 생겼어, 뿅. 우리가 함께 경기할 때도 너는 멀쩡했고. 아닌가?”

“아니거든요. 긴장 많이 했어요. 전날 숙소에서 산왕의 경기 테이프를 보면서……. 작년의 주전이 그때도 셋이나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당신은 영영 모를 거야.”

“나랑 경기하기 전에도 헛구역질 했어? 겁 먹어서?”

태섭은 잠깐 대답을 고민하는 것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아직 거칠기만 한 숨을 돌렸다. 그러다 어깨에서 힘을 전부 뺀 채로 앉아서는 팔을 세운 무릎에 걸쳤다. 바닥을 짚고 일어선 태섭이 멀리 굴러간 농구공을 주워 와서는 명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태섭에게 일으켜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명헌이 공을 쥐었다. 침착하고 낮은 자세의 드리블은 교본에 실려도 충분할 정도로 안정적이었고, 또 언제든지 허점이 보이면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태섭은 게걸음으로 움직이며 그가 삼 점 슛을 넣을 수 있는 선수였던가를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산왕과 했던 경기에서 그는 주로 공을 돌리는 편이었으나 득점이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라는 게 방금 짧게 한 원 온 원에서도 보여 태섭의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났다. 꼭 실전 같았다. 일 점 차이가 모든 것을 가르는, 소리가 너무 잘 울리는 그 실내 경기장에 있는 것처럼. 태섭은 신발 밑창을 브레이크 삼아 끽 멈추고는 뒤로 빠졌다. 삼 점 라인은 지났다. 그는 명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했겠어요? 농구로 이름난 그 산왕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이었고 2학년 때부터 주장인,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신화를 달성해 오고 있다는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

게다가 경기 중에는 지쳐 나가 떨어지지도 않지, 정우성 걔랑 같이 끈덕지게 존 프레스나 해 오고 있지. 태섭은 투덜대면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공을 따라갔다. 약간의 페이크에도 명헌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와 자신의 바꿀 수 없는 차이에서 오는 높낮이로 승부하는 것이 좋을 거였다. 태섭은 무릎을 더 구부리고 상체를 낮췄다. 명헌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그가 스스럼없이 구는 상대에 속하게 된 것 같아 묘하게 흡족해진 얼굴을 한 태섭이 빠른 스텝을 밟아 가며 옆을 막았다.

뒷걸음질로 떠밀린 명헌이 태섭과 충돌했다. 밀친 몸은 흔들리지 않았고, 태섭 역시 그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덩치로 승부하면 아무래도 밀린다. 신장 작은 선수가 아무리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 많다 해도 평균 신장이 백구십 센티미터쯤 되는 농구 코트 위에서 백육십 대 키는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부족한 신장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해내야 한다. 신장이 뛰어나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 없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원망할 거리는 아니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부족한 걸 부족하다고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 틈은 최대한 벌려 가면서.

태섭이 기적적인 타이밍에 공을 빼앗았다. 다시 없을 기회라 태섭은 긴장으로 흔들리는 무릎을 다잡을 새도 없이 일단 반대편으로 뛰었다. 두 발이 동시에 코트를 밟고 떴고, 단단히 움켜쥔 공은 허공으로 솟았다.

“산왕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넘고 싶던 벽이었어요.”

내 형도 그랬고. 다만 마지막 말은 삼켰다. 밀어올린 공은 림을 맞고 떨어져 나왔지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서 그런 말을 하는 태섭의 얼굴은 후련함으로 가득했다. 고작 한 번 이겼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명헌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거라기엔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너무 많은 것들이 고여 있었다. 명헌은 그때 태섭이 정말로 많은 것들을 떨치고 한층 컸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눈동자 위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갖고 싶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열망, 뜨거운 긍지를. 그런 마음을 가진 소년을.

날이 더웠다. 명헌은 이 기분이 여름철 해안가의 더위 때문인가 생각했다. 무릎을 짚은 채로 이마께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명헌이 길게 숨을 내쉬면서 달라붙은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이렇게 습하고 끈덕진 더위를 싫어하지 않는 태섭이 보였다. 이렇게 여름이 어울리는 뜨거운 소년이, 추운 아키타에 오면 어떤 얼굴을 할까 궁금했다. 그러나 또 명헌은 딛고 선 땅이 남쪽의 흰 모래 위거나, 북쪽의 설원이거나 하는 것 따위는 전혀 관계 없이 태섭은 어디에 있건 늘 체온 이상의 온도로 뜨거울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있기만 한다면 모두 조용하고, 깊고, 그러나 파헤쳐 보면 뜨겁게 끓어오를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키타와 오키나와는 그렇게 다른 것도 없었다.

명헌은 코트 위에 주저앉고 손을 등 뒤에 짚어 몸을 기울였다. 머리 위에서 희고 부드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사람이 시끄럽게 오가지 않아 조용했고, 잊을만 하면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평화로운 순간은 농구부 훈련을 째고 나와 혼자 들판에 누웠을 때와 상당히 비슷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명헌이 얼굴로 햇빛을 받았다. 뺨이 부드럽게 달구어졌다. 속눈썹에 햇살이 걸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꼭 아키타 같다, 뿅.”

“여기가? 어떤 점이요?”

“깊은 곳이야.”

네가 있어서. 대답은 짧았고 어느 정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단어인데다가 심지어 명헌은 가장 중요한 말을 잘라먹었다. 그럼에도 태섭은 거기 숨은 의미의 적어도 반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 이해한 건지 태섭이 눈동자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거기도 좀 재미없는 곳이었겠네요. 심심하고, 할 것도 없고. 그런 데서 어떻게 지냈대.”

“네가 여기서 지내던 것처럼, 뿅.”

태섭이 공을 대충 굴러가지 않게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신발 밑창이 얇아 걸을 때마다 타박타박 소리가 났다. 동그란 눈과 부슬거리는 머리카락 따위를 쳐다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나쁘지는 않겠지. 바다에 사는 건.”

명헌의 눈동자가 깊었다. 고요하고, 무섭지 않고, 따듯할걸. 종잡을 수 없는 눈이 그런 말을 했다. 태섭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아키타처럼 멀리 있는 이곳 오키나와에서 사는 것도, 혹은 알 수 없는 저 너머 외따로 떨어진 섬에 혼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는 것도. 따뜻하고, 그립고, 가끔 잔잔한 파도 소리에는 귀가 간지러울 거였다. 태섭에게 그 말은 아주 가볍고 묘한 위안이 됐다. 그는 여태 저 물 속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키타에 가면 그쪽이 있어요?”

“아키타?”

“거기도 오키나와처럼 재미없는 곳이라며.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직접 겪어 보게요.”

“세상과 단절되고 싶다면 추천하는 편, 뿅. 할 게 없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 말고는.”

“그래서 산왕이 농구를 그렇게 잘 하나. 고등학생들 산속에 가둬 놓고 농구공만 쥐여 줘서.”

그럴지도. 명헌이 어깨를 으쓱이고 적당히 긍정했다. 태섭이 크게 웃었다. 그런 면에서는 바다의 수영을 즐기러 오는 사람이 많은 카나가와, 혹은 오키나와가 낫나. 그렇지만 새벽에 구보를 뛰는 오솔길이 아름답다길래, 그 풍경은 정말로 궁금해졌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철 아직은 어두울 시간대에 나가 학교로 돌아올 때쯤이면 환하게 밝아져 있는 낮은 같이 산책을 하기에도 좋다고 했다. 늘상 바다 가까이에서나 살았던 태섭은 흘러가는 말로 아키타에 가면 나를 맞으러 나오라고 명헌과 약속했다. 가끔 그렇게 평생 살았던 곳과 정 반대로 다른 곳에도 가 보면 분명 좋겠지, 싶었다.

 

 

“……그, 진짜로 들어갈 거예요?”

“뿅.”

대답은 빨랐고 태섭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요. 가자고. 흐트러진 머리를 북북 긁다 못해 정수리 쪽으로 쭉 붙여 넘긴 태섭이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명헌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갑자기 왜요?”

“그냥, 궁금해서. 바닷속이 어떤가 보려고. 네가 그러고 있었던 이유도, 뿅.”

“별생각 없이 한 건데도? 짠물에서 눈 뜨는 건 오키나와 사는 사람들이나 겨우 하는 건데도?”

“그래도, 뿅.”

약간의 과장을 섞어 가며 위협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에 태섭이 항복을 선언했다.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기껏 갈아입은 몇 벌 없는 옷을 다시 바다에 적시려는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명헌은 늘 그랬듯 무심하고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태섭의 뒤를 따라 걸었다. 복잡한 생각은 없었다. 태섭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일지 생각해 보지만 그러기로 결정한 이유의 출처는 명헌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에 지금 고민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를 낱낱이 알게 되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문득 미약한 불안이 솟았다. 전부를 다 파헤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가장 안에 있는 깨끗하지 않은 것까지 알 필요가 없는 것이 많을 텐데. 그럼에도 명헌은 궁금했다. 작고, 단단하고, 그렇지만 스스로 벌린 안쪽은 부드러운 소년을 알고 싶었다. 농구를 사랑하는 이유, 단단하게 겉을 포장한 이유, 생일이 언제인지, 어떤 농구 선수를 좋아하는지, 음악은 잘 듣는지, 추위는 어떻게 타는지. 그리고 태섭이 알 리가 없는 오키나와에서 태어난 이유 같은 것도. 태섭이 끝까지 안 내키는 얼굴로 보도블록 끝자락에 서서 명헌에게 고갯짓했다. 모래가 발 밑에서 사박거렸다.

마르려면 한참 걸리는 옷을 또 젖게 하기는 싫었는지 태섭이 티셔츠를 벗어던질까 말까 고민했다. 그 사이에 신발만 대충 한쪽에 벗어둔 명헌이 먼저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주저함도 없이, 단숨에 성큼성큼 걸어 허벅지 위쪽까지 물이 찼다. 몸에 잘 맞는 티셔츠 밑단이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보던 태섭이 에라 모르겠다 싶은 얼굴로 신발을 벗어둔 채 따라 들어갔다. 첨벙첨벙 걸으면 맨살이 드러난 종아리에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었다. 더위가 식어 갔다.

“들어와.”

깊은 곳에 있는 명헌이 태섭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에게 명치까지 물이 찼다. 태섭이 가서 서면 목 밑에서 찰랑거릴 것이다. 분명 바다 근처에서 자라기를, 아무리 그날의 파도가 좋고 오늘따라 몸이 가벼워도 가슴 높이까지만 물이 차면 그대로 돌아오라고 단단히 배웠는데. 태섭은 위험할 거라고 고개를 저으려다가,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잡아 줘요. 나한테는 더 깊으니까.”

뿅. 명헌이 태섭의 팔뚝을 쥐었다. 어깨를 붙들고, 몸이 쓸려가지 않게 허리께를 지지했다. 태섭이 명헌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야 치솟는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멋대로 바다로 다이빙을 하고 숨을 참았다지만 다른 사람이 그 의식에 발을 들이는 건 조금 다른 문제가 아닐까 했다. 파도가 가슴팍을 치면 태섭이 명헌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깊게 생각하지 마. 하고 싶다는 게 이유의 전부, 뿅.”

태섭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숨을 오래 참기 위해서는 폐 저 밑바닥에 고여 있던 숨까지 모조리 다 내뱉은 후에 새로 공기를 채워야 했다. 따라하라는 듯이 팔뚝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건드리자 명헌이 눈치 좋게 그를 따라 오래 호흡했다. 숨을 전부 끌어내리고, 몸을 쥐어짠 것처럼 공기를 빼냈다. 이제 들어갈 때가 됐다.

“숫자 셀게요.”

태섭이 말했다. 

셋, 둘, 하나. 

순식간에 머리 위까지 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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