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단편들

[슬램덩크] 해수관음

K패치된 우성명헌 이야기입니다

3RD by 자엉

이것도 재발행 글이에요…! 많은 분들이 잘 읽었다고, 감사하게도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아끼는 글입니다

주의: K패치된 명헌의 가족사가 언급됩니다

BGM: 우리에게 아픔이 필요한 이유 by MOVNING

 

 

강원도 설악의 정기를 받으며 고교 생활을 보낸 이명헌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20대손으로 장자였다. 족보상으로는 그랬고, 대한민국 주민등록초본에는 그냥 셋째로 기록되었다. 딸 둘, 아들 하나. 명절만 되면 셋째에 아들이 태어나서 다행이란 소리를 듣는.

명헌의 아버지는 방계이기는 하지만 왕실 대군의 후손이며 양반 집안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때문에 그의 대를 이을 명헌을 막내처럼 예뻐하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지닌 장자이자 차기 가장으로 대우했다. 가업으로 이어갈 만 한 건 한의원 하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의대에 진학한 명헌의 아버지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개천에 용 난 팔자, 자수성가한 지역의 유지였다. 그런데 공부 머리는 그리도 예뻐하는 장남에게 대물림되지 않았다. 끌려가다시피 다녀온 군대에서 말뚝 박으라 그리도 꼬심을 당하였다니 하나뿐인 아들은 거기서 운동부 기질을 물려받은 듯 했다.

운동 센스가 좋았던 명헌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농구에 홀딱 빠졌으며, 후에도 농구로 먹고 살 꿈을 꿨다. 이에 영특하기로 소문났던 차녀―명헌의 작은 누나가 동생을 대신해 총대를 짊어졌다. 한의원은 제가 물려받겠습니다. 족보는 남녀가 유별했지만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성별이 중요치 않다는 연설이 아버지의 직업정신을 일깨운 모양이었다. 작은 누나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 당당히 서울의 이름 난 한의대에 진학했다. 합격통지를 받은 날 명헌의 아버지는 한의원을 들린 환자들과 직원들에게 떡을 돌렸다.

명헌은 진심으로 작은 누나를 축하해주었다. 아버지가 쏘아대는 스포트라이트가 드디어 작은 누나에게로 방향이 틀어진 경사로운 날이었다. 양순하지만 강단 있는 큰 누나나 혼자 공놀이하는 것을 즐겼던 막내에 비해 이씨 집안의 둘째는 칭찬에 목말라했다. 상경한 작은 누나가 대학교 첫 방학을 맞이해 본가에 내려왔을 때 동네는 금의환향하는 과제급제 장원을 반기듯 했고, 작은 누나는 쏟아지는 관심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훗날 명헌의 가족 중에서 정우성과 가장 빨리 친해진 사람도 작은 누나였다. 칭찬을 들을수록 우쭐해지지만 자만하지 않고 바로 서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는가 보았다.

아무튼 명헌은 대학이나 프로 선수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속초의 산왕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반년이 지나지 않아 주전이 되었지만, 집에는 절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헌의 농구 소식은 늘 과거형이었다. 주전이 되었어. 여름 대회에서 우승했어. 주장이 되었어. 등등. 그래도 가족들은 막내의 경기를 보기 위해 가끔, 타이밍이 맞으면 경기장을 찾았다. 아버지야 한의원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는 어려웠으니 누나들과 어머니가 명헌을 위한 특별 응원단이 되었다. 기실 산왕공고는 부원들로 이루어진 응원단이 있었지만, 가족이 건네는 격려는 색다른 법이었다. 명헌의 팀메이트들도 신기해했다. 저기 봐, 이명헌이 여자다. 어, 여자가 둘인데. 저거 명헌이네 누나들이야, 말조심해.

이씨 집안의 여자들은 차치하고, ‘의사 선생님’인 아버지가 아들의 농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명헌이 고교를 졸업하고 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명헌이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그해 국가대표 명단에는 명헌 대신 대학 선배가 들어갔다). 미국에서 프로 농구 선수가 되어 그냥 스포츠뉴스가 아니라 방송3사 9시 뉴스에 나온 농구선수 정우성이 아들의 고교 후배임을 건너들으셨던 거다.

대한민국은 정말 좁았다. 세 다리만 건너면 대통령도 아는 사이라더니. 가족들은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명헌은 ‘걔가 내 남친이기도 한데요’라고 폭탄을 투하하는 대신 배를 우적우적 씹었다. 올해 과일이 달다더니 정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명헌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서울 소지의 유명 사립대에 입학한 명헌은 서울에 터를 잡으려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는 해산물을 엄청 좋아했고, 짠 바닷바람이 익숙한 속초 사람이었다. 그래도 고향 땅은 안 되었다. 건방지게 고백을 갈기고 바다 너머로 튀어버린 정우성과 어떻게든 연애 비슷한 것을 이어가려면 사람이 넘쳐나는 서울에 있어야 했다. 나무는 숲에 숨기라는 격언도 있잖은가. 명헌이 보기로 동성연애는 사람 속에 숨겨야 하는 법이었다.

대학 졸업하면 우리 구단으로 와라, 지장 찍으면 네 목에 금메달 걸게 해줄게, 군대 안 가게 해줄게, 살살 꼬시는 선배들이 많아졌을 무렵 명헌은 모종의 사건을 겪었다. 명헌은 무교에 가까웠지만, 어머니가 낙산사 다녀오고 태몽을 꾸셨다고 하여 힘들거나 황당해지면 부처님부터 찾는 편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낙산사의 거대한 해수관음상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그린 명헌은 결심했다.

이번 연말에는 누나들에게 먼저 얘기해야겠다.

 

 


 

고백은 정우성이 먼저 했다. 받아준 건 이명헌이었다.

우성과 명헌의 관계를 서행하는 자동차로 비유한다면, 엑셀은 우성이 밟았으나 차선을 변경하고 경로를 탐색하는 건 명헌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사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우성은 세상에 ‘명헌이 형’ 하나 뿐인 듯이 굴었지만 명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 우성의 가족. 서로의 팀메이트. 감독. 코치. 팬들. 사람들의 숱한 시선, 시선들……. 그렇게 시작된 비밀 연애는 순조로웠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연애한다며 티를 낼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하여, 김포국제공항까지 차로 같이 가자는 정광철 씨의 제안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아들이 모처럼 귀국하면 가족끼리 모이는 게 당연한데 우성이 따르는 친한 선배라고 챙겨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픽업 장소는 명헌이 자취하는 신촌 일대였다. 이마저도 아랫사람을 배려해주는 마음씨가 느껴졌다. 꾸벅 인사하고 조수석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량이 한강대교를 건넜다.

그리고 문제의 발언이 터졌다.

“그, 명헌 학생.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요.”

“네.”

“학생 혹시, 우성이랑 교제하나?”

묻는 뉘앙스가 쎄했다. 명헌은 앞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대꾸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기는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 아들하고 사귀는가, 해서.”

또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보단 시속 95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게 적절할 듯 했다. 명헌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우성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걔야 나한테 말을 많이 하지. 하지만 이건 아빠로서의 감이랄까.”

정광철이 잡고 있던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이제 와서 우성이에게 훈계하며 어른처럼 굴기는 싫더라고. 그래서 명헌 학생에게도 말해둬야겠다 싶었지.”

어떤 거를요? 목구멍까지 질문이 치달았지만, 명헌은 참아냈다.

“찬성이나 반대 같은 건 안 해요. 이게 찬반으로 의견을 들을 문제는 아니잖아? 우성이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힘든 일이 있어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 말을 얹으면 되고. 그러니까 명헌 학생도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명헌은 감격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저 동요했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 한 꺼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이후에는 무슨 정신으로 남자친구를 맞이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선배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말을 핑계로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다가, 학교에 일이 생겼다는 비겁한 핑계를 남기고 정씨 사람들에게서 도망쳤다(딱히 비밀리에 사귀는 게 아니게 된 남자친구에게는 나중에 제대로 사과했다). 명헌은 눈에 띄게 서운해 하던 우성의 얼굴을 잊기 위해 고향의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는 해수관음상을 떠올렸다. 고요하게 우뚝 선 관세음보살을 드센 풍파가 세차게 때렸다. 그의 가족들은 저들만큼 자비롭지 않을 것이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이씨 집안의 삼남매는 시댁을 따라 춘천에 신혼집을 차린 큰 누나의 집에 간만에 모였다. 삼남매의 계획은 이랬다. 며칠 느긋하게 보내고 둘째와 막내가 속초 본가로 이동한다. 첫째는 뭉그적거리는 남편의 멱살을 잡고 연말 즈음에나 움직일 예정이었다.

명헌의 계획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미 정씨 집에 전화를 해두었다. 짐도 대충 싸왔다. 누나들은 그게 본가로 가져가는 짐인 줄로 이해했다. 명헌은 춘천에서 서울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몇 시에 떠나는지 알고 있었다. 오후 열 시였다. 식사 시간에 말하면 체할까봐 적당히 소화가 다 되었을 시간대를 노렸다.

막내 동생의 고백을 들은 누나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더분한 매형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명헌은 속으로 삼십까지 헤아리다,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거실의 시계를 흘끔 봤다. 하프 타임 정도만 버텨볼까. 그 정도 시간이면 솔직히 뭐라 한 마디는 할 줄 알았다. 징그럽다거나, 더럽다거나.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느냐,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냐.

후반전으로 넘어갈 시간이 흘렀는데도 거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결국 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방 옷걸이에 걸어 둔 흰 토퍼를 도로 입었다. 대학교 로고가 박혀 촌스럽다고 작은 누나가 그렇게 구박했던 옷이었다. 거실로 나온 명헌은 구석에 밀어놓은 스포츠백을 짊어졌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큰 누나가 용돈을 털어 사 준 가방이었다.

“미안해.”

명헌은 정우성을 선택한 사실을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모처럼의 단란한 시간을 망친 것이 조금 그랬다.

작은 누나가 벌떡 일어났다. 울기 일보직전의 새빨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명헌은 저 똑똑한 혈육처럼 곧잘 울고 흥분하는 남자친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등을 돌렸다.

 

 


 

성인이 된 정우성과 이명헌의 만남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했다. 이명헌은 그게 꼭 견우와 직녀 같다고 생각했는데, 맡은 바를 소홀히 하여 벌을 받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얼추 비슷하기는 했다. 대학 시즌이 한창인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본다는 점도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해에 우성은 두 번이나 국내로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전에 한 번, 겨울에 잠깐 짬을 내 한 번. 일 년 늦게 태어난 녀석이 먼저 프로 선수가 되었는데도 명헌의 속내는 그저 그런 연애 문제로 시끄러웠었다.

정우성의 본가는 경기도 여주에 있었다. 웃어른이 편하게 대하라 해도 밤늦게 찾아가는 건 대단히 실례였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연휴에. 때문에, 명헌은 신촌 자취방에 머물고 날이 밝으면 움직이려 했다. 그걸 정광철이 한사코 만류했다. 늦게라도 좋으니 와서 대작 좀 해달란다. 일대일 농구를 같이 해 주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말도 따라붙었다. 예의범절을 깍듯하게 배우며 자란 명헌은 윗사람의 부탁을 냉정하게 자를 수 없었다. 명헌은 터미널 매표소에서 표를 원주행으로 바꿨다. 춘천에서는 여주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으니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갈아타야 했다.

공휴일 저녁의 버스는 한산하다 못해 휑했다. 온풍을 넉넉히 틀어 준 내부가 후덥지근했는데도 그랬다. 명헌은 생판 남의―남자친구도 ‘남’이긴 했다―집에서 황금 같은 연휴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다 아팠다. 심지어 우성의 아버지는 늦은 밤에 다니다 큰일 나면 안 된다고 여주종합터미널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육체적 고통에는 총량이 있다. 정신적인 충격도 마찬가지였다. 명헌은 살면서 누나들 눈에 눈물 뽑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오늘, 무뚝뚝해도 반항이란 걸 모르던 막내 동생은 사라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맴도는데도 어째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쯤 이씨 자매는 동생이 남고를 나오더니 이상한 물이 들었다며 한탄하고 있을 게 뻔했다―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속이 말이 아닐 터다. 작은 누나는 그렇다 치자. 큰 누나가 흐느끼고 있을 거라 상상하면 벌떡 일어나 병무청 현역모집과에 문의 전화를 넣고 싶어졌다.

그런 와중에 우성의 아버지가 베푸는 친절은 증여세 낼 돈도 없는데 일확천금을 물려받게 된 빈털터리의 심정을 느끼게 했다. 기쁘지만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댔다. 광철은 우성을 위해 그를 여주 본가로 납치, 아니, 소환한 게 아니었다.

농구선수 이명헌의 앞날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오지랖일까 싶었는데 어째 주변에 제대로 조언해주는 어른이 없는 것 같더라고. 일단 한 번 봐 봐요. 명헌 학생, 아니, 명헌에게 필요한 정보일거야.”

늦은 시각인지라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두툼한 출력물을 한 장, 또 한 장 넘기던 명헌의 눈에 반짝임이 돌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동차가 무심했다. 명헌은 국도의 양 옆 언덕에서 자동차, 봉분에서 기어오른 시체, 아무거나 우르르 쏟아져 진로를 방해해줬으면 싶었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다 해도 이 귀중한 자료는 그에게 남아있을 거다. 명헌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밤 열한시가 되어서야 늦은 술 파티가 벌어졌다. 우성의 어머니는 내일 한 사람이라도 멀쩡해야 공항에 아들을 데리러 간다며 자리를 피했다. 좋은 구단에 들어가려면 비교를 많이 해봐야 돼. 그 말과 함께, 정광철이 명헌 앞에 놓인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명헌은 소주나 맥주, 와인도 아니고 왜 위스키였을까, 궁금해 했었는데 나중에 우성이 고민을 해결해줬다. 그게 광철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을 거라 했다. 아들과 마주 앉아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정우성은 알쓰였다.

다음 날 아침 명헌은 생전 처음으로 ‘숙취 일대일’이라는 농구를 해 봤다. 개인 소유의 코트에서 뛴 것도 처음이었으나 뒷머리가 띵하게 울려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정광철은 나이 때문에, 명헌은 양주가 낯설어서.

우성의 어머니는 아침부터 농구 한 판 거하게 치른 남자들을 싣고 가는 내내 잔소리를 퍼부었다. 명헌은 깊이 반성하는 척 딴생각을 했다. 이런 집에서 자랐으니 그가 사랑하는 정우성이 된 거였더랬다.

 

 


 

전날 위스키 파티에 이어 여주 본가로 ‘모셔진’ 정우성을 위한 한우 디너파티가 이어졌다.

명헌은 남들보다 두 배의 식사량을 자랑하는 평범한 운동선수였으나 정우성은 그보다 두 배를 먹었다. 값비싼 한우라 눈치가 보인 것도 있지만, 명헌은 일주일 뒤에 떠날 남자친구를 배려해 잘 구워진 고기를 우성의 접시로 덜어주었다. 그러면 그의 접시에는 우성의 부모님이 알맞게 구워 건넨 고기가 쌓였다. 돌고 도는 회전고기가 몇 번 이어지자 명헌은 괜한 짓을 포기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실컷 배를 채우고서 명헌은 전날 홀로 잠을 청했던 우성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니 우성이 바싹 몸을 붙여 오른편에 앉았다. 익숙한 집에 배는 부르고, 손을 뻗으면 잡히는 가까운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우성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명헌의 얼굴 근육도 말랑하게 풀렸다. 명헌은 여긴 웬일이냐는 우성의 질문에 전날 올라왔는데 좋은 자료를 받은 데다 잘 대접받았다고, 적당히 얼버무린 이야기를 꺼냈다.

“몰랐어요? 광철이가 형 엄청 좋아하는데.”

고개를 돌린 명헌이 우성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 아빠, 아니, 아버지가. 근데 아빠라고도 불러본 적이 별로 없는데 아버지라고 해야 해요?”

“연습이라 생각하고 해. 어른이잖아용.”

한 살 위의 형이 내뱉는 ‘어른’은 마법의 단어였다. 홀딱 넘어간 우성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형이 산왕 1학년일 때부터 팬이었다고요. 국가대표 되면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거저먹을 거라고 맨날 그랬어요.”

“흠.”

“요즘 전화하면 미국 얘기랑 형 얘기밖에 안 했거든요. 형 대학에는 실업으로 간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형이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니까 자료를 엄청 긁어모으는 것 같았어요.”

종합하자면 정광철은 이명헌이 구단과 계약하여 프로 선수가 되길 희망한다는 소리였다.

미국에서 농구는 미식축구, 야구와 더불어 인기 종목이었으나 한국의 농구는 그리 돈이 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명헌은 어떻게든 농구를 계속할 생각이었으나 선수로서 경력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첫째, 미뤄둔 군 입대 문제가 있다. 둘째, 국내 프로 리그는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 셋째, 제일 중요하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난제가 있었다. 그를 성장시켜줄 요소가 더는 국내에 없었다.

오만하다면 오만한 고민이었다. 한때 정우성을 괴롭혔던 고민이기도 했다.

우성은 해답을 미국에서 찾았다. 명헌은 그럴 여유가 없었거니와 이제 와서 미국으로 떠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일단 병무청에서 보내주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정말로 그의 상대가 없었다. 명헌이 소속된 대학은 그가 2학년일 때 준우승을, 3학년과 4학년일 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가 포인트가드 주전으로 나선 경기에서 패배의 고배를 맛본 적은 딱 두 번이었다.

그토록 즐거웠던 농구가 아주 조금이지만, 무료해졌다.

명헌은 가끔 안부 차 인사드리는 도진우 감독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도 감독 역시 프로가 되는 게 낫다고 조언해줬지만 광철처럼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학사 졸업장이 나온다. 대학 리그에서는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답지 않게 망설임을 거듭하던 명헌은 차라리 심판이 될까 싶어 강습회 일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듣는 우성은 빈말로라도 미국으로 넘어오라 제안할 법 했는데, 여태 그러지 않았다. 마치 명헌의 입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이게 부전자전, 아니지, 이심전심이라는 건가?’

그렇더라도, 구단에서 여태 제의가 없다는 건 의아했다. 역사가 짧다고는 하나 프로는 프로였다. 대학 수준을 뛰어넘은 선수들이 득시글한 곳의 관계자들은 이명헌이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선수라 판단하고 그를 외면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쁜 생각.”

우성이 불쑥 손을 내밀어 명헌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왜, 용.”

“방금 엄청 나쁜 생각하는 얼굴이었어요.”

“들켰네.”

명헌은 쿨하게 인정했다.

“농구 그만해야하나 고민 중이었거든.”

“형 벌써 은퇴하면 아빠 울어요. 농담 아니고 진짜로.”

우성이 자기보다 조금 작은 명헌의 오른손을 잡았다 놨다 뒤집었다 장난을 쳤다.

“나도 좀 슬플 거고.”

“조금만?”

“형이 심판이 되면 어울릴 거 같거든요. 그리고 더 이상 코트에서 뛰는 형을 보지 못한다면 조금……. 알았어요! 거짓말 안하기로 했으니까. 조금이 아니고 진짜 무지막지하게 서운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중얼거리는 우성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헌은 상체를 깊숙이 수그려 우성의 얼굴을 훔쳐보려 애썼다.

“진짜로 그만둘까?”

“형이 선택하는 거잖아요, 그건.”

“진짜로용?”

시선이 간신히 마주쳤다. 우성은 명헌의 눈길을 피했다. 명헌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괜히 아빠 핑계를 대는 우성이 웃겼다.

“우성아, 내일 서울 갔다가 놀러갈까?”

우성이 슬쩍 얼굴을 들었다.

“어디로요?”

“낙산에. 절에 다녀올까 해서.”

“속초 말고요? 전 상관없는데.”

근데, 우성이 질문을 덧붙였다.

“왜 굳이 서울로 갔다 가요? 여기서 가는 게 더 가까울 텐데. 직행 버스가 없어요?”

명헌이 우성을 쳐다보았다. 뚫어지게, 20초 남짓. 아! 말뜻을 이해한 우성의 귀 끝이 발그레해졌다.

“자취방으로요, 응…….”

“내가 좀 고지식하잖아용. 남자친구 부모님 계신 집에서는 아무래도.”

“조용히 하면 괜찮을 텐데.”

“너 땜에 조용하게 안 돼.”

우성은 잠자리에서 말이 많았다. 분위기 깨는 더티 토크를 쏟아낸다기보다 감상을 실시간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걸 입맞춤으로 틀어막아도 명헌 쪽이 함정카드처럼 남아 있었다. 어느 한 부분을 심하게 자극당하면 비명을 지르듯 신음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그의 자의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명이든 자극이든.

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오늘 심신이 피로하여 씻고 일찍 잠들 참이었다. 오늘 정말 안 해요? 물기어린 칭얼거림이 이내 투덜거림으로 바뀌었다. 프로 선수로 거듭난 정우성은 비벼도 되는 언덕과 그렇지 않은 언덕을 더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겨울의 사찰은 어디든 한적하다. 사찰에도 성수기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음력 사월 초파일 즈음이지 겨울은 아니었다. 양력으로 한 해가 지나가는 날, 그러니까 12월 31일에는 해돋이를 보러 오는 이들이 많겠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송년회로 들뜬 어중간한 시기는 달랐다.

대학 리그의 선수 이명헌은 그렇다 치더라도 NBA 선수 정우성은 나름 공인이었다. 우성은 명헌의 자취방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느냐고 그리 호들갑을 떨더니, 우등버스를 타자마자 맘 편히 곯아떨어졌다. 명헌은 좌석 등받이를 꼿꼿이 세우고 우성이 자는 모습을 한참동안 구경했다. 저기서 입을 조금 더 벌리면 침이 흐를 것 같았다. 그 얼빠진 모습은 고등학교 2학년에, 갓 주전 딱지를 달은 우성을 통로 맞은편에 앉히고 경기장으로 이동하던 때와 꼭 같았다.

정말로, 명헌은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가 부처님을 떠올리는 건 재채기를 하면 신의 은총을 빌어주는 영어 문화권의 관습과 비슷했다. 불교 대학을 나온 부모님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을 터다. 그렇지만 굳이 양양군의 낙산사를 찾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다 뷰가 끝내줬다.

속초에서 2년하고 6개월가량을 보낸 우성에게 낙산사는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 속초 학생들이 역사문화체험을 한다고 하면 갈 만한 곳이 설악산, 낙산사, 멀리 가면 오죽헌……. 뭐, 그 정도였다. 허나 우성도 한겨울에 낙산사를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헌은 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큰 누나와 낙산사에 한 번 왔었다. 산왕공고로 가서 농구를 계속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크게 실망했다. 한의대 준비를 하려면 고등학교 1학년부터 내신을 준비해야한다는 꾸짖음은 없었어도 집안 분위기는 개박살이 났다. 어머니는 부자의 눈치를 봤고, 명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직 젊은 누나들은 막내의 진로에 섣불리 참견하기 뭐했는지 말을 아꼈다.

그러다 갑자기 큰 누나가 낙산사에 다녀오자고 했다. 큰 누나가 원통보전과 홍련암에서 짧은 기도를 올리는 동안 명헌은 일출로 유명한 의상대에 멀뚱히 서서 기다렸다. 바닷바람이 참 차가웠었다. 너무 시려서 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고집을 부리나, 다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형, 추어여.”

후문을 조금 올라가자마자 재채기를 한 어린 남자친구 때문에 부처님을 모신 원통보전으로 인사드리러 가는 것은 과감히 생략했다. 산사 나들이를 한답시고 간다고 청바지와 운동화는 야무지게 챙겼으면서 코트는 무슨 생각으로 입은 건지 당초 이해가 안 갔다. 명헌은 코트 말고 토퍼나 패딩을 입었어야지 한소리 늘어놓는 대신 목도리를 풀어 우성의 목을 감싸주었다. 캐시미어 목도리의 보드라움이 좋은 건지 보살핌 받은 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성이 만족스러워했으니 그걸로 괜찮았다.

멀리 수평선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그렇지만 바람 부는 게 엄청났다. 우성과 명헌은 외진 곳에 있는 홍련암으로 향하는 동안 번갈아 코를 훌쩍였다. 어쩌다보니 동행하게 된 어르신은 털모자에 방한 귀덮개, 목도리와 장갑까지 중무장을 하고 계셨다. 어르신은 작디작은 절간에 들어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고, 반대로 둘은 합장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암자 밖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푸름을 응시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우성이었다.

“속상한 일 있었어요?”

명헌은 대답에 뜸을 들였다.

“조금.”

“난 형이 불교 신자였는줄.”

“그랬으면 말을 했겠지, 용?”

“정동진이나 강릉 바다도 괜찮은데.”

“여기가 좋아.”

짠 내음을 실은 바닷바람이 이어진 침묵을 메웠다.

“여긴 미국하고는 다르네요. 어차피 같은 바다인데.”

“미국 바다는 어떤데?”

“더 넓고 연약한 느낌이에요. 여기처럼 절벽 옆의 해변을 가보면 또 다른 감상이 들지도 모르지만.”

명헌이 화제를 돌렸다.

“나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태몽을 꿨거든용.”

찬바람에 경직되어 있던 우성의 얼굴이 일순 흐물흐물해졌다.

“그 표정은 뭔가용.”

“그치만 갓난아기인 형을 상상하니까.”

“…… 아무튼 여기 암자가 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용. 그래서 어머니도 날 낳기 전에 기도를 드리러 왔는데, 바다를 건너가는 관세음보살님이 꿈에 나왔대용. 크게 될 아이라고 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셨다나 뭐라나.”

“그렇구나.”

심드렁한 대꾸에 명헌이 우성을 돌아보았다. 명헌은 우성의 표정을 아주 세밀한 단위로 읽어낼 수 있었다. 육감이 정답을 외치는데도 긴가민가했던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의 경험과 두터운 감정이 쌓이면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의외였다. 우성은 지루해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다는 것처럼.

“뭔데.”

“으음.”

“정우성?”

“형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고민 중이었어요. 형은 농구를 엄청 잘하니까 진짜로 크게 된 건데 좀 다르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명헌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필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서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그는 고민해봤자 헛된 것들을 털어놓고 자비를 구하고자 굽이굽이 먼 길을 왔다. 아니라고 잡아떼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런데 우성에게 위로받을 예정은 없었었다. 아직도 성장기인 것 같은 남자친구는 이게 위로인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슬슬 가자. 춥고 배고프네용.”

“여기 공짜로 밥 주는 데 있지 않아요?”

“그걸 공양이라고 해용. 얌전히 한 그릇만 먹고, 그래도 양이 모자라면 다른 식당을 찾아가는 게 매너지용.”

“아, 진짜. 그 정도는 안다고요.”

마침 둘을 배웅하려는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똑같은 타이밍에 오들오들 떤 우성과 명헌이 빠른 걸음걸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은 공양 국수 한 그릇을 3분 컷에 해치우고, 내친 김에 보타전과 대웅전 격인 원통보전까지 걸어 제대로 관광 포인트를 찍었다. 우성이 원통보전 근처 찻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동안 명헌은 맞은편 종무소(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빌려 썼다. 수신인은 여주의 정광철 씨였다.

저녁 전에 돌아갈 거라 말씀드렸는데 어렵겠습니다. 바다 보려 낙산까지 내려왔다가 속초 생각이 나서 들릴까 하고요. 입술에 침은 안 발랐는데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상대방은 이해한다는 듯 흔쾌히 덧붙였다. 겨울바다 좋지, 분위기 있고. 콘돔은 꼭 쓰고? 위로받은 만큼 몸으로 보답해줄 셈이었던 명헌은 고분고분, 집안 어른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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