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로마의 하루
우성명헌 웨딩합작으로 제출했던 글을 재발행합니다
BGM: A lover‘s concerto by Sarah Vaughan
정우성, 어제 서른이 된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는 반년 전에 바다 건너 사는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했다.
십 년 넘게 연애한 것치고는 어설픈 청혼이었다. 데스크탑 메신저로 모처럼의 휴일에 본 고전영화 감상을 떠들다 ‘우리도 나중에 유럽으로 허니문 가요!’라고 해버렸으니까. 영상 통화로 무릎을 꿇고 물어본 건 아니다. 값비싼 반지를 들이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남자친구이신 이명헌께서 ‘그래’라고 칼답해주신 바람에 대수롭지 않은 말은 대수로운 게 되어버렸다.
형 근데 우리 진짜 가요? 허니문?
그럼 가짜로 가?
허니문 뜻 뭔지 알죠?
HONEYMOON
신혼여행 얘기하는 거 아냐?
네
싫으면 말고.
아니! 완전 좋아요!
신혼여행 가려면 뭐 해야 하는지 알지?
결혼해야죠
진짜 결혼하나? 진짜로? 국내에서는 혼인신고도 안 되는데? 결혼식을 그럼 미국에서 해? 다들 어떻게 오라고 하지? 언제가 낫지? 우성의 멘탈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해 어둠의 자식을 자처했던 때보다 우수수 무너졌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평소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상대에게 짝이 되어달라 청하기는 조심스러웠다. 그랬었다. 그저 손가락이 방정이었다.
하필 고민할 시간이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올해 소속된 팀이 부진하여 우성의 플레이오프 일정은 어물어물 끝났고, 명헌은 국내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문제의 대화 이후, 우성은 구단 선수들 전용의 체육관에서 숙소로 돌아가다 동네 서점에 들렀다. 『웨딩 북: 완벽한 결혼식을 위한 전문가의 가이드』가 생활 코너에 베스트셀러로 진열되어 있었다. 책을 집긴 했는데 파스텔 톤 표지에 꽃이 잔뜩 있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꽃이 없는 결혼식은 드리블 못하는 농구나 다름이 없다.
가만, 결혼식에 필요한 게 또 뭐더라? 혼란에 빠져 생활 코너의 기둥이 된 우성을 나이 지긋한 여성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결혼은 처음인가, 젊은이?”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마음 맞으면 결혼하고 아니면 이혼하는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처음 만난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보았다. 결혼이란 평생 함께할 사람을 모셔 오는 거야. 꼼꼼히 준비해야 해. 구구절절 맞는 소리를 경청하고, 우성은 한 권의 백지 플래너를 샀다. ‘모셔 올 사람’과 어떤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지 위시 리스트부터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비슷해진다고 했던가? 우성은 산왕공고 동창 형들을 만날 때마다 미국물이 애를 버려놨다며 욕만 먹었는데 명헌과는 기가 막히게 잘 통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성이 어렵사리 구매한 웨딩 노트에 두 사람의 이름을 써 두기도 전에, 명헌은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1부터 4까지 숫자 중에 하나만 골라 봐.’
우성은 농구의 신께 맹세코 저 메시지가 신혼여행지를 고르라는 뜻인 줄 몰랐다. 하지만 어려운 물음은 아니었으므로 아무거나 골랐다. ‘4번!’ 다음 질문이 바로 날아들었다. ‘1부터 10까지 숫자 중에 하나만 골라.’ ‘또요?’ ‘몇 번?’ ‘9?’ ‘너 진짜 알기 쉽다.’ 이 대목에는 괜히 찔려서 메신저 프로그램을 닫아 놓고 스팸 메일을 정리했다.
10분 뒤 확인한 메신저에는 읽지 않은 질문이 추가되어 있었다.
‘신혼여행은 돌아오는 8월이 낫지? 비시즌이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우성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의 결혼 일정은 이렇게 결정이 났다―피로연과 결혼식은 과감하게 생략. 예물은 시계같이 팔목에 거는 것으로 통일. 우성이 거주하는 미국 시의 행정기관에서 결혼 허가증을 발급받고 서약식 진행. 증인은 각자 한 명씩 준비할 것. 증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혼인 증명서를 챙긴 다음 신혼여행지로 바로 출발. 돌아온 후 양가 어르신들께 꼭 인사드리기. 양측에서는 그들에게 동성의 애인이 있는 건 알고 계시지만 소개시켜드린 적은 없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드릴까 고민했으나, 그러면 감당 못할 정도로 일이 커질까봐 뒤로 미뤄버리기로 했다.
얼마 전 미국 동부의 구단으로 넘어 온 우성은 남자친구와 더 멀어졌다고 눈물을 짰었는데 사람이 참 간사했다. 낭만은 오간 데 없고 최소한의 실리만 챙긴 혼인신고였다. 그에 어울리는 간단한 행정 절차에 구단에 대한 애정이 절로 솟고 낯선 거리가 꽃밭으로 보였다. 고마워요, 뉴욕!
우성이 거주하는 지역공동체에 사심 담은 애정을 키우고 있을 즈음, 명헌이 남자친구가 고른 번호에 맞춰 사다리 타기로 결정한 신혼여행지는 4. 유럽의 9) 로마였다. 나중에 로마가 후보지로 들어간 까닭을 물으니 명헌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로마의 휴일>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잖아용.
형, 그 영화에서는 남주와 여주가 헤어지고 끝나잖아요…….
그래도 로마에는 죄가 없다.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기도 했다.
현지의 행정 절차를 맡은 우성은 바쁜 짬짬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주기로 한 증인들의 숙소를 구했고, 명헌은 신혼여행, 아니, 로마 관광 코스를 짰다. 열성적으로.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우성은 명헌이 지중해로 놀러 가고 싶어서 어설픈 프러포즈에 응한 줄 의심했었다.
무더위와 함께 D-Day가 다가왔다. 서약식에 참석할 증인들이 먼저 도착하고, 명헌이 여행 짐을 꾸려 우성의 품으로 날아왔다. 우성의 전담 에이전트는 떨떠름해 하는 얼굴로 서약식 장소에 찾아와 꽃다발을 주고 갔다. 그는 둘의 관계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혼인신고 얘기에는 매우 난감해했었다. 단점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말리던 베테랑 에이전트는 결국 우성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탄식하며 넘어갔다.
종이 쪼가리 한 장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로마행 비행기의 일등석에 탑승한 지 4시간 뒤. 명헌이 심심풀이로 볼 애니메이션을 고르고 있는 우성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생일 축하해.”
우성이 남은 손으로 포개어진 손등을 덮었다.
“형도 결혼 축하해요.”
명헌은 산탄젤로 성에 가보고 싶다 했다.
우성은 뭔 젤리요? 되물었다가 갓 배우자가 된 사람에게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명헌은 시스티나 경당과 판테온, 트레비 분수를 전부 둘러볼 것이라며 의욕에 넘쳐 있었다. 우성은 지네 수도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모르는 미국 애들이 쌔고 쌨는데 나 정도는 똑똑한 편이라 반박하려다 언변으로 이긴 전적이 없음을 상기하고 참았다.
우성의 로망은 다른 데 있었다. 명헌과의 그럭저럭 연애가 진지한 연애로 돌입한 지 오래지만, 얼굴을 본 나날들은 손으로 꼽는다. 결혼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밤에는 동거부터 해야 했을까, 뒤늦은 망설임이 일기도 했다. 위태로운 젠가처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머릿속이 정돈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우성은 옆에서 곤히 잠든 명헌의 얼굴을 봤다. 심장이 요동친다거나 설렘으로 아래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조금 부은 얼굴을 보면서 우성이 했던 생각은 단순했다. 형한테 아침 뭐 해주지?
그래서 우성은 결심했다. 이동 시간을 제하면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는 밀월 내내 명헌이 형에게 아침밥을 해 주기로.
처음에는 몰래 차려주려 했는데, 배우자의 표정을 속속들이 읽을 줄 아는 명헌에게 들켜 공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전통 가정식 해줘용. 우성은 짓궂은 요구를 단칼에 기각했다. 관광 코스에 맞춰 예약해 둔 숙소는 5성급 호텔이었다. 즉, 호텔 서비스에 조식 코스가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아차…….
어쩐지 명헌이 형이 체크인할 때 웃음을 참고 있더라니.
평소 명헌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감정 표현이 적다기보다 웃거나 우는 포인트가 남들과 좀 달랐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건데, 명헌에게 까닭을 물으면 이해가 가는 답변을 해줬다. 그걸 신현철은 특이하다 했고 정성구는 농구에 한해서는 존경한다 했다. 어쨌거나 우성은 명헌이 울면 슬펐다. 명헌이 웃으면 그도 기뻤다. 조식 레스토랑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서 피식대는 명헌은 얄미웠다. 안 그래도 실컷 놀림 당했던 우성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아침밥 가져왔어요.”
뷔페용 접시에는 명헌이 좋아할 만한 것들만 담았다. 간이 잘 되어 있는 스크램블 에그와 부드러운 롤빵 세 개, 살구잼, 살짝 익힌 베이컨 다섯 장, 슬라이스 토마토와 치커리 잔뜩. 감동 포인트가 특이한 이명헌은 쓴맛이 나는 채소를 좋아했다. 우성은 흥, 코웃음을 치고는 오렌지 주스까지 명헌의 앞에 야무지게 내려놓았다. 표정관리에 실패한 명헌이 중얼거렸다.
“전통 가정식…….”
명헌의 개소리를 흘려들은 우성이 다시 테이블을 떠나 본인의 식사를 챙겨 왔다. 그 사이에 명헌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맞은편에 우성이 앉자 명헌이 놀림을 재개했다.
“정우성 장가가도 되겠네용. 요리가 5성급 호텔 수준이네.”
“자꾸 그러면 나 정말로 삐질 거예요.”
“그래도 가정식은 아쉬운데.”
명헌을 짧게 노려본 우성이 포크로 소시지를 찍다 말고 머뭇거렸다.
“바에 미소된장국 있긴 있었는데. 가져다줄까요?”
명헌이 급하게 포크를 들었다. 여기서 웃음이 터지면 식사 시간이 길어진다. 지금은 로마가 제일 붐빈다는 여름 휴가철이고, <천지창조>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 경당은 명소 중의 명소였다. 예약한 시각에 맞춰 입장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형, 근데.”
“왜용?”
“우리 단둘이 멀리 여행 온 건 처음이잖아요.”
명헌이 비좁은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 같네.”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다녀야 할까요?”
사방이 관광객들 천지였다. 우성은 처음에 손잡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겠다며 시시덕댔으나 점차 지쳤다. 명헌은 한참 전부터 눈빛이 죽어버렸다.
시스티나 경당은 바티칸의 사도 궁전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황의 관저에 있는 만큼 입장하실게요~ 발랄한 안내 멘트에 맞춰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질서의 질서를 찾으며 눈치껏 이동한 곳에는 인류의 보물 중 하나와 사람과 사람, 또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우성과 명헌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천장 벽화보다 압도적인 인파에 기가 눌려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인근의 성 베드로 대성전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명헌이 국내에서부터 가져 온 관광책자는 대성전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젊은 시절 조각한 <피에타>가 보관된 종교적 명소라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 그거 뭔지 알 것 같아요. 엄청 실감나는 조각상과 시원한 그늘이 있는 성당, 맞죠? 영혼이 증발한 목소리에 명헌은 좋다고 맞장구쳤다.
로마의 여름은 뜨거웠다. 후덥지근하지는 않은데 햇볕이 너무 세서 캡모자를 썼는데도 정수리가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스태미나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현역 농구선수들을 지치게 만든 인파에는 여행객의 돈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까지 섞여 있었다. 그늘 안에 들어와 살 것 같다고 손부채질을 하던 우성이 깜짝 놀라 명헌을 잡아당겨 안았다. 명헌의 가방을 노리던 소매치기는 공쳤다는 얼굴로 인파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거장이 남긴 조각은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둘은 정문의 회랑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한숨을 돌렸다.
“여긴 뉴욕보다 더 심해요.”
“사는 동네가 그렇게 위험해?”
“뭐, 뉴욕에서는 부자 동네나 슬럼 가릴 것 없이 총칼 맞으면 끝이긴 하죠. 그런데 여긴 돈부터 훔쳐가려 하잖아요.”
…… 돈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나? 미국에서 20대를 보낸 배우자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한 명헌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낌새가 이상하면 주저 말고 안전한 숙소로 바꿔달라고 해용.”
“에디는 엄살 부린다고 할 것 같지만, 알았어요.”
에디는 우성의 구단 계약과 전반적인 일정을 관리해주는 에이전트의 별칭이었다.
“서약식 때 표정 봤죠? 형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할 걸요.”
“반대하지는 않았잖아.”
“그런 거 반대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뭐랄까. 일할 때는 보수적이거든요. 그게 미국에서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스폰서나 구단 비위 맞추려면 모난 게 없이 굴어야 한다고 그랬거든요.”
입술을 삐죽인 우성이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가 모난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지.”
명헌이 엄격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결혼 생활이라 해야지용.”
“아.”
“실감이 안 나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거짓말해도 어차피 티 나용. 그냥 말해.”
우성이 뒷덜미를 긁적였다.
“결혼식, 할 걸 그랬나 봐요.”
“…….”
“식을 생략한 건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잡음 만들기 싫은 것도 있었잖아요. 아주 만약에, 결혼식 얘기 들은 구단에서 계약 파기 운운하면 미련은 없거든요. 유감은 있게 만들어줄 거긴 해도. 그런데, 음……. 십 년 전이면 모를까 이제 와서 형하고 커리어 중에 택일하라 하면.”
“알아.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농구는 포기 못하지만요.”
“나도.”
명헌의 대꾸에 우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형이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게 더 많을 거잖아요.”
“내가 구단에 뭐라 얘기하고 뉴욕행 비행기를 탔을 것 같아용?”
“그냥 잠수 탄 거 아니에요? 형 그런 거 잘하잖아요.”
발품 파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명헌은 공식 일정이 없으면 자발적으로 실종되고는 했다. 명헌의 담당 코치가 속 터져 하며 연락을 돌리다 못해 우성에게 전화한 적도 있었다. 흑역사를 떠올린 명헌이 우성을 흘겼다.
“얘기 길게 하고 왔어용.”
“진짜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나중에는 알아서 납득하던데. 전혀 모르고 있다가 폭탄 터지는 거 수습하는 것보다는 낫다면서. 상대는 천천히 밝히겠다고 했지만, 이해는 해 줬어용.”
“…… 하긴 이해를 안 하면 이듬해 형네 구단의 챔피언십이…….”
“바로 그거지, 정우성.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구단이나 가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거든.”
입술을 한 번 더 삐죽거린 우성이 명헌의 왼쪽 손을 더듬었다. 농구하는 사람답게 큰 손이 명헌의 약지를 잡아먹을 듯 그러쥐었다.
“난 형이랑 안 헤어져요.”
“거야 두고 봐야지.”
“못된 말만 하는 못된 입은 혼내줘야 하는데.”
“참아용. 여긴 신성한 장소잖아용.”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둘은 일정을 변경하여, 선선해질 때까지 노천카페에서 노닥거리기로 합의를 봤다.
명헌은 꼭 보고 싶다고 강조했던 것치고는 산탄젤로 성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겨울이었다면 해가 저물었을 시각에 성곽 안으로 들어가 실내와 바깥을 오가며 구경했다. 우성은 길을 잃었던 거라고 투덜댔으나 명헌은 발 가는 대로 움직였다며 꿋꿋하게 우겼다.
우성과 명헌은 산탄젤로 성과 이어지는 다리를 도보로 이동하여, 눈에 띄는 적당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비좁은 곳이었으나 분위기는 좋았다. 이른 저녁이라 사람이 몇 없었던 점도 매력적이었다. 점원은 각각 접시 하나를 시키고 메인 요리를 두 개 더 시킨 먹성 좋은 동양인 남자들에게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물을 한 병 더 주문하자, 악센트가 강한 영어로 관광 중이냐 대화의 운을 띄웠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먼저 입을 연 건 명헌이었다.
“저희 신혼여행 중입니다.”
정중하고도 (우성을) 설레게 만든 그 한 문장으로 둘은 레드 와인 한 병을 서비스로 받았다. 값비싼 것은 아니어서 사양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점원은 덕담을 건네면서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이탈리아는 축구의 나라였다.
점원이 손수 와인을 따라주었으나 몸값이 비싼 처지라 술을 물처럼 들이킬 수 없었다. 둘은 와인을 반만 마시고 병을 챙겼다.
“명허니헝.”
몸값도 몸값이지만, 우성은 술에 약했다. 대신에 숙취는 없었다. 그래도 알코올과 상극이라는 걸 부끄러워하여 ‘술 취한 정우성’을 볼 기회가 아주 드물기는 했다. 와인 병은 혀가 꼬인 우성 대신 명헌이 챙겼다. 무늬만 주정뱅이는 알아서 그를 졸졸 쫓아왔다.
도시를 양분하며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따라 샛노란 조명들이 하나 둘 씩 켜졌다. 호텔로 돌아가려면 다리를 도로 건너가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초저녁 강바람이 술기운 오른 몸을 적절하게 식혔다. 명헌은 정면에 보이는 산탄젤로 성을 응시했다. 여름밤이 수줍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아주 어여뻤다. 미적 감각이 넘치는 하늘 아래 대천사가 굽어보고 있는 성은 장관을 뛰어넘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어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저 지금 진짜 기분이 조아여. 형도 그래여?”
실실 웃으며 걷던 우성이 명헌을 따라 걸음을 멈췄다. 명헌이 우성을 향해 등을 돌렸다. 우성이 갑자기, 환상 속에 잠겨 있다 급하게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아니, 형.”
명헌은 다리 기둥 구석에 와인 병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우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죠?”
우성이 넓은 시야와 폭발적인 스태미나로 팀의 없어서는 안 될 포인트 가드가 되었다면, 명헌은 상대 팀을 속이기 위해 같은 팀원을 속여 불시에 점수 차를 벌이는 악랄한 포인트 가드로 유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같은 팀원’에 우성도 속하는지의 여부였다.
당근오브콜스였다.
우성이 오른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당했다는 분함과 눈앞의 남자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은 양가감정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우성아, 나 봐. 엊그제 혼인 신고한 남편을 속여먹은 못된 포인트 가드가 그를 재촉했다. 우성은 마지못해 손을 내렸다. 여행용 크로스백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낸 명헌이 우성을 향해 내용물을 공개하고 있었다.
명헌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몸이 재산인 농구선수였으니까. 가만히 서서 백색으로 반짝이는 반지 한 쌍을 보여주는 의미를 확신한 우성이 윗입술을 사려 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이 평온하게 오가는 길가에서 고함을, 아니,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여기 야경 끝내주지?”
우성이 간신히 데시벨을 조정했다.
“반지나 내놔요.”
“그래. 나도 사랑해용.”
“진짜 미워 죽겠어.”
“사이즈 맞으면 좋겠는데.”
명헌이 한 살 어린 남편의 왼쪽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 동안, 우성은 억울한데 좋아 죽겠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연신 꿍얼댔다. 나는, 반지 이런 거 필요 없고 시계면 됐다고 해서 진짜 준비 안 했는데. 형은 다 준비하고. 나만 어린애 만들고. 사이즈는 또 잘 맞아.
반면 명헌은 무표정을 고수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배우자의 표정을 그럭저럭 읽을 줄 알게 된 우성이 보기에는, 지금 이명헌은 아주 신나하고 있었다.
“우성아.”
“왜요.”
“이제 진짜로 못 무른다.”
우성이 반지 케이스를 명헌에게서 홱 낚아챘다. 그리고는 명헌의 왼쪽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덕분에 박력이 넘쳤지만, 약지를 조심스레 잡는 손이 달달 떨렸다.
“<로마의 휴일>은 다 핑계였죠? 사람을 아주 정신 못 차리게 하려고 여기 오자고 한 거죠?”
치밀하게 준비했던 반지 증정식을 성공리에 끝마친 명헌이 와인 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네가 얘기해서 관심이 생긴 거지. 사전 조사도 한 거고.”
“거짓말.”
“진짠데용.”
“이제 이명헌 말은 하나도 안 믿을 건데요.”
명헌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부담 갖지 말고용. 어차피 이거, 너나 나나 운동할 때 빼야 하는데. 그리고 옥션에서 10달러에 구매한 거라서용.”
“…… 비싼 거예요?”
“네가 준 예물보다는 덜 비싸.”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린 명헌이 우성을 불렀다.
“돌아가서 와인 더 마시자. 괜찮지용?”
“와인보다 형이 더 급해지면 어쩌죠?”
“그럼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지.”
명헌이 반지가 없는 손을 내밀자 자연스레 우성의 손이 감겨들었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무섭도록 잘 풀리는 경기에서 농구공이 손바닥에 달라붙을 때의 감각과 흡사했다. 명헌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우성은 호텔까지 얼마 걸릴까 머릿속으로 분초를 계산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명헌은 마감 중인 마트를 발견하여 내켜하지 않는 남편을 질질 끌고 들어갔다. 그들이 어떤 몸인데, 안주 없이 술깡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명헌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안주와 와인을 건들지 못했다. 우성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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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족제비
너무너무 행복한 글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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