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끓이기

절망편

이 이야기는 한 여자가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며 시작된다.

여자의 직업은 흔한 회사원이었다. 그는 막 야근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원래 야근이 끝난 배고픈 직장인은 예민하기 마련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여자는 오늘 끝내주게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을 작정이었다.

여자는 의자를 가져와 의자 위에 올라섰다. 찬장은 너무 높아 여자의 키로는 닿을 수 없었다. 의자의 도움을 받아 라면을 꺼낸 여자는 라면 봉지의 뒷면을 보았다. 앞서 말했듯, 오늘 최고로 맛난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서였다.

봉지의 뒷면에는 석박사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라면 레시피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레시피에는 라면 물의 온도가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라면을 끓이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끓는 물의 온도였다. 물의 온도에 따라 스프가 퍼지는 정도, 그리고 면발이 익는 속도에 차이가 생길 것이다. 그 차이에 따라 맛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겠지.

여자는 오늘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완벽한 라면을 먹음으로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를 할 계획이 있었다.

여자는 부리나케 부엌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온도계가 들어있었다.

여자는 비커를 들고 레시피에 적힌 만큼의 물을 그곳에 부었다. 비커를 평평한 곳에 두고 눈금을 보며 확인도 두 차례나 했다.

이제는 비커에 담긴 물을 냄비에 부을 차례였다. 불행하게도, 여자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변수를 찾아내 버리고야 말았다. 바로 냄비였다.

여자는 찬장 안에 있는 모든 냄비를 꺼내 들었다. 냄비의 종류는 아주 다양했다. 크기로 따지자면 폭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냄비부터 50센티는 더 되는 냄비까지. 재질로 따지자면 두꺼운 쇠로 된 냄비부터 얇은 양은으로 된 냄비까지. 높이로 따지자면 10센티의 낮은 냄비에서 80센티의 높은 냄비까지. 여자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여자는 지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고난의 끝에는 최고의 라면, 행복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여자는 결심한 듯 비장하게 양은 냄비를 골랐다. 폭은 24cm에 높이는 10.5cm짜리 냄비였다. 그 냄비 속에 여자는 비커에 담긴 물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인덕션을 켜고 냄비를 불 위에 올렸다.

여자는 냄비를 빤히 바라봤다. 아직 물은 미동도 없었다. 여자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없이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보글보글 기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은 끓는 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보글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기어코 물은 표면에까지 거품을 물며 부글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공중으로 하얀 수증기를 뱉어냈다.

아, 여자는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뱉었다. 그는 또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물의 증발 현상이었다.

이번에는 물의 양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자는 당장 끓는 물을 하수구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냄비 뚜껑을 닫아야겠다는 판단이 이어졌다.

여자는 위와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비커에 물을 받아 평평한 곳에 두고 눈금을 두 번이나 더 확인한 다음 첫 번째로 고른 폭은 24cm에 높이는 10.5cm짜리 양은 냄비에 물을 쏟아붓고 인덕션을 켜고 냄비를 올린 다음 찬장에서 뚜껑을 찾아 냄비 위에 올리고 그 뚜껑을 두 손으로 힘껏 눌렀다.

여자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건 여자의 승리였다. 안타깝게도 여자가 물의 온도를 재기 위해 냄비의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여자는 라면 물의 완벽한 온도를 알기 위해 뚜껑을 열어야만 했고, 그로 인해 수증기는 빠져나갔다. 

여자의 머리는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모든 계산이 엉망이었다. 당연하지만 기체로 변한 물은 한낱 인간이 통제할 수 없었다.

여자는 이번에는 서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청테이프를 꺼냈다. 여자의 발은 바쁘게 움직여 다시 냄비의 앞으로 향했다.

여자는 또 앞선 과정을 반복했다. 비커에 물을 받아 평평한 곳에 두고 눈금을 두 번이나 더 확인한 다음 첫 번째로 고른 폭은 24cm에 높이는 10.5cm짜리 양은 냄비에 물을 쏟아붓고 인덕션을 켜고 냄비를 올린 다음 온도계를 물 속에 넣고 찬장에서 뚜껑을 찾아 냄비 위에 올리고 그 뚜껑을 두 손으로 힘껏 누른 다음 청테이프로 냄비를 꽁꽁 싸맸다.

그러나 테이프를 감는 와중에도 여자는 수증기의 움직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수증기가 청테이프를 뚫고 나오지 않을 확신이 있는가?

왜 나는 수증기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는가? 그것은 오직 신만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상황 또한 신의 개입이 일어났는가? 신은 어째서 내가 가장 완벽한 라면을 먹을 수 없도록 세상을 계획했는가. 신의 계획대로라면 진정 나는 완벽한 라면을 먹을 수 없는 것인가. 신은 왜 ‘다행히 수증기가 공중에서 멈췄고 여자는 숟가락으로 무사히 수증기들을 다시 냄비에 넣을 수 있었다’와 같은 세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아니, 애초에 신이 있기는 했는가.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나는 실재하던 인물이던가. 지금 냄비를 감싸고 있는 손은 나의 것이던가. 완벽한 라면을 끓여 먹겠다던 나의 이성과 사고는 진정한 나의 것이던가. 나에게 형상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정말로 나의 의지로 살아있는가.

비로소 여자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신으로부터 지금 구원받을 수 있겠노라고.

당신의 연필에 ‘여자는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행복했습니다.’가 지금 걸려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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