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발더스게이트 3 - 꿈 꾼 이야기 * 엔딩 이후
따스한 볕 속에서 잠이 드는 꿈을 꾸었다. 단단한 무릎에 머리를 뉘고 작게 고릉고릉 소리를 내며 잠들던 자신은 고양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귀가 쫑긋하고 작은 고양이. 부푼 털 사이사이로 품은 온기를 즐기던 고양이가 귀를 움찔거리자 길고 예쁜 손가락이 작은 머리통을 긁어주었고, 귀여워 해주는 손길에 고양이는, 나는 그대로 더 깊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눈을 뜬 순간 바로 꿈이라는 걸 알았다. 이곳은 햇볕이 들지 않는 땅이니까. 무릎 담요가, 의자에 얹은 방석이, 침상이 얼마나 따뜻하건 그건 햇볕으로 뎁혀진 온기는 아니다. 꿈과 공유되는 것은 단 한 가지, 길고 예쁜 손가락의 주인뿐이었다. 다정하게 무릎을 빌려주고 있었던 이는 고양이 아닌 하프엘프의 얼굴 위로 흔들던 손을 거두며 말을 붙였다.
“아, 마침 깼네. 너무 잘 자길래 어디까지 자나 보려 했는데.”
“―으응. 왜, 못된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것도 생각은 해봤지. 자고 있을 때 칠 수 있는 장난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척으로 그를 깨운 연인이 그 예쁜 손보다 아름다운 얼굴로 짓궂게 웃었다. 이제 막 깊은 수면의 안개에서 벗어난 하프엘프는 몸을 뒤척였다. 그는 투박하고 다소 조잡하지만 튼튼한 안락의자에 길게 몸을 눕히고 있었다. 잠에 떨어지기 전까지 들고 있었던 책은 책상 위에 있다. 하프엘프는 그 책을 자신이 저기 두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아니라 아스타리온이 두었나? 어느 쪽이든 몸 위에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기엔 너무 무거운 책이다. 몸 위에 둔 채 잠들었으면 많이 불편했겠지. 그랬으면 아까 같은 편안한 꿈은커녕 가위에 눌려 바르작거리는 꿈이나 꾸었을지도 모른다. 감미로웠던 꿈결 속 순간을 곱씹으며 하프엘프가 입을 열었다.
“드루이드가 될 걸 그랬나봐.”
“드루이드?”
뜬금없는 소리에 아스타리온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연인의 뜬구름 잡는 언동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이미 익숙해졌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당연한 말을 이었다.
“자기 호기심이 왕성한 데다 다재다능한 덕에 이것저것 건드려보는 걸 좋아하는 건 알지만, 이번엔 왜 또 드루이드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우리 곰 같은 드루이드 동료와 수개월 같이 다닌 적이 있다 해서 자기마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할까봐 무서워지거든. 자연을 사랑하기엔 여기 언더다크의 자연은 지상 같은 멋은 없잖아. 더 위험하고.”
“폭발하는 버섯을 사랑하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야.”
“그거 다행이네. 아니,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어. 자기가 아무리 내 매력에 너무 익숙해졌다 해도 버섯 따위가 나보다 더 빛날 순 없지. 아무리 발광 버섯이라 해도 말이야. 그래서, 드루이드는 왜?”
“그냥, 좋을 것 같아서.”
“좋긴 뭐가 좋아, 갑자기 왜 그런 따분한… 오, 물론 우리 드루이드 동료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재미있는 삶은 아니잖아.”
어이없다는 반응을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내는지 훤한 이마에 문자로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하프엘프는 부드럽게 반박했다.
“나름대로 매력적일 수도 있지.”
“글쎄다. 자기가 드루이드로 사는 경우의 삶도 있을 수야 있겠지만 상상이 안 가는걸. 문명 이전의 고리타분한 삶? 야생 속 조화로운 삶? 동물로 변신해서 어슬렁거리기? 공들여 식물 키우기? 뭐, 지금도 여기서 버섯 몇 개를 키우긴 했네.”
“맞아. 그리고 금방 죽었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약간의 한탄을 담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달콤한 잠에 빠졌을 때와는 다른 숨이었다. 꿈에서는 좀 더 작고… 가르릉거렸다. 하프엘프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꿈에선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았던 것은 알겠다. 가는 수염이 살랑거렸던 것도. 새끼였을까? 털은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려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몸 색은 모르겠지만 발끝만은 희었던 것 같다. 가물가물한 감각을 그리며 그가 말했다.
“동물로 변하는 건 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하! 전혀. 난 곰이나 늑대에게 구애받는 삶은 사양이야. 발정기가 정해져 있는 것도 포함해서.”
“으음.”
그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의 발상에 하프엘프가 짧게 신음했다. “그런 쪽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하고 그가 푸념하자 아스타리온이 물었다.
“그럼 대체 뭘 생각한 건데? 사냥하기? 풀 뜯기? 흙바닥에 뒹굴기?”
손짓발짓을 곁들여 얼마나 재미없을지 온 얼굴로 표현하는 모습이 그저 재미있다. 하프엘프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건 좀 괜찮을지도. 털이 빵빵하면 담요는 필요 없겠네.”
“부숭숭한 털뭉치가 부러운 거야? 싱겁긴. 그런 거라면 굳이 드루이드 공부까지 할 필요 없잖아. 나중에 자기 털옷이라도 하나 해줘야겠네. 이상한 소리 안 하게 하려면.”
“그렇게 이상한 소리였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털이 빵빵하면 따뜻하고 귀엽잖아. 사랑스럽다고.”
“이거 정말 왜 이래, 잠이 덜 깼나? 꿈 깨, 자기. 밖에 있는 누굴 잡고 물어봐도 다 이상하다 할걸. 거기다 지금 자기 쪽이 더 피도 맛있다고. 동물 따위로 변신해 다녀서야 내 식생활도 빈곤해질 텐데, 당연히 결사반대 외에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어?”
그래, 식생활은 중대지사지. “그래, 그렇겠네.” 하고 수긍했지만 그렇게 보내기엔 아쉬운 감이 있었다. 하프엘프는 손을 뻗어, 꿈속의 그가 해주었던 것처럼 손끝으로 그의 턱을 쓸었다.
“그래도 나, 너에겐 사랑받고 싶어.”
난데없는 말에 “응?”하고 붉은 눈이 껌벅였다. 이 눈이 보고 싶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꿈속에선 보이지 않았으니까. 느껴지는 건 오직 손길뿐이었다. 맥락을 잃은 발화 흐름에 잠시 시간 지연은 있었으나,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한 아스타리온이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만면에 창백하고 화사한 웃음을 띤 그는 기쁨을 능청맞음으로 가장하며 능글맞게 눈웃음을 쳤다.
“자기, 내가 뭐라 했다고 그렇게 나오기야? 갑자기 너무 깜찍한 말로 치고 들어오는데.”
“흠, 싫어?”
“그럴 리가. 싫다기보단― 충격적이지. 난 이렇게 열심히 자길 사랑하고 있는데, 자긴 모자라다니. 요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모자라다곤 안 했어.”
가속할 것 같은 낌새에 제동을 걸어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신이 난 아스타리온은 요망하고도 색기 어린 목소리로 웃었다.
“그게 그 말이지. 더 원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잖아? 내가 다 알지. 걱정 마, 자기. 덜 사양하고 사랑해줄게. 자기 입에서 그런 말 안 나오게.”
이런 흐름을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자주 있는 일에 한탄이 새어 나올 것 같았으나 그러기엔 또, 기뻐하는 그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가까워지는 입술을 입술로 받아주자 그는 금방 이를 세우고 입술을 핥아왔다. 입술 사이로 언뜻언뜻 빠는 소리를 흘리면서 세운 이로 살그머니 입술을 물고 혀를 탐낸다.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의자에 기댄 머리를 받친 채 입을 맞추는 모든 동작에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저 그가 꿈꾸었던 종류가 아닐 뿐.
자다 깨어서는 이상한 소리로 그를 황망하게 만들었음에도 입맞춤에 응해오는 한 치 혀에 아스타리온은 사랑을 확인하고, 또 더없이 행복 해했다. 그게 고양이가 아니어도 그가 여기 있는 이유였다.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댄 몸을 떼지 않은 채 하프엘프는 아스타리온의 긴 귀를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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