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테르seter, 해홍기海紅紀.

[대만태섭] 해홍기海紅紀 00.

서장, 용궁지유혼龍宮之幽魂.

해홍기海紅紀 ~東海使臣 紅川紀行~

슬램덩크 2차 창작, 세테르seter 대만태섭.

용궁지유혼龍宮之幽魂

이 꿈을 언제부터 꾸었더라. 정대만은 망연한 기분으로 눈앞의 몽유도원夢遊桃原을 바라본다. 벌써 다섯 번. 한 달 같은 일주일 동안 같지만 늘 달랐던 꿈을 벌써 다섯 번째 꾸고 있다. 푸르른 파도가 귓가를 먹먹하게 적시고, 묵직한 유속에 못 박힌 채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은 듯 물길 따라 흔들리는 몸뚱어리는 갑갑하기 그지없다. 세워진 연도를 알 수 없는 고색창연한 구중궁궐은, 몇 해 전 할머니를 따라 다녀온 사찰 대웅전과도 모습이 달라 막연히 고대적 건물이려니 하고 시대상을 추측할 뿐이다. 밤하늘 별빛처럼 오밀조밀한 빛을 품은 산호초며 본 적 없는 채운 빛깔 물고기가 하늘거리는 지느러미를 뽐내며 심해를 가른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풍경을 보노라면 집안 가풍 덕분에 전국 8도 명승지란 명승지는 대부분 밟아본 천하의 정대만조차도 가히 용궁의 아름다움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나 그런 감탄도 하루 이틀이요, 몽유도원에서 노닐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는 순간이 다섯 번씩이나 되어선 감탄이고 자시고,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별천지조차도 지루할 따름이다. 깊은 심해 유속을 따라 너풀너풀 춤추는 몸뚱어리가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 없다. 몸을 맘대로 가눌 수조차 없는 순간에서 그의 시선은 오로지 단 한 사람의 유혼幽魂에게 못 박혀 외면할 수가 없다.

뉜지도 모를 유혼의 존재가 몽유도원의 까닭이라는 듯이.

머무는 자리가 용궁이요, 이미 사바娑婆와는 동떨어진 존재이니 계절과 동떨어진 검은 민소매와 붉은 반바지를 입은 모양새가 마냥 어색하진 않지만 훤칠한 신장에 비해 얇은 뼈대며 인상이 또렷하지 못한, 그래서 소년인지 청년인지 아리쏭한 구석이 있는 그 유혼을 보노라면 여엉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용궁 저 너머 여울치는 파도 너머의 윤슬을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볼 뿐, 도통 움직이는 법이 없는 유혼은 이따금 어휴, 하고 얕은 한숨을 내쉴 따름이다. 그 모습을 벌써 수일 째 마냥 바라만 보던 순간에, 문득.

저의 등 뒤에서, 저처럼 가만히 유혼을 바라보는 인외의 존재를 깨달은 정대만은 숨을 강하게 들이 삼킨다. 그저 가만히 자리하며 바라볼 뿐인데도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여서 도통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껏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습관처럼 번지는 헛웃음에도 목소리가 나질 않는다. 그간 꾸었던 다섯 번의 꿈자리는 다만 자신의 정신을 아무런 뒤탈 없이 용궁에 적응시키기 위해서라는 걸, 정대만은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로 깨닫는다. 느닷없이 꿈자리가 용궁이 되어 몽유도원에 못 박힌 일이야 대만에게는 그렇게 특이할 일도 아니다. 그런 일쯤이야, 집안에 강신계降神系 박수무당만 두 손에 꼽을 정도로 널리고 깔린 게 정씨 집안인데다 외갓집도 대대로 인천에서 어선 임대업을 하고 지내는 터줏대감이라 매년 마을의 풍어제를 올리는 집안이라 호오好惡와는 상관없이, 정대만은 이러한 무속적인 환경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설마, 신기도 신안도 없는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지만. 생면부지인 유혼의 추모굿이 왜 하필 저한테로 온 걸까. 친가 쪽 사람이라면 집안에 널리고 깔린 박수무당들에게 돌아갔을 테고, 외가 쪽 사람이어도 매해 공들여 풍어제를 지내는 다른 외가쪽 어른들을 놔두고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올 일이 없다. 그렇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저 유혼은 집안이랑 영 관계가 없다는 건데.

……그래서 더더욱 유혼의 정체를 종잡을 수 없다.

“허억……!”

목 뒷덜미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싸늘하게 식은땀이 흐른다. 그간은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애써 도외시해온 사정을 더는 무시할 수 없다. 그냥저냥 어디 바다 한복판에 못 박힌 수사귀水死鬼도 아니고 용궁에 머물며 용왕의 보살핌을 받는 유혼이라니. 하물며 물귀신에게 으레 나타나곤 한다는 무차별적인 원한도 보이지 않는다. 그간 필사적으로 몽유도원이 되어버린 꿈자리를 외면해온 데에 비해, 머리는 자연스럽게 그간 눈으로 보아왔던 순간순간을 분석한다. ……이래서 가풍이라는 게 무섭긴 무서워. 대만은 애써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며 복잡한 심정을 다스린다. 유혼의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자신에게 추모굿이 돌아왔는지를 알 수가 없다. 철들기 전 한참은 어리던 순간에, 친가에서 저처럼 추모굿의 매개체로 지목되어 한참을 고생하시던 친척 어른을 알기에 더더욱 마음이 뒤숭숭하다. 게다가 뉜지도 모를 생면부지의 유혼을 대상으로 한 추모굿이니 이름자며 사주명리四柱命理를 알지 못해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사자死者의 유혼이 알아서 이치를 깨닫고 성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저도, 죽은 그이도 괜한 시간 낭비하는 일 없을 텐데. 대만은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그렇게 속으로 툴툴거리며 주섬주섬 잠자리를 정리한다. 꿈자리가 워낙 황망하다 보니 재차 잠을 청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평소보다 세 시간 일찍 깨어난 셈인데도 몸은 푹 자고 일어난 마냥 상쾌한 기분이라 다시 잠드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나저나 새벽 2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에 대체 뭘 한담. 계절이 한여름이었다면 어디로든 불 켜진 공터에 나가서 공이라도 튕길 텐데, 겨우 봄꽃이 피기 시작한 3월 하순이어서야 그러지도 못한다. 침대맡에 걸터앉아 멍하니 천장의 벽지 무늬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를 잠시, 별안간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와악 씨발. 뭐야.”

한 새벽, 야행성 동물이나 귀신이 아니고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은 시간대에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그렇게 섬찟할 수 없다. 심장이 거세게 벌렁거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전히 쿵쾅쿵쾅 떨리는 심장에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지금으로선 세상 누구보다 든든하기만 한 목소리가 들린다.

[대만이 인석아. 왜 말을 안 하느냐.]

“……할머니. 그,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하셨어요.”

명절이며 제삿날, 한 해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 나가계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큰집에 들를 때마다 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밤까지 몸을 움직이시는 할머니를 보며 밤잠이 없으시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시간까지 깨어 계실 줄 몰랐다. 대만은 드드득, 사각 플라스틱 의자를 발끝으로 끌어와 전화기 앞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요 며칠 치성 올리느라 눕는 시간이 늦었을 뿐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러는 대만이 너야말로 이 시간에 오는 전화를 다 받느냐? 이번에도 안 받으면 할미가 직접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구나.]

연세가 연세인 만큼 어지간해서는 바깥 외출을 잘 하지 않는 할머니가 저 하나를 만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는 말에 대만이 켁, 하고 헛기침을 뱉는다. 이 소식이 위로 넷이나 있는 백부들 귀에 들어가면, 아니, 백부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어머니 이예경 여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 길로 등짝에 불이 나고도 남을 이야기다. 할머니께서 느닷없이 이 시간에, 그것도 요 며칠간 내도록 전화를 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전화를 받아서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치성을 올리고 계신다고 하셨지. 할머니께서 이 시간까지 치성을 올릴 만큼 가까운 신당이라곤 인천 만신밖에 없다. 요 며칠 내도록 꾸었던 용궁 꿈자리며 뉜지도 모를 유혼의 추모굿 매개체 노릇을 하게 된 일 하며, 뭔가 인천 만신에게 전해 들은 말이라도 있으신 건가? 그래서 전화를 거셨나? 대만은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답한다.

“그, 꿈을 좀…… 이상한 걸 꿔서요.”

[용궁 꿈 말이냐?]

“네. 할머니 뭔가 들은 거라도 있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평소처럼 안부 인사도 드릴 겸 치성 올리러 갔더니 만신께서 그러시더라. 동해 용왕께서 우리 집안사람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 같다고. ……만신께서 동해 용왕을 모신 적이 없는데 경고를 받을 정도면, 우리 정씨 집안에선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겠느냐.]

나직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다. 엇비슷한 나이 또래에 집안의 격이며 가풍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매를 받아 월성¹에서 인천으로 시집온 지도 어언 수십여 년. 아들 다섯을 낳고 키우는 동안 머나먼 친정을 대신하여 할머니의 버팀목이 되어 준 이가 인천 만신이었다고 하니, 집안에서 벌어지는 어지간한 대소사는 같은 성씨를 단 박수무당을 통해 해결하여도 집안 문제가 아닌 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따금 인천 만신의 조언을 받곤 했다. 이게 정대만 그 자신의 정확한 기억인지는 인지할 수 없어도, 적어도 그가 알기에 자신처럼 추모굿의 매개체로 지목되었던 친가 어른도 할머니의 중개로 인천 만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인천 만신이 끼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근데 잠깐만. ……동해 용왕?

“……동해요? 서해 용왕이 아니고? 아니, 웬 유혼이 용궁에 묶여서 추모굿 매개체로 불려간 건데 서해 용궁이 아니라 동해 용궁이라고요?”

[추모굿이라니……, 대만이 네가 잘못 느낀 게 아니냐.]

할아버지 장례식 때 말고는 항상 당당하기만 하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뉜지도 모를 유혼의, 팔자에도 없는 추모굿 매개체 노릇을 하게 되었다며 속으로 내심 한탄하긴 했지만 용왕까지 개입하며 들이닥친 일이니 피차간에 어물쩍거리지 않고 일을 끝마치는 쪽이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판단했지만,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인가?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에 대만이 슬쩍 입을 열려는 순간, 후우우. 하고 긴긴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넘친다.

“할머니?”

[단기간에 끝날 일은 아니로구나. ……어멈에게 이야기해서 내일 사람을 보낼 테니 큰집까지 좀 오거라.]

“내일…… 금요일이요? 26일? 저 그날 연습 시합 있는데요?”

[그럼 오늘 오겠느냐?]

“내일 가겠습니다 할머니.”

서릿발처럼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정대만이 곧장 꼬리를 만다. 집안의 다른 어른들이라면 모를까, 할머니가 저런 목소리로 내리는 명령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 무릎을 다쳐 한참 엇나가던 시절에도 할머니의 연락에는 꼬박꼬박 응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걸려올 때처럼 별반 기별도 없이 끊어져 뚜뚜 신호음만 내뱉는 수화기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다. 대만은 저도 몰래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할머니의 반응을 보아하니 어쩌면 자신이 지나치게 속없이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평생 나고 자라온 서해를 다스리는 서해 용왕이 아니라, 어쩌다 한두 번 놀러 가본 게 전부인 동해의 용왕이라니. 당최 동해 용왕과 연을 맺을 일이 어디에 있다고.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데 머리는 더더욱 뒤숭숭하다. 대만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뱉어내지 않는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를 충동에 속으로 외워두었던 번호를 누른다. 새벽 3시 반. 할머니와의 통화며 저 홀로 상념에 잠긴 사이에 시간이 제법 흘러 시차를 생각하여도 이쪽과 저쪽에 있어 가벼운 통화를 할 정도의 시간은 된다. ……상대가 자신의 전화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네. 송태섭입니다.]

승산이라곤 보이지도 않는 깜깜무소식의 도박에서, 정대만은 늘 그래왔듯이 승리한다. 찰나의 정적, 순간의 침묵 속에서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수화기 반대편에서 태섭의 나직한 숨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한때는 매일같이 곁에서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한 해 동안 함께 코트를 누비던 사이였다는 게 지금 돌아보면 마냥 꿈만 같아서. 설마 자신들 사이에 태평양이 가로 놓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 사실이 마냥 아쉽다가도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매해 장학생이 나오면 다행이란 말을 듣던 미국 농구 유학 장학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된 사람이 다름 아닌 송태섭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기묘한 환희가 정대만을 덮치곤 한다.

꼭 지금처럼.

“오랜만이다 송태섭? 잘 지냈냐.”

[뭐야, 선배가 이 시간에 전화를 왜 해요? 지금 거기 새벽 아니에요?]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좀 일찍 일어났어. 잠도 안 오고, 지금쯤이면 거긴 대낮일 테니까, 하는 김에 전화해 봤다. 뭐 힘든 건 없고?”

[참 나… 그렇다고 국제 전화를 이렇게 불쑥 걸어버리나?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별일 없어요. 그러는 선배는요?]

“나도 뭐, 딱히 별일은…… 아, 근데 나 내일 있을 연습 경기 못 나가게 됐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큰집에 내려갔다 와야 해.”

그는 사실 어째서 송태섭이 은근한 구석에서 자신에게 이토록 느슨한 태도를 내비치는지 모른다. 한 학년 차이의 고등학교 선후배. 그것도 단순히 채치수의 기대를 받는 신입이라는 이유로 집단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와 피해자. 여전히 종종 강백호와 그 친구들이 농구부 최후의 날이라고 놀려대는 그때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혹, 조금이라도 운이 나빴더라면…… 정대만은 습관적으로 수화기 연결선을 빙글빙글 손으로 꼬아댄다. 그가 고등학교 마지막 인터하이 도 예선전을 며칠 앞둔 늦된 시기에 농구부에 복귀하던 날. 송태섭이 조금 당황한 듯 손가락질을 보내긴 했어도 허리 숙이며 사과하는 자신을 깔끔하게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2년 만에 간신히 돌아온 농구부 활동이 마냥 원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농구 남자부 1부 리그에서도 우승을 밥 먹듯 당연하게 여기는 서울 소재 대학교에 추천으로 입학하게 된 첫 1년 동안에도 짬이 날 때마다 드문드문 북산에 얼굴을 비추곤 했지만, 그의 대학 추천 입학이 확정된 그해 마지막 전국대회였던 윈터컵 결과는 대만에게만 호사를 가져다준 게 아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북산 고등학교라는 이름조차 모르던 고교 농구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여름 인터하이에서는 왕자王者 산왕 공업 고등학교를 격파하고, 몇 개월 뒤에는 기어코 모든 고등학교 농구부를 제패制霸했다. 송태섭은 인터하이 당시 산왕전 후반동안 경기의 흐름을 이끌었고, 윈터컵 때는 농구부 주장으로 팀 전체를 이끌었으니 그만한 선수가 장학재단의 눈에 드는 건 당연지사. 송태섭이 장학재단의 일정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식도 참가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벌써 한 분기가 지났다. 때마침 시간이 비어 김포 공항으로 송태섭을 배웅하러 나갔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는 상황 속에서 그에게 자신의 대학 연습 경기 일정 같은 걸 알 리도 없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대만은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태섭이 짐짓 당황한 듯 침묵으로 시간을 삼키다가, 당황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기색을 가득 담아 툭 쏘아붙인다.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선배 연습 경기를 보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갑자기 할머니께서 이 시간에 전화하셔서는 사람 보낼 테니까 당장 좀 오라고 하시더라. 내일 연습 시합 있다고 하니까 그럼 오늘 오라고 하시는 거 있지. 진짜 너무하지 않냐?”

[네에. 네. 진짜 너무하시네요. 정말 너무한다― 그래서 지금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저한테 투정 부리려고 전화했어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미안. 그거까진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그냥. 요 며칠 좀 뒤숭숭한 꿈도 꾸고, 좀 복잡한 일도 생기고 해서. ――태섭이 네 목소리 들으면 좀 괜찮아질 거 같았거든.”

어휴. 수화기 너머로 긴긴 탄식이 들려와 대만은 나직한 웃음을 터트린다. 고등학교 3학년 내도록 농구와 영어 일체를 붙잡고 먼 길 유학 준비를 시작한 태섭을 보노라면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해, 부러 모른 척 외면하던 나날도 있었다. ……목소리 한 번 듣지 않은 지난 3개월을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느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지금 당장에 집중할 수밖에.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다소 오래되어 케케묵은 나날들을 새삼스럽게 꺼내는 일이 왜 이렇게나 즐거운지 모른다. 누군가와 담소하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적이 언제였더라. 대만은 기억조차 어렴풋한 옛일을 떠올리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실없단 생각이 들어 애써 웃음을 삼킨다.

[그럼 끊을게요. 잘 지내요 선배.]

“그래. 태섭이 너도 잘 지내고.”

……멀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화조차 시간을 잘 계산해야만 가능하게 될 줄은, 그리고 그런 현실이 그토록 아쉬울 수 없다. 어째서 아쉬운지는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끊어진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안에 그저 막막하고 답답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면부지의… 어쩌면 그 정체를 조금은 짐작이 가는 유혼의 추모굿에 대한 착잡한 심정만큼은 마냥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전히 새까만 밤하늘이 뜬 커튼 너머를 바라보던 대만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한다. 3시 57분. 대충 한 시간이 지나면 길거리 가로등도 소등해 완전히 어둑해질 시간이다. 다시 눈을 붙이기에는 무척이나 애매한 시간. 정대만은 잠깐 고민하다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농구공을 챙겨 자취방을 나선다.

운동화 끈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동여매고 길게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 슬금슬금 달리기 시작한다. 새벽 일찍부터 조간신문이며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부들의 거센 오토바이 엔진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 널찍한 차로와 인도를 저 홀로 독점하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척척척.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거리를 따라 번진다. 태섭과의 통화를 하며 제법 차분하게 정리된 줄 알았던 머리가 또다시 복잡한 심상을 품는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타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이따금 아버지를 만나러 해외여행을 가거나 가족여행이랍시고 이북을 포함한 전국 팔도 여기저기를 다녀본 적은 있어도 대부분은 방학을 맞이해 일주일 남짓 호텔이나 콘도에 숙박했으니 그걸로 살아봤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꿈자리가 용궁으로 변하더라도 내도록 살아온 인천과 맞닿은 서해인 줄 알았지, 가족들, 혹은 친척들끼리 몇 번 여름 휴양차 놀러 간 동해일 줄 누가 알았을까. 게다가 대학 동기들을 제외하면 자신이 추모굿 매개체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인천 토박이이고, 이영걸하고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보고 자란 이웃사촌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단 한 명, 중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왔다던 송태섭을 제외하고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칫 추모굿 매개체 노릇으로 학기를 통으로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만은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집안 문제로 당분간 학업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고 혹시라도 연락에 차질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기저기 비상 연락망도 갱신한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앞서 추모굿 매개체 노릇을 하셨던 친척 어른께 연락하여 조언을 구할까 고민하다가, 막상 그분의 함자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고민을 접는다. 할머니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렇게 무책임한 생각을 하면서.

정대만이 집안 문제로 당분간 학업을 중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대경실색한 건 그가 소속된 대학 농구팀이었다. 2년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고교 3년 인터하이며 윈터컵 공식전을 치르는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합을 풀타임으로 뛰었으며, 체력적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여 전술 전략을 결정짓는 핵심 선수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평균 7할을 훌쩍 넘기는 신들린 듯한 야투율까지 지녔다. 슈터를 지망하는 고교 농구 선수는 많지만, 6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쌓아 올린 기록을 따라올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92-93년 리그동안 팀의 주전 슈터로 뛰었던 선수는 졸업과 동시에 실업팀에 스카우트 되어 떠났고, 남은 선수들 중에서 정대만 만큼의 야투율을 자랑하는 사람도 없어 다가올 93-94년 리그에서는 본격적으로 주전 슈터로 올려 겨우 재미를 보려던 참에 덜컥 집안일이 생겨 학업을 떠나게 생길 줄이야.

“어떻게…… 그 집안일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없니?”

“그게, 저희 아버지께서 지금 해외에 계셔서. 아버지를 대신해서라도 제가 출석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동해 용왕이 얽힌,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유혼에 대한 추모굿 매개체 노릇이니 뭐니, 어지간히 무속에 해박하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이 없었던 대만은 중고등학교 시절 가끔 입에 올리던 이야기로 감독을 설득한다. 대타라고는 해도 다섯 형제의 막내인 아버지는 집안일 참석 유무가 제법 자유로운 편이지만 인천 출신도 아닌 감독님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다. 아쉬운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감독의 모습에 대만도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럼 일단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당장 어떻게 될진 모른다고 하니…… 대만이 너도 심란할 텐데 마음 잘 추스르고.”

새벽에 태섭이와 통화하며 마음의 준비는 얼추 끝낸 덕분에 그다지 심란할 것도 없다. 불의에 의해 농구를 잠시 쉬어야 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부상과 수술이라는 형태로 들이닥친 그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몸도 멀쩡한데다 할머니가 백방으로 도와줄 걸 알아 마음이 든든한 만큼 훨씬 나았다. 그래도 걱정해주시는 감독님 마음이 고맙고 감사해서 대만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체육관을 나선다. 이걸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전 준비는 끝났다. 추모굿 매개체니 동해 용왕이니 하는 무속적인 일은 할머니와 아예 직업이 한반도 무속사학자인 둘째 백부가, 그 외에 자잘한 문제는 어머니께서 처리해 주실 테니까 남은 건 자신의 아쉬운 마음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죽어서도 성불을 못해 동해 용궁에 못 박힌 유혼을 진혼하는 일이기도 하고, 동해 용왕까지 나선 일을 피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취방으로 돌아온 대만은 어질러진 집을 정리한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대로 휴학하게 될지도 몰라 가볍게 주변 정리도 끝냈고, 며칠 전 어머니가 주고 가신 냉장고 속 반찬을 빼면 얼마든지 자취방을 비워도 괜찮게끔 처리한 대만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오늘은 용궁 꿈 좀 안 꿨으면 좋겠는데…….”

동네 한 바퀴를 달리고 돌아와 샤워까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목이 다 늘어나 후줄근해진 티셔츠에 잠옷 바지까지 챙겨입은 대만이 이불을 펴고 침대에 눕는다. 일주일 내도록 보아왔던 동해 바닷속 몽유도원을 꿈꾸기에는 지나치게 피곤하다. 처음 꿈을 꾼 이후부터 꿈자리로 용궁이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으니 마냥 기대하기 힘들 걸 알지만, 오늘만큼은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숙면을 취하고 싶을 뿐이다.

……추모굿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매일같이 그놈의 용궁 꿈을 꾸겠지.

대만은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1. 월성: 경상북도 월성군. 1989년 1월 1일자로 월성군에서 경주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자로 경주시와 경주군을 통합하여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정착하였다.


공미포 8,285자.

소장본 작업을 하던 도중 본편을 통짜로 묶어 내는 것보다 적당한 시점에서 분할하여 챕터를 나누는 쪽이 읽기에 수월하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분할 작업을 하려고 보니, 연재본과 소장본의 배경년도(97/93)의 차이가 심한데다 중간에 배경계절이 갑자기 확 바뀐걸 깨닫고 허겁지겁 수정 겸 퇴고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퇴고가 한달씩이나 걸리는지... 그래도 최대한 매끄럽고 읽기 좋게 다듬은데다 태섭이 비중도 늘어났고 대만이 심리묘사도 잔뜩 추가했으니 전화위복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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