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 지도와 영토
2023.09.04
성별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곳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신체가 하나의 재능이자 재산이 되는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그러다 보니 한때는 여러 곳에서 성별과 형질 자체가 우대 조건이자 가산점의 요소가 되곤 했다. 스포츠계 역시 아주 오랫동안, 타고나는 골량과 근육량이 뛰어난 알파나 근육의 유연함이 뛰어난 오메가를 선호해왔다.
그 기준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박힌 지는 기껏해야 한두 세대 정도. 그나마 올림픽에서 제2성별에 따라 종목과 메달을 분리하면서, 팀 스포츠계는 다른 분야보다 그 인식이 수월하게 받아들여진 면이 있다.
분리가 진행된 이유는 인식 변화보다는 페로몬 탓이었다. 제2성별의 큰 특징 중 하나인 페로몬이 의지는 물론 감정에도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합 중 선수들이 심하게 흥분하는 일은 흔했고, 그럴 때면 보통 페로몬 조절이 느슨해진다. 페로몬은 호르몬의 부산물이라, 부가성별 비소유자라 해도 지나치게 강한 페로몬을 가까이서 접하다 영향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과거 스포츠계를 비롯해 몇몇 분야에서 유달리 많이 발병하던 자율신경실조증의 원인이 페로몬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을 정도다. 게다가 페로몬이 때로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인다는 이유도 있었다. 부가성별 소유자만 인식할 수 있는 페로몬으로 전략을 짜는 상황이 반복되면 당연히 비소유자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던 중 어느 기업이 페로몬을 이용해 승부조작을 시도했다 발각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종목은 빠르게 분리되었다.
그렇다 보니 제2성별과 그 형질이 주로 발현하는 중고등학교 시기의 운동부는 보통은 꽤나 혼란스럽곤 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또래보다 신체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일단은 타고난 재능인 신체는 마찬가지로 타고난 성징인 부가성별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베타가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지만 운동부는 대부분 부가성별 소유자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제2성별이 발현하면 팀을 분리하는 게 당연해지면서, 어제까지 팀의 주 전력이던 선수를 알파 팀에 보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세상의 대다수가 베타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도 결국은 오락인 탓에 어떤 종목이든 베타를 배제하고 유지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스포츠 명문고라면 베타 팀을 함께 운영하는 것은 매우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고등학교 운동부에서는 제2성별에 따라 팀을 나누더라도 감독은 한 사람이 겸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농구부를 학교의 얼굴로 세우는 산왕에서는 몇 년 전부터 팀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과거 산왕의 알파 팀이 몇 년째 연승하면서 한때 베타 팀에도 알파 특유의 수직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강요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훨씬 다양한 타입의 선수들이 모여 있던 베타 팀에서는 폭력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당연하게도 팀 성적은 수직하락했다. 결국 학교는 과단을 내렸다.
학교에서 베타 팀의 감독으로 스카우트해온 사람은 도진우 감독이었다. 산왕 감독은 늘 경력이 화려한 베테랑이었던 데 반해 도 감독은 서른을 넘긴 지 오래지 않은 아직 젊은 나이였는데, 그가 부임하자마자 시작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학생들과의 기나긴 면담이었다. 폭력과 무질서로는 승리는 물론 학생들의 미래도 얻을 수 없다는 게 도진우의 지론이었고, 1년도 되지 않아 팀의 분위기는 명확히 변하기 시작했다. 곧 팀은 도 감독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쳤고, 그는 부임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제자들의 전적인 신뢰를 업고 인터하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인터하이 3연패. 그러다 보니 진학이나 제2성별 등의 이유로 팀을 떠난 선수들도 여전히 종종 도진우를 은사라 칭하며 찾아오곤 했다.
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한 학년 위 선배였던 그는 작년까지는 이명헌과 같은 팀에서 포워드로 뛰었다. 윈터컵 우승컵을 쥐고 해가 바뀐 직후, 그가 갑작스럽게 알파 팀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 윈터컵까지는 같이 뛰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탈의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선배는, 문 앞에 서 있는 명헌을 보고는 조금은 후련하다는 듯 웃었다. 큰 짐은 며칠 전 다 정리한 덕에 선배의 손에는 자신의 9번 유니폼 하나만 담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그는 오늘 명헌이 코트 정리를 자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 ......네, 베시.
약간 텀을 두고 돌아온 대답에 그가 다시 웃었다.
- 잘 지내고, 나 없이도 내년에도 우승하고. 알았지. 아, 가끔 3학년 교실도 놀러 와.
선배는 주장으로 예정되어 있는 다른 선배 이름을 언급하며, 그 녀석과는 반이 같으니까 종종 오라고 권했다. 이번에도 명헌은 네, 하고 뻣뻣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코트 정리가 끝났으면 같이 돌아가자던 선배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명헌아, 하고 불렀다.
- 이거 받아. 너 줄게.
명헌의 눈에도 익은, 지난 1년간 상대방의 손목에서 소임을 다하던 검은색 아대였다.
한때는 내려다보아야 했으나 지금은 명헌의 키를 넘어선 지 오래인 동기는 투박하지만 세심했다. 주전이 갑작스레 한 사람 비면서 조금 더 일찍 벤치에서 나올 수 있게 된 신현철은 제 행운 혹은 실력에 맘껏 기뻐하는 대신, 이명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 이명헌.
- 왜베시.
- 내가 코트에서 네 공 받고 싶어 했던 거 알지.
- 베시.
- 너한테 제대로 축하받고 싶으니까, 오늘만 빌려준다.
신현철이 입을 꾹 다물고서 가만히 공을 닦는 명헌의 옆에 털썩 앉았다. 낮아지는 시선이 어제까지는 본 적 없는 오른쪽 손목의 아대에 닿았다가 다시 빈 코트로 향한다. 얼마간 같이 침묵을 지키던 현철은 갑자기 명헌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얹었다. 그 서툴고 털털한 위로가 간지러웠지만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목을 45도쯤 꺾은 채로 여전히 공을 닦고 있자니 현철이 탕 소리가 나게 공을 쳐서 날려버렸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있었다. 한참을.
그해 정우성이 입학했다.
에이스라는 명칭의 무게는 어디서나 가볍지 않지만 산왕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서 선두를 다투던 선수들이 모인 곳이니, 눈에 띄기도 쉽지 않지만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팀에서 제일 잘 뛰고 점수 제일 잘 내고 실력 제일 좋으면 에이스지, 뭐. 그렇지만 이 자존심 강한 백여 명의 선수 모두가 저 녀석이 바로 산왕의 에이스라고 입을 모아주기를 바라는 건 그야말로 욕심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산왕에서도 명실공히 에이스였다.
3학년 때 전중이 끝나자마자 베타 팀으로도 알파 팀으로도 모두 스카우트가 들어갔다고 했다. 산왕에서 이 학생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입부식 이후로 며칠 동안 훈련과 연습 경기가 이어졌고, 정우성이 이명헌에 이어 1학년 주전으로 오르리라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명헌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3학년들 표정에 기대보다 걱정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네가 보기에는 어때?
지나치게 솔로 플레이를 하는 점이 걱정된다며, 주장은 아직 2학년인 명헌에게도 정우성의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전중 예선과 본선 경기였다. 본선까지 오르긴 했지만 강팀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팀. 정우성 한 사람을 빼면 다른 팀원들의 실력은 볼 것도 없었다. 저 중 대부분은 산왕은커녕 그 지역 일반고에서조차 벤치를 벗어나지 못할 게 빤했다. 어쩌면 벤치에도 못 앉을지 모르고. 다르게 말하면 저런 팀원들을 데리고도 전중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첫 번째 경기까지 올라간 정우성은 괴물이라는 얘기다. 다만 눈에 밟히는 점이 있었다.
- 패스가 거의 나가질 않지.
- 그러네요베시.
- 유일한 득점원인 건 알겠는데, 무슨 팀이 공을 한 명한테만 몰아주는 거야. 아무리 실력 차가 크다고는 해도, 이래서야 쟤 말고는 거의 들러리잖아. 팀하고 같이 뛸 생각을 안 하는 건가?
연습경기 때도 좀 그런 태도였고, 팀워크를 무시하는 선수는 곤란한데. 주장이 혀를 찼다. 비디오를 한참 살펴보던 명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 팀워크를 무시하는 타입이 아니라베시, 아예 겪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시.
본인 탓인지 주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베시. 이명헌 역시 그 산왕에 스카우트를 받고 들어와 자그마치 유일한 1학년 주전으로 뛴 선수다, 예전부터 과한 기대와 은근한 질투를 받는 데는 익숙했다. 그러나 명헌은 사람을 예민하게 간파하는 타입이고 종종 변명거리로 써먹을 만한 4차원 콘셉트도 갖고 있다. 거기에다 산왕의 존재감이 거한 영향을 끼치는 이 지역 출신이기도 하고 득점보다는 패스를 우선하는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 덕도 봤다. 정우성에게 그런 요행이 하나도 없었다면? 뛰어난 스코어러인 게 코트 안에서고 밖에서고 오히려 내내 독이 되었다면.
어쨌든 이렇게나 뛰어난 선수가 들어온 이상 그를 쓰지 않고 넘길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신입 하나를 위해 산왕 자체의 스타일을 바꿀 이유도 없고. 그러니 정우성에게 팀을 가르쳐야만 했다.
- 1학년부터 주전으로 뛴다는 공통점도 있겠다, 한번 잘 얘기해봐. 쟤한테 공 던져줄 사람도 너고.
처음부터 자기가 나서느니 그래도 학년이 조금 더 가까운 네가 먼저 얘기를 해보는 게 낫겠다고 주장이 등을 떠밀었다. 네가 미리 좀 굴려두면 나중에 나는 편하겠지. 뭣하면 현철이 데려다가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라도 해보고. 그런 연유로 정우성의 교육은 이명헌에게 떨어졌다.
몇 년을 손에 붙은 버릇이 한두 번 만에 고쳐질 수는 없는 법이다. 1on1이 아니라 경기를 뛰는 느낌으로 뛰어보라는 지적에도 정우성의 움직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공이 근처로 오면 반사적으로 낚아채 혼자 무조건 안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상대는 중학생이 아니라 산왕의 선배들, 뚫는 일도 잦았지만 적지 않은 공이 수비에 막혔다. 그 후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면 본인도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역시 아예 겪어본 적이 없는 거베시. 저 정도로 실력 있는 애가 왜 저렇게 된 거지.
몇 번의 연습 경기가 끝난 후 명헌은 우성을 따로 불러냈다. 체육관 뒤 작은 공터로 불러내자마자 답을 알 수 있었다. 불순한 태도로 돌을 툭툭 차대며 따라온 후배가, 자리를 잡자마자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냉큼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 얼굴이랑 팔다리는 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계심 가득하고 딱딱한 말투. 무슨 소린가 싶어 대꾸도 않고 쳐다봤더니, 또 냉큼 대답한다. 제가 맞을 짓 한 건 알아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 무슨 짓베시.
- 공 독식한 거에 화 나셨잖아요.
- 그것 때문에 부른 건 맞다베시.
- 아, 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는 잔뜩 반항적인 자세로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당연히 제가 맞을 거라 상정하고 벽부터 치는 걸 보니, 팀워크를 잘 모르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명헌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명헌은 사람을 유도하고 부릴 줄 알았으나 누구나 그렇진 않지. 작년에는 본인이 최고 학년이었고 다들 정우성 하나만을 보며 매달리는 팀을 거쳐 왔는데도 이런 태도다. 중학교에서 겪은 '선배'들이 어땠는지 눈에 환히 보였다.
그리 살갑지 않은 성격이라 더 미움을 받았나 생각하자, 마찬가지로 본디 유순하지 않은 명헌은 조금 연민이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건방지대도 사람을 두들겨 패는 걸로 해결이 되겠냐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 신입을 지금 꺾어두지 않으면 곤란하긴 했다. 이명헌이 산왕의 흐름을 주도하는 한, 동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선수는 자신의 코트에 필요 없었으니까.
- 그런 태도로 굴면 더 맞을걸베시.
고개를 푹 숙인 몸이 움찔거렸다.
- 근데 우리가 공 좀 차지했다고 후배를 두들겨 패기나 하는 선배로 보였다니베시, 유감베시. 이건 심각한 문제베시. 선배인 우리가 심히 반성해야 할 상황베시. 감독님과 이후 대처를 진지하게 논해봐야겠다베시.
네?! 이 상황이 싫어 죽겠다는 오라를 뿜어대며 바닥만 쳐다보던 밤톨 같은 머리가 확 들린다. 처음 불려 나올 때 눈에 담겨 있던 완고한 반항은 허물어지고, 당황과 난감함이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 당장 들어가서 감독님과 면담베시. 2, 3학년 다 집합베시.
몇 초 사이에 동글동글한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가 시뻘겋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좀 전까지 잔뜩 세워대던 가시가 후드득 떨어진다. 속내를 못 숨기는 편. 명헌의 머릿속 메모장에 한 줄이 적혔다.
- 문제 제기자인 우성은 프리젠테이션 준비베시. 워드프로세서 잘 다루냐베시.
언 밤 구워지는 밤 익은 밤 탄 밤 무지개색을 거쳐 새하얗게 질려가던 얼굴에 뒤늦게 색이 돌아왔다.
- ......혹시 방금 농담하신 거예요?
- 이제 알았냐베시.
- 어...... 정말 농담이에요? 아, 진짜!
- 때리려고 부른 거 아니다베시. 애초에 힘으로 후배를 누르는 선배는 없는 팀베시. 네가 먼저 주먹질을 하면 모를까베시.
아니, 뭘 표정도 하나 안 변하고 이런 데서 농담을 해요! ......아니, 하세요...... 아, 저, 따지는 건 아니고요...... 세워둔 벽이 우르르 무너진 신입은 머리를 부여잡고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뻐끔대는 입을 보며 머릿속으로 한 줄을 더 적었다. 생각이 그대로 말로 나오는 편.
- 문제점을 알고 있다니 굳이 다시 지적은 않겠다베시.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민해보고베시, 모레 오전에 나랑 한 번 더 면담베시. 메모할 거 챙겨와라베시. 이상. 베시.
- 네, 에......?
한번 당황하고 나자 정우성의 투지는 단숨에 꺾였다. 폭력으로 위계를 세우지 않는 팀이라는 장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고. 곧바로 순순해진 태도를 보니 팀에 맞게 다듬어볼 여지는 충분해 보였다. 하긴, 스카우트를 받아들였다는 건 본인도 여기 오고 싶어서 왔다는 소리일 테고. 어쨌든 상황을 소화할 시간을 좀 줄까 싶어 혼자 돌아가려는데,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우성이 말을 걸었다. 여전히 조금 겁은 먹었지만 이번에는 통 튀어 오르는 목소리.
- 저기, 근데요.
저기가 뭐야, 선배한테.
- 베시는 뭐예요?
딱. 이 정도로 학교폭력 소리를 듣진 않겠지. 명헌은 되바라진 후배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우성이 악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쥐고 주저앉았지만 무시하고 체육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 번에도 기어오르면 그때는 나쁜 경찰도 출동이다베시.
경계심이 풀리자 정우성에게 변화가 두 가지 생겼다.
하나는 당연히 플레이 스타일. 혼자 치고 나가는 버릇이 아예 사라질 수는 없었지만, 다루기 난감했던 후배는 서너 번 제대로 맞춰본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알지 못했을 뿐 혼자 뛰지 않아도 뒤를 단단히 받쳐줄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팀원들과 협력해 공격수를 가두거나 상대의 파울을 유도하는 플레이를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팀의 지원을 받아 혼자서 수비수를 단숨에 헤치고서 파고 들어가는 공격은 머지않아 팀의 큰 무기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태도였다. 워낙 꼬장꼬장하게 굴기에 좀 냉한 성격인가 싶었는데, 딱히 미움받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처음 몇 번은 조심조심 눈치 보듯이 다가오더니, 선배들의 칭찬 몇 번이 더해지자 곧바로 꾸미지 않은 본모습이 드러났다. 잘 웃고 금세 울고 선 안에 들인 사람들에게는 정도 깊은 성격. 거기에 조잘조잘 시끄럽기까지.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는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쉽게 남을 비난하거나 깔보는 성품도 아니었다. 당장 어제 신현철에게 목을 졸린 발언 역시(현철 선배, 오늘도 외곽슛 엉망이었잖아요, 아직 덜 큰 거 아녜요?) 현철의 키가 아직 자라는 중이라 외곽슛이 흔들리는 거 아니냐는 사실 적시적인 질문이었다. 물론 말의 내용보다는 껍데기가 문제라, 현철의 화려한 기술에 주장과 부주장은 박수나 쳐줬지만. 아악, 잠깐만요! 주장, 명헌 선배, 살려주세욕!! 이제는 익숙해진 괴성을 배경음악 삼아 매니저와 명헌은 느긋하니 이온음료를 들이켰다.
이런 녀석이 대체 어쩌다가 처음 들어올 때는 그런 꼴이었던 거냐며 주장과 신현철은 탄식했고, 몇 주 뒤에는 그냥 까칠하게 굴게 놔뒀어야 했다며 한탄했다. 신현철은 원래도 좋아하던 레슬링 잡지를 더 자주 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정우성이 제일 치대는 사람은 자기를 대놓고 귀여워하는 주장도 툭하면 애정 어린 신체접촉을 나누는 신현철도 아닌 이명헌이었다. 1학년들은 대부분 표정 변화가 적고 말투도 특이한 명헌을 어려워하는 눈치였는데, 우성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무서워? 되게 웃긴 사람인데? 하고 동기들에게 반박하기까지 했다. (너 지금 선배가 웃기다고 한 거냐? 신현철의 팔뚝이 또 한 번 불을 뿜었더랬다.) 제일 먼저 편히 말을 걸어준 선배라서려나. 왜, 짐승들도 그런다지 않는가. 저 일화를 전해 들은 명헌은 밤톨처럼 생긴 새끼오리를 상상해보았다. 우성은 새끼오리라기에는 조금 크지만.
선배였던 호칭은 인터하이 우승 즈음해서 형으로 바뀌었고, 호칭만큼이나 거리감도 반타작이 났다. 솔직함이 큰 장점이자 단점인 막내 에이스는 연습 경기나 훈련이 지루해질 때마다 현철이나 명헌에게 달라붙었다.
- 농구는 팀 경기인 거 알아요, 아는데에.
요놈 또 건방 떠네. 악, 현철이 형! 타임, 타임! 간헐적으로 레슬링 기술로 정우성을 두들기면서도 결국 어울려주는 건 주로 신현철이었다. 저놈 자식은 뭘 먹고 저렇게 매일같이 파릇파릇하냐. 깊은 한숨을 쉬는 동기의 옆에서 명헌은 피식 웃음으로만 답했다. 그러고 있노라면 말간 얼굴이 불쑥 다가와서는 활짝 웃었더랬다. 현철이 형 진짜 나빴다, 명헌이 형은 내 편 해줘요!
- 그러다 또 현철한테 혼날걸베시.
- 그럼 내일은 형이랑만 할래요, 10점 먼저 내기요.
형도 나랑 하는 게 제일 재밌잖아요. 나중에 내가 바빠서 안 해준다고 하면 형이 서운할걸요? 미리미리 잘해주시라고요. 바로 좀 전에 신현철의 팔뚝 맛을 보고도 우성은 꼿꼿했다. 두툼한 손바닥으로 매끈한 얼굴을 철썩 올려치면서 명헌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고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은 늘 또렷한 선으로 날아와 박힌다. 눈이 마주치면 아마도 그대로 꿰일 것만 같다.
그런 우성도 한 사람에게는 날카롭게 굴었다.
우성이 입학하기 전 알파 팀으로 옮겨갔던 선배는 팀을 옮긴 후로도 도진우를 은사라고 부르며 가끔 찾아왔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부가성별 소유자가 비소유자들이 쓰는 체육관에 찾아오는 것도 금지해야겠지만, 어차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몸이고 연습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다들 그러려니 넘겨준 덕이다.
그러나 그 선배가 나타나면 우성의 집중력은 흐트러졌다. 유달리 명헌을 아끼던 선배인지라 그는 찾아와서 도 감독과 대화를 마치고 나면 늘 명헌을 불러냈다. 가끔 훈련이 끝나는 시간이 맞으면 명헌이 먼저 다가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성은 답지 않게 선배들에게 원칙 운운하며 따져들었다.
- 저 사람은 원래 여기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자꾸 들어오게 해요?
- 저 사람이라니. 팀은 달라도 선배다, 자식아.
퍽 소리가 나게 우성의 등짝을 후려치는 건 현철의 몫이었다.
그 선배가 찾아올 때면 눈치 빠르게 현철이 우성의 목덜미를 쥐고 코트로 끌고 나갔지만, 그렇다고 우성이 제대로 집중하지는 않았다. 선배가 검은 아대를 찬 명헌의 손목을 쥐고 웃은 날에는 특기인 풀업점퍼를 세 번 연속 실패하는 바람에 혼자 코트를 정리하는 벌을 받기까지 했다.
선배라고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새끼 맹수를 눈치 못 챌 수는 없었으리라. 1학년 꼬맹이 상대로 굳이 태도를 지적하러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스포츠 선수란 싸움이 걸려오면 상대를 밟고 승리를 쟁취해내야 속이 풀리는 족속인지라, 그 선배도 가끔 일부러 도발하듯 우성 쪽을 보며 웃곤 했다. 그런 날에는 우성은 현철에게 매달려 거의 날뛰다시피 했다.
- 현철이 형, 저 사람 왜 저렇게 자주 와요? 시간이 남아돈대요? 뭐, 그럼 그런 시간에 공이나 몇 개 더 던지든가?
- 얌마, 말 예쁘게 안 할래. 주장이나 명헌이 앞에서는 그딴 소리 꺼내지도 말고.
- ......이씨.
+ + +
대표로 꽃다발을 건네고, 형식상이지만 차기 주장으로 전대 주장의 일지를 받아 들고, 그러고 나면 이어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고함 소리. 졸업식에 이어 체육관에서 농구부의 일정까지 마친 후 짐을 던져둔 관중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더플백에 작은 쪽지가 꽂혀 있었다. 명헌은 망설임 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 아쉽네, 너한테 꽃다발을 받고 싶었는데.
교정 구석,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인 나무 아래에서 선배가 미소를 지었다. 문득 눈이 부신 것은 눈더미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탓일까, 그가 웃고 있어서일까.
그의 손에는 둘 다 잘 아는 벽돌색 공이 들려 있었다. 졸업식 날에도 공을 들고 오셨느냐고 물으려는데 홀연히 공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드니 선배가 손을 까딱했다. 그 신호에 명헌이 휙 손목을 털자, 공은 빨려들어가듯 선배의 손 안에 안착했다.
- 아, 이 느낌이야.
그가 기쁜 표정을 짓는다.
- 이게 그리웠어, 명헌아. 저 팀에서 공을 받을 때마다 더는 코트 위에서 네 공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꼭 받아보고 싶었지 뭐야.
이걸로 마지막이겠지만.
가볍게 덧붙이는 말의 무게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이명헌의 제2성별 발현 가능성은 9%. 사실상 절대적인 베타에 가까운 수치다. 90이 넘는 수치를 뛰어넘어 알파로 변하지 않는 한, 명헌은 다시는 선배와 같은 코트에서 뛸 수 없다. 대학 리그 이상으로 가면 이 구분은 더더욱 엄격해져, 부가성별 소유자와 비소유자는 시즌도 시기가 조금씩 비낀다. 페로몬이 끼칠 영향을 대비해 경기장은 물론 연습장과 숙소조차 가능한 한 겹치지 않게 잡는다. 선수로는 우연히라도 같은 코트에 설 수는 없다는 뜻이다.
코트 밖에서야 언제든 만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공과 운동화를 긁어낸 다음에야 그어지는 선. 코트 위에서 시작한 것들은 더는 무엇도 계속되지 못한다.
다시는 서로에게 공을 던져줄 수도, 던져진 공을 받을 수도 없는 관계.
농구에서도 당연히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건 키일 수도 있고 시야일 수도 있으며 타고난 재능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헌에게 한계란 때로는 세계가 제 곁을 빼앗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 명헌아, 잘 지내. 주장 된 것도 축하하고.
- 선배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포인트가드의 숙명이란 때로는 림으로 향하는 이들의 등을 바라보는 것. 작별은 가끔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상대를 잠깐 바라보다가, 명헌은 1년 동안 자신의 손목을 지켜주었던 검은 아대를 천천히 벗어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문득 손목이 욱신거렸다. 아니, 어쩌면 심장이.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누는데, 선배가 살짝 귓가로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 너희 팀 꼬맹이, 그만 나와도 된다고 해. 나 밤길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다. 하핫.
- 베시......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쪽지를 보고 뒤뜰로 향하는 명헌의 뒤에서 딴에는 미행이랍시고 종종걸음으로 온갖 모퉁이를 누비며 쫓아오던 그림자. 심지어 방금은 우두둑거리는 소리까지 났다. 나뭇가지라도 부러뜨린 모양이지.
- 그렇지, 쟤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라.
선배의 눈가가 개구지게 휘었다. 쟤, 잠재성이지?
아직은 아니지만 알파 또는 오메가로 발현할 확률이 100%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공식 명칭은 좀 더 복잡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잠재성이라고 불렀다. 발현이 임박한 사람 중에는 페로몬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읽을 수는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일상에서는 부가성별 소유자와 동일하게 보았지만, 스포츠계를 비롯한 몇몇 분야에서는 취급이 조금 달랐다. 부가성별 리그에서는 페로몬 자체가 경기 중 소통 수단과 스킬의 하나로 쓰이기 때문이다. 아직 페로몬을 발산하고 움직일 수 없는 잠재적 발현자는 제2성별이 확실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베타로 취급된다. 단 모든 공식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 발현 여부와 가능 수치를 매번 검사받아야 한다는 조건하에. 아직 잠재성인 정우성의 수치는 알파 94%. 당장 내일이라도 알파로 발현할 수 있는 수치였다.
- 내가 너한테 몇 번, 페로몬을 살짝 씌운 적이 있거든.
장난기가 살짝 섞인 목소리에 명헌이 눈을 크게 떴다. 베타니 당연한 일이지만 전혀 몰랐다.
- 처음에는 오랜만에 도 감독님하고 대화하다 보니 흥분해서 약간 제어를 못했던 것 같은데, 걔가 너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게 재밌어서 좀.
그리고 질투도 약간 있었나.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선배가 웃었다. 그래도 좀 봐달라고 해, 걔는 아직 이명헌이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잖아. 장난기 어린 목소리 사이에서 단어 하나가 삐죽 가시를 세웠지만, 명헌은 그 삐죽임을 가만히 눌렀다.
- 네, 아직요, 베시.
속이 작게 따끔거렸다.
선배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뒤쪽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자, 나무 뒤에서 우성이 파드득 튀어올랐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나무 뒤라고 본인이 믿는 곳에서. 으엑, 저 여기 있는 줄 알았어요? 삐끗 깨지는 목소리가 어이없다. 그 덩치가 나무에 가려질 거라고 생각했다니 저것도 자신감 과잉 아닌가, 명헌은 잠깐 고민했다.
당연히 호되게 혼날 줄 알았는지 어깨를 바짝 세우고 쫄아 있던 주제에, 명헌의 태도가 덤덤하자 우성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 형, 아까 그 선배가 뭐래요?
- 잘 있으라는데베시.
- 아니, 그거 말고, 그...... 아까 왜......
- 뭐베시.
- 아, 그 쫌...... 그러니까......
우성이 괜히 신발 앞코로 땅을 콩콩 찧으면서 양 팔을 등 뒤로 돌린 채 몸을 비비 꼬아댔다. 그러나 혈기 넘치는 성장기 남고생이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코트 위뿐이다. 현철이었다면 당장에 허리를 꺾었을 텐데, 그 희망사항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명헌은 뒷짐을 지었다. 가슴이 펴지고 턱 끝이 살짝 올라간다. 형이 아닌 선배의 자세다. 자세를 따라 목소리가 단단해진다.
- 정우성.
정우성이 신현철의 무자비한 팔뚝보다 조금 더 무서워하는 건 이명헌의 모서리진 목소리다.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 아까 그 사ㄹ...... 선배가 형한테 귓속말 했잖아요!!
아마도 벌컥 튀어오른 말끝이 젖어 뭉그러진 탓일까, 명헌은 저 반드러운 알밤머리를 쥐어박으려다 마음을 접었다. 정우성이 울먹일 때면 이명헌은 늘 손끝이 저릿했다.
미안하다고 전해달래베시. 뭐가요? 저한테요? 왜요? 뭘 했는데요? 다닥다닥 호흡마다 달라붙는 방정에 공기가 동동 떠올랐다. 잔잔한 우울도 양껏 즐기지 못하게 해준 후배가 조금은 고맙기도 해서, 명헌은 우성을 끌고 천천히 걸으며 순순히 이야기를 전했다.
고까운 인간에게 놀림 당했다는 걸 알고 펄펄 뛰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우성이 불쑥 멈춰섰다. 몇 초 늦게 옆이 빈 걸 깨닫고 명헌이 고개를 돌렸는데,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여름 같은 초록색이 설풋 도는 밝은 갈색 눈동자에는 분노나 짜증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굳이 말하자면......
- 어...... 그냥 그런 거였대요?
- 베시?
- 그냥 마운팅이었던 거예요? 뭐야...... 그럼 됐어요.
또각, 또각. 운동화 끝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이 꺾여나가 부스러졌다.
- 나는 그 선배가 형을......
우성은 말을 끊고 입을 다문다. 뒤로 이어질 말은 알 듯도 하고 전혀 모를 듯도 하다. 그 사람이 우리 체육관에 들어올 때마다 형이,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래서. 여전히 멈춰서 있는 우성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말끝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목소리에는 아직 설익은 간절함이 묻어 있다.
- 그럼 형은 괜찮은 거죠......?
손에서 흘러나갈 것만 같은 무언가를 힘껏 움켜쥐지도 아예 놓지도 못한 채 그저 필사적으로 붙들기만 하는 마음을, 명헌 또한 알고 있다. 명헌은 우성을 두고 그대로 걸어가야 할지 함께 멈춰서야 할지 고민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이기에.
공을 따라 손 끝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이 열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마도 알고 있을 텐데.
+ + +
- 명헌아, 나는 산왕에 지배하는 주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명헌이 다음 주장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헌 본인까지도. 그러니 윈터컵을 앞두고 도 감독이 이명헌을 불렀을 때 모두가 이듬해 주장 자리를 맡으라고 지시하겠구나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너는 영민하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리지. 항상 침착하고 흔들리지 않아서 모두의 닻이 되어주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다들 네 앞에서 함부로 굴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게 다였다면 너에게 내년 주장이 되라고 얘기하지 않았을 거야.
도 감독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단호하다. 그 아래 깔린 그늘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순간 도진우가 그 그늘을 보게끔 허락하는 이명헌뿐이다.
- 명헌아, 너는 최고의 가드다. 우리 팀에서 네 공을 받기 위해 자기를 눌러죽이는 선수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야. 네가 각 선수에게 알맞은 공을 던져주니까. 이명헌의 공이 아니라 상대방의 공을 던져준다고. 그게 내가 널 주장으로 올리고 싶어 하는 이유다. 그럴 수 있는 네 능력이 가끔 널 괴롭힌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그 능력은 네 가장 큰 무기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가 그 힘에 눌리지만 않는다면 네가 있는 산왕은, 그리고 너는 앞으로도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러길 바라고.
할 수 있겠니.
도진우가 산왕을 최강으로 이끄는 감독인 이유도 이것이리라. 그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명헌의 모순을 알아보고 그럼에도 이 세계를 향한 누를 수 없는 사랑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제 제자들의 코어를 꿰뚫어보는 사람이다.
문득 이명헌은 도 감독 또한 베타로서 오래 코트를 누볐던 사람임을 기억해낸다. 그러니까 아마도, 자신의 땅에 존재하는 한계가 뭔지 알고 있을.
이명헌은 코트 위에서 언제나 선을 긋는다. 명헌이 보는 대로 선이 그어지고, 그 레인을 따라 공이 날아간다.
그는 코트를 사랑한다, 이 땅 위에서 격정을 억누르고 평정을 가장하는 순간마다, 그 불꽃이 눌려 단단해지는 만큼 다시 코트를 사랑하고 만다. 그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사랑이 깊다는 뜻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격렬히, 무감한 표정 아래로 수만 번 수억 번 누르고 감쳐 꿰매넣은 만큼이나 짙고 두터운 욕망은 또 다른 색을 띠고 있다. 코트를 세계로 삼아 몇 번이고 승리를 끌어내는 황홀감, 동시에 미치도록 사랑하는 코트 위에서 그 흐름에 함께 녹아들기를 바라고 마는 갈망. 저울이 양쪽으로 세차게 뒤척인다.
그렇기에 명헌은 코트를 죽을 만큼 사랑하고 꼭 그만큼 제가 그어놓은 선들을 증오했다. 자신의 승리가 거대한 정사각형의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이 황홀했고, 자신의 승리가 림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저울은 늘 수평에 가까웠으나 아주 가끔, 분노가 한 방울 더 찰랑거릴 때가 있었다. 드물게 맞는 패배도 몇 번이나 뒤바뀌는 점수판도 결국에는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러니 그것은 이명헌이 대응하고 바꿔쓸 수 있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래, 그러니까 마치 그날처럼, 제가 긋는 선 위에 마땅히 서야 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날처럼.
나는 그리고 긋는 사람이기에 당신의 지도가 되는 일밖에 할 수 없는데, 왜 내가 그려낼 수 없는 땅이 끝내 나의 이야기를 빼앗아가는가. 이명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절망의 형태는 꼭 그러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코트의 지도가 될 수 없는, 어느 땅에 얽매인 한계에 불과한 모습으로.
그러니 기꺼이, 결코 짓눌리지 않겠노라고 이명헌은 다짐하고 또 맹세한다. 이것은 작별을 아는 자들끼리의 약속이다.
+ + +
포인트가드는 제가 선 코트를 살피고 읽는 포지션이다. 길이 28미터, 너비 15미터에 높이 3미터. 그 네모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읽고 이끄는 사령탑. 그리고 이명헌의 특기는 거대한 물살처럼 그 흐름을 움직이고 끊는 것이다.
이명헌은 코트 위에서 언제나 타인의 한계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를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상대 팀의 가드들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고 배치해야 하는 팀원들에게도 그러했다. 이명헌의 수비를 뚫지 않으면 상대는 림으로 향하지 못한다, 이명헌의 손이 공을 던져주지 않으면 팀원들은 림으로 향하지 못한다, 그는 종종 턴의 결말로 향하기 위해 넘어서고 순응해야만 하는 한계로 존재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그의 한계를 인지하는 순간, 명헌은 진심으로 동요했다. 그 동요가 지닌 이름은 정우성이었다.
이명헌은 정우성이 제 선을 깨부수고 들어온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2학년인 이명헌, 신현철에 1학년 정우성까지. 산왕에서는 드물게도 스타팅 멤버에 최고 학년보다 그 아래 학년이 더 많이 들어간 해였다. 그 해 역시 어김없이 산왕은 시드를 받았다. 정우성이 13번을 받아 주전으로 처음 참가하는 인터하이가 코앞이던 시기. 그날도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명확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오전부터 계속 뭔가가 찜찜하던 날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자신 안의 뭔가를 온전히 억누르지 못해 마음속 어딘가에서 덮개가 들썩거리던, 혹은 한계를 모르는 듯한 눈부신 누군가의 모습 탓에 힘껏 눌러둔 갈망이 몸부림치던 날.
언제나처럼 공을 던지는 순간 몇 년이나 잊고 있던 감각이 날카롭게 뒤통수를 긁어댔다.
잘못 던졌어, 손가락을 조금 더 꺾어서 더 뒤쪽으로 던졌어야지.
산왕에 발을 딛기 한참 전의 아직 서툴고 미숙하던 시절, 아직 제 손에 좀 더 익숙하고 편한 감각을 버리지 못했던 어린아이의 공. 그날 동료의 손끝을 스치고 코트 밖으로 나가버린 공은 패배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어린 명헌에게는 실패의 기억으로 새겨졌더랬다.
그저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완벽에 가깝게 선을 긋는 것은 이명헌의 강박이자 자부심이다. 상대의 안에 옅은 위화감이 피어나는 순간이 스칠 때면 그 긍지는 상처 입곤 했다. 타인에게서 덜컥 터져나오는 감탄이 명헌의 안에서는 종종 희열로 자리 잡았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다 해도 명헌에게는 제 안의 저울을 진정시킬 몇 방울이 언제나 필요했으니까.
공을 따라 뒤늦게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세찬 바람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거리가 조금 모자랐을 터인 정우성이 그 공을 멋지게 받아들고는 돌파한 것이다. 우성은 곧바로 드리블로 수비수를 하나 더 따돌리더니 높이 뛰어올랐다. 3점이야! 응원단 어딘가에서 작은 외침이 들렸다.
멋지게 스위시로 네트를 가른 공을 등지고 돌아서며 정우성이 외쳤다.
- 명헌 선배, 나이스 패스!!
손이 맞부딪는 소리에 선 하나가 깨져나간다.
코트 위에 처음으로 세계를 한정 짓지 않는 이가 내려왔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명헌의 공을 던져도 되는 상대가 달려들어 그의 단단한 벽을 들이받는다. 어떤 형태로 건네더라도 그 공을 받아 림에 꽂아넣을 수 있는 거대한 빛. 이명헌의 손과 시야가 약간의 불편함을 굳이 견뎌내지 않았는데도, 역시 당신은 최고라며 그 아이가 웃는다. 이명헌이 강박에 가깝게 쌓아올려 감내했던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우그러지는 소리 뒤로 해방감이 밀려왔다.
과거의 언젠가, 명헌은 생각했다. 그 선배는 자신이 긋는 선 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이라고. 크리스마스 트리 제일 높은 곳에 놓인 반짝이는 별처럼. 그 별이 없으면 장식은 미완성이듯, 명헌의 코트도 때로는 문득 불완전했다. 여전히 옳은 선을 긋고 바른 곳으로 길을 내는데도 늘 제 눈보다 높이 있는 어딘가가 텅 빈 채로.
그리고 정우성이 나타났다. 처음에 우성은 색이 조금 다른 별 장식으로 보였다. 높은 곳에 홀로 놓일, 반짝이지만 그만큼 외로운 별장식. 그러나 별은 별로 놓여야 하므로, 명헌은 다가가 물었다. 너한테도 너를 더 높이 올려줄 나무가 필요하니. 다시 한 번 제 무릎을 대어줄 요량으로.
그러나 소년은 다르게 웃었다. 별을 잃어버렸어요? 그럼 더 많이 가지러 가요.
나무 하나가 아무리 커봤자 그냥 나무잖아요. 검은 아대가 없는 손목을 덥석 움켜쥐고 정우성이 달려나간다. 몇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흩어진 하늘로. 나무 몇 그루가 꺾이고 별 장식 한두 개가 나뒹군다 한들 빼앗긴 줄도 모르게 거대한 세계로. 무엇 하나 어렵지 않다는 듯 선으로 그어놓은 한계를 겅중겅중 뛰어 넘어가는 소년은 더없이 지루하고 또 행복해 보였다.
- 나, 미국에 가려고요.
그래서 그야말로 정우성에게 걸맞은 광활한 가능성을 마주했을 때, 명헌은 생각했다.
너무 커다란 너를 눈에 담아버린 순간이 내게는 기적일까, 상실일까.
정우성은 언젠가 마땅히 이명헌의 코트를 벗어나야 하는 이였다. 그 자부심 넘치는 산왕의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기꺼이 에이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던 눈부신 선수. 한갓 땅의 이름을 지고 있는 산왕이 그 맹금의 둥지가 될 수는 없으니. 그렇기에 정우성을 보내는 것은 괴롭지 않다. 행여 우성이 더 남아 있겠다고 투덜거렸대도 누구 하나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너는 기어이 거대한 세계로 떠나야만 하는 자.
그래서 소년이 마침내 바다를 건너겠다며 목소리를 드높였을 때, 명헌은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그 등을 밀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단절이 기다린다는 것은 여전히 슬픈 일이다.
+ + +
이명헌이 주장을 단 해, 인터하이에서 산왕은 시드 1차전 패배라는 당황스러운 사건을 겪었다. 최강 산왕의 이름을 들기에 누구보다도 마땅했던 팀이었기에 그 충격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미국에 가기 직전까지 산왕에서 뛰고 싶어 했던 우성은 꽤나 오래도록 울었다. 예상조차 못했던 일에 명헌조차 늘 품고 있던 어떤 각오를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방심은 늘 길을 잘못 이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터하이의 현실 같지 않은 패배가 지나고 보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정우성의 제2성별이 발현했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긴 했지만 시기가 시기인 탓에, 출국을 고작 이삼 주 앞두고 바다 건너의 수속을 바꾸느라 학교와 가족 그리고 우성 본인까지 그야말로 패닉에 빠지다시피 했다.
발현 증상 때문에 쉬느라 하루, 그리고 병원과 등록기관에 들르느라 또 하루. 이틀 뒤 짐을 정리하러 체육관에 나타난 우성은 형들하고 같이 뛸 수 있는 하루하루가 아까운데 왜 이렇게 됐느냐며, 인터하이에서 진 날보다 더 크게 울었다. 출국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고는 해도 팀원들은 그 기간 역시 훈련을 해야 한다. 게다가 정우성은 여전히 멘탈 관리에 서툴렀고. 원칙은 물론이거니와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는 페로몬의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지라, 팀의 체육관에 더는 정우성의 몸과 물건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주장인 명헌마저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며 도 감독에게 청했지만, 연민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은 오전 훈련을 하는 대신, 모두 우성과 인사를 나누었다.
우성이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는 동안 주전과 벤치 멤버 모두가 사물함 정리를 도왔다. 몇몇은 우성을 달래면서 계속 휴지와 물을 갖다줬고, 몇몇은 옷가지나 잡화 같은 대단치도 않은 짐이건만 하나하나 조심히 박스와 가방에 담아주었다. 그 모습을 명헌은 과거의 어느 날처럼 문가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당장 오늘부터 학교를 떠나는 날까지 다들 무조건 점심은 자기랑 먹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은 후에야 우성은 체육관을 나갔다. 텅 빈 우성의 사물함을 들여다보다 문을 닫았을 때, 명헌의 눈에 바로 옆 자기 사물함 문에 끼워진 작은 쪽지가 들어왔다.
- 형, 나 안 잊어버릴 거죠.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헌이 우성을 불러냈던 그곳에서 이번에는 우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훈련이 끝나고 조금 쉬다 나와도 될 만큼 여유로운 시각을 적어놨으면서, 본인은 언제부터 와서 기다렸는지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알파가 베타를 막 불러낸다뿅.
- 뭐예요. 우리가 완전 딴 세상에 살 것도 아닌데.
여상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 끝에 물기가 묻어나는 걸 두 사람 모두 모르지는 않았지만.
- 심각한 문제뿅. 감독님하고 진지하게 논의해봐야겠다뿅.
- 아, 못됐어, 정말! ......그때는 형 진짜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 우성은 건방진 꼬맹이였다뿅.
- 으으, 부끄럽다......
한때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당돌한 신입은 이제 팀의 자랑이 되어 떠난다. 산왕의 사람들이 자기를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우성도 알고 있다는 것이, 명헌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네가 여기서 좋은 것만 받아가기를, 우리가 네 안에 기쁜 것으로만 남기를.
명헌은 가만히 우성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손길은 실은 명헌 본인을 위한 것이다. 형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 시간을 주겠다는 듯, 우성은 오래도록 말없이 명헌의 손길을 받았다.
- 가서 잘해뿅. 잘할 거 알지만, 더 잘해. 우리가 응원하는 거 알지, 뿅.
조금 다른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배려이자 걱정. 언젠가 돌아오라는 말 한마디조차 혹여 저 아이의 발목을 잡을까 봐. 명헌은 처음 이 자리에 섰던 우성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했다. 고립되었다 믿고 그저 위로만 솟아오르려던 모습. 누구보다 잘해낼 것을 알면서도 자꾸 걱정하고 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성은 이제 산왕이 자신을 사랑하는 형태를 알고 있다. 파울을 당해 넘어지면 살펴보러 다가간다, 다치지 않았다면 혼자서도 일어날 것을 알기에 믿고 돌아온다. 그 걱정과 신뢰를 받아본 우성은 이제 스스로를 아끼는 법을 안다. 그러니 남은 사람들은 그저 빌어줄 뿐이다. 어디서도 혼자가 되지 않기를. 네가 만날 세상이 너를 혼자 두지 않기를.
기원처럼 손을 늘어뜨리자, 이번에는 우성이 팔을 뻗었다.
- 형, 나 잊어버릴 거 아니죠. 미국이랑 시차 있다고 해서 연락도 안 하면 안 돼요. 편지 보내요, 대학 가면 전화도 걸어줘요. 나도 편지 쓸게요, 답장 꼭 해야 돼요, 형들 졸업식 날에는 목소리 듣고 싶어요, 집 전화번호 알려주면 내가 전화해도 돼요? 또, 또......
쏟아지는 단어들은 밭은 호흡보다도 조금 더 숨이 찼다. 고작 20여 초를 남겨두고도 단호하고 과감했던 에이스가, 지금은 몇 마디라도 더 전해야 한다는 듯 헐떡인다. 발음 하나하나마다 묻어 있는 초조함이, 넘을 수 없는 거리와 깰 수 없는 규칙이 만들 공간을 술렁거리게 한다. 안정과 확신 쪽을 조금 더 중시하는 명헌은 그래서, 흔들거리는 정우성을 붙들었다.
- 우성,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거잖아뿅. 왜 그렇게 불안해해뿅.
그 오답에 우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미국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형하고 내 얘기를 하는 거예요. 형은......
가버리는 건 안 잡잖아요, 가게 두잖아요. 그 사람도 그냥 보냈잖아요.
나는 그런 거 싫어요. 울 것 같은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반듯했다. 그 반듯함은 분명 도망치지 않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유의 것이리라.
가끔은 신기할 때가 있었다. 상대 선수들의 성격과 플레이 스타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약점을 찾아 치는 것은 명헌의 특기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나 저보다 더 예민하게 자신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을 연달아 만나는 걸까. 명헌이 어디에 기뻐하는지 알고 있던 선배도, 명헌의 괴로움을 꿰뚫어봤던 도 감독도, 명헌의 안에 있는 빈 공간을 본인보다 먼저 눈치채던 신현철도. 그리고 이명헌이 뭘 체념하고 포기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뒤쫓는 정우성도.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평정을 가장하는 것이 제 무기라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욕심 하나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하는 나약한, 이명헌.
오전 내내 울어 발갛게 부어 있던 우성의 눈가에서 또다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명헌은 젖은 뺨을 문질러주었다.
- 우성아, 왜 울지.
마땅히 가야 하는 곳으로 가는 건데 왜 네가 울지.
문득 깨달음이 벼락처럼 내려왔다. 그렇구나. 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내가 빼앗기는 거구나. 내가 울지 않아서 네가 대신 울고 있구나. 그러나 그날도 그랬듯이, 명헌은 제가 보내는 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안다. 그러니 우성에게도 마지막으로 받아 마땅한 공을 던져주어야 한다. 제 옷자락을 붙들고서 파르르 떠는 길쭉하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명헌은 그 손에 제 손목을 가만히 쥐여주었다. 검은색 아대와는 다르게, 힘을 주어 손목을 뜨겁게 쥐어오는 손. 이번에는 분명 심장이 아팠다.
몇 주 전 우성의 2차성별 발현이 공지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공지사항이 간단히 내려왔다. 퇴부한 정우성이 오늘 출국한다고, 다들 인사는 했겠지만 먼 나라에서 잘하길 각자 맘으로 응원해주자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박수 소리를 높인 후 언제나처럼 연습이 시작됐다.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다 같이 훈련을 하고, 윈터컵 예선을 대비해 주전들끼리 다시 한 번 합을 맞추고. 평범하고 똑같은 하루.
최고 학년에 주장인지라 이번에는 공을 닦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코트 정리가 끝나고 난 후 명헌은 일지 작성을 핑계로 혼자 남았다. 가을 초입의 기울어진 석양이 비껴드는 내내 코트는 고요했다.
못된 주장이 되어 정리가 끝난 코트를 어지럽혀볼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이 시간에는 없어야 할 발소리가 들린다. 다가온 현철이 옆에 앉더니 가만히 명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울 거면 울어라. 애도 아니고, 안 운다삐뇽. 손수건 빌려주랴. 안 운다고삐뇽. 딴에는 제법 단호하게 답한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은 또 이길 수가 없는지, 갑자기 그늘이 드리웠다. 얼굴 위로 현철의 크고 따뜻한 손이 놓였다.
- 친구 있을 때 써먹어라.
- 서비스 좋네삐뇽.
- 기간 한정이다.
저 아래 놓인 텅 빈 코트는 언제나처럼 익숙하고 또 처음으로 황량했다. 더는 조잘거림이 내려앉지 않는 땅. 오늘만은 그 고요함을 사랑할 수 없는 까닭을 이명헌은 이제 분명히 알고 있다.
- 현철아.
- 왜.
- 생각해봤거든.
- ......그래.
- 이제 우리는...... 우성이하고 다시는 같은 코트에 설 수 없겠네.
때로 언어란 발화되는 순간 손으로 만져질 만큼 단단하게 형태를 갖추고서 삶 위에 거대한 기둥이 되어 박힌다. 다시는, 이라는 단어 또한 그랬다.
당장 내일이라도 영원히 길이 갈릴 수 있는 채로 1년하고도 반년을 함께 뛰었다. 그 기간 내내, 매일 아침 체육관의 문을 열면서 술렁이던 그 마음은 잘라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침내 통지가 오면 어떡하지, 어쩌면 내일. 다시는 내가 던지는 공이 너에게 가닿지 않으면, 또다시 너를 영원에 빼앗기면 그때는 어떡하지.
미국이 아무리 먼 땅이라 한들 같은 곳에 서 있다고 믿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거기에는 막연한 희망이 여전히 걸려 있으니까. 그러나 종종 기대와 바람만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 눈앞을 막아섰다.
- 패스해주세요, 명헌이 형!
다시는 저 건방진 에이스의 손에 승리를 위한 공을 던져줄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는.
이명헌에게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신현철은 이미 대학생이나 프로 선수에도 뒤지지 않을 센터라는 평을 받고 있으니 몇 년이 지나면 국내 최고의 이름을 달게 될 터였다. 정성구가 얼마 전 받은 스카우트 제의에는 리바운드 실력뿐 아니라 이명헌과는 다른 형태로 팀을 결속시키는 리더십에도 감탄했다는 의견이 있었다. 올라운더, 팔방미인의 최고봉으로서 최동오는 그저 코트 위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 팀의 수많은 전략을 무력화할 수 있는 선수다. 수비가 약한 팀을 두고 있는 대학 팀이라면 어디나 김낙수를 탐내고 있다. 축복받은 체격의 소유자인 신현필은 제 형의 특훈 아래 머잖아 놀랍도록 뛰어난 선수가 되리라. 그뿐만이랴. 산왕이 아닌 다른 학교의, 이름을 대면 농구 팬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일 만한 뛰어난 선수들까지도 머잖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등 뒤에 놓인 길 위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궤적이 때로 이명헌의 안에 폐허가 되어 쌓인다. 자신이 던지는 공이 다시는 가닿을 수 없는 손. 떠나면서 마지막이라고 말해야 하는 인사. 의지와 애정과는 상관 없이,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갈라놓는 세계.
앞으로도 이명헌은 제가 죽도록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이 코트의 주도권을 감히 다른 자들의 손에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 이는 의지이자 고집이며 또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끝내 산왕 최강의 포인트가드로 남을 것이다, 오래도록 곁에 있던 친구들과 이미 완벽히 파악한 후배들을 마음껏 움직여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고 어긋나지 않는 선들을 그을 것이다, 28미터의 길이와 15미터의 너비와 3미터의 높이로 이루어진 그 땅 안에서만은 수많은 이들이 뛰어넘지 못해 무릎 꿇고 좌절하는 한계로서 당당히 서서 모든 것에 맞설 것이다, 제 안을 꿰뚫어봤던 감독이 자신에게 요구한 대로 결코 상실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이 수많은 기록 위로 적히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흐름을 가르고 끊고 다시 잇고 꿰어서 이야기를 완성하는 코트 위의 연출자로 설 것이다, 영원히.
그러나 세계가 갈리고 땅이 뒤틀리며 자신이 구겨지는 이 감각만은.
- 그 애를 보내고 싶지 않았어.
- 알아.
너는 뺏기고 싶지 않았어, 우성아.
다짐이 무색하게도 결국 눈에 열이 올랐다. 얼굴 위로 따뜻하게 자리 잡은 현철의 커다란 손 그늘은 비껴든 태양이 가라앉을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동안 명헌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되짚고 다시 읽었다.
이명헌은 여전히 산왕의 주장이다. 명헌은 다시 한 번 산을, 생명이 있고 열기가 있고 숨결이 있는 거대한 산을 이끌게 되리라. 눈과 얼음을 덮어쓰고도 그 차가운 기운을 골짜기에 품어 흐르는 물로 담아내는 곳. 어느 동물은 뜨겁게 날뛰며 어느 바위는 굳세게 거대하다, 어느 이끼는 영구히 버텨내며 어느 토양은 풍요로이 되살린다, 그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자리 잡아 숨을 내쉬기 시작하면 시간과 움직임은 늘 거대한 산이 되었다. 그곳은 이명헌의 세계, 이명헌이 딛고 선 코트.
그리고 이제는 그 코트에 더는 정우성이 서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시 이명헌은 다른 누군가의 공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 자신이 옳은 지도로 존재하는 코트를 영원히 장악할 것이다. 이것은 명헌이 자신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빼앗긴 에이스를 절박하게 사랑하며 상실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자신이 긋는 선이 다시는, 지도 바깥의 세계를 도달점으로 삼는 사람들과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법은 빼앗기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그해 겨울, 베타 리그에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윈터컵 지역 예선을 치르게 된 산왕은 예선 첫 경기부터 윈터컵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를 압도적인 점수 차로 승리했다. 지난 인터하이의 추락에 더해 정우성이라는 에이스의 부재까지, 산왕의 전력을 얕보는 팀들도 몇 있었으나 그들은 더 단단해진 산왕이라는 벽에 그야말로 짓눌려버렸다.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승부를 포기하는 팀까지 나올 정도였다. 원래도 주 득점원이었던 신현철과 최동오는 물론 골 밑을 주로 맡는 정성구와 디펜스가 특기인 김낙수, 그리고 사령탑이자 주장인 이명헌까지 모두가 매 경기 적지 않은 득점을 올렸다.
통산 어시스트 12.6개에 스틸 2.8개, 그해 윈터컵의 MVP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이명헌이었다. 모두가 그의 이름과 함께 산왕의 부활을 외쳤다. 거대한 함성과 환호를 받으며 우승컵과 MVP 메달을 안아 들고서 단상에 오르는 이명헌의 손목은 비어 있었고, 표정은 여전히 단단했다.
그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이명헌은 조용히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 +
Q. 오늘의 주인공은, 동양인으로 작년 NBA 알파 리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된 데 이어 올해 올 루키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린 최고의 유망주 정우성 선수입니다. 반갑습니다.
A.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중략)
Q. 미국에 오기 직전에야 제2성별이 발현하는 바람에 리그에 적응하는 데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훨씬 더 일찍 알파로 뛸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A. 아니요! (단호하시네요.) 저는 오히려 그 사실에 감사합니다. 제 농구의 기본은 모두 고등학교 팀에서 만들어졌거든요.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면, 지금의 정우성은 없을지도 몰라요.
Q. 평소 여러 인터뷰에서도 고등학교 당시 베타 팀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죠.
A. 네, 그 팀에서 뛰는 동안 저는 정말 소중한 것을 알게 됐거든요. 그때의 정우성과 결별하고 지금의 제가 된 게 아니니까요. 코트가 갈렸다고 해도, 미래까지 엇갈리는 건 아니잖아요. 코트가 달라졌다고 해도 저는 그 시절의 정우성을, 그리고 그 정우성과 함께 있어줬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요. 영원히 잊지도, 놓지도 않을 거예요.
_<SLAM> vo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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