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t no.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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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t no. 1407
name : 정대만
date : 2023.12.09.
Treatment :
오늘 왜 이렇게 한가하지?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올뻔한 말을 A씨는 가까스로 삼켰다. 타일에 눌어붙은 왁스 조각 닦기, 오래된 기공물 정리하기, 임시치아 연습용으로 따로 빼둔 방치된 석고 모델 버리기를 모두 끝냈는데도 치과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대게 동네 치과의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바쁠 때는 초음파 스케일러의 진동 소리, 핸드피스와 집진기 소리, 환자의 비명과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인세의 지옥이 따로 없지만 가끔가다 이렇게 환자가 뚝 끊기면 천국…은 아니고 그냥 평범하고 약간은 스산한 오후의 풍경이 될 때가 있었다. 마침 오늘 첫눈이 내린다는 예보도 있어 오전에 연세가 많으신 환자에게 전화를 다 돌려 예약을 미뤄둔 차였다. A씨가 앉아있는 데스크에서는 창밖이 보이지 않아 지금 눈이 오는지 안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두 시간째, 환자가 없었다. 거의 모든 서비스업종과 자신이 내원객을 통제할 수 없는 업종 대부분이 그렇듯 입 밖으로 오늘 한가한데 서로 스케일링이나 해줄까요?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어느샌가 환자분들이 하나둘 내원하곤 하는 징크스가 있다. 심지어는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환자가 몰리는 일도 있었다. A씨는 절대 그 말만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카디건 옷깃을 한번 여몄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유난히도 추운 느낌이 들었다. 눈치 보여서 난방 온도를 올리기는 좀 그렇고 스텝실 안으로 들어가자니 데스크에 사람이 없으면 원장님이 더 눈치를 줄 것만 같았다. A씨는 원장이 잡무라도 시킬세라 이미 정리되어 있는 종이 차트 들을 괜히 다시 뒤적거리며 보기 시작했다. 원장님 그럭저럭 괜찮은 상사이긴 한데 한번 예민하고 초조하게 굴 떼면 어지간한 진상 환자 뺨치게 신경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먼저 센스있게 길이 얼기 전에 퇴근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고용주 앞에서는 절대 털어놓지 않을 말들을 속으로 삼키며 차트를 다 정리하고 나서는 다음날 와야 할 보철물 목록을 쭉 훑어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가 났다. 치과 문에 달아둔 도어벨이었다. A씨는 들어온 사람이 어떤 환자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기계적으로 박힌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머.”
환자로 들어온 것은 키 큰 남성이었다. 특이하게 머리를 단발 길이까지 기르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을 봐서는 고등학생인 것 같았다. 줄인 것이 분명한 교복, 어디서 치고받은 게 분명한 상처투성이 얼굴은 이제 점점 붓고 멍이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왼쪽 턱 아래는 최근 다른 병원에서 처치 받은 것이 분명한 꿰맨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였다. 교복 안에 받쳐입은 티셔츠에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A씨가 처음 한 생각은 어째서 여기에 온 거지? 라는 생각이었다. 작은 동네 의원에서 보기에는 상해 환자는 너무 까다로운 환자였다. 나중에 소송이 발생할 시 법률분쟁에 휘말릴 위험도 있고 환자나 환자 보호자, 심지어는 소송 상대의 보호자라고 주장하는 건장한 남성분까지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A씨는 긴장을 애써 감추며 오늘 빠른 퇴근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내원하신 적 있으세요?”
데스크 가까이 오지 않은 채로 학생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치료를 받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퇴근 시간 1시간 반 전에 닥친 외상환자로 인해 약간 심기가 뒤틀려 있었지만, A씨는 오랜 경력으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접수증을 건네며 여기 읽어보시고 적어주세요~ 하며 애써 친절한 말투를 유지했다. 그제야 학생은 한두 걸음 다가와서 접수증을 적었다. 언제 일을 친 건지 엉망이 된 얼굴이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눈썹이 짙고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만약 길에서 이런 행색의 불량 학생을 만났다면 귀가에 두 시간이 걸린대도 주저 없이 길을 틀었을 것이었다. 치과가 있는 주거지 부근은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었지만 그녀가 나고 자란 이 도시는 원래도 근처 불량 학생들이 과격하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새벽이면 해안가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며 해수욕장 근처에서 술을 마시는 미성년자들로 늘 시끄러웠고 지역신문에 짤막하게 패싸움 기사가 실리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덩치와 골격이 좋은 환자가 만약 행패를 부린다면 격리하거나 제압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평소 대기실을 보는 CCTV로 잽싸게 원장이 나와서 환자를 보내버리길 바랐지만 화질 저하 때문인지 원장실 안에서 누가 나오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스텝실 안에서 환자가 온 것을 알았는지 움직이며 진료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접수증을 쓴 환자는 또 별말 없이 A씨를 흘끔 봤을 뿐이었다. A씨는 접수증을 집어 차트에 인적 사항을 옮겨 적었다. 정대만. 18세. 고2짜리가 대체 무슨 싸움을 했는지 몰골이 엉망이었다. 접수증 아래 제일 불편한 사항을 적어달라는 부분은 텅 비어있었다. A씨는 어렵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오늘 어디가 불편하셔서 내원하셨을까요?”
“... 병원에서, 치과 가보라던데.”
낮고 불분명한 목소리였다. 아마 입술이 너무 터졌거나 앞니를 상실했거나 그 두 가지 경우로 마취하고 봉합하느라고 발음이 새거나 했을 것 같았다. 오늘 난 상처인지 아직 멍은 생기지 않았지만 상처 부분이 붓고 있는 게 보였다.
“앞니 쪽 다친 부분 체크하러 오신 걸까요?”
“거기서 제거하긴 했지만 입술 안쪽에 치아 조각이 있을 수 있다고 X-ray 사진 찍어보라고 해서….”
정대만 환자는 나름대로 애써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짧은 문장에서 유추해 보건대 패싸움으로 앞니가 정출 혹은 파절됐는데 이제 입술에 난 상처에 그 치아 조각이 있는지 없는지 치과에 있는 작은 엑스레이로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겸사겸사 전치부 보철 상담도 좀 하라는 의도겠지. 보호자분은 진료 내용에 대해 알고 계실까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또 쓸데없는 소리로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A씨는 그냥 잽싸게 접수를 마치고 차트를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대기 중이던 치위생사들이 차트의 C.C(현주소. Chif complain : 환자가 내원한 주 증상)부분을 보더니 바깥에 들리지 않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치아는 가지고 왔대요?”
“아뇨. 없는 거 같던데.”
“그러면 오늘 프렙(preparation, prep : 치아 삭제, 보철물을 제작하기 전 치아를 깎는 과정) 들어가는 거예요?”
“별로 진료 의지는 없어 보여요.”
“보호자는요?”
“좀…. 불량 학생 같아서 못 물어봤어요.”
“…아, 싸움?”
마지막엔 거의 바람 소리처럼 작은 소리였다. A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 스텝은 고개를 저으며 드레싱 기구를 준비했다. A씨는 유닛 체어 브라켓 트레이 위 차트를 놓아두고 되도록 친절하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환자를 불렀다.
*
데스크에 앉아 있어도 워낙 한가한 날이라 진료실 안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잘 들렸다. 원장님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원장님도 진료 의지는 0에 가까운 것 같았다. 연령이 낮으니, 임플란트는 어렵고 브릿지라고 멀쩡한 치아를 깎아서 거는 치료를 해야하는데 개수가 많아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정확한 상담을 위해 보호자를 모시고 오라는 말을 아주 길고 온화하게 빙빙 돌려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되도록 환자에게 진료에 대한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 의욕 없음을 드러낼 셈인 것 같았다. 행여 환자를 자극할지 걱정이 되는지 상해진단서 부분은 아예 언급도 안 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해야겠군. A씨는 초조하게 볼펜을 딸각거렸다. 정대만 환자를 내원하게 만든 어떤 병원 응급실로 모든 책임을 돌려야지. 나름대로 굳은 결심을 하고 나니 곧 진료실 안에서 정대만 환자가 나왔다. 잠깐 앉아계세요. 라고 말하고 차트가 나오길 한참 동안 기다렸다. 진료실 안에서는 A씨를 부르는 치과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A씨는 수첩과 볼펜을 들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치과의사는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했다.
“오늘 오후에 싸우다가 이가 빠졌대.”
“어머.”
“요즘 애들 무섭네. 보철치료는 보호자 모시고 오라고 했고, 상해진단서는 여기선 못 끊어준다고 얘기해주면 될 것 같아. 리콜은 하지 말고.”
“네.”
“환자 가면 바로 정리하고 가세.”
“네.”
A씨는 약간 미소 지을 뻔한 입꼬리를 가다듬으며 차트를 받았다. 아주 기계적으로 오늘 사진을 찍어본 것,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은 부위 소독한 것만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나오자 대기실엔 머리 긴 불량 학생, 정대만 군이 어쩐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내일 없이 사는 것 같지만 불량 학생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 싶었다. 복잡한 얼굴에선 아직 채 해소되지 못한 분노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A씨는 너무 좆같아서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밀어둔 채 다시 솔 톤의 상냥한 목소리로 정대만 님~ 하고 환자를 불렀다. 환자의 단발머리가 머리 위 조명을 받아 얼굴에 긴 그늘을 만들었다.
“안에서 얘기 들으셨겠지만, 빠진 앞니 쪽은 보철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금액이 상당히 많이 드는 치료라서 보호자께도 진료 내용을 설명해 드리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같이 오실 수 있으면 사진 찍은 거 보시면서 설명 들으면 좋으실 것 같고, 아까 x-ray 찍어보니까 입술 안 상처에는 치아 파편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요. 충격을 받아서 치아가 빠져나올 정도면 뼈에 사진엔 나타나지 않는 실금이 가 있을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식사 주의하시고요. …혹시 상해진단서 같은 게 필요하신가요?”
정대만 환자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부모랑은 얘기도 하지 않는 종류의 불량 학생 같았다. 아이구… 혀를 끌끌 차고 싶은 심정을 숨긴 채 A씨는 오늘 사진 찍으시고 소독 간단히 하셔서 5,800원 나오셨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환자는 반지갑 안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했다. 곧 딸랑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완전히 적막해진 치과에서 A씨는 벌떡 일어나 스텝실에 원장님이 마감하자고 하셨어요. 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웬만한 정리는 다 해둬서 따로 할 것은 없었지만 아까 마지막으로 온 환자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차트 구석에 A씨는 상해로 인한 치아 상실, 추후 보철치료 상담 필요해 보임. 하고 사족을 적었다.
*
그 환자가 다시 내원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환자 얼굴을 잘 기억하는 재능이 있는 A씨도 그의 얼굴은 좀 헷갈렸다. 처음 내원 시 얼굴이 워낙 붓고 상처로 가득한 것도 있었지만 귀밑 5cm는 되어 보였던 단발머리가 깔끔하게 이발 된 것, 그리고 이번엔 부위가 다른 안면 상처들로 인상이 많이 바뀌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전엔 세상 모든 시름을 다 짊어진 불량 학생 같았다면 지금은 어딘가 개운해진 모습으로…. 설마 모든 원수놈들을 다 두들기고 온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말하는 것도 예전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정대만입니다. 작년 겨울쯤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름을 듣자마자 곧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정대만 환자. 불량 학생. 상해 환자. A씨는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와서 1년 전의 상해진단서를 떼려고 온 거면 어떡하지? 그 걱정이 먼저 들었다. 개원 초기, 자신도 원장님도 생초짜일 때 한번 상해진단서를 발급해 줬다가 남의 송사에 잘못 휘말린 기억이 있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남자의 입을 쳐다보는데 이제는 앞니가 없는 생활에 익숙한지 꽤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정대만 환자는 “앞니 보철을 하려고요.”라고 말했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작년 추울 때 왔던 것 같아서 치워둔 차트를 찾으러 환자를 앉혀두고 A씨는 차트실로 향했다. 차트를 꺼내보자 예전의 그 상처투성이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두 가지의 의문이 들었다. 왜 이 학생은 아직도 전치부보철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왜 이제와서 전치부보철을 제작하려고 하는가.
*
저번과 비슷하게 또 진료실이 비어있는 시간이었다. 높은 확률로 당일 보철치료에 돌입할 것 같아 A씨는 의자를 쭉 뒤로 기대 진료실 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저번과는 다르게 오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료가 진행되는지 가끔 웃음소리마저 들렸다. 안에서 A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면 바로 우주선(반구 형태의 아크릴이 씌워진 치과 보철물 모델을 모아둔 키트)을 들고 진료실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대화가 끝난 후에는 별안간 유닛체어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안의 위생사가 “잠시 따끔해요~ ” 하고 마취 주의 사항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벌써 치료 시작하는 거야? A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대 뛰지는 않지만 하여튼 빠른 걸음으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대만 환자의 얼굴에는 구멍포가 씌워져 있었고 마취 주사가 천천히 들어가는 중이었다. 옆에서 인상 체득(impression taking : 치아의 수복, 보철 등의 치과 치료를 할 때 필요한 치아 및 구강조직의 형태를 음형(陰型)으로 기록하는 것.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간호학대사전) 준비하던 위생사에게 접근해 또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바로 치료 들어가시는 거예요?”
“네. 일단 보호자분이 카드 주셨다고 치료받으라고 했다 그러더라고요. 올세라 브릿지로 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마취되는 동안 데스크에서 보호자께 전화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A씨는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정대만 환자는 마취가 끝나서 입을 헹구고 있었다.
“환자분~ 아까 설명 들으셨겠지만, 앞니 보철치료가 비용이 꽤 많이 드는 치료라서요. 보호자께 제가 따로 전화드려서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마취약이 쓴지 입을 연거푸 헹궈내던 정대만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다시 한번 뱉었다.
A씨가 정대만 환자의 보호자에게 전화했다. 정대만 환자가 (전) 불량이었고 하니 아이를 좀 방임하는 타입의 부모인가? 싶어서 조심스러웠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온화하고 조심스러운 어조의 사람이었다. 치료계획과 과정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늘 카드를 들려 보냈으니 보철 비용을 모두 수납하면 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제야 자녀분이 정신을 차린 건가 싶은 생각에 괜히 A씨의 마음마저 좀 아픈 것 같았다. 주말 오전에 하는 TV 프로그램의 고정멘트 처럼 이제 부모님 속 안 썩이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라고 얘기해야할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 정대만 환자가 눌린 뒤통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앞으로 나왔다. 조금 기분이 멜랑콜리해진 A씨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의 사항을 잔뜩 늘어놨다. 지금은 임시보철물이니까 앞니로는 절대 뭘 씹거나 깨물려고 하지 마세요. 베어드시면 안 됩니다. 끈적거리는 음식은 안 드시는 게 더 나아요. 혹시 위 사항을 다 지켜도 임시치아가 빠질 수 있으니, 치과에 내원할 수 있는 상황이면 바로 가지고 오시고 오실 수 없는 상황이면 끼워 넣고라도 계세요. 등등. 전 불량청소년은 약간 머쓱한 얼굴로 데스크 앞에 놓인 거울로 임시치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임시치아까지 하고 나자 인물이 꽤 훤했다.
“앞니 진짜 같네요.”
“임시치아인데 잘 제작되었나 봐요. 지금까지 많이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아. 적응해서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옆 치아는 신경치료 한 치아가 아니니까 시리거나 아픈 느낌 있으면 전화해 주시고 예약일 전에라도 꼭 내원하셔야 하세요.”
부모님께 받았을 것이 분명한 카드로 무려 일시불 결제를 하고 이번엔 무려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까지 하고 치과를 나섰다. 또 할 일이 없어진 원장님이 한참 뒤 원장실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저 친구 잘생겼네. 키도 크고.”
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원장님은 전형적으로 학교 다닐 때 공부만 열심히 하던 사람으로 조금 젊고 키 큰 남자 환자만 보면 선망을 감추지 못하고 칭찬하곤 했다. 저번에 왔을 때도 키랑 덩치는 좋았던 것 같은데 얼굴이 엉망이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미지가 좀 달라졌네요.”
“그러게. 어휴. 부모님은 이제 좀 마음이 놓이셨겠어. 한 다섯 시 반까지 있다가 환자 안 오면 정리하게.”
원장님은 또 휘적휘적 걸어 원장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A씨는 기공 지시서를 봉투에 넣어 정리하다가 지시서 여백에 괜히 환자분 연령이 젊습니다. 신경 써서 제작해 주세요. 라고 적었다.
*
치과 일을 하다 보면 꼭 환자나 의사의 잘못이 아니어도 같은 부위에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치아 구조상의 문제일 때도 있고, 정말 순전히 운이 안 좋아서 그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1년 정도 전에 문제없이 전치부 보철물을 세팅했던 환자, 정대만 군은 접수증에 어제 앞니가 깨졌어요. 라고 내원 경위를 적고 있었다. 벌써? 요즘 남자애들은 뭘 하고 다니는 거람. A씨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대만군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외견상 어디가 심하게 깨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의 의아한 얼굴에 대답하듯 왼쪽 측절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살짝 끝이 깨졌는데 날카로워서 혀가 베였어요.”
전치부 포셀린 보철물 같은 경우 끝부분이 워낙 얇기도 하고 재수 없으면 넘어지며 그 부분을 부딪친다던가 젓가락을 잘못 씹기만 해도 깨지는 부위였다. 일단은 사진을 찍어봐야 정확한 건 알겠지만 제발 끝이 살짝 떨어져 나간 거라서 약간 다듬는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A씨의 작은 바람은 입 안에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약간 무의미해졌다. 기술 좋게도 앞쪽 부분은 남겨둔 채 입천장 쪽 부분의 포셀린이 꽤 많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레진으로 수복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냥 다듬는 정도로 끝내려면 한 치아만 지나치게 짧아져서 보기 흉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다시 제거해서 본을 떠야 했다. 죽상을 한 진료실 스텝 옆에 A씨가 다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예전 임시치아 보관 안 해뒀죠?”
“너무 오래돼서 버렸죠….”
“저 상태로 퍼티(putty. 치과에서 쓰는 인상재료)로 전치부만 뜬 다음에 거기다가 템포 레진 부어서 프렙(prep. preparation : 치과에서는 보철치료를 위해 치아를 삭제하는 것을 뜻함)한 후에 찍는 식으로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아까 접수할 때 파절된 부분에 베였다고 하던데 진료 중에 한 번 확인해 주세요.”
스텝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에서 입 안에 쓸 수 있는 연고를 꺼내서 정대만 환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스텝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다시 서랍을 열며 작게 이야기했다.
“그게, 나았다는데요?”
“벌써? 어제 깨졌다는데?”
본인이 나았다는데 다시 상처를 낼 것도 아니고, A씨는 안쪽 정리를 좀 한 다음 데스크 쪽으로 돌아가 앉았다. 원래 입안은 상처가 빨리 낫는 부위긴 한데 지나치게 빠른 회복 속도 아닌가…. 젊음이 좋긴 좋나 보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는 핸드피스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진료가 빨리 끝났다. 다음 예약 일정을 잡던 정대만 환자는 문득 생각난 듯 질문했다.
“앞니 붙이는 날 누구 데려와도 돼요?”
“네. 한번 붙이면 제거하기 어려우니까 보호자분들이 붙이기 전에 같이 확인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A씨는 은근히 기대했다. 드디어, 전화상으로만 진료계획을 잠깐 설명했던 그 보호자가 환자분과 함께 내원을 하는걸까. 그때 전화했던 여성은 평범하고 정중한 사람이었다. 자녀에게 관심이 없는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매사에 조심스러워서 자녀에게 전적으로 판단을 맡기는 것처럼 보였달까. 게다가 고액의 진료를 하면서도 그 비용을 지불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내용에 관해 설명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게다가 그사이에 모자 사이가 좀 나아졌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져 왔다.
*
A씨는 익숙한 정대만 환자와 같이 들어오는 사람을 유심히 봤다. 체구가 그렇게 크지는 않는 남자애였는데 왁스로 세팅한 머리, 귓불에 반짝이는 피어싱, 그리고 왠지 불량해 보이는 눈빛. 딱 봐도 양아치 같아 보였다. 좀 실망했다고 해야 하나. 약간 보철도 너무 잘 나온 케이스고 해서 이래저래 환자에게 사적으로 친밀감을 느낀 것 같았다. 마치 말 안 듣던 조카가 이제 맘잡고 공부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정대만 환자는 아직도 불량생활을 다 청산하지 않은 걸까. 연령을 슬쩍 보니 문제가 없으면 대학생일 나이인데. 아니면 그냥 예전에 같이 어울려 다니던 정으로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걸까. 같이 들어온 학생은 그다지 싹싹한 성격은 아닌지 꾸벅 인사하고 대기실 소파 구석에 털썩 앉아 잡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정대만 환자는 동행인의 옆에 가방을 내려뒀다.
“갔다 올게.”
“계산 해놔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여기까지 왜 데려왔는데요.”
“야 병원에선 조용히 해야지. …정대만입니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던 A씨를 눈치채고 있었던지 드디어 접수를 했다. 그 와중에도 둘의 실없는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런 데는 영걸 선배랑 오라고요.”
“걔가 왜 나랑 병원에 와. 이거 네가 없앤 앞니잖아.”
“시비는 누가 먼저 걸었죠?”
“아 씨, 그래서 내 돈으로 치료했잖아. 그냥 치과 무서우니까 같이 와달라고.”
“나 참. 손잡아줘요?”
“아니, 오늘은 물 안 나온다고 했어. 그렇죠. 누나?”
A씨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그렇게 불러주니 고맙다만. 갑자기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서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는데 키가 작은 학생은 그럼 나를 왜 불렀냐며 투덜거렸다. A씨도 그게 좀 궁금했다. 저 환자는 치과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닌가? 내심 무서웠던 걸까? 환자의 섬세한 심리를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인가?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혀 베었다고 하지 않았냐?”
“아.”
“치과 왔으니까 보고 갈래?”
“그게 언제적인데… 진작 나았죠.”
“정대만 환자분, 안으로 들어오세요.”
진료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대만 학생은 그럼 다녀온다면서 지금까지 중 가장 밝은 얼굴로 진료실을 향해 갔다. 같이 온 학생은 머쓱한지 빌려온 고양이처럼 이곳저곳을 보다가 아까 집었던 잡지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주부 대상의 잡지라서 재미가 없을 텐데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으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 잠시 잡지를 읽는 것 같더니 이내 조용히 잡지를 옆에 두고 데스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껏 고개를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기, 아까 정대만 환자요,”
“네.”
“앞니 치료비 얼마 나왔어요?”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 건 좀 망설여졌으나 그냥 치료 비용에 대한 사실 고지를 하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A씨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작게 대답했다.
“200만 원이요.”
불량 학생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가까이서 보니 좀 어린 얼굴이라 생각만큼 불량스럽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학생은 또 작게 소곤거렸다.
“임플란트 심은 거에요?”
“아직 미성년자라 임플란트는 식립 못 하셨고 옆 치아를 깎아서 거는 브릿지라는 보철물을 했어요. 근데 이제 개수가 네 개 다 보니까 비용이 좀 많이 나왔죠.”
“아…. 그럼 이거 붙이면 몇 년 정도 써요? 한 십 년?”
“책에는 평균적으로 7~8년이라고 나오는데 개인차가 좀 있죠. 더 오래 쓰는 분도 계시고 더 빨리 제거하는 분도 있고. 정대만 환자도 1년 정도 썼는데 깨져서 다시 하시는 거니까요.”
학생은 좀 고민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뭔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정말로 눈앞의 학생이 정대만 환자의 앞니를 완전히 탈구시켜서 분실되게 만든 걸까? 키도 훨씬 작고 체구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라 1:1로 붙었을 때 정대만 학생이 앞니 두 개를 상실할 정도면 저 학생도 그에 상응하는 상처를 입었을 텐데 가까이서 봤을 때 앞니가 보철이라던가 그런 테는 나지 않았다. 싸움은 했지만 치아와는 다르게 재생되는 부위에만 부상을 입은건가? 그리고 서로 주먹발치를 할 정도의 상해를 주고받았다기엔 너무 친해 보이는 사이라서 이게 요즘 젊은 애들 사이의 어떤 농담 같은 게 아닌지 헷갈렸다. 저기, 하고 학생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진료실 안에서 스텝이 불쑥 나와서 이야기했다.
“정대만 환자분 보호자분?”
“예? 보호자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대기실엔 그 학생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진료실 스텝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좀 어색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약간 뻔뻔할 정도의 사무적인 톤으로 다시 불렀다.
“보호자 분, 안으로 들어오세요.”
학생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에선 정대만 환자가 유닛체어에 앉아 치과마다 꼭 하나씩 있는 앙증맞은 은색 손거울로 시적한 세라믹 브릿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가 선배 보호자예요?”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이거 봐봐. 색이랑 모양 괜찮아? 너 보기엔 예뻐?”
유닛체어 너머에서 멀찍하게 쳐다보던 보호자가 체어 바로 뒤로 다가왔다. 정대만 환자가 입술을 한 손으로 약간 들어 올리며 거울을 좀 멀리 들었다. 거울에 비친 정대만 환자의 전치부 보철물을 힐끔 본 동행인이 툭 던지듯 이야기했다.
“진짜 치아 같네요.”
“좀 성의 있게 보라고. 앞에서 봐봐.”
“제가 뭘 알아요? 전문가분들이 잘 알겠지.”
“너 옷 잘 입잖아.”
“아니 내가 옷 입는 거랑 선배 가짜 이빨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어쨌든 네 맘에 들어야 할 거 아냐.”
같이 온 학생은 잠깐 할 말을 잃은 듯 정대만 환자의 뒤통수가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맘에 들어요. 예뻐요. 성의 없게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정대만 환자는 만족한 듯 웃더니 이대로 붙여주세요. 라고, 얘기했다. 같이 온 사람은 왠지 귀 끝이 빨개져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았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아까 옆에 뒀던 잡지를 다시 접어들고 마치 고개를 처박을 것처럼 얼굴을 바싹 붙여 읽기 시작했다.
곧이어 진료가 마무리되고 정대만 환자가 진료실로 나왔다. 잡지를 읽고 있던 보호자가 눈만 약간 치켜뜨고 확인한 후 잡지를 책꽂이에 던지듯 꽂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잠깐, 수납만 하고.”
작은 학생 쪽은 낯을 좀 더 가리는지 꾸벅 인사만 하고 먼저 치과를 빠져나갔다. 수납을 마친 정대만이 성큼성큼 뒤를 따르더니 어깨에 팔을 둘러서 거의 감싸다시피 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거리감이 좀 이상한 애들이네.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반에 한두 명씩은 저런 남자애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거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다음 시간 예약 환자가 내원해서 A씨는 잡생각은 그만 두고 웃으며 응대하기 시작했다.
*
아까부터 송태섭은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여느 때와 똑같은 멍한 듯 심드렁한 표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무려 송태섭의 남친인 자신만은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 너 무슨 생각해?”
송태섭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서 정대만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정대만의 새로 만든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전치부 보철물을 보는 것 같았다.
“선배 있잖아요.”
의외로 송태섭은 친해지고 나면 말투가 약간 사근사근해질 때가 있었는데 정대만은 평소에도 그게 너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런 초 필살 애교스러운 부분은 자신만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단속하는 건 좀 너무 치졸하지 않나. 라는 자각도 있었기 때문에 한 살 어린 연하 남친 앞에서는 적정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뒤에 무슨 얘기가 나오든지 들어주겠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빛(주관적 기준)으로 응, 말해봐 라고 대답했다.
“저 농구부 최후의 날에 앞니 하나 빠졌잖아요”
“야.”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날을 영원히 미안해하는 남친에게는 별 관심 없는 듯 송태섭은 말을 이어갔다.
“저도 그때 치과 갔었는데 상해로 배상 같은 거 해야 하면 얼마나 비용 나오는지 물어봤거든요?”
“아니. 진짜 필요 없다니까.”
“거기서 사람을 때리거나 다치게 해서 생긴 거면 계산을 좀 다르게 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이제 보철물 비용이 나오면 그 보철물의 평균 수명으로 사람의 평균 수명을 나누는데요. 예를 들어 선배가 80까지 산다고 치면 한 육십몇…. 남잖아요? 그럼 60을 8로 나눈 다음에 보철물 비용을 곱한대요. 아까 치과에서 물어봤는데, 200만 원 들었다면서요? 그러면 대략 1,600만 원 정도 나오는데 이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나중에 임플란트로 교체하거나 신경치료에 들어가거나 하는 비용도 포함하면 최대비용이 늘어난대요.”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 예전부터 쓸데없는 부분에서 갑자기 영리해지더라.”
“아 쫌 들어봐요.”
이 불편한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연하 남친의 말을 늘 경청해 주고 존중해 주는 좋은 남자 친구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선배에게 한 2,000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니지. 내가 먼저…그랬는데.”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남자친구가 말의 중간을 흐리든 말든 송태섭은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좀 염치없긴 한데 곧 저 미국 가잖아요. 아무리 해도 바로는 못 값을 것 같은데. 그거 저한테 빌려준 셈 치고 갚을 때까지만 저 기다려 주면 안 돼요?”
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마지막 문장은 아주 작아져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정대만의 귀에는 들렸다. 유학 얘기가 나오고 나서는 한동안 둘 사이에서 그 화제는 금기나 다름없었다. 정확히는 송태섭이 그 화제가 나오면 대답하지 않거나 말을 돌리곤 했었다. 얘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애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섭아…!”
그는 작고 귀여운 연하 애인을 꼭 끌어안았다. 아 놔요, 라고 잠깐 버둥거리던 송태섭은 이내 못 이기는 척 정대만의 가슴에 머리를 폭 기댔다.
*
퇴근하던 A씨는 좀 이상한 광경을 봤다. 꼭 우리 환자 같아 보이는 실루엣이 해변에서 누군가를 꽉 껴안고 있는 것 같았는데 버스에서 본 거라 확실하지는 않았다. 좀 자세히 보려는데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실루엣은 역광이라 그냥 어떤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으며 —꼴값 커플처럼 보이긴 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버스는 출발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고개를 꺾어가며 누군지 보려고 노력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의료법 중 직무 중 알게 된 환자의 개인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거나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자신이 본 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시고 전치부 보철물이나 부디 깨먹지 말고 오래 써줬으면 하고 A씨는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뒷표지를 차트로 만들고 싶다고 징징거려서 노네임(@xxxx_noname)님을 귀찮게 했습니다. 그치만 귀엽죠? 늘 표지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신 분들, 행사장에서 가져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2023년 12월 9일 대만태섭 온리전 @icecream_mix0
* 이 책은 The First slamdunk의 2차 창작물로 원작 및 실제 지명, 인명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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