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Attack

대만태섭

Laundry by so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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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다지 아름답고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송태섭의 경우엔 그 남자에 대한 짝사랑을 자각하고 난 다음이었다. 언제나 사랑이란 대비할 수 없는 일종의 사고 같은 거였는데 한나를 좋아할 때는 그저 환한 빛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짝사랑은 고층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하강할 때 느끼는 울렁거림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정대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선배의 손끝을 떠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높이 올랐다가 림 안에 빨려 들어가듯 떨어졌다. 다른 누가 보고 있었더라면 의식하지도 못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송태섭의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저 사람이 넣은 수십만개의 슛 중 가장 아무것도 아닐 텐데. 시합 중도, 연습 중도 아니고 체육관 정리를 하다가 손에 있는 공을 장난삼아 던진 거였다. 어떤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라지곤 했는데 별거 아닌 이 순간은 꽤 오래 기억될 것만 같았다.

떨어진 공이 체육관 바닥에 튀어 송태섭의 발치에 굴렀다.

 

“그게 그쪽으로 갔네.”

 

송태섭의 침묵을 청소 중 딴짓에 대한 간접적 꼽 줌으로 받아들였는지 정대만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송태섭은 발치의 공을 차는 대신 주워서 정대만에게 가볍게 패스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에 잡히는 공이 왠지 생경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인터하이 이후로 저 선배를 그저 같은 팀 선수로만 생각하게 됐다고 여겼는데 어쩐지 억울하고 분했다. 저 사람 앞에서는 모든 감정이 엉망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다. 뒷정리고 뭐고, 혼자 하라고 내버려두고 집에 가고 싶었다. 오늘 문단속을 해야 하는 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송태섭 자신이라 먼저 갈 수도 없었다. 때문에 송태섭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집에 가기 싫어요?”

“그럴 리가, 할게, 할게.”

 

태연한 척하는 건 장기였는데 지금 제대로 된 표정인지 가늠이 안 됐다. 한번 떨어진 심장의 서늘함은 도통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꼭 호감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는 앙케이트가 송아라가 가끔 읽는 간지러운 잡지에 나왔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게도 스스로 되물었다. 대체 어디가 좋은 건지. 서태웅보단 좀 못하지만 제법 잘생긴 얼굴? 농구부 주전 중에선 바로 다음이지만 일반인들 사이에 있으면 머리 하나가 우뚝 솟은 큰 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불가능한 농구 실력? 꽤 많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폭력과 불유쾌한 기억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과거에 있던 일에 대한 유감은 이미 없어진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은 좀 다른 차원의 일 같았다.

한나를 좋아하던 느낌과는 명백히 달랐다. 그때는 조리개 설정을 잘못한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세상이 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터하이 이후 화려하게 차이고 나서는 좀 슬펐지만, 이후에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이 맞았고 이제는 슬픔도 많이 옅어졌다. 그녀를 보면 그래도 부드럽게 웃을 수 있었다. 열일곱의 송태섭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드는 이 감정은 뭐지? 온통 혼란스럽기만 하고 자각한 순간부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고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한 게 사랑이 맞나. 아마도 절대 이뤄지지 않을 짝사랑인 걸 시작과 동시에 알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또 짝사랑. 질리지도 않고.

지조 없는 마음이 자신도 한심했다. 이유가 짝사랑의 대상 때문인지, 자기 자신 때문인지 헷갈렸다. 짝사랑을 자각하고 나서 맨 처음 한 생각은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이었다. 그 선배라도 그러지 않을까? 치고받고 심지어 무료 발치도 해줬던 버릇없는 후배가 난데없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농구하다가 스트레스로 미쳐버린 거라고 진심으로 걱정해 줄 것 같았다. 아니면 잘 하지도 못하는 연기로 재미없는 농담 취급 해주거나. 후자를 상상하면 당장이라도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 꼴을 보느니 죽고 말지.

이 불안과 불행의 연속에서 하나 다행인 것이 있다면 송태섭은 몇 개월 후 미국 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물론 윈터컵이 잘 풀리고 다른 일도 제대로 진행될 때 가능한 일이었지만 송태섭은 자신 있었다. 인터하이에서 산왕을 이겼다지만 객관적인 점수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는데 어떤 부분이 좋게 보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쨌든 미국 유학 추천을 받았다. 진심으로 고백할 마음이었어도 몇 개월 후엔 끝이 정해져 있다는 뻔한 결말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건 걸림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송태섭은 한 학년 위 선배에 대한 짝사랑을 자각하는 순간 깨끗하게 치워버릴 결심을 했다. 평정을 찾으려는 노력과 거의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이런 송태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대만은 항상 송태섭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애초에 사는 법이 그런 사람 같았다. 당장 그날의 귀갓길도 그랬다.

 

“야, 화났냐.”

 

눈치를 슬쩍 보며 붙어올 때 정말 주먹을 참기 힘들었다. 짝사랑 자각 40여 분 만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주먹으로 후릴까 하다 애써 참으며 팔꿈치로 아프지 않게 밀어냈다. 아야야, 경기중도 아닌데 대단한 엄살이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때릴걸. 작은 후회를 한숨으로 흘려내며 일부러 뭐요,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봤다. 정대만은 답지 않게 어물어물 얘기했다.

 

“아까 체육관에서 그거.”

“화 안 났어요.”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댁이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쓸데없이 착 붙어서 걸으니까 무거워서 표정이 안 좋은 거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대신 송태섭은 아, 떨어져요, 하고 다시 한번 정대만을 가볍게 밀었다. 184센티의 덩치는 밀리는 척도 안 하고 오히려 무게를 송태섭 쪽으로 실으며 기우뚱하게 길을 걸었다.

 

“날씨도 추운데 이러고 좀 가자.”

“무겁다고요. 성장기에 무거운 거 들면 키 안 큰다는데 선배가 책임질 거예요?”

 

정대만은 목젖이 다 보이도록 크게 웃더니 보란 듯 더 기대왔다. 아오. 개새끼. 그 뒤로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적당히 대꾸하며 걷다 보니 송태섭의 집 근처였다. 거기까지 가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풍림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얼굴이 내내 뜨겁고 어깨의 무게가 신경 쓰였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정대만은 내일 보자, 하고 후련히 떠났다. 예에, 하고 정작 그의 귀에 들리지도 않을 인사를 하고 걸어가는데 귀가 너무 뜨거웠다. 병에 걸린 것 같다. 이게 다 정대만 때문에. 신경이 온통 등 뒤로 향했지만 애써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가다가 방향을 돌려 해변으로 향했다. 해가 거의 다 질 때쯤이라 바다는 시커먼 덩어리처럼 보였다. 하늘과 경계가 흐려지는 바다를 한참 쏘아봤다. 빨개진 귀나 뺨이 좀 식을 때까지만 있다가 갈 생각이었다.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의식도 하지 않던 의문이 자꾸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자신의 작은 방 이불 위였으면 좋겠다. 한심한 악몽이나 착각이라고 생각하게.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찬바람을 맞은 후 송태섭은 집을 향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깨에 아직도 어떤 무게가 얹혀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떨쳐내듯 어깨를 몇 번 털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과 1분 1초라도 같이 있고 싶다던데 송태섭은 기회가 된다면 당장이라도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연애든 알 수 없는 행동이든 농구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세계. 농구 꿈만 꾸고, 그 선배가 생각나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대도 기후도 다른 곳에 가면 이 마음도 별것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그게 절실히 필요했다.

집에 도착하니 송아라가 안방에서 TV를 보는지 거실로 소음이 좀 샜다. 다녀왔습니다. 들을 사람 없는 인사를 내뱉고 흘깃 거울을 보니 찬 바람을 너무 쐐서 그런지 볼이 아직도 붉었다. 뭐라도 씻겨 내려가도록 거칠게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 도착하면 좀 잡생각이 없어질까 했지만 방에 들어오니 침착하게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림을 바라보는 눈. 어쩌면 상처였을 어린 날의 야외코트. 혼자만 기억하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갔다. 억울했다. 영어 공부나 좀 해야지. 하면서 책을 펼쳤지만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백이 된 머릿속에 체육관 바닥을 퉁 퉁 울리는 공 소리가 맴돌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미쳤나, 오빠 왜 그래?”

 

송아라가 방 밖에서 소리쳤다. 빌어먹을 아파트 단지, 거지 같은 방음, 태연한 척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이번엔 지금 자신이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한나를 좋아할 때는 넘치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그냥 꼴사납지 않아 보일 정도만 자제하며 살았다- 지금은 죽기 직전까지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책상 위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충분히 한심하고 엉망이었다.

 

그날 이후, 송태섭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윈터컵, 그때까지만 참자. 라고 생각했다. 잘 생각해 보면 학년도 다르고, 접점이라곤 부활동 뿐이라 수업 후에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될 줄 알았는데 그 짧은 시간이 매 순간 고비였다. 솥뚜껑만 한 큰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거나, 연습 시합에서 같은 팁일 때 이기면 달려와 꽉 끌어안거나, 집에 가기에 심심하다며 아이스크림이나 만두를 사준다고 사람을 꼬드기곤 했다. 우리 이렇게 친했나?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송태섭은 그때마다 덤덤한 얼굴로 손을 치우거나 땀 때문에 찝찝하다고 밀어내거나 추운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며 핀잔을 주는 식으로 밀어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거절한다고 거절하는데 그럴 때면 그 선배가 자신을 한 번씩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그 인간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 볼 일이 없어서 보지 않는다는 걸 송태섭은 알고 있었다. 눈치 볼 거 다 봤으면 쓸데없이 그만 좀 치대라는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마음을 숨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한나를 좋아할 땐 그저 멋있어 보이고 싶고, 도움이 되고 싶어 노력하며 자연스럽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눈에는 대체 어떻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더 이 선배에게는 끝까지 숨겨야지 하는 생각만 강해졌다. 한 십 년 후 동문회 같은 걸 하더라도 농담이라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선배는 자꾸 웃고 치대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아주 난리였다. 불러다 팰 때는 언제고, 미친 새낀가 싶었다. 더 미친 건 날이 갈수록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인지하는 자신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들이 버겁게 다가왔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게 느껴져서 죽고 싶었다. 유난히 자신에게만 친밀하게 구는 것 같고,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송태섭은 정대만 선배의 절친인 영걸 선배를 떠올리곤 했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이미 그 둘은 학교 공인 커플이나 마찬가지일 거라는 상상을 하니 좀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영걸 선배의 순수한 우정에 대단히 실례가 되는 상상이었지만 이쪽은 정말로 급했다. 송태섭은 어느새 영걸 선배에게 미안해서 좀 친절하게 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참고로 정대만에게는 단 한 번도, 일분일초도 미안하지 않았다.

정대만이 하는 무수한 헷갈리는 행동 중 송태섭이 제일 싫어하는 건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였는데 일단 그 거대한 손이 다가오는 것부터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쫄렸고, 거친 손길에 왁스나 스프레이로 열심히 고정한 머리가 망가지는게 아주 짜증이 났으며, 정대만은 송태섭이 짜증을 내며 손을 치우고 머리를 다시 매만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는 점이 정말 열받는 부분이었다. 연습 중 머리카락이 반쯤 내려와 있을 때는 흘리는 땀 때문에 두 배로 신경 쓰이고 불쾌했다.

 

“괴롭힘으로 신고할 거야.”

“우리 또 징계 먹으면 출전 못해. 나 없이 윈터컵 어떻게 하려고.”

 

집에 있는 송아라도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는 머리를 좀 쓰다듬을라치면 짜증을 있는 대로 내곤 하는데 정대만은 왜 고작 1년 차이 나는 후배를 가지고 이 짓을 하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1학년들은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좋아질 수도 있잖아. 어떤 사람에 대해 알수록 싫어하게 되기에 어려웠다. 특히 정대만처럼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일말의 불편함이라도 없으면 정말 너무 빠져들 것 같았다. 그래서 거리를 좀 늘리고 싶은데 이 선배는 요즘 들어 더 붙어오곤 했다.

 

“맨날 하는 머리, 그거 다시 하는 거 5분도 안 걸리잖아.”

“맨날 하는데 또 해야 하는 게 짜증 난다고요. 아!!”

 

캐비닛에 넣어둔 왁스를 찾으러 가는 길에 다시 큰 손에 붙잡혔다. 뭐지, 이 선배. 하고 노려보는데 그걸 신경도 쓰지 않고 정대만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너 그 성질 사나운 눈썹 가리면 인상이 훨씬 낫네.”

“선배도 머리 길러서 얼굴 가리고 다니면 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은데요.”

 

정대만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긴 머리 네가 싫어하잖아.”

 

대체 뭔 상관이래.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때 한심하게 살던 자신이 싫은 거겠지. 송태섭은 뭐라고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너무 크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한 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렇게 싫어하진 않는데요. 라고 덧붙였다.

 

“송태섭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러면 계속 모르세요.”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온 진심마저 농담 같은지 정대만이 다시 웃었다. 잘생긴 얼굴. 언제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데 자신이 반한 상태라 좀 특별한 상황같이 느끼는 거겠지. 송태섭은 사춘기 소년이 된 것처럼 좀 슬퍼졌다. 마음을 접기까지 버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어차피 말하지도 않을 건데 혼자 영원히 기억해야지. 스스로에게만 소중한 기억이 자꾸 쌓이는 것을 짝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갈수록 실감했다.

머리를 매만지고 와서 남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다가 정대만이 또 눈에 자꾸 걸려서 아예 피곤한 척 눈을 감고 벽에 기대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휴, 그래 쓰다듬듯 헤집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그냥 눈을 감고 잠든 척하는데 다가오던 손그림자는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데서 멈췄다. 아주 잠깐일 것 같은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을 뜨면 다른 사람이 서 있지 않을까. 불안한 기분에 눈을 번쩍 떴더니 정대만이 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2~3초 정도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어색하지 않게 무슨 말이든 해야지. 했는데 찰나에 마주친 표정이 아주 낯설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초조한 듯 흔들리는 차가운 눈동자. 그래서 평소처럼 웃기는 농담을 하지도 못하고 여유 있는 표정을 짓지도 못했다.

무슨 말인가가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목 안으로 사라졌다. 송태섭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상한 착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정대만이 너무 좋아져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 선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지금이야 여러 경기를 함께 뛰고 나서 약간의 전우애가 쌓였다고 하지만 예전엔 유난히 송태섭만을 싫어했었다. 그 당시 농구를 할 수 없었던 개인사를 투영했던 탓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싫었던 인간을 좋아하게 될 확률은 너무 낮았다. 게다가 인간적인 호감이 아니라 애정? 사춘기 여자애의 공상 같은 소리였다.

송태섭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정대만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졌다. 괴로운 것처럼 보였다.

 

“선배, 어디 아파요?”

“나는 네가 어디 안 좋은 줄 알았지.”

 

아까의 표정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정대만은 그새 선배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선배 같은 얼굴. 이상한 표현이다. 언제부터 저 사람은 저런 표정을 하게 되었을까. 어느 날카로움도 남아있지 않은 표정을, 그것도 자신을 향해.

오직 둘만 조금 어색한 분위기로 부 활동이 끝난 후, 송태섭은 들를 곳이 있다는 핑계로 한참을 어물거리다 밖으로 나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을 때까지 숨기려던 마음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집까지 뛰어갈까. 복잡한 생각들로 오히려 걸음이 느렸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덜터덜 걷던 송태섭이 길 한복판에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별로 숨으려는 기색도 없이 정대만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할 말 있어요?”

“나는 딱히….”

“그렇담 왜 기다렸대. 추운데.”

 

힘 빠진 웃음을 짓는 송태섭에게 정대만이 천천히 걸어왔다.

 

“뭐…. 집에 같이 갈까 해서.”

“고작 그 이유로?”

“이제 별로 시간이 없잖아.”

“뭐야, 선배 이제 와서 은퇴할 생각은 아니죠?”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 나니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제 와서 이 선배 없으면 윈터컵은 고사하고 앞으로의 연습경기 일정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뭐 발목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하나? 눈치를 살피려고 옆을 걷는 선배를 올려다봤다.

 

“너 유학 준비한다며.”

“아… 어디서 들었어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윈터컵에서 잘해야 가는 거라.”

 

자신의 유학 사실이 또 이 선배의 심기를 약간 불편하게 한 건가 싶어 맘이 좋지 않았다. 부상과 방황만 없었어도 이럴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좀 조급했다.”

“윈터컵 결과가 좋으면 선배 대입에도 도움이 되겠죠. 제가 잘 해볼게요.”

“그거 말고.”

 

그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송태섭에게 유학은 절실했다. 도망갈 곳이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게 곧 목표라는 점이. 평생 어딘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데 도피처가 꽤 그럴듯한 목표로 탈바꿈해 눈앞에 놓여있었다.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놓친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놓는 거다, 모르는 척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 이 선배가 자신의 기만을 눈치챈 듯 주변을 맴돌았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걸리면 걸릴수록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이쪽을 포기하는게 정답이 아니야? 멈춰서서 정대만을 쳐다보자 정대만도 자신을 쳐다봤다. 수없이 마주치던 시선은 한낮의 어떤 순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싫으면 나는 그냥 3학년 정대만으로 있을 거야.”

“제가 결정하는 건가요.”

“응.”

“왜요?”

“이제 난 네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근데 넌 날 좋아하잖아.”

 

바로 이런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싫어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송태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면서.

 

“전 미국에 갈 건데도?”

“몇 개월 남았잖아.”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뭘 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추억이냐.”

 

송태섭은 쓰게 웃었다.

 

“선배는 언제나 최악의 선택만 하게 만들어요.”

 

몇 번이나 되살아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때로는 이런 순간만이 영원하다. 송태섭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선배를 정말 좋아해요.”

 

입 밖에 내는 그 순간까지도 두려웠다.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정대만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다가 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 송태섭… 나는 너 갈 때까지 그 얘긴 못 들을 줄 알았어…”

“뭐에요?”

“뭐긴 뭐야.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 선배는 얼굴을 벅벅 쓰다듬더니 벌떡 일어나서 송태섭의 양 볼을 잡고 부지불식간에 입을 맞췄다.

 

“악!!! 정대만 미친 거 아니야?!”

“나 좋다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말도 없이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좀 봐주라… 이제 네 남자 친구잖아.”

 

송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 친구? 되묻는 말에 정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미국 갈 건데?”

“너 이제 내 남자 친구라서 바람 못 피워, 다른 사람은 절대 못 만나.”

“미국에 가서도?”

“미국에 가서도.”

 

그러고 정대만은 송태섭을 꼭 껴안았다.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던 것 같은 울렁거리는 불안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당장 내일부터도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이렇게 꽉 안아준다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방향으로 모든 일이 풀릴 것 같았다. 송태섭은 실실 새는 웃음을 참지 않고 정대만을 마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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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후기쓰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4의 배수를 맞추려고 배포본엔 넣지 않았지만? 여튼 그런 기벽이 있습니다.

재활이라고 하면 좀 자주라도 써야하는데 대운 부스는 잡아두고 갈까말까갈까말까를 고민하다가 벼락치기하듯 쓰게 되었네요…

다음엔 좀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목도 잘 못지어서 매번 지인들에게 강제로 보여주고(심지어 같장르도 아님) 뜯어내다시피 하는데 이번엔 너무 발등파이어상태로 마감하는 바람에 듣던 작업곡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빛나는 남돌인지 귀여운 여돌인지는 읽으시는 분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둘 다 너무 좋아해요.

이번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어 표지를 해주신 노네임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하는데 찰떡같이 들으시고 멋진 표지만 만들어주시는 천재디자이너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일에 올리게 되어 쫌 기쁘네요. 그냥 인터넷 썰타래 읽듯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도 가볍게, 그리고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가져가주신분들, 웹상으로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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