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기록

명헌태섭

네, 송태섭입니다.

 

진짜 이명헌?

여름

 

번호를 드리긴 했지만 정말로 전화할 줄은 몰랐어요. 그 뿅뿅 하는 말투는 전화로도 쓰는구나.

 

산왕 주장, 이렇게 다른 팀 선수한테 사적으로 연락해도 되는 거예요? 나한테 산왕의 기밀을 빼먹으려는 못된 계획이 있으면 어쩌시려고. 와, 재수 없어. 그래요. 그쪽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긴 하다.

네? 칼이 들어오면 말한다고? 이명헌 씨 웃기는 사람이네….

 

아아, 나는 별로 해당 사항 없어요. 일단 전화로 유출할 작전 따위가 있는지부터 물어보시죠? 그런 거 안 키운다니까. 원숭인지 천재인지 모를 애는 하나 키워도.

 

응, 재활 중.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되겠죠. 당신 아픈 애 소식을 나쁜 마음으로 받아 갈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아, 맞아요. 주장. 이제 내가 주장이에요. 용케도 아셨네.

 

보고 있었구나.

 

미안한데 난 그쪽까지 볼 정신 없었거든요? 그래도 좀, 도움은 됐어요. 센터 주장과 포인트 가드 주장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잘 봐둘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죠. 뭐, 난들 알았나? 내가 차기 주장이 될 줄.

 

…당신도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상한 일이네. 치수 선배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뭔가를 보는 눈이 있나 보죠. 나도 주장 일에 좀 익숙해지면 보일까. 아무튼 기분은 좋네요. 한 명도 아니고 둘씩이나 팀을 이끌어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응?

 

뭐야, 먼저 걸고 먼저 끊는 거예요?

 

맞다.

 

산왕은 기숙사였죠. 전화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넘쳐나겠네.

 

흠, 그럼 내가 그쪽 번호를 받아봤자 의미 없겠네요.

 

불러주지 마요. 안 걸 거니까.

 

 

 

 

가을

 

 

네, 송태섭입니다.

 

이명헌 씨, 혹시 한가해요?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3학년이면 윈터컵 준비에 대학 입시까지 할 일이 많을 텐데, 고작 인터하이에서 한 번 마주친 나한테 계속 전화를 거는 게 신기해서.

 

그렇게 인상이 깊으셨나. 이기는 게 좋긴 좋네요.

 

나? 나도 바쁘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백호는 재활, 태웅이는 국대 훈련 때문에 자리를 비워서 싸움 말릴 일은 없긴 한데. 그래도 주장 노릇이 쉽지는 않네요. 당신은 대체 어떻게 그 많은 빡빡이를… 아, 죄송. 그 많은 부원을 관리했어요?

 

그러네. 거긴 3학년들이 많지. 시스템도 잘 되어있고.

 

혼자만의 짐은 아니겠네요.

 

…나도 남한테 의지 좀 하라는 뜻이죠?

 

알아요, 알아. 나름대로 여기저기 조언도 구하고, 이렇게 당신한테 전화로 물어보기도 하잖아요? 안 그래도 우리 매니저한테 잔뜩 혼났으니 잔소리 그만 해요.

 

지금? 지금은 녹화 좀 보고 있었어요.

 

늦었으니까 조금만 더 보고 자야지.

 

그쪽은 이런 시간에 전화해도 괜찮은 거예요? 아니, 몰래 하는 거였어요? 이봐요, 이명헌 씨. 전화 하루 빼먹는다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요. 내가 무슨 그쪽 여자친구도 아니고, 그냥 시간이 남아돌 때나 전화하세요.

 

오, 다음 테이프는 당신의 산왕이네요. 좋아, 이게 마지막이에요.

 

작년 윈터컵 준결승인데 기억해요? 지금 당신이 상대 팀 가드를 골대 밑에다 처박았어요. 잠깐만, 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어.

 

그리고 직접 득점.

 

녹화 품질이 별로 좋지 않은데도 흐름을 잡아챈 게 보이네요.

 

네?

 

슛 연습도 하고 있어요.

 

아니, 내가 슛을 잘 쏘게 되면 그쪽이 곤란한 거 아니에요? 뭐였더라. 슛 해 봐라, 뿅? 그거 코트 위에서 들으면 얼마나 열 받는데.

 

티는 안 났구나. 다행이네.

 

얼마나 짜증 나고 불편했는지 알아요?

 

그에 비해 당신은 신경줄이 돌로 만들어졌는지.

 

….

 

…그건 좀 기쁘네.

 

좋아, 슛 연습 더 할래요. 윈터컵에서는 당신을 더 거슬리게 해 줄게요. 기대해도 좋아요.

 

내일도 연습이 있으니 이만 자야겠어요. 그쪽도 몰래 전화 쓰지 말고 자러 가라고요.

 

잘 자요.

 

 

 

 

 

겨울

 

네.

 

훈련 끝나고 와서 이제 씻고 나왔어요.

 

벌써 눈이 온다고요?

 

아키타는 정말 멀구나. 그렇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긴 눈은커녕 아직 그렇게 춥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다들 별로 추워하지 않는다는 거지. 나는 남쪽 지역에서 태어나서인지 추위를 좀 타거든요. 기온이 더 떨어지면 감기에 걸릴까 봐 두꺼운 옷을 미리 꺼내놨어요. 눈은, 오겠죠.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왜냐고요? 그냥 눈이 싫어요. 이유는 딱히 없어요. 어차피 눈 같은 거 별 쓸모도 없고 예쁜 쓰레기잖아요. 아키타는 더 심하지 않아요? 정말? 3학년들까지 하루 종일 퍼내야 할 정도라니 믿기지 않네. 그럼 나보다 그쪽이 더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당신은 눈을 좋아하는구나….

 

뭐, 그럼 나도 이번 겨울의 첫눈을 보면, 쓰레기보다는 높게 평가해 볼게요. 이명헌이 좋아하는 것. 그 정도면 됐죠?

 

아키타라….

 

왜, 놀러 가면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요? 웃겨, 거기가 어딘데 내가 가요. 난 비행기 표 살 돈이 있으면 농구화나 한 켤레 더 사는 고등학생이라고요. 흠, 그렇지만 궁금하긴 해요. 눈이 대체 어떻게 와야 허리까지 빠지지? 당신이 손가락만 한 것도 아니고.

 

가게 되면.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만약에. 아키타의 눈밭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면…. 한 번쯤은 당신 손을 잡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나 그렇게 가볍지는 않으니 잘해 봐요.

 

여긴 바다가 있어요.

 

응, 바다. 우리 집 바로 앞도 해수욕장이긴 한데 거길 데려가긴 좀 고민되네요. 가끔 이정환이 파도 타고 나타나거든요. 어, 해남 앞이야. 웃겨요? 나도 웃겨. 해변에서 가드 셋이 마주치면 그만한 코미디가 없겠다. 바다는 좋아해요. 왜냐니….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좋아해요.

 

….

 

여보세요?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수화기 들고 졸았나?

 

바다가 왜 좋은지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냥 난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니까. 해변을 걷지 않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뿐이에요. 응, 더 남쪽. 오키나와예요.

 

거긴 제법 덥거든요.

 

여름이 오면 당신 같은 아키타 남자는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네.

 

맞다, 그리고. 그쪽 기숙사 전화번호 불러줘요. 내가 안 받겠다고 한 건 맞는데,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그냥, 그냥….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할게요. 또 그렇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놀리지?

 

대충 넘어가 달라고요.

 

…응, 다 적었어요.

 

그러게, 이제는 진짜로 윈터컵이 코앞이네요.

 

사실 예선을 통과하기 전까지 계속 불안했어요. 백호도 제대로 감을 찾았고, 정대만 선배도 대학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주고 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경기는 끝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거, 그쪽이랑 우리는 잘 알죠.

 

아, 시비 아니라고. 당신이야말로 자꾸 장난치지 말아요!

 

네네, 삐뇽.

 

뭐 어때요? 좀 따라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근데 이건 대체 무슨 기준으로 바꾸는 거예요? …들을수록 이상해지네. 그냥 설명하지 마요. 다시 윈터컵으로 돌아가자고요, 우리.

 

그쪽은 예선 정도론 떨리지도 않죠? 산왕은 왕좌를 지키는 쪽이지 기어오르는 쪽이 아니니까. 이번 겨울에 좀 기어 본다 쳐도 본질이 어떻게 변하겠어요. 으, 나 벌써 당신이 박살 낸 가드들이 불쌍해지려고 해.

 

물론 난 이긴 쪽이지만, 공감은 된다고요. 이명헌 씨가 경기 중에 어떻게 보이는지 거울이라도 보여주고 싶네.

 

녹화 테이프로는 안 돼요. 그런 데에 담기지 않는다고.

 

쳇.

 

좋아요. 이번에도 맘껏 저를 싫어하게 도와드릴 테니까요.

 

기억하죠? 스피드는 누가 최고다, 뿅?

 

이젠 삐뇽이지, 예에. 이상한 사람 같으니.

 

….

 

정말로 시간이 빠르네.

 

곧 봐요.

 

 

 

 

 

 

어, 명헌이 형.

 

아악, 내 말이요. 진짜 환장하겠다고! 물론 윈터컵 전에도 부원이 꽤 늘긴 했어요. 개중에는 기본기가 괜찮거나 아직 좀 서툴어도 재능이 보이는 애들도 있었고. 그때 형이 해가 바뀌면 신입 부원이 많이 들어올 테니 각오를 해 두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감당이 안 돼!

 

피라미드라고요, 피라미드.

 

매해 어느 정도 부원이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3학년은 너무 없고 2학년은 좀 나아도 1학년보다는 훨씬 부족하니까. 한 사람이 돌봐야 하는 후배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솔직히 원래 주전들의 사회성부터가….

 

하아, 이건 누워서 침 뱉는 셈이니까 그만할게요. 하여튼 오늘도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훈련 계획을 짜다가 왔어요. 그래도 태웅이가 주장을 맡아본 경험이 있어서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형이 보내준 책이랑 편지들도요.

 

음….

 

진짜 이렇게 도와줘도 돼요? 아니, 형이 딱히 산왕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후배들의 상대 팀이잖아요? 아, 자신감 있네. 좋아요! 이번 인터하이에서 또 최강 산왕을 타도한다, 내가!

 

흠흠. 그건 그렇다 치고. 이봐요, 대학교 새내기.

 

캠퍼스 생활은 어때요?

 

라디오에서 떠들어대는 것만큼 낭만이 있나요? 도쿄에는 훌륭한 선수도 많고, 예쁘고 멋진 대학생들도 많으려나.

 

이 사람 좀 봐, 형이랑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야지 나 같은 고등학생 남자애랑 캠퍼스를 걷는 상상을 해서 뭐해요?

 

….

 

형 말이 맞아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에요.

 

어쨌든 대학생이 된 거 축하해요. 형은 또 1학년 때부터 주전을 꿰찰 건가요? 그렇게 되면 늦지 않게 알려주기예요. 아니, 딱히 자랑할 데는 없는데. 그래도 기쁘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나도 당연히 기쁘죠, 형한테 좋은 일이 생기면!

 

자꾸 이상한 말을 하게 되네.

 

다 그쪽 때문이에요. 형이 생각보다 그런… 이상하고, 간지러운 말을 자꾸 해서 그래.

 

나는 결백해요.

 

아니면 봄이라서 우리 둘 다 좀 제정신이 아니거나.

 

도쿄라. 몇 시간은 걸리지만, 형이 원래 살던 곳은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하니 훨씬 나아진 셈이네요. 솔직히 좀 아쉬워요. 예전에 전화로 아키타의 눈 내리는 날에 대해 말해줬을 때, 한 번쯤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응, 여전히 눈이 달갑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마냥 싫지만은 않아요.

 

우리 윈터컵 성적 끝내줬거든. 산왕은 못 이겼지만, 그래도 눈 하면 떠올릴 자랑거리가 많이 생겼어요. 신입 부원 폭탄만 봐도 알 만하지. 작년 겨울에 우리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이야기도 하고, 훈련하다가 첫눈을 보고 강아지처럼 신나서 펄쩍거리던 애들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명헌이 형은 진짜 추위를 안 타더라.

 

그런 생각도 해요.

 

아, 그렇게 추운 줄 알았나.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추웠다고요.

 

형이 준 장갑은 잘 갖고 있어요. 이거 정말 택배로 안 보내줘도 돼요? 나한테는 맞지도 않는 걸 가지긴 뭘 가져. 그땐 가는 길에 손이 떨어져 나갈 뻔해서 형이 끼워주는 동안 얌전히 있었지, 너무 커서 도저히 끼고 다닐 수가 없다고요.

 

습, 아키타에 가볼 수 있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는 무리예요. 형이 비행기 표 사준다고 꼬셔도 안 돼요. 나도 내 힘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가기엔 성적이 좋지 않거든. 휴, 진짜 걱정이 크다. 작년에 고생한 치수 선배랑 준호 선배 생각이 또 나네. 다들 이렇게 조마조마한 시간을 견뎠겠죠?

 

뭐? 아니, 그야 그렇지. 형이랑 산왕 선수들은 걱정이 없었겠지! 그래서 아무도 은퇴 안 하고 윈터컵에 우르르…. 두고 봐요. 내가 꼭 어디든 추천받아서 농구로 대학 간다. 나 정말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이것저것 알아보고 선생님이랑 상담도….

 

음, 아니에요. 딱히 정해진 건 없어요.

 

이번 인터하이나 열심히 해야지.

 

좋은 일 생기면 형한테 제일 먼저 전화할게요.

 

잠깐만, 옆에서 애인이냐고 소리친 거 누구야. 이거 목소리가 익숙한데? 우리 학교 웬수 소리가 나는데? 어이, 정대만! 도쿄는 좋아요? 댁이 이명헌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건 다 우리 덕분이니까 감사한 줄 알라고요!

 

뭐야, 형 뭐 해요? 정대만 버리고 온다고? 아하하하….

 

웃겨, 진짜.

 

아무튼 다음 주죠? 기대된다. 카나가와의 바다를 보여줄게요. 우리 학교랑, 내가 아침 러닝을 하는 길도.

 

근처에 중학생 때부터 자주 놀던 농구 코트도 있거든요. 거기서 원온원도 해요. 그리고 또 뭘 하지? 매일 같이 통화하면서 한 이야기는 많은데, 막상 형이 진짜 카나가와에 온다고 하니 마음을 못 정하겠어요. 남을 자기 지역으로 초대한 사람으로서 책임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요.

 

…나는.

 

형 말이 맞네요. 나도 뭘 하든 상관없어요.

 

나머지는 다음 주에 이야기해요.

 

응, 잘 자요.

 

 

 

 

 

여름

 

크흠, 여보세요.

 

웃지 마요! 더 안 웃겠다고 했잖아!

 

아니, 하.

 

그래, 인정해요. 거기서 형을 끌어안은 건 솔직히 과했다.

 

하지만 우승이라고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산왕처럼 부원이 차고 넘치는 명문고도 아니고, 작년까지는 응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팀이 우승이라니! 사실 지금도 흥분이 안 가셔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너무 좋은 나머지 엉엉 우는 애들도 있다니까요.

 

나 참. 아무튼 우리 애들 앞에서 형을 보자마자 달려든 건 절대 고의가 아니라고요!

 

안 그래도 부원들한테 엄청나게 시달리고 있어요. 백호랑 태웅이 녀석은 물론이고, 응원하러 왔던 선배들한테까지 다! 대만 선배는 방금 전까지도 형이랑 왜 사귀냐고 어깨를 짤짤 흔들었다니까요? 몰라, 괘씸하니까 나중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좀 괴롭혀 줘요.

 

아, 근데 아직도 꿈만 같아.

 

정말로 내가 이끄는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우승한 거예요?

 

…….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실감이 난다.

 

정말, 꿈이 아니네.

 

그동안 전국재패니, 뭐니 떠들긴 했어도 진심은 아니었다고요. 다른 바보 두 명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심이었겠지만. 나는 솔직히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봤어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우리를 분석하는 팀들도 더 치밀하게 노력했을 테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길 잘했네요. 이제 선수로서도, 주장으로서도 자리를 잡은 느낌이에요. 고작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 번호를 다는 게 맞는지 고민했는데 말이죠. 그때 내가 형 붙잡고 신세 한탄을 얼마나 했는지 기억나요?

 

네? 아아, 대학. 그렇죠. 인터하이가 끝났으니까.

 

아마도 추천 하나쯤은 들어오겠죠?

 

형이 다니는 대학에 간다면 좋을 텐데….

 

…….

 

아, 듣고 있어요. 잠깐 다른 생각을 좀.

 

복잡한 문제잖아요. 이번 인터하이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고 해도 아직 고민이 많아요.

 

그래도 좋은 일 생기면 형한테 제일 먼저 전화할 테니까.

 

응, 나쁜 일이나 힘든 일도요. 내가 전화해서 투덜거릴 사람이 형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뭐? 정대만? 형,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음, 치수 선배나 준호 선배는 좀 그럴듯하다.

 

근데 형은 어떻게 북산 예전 선수들까지 다 기억하냐.

 

나랑 관련된 건 다 기억해요? 아하, 그때부터 내가 좋았구나.

 

아직도 가끔 신기해.

 

그 이명헌이랑 이렇게 지내는 거요.

 

정말로, 농구가 좋긴 좋다.

 

코트에서 형 같은 사람도 만나고. 형이랑 전화하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상담하다 보면, 좀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뭐라고 설명하긴 좀 그런데. 하여튼, 고맙다고요.

 

맞아요. 오늘 기분 좋아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하? 여기서 더 뭘 해요.

 

음….

 

보고 싶어요.

 

…분위기가 이상해졌잖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정말이지, 이럴 때 콱 한 대 때려줄 수 없다는 점이 장거리 연애의 슬픔이라니까. 이제 바로 옆 지역이기는 하지만, 얼굴 보기 힘든 건 여전하다고. 그야 물론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게 제일 큰 문제죠.

 

양심의 가책은 안 들어요?

 

됐어, 앞으로 나 졸업할 때까지 손가락도 대지 말던가요.

 

이 대화를 했다고? 언제?

 

아, 맞다. 저번에 형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갔을 때. 그 전날에도 내가 접근 금지령을 내렸구나. 이제 기억났어. 알겠다고 해놓고 날 엄청 못살게 굴다가 잤잖아요. 집이라고 끝까지는 안 했어도 진짜 파렴치한이 따로 없었는데! …뭐, 싫었다는 건 아니고.

 

그야 당연하죠.

 

애인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나 다음 주쯤에 도쿄에 갈까 봐요.

 

인터하이가 끝났으니 잠깐 쉴 시간이 있거든요. 물론 나는 3학년이니까 그리 여유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쿄 한 번 더 다녀올 시간이 없겠어요?

 

거의 매번 형이 카나가와로 와줬으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예요. 나 숙소는 따로 안 잡아도 되겠죠? 저번처럼 형 자취방에서 재워주면 되잖아요. 음, 그러니까. 저번에는 괜히 숙소를 잡았다가 들어가지도 않았고. 아까우니까….

 

칫, 또 웃는다.

 

이 형 이제 보니 웃음이 아주 헤프네.

 

푸흐, 그렇죠.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 들으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 걸? 그래도 뭐 어떡해. 딱딱한 표정 짓고 있어도 내 눈에는 다 보이는데.

 

아무튼 시간 비워놔요.

 

그리고 같이 사진도 한 장 찍어요. 이왕 다 들킨 거, 라커룸에 대놓고 하나 붙여놔야 덜 억울하겠어. 앞으로 누가 놀리면 그냥 귀 막고 내 애인 잘생겼다고 자랑이나 하려고요.

 

웬수 녀석들, 누가 이기나 보자.

 

아, 이거 봐. 자기들 얘기 하는 줄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부르네.

 

간다, 가!

 

이만 끊을게요.

 

도쿄에서 만나요!

 

 

 

 

 

가을

 

 

명헌이 형.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응, 지금 공중전화.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

 

나 미국 가요.

 

더 설명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알죠.

 

이렇게 통화하는 거 앞으로는 힘들 거예요. 전화도 편지도, 솔직히 쉽지 않죠. 기다려달라는 말 안 할게요.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거든.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요.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이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끝없이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파도를 보며, 돌아오지 않는 시절을 되짚어 나가는…. 역시 그런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여기까지 해요.

 

나한테 이명헌이라는 사람을 알려줘서 고마웠어요.

 

내가 형한테 큰 상처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라고 믿어요.

 

…….

 

아….

 

미안해요.

 

형도, 우는구나.

 

정말 미안해.

 

잘 지내요.

 

 

 

겨울

 

 

태섭, 나야.

 

기다릴게.

 

이 말 하려고 전화했어. 따로 더 할 말은 없다. 잘 다녀와.

 

아니면 잊어.

 

뭐든 내가 범한 파울이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온다, 태섭아.

 

아키타에서 기다릴게.

  •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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