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의 목소리
명헌태섭
내달 초 아키타에 방문합니다.
한 달간 머무를 생각입니다.
숙박하는 곳과 연락처를 동봉하겠습니다.
당신을 너무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면,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오지 않아도 좋아요.
보내는 이, 송태섭.
흰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손을 뻗자 차가운 것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함박눈이 쏟아진 거리는 온통 희고 반짝였다. 태섭은 바닷가의 하얀 포말이 온 세상을 덮은 듯한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런 눈이라면, 정말로 키가 큰 농구선수의 다리까지 푹 빠질 것 같았다. 태섭, 여기는 눈이 많이 온다. 너 정도 되는 사람은 눈 깜빡할 사이에 눈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된 과거.
태섭은 어린 시절의 잔재를 따라 홀린 듯이 걸어 나갔다. 내리는 눈 사이에서는 세상이 고요 속에 잠겨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는 인정한다. 이런 광경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
눈이 싫어?
나는 꽤 좋아해.
그리고 네가 좋아하게 만들 자신도 있어.
뼛속까지 시린 한기, 차가운 바다. 손에 맞지 않는 장갑을 끼고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손바닥을 쫙 펼치면 낡은 천 위로 눈송이 한 개, 바랜 추억 하나. 자신은 없었다. 우리 모두 적잖이 나이를 먹었고 청춘은 수평선 너머로 기울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아키타의 남자는 나를 기억할까.
“정말로 혼자 아키타까지 가?”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습관적으로 이민 가는 사람처럼 짐을 싸던 태섭은 옷가지들을 죄다 꺼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레토르트 식품 같은 걸 넣을 필요가 없지. 아키타는 멀긴 해도 미국이 아니니까. 태섭이 짐가방을 두고 고민에 빠지자 문간에서 구경하던 아라가 아키타행 비행기 표를 팔랑거렸다.
“응.”
“누구 만나러 가?”
“딱히? 그냥 쉬러 가는 거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휴양이 될 것이다.
태섭에게는 큰 기대가 없었다. 기대와 설렘으로 일본을 가로지르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한때는 전화선을 꼬아대며 풋내 나는 마음을 속삭였으나, 이제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금속성이 만져졌다. 유선 전화기가 사라지는 속도에 맞춰 낭만도 죽어버린 시기였다. 그래서 내민 손 위에 아라가 내려놓은 표는 편도로 끊겨 있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거나 거절이 돌아오면 한 달을 채우지 않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아니, 애초에 편지가 그에게 닿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태섭은 미국에서 제법 친해진 우성은 물론, 국내 리그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에게도 그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는 이명헌의 이름 석 자조차 허투루 꺼낸 적이 없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라지는 것이 옳으므로.
“오빠 혹시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말 참 예쁘게 한다.”
그나마 이명헌이 여전히 태섭이 알던 이명헌이라서 다행이었다. 국내 최고의 가드에게는 에이전시를 통해 팬레터를 전달할 수 있었다. 수많은 편지들 중에 하나로 변한 옛 약속이 무사히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태섭이 원하는 방법이었다.
미약한 인연을 빌고, 그것이 없다면 버려지기를 바랐다.
“그럼 왜 굳이 한 겨울에 아키타에 가는데?”
동생의 어투는 곱지 않으나 걱정이었다. 그들 가족은 한 바다에서 태어나 체질을 공유했고, 태섭은 그중에서도 특히 추위를 많이 타곤 했었다. 여전히 더운 바다를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눈을 보러.”
“눈?”
“응, 눈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광경을 볼 거야.”
아키타의 추위는 사나웠다.
가장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얇은 옷들을 껴입다 못해 목도리와 귀마개까지 둘둘 감았는데도 그랬다. 패션을 포기하고 천으로 이루어진 눈사람이 된 태섭은 어깨와 턱을 덜덜 떨면서 걸었다. 너무 추운 날에는 오지 마. 누가 간대요? 와줬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도무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낮게 스며드는 목소리에 어린 심장이 가늘게 떨리곤 했다.
미숙한 말, 다정한 말. 이제 와 생각해보면 미성숙했던 나에게 똑같이 부족했던 당신이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전해줬던 마음들. 태섭은 가끔 생각했다. 그때 형도 어렸는데. 그때의 형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왔는데. 기억 속에서 사랑을 가르쳐준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리도 용감했을까.
이내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태섭의 얼굴을 할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뜬 태섭이 멈추지 않고 걸었다. 낯선 찬바람을 뚫고 도착한 숙소는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지인 정 모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낭만이 다 뒤진’.
“체크인이요.”
출장 온 샐러리맨들이 머무는 곳보다는 조금 더 낫고 고급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곳이었다. 여행객이 못 되는 처지에 어울리도록 택했지만 한 달 정도는 지낼 만했다. 무엇보다 먹을 만한 식사가 나온다는 점에서 합격점이었다. 사실 태섭은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친 지 얼마 안 돼서 일본식이기만 하면 뭐든 달가웠다.
태섭은 천천히 짐을 풀었다. 옷가지 몇 개를 옷걸이에 걸고 전자기기와 스킨케어 제품마다 자리를 정하는 손길이 빠릿빠릿했다. 방랑이 익숙한 사람의 버릇이 그랬다. 방은 생각보다 작지 않았고, 짐은 딱 생각만큼 적었기에 정리를 끝낸 후에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공간을 채우는 건 잡동사니가 아니라 상념이었다.
너는 혼자 남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
알아요.
의지하는 버릇을 익혀. 훈련하듯이.
작은 창을 열자 싸늘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추위는 당신을 생각나게 만든다.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는 짐승처럼. 한 걸음 떨어져 보자 네모난 창문 너머로 하늘하늘 내려앉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한때는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던 조각마다 하나씩 그리워했던 통화 기록이 있었다.
아키타에는 정말로 눈이 많이 오는군요.
여긴 눈이 많이 와.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눈이 내 허리까지 쌓이면 3학년들까지 죄다 끌려 나와 눈을 치우지. 두 사람은 너무 많은 통화를 했다. 가장 먼저 잊히는 것이 목소리라던데, 그와 나눈 대화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했다. 그것은 태섭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 같았던 순간마다 완충제가 되어주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승 축하해.
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 역시 기뻤어.
고통스러운 날에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면 절망마저 무색해졌다.
자신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등을 밀어준 바람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알기에, 죽어도 무너질 수가 없었다.
난 두 번째 영광의 시대를 찾아야 해. 한 사람을 상처입힌 사람은 스스로 절망할 자격이 없어. 미국 땅에서 이룬 성취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모두가 보내준 찬사는 실연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의 상처가 만든 영광이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당신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래서 당신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기다릴게. 그 한마디가 당신에게서 나를 오래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까. 아마 알고 있겠지. 마지막 통화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으니. 당신은 한 번의 통화로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큰 판을 설계했다. 그리고 이명헌의 상처가 승리의 열쇠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태섭은 창가를 향해 속삭였다. 여긴 눈이 많이 와요.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이곳에 있으면 열다섯 번의 해가 하루처럼 지나가지 않을까. 그리하여 당신의 기다림이 너무 길고 고독하지 않았다면 좋겠다.
기다려달라는 말 안 할게요.
해.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거든.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요.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다릴 수 있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이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어요. 끝없이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파도를 보며, 돌아오지 않는 시절을 되짚어나가는…. 역시 그런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겠더라고요.
송태섭, 그만 말해.
그러니까, 우리 여기까지 해요.
그 후로도 태섭은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했다. 혼자서 여행을 다닌 적도 있고, 독거 생활도 오래 해본 주제에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잘 나돌아다니는 녀석은 NBA 선수 송태섭이었고 지금은 아니었다. 귀국하고 인사를 돌리러 다니느라 미뤄두었던 탈력감이 이제야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이명헌도 없고 농구도 없는 삶이라니. 태섭은 헛웃음을 치고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었다. 몸을 움직이면 나쁜 생각도 조금은 관용을 부려준다. 아침저녁에 가벼운 러닝을 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은 훨씬 나아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 왔다. 당신도 이 거리를 달려봤을까. 어느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했을까. 어린 시절의 그를 상상해보는 일은 재미있기도 했다.
물론 한 달을 전부 그렇게 견딜 수는 없었다. 3주가 지나자 태섭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한 번 정한 루틴을 죽어도 지켜야 하는 몸뚱이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진짜 죽겠다 싶어서 얌전히 기어들어 왔다. 옷가지를 의자에 걸쳐놓은 태섭은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당신에게 약속한 성공을 다 이룬 지금, 내게 무엇이 남았다고 생각해?
평범하게 료칸에 묵을걸 그랬나 잠깐 후회했지만, 다시 예약할 기회가 주어져도 이 방으로 올 것 같았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유일한 공간에 갇힌 게 꼭 이명헌을 버리고 미국으로 처음 떠났을 때의 생활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공하기 전, 또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선명하게 이명헌을 그릴 수 있던 시절.
혼자가 되면 딱 이렇게 멍청이처럼 쓰러져버리곤 했어. 고된 훈련을 끝내고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가득 찬 채로. 눈을 감고 당신의 말을 곱씹고 있으면 어디 적어놓은 것도 아닌데 선명하게 생각이 나더라.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아마 시험 성적으로 미국에 가지 않았을까.
기다릴게.
정말 이 차갑고 아름다운 곳에서 나를 기다렸어?
아키타에서 기다릴게.
얼마나 오래?
도저히 방 한 칸을 견딜 수 없었다. 태섭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옷을 꿰어 입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낡은 장갑을 끼고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손님, 눈이 내리고 있어요. 밖으로 나가기엔 옷차림이 얇으세요. 괜찮다고 대답했나, 아니면 눈이 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나? 태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그저 눈앞에 새하얀 세상이 있었다.
이명헌의 영원.
아키타의 남자, 그 옛날 눈을 바라보며 수화기를 들었을 소년. 파울을 고백하는 당신의 입술 사이에서 흩어진 입김을 다시 그러모을 수 있다면. 그런데 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추위를 견디는 법을 몰라.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네가 눈 속에 빠지면 내가 잡아줄게. 날 붙잡고 걷도록 해. 태섭은 길에서 벗어나 천천히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백지 위로 발자국이 남았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옮길수록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한가득하다면 눈의 바다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겠어요.
애리조나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었다. 썰물과 밀물은 늘 일정하게 찾아와 기다림을 견디는 사람에게도 시간이 흐른다고 말해주는데, 그곳에는 바다가 없어 지난 십오 년간 누구도 삶이 나아가고 있다 말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멈춘 곳에서 과거에 갇힌 사람은 나였을지도.
너는 네 그리움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
잠깐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그렇게 평했다. 그러나 태섭은 바닷물을 낯선 땅에 풀어놓을 수 없었다. 머지않아 감정은 증발하고 짠 알갱이만 하얗게 버려질 테니까. 태섭을 알고자 한다면 진짜 바다를 찾아야 한다. 그곳이 근원이다. 태섭이 조형된 장소, 그가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한다면 손에 잡히는 것은 영원히 일부뿐이다.
카나가와에 갈게. 네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여 줘.
그리하여 송태섭의 전부는 여기에 있다. 이곳 아키타에.
허벅지까지 눈 속으로 잠겨 들었으나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당신을 찾으러 온 땅에서 내내 추웠는데. 추억에 잠기자 비로소 온기가 느껴졌다. 눈앞을 가득 채운 새하얀 빛무리가 세상의 소리를 전부 훔쳐 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 옛날 당신이 들려준 목소리밖에.
아키타에서 기다릴게.
영원히?
영원히.
고작 40분을 맞부딪힌 사람에게 영원을 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프로 경기에서는 불가능했겠지. 이기고 지고 다시 이기고, 그리고 다시 지는 게 바스켓이니까. 그날 당신이 나를 궁금해하고 내가 당신을 알게 된 것은 어렸기 때문이었다. 이명헌이 열여덟 살 소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타인이었으리라.
그런데 우리는 영광의 시대에 만났고.
이명헌의 미숙을 내가 가져버렸어.
이제는 안다. 자신이 그의 덜 자란 마음에 큰 상처를 냈다는 사실을. 무표정을 가장한 십 대 소년은 피를 흘렸고, 아마도 오래 아팠겠지. 자신이 미국에서 그리움과 죄책감이 사무치는 동안 명헌은 흉터를 가진 채로 자랐을 것이다.
아, 그 흉은 이제 사라졌을까. 덜 여문 영광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동안 천천히 흐려졌을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보낸 편지가 누락되기를 바란다. 수많은 팬레터, 당신이 받아 마땅한 사랑들 사이에 너무 늦어버린 과거는 돌이켜지지 않기를.
눈 속에서 잠들면 과거가 있을까.
아니면 잊어.
바다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이야.
뭐든 내가 범한 파울이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송태섭.”
차갑고 그리워. 끝이 없고 고요해.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온다, 태섭아.
“나와.”
아키타에서 기다릴게.
“송태섭!”
“콜록!”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양 옆구리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눈에 파묻혔던 태섭의 몸을 거친 손길로 끌어당겼다. 몸무게가 그리 가벼운 편은 아니었는데도 발이 땅에서 번쩍 들렸다. 추위에 둔해진 몸이 반응했을 땐 이미 길 위에 서 있었다. 태섭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장갑.”
“뭐?”
태섭은 몸을 비틀어 아직도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이제 상체를 제대로 감싼 팔이 그를 질질 끌고 후퇴했다. 뒤척일수록 힘이 더해져 끝내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였다. 결국 태섭은 남자의 단단한 상체에 기대서 축 늘어지며 말했다.
“장갑을 떨어뜨렸어.”
“버려도 돼.”
“어떻게 그래, 내 것도 아닌데. 돌려주려고 가져온 거라고.”
명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한테 돌려주고 싶어서….”
입술이 얼고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당신의 선물을 주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뺨과 눈가에 감각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는 몸을 명헌이 깊게 끌어당겼다.
따뜻하다.
추억과 같은 온도였다.
“그날,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떠올렸어. 추위를 많이 탄다고 했으니 따뜻한 걸 주면 좋을 텐데… 라고.”
“…….”
“급한 대로 내 걸 벗어서 줬지만 조금 실수했다고 생각했어.”
명헌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태섭을 녹이려는 듯이 연신 고쳐 안았다. 그의 손이 태섭의 뒷머리를 감싸고 등 가운데를 눌렀다. 하나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이 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태섭도 명헌도 고통의 양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다. 명헌이 둘러준 외투 속에서 힘겹게 등을 마주 안은 태섭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당신, 도, 완벽하지 않았어. 그때는….”
“그랬지.”
여전히 끄트머리가 가늘게 떨렸으나 빈틈없이 맞붙은 남자에게는 분명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 때문에 많이 아팠죠.”
귓가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조금 기뻐 보이던 명헌은 태섭의 방으로 들어온 후로 계속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태섭은 제법 지낼 만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고연봉의 농구선수 출신이 한 달이나 갇혀있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다. 태섭의 그리움은 이런 식으로 미련한 부분이 있었고, 15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랐다.
명헌은 급한 대로 태섭을 욕조에 앉히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추운 곳에서 눈물을 흘린 태섭의 얼굴은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 물을 적셔 조심조심 닦아주니 그제야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눈가를 찌푸렸다. 명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 이리 줘.”
“발은 왜?”
명헌은 두 번 묻지 않고 무릎을 굽히더니 직접 태섭의 발을 끌어당겼다. 커다란 손이 발등 위로 천천히 물을 흘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발끝이 풀어지도록 감쌌다. 부끄러움을 느낀 태섭이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발을 꼼질거리자, 명헌은 뼈 아래의 무른 부분을 엄지로 눌렀다. 아! 아파, 뭐 하는 거야. 발목을 꽉 감싸 쥐는 것으로 태섭의 버둥거림을 누른 명헌이 말했다.
“조금만 더 싸돌아다녔으면 동상에 저체온증까지 왔을걸.”
“나 지금 혼나요?”
“혼나야지. 나 보러 왔지 얼어 죽으러 온 거 아니잖아.”
입을 다문 태섭이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이 진짜로 올 줄은 몰랐지.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추위에 떠느라 조금 둔해진 머리로도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보통 혼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자각은 있었다. 태섭이 고분고분해지니 명헌도 말하기를 멈췄다. 두 남자가 함께하기엔 좁은 욕실에 가벼운 물소리만 울렸다.
침묵 속에서 태섭은 멍하니 명헌을 보고 있었다.
가족이 새로 이사한 집에는 우리가 연락을 주고받던 유선 전화기가 없다. 공중전화를 만져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편지도 메일도 아날로그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게 당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날로부터 십오 년을 훌쩍 건너와 버렸다. 낭만이든 청춘이든 저물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새겼는데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그것이 실제와 같은지 아니면 그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재조립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세기가 교체되는 동안 당신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잊을 수 없는 담담한 어조.
아키타의 목소리.
“말 한번 더럽게 안 듣지.”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났다.
“뭐가요.”
“추울 때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화나서 빨리 뛰어오라고 이때를 골랐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명헌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허리를 조금 굽혀 시선을 맞추자, 눈보라 사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뚜렷해졌다. 눈가가 조금 깊고 광대뼈 아래는 예전보다 움푹해졌나. 이마를 반쯤 가리는 머리칼은 생경하지만, 도톰하게 선을 그리는 입술이 우스울 만큼 그대로였다.
명헌이 태섭의 허리를 잡아서 일어나도록 도왔다. 체온이 오르자 태섭의 팔다리는 모두 정상적으로 기능했으나,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몸을 전부 맡기기로 했다. 옷장에서 가장 두꺼운 맨투맨과 바지를 꺼내 갈아입히는 것까지 모두 명헌이 했다. 태섭은 선수 생활로 인해 나체를 보이는 데에 면역이 있으면서도 일순간 긴장했다. 맨몸을 스치는 손끝이 너무 뜨거웠다.
“형, 소매 다 젖었어요.”
명헌에게는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니트를 대충 벗어놓은 명헌은 티셔츠 위에 실내용 가운을 걸치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불 두르고 있어. 태섭은 감독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명헌의 심기가 조금 나아졌다.
“편지를 그딴 식으로 보내는 사람이 어딨지. 혼자 90년대에 살고 있어?”
음, 아닌가. 아직 화났나.
“어쨌든 왔잖아. 3주가 넘었는데 머리카락도 안 보이길래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잠깐 다른 지역에 내려가 있느라 바로 못 받았어.”
“어디에 있었는데요?”
“카나가와.”
태섭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제정신이에요?”
“별로 제정신은 아니었지.”
열다섯 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그리움으로 산 남자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카나가와에서 뭘 했어요?”
“바다를 봤어.”
“그리고?”
“내가 말하면서도 좀 웃긴데, 이정환을 마주쳤어.”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꺼낸 말에 태섭은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짓는, 악동 같은 미소였다. 뺨이 엉망이라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거 볼 만했겠네. 고등학생도 아닌데 어쩌다 거기서 마주쳤대?”
“그 녀석, 해남에서 감독 일을 해.”
“형은요?”
“나는 은퇴 기사 띄운 후에 산왕의 감독이 될 테고.”
초임 감독이 되면 바빠지겠지. 그 전에 바다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카나가와에 갔었어. 널 기다리는 동안 오키나와에도 몇 번은 다녀왔고. 태섭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이는 안다. 그의 목소리에 바다가 묻어 있었다. 겨울 냄새가 나던 말끝에 이제 소금기가 감돈다. 태섭이 해변을 바라보지 못하는 동안 그를 대신하여 그곳에 있었다. 밀물과 썰물,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시간이 흐르면 떠났던 이는 돌아온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돌아오는 영광도 있다.
너는 돌아오는 사람이야. 그래서 기다렸어.
바다부터 아키타, 약속한 모든 장소에서. 태섭은 뒤늦게 그들의 첫 약속이 바다를 보며 이루어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느 봄날, 태섭은 카나가와를 찾아온 명헌을 집 앞의 바다로 데려갔다. 무릎을 모아 세우고 앉은 태섭 옆에 선 명헌이 말했다. 인터하이 잘 치르고 우리 학교 와. 도쿄에서 기다릴게.
그때부터 명헌은 태섭에게 영원을 말했다. 덜 자란 소년은 때때로 동요하고 태섭은 예상치 못한 순간의 그의 손을 빠져나가곤 했지만, 명헌이 계획한 미래는 언제나 하나였다.
“결혼은?”
“할 뻔했어.”
태섭은 이불 밖으로 손을 빼서 살금살금 뻗었다. 명헌의 무릎을 한 번 짚은 손끝이 단단한 몸을 타고 올라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미약한 손길에도 순순히 응해준 명헌이 쏟아지듯이 태섭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무게만큼 침대가 푹 내려앉았다. 살갗 까진 눈가 위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잠시 손을 어색하게 놀리던 태섭이 명헌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왜 안 했어요?”
“해서는 안 됐지.”
널 기다렸어. 귓가로 다가온 목소리는 중저음에서 더 낮아졌다. 이런 것을 가끔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명헌이 산왕의 주장이던 시절, 그는 한밤중에 태섭의 목소리 하나를 듣기 위해서 몰래 복도로 나오곤 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인 목소리. 되돌아보면 웃음이 나오는 사랑의 증거. 그때를 닮았다. 여전하다.
“너는?”
“사람 잘 안 만나요.”
“좋네.”
따뜻해진 뺨 위로 입술이 내려왔다. 명헌은 오래전에 잃었던 소년을 다시 찾았다. 이제 그들은 바스켓맨이 아니었으므로, 이 작은 몸을 한껏 끌어안아도 파울을 선고할 사람은 없었다. 명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바다 냄새를 받아 삼킨 태섭이 말했다.
“형을 다시 만나면 심장이 터져버릴 줄 알았어.”
“직접 보니 어때.”
“아까는 좀 울컥했는데, 진정하고 보니 생각만큼 빨리 뛰지는 않아요. 그냥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나도 그래.”
내가 형한테 큰 상처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라고 믿어요.
네게는 상처일까, 태섭아.
기다려달라는 말도 못 하면서 울면 어떡해.
아, 오랜 상처가 이제야 나아가는 기분이다. 태섭은 스스로 상처 입혔던 어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많이 아팠으나 결국 지금의 송태섭을 있게 한 상처들. 뒤늦게 겨울의 품에서 보듬어지는 것들. 명헌은 긴장이 풀려 늘어진 태섭을 일으키고 아랫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놓아줬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꼭 어린애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일어나서 짐 챙겨.”
널 여기 두느니 내 집으로 데려가는 게 낫겠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태섭은 잠깐 옷가지를 거두는 척하다가 명헌을 붙잡고 도로 누워버렸다. 명헌이 옛날에도 안 부리던 어리광을 다 본다며 태섭의 코를 톡 건드렸다. 딴청을 피우며 명헌의 팔을 가져다가 머리를 올린 태섭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태섭을 봐주기로 결정한 명헌이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본 아키타는 어땠어.”
“예뻤어요. 당신 말대로.”
“많이 춥지.”
“아니요, 따뜻해요.”
그럼 아키타에서 살까.
태섭은 그 물음이 기꺼웠다. 네모나고 작은 창문 밖에서는 아직도 눈이 많이 내렸다. 창을 열면 흰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겠지만, 태섭은 이제 추위를 견디는 법을 알 것 같았다.
그리움보다 따뜻한 것은 아키타의 목소리,
진실로 영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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