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 PLACEBO

714 by Ha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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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두나 님

+태대기반 대만이 생일 덕톡회(230522) 배포

1.

오늘도 농구부엔 큰 소리가 들렸다. 훈련 강도를 높이려는 태섭과 과하지 않게 조절하려는 대만의 기 싸움이다. 비슷한 패턴이다. 높아지는 언성이 두어 번 오가면 새 매니저인 채소연과 이한나가 다가와 말릴 것이다. 한나가 태섭을, 소연이 대만을 말리면 둘은 금세 진정하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다시 훈련이 시작된다.

“너 같이 체력이 받쳐주는 애들은 괜찮지만, 다른 애들은 아니라고.”

“선배는 대학 진학도 달려있으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뭐 인마?”

“둘 다 그만.”

오늘은 강백호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그만하라고 말하면서 큰 손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잡고 양쪽으로 밀어서 멀어지게 했다.

“그렇게 붙어있다간 뽀뽀하겠네~”

“아니야!” / “아니거든!”

강백호의 손에 잡혀 있는 채로 둘이 동시에 부정했다. 태섭이 먼저 백호의 손을 뿌리쳤고, 대만도 곧 백호의 손을 잡아 내렸다. 멀어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백호가 입을 열었다.

“송태섭, 너는 좀 진정하고, 대만군은 너무 시비 걸지 마. 둘이 이러면 훈련 시간 줄어들잖아.”

웬일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강백호를 둘 다 놀란 눈으로 보며 말을 잃었다.

먼저 정신이 든 건 정대만이었다.

“그래. 내가 너무 간섭한 것 같다. 미안.”

그러고는 러닝하고 오겠다며 체육관을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송태섭이 대만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혀를 찼다. 그걸 본 강백호가 낄낄대면서 채소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 군도 아니다 싶으면 그만뒀어야지~”

“……시끄러워.”


윈터컵이 얼마 남지 않았고, 채치수나 권준호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순 없는 현실이 주장으로서 송태섭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다행인 건, 골 밑을 지켜줄 강백호가 재활에 성공해 돌아왔다는 거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정대만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자신이나 정대만만큼 체력이 받쳐주는 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생각해 보면 정대만의 체력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인데. 점점 좋아지는 중이고. 사실 저나 강백호, 서태웅 같은 인간이 타고났거나 악착같이 체력을 끌어올려 좋은 거지, 대만이 다른 선수가 많은 팀에 있었다면, 교체로 컨디션을 조절하여 큰 점수를 내게 했을 것이다. 역시 부원을 더 모아볼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체육관을 나가던 정대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대학 이야기는 꺼내는 게 아니었어. 태섭은 제방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농구공을 들고 일어서 방을 나섰다.

머리 복잡할 땐, 농구지. 머릿속에 농구로 가득 찬 녀석들이나 할 법한 생각을 태섭도 당연하게 하고 살았다. 그래서 밤 10시가 넘어도 농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는 거겠지. 공을 들고 근처 야외 코트로 향했다. 코트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드리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먼저 있나 보군 일대일이나 하자고 할까.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코트에 도착해 먼저 온 사람이 누군지 보자마자 태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대만……?”

태섭이 홀린 듯 말하자마자 대만이 드리블을 멈추고 슛을 쐈다. 공은 당연하게 림을 통과해 네트를 거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잠깐의 정적에 태섭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 대만의 시선이 향했다. 태섭을 발견한 대만도 놀란 눈을 했다가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워 옆구리에 끼면서 태섭에게 말했다.

“이제 맞먹기로 한 거냐?”

“선…배. 뭐해요? 연습?”

“러닝 겸 연습.”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지만, 태섭은 걱정이 먼저 앞섰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다가오면서 물어오는 우려에 대만은 제 무릎을 한 번 보고 왼쪽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 후에 대답했다.

“오늘은 괜찮네.”

오늘은? 그럼 안 좋은 날도 있다는 건가? 하긴 컨디션에 따라 다르겠지. 태섭은 납득하며 코트로 들어왔다.

“너도 연습?”

“뭐……. 연습까지 거창한 건 아니고….”

“점프슛 연습해. 봐줄게.”

“네? 아니 갑자기 무슨 연습을 하라고 해요. 밤 10시인데.”

“이 시각에 온 거면 속 시끄러워서 왔을 거 아니야. 당장 해결 못 할 걱정이면 연습하면서 그냥 걱정 날려. 1시간 봐줄게. 11시까지 하고 피곤한 몸으로 잠이나 자.”

대만이 우다다 쏟아내는 말에는 또 틀린 말은 없었다. 이 사람은 뭘 아는 듯 모르는 듯 이렇게 굴 때마다 진짜 반발심 들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점프슛을 봐준다면 또 좋은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대만이나 송태섭 머리엔 농구가 1순위니까.

태섭이 점프슛을 하면 대만이 자세에 대한 지적이나 조언을 해줬다. 직접 쏴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태섭의 신장에 맞춰서 알려주기도 했다. 정대만이 키가 작은 것도 아닌데, 잘 알고 있는 게 신기해서 태섭이 말했다.

“작은 키도 아니면서 잘 아네요.”

“NBA 경기 가끔 녹화하는데, 거기서 단신 선수가 출장하는 시합을 봤었어. 궁금하면 녹화한 비디오 빌려줄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이래서 우리 주장님 득점력 올라가면 좋은 거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눈을 떼지 못했다. 내일 가져갈게. 대만의 말이 살짝 먹먹하게 들렸다.


그날의 기묘한 시간이 어쩐지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당겨져 오후 8시에 만났고, 같은 야외 코트에서 태섭은 대만과 개별 연습을 했다. 서로가 부족하다 싶은 걸 연습하곤 했는데, 태섭은 좋은 체력으로 대만과 일대일을 했고, 대만은 태섭의 슛 자세를 봐줬다. 태섭은 대만의 개인 과외를 받는 느낌이 들어서 이 시간이 흥미로웠다. 대만은 정말 못하는 포지션이 없었다. 가끔 태섭의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에 관해 물어도 그는 막힘없이 대답해 줬다.

그리고 대만은 이 시간만큼은 윈터컵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본인 진학에 있어 중요한 시즌일 텐데도 윈터컵 이야기로 태섭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농구부 훈련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태섭이 다른 부원들과 의견을 나눠 연습 강도를 조절하여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하나씩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태섭은 어쩐지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손목에 스냅을…그때 말했던 것처럼.”

“뭐야. 너희 나 빼고 연습하냐? 이 천재를 두고 둘이?”

농구부의 슈팅 연습 중에 태섭이 대만에게 개별 연습 때 알려줬던 걸 다시 물었는데, 옆에 있던 백호가 대만의 이야기를 듣다가 둘이 따로 연습하고 있다는 걸 잡아낸 모양이었다. 감이 진짜 먹이 잡기 직전에 야생동물 같다니까.

“우연히 만났던 것뿐이야.”

태섭의 대꾸에 대만은 우연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태섭이 얼버무리니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주장이 개별 연습하는 걸 들키는 것도 체면이 안 살지.

“나도 같이해!”

백호의 말에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만이 옆에 있는 태섭을 한 번 봤다가 다시 백호를 봤다. 같이 하면 팀 득점에 좋긴 하겠지. 백호한테도 슛 포즈는 종종 알려줬었으니까. 태섭과 같이 따로 슈팅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대만은 그렇게 하자고 입을 뗐다.

“그….”

“안 돼.”

“에?” / “뭣!?”

대만이 말을 다 하기 전에 태섭이 먼저 대뜸 거부했다. 갈린 의견에 대만이 놀라서 눈을 깜박였고,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넌……지금이 적당해. 너무 무리하지 말고, 과외는 나중에 해.”

과외……. 그렇게 생각했구나. 뭐. 거의 그런 모양새긴 했지. 대만에게 그 시간은 송태섭과 일대일을 하는 시간이었지만, 일대일을 하고 나서 태섭의 슈팅 자세를 봐주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역시 강백호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재활도 잘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고.

“그래도 이 정ㄷ-. 아!”

대만이 말을 하다 말고 큰소리로 아픈 소리를 냈다. 태섭이 대만의 등을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꼬집어? 이 타이밍에? 갑자기? 선배를?

“왜 꼬집고 난리야! 이게!!”

대만이 욱해서 태섭의 볼을 꼬집었고, 곧장 다른 부원들이 와서 태섭과 대만을 떼어놓았다.


저녁 8시의 코트엔 아무도 없었다. 하. 역시 안 오나. 태섭은 일단 혼자서 연습하기로 했다. 골대 근처에서 드리블하며 공을 이리저리 옮기고는 한 자리에 멈춰 슛을 던졌다. 던진 공이 림에 맞아 들어가지 않았고, 태섭은 떨어지는 공을 잡고 다시 드리블로 코드를 누비다가 다시 슛을 던지는 걸 반복했다.

‘골 밑에 누가 있는지 빠르게 확인해. 자세가 됐다면 방해를 받을 것 같아도 망설이지 마. 공이 손바닥을 떠났으면 손가락 끝까지 공을 밀어.’

대만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슛하자 공이 림에 부딪히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 공이 들어간 림을 잠시 보다가 굴러간 공은 내버려 두고 바닥에 냅다 누웠다. 바닥이 차가웠으나 몸이 좀 데워져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대로 하늘을 봤다. 별이 원래 이렇게 많았나?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임이 분명했다. 자주 보는 바다와는 다른 방대함에 눈을 감고 싶었지만, 흩뿌려진 별에 홀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기만 했다.

왜 단둘이서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태섭은 오후 농구부 연습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백호가 같이 하자고 말하는 순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대만과의 개별 연습은…….

어디서든 반짝인다면, 여기서만큼은 나만을 위해 반짝여 줘도 되잖아.

……여기서만큼은. 왜냐면 여긴.

“뭐하냐. 송태섭.”

별안간 태섭의 눈앞에 정대만이 가득했다. 눈이 내렸던 그날이 갑자기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태섭은 별이 쏟아져 내린다고 생각했다.

자세가 됐다면 망설이지 마. 별이 제게 그렇게 말했다.

“왔어요?”

태섭은 환하게 웃으며 대만을 반겼다.

2.

저녁 8시. 대만은 괜히 초조하게 시계를 봤다. 태섭이 오늘 훈련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과외’를 그만두기로 했을지, 아니면 오늘도 그 코트에 나가서 저를 기다리면 어쩌나 싶어, 대만은 앉지도 못하고 거실 한 자리를 이리저리 맴돌며 고민했다. 볼을 꼬집으며 대판 싸우려다가 멈춘 게 몇 시간 전이었다. 잘 지내보려고 애쓰던 지난 며칠간의 개별 연습을 이런 식으로 망쳐버릴 줄은 저도 몰랐지만.

가서 있으면 사과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런데 그 자식이 먼저 날 꼬집었…. 아니다 치졸하게 꼬집은 걸로 물고 늘어지지 말자. 체면 안 산다고 자주 만나서 연습한 것도 얼버무렸는데. 내가 또 너무 오지랖을 부렸지. 안절부절못하던 대만의 걸음이 멈추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강백호와 같이 연습하면 태섭이도 경쟁심이 붙어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로 자세를 보면서 보강할 수도 있고. 장신 선수가 던지는 슛 폼도 봐두면 다 쓸 데가 있을 거고. 이마저도 너무 나간 건가.

그간 대만은 태섭의 슛연습을 봐주면서 그가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내심 즐거웠다. 새로운 걸 배우면 금방 익히는 것도 좋았고, 연습한 슛이 들어가는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짜식.

“……하.”

짧은 한숨과 함께 대만은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대만이 더 늦기 전에 달려서 야외코트에 왔는데, 태섭이 골대 밑에 대짜로 뻗어서 누워있었다. 왔었구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그런데 뭐지 저 찬 바닥에 왜 누워있는 거지? 12월이 되진 않았지만, 늦가을 날씨는 꽤 쌀쌀했다. 계속 누워있으면 몸 상하는데. 대만은 태섭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여 얼굴 위로 마주 보며 말했다.

“뭐하냐. 송태섭.”

태섭이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왔어요?”


예상했던 반응은…아니었는데. 낮에 있던 트러블은 잊은 듯 그들은 평소와 같이 일대일을 하고 연습했다. 다만 평소 같지 않은 건, 대만의 심장이었다. 태섭이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봤다. 그렇게 웃는 타이밍이 뭔가 이상했다. 아니 그냥 내 심장이 이상해진 건가? 간질……간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둘이 같이 가게 되는 구간이 있다. 이상한 심장은 뒤로하고 대만은 헤어지기 전에 얼른 옆에서 걷는 태섭에게 말을 꺼냈다.

“백호도 이 정도 연습은 더 할 수 있을 거야.”

무릎 재활한 나도 하는걸. 대만의 말에 태섭이 곁눈질로 대만을 보다가 다시 앞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쉰다고?

“뭐야.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셋이 연습하려는 이유가 뭔데요?”

“……아니. 같이 하면 네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강백호 득점률도 올리고….”

“그러면 여기 말고 학교에서 해요.”

“학교?”

“여긴 나랑만.”

심장이 이상하다. 점점…심하게 뛰는 것 같은데. 대만이 걸음을 멈췄다. 대만이 걸음을 멈추자, 태섭도 두세 걸음 더 걷다가 멈춰서 따라오지 않는 대만을 돌아봤다. 멈춰 선 태섭을 보며 대만은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는 너랑만……?

“형?”

“……송태섭. 웃어봐.”

“예?”

“웃어보라고. 그러면 여기에서는 너랑만 할 테니까.”

갑작스러운 요구에 태섭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만의 요구를 듣고 이내 웃었다. 창피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아. 땡.”

“땡? 뭐야 정답이 있는 거예요?”

“아까처럼 웃어봐.”

“아까가 뭔데?”

“누워서 나 봤을 때.”

태섭은 대만이 말한 상황을 떠올리고 놀라서 말을 잃었다. 이 형 뭘 알아서 지금 이런 요구를 하는 건가? 잠시 열이 훅 올라 현기증 이는 시야를 견디고 이어서 말했다.

“지금…본인이 뭔 말하는지 알아요?”

“……알아. 그러니까 확인해 보려는 거야.”

“뭘?”

“내 마음.”

내가 아니라 정대만,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다고? 마음이 어떤데? 뭔가 크게 동요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내 웃음에 동요하고 있다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으로 웃었는지 알고 있어? 태섭은 빤히 대만을 봤다. 웃는 걸 보면 확인이 가능하다는 건가? 그럴 리가. 태섭이 발걸음을 옮겨 대만에게 가까이 갔다.

“웃는 얼굴 보는 걸로 확인이 되겠어요?”

“뭐?”

태섭이 손을 뻗어 대만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잠시 경직됐다가 깜짝 놀란 대만이 얼른 송태섭의 어깨를 잡아 떼놓고 뒤로 물러났다. 태섭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야! 미쳤어?”

“난 확인했어요.”

“뭐, 뭔 소리야?”

“내가 정대만 좋아하는 거 확신했다고.”

“……미친….”

잡고 있던 태섭의 어깨를 놓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송태섭아…….”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웃어 달랬더니 냅다 입술을 대는 마음씨는 넓고 성질머리는 더러운 후배님이 날 좋아한다고. 이게 무슨 러브코메디야. 대만이 천천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쓰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새빨개져서 어쩐지 울상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제 감정만 확인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태섭이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직은.

“……대답 보류.”

“뭐라고?”

태섭이 대번에 대만의 멱살을 잡았다. 대만은 멱살을 잡힌 채 진정하라는 듯이, 항복한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이어서 말했다.

“윈터컵 이후에 대답해 줄게. ……그때까지도 네가 날 좋아하는 걸 확신한다면.”

“……그래요. 알겠어요. 그런데, 정대만 선배.”

이름만 부르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대만의 심장은 또 다른 의미로 뛰었다. 러브코메디가 아니라 스릴러 일지도.

“그때는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할 거야. 승낙이든 거절이든.”

대만은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은 대만의 멱살을 놓고 그를 조금 흘겨보며 말했다.

“나의 위대하신 스승께서 자세가 됐다면 망설이지 말라고 했어.”

당신도 그래야 할 거야.

3.

윈터컵은 좋은 성적에 마무리됐다. 물론 우승은 하지 못했다. 득실을 따지자면, 득이 되는 시즌이었다. 주전 멤버들 각자에게 큰 기회가 왔다. 그중 가장 큰 행운이 온 건 송태섭이었다. 농구 본고장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만은 제가 바라던 것처럼 추천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농구 리그에 몇 번이고 우승한 팀이라고 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3학년의 졸업식이 왔다.

이런 행운과는 별개로 송태섭과 정대만에겐 대망의 시간이 왔다.

태섭은 대만의 센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물론, 처음부터 기대한 건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옥상에서 대답을? 이 사람 뭐 옛날 일은 잊고 사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건가? 내가 이런 인간을 좋아한 건가? 회의가 몰아쳐 오는데, 옥상으로 불러낸 당사자랑 마주하고 나니 뭐, 주먹 갈겼으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찮아졌다. 3학년, 정대만의 졸업식이 끝나고 그는 태섭을 옥상으로 불러내 어느 겨울날 받았던 고백에 대답하기로 했다.

대만은 태섭을 불러내 놓고 멀찍이 떨어져 그를 맞이했다. 누가 보면 피로 물든 그날의 앙금을 복수하기 위한 자리라고 착각할 만한 분위기였다. 대만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확신하니?”

대만이 꺼내는 말에 태섭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게 무슨…서부극도 아니고. 어처구니없었지만, 태섭은 일단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대학 가고, 넌 미국 가는 이 상황에도? 나 여기에서 너 패기도 했어.”

“나도 여기 올라오면서 그게 좀 화가 나려고 했는데, 나도 당신 개같이 팼어.”

“……그랬지.”

대만은 기운이 쭉 빠진 사람처럼 대답하면서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사람이 왜 이렇게 본전도 못 뽑을 말로 밑밥을 까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고백 거절로 9할 정도 넘어간 것 같은데. 대만이 대학에 가서 더 좋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태섭이 미국으로 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당신 좋아해.”

지금 당장은 당신이 좋은 걸 어떡하라는 말이야. 윈터컵 내내 태섭은 대만에게 꽤 의지했다. 대만은 의연하게, 제가 고백한 것도 잊은 듯, 평소와 똑같이 대하면서 태섭을 받아줬다. 그러면서 제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기울어지고, 윈터컵 이후라는 약속이고 뭐고 뒤엎고 당장 대답하라고 설득하고 싶은 걸 여태껏 참아왔다. 그런 기다림의 끝이 거절이라.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었는데, 막상 실제 듣는다고 생각하니 땅에 처박히는 기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새삼 이 정도로 정대만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만이 태섭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바로 앞에 섰다. 뭐 하려는 거지 싶은 순간 대만이 제 품으로 태섭을 끌어당겨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태섭은 잔뜩 굳어서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초봄에 남은 겨울의 기온을 잊을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도. 아직 네가 좋아.”

대만의 고백에 주변의 소음이 잠시 사라졌다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대만의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미친. 이 인간 심장 터지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태섭의 심장 또한 거세게 뛰어 지금 듣고 있는 게, 대만의 것인지 제 것인지 점점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가기 전까지 열심히 연애하자. 멀리 떨어져 있으면 농구를 열심히 하고, 내가 너에게 가고, 네가 돌아와도 만나고. 혹시…혹시 네가 날 싫어하게 되면……. 모르겠다. 너를 포기하는 상상이 안 돼. 포기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거든.”

대만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태섭을 더 끌어안았다.

“그러니까……언젠가 헤어지는 건 네가 하는 거야. 알겠지?”

시작은 네가 했으니까. 끝내는 것도 네가 해. 난 못 해. 이런 열 받는 소리를 하면서 우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태섭은 안겨있으면서 귓가에 들리는 울음이 섞인 장황한 고백에 덩달아 눈물이 났다. 나라고 끝내는 걸 할 수 있어서 고백했을까. 이제 막 시작했는데, 마지막은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연인이라니. 최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곧 미국으로 가게 되니, 최악이라 말할 자격을 잃는다.

태섭은 팔을 벌려 대만을 똑같이 안아줬다.

“알겠어. 하지만, 형. 형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날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말한 대로 절대 포기하지 마. 알겠어?”

내 앞에서 어떤 것도 포기하지 마. 용서 안 할 거니까. 태섭의 말을 들은 대만이 잠시 조용히 있다가 안았던 팔에 힘을 풀고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마주했다. 태섭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울다가 웃다가. 아주 가관이다. 그러는 태섭 또한 환하게 웃었다.

4.

열심히 연애하자고 했지만, 대만의 대학이 조금 먼 곳에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점과 태섭 또한 유학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둘이 만날 시간을 내는 게 여간 어려웠다. 그나마 대만이 대학을 입학하기 전에는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4월이 되고 대만이 대학에 입학하자, 오리엔테이션 등의 대학 내 활동으로 거의 만나지 못했다. 전화는 거의 매일 했지만, 태섭은 아무래도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5월에도 이 지경이면 가만 안 둬요.”]

5월의 첫날, 태섭에게 첫 전화를 걸었을 때, 태섭은 대만에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이러다 또 러브코미디에서 스릴러 된다. 대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태섭을 달랬다. 내일 주말이니까, 데이트하자.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응? 애교 좀 부려본답시고 내는 대만의 목소리는 여간 이상했지만, 태섭은 내일 온다는 대만의 말에 서운함이 좀 누그러졌다.

[“좋아요. 늦지 마요.”]


태섭은 책상 위의 탁상 달력을 노려봤다. 빨간 사인펜으로 여러 차례 동그라미를 친 5월 22일에 <중요>하고 써두고는 뭐가 중요한지는 써두지 않았다. 혹시나 정확히 적어두면, 아라나 어머니가 누군지 물어보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곧 정대만의 생일이네.

달력을 노려보며 태섭은 그에게 줄 생일 선물을 고민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엔간한 건 다 있을 정대만. 딱 봐도 원하는 건 이미 다 있을 정대만. 그리고 의외로 물욕이 별로 없는 정대만. 정대만은 누구라도 제일 선물하기 어려운 유형이었다. 게다가 태섭이 받는 용돈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최근엔 유학 준비로 태섭도 아르바이트하는 중이었다.

비싼 건 못 사주지만, 몰래 준비해서 조금이라도 감동 먹게 해주고 싶다.

태섭이 원하는 건 한 문장으로 설명이 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5월 22일에? 아. 내 생일이라?”

게다가 대만은 농구 외의 일엔 눈치가 별로 없었다. 야외 코트에서 한바탕 원온원을 한 후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대만의 생일에 만날 수 있는지 생일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닌 척 물어보는 태섭에게 대만은 모른 척도 하지 않고 이유를 찾아내 말했다. 저렇게 눈치가 없는 걸 보니 양아치 시절에도 여친 하나 못 사귀었을 거라는 게 태섭의 결론이었다. 이렇게 눈치 없어서 누가 좋아하겠냐고. (물론 이렇게 말하는 태섭도 제대로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다) 태섭이 눈을 치켜뜨며 대만에게 말했다.

“……예. 뭐.”

“왜……왜 그렇게 보냐?”

“눈치 더럽게 없는 정대만에게 감탄 중입니다.”

“야. 눈치는 뭔……. 아. 선물 주려고?”

“진짜 눈치 개같이 없네요.”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어댔다. 머리만 긁적이면 다냐고. 태섭이 입술을 내밀고 입을 꾹 닫았다. 선물 기대하게 하면 안 되는데. 생일에 만나자는 걸 말했으니, 선물도 기대하겠지……?

“선물 안 줘도 돼.”

또 결국, 생일 선물로 머리를 굴리는 태섭의 귀에 대만의 말이 꽂혔다.

“안……줘도 된다고요?”

“나는 그날 너랑 종일 노는 걸로도 좋아.”

“……하지만.”

대만이 태섭에게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너 말이야 지난달에 우리 자주 못 만나서 나한테 이번 달에도 그 지경 나면 가만 안 둔다더니, 요즘은 너 알바 한다고 자주 못 만나잖아. 뭐, 알바하는 이유는 말해줘서 이해하니까 서운한 건 아닌데. 대만은 상체를 기대며 태섭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날은 종일 나랑 있어 달라고.”

그날의 네 시간을 나한테 줘. 대만이 태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간지러운 숨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태섭의 귀를 통해 머리를 울리고, 심장을 망치질했다.

대만에게 전 여친 없었을 거라는 판단, 취소다.


대만의 요청대로 태섭은 5월 22일의 제 시간을 통으로 비우고 대만과 24시간 동안 같이 있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태섭은 빡세게 꾸미고 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멀리서 대만이 제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또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꾸미고 나온 모양새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대만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가는 게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생겼으니까. 태섭의 심장이 벌써 쿵쿵 뛰었다. 이윽고 태섭의 앞에 선 대만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시간 재.”

“시간은 왜요? 준다고는 했지만, 우리 사이에 뭘 따져가면서 만나요?”

“알바하면 시간은 칼같이 지켜서 출퇴근하잖아.”

“알바 한 번도 안 해본 티 내지 마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게 내 알바에요?”

“너 알바 갈 시간까지 끌어다가 나랑 있어 주는 거니까.”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대만 씨. 당신 지금 성인이고, 난 아직 고등학생이거든? 지금, 이 발언들 졸라 위험한 건 알고 있죠?”

“……가자, 태섭아. 선.배.가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단다.”

시작부터 ‘정대만은 못 말려’인 게, 아주……불안하다. 태섭이 몰려오는 걱정에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입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대만이 데려간 식당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다 시켜 이 선배가 쏜다. 태섭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대만이 거들먹거렸다.

“선배 생일인데, 선배가 쏴요?”

“음? 생일 파티는 원래 생일인 사람이 준비하잖아. 난 지금 너를 데리고 생일 파티를 하는 거다. 그러니까 오늘은 엔간하면 내 뜻대로. 엔간하면 내가 하자는 대로. 알겠지?”

“……예예.”

태섭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메뉴판을 보고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을 먹으며 평소와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대만이 들려주는 대학 농구팀의 이야기는 태섭에게 흥미로운 주제였다. 미국에서도 똑같을까? 대만의 이야기로 앞으로 자신이 경험할 일을 예측하는 건 즐거웠다. 태섭은 자신의 유학 준비가 어느 정도 됐는지, 그리고 출국 일정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에는 8월에 갈 것 같아요. 9월에 학기가 시작하는데, 현지에서 처리할 일도 있고, 먼저 가서 적응할 겸.”

“가면 연락처랑 주소 꼭 알려줘야 한다. 우리 집 전화번호 잊지 말고.”

태섭이 들고 있던 포크로 썰려있는 스테이크를 찍으려다가 잠시 멈추고, 대만을 봤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알아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정대만과 헤어지는 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꽉 막혔다. 새삼 제 인생은 항상 좋은 일과 싫은 일이 동시에 오는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8월에 가면, 네 생일에 우리 만날 수 있겠네.”

대만의 이어지는 말에 태섭의 시선이 접시에서 다시 대만에게 향했다. 저를 보고 씨익 웃고 있었다.

“네 생일에는 내 시간을 줄게.”

알차게 써라. 아마 정대만은 지금 제가 짓는 표정이 상대에게 가장 멋있게 보이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니까, 멋있는 대사와 멋있는 얼굴로 상대를 다시금 반하게 하는 그런. 하. 그렇다면 성공이야. 정대만. 태섭은 실내가 갑자기 더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아닌 척. 꿍하게 대답해서 괜히 튕겨보는 게 송태섭의 방어본능이었다.

“……저 생일에는 가족들이랑 보내야 하는데요.”

“뭐……. 그럼 어쩔 수 없-”

“그래도 주세요.”

대만이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 하려는 순간, 태섭이 말을 끊고 대뜸 말했다.

“주세요. 선배 시간.”

“가족들이랑 보낸다며.”

“……가족들이랑은 저녁에 보내면 되니까.”

태섭은 대만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면서 제 접시에 담긴 음식을 포크로 괜히 푹푹 찍고 있었다. 대만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괜한 짓을 하는 태섭을 보고 조금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얼마든지.


다음 코스는 그래도 옷을 차려입었다고 영화관이었다. 영화 선택도 전적으로 정대만에게 맡겼기 때문에 조금 염려스러웠다. 지루해서 둘 다 자버리는 전개, 혹은 너무 무서워서 정대만이 창피하게 소리치는 전개, 혹은 너무 슬퍼서 자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전개. 뭐든 정말 마음에 안 드는데…….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오는 정대만을 삐뚜름하게 바라봤다.

“눈 봐라. 아주 재미없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이네.”

“선배, 난 알바도 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생일인데, 되도록 알차게 보내고 싶다고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태섭이 하는 말에 대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좋아하는 사람…하하.”

대만이 중얼거리는 말에 태섭도 깜짝 놀랐다. 제가 그렇게 말해놓고 자각이 없었다. 진짜냐 송태섭, 자각 없이 본심 말하기?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듣기 좋네. 송태섭 진심.”

태섭은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닫은 채 먼저 상영관 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 어느 관인지는 알고 먼저 가시나~. 따라오면서 대만이 하는 말에 태섭은 다시 몸을 휙 틀어서 대만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놀리지 마요. 티켓 내놓고.”

“놀리는 거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

대만이 건네는 티켓을 낚아채든 가져가고는 또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만은 키득키득 웃으며 태섭의 뒤를 따라갔다.

영화의 장르는 러브 코미디였다. 태섭과 대만은 영화를 보는 내내 웃고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눈을 반짝이며, 한 장면에서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타인이 보기엔 완벽한 영혼의 단짝이라 생각할 만큼. 다행히도 영화관은 어두웠고, 두 사람 즐겁게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태섭은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조금 진 기분이 들었다. 눈치가 없다느니, 자길 놀려먹는다느니 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대만은 결정적인 득점을 내는 인간이었다.

“재밌었다. 그치?”

“……네.”

“다음 코스는~.”

“다음도 있어요?”

“어허. 벌써 지겹냐? ……이 자식 농구 언제 하냐는 눈을 하고 있네.”

“뭔…그건 또 무슨 눈인데요?”

“있어. 나랑 농구하고 싶어서 돌기 직전에 눈. 미안하지만, 그 순서는 아직 멀었거든?”

태섭은 정색하고 대만을 봤다. 있긴 있다는 거네. 저나 정대만이나 농구에 환장한 녀석들이니 당연한 수순이긴 했지만, 태섭은 정곡이 찔려서 괜히 혀를 찼다.

“아무튼 일단 가자. 다음 코스로.”


정대만이 태섭을 데리고 온 곳은 신발가게였다. 그것도 스포츠 전문점. 대만은 태섭의 손목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너 여기 브랜드 농구화 신었나?”

“어……예. 근데 왜요? 선배 농구화 사게요?”

“나 말고 너.”

“예?”

“일단 여기 앉아봐”

태섭을 끌고 가게에 마련된 의자에 앉히고, 대만은 진열된 신발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태섭이 앉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만을 보며 말했다.

“생일은 선배인데, 왜 나한테 신발을 사줘요?”

“엉? 해주고 싶어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는 벽에 진열되어 있던 농구화 하나를 들고 태섭의 앞에 섰다.

“원래 생일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는 태섭의 앞에 가져온 신발을 내려놨다. 신어 봐. 태섭은 대만의 얼굴과 그가 가져온 신발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꾹 닫고 새 신발에 묶인 끈을 조금 풀어서 신어봤다.

“내가 여태 만나고 겪은 사람 중에서 선배가 가장 거침없고 가장 제멋대로예요.”

“……뭔 뜻이냐?”

신발을 신은 태섭이 한쪽에 있는 전신거울로 신발이 어울리는지를 확인하고는 대만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만의 미간이 좁아졌고, 태섭은 다시 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어서 대만에게 건넸다.

“내 취향 아니에요.”

“……오케이. 다른 거.”

대만은 빤히 신발과 태섭을 번갈아 보다가 건네준 신발을 들고 다시 진열대 앞으로 갔다. 과연 오늘 내로 주고 싶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신발을 가져올 수 있을지, 태섭은 심각하게 진열대를 관찰하는 대만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무슨 뜻이냐고? 당신은 나를 언제고 뒤흔들 수 있다는 거예요.

아마도 일곱 번째 골라온 신발일 것이다. 대만이 건네줬을 때도 예뻤으니 신었을 때 어울린다면 태섭은 아마 이 신발로 사게 될 것 같았다. 태섭이 신발을 신어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애인한테 신발 사주면 도망간다는 말이 있던데.”

“뭐? 크하하. 그런 건 어디서 들었냐? 너는 무슨 애늙은이처럼 그런 속설 같은 걸 주워들었어.”

“애늙은이라니.”

“도망가라고 사주는 거다.”

신발 끈을 묶던 태섭의 손이 멈췄다. 뭐?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만을 봤다. 대만을 태섭을 내려다보고 씨익 웃다가 무릎을 굽혀 앉고는 태섭이 신던 신발의 끈을 이어서 묶어 줬다.

“도망가 태섭아. 멀리 가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전력으로 해.”

그렇게 말하는 대만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않았고, 한 톨의 서운함이나 원망도 없었고, 평온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다 지치면 돌아와. 그러면 돼.”

“……내가…도망가서 안 오겠다고 하면? 그땐 어쩌려고?”

부담 주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건 안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돌아올 곳이 있다고 말하는 억양에는 돌아오라는 뜻이 아닌, 쉼터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인 것도. 그래서 오히려 서운한 건 태섭이었다. 악착같이 자신을 원한다는 의미의 말을 듣고 싶어서 멍청한 가정을 입 밖으로 내고 대만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면……. 내가 간다! 짠!”

그렇게 외치면서 신발 끈을 다 묶었는지 양손으로 신발을 신은 발을 보라고 손짓했다.

“어떠냐? 너랑 제법 잘 어울리는데?”

검고 빨간 게 북산고 농구부 생각도 나고 말이야. 그러면서 환하게 웃는데, 농구 코트에서 어렵사리 슛을 넣었을 때나 짓던 그 미소였다. 태섭은 눈물을 참기 위해 인상을 바짝 쓰고 입을 쭉 내밀었다.

“……정대만이 이럴 때마다 짜증 나요.”

“음? 멋지다고? 나도 알아.”

마지막까지 열 받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태섭은 괜히 킁 하고 코를 먹으며 신발이 맞는지 발을 굴렀다. 이제는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걸로 할래요.”

신고 있는 농구화는 처음 봤을 때부터 태섭의 마음에 들었다.

아주 멋대로. 정대만 같이.


마지막은 예고한 농구였다. 코트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고, 1:1을 했다가, 대만이 태섭에게 다시 점프슛에 대한 걸 알려줬다가, 대만의 대학팀에서 하는 훈련 방법을 말해줬다. 한참을 웃고 떠들면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야외 코트를 떠났다.

“아무리 생일이라서 선배 하고 싶은 거 하는 날이라고 해도! 지금 당신을 집에 데려다주는 건 내가 할 거니까 앞장서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태섭이 으름장을 놨다. 대만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가려는 쪽으로 획 틀었다가 바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이상할 만큼 서로 말이 없었다. 태섭이야 원래 선뜻 말을 꺼내는 타입이 아니었고, 대만은 뭔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태섭이 흘끔흘끔 대만을 보며 심중을 헤아리려고 애썼지만, 대만이 이런 상태일 때는 예전에도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형은……생일에 가족이랑은 파티 같은 거 안 해요?”

태섭은 정대만의 생각을 멈추고,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말을 찾다가 가까스로 질문했다.

“엉? 가족이랑? 음……. 중3 때까진 했던 것 같네.”

“그 이후로는 안 해요?”

“형이 질풍노도의 시기였잖냐.”

“아…….”

대만이 팔로 태섭의 팔을 툭 치면서 가볍게 대답했지만, 태섭은 대화를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보통 생일에는 가족이랑 보내니까 그래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주제는 영 껄끄러운 정대만의 과거를 꺼내게 했다.

있었던 일이 없던 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입에서 무신경하게 튀어나오는 옛날이야기는 신경도 안 썼지만, 태섭은 대만이 잘못했던 일에 대해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았다. 장난으로는 한 번쯤 협박했을 것 같은 인상과 성질머리를 가졌음에도 이 주제가 나왔을 때, 태섭은 입을 닫고 표정을 지웠다.

대만도 어렴풋이 태섭이 피하는 주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에 이 반응으로 확실히 알았다. 그를 빤히 보던 대만이 시선을 돌리고 바닥을 봤다.

“……미안. 말이 헛나왔다.”

대만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자마자 태섭이 깜짝 놀라서 대만을 봤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조차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정대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고, 태섭이 입을 열었다.

“삽질하지 마요. 난 형이 불편한 게 싫은 것뿐이니까. 확실하게 말해두는데, 나는 그날에 대해 마음에 담아둔 거 없어요. 형이 나한테 잘못한 만큼, 나도 형 뒤지게 팼으니까.”

태섭의 말에 대만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고 태섭에게 향했다. 눈을 마주하자, 태섭이 한쪽 눈썹만 위로 치켜뜨며 “same-same OK?”라고 했다.

“……그래~. 뒤지게 맞아서 개과천선했지.”

“형은 진짜 농구 오래 해야 해. 알겠어?”

“오냐.”

“이렇게 혼자 땅굴 팔 것 같으면 내 주먹을 떠올리고.”

“오냐오냐해 줬더니 이게.”


“다 왔다. 정대만 집.”

그 후로는 티격태격 아무 말이나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대만의 집에 도착했다. 아까 아무 말 없이 걸을 땐, 시간이 늘어지더니, 막 재밌어지려니까 금방 도착했네. 태섭은 아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 선 대만이 태섭의 그런 얼굴을 보고 씨익 웃으면서 허리를 조금 숙여 그의 뺨에 입을 맞춰줬다. 놀란 태섭이 고개를 돌려 대만을 봤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선물 잘 받았다. 정말 즐거웠어.”

늦었다. 얼른 들어가. 연락하고. 그러면서 대만이 집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걸음째 옮기고 대문에 한 손을 댄 순간, 강한 힘에 이끌려서 몸이 반대로 끌리더니 별안간 입술에 말랑한 게 닿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태섭이 대만에게 다가와 한 손으로 손목을 잡아끌고 기울어진 상체에 멱살을 잡아당겨서 제 입술을 포갰다. 입술은 딱 3초 붙어있었다. 입술을 떼고도 태섭은 멱살을 놓지 않았고, 얼굴은 잔뜩 달아올라 어두운 피부여도 붉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대만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거두지 못했고, 멍하니 있다가 겨우 말을 했다.

“……이거.”

“식사에 영화에 운동화까지 받기만 했으니까. 주는 거예요. 날로 먹었다는 소리도 듣기 싫고.”

“크하하.”

입술을 쭉 내밀고 시선은 맞추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에 대만이 소리 내어 웃자, 태섭이 잡았던 멱살을 놨다. 기울었던 상체를 세우고 태섭을 보면서 한껏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인마. 선물 잘 받았다. 하하!”

태섭은 아직 잡고 있는 대만의 손목을 놓지 못하고 말했다.

“내일 기숙사로 돌아가요?”

“응.”

“돌아오는 주말에 또 볼 수 있어요?”

“왜? 보고 싶을 것 같아?”

“……네.”

장난스럽게 한 말에 태섭은 태클을 걸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순해진 송태섭을 보며 대만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선물 확실하게 주는구나. 태섭아. 입 밖으로 꺼내면 또 금방 건방진 얼굴로 감추기 때문에 대만은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어디든 갈게. 연락만 해.”

태섭의 시선과 대만의 시선이 맞닿았다. 시선을 주고받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입술을 맞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행동이었다. 수줍은 입맞춤이 아닌, 숨을 주고받는 입맞춤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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