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上

네,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입니다.


시작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정류장도 도보로 15분은 걸리는 데다가, 시간당 한 대꼴인 마을버스라도 타지 않으면 변변찮은 오락기 하나 구경하지 못하는 산골짜기 고등학교에 다니다 보면 늘 똑같은 대화거리가 돌고 돌았으니까. 농구 아니면 연애 아니면 급식. 특별한 것 없는 주제를 두고 이야기가 끊기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중에서도 우성이 가장 끼기 어려워하는 주제는 연애였다. 가끔은 온 우주가 10대라면 응당 가슴 떨리는 짝사랑 한 번쯤은 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야 농구공 쫓기 바빴고, 중학생 때는 시기하는 사람들 탓에 외톨이를 자처했다고 치더라도 심심찮게 러브레터를 받는 처지에 연애하기 싫다니. 

“배가 불렀다니까.”

수건으로 땀을 대강 훔쳐낸 신현철이 큼지막한 티셔츠에 머리를 쑤셔 넣으며 말을 이었다. 저 좋다는 편지를 매일 질리도록 받으니 배가 불러서 연애 생각이 안 드는 거지. 저놈이 얼마나 건방진 놈인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다른 부원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몇은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한다. 

또래 애들 사이에 섞어두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키가 큰데다가 깎아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게다가 농구까지 잘하는 우성의 캐비닛에는 팬레터를 가장한 러브레터가 끊기지 않았으니까. 대부분 먼 발치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개중 일부는 모월 모시에 어디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이전부터 좋아해 왔다는 둥의 직설적인 고백이 담겨있단 사실을 모르는 부원이 없었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아니, 그래도. 공연한 억울함에 입술만 비죽거리고 있던 정우성이 볼멘소리를 했다. 

“상관없어요. 그런 거.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꼭 연애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농구만 하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바로 그런 점이 배불렀다는 거야.”

연애에 관심 없어 보이는 것으로는 우성과 별 다를 바 없을 것 같던 김낙수까지 말을 얹자 우성의 얼굴 위로 배신감이 넘실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만큼은 그런 말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꼬리 밟힌 개처럼 쳐다보고 있자니 제가 뭐 틀린 말 했냐는 듯 어깨를 들썩해 보인다. 이 라커룸에서 우성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농구는 앞으로도 할 거니까. 특히 넌 이번 가을에 미국으로 가잖아. 거기선 진짜 농구만 해야 할걸. 고등학생이라고 전부 사랑에 목숨 걸어야 한다는 헛소리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떠나기 전에 미리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보는 건 나쁜 것 없다는 말이야. 경험 삼아.”

“아서라, 저놈한테 그런 말이 통하겠냐? 아무 생각 없이 미국에 갔다가 홀랑 따먹히고 온다는 것에 내일 반찬을 건다.”

“받고 음료수까지.”

“까먹, 그거 성희롱이거든요?”

당사자가 씨근거리며 항변하든 말든 저들끼리 신나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원래 제일 재밌는 건 싸움구경 불구경 그리고 남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더니. 곧 유학 갈 후배 놈이 향락의 나라 (온갖 미디어로만 미국을 접해본 부원들은 미국이 무슨 성姓적 유토피아라도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에 가서 겪게 될 새로운 경험에 대해 한참 떠드는 동안 안색이 붉어졌다 파래지길 반복하던 정우성은 반쯤 뛰어서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손잡기니 뽀뽀니, 그런걸.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쾅쾅 발소리를 울리며 기숙사로 돌아간 다음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놀림의 대상이 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우성은 타고나길 서글서글한 성격이었지만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에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철조망처럼 두르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눈에 띄던 우성이 지금처럼 물러진 것에는 올해 3학년이 된 농구부 선배들의 역이 컸다.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대여섯 살 차이 나는 사촌 동생 다루듯 참견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붙여오는 것이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오늘 있었던 장난들도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 맺는 걸 어려워하는 후배가 신경 쓰여서…

아니, 정말 그런가? 끈질기게 놀려대던 면면들을 되새긴 우성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재밌어서 놀렸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 시트콤에서 봤던 뜨겁고 열렬하던 연인들의 모습을 재연하던 정성구와 최동오를 봐서는 거의 구십 퍼센트 확실했다. 성구씨, 나 오늘 밤은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아. 마이스윗허니달링,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신. 지겨워. 그러는 자기들은 뭐, 얼마나 많이 해봤다고? 우성이 알고 있기로, 신이 나서 입방아를 찧던 인물 중 연애의 고수라 할 만한 이는 딱히 없었다. 

고된 훈련과 뜨거운 샤워로 노곤해진 몸을 아무렇게나 뉜 채 천장을 올려다보던 우성은 평소 습관처럼 농구 잡지를 뒤적이기 위해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몇 번이나 뒤적거려 끝이 동그랗게 말린 잡지 대신 바스락거리는 종이 재질의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응?”

잡혀 나온 봉투 겉면에 야무지게 붙여진 하트 스티커를 본 다음에야 근 며칠간 받았던 편지들을 전부 침대 아래에 박아뒀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가 좋아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니, 일일이 답하지는 못하더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던 광철의 말을 떠올린 우성은 비딱하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우성에게, 로 시작해 두 장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글자는 아주 공들여 쓴 듯 종이 뒷면으로 양감이 느껴졌다. 우성의 경기를 어쩌다가 처음 보게 되었으며, 그때 슛을 쏘던 얼굴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처음에는 소리 내 응원하는 게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크게 소리칠 수 있게 되었다던가, 수많은 팬 중 한 사람이겠지만 자신에게 있어 우성은 둘도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차근차근 고백하는 문장들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따뜻하다. 꼭 광철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고마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이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다던가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든가 하는 반응은 전혀 없는 걸 자각한 정우성은 편지를 도로 차곡차곡 접어다가 봉투에 넣어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어쩌면, 정말 만약의 이야기지만 형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가진 모든 관심과 흥미의 벡터를 농구로 돌려버린 나머지 연애랑은 영 거리가 멀어져 버린 걸지도. 사람에게 설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두근거리는 것보단 농구 한판 끝내주게 뛰고 두근거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여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정우성은 남들 시선에 떠밀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성정이 아니다. 농구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던 말던 신경 쓰지 않는 편에 가까웠지. 하지만 제 인간관계가 남들보다 편협한 수준이란 자각은 있었고, 미국 유학을 앞둔 지금 와서는 그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농구만 하면 그만이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유학이란 건 말 안 통하는 낯선 타지에 얼마나 잘 적응하냐의 문제기도 했으므로. 뭐, 솔직히 말해 궁금하기도 했고. 그게 그렇게 좋나.

그날 잠들기 직전까지 사랑, 연애, 나아가서 자신의 사교성마저 의심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우성은 눈을 뜬 순간 지난 밤 제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깡그리 잊어버렸다. 연애에 통달한 고수처럼 떠들어대던 형들에게 보통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냐 물어보겠노라 마음먹었던 걸 다시 떠올린 건 정오 반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우성은 단 배추된장국에 차조밥을 말아 후루룩 삼킨 다음 이미 국물 정도만 남아있는 제육불고기 부스러기도 긁어다가 두 번째 급식 판까지 싹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고등학생 남자애들이란 급식은 입에 쏟아붓고 축구공이라도 한 번 더 차보려 달려 나가기 마련이라 급식실이며 복도가 썰렁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같은 반 학생이 잰걸음을 하다 우성을 발견하고 속도를 늦췄다. 데면데면하긴 해도 매일 얼굴보는 사이에 쌩 지나가기 뭣하단 표정이었다. 

“어, 어어. 정우성, 너도 축구 같이 할래?”

“아니, 괜찮아. 고마워.”

남들이 뭐라 하든 농구 원앤온리 인생인 우성이 대꾸하자, 상대방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대강 고갤 끄덕이며 곁을 달려 나갔다. 벌써 운동장 쪽이 시끌벅적하다. 정우성은 잠시 고민하다 4층 남자 화장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거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낙서를.

누구나 아는 연예인이 나와 CF라도 찍었으면 모를까, 아니, 설령 그런 광고라도 쳐도 뭐 이런 수상쩍은 서비스가 다 있나 싶었을 텐데 이런 구석진 화장실 벽면에 굵은 매직으로 휘갈겨 쓴 낙서라니. 

마침 정우성의 눈높이에 딱 맞는 위치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퇴폐업소 찌라시라도 보고 베낀 건가 의심스러운 문장들로 보아 누군가의 장난일 것이 분명했다. 재밌지도 않고, 무슨 대단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누가 적은 건진 몰라도 네이밍 센스 최악이네.”

핑크빛 오라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이름이었다. 이런 거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나. 하기야, 어제 대화만 보면 이 학교엔 연애 못 해서 죽은 귀신들이 백여 명은 있는 것 같으니 영 수요 없는 장난질은 아닐지도…. 

찬물로 손을 씻고 나온 우성은 픽 웃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니까, 학교에 비치된 공중전화기 앞에서 동전을 짤랑거리게 된 건 우성의 계획이 아니었다. 맵고 짠 걸 먹었더니 음료수가 당겼고 교내에 몇 없는 자판기는 하필이면 전화부스 옆에 있었으며 이온 음료를 뽑아먹고 나자 애매하게 잔돈이 남았다. 

누가 받을 줄 알고 화장실 벽에 적힌 번호에 함부로 전화하냐는 목소리와 어차피 없는 번호로 뜰 텐데 호기심이나 해소하자는 게 뭐 그리 나쁜 일이냐는 목소리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 만에 하나 누가 받는다 쳐도 그냥 잘 못 걸었습니다. 한마디하고 끊으면 되는 것을. 십 대다운 호기심으로 전화 한 통 걸어봤다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돌을 던질 것도 아닐 테고. 돌을 던지려 해도 우성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찾아오느냐 이 말이다. 발신인의 이름이며 주소 따위를 알아낼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이 있지 않고서야. 

망설이던 것도 잠시, 동전을 넣고 나자 손가락이 제멋대로 번호를 눌렀다. 우성은 그 번호를 망설임 없이 누르는 자신에게 조금 놀라는 한편으로 혹시 이 장면을 누군가가 보고 있진 않나 초조해져서 죄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아직 축구가 한창인지 쥐새끼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뚜르르, 뚜르르…대기음이 길어질수록 슬그머니 후회라는 놈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그때였다. 

“네,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입니다.”

“우왓!”

그대로 내동댕이칠 뻔한 수화기를 붙잡은 우성이 제풀에 놀라 입을 텁 막았다. 받았다. 그것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그, 그, 우성의 입으로는 말하고 싶지도 않게 낯부끄러운 이름을 대면서. 딸꾹질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반응이 없자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잠시 기다렸다가, 여보세요, 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네, 네. 그게, 벽에 적힌 걸 보고 전화를….”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주둥이가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설령 누군가가 받는다 한들 잘 못 걸었다고 끊을 작정이었단 건 그 이후에야 떠올랐다. 우성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서비스 이용을 원하시나요?”

“아뇨, 네?”

“서비스요. 광고 보고 연락해주셨다고 하시길래.”

은근슬쩍 말이 반 토막 났지만, 그게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해서 연령대를 추측하기 어려웠는데 변성기의 소년 같다가도 저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성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버버하는 전화 상대를 차분하게 기다려주는 인내심으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우성보다는 연상이지 싶었고. 침을 꼴딱 삼킨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혹시 거기 이상한 가게, 뭐 그런 거예요?”

한마디라도 놓칠까 싶어 수화기를 귀에 딱 붙이고 있다 보면 문득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웃은 건가 방금? 무안함에 귀가 새빨개진 우성이 자신감 없는 투로 덧붙였다. 저 고등학생이라서요. 

“지금 그쪽이 생각하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거짓말. 우성의 귀가 더 빨개졌다)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꼭 그렇고 그런 퇴폐업소가 아니라 한들 데이트 서비스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상한 가게라고 볼 수 있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말한 것만으로 어쩐지 가게 자체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고분고분 네 하고 대답하고 난 다음에야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얌전히 대답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아뇨, 그래도 역시,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똑 부러지게 전화를 끊기로 하고 수화기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는데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툭 내뱉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뿅?”

“네?”

“정 불안하면 무료 체험이라도 신청해보던가, 뿅. 마침 지금 이벤트 중이니까.”

고객이 아니라 아는 지인과 통화하는 것처럼 편안한 어조였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으니 배려해주는 거란 느낌으로. 그제야 화장실 벽에 적혀져 있던 무료 체험이란 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고등학생이라고 말한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제가 돈 많은 직장인이 아니란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뭘까. 코 묻은 돈 좀 뜯겠다고? 뿅은 또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은어 그런 건가? 상대방의 의도를 짐작해보느라 잠시 대답을 끌고 있던 그 순간 차임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우성은 소스라치게 놀라 운동장 쪽을 돌아봤다. 여태 축구공을 차며 뛰놀고 있던 놈들이 예비종을 듣고 건물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끊어야 했다. 지금 당장. 

“할 거야, 뿅?”

“네? 네, 네! 근데 제가 지금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꽝 소리가 날 정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우성이 전화부스 밖으로 튀어 나갔다. 혹시 마주친 애들이 누구랑 전화했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까 싶어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교실로 갔다. 1층에서 4층까지 좀 뛰는 거로 힘들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맨 뒷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고 나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내달린다. 부모님 몰래 사고치고 방에 숨었을 때처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교과서를 꺼내어 펼쳐두는데 문득 소름이 끼치는 생각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 전화 끊기기 전에 뭐라고 말했더라?

그날 오후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본래도 수업에 성실히 집중하는 편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 동안 내내 그놈의 데이트 서비스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마지막에 한 ‘네’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거다. 그걸 오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았겠지. 뉘앙스가 그게 아니었잖아. 어느 쪽이냐 하면 네, 가 아니라 네? 에 훨씬 더 가까웠다고. 그렇게 자신을 안심시키다가도 마지막의 네, 끝에 붙은 것이 물음표보단 느낌표였다는 사실만 확실해진 우성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내쫓았다. 이미 저지른 일, 이제 와서 고민해봤자 늦었다. 그나마 개인 정보랄 건 거의 말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결국 너 오늘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연습 시합에서도 빠지게 됐다. 운동량이 줄었으니 기운이 넘쳐야 하는데, 그 몫의 에너지를 몽땅 고민하는 데에 쏟아부은 탓에 기숙사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기진맥진해있었다. 안 쓰던 머리를 굴리려니 뇌에 쥐가 다 났다. 이걸 누구에게 상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더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뭐라고 말할 건데. 제가 그러려던 건 아니고요, 화장실 벽에 적혀있던 번호가 마침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 봤거든요. 무슨 번호냐면, 러브러브 연애 서…에이씨.

“하아아…미치겠네.”

그런 수상한 곳에 전화를 거는 게 아녔다. 아니, 애초에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는 게 아니었는데. 

본래 우성은 후회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어떤 일이든 제가 마음먹은 건 끝까지 해내곤 했고, 그 결과가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거기 연연하느라 시간을 버리는 일이 드물었다. 후회할 시간이 있다면 일어나서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란 것 정도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네, 면 어떻고 네! 면 어떤가. 어쨌든 그 사람이 우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고등학생 남자애라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뭘 할 수는 없겠지. 전에 없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보고도 별생각 없었던 우성은 한 박자 늦게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제 방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그란 두상이 드러나도록 빡빡 깎은 머리, 그리고 딱 맞아 보이는 농구부 반소매 티. 문이랑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사람이 인기척을 느낀 건지 고갤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정우성?”

“네, 맞는데요.”

누구더라. 농구부인 건 확실한데 낯선 얼굴이었다. 주전은 확실히 아니고. 키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닌데도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게 익숙해 보이는 걸 보아 아마 3학년이다. 선배로 추정되는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한 우성이 그 앞에 가서 섰다. 

이름을 불렀으면 무슨 용건이라 먼저 말할 법도 한데, 그 사람은 대꾸 없이 우성을 한 번 훑어본 다음 가볍게 문을 턱짓해 보였다. 3학년일 거란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태도였다. 전달 사항이 있는 건가, 그럼 그냥 여기서 말하지. 친한 사이도 아니고, 이름은 둘째치고 학년도 긴가민가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초대해 담소를 나눌 만큼 아무에게나 살가운 후배는 아니었지만…

우성은 어깨로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순순히 문을 열었다. 하루종일 이상한 일에 연루된 건 아닌가 심란했던 탓에 이름 모를 선배와 가타부타 입씨름할 여력이 없었다. 침대 옆에 던지듯 가방을 내려놓은 우성이 뒤를 돌자, 초면의 선배가 제 방인 양 태연하게 들어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시선이 침대와 옷장과 책상을 순차적으로 훑었다. 

“전달 사항 있는 거죠? 그냥 부활 시간에 말해주셔도 되는데.”

우성이 초조하게 되물어보는데도 선배는 급한 것 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로 방문을 닫고…(이즈음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방을 가로질러 책상 끝에 기대섰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매일 밤이면 눈을 감는 익숙한 방이 순간 지독히 낯선 공간처럼 느껴졌다. 방의 주인은 저 선배고, 우성이 손님이라도 된 것처럼. 

그런데 저 선배 목소리,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오늘 몇 시간 전에.

자판기 옆 공중전화에서.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네, 뿅. 너 정도면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아도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람 많지 않나?”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렸다. 이 사람이구나, 전화 너머의 남자.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방금 내 손으로 방에 들였구나. 

***

그 선배는, 아니,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 직원은 이 학교 학생이냐, 여긴 어떻게 안거냐,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안거고, 그보다 서비스는 또 무슨 말이며 아까부터 그놈의 뿅은 대체 뭐냐는 질문을 싸그리 무시했다. 현대에 있어 서비스라는 말은 물질적인 상품을 제외한 근로자의 행위, 꼭 경제활동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서 일하거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할 터인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비스 정신이라곤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서비스를 하는 것보단 서비스받는 것에 백 배쯤 더 익숙해 보이는 표정 하며 함부로 남의 책상에 손을 대는 태도가, 

“그건 왜 봐요?!”

거기 뒀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편지를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피는 걸 보고 기겁한 우성이 잽싸게 뺏어 들었다. 내용을 읽기 전에 빼 들긴 했지만, 편지의 가장 상단에 큼지막한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것까지 못 봤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텅 빈 손이 아쉽다는 듯 검지와 엄지를 마주 비빈 다음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계약하기 전에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하니까, 뿅.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지, 연애는 몇 번이나 해봤는지. 그 편지는 여자친구, 뿅?”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끌림이나 설렘 같은 걸 알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무뚝뚝해 보이는 낯으로 연애니, 취향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게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로 말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정도로. 비현실이 지나쳐 슬슬 이게 꿈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우성은 제 뺨을 슬쩍 꼬집어봤다. 당연히 눈물 나게 아프기만 하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지금 바보 같은 짓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 

꿈이 아니라면 다 같이 짜고 치는 장난일지도 모른다.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며 놀려대는 것으로 부족해 우성이 모르는 다른 3학년을 동원해가며 벽에 낙서하고, 우성이 전화를 걸 때까지 기다렸다가…이도 저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계약인지 뭔지 한다는 말 안 했거든요. 그런 것보다 질문에 대답은 안 해주는 거예요? 학교에서 이런 거 하면 교칙에 안 벗어나요? 저인 건 또 어떻게 안거고요. 공중전화로 걸었고 이름이나 학년 같은 건 말 한 적도 없는데. 솔직히 말해봐요. 형들이랑 짠 거죠? 낙수형이 이렇게 공들인 장난을 쳤을 것 같진 않은데. 현철이형이에요? 성구형? 아니면 설마 전부?”

“영업비밀이다. 뿅.”

“아, 쫌!”

우성은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어졌다. 빡빡이라 그냥 머리통을 움켜쥔 사람이 됐지만. 남자는 벽에 걸어둔 유니폼에 고정해뒀던 눈을 굴려 우성을 바라보더니, 그 조막만 한 머리통이 터질까 염려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냥 업무 지침상 고객이 미쳐버리기 전에 대답해야 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이렇게 할까.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씩. 공평하게. 뿅.”

이제 와서 공평을 운운하기에 남자는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게 많은 눈치였다. 우성의 이름은 물론이고 방 호수를 안다는 것은 학년까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농구부 티셔츠를 입고 찾아왔으니 제가 어느 부 소속인지도, 방금 유니폼을 봤으니 등번호가 9번인 것도 알고 있을 거고. 더해서 이런 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단 건 연애 쪽으론 영 소질 없는 타입이란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으리라.

반면 우성이 아는 거라곤 딱 하나였다. 남자가 수상쩍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  그러니 이 타이밍에서 공평 운운하며 뭔가 알아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공을 뺏겼다면 다시 뺏어오면 그만이다. 기회는 언젠가 올 테니까. 

“좋아요. 그럼 저부터.”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우성이 눈을 치떠 남자를 올려다봤다.

“대체 그 서비스란 게 뭐에요?”

“말 그대로 데이트 제공, 뿅. 당연히 로맨스적인 의미도 포함되어있는 거고, 일단은 그 외에 취미를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던가 단순히 말동무가 필요한 경우에도 서비스하고 있다 뿅. 우성이 신청한 건 연애쪽이지만. 기본적으로 기간제로 운영되는데, 자세한 건 여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남자의 주머니에서 종이가 한 장 딸려 나왔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접힌 에이포용지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흔드는 바람에 내용을 자세히 읽을 수 없었지만 가장 상단에 굵고 큰 글씨로 계약서, 석 자가 적혀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인 정우성은 지금까지 계약서다운 계약서를 본 적이 없었다. 구태여 따지고 들자면 부 가입 신청서나 합숙 신청서도 계약서 일부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외에는 우유 정기구독조차 부모님이 대신 해주곤 했으니까. 계약서라는 단어는 어쩐지 무겁고 중요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에 함부로 날인했다간 무언가가 크게 바뀔 것 같은 예감. 아무리 꼼꼼히 본다 해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작은 글자 하나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왜, 어른들이 곧잘 그러지 않는가. 도장 잘 못 찍었다간 인생이 망하는 법이라고. 

우성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사이 순서가 넘어갔다. 

“우리 서비스에 전화할 생각은 어쩌다 한 거야, 뿅. 다른 사람에게 소개받은 것도 아니라면서? 사귈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남자가 가볍게 턱짓했다. 예를 들어 그 편지를 준 사람이라던가. 그런 말이 뒤이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말투나 표정은 지나치게 담백해서 반대로 부끄러움을 부추기는 구석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니 여자친구 못 사귀어 안달 난 놈처럼 보일 것 같았지만, 거짓말로 둘러대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기도 하고. 

“제가 곧 유학하러 가거든요. 유학 가고 나면 적응하느라 몇 년은 금방 지나갈 텐데,”

“연애 한 번 안 하고 청춘을 보내자니 아쉽다?”

“아니, 그런 것도 있지만요.”

손안에서 편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자였다. 우성은 흉내도 못 낼. 마침표가 찍히는 자리마다 자그마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전 역시 이런 거에 별로 재능이 없나 봐요. 사실 그렇게까지 누굴 사귀고 싶었던 적도 없고요. 이 편지도, 받으면 고맙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사람이 궁금해지거나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지는….”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한탄을 늘어놓는데, 남자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편지를 내려다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가 퍼뜩 들리고 눈이 마주쳤다. 무슨 손가락에서 돌 부딪치는 소리가 나냐. 

우성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는 동안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2인실이라고 해도 기숙사는 그다지 넓지 않다. 그처럼 평균보다 큰 체구를 가진 사람에게는 더더욱. 책상에서부터 딱 네 걸음 걷고 나니 무릎이라도 닿을 듯 거리가 가까웠다. 남자가 가까워질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던 우성은 매트리스에 오금을 딱 붙인 채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굴렸다. 남자는 통나무 같은 상체를 숙여 우성이 숨을 흡 참을 때까지 즐겁게 뜸을 들인 다음 그 손에서 편지를 부드럽게 뺏어갔다. 저항할 수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냄새에 필사적으로 맞서는 사이 거리가 다시 훌쩍 벌어졌다. 향수 냄새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쉽게 잊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시원하면서도 깨끗했다. 비 내리기 전 공기에서 날 것 같은 물 냄새.

“원래 뭐든 간절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뿅.”

고등학교 농구부 단체 티셔츠를 입고도 정장을 차려입은 듯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그가 영업사원이기 때문인 걸까. 원래 뭔갈 팔러 다니는 사람들은 겉치레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니까. 다른 사람이 쓴 편지, 그것도 애정이 담긴 걸 다른 사람이 읽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건 편지를 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남자는 기껏 빼앗아 든 편지를 읽는 대신 말끔하게 접어 내려두었다.

“간절해지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요.”

몸이 가까워졌을 때 은근히 풍겼던 냄새에서, 혹은 칭찬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에서 관심을 돌리려 애쓰느라 말투가 조금 삐죽해졌다. 

“그런 것 치고 신청까지 접수했는데.”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고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한다는 게.”

제가 생각해도 다소 변명처럼 들렸다. 우성이 겸연쩍어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는 가당찮은 변명 따위 들어 줄 시간 없다는 듯 가타부타 말없이 계약서부터 들이밀었다. 

“저 아직 궁금한 거 남았는데요?”

“뭔데.”

“뿅은 뭐에요?”

궁금한 게 고작 그런 거냐고 되묻는 표정에 우성이 눈알을 떼굴 굴렸다. 그 계약서에 나와 있진 않을 것 아니냐는 공연한 핑계가 뒤따랐다. 남자는 체육계 인간이 아니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곧은 자세로 서서 뒷짐을 진 채 잠깐 침묵하다 두껍고 끝이 쳐진 눈썹을 슬쩍 들썩였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큰 표정 변화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 순식간에 열여덟아홉 먹은 고등학생 같은 인상이 됐다.

“이런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 친밀함은 깔고 가는 게 유리하거든…. 뿅. 원래 말투가 좀 딱딱한 편이라.” 

“별로 친밀하진 않은데.”

“지금 네가 이렇게 건방진 말을 한다는 건 효과가 있다는 뜻이고.”

그건 뿅의 효과가 아니라 제가 과하게 솔직한 편인 것 뿐이라고, 원래도 말버릇이 밉살맞은 구석이 있다며 한 소리 듣곤 했다고 알려주는 대신 입 다물고 얌전히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데이트 서비스 약정 계약서

“이용자”와 “제공자”는 다음과 같이 서비스 계약을 체결하고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한다. 


1조 (목적)

이 약관은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이하 “제공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제공자와 이용 고객(이하 “이용자”) 간의 서비스 이용조건 및 절차, 권리, 의무 및 기타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2조 (용어의 정의)

(1) ‘서비스’란 이용자가 의뢰한 내용에 따라 제공자가 실행하는 감정적 교류 행위 일체를 말한다.

(2) 제공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이용자의 의뢰에 명시된 사항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3조 (계약기간)

본 계약은 정식 계약에 앞선 무료 체험이므로 중간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 특별한 사유 없이는 체결 후 28일까지로 하며 연장계약을 완료하지 않을 시 통지 없이 해지된다. 계약이 실효하였을 때는 제공자는 즉시 주변 환경 및 물품 일체를 계약 실행 이전 상태로 이용자에게 인도한다.


4조 (신의 성실 및 협조)

제공자와 이용자는 신의를 가지고 본 규정의 조항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제공자는 이용자의 요청이 있을 때는 수시로 계약에 관련된 편의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이용자는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을 부당하게 요구할 수 없으며, 계약 실행에 협조하여야 한다.

종이는 남자를 닮은 글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전혀 동그랗지 않고 모나고 딱딱한 글자들. 조금 전까지 우성의 손에 들려있던 동그랗고 애정을 듬뿍 담은 글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때면 남자에게 물어봤다. 그는 이미 내용을 달달 외기라도 한 것처럼 계약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주었다. 신체 포기각서나 터무니없는 돈을 뜯어 가는 내용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고갤 든 우성이 물었다.

“무료 체험인데 4주씩이나 하네요? 보통 이런 건 삼일, 일주일, 그렇게 하지 않나?”

“그 정도는 해야 해, 뿅. 우리 회사는 고객의 정으로 실적을 올리는 거니까. 정을 쌓으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뿅.”

“회사라고 하니까 뭔가…진짜 이상하네요. 계약서도 생각보다 엄청 본격적이고. 실적이란 것도 따지는구나.”

남자는 뭔갈 찾는 듯 가슴팍을 더듬었다가, 지금 입고 있는 게 판판한 티셔츠라는 걸 깨닫고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꺼내 든 건 어두운색의 펜이었다. 몸체가 로켓처럼 동그랗고 묵직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값나가는 물건처럼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성의 손에 그 펜을 쥐여주었다. 우성은 그제야 남자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조금 초조해하는 걸지도 모른단 걸 깨달았다. 표정은 시종 담담했지만 지진 부진 시간 끄는 일이 없었고, 우성이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자 냉큼 계약서를 손에 쥐여주는 것도 그렇고. 일 처리가 느려 회사에서 군소리 듣진 않겠다 싶은 타입이었다. 

“실적 중요하지. 요즘 불경기거든. 뿅.”

체온이 옮아 약간 미적지근한 펜을 만지작거리며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어봤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구석이 있으면 바로 내쫓은 다음 사감이라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무료 체험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어차피 다른 선배들에게 물어보려 하던 참이었으니, 보다 전문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싸한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말 많은 형들보다야 실적 올리겠다고 이 산골짜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연애에 대해 통달했을 건 분명했으니까. 

“그럼 그쪽 회사에서 사람이 오는 거예요?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

새까만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나이, 키, 몸무게, 성별, 외모, 성격…조금 전 받아본 계약서만큼이나 내용이 빼곡했다. 이용자의 요청사항에 맞춰 전부 커스텀 가능하다는 게 우리 회사의 강점, 뿅. 무슨 수제운동화라도 두고 말하는 양 남자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것들을 전부 맞추는 게 가능은 한가? 직원이 대체 몇 명이기에, 성격이야 연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쳐도 외모 부분에서 까다롭게 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우성은 스스로 까다로운 타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 취향이랄게 뭔지도 잘 모르는 판국에 재고 따질 게 있을 리가. 

일단 계약서에 서명하는 건 뒤로 미뤄두고 요청사항부터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초장부터 고난이었다. 그냥 최선을 다해주세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밀려 올라왔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서비스에 제 발로 신청하게 된 이상 당초의 목적이라도 제대로 이룰 작정이었다. 제게 연애 세포라는 게 남아 있긴 한지, 전 세계가 마르고 닳도록 말하는 그 사랑이란 게 대체 뭔지 그 가닥이라도 잡을 작정. 일단 분명한 것부터 적기로 했다. 키는 약간 큰 편으로. 우성은 주변 사람들보다 키가 훌쩍 큰 편이었다. 매일 밤 관절이 저린 것으로 보아 앞으로 더 자랄 게 분명했고. 너무 차이 나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으니까. 나이는 동갑이나 연하보단 연상 쪽이 좋다. 외모…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너무 못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신체 부위?

“이런 것도 적어야 해요? 이건 진짜 좀 변태 같은데.”

“싫으면 넘어가 뿅.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다 채우고 뿅. "

그래야 맞춰줄 수 있으니까, 하고 덧붙인 남자는 우성이 넘긴 종이를 빠르게 훑어보고 어쩐지 모호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내용이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성은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마지막으로 계약서 앞장을 다시 읽은 다음 그 끝에 제 이름을 정자로 천천히, 또박또박 눌러 적었다. 남자의 이름은 그 아래 적혔다. 이명헌.  생각보다 이름이 동그랗단 소감이 먼저 들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부터 시작한다 뿅.”

입속으로 명헌의 이름을 굴려보고 있자니 그가 망설임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계약서에 싸인 받았으니 이제 할 말 없다 이거야 뭐야. 뭐가 이렇게 빨라? 당황한 우성이 따라 벌떡 일어났다. 

“벌써요? 아직 궁금한 거 남았는데.”

“궁금한 게 참 많다 뿅. 빨리 물어봐 그럼.”

“그, 그럼 누가 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절 어떻게 알아보는데요. 그냥 이렇게, 뭐 없이 바로 시작하는 거예요?”

우성이 초조하게 말을 붙이는 동안 빼먹은 게 없나 확인하는 기색으로 방 안을 둘러본 명헌은 누가 붙잡기라도 할세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눈이 스치듯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영업 비밀.”

쿵. 따라 나오지 말라는 듯 문이 코앞에서 닫혔다. 

“아, 그놈의 비밀, 은, 대체….”

청자를 잃은 말이 허공에서 사그라들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우성의 방을 나서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가려 해도 부족했을 시간이었는데.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멍하니 두리번거리던 우성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복도 끝까지 나가 계단참을 어슬렁거렸지만 멀어지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제가 본 게 귀신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산왕은 인근에 낮은 산이 여럿 있고 저수지까지 끼고 있어 잊을 만하면 기묘한 걸 봤다는 소문이 도는 동네였다. 하지만 어느 동네 귀신이 실적 올리려고 영업 뛰는데? 

돌아온 우성은 시험 삼아 제 뺨을 두어 번 짝짝 쳐본 다음, 침대 위로 퍽 엎어져 버렸다. 

꿈이었을까. 그 서늘한 물냄새도, 맞춘 듯 어울리던 농구부 티셔츠도, 수화기 밖에서 더 허스키하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까지. 조금 전까지 이 방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우성명헌 9월 24일 교류회에 나온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 웹발행 버전입니다! 

회지와 내용은 동일하되 외전이 추가로 올라올 예정이에요. 

가벼운 글이니 가볍게 즐겨시면 기쁠것같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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