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돌아왔다 中

명헌태섭(후카료)

가장 먼저 후카츠는 휴대전화를 뺏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무언가를 압수당한 적이 없는데, 친구 놈들에게 담배를 싹 뺏긴 데 이어서 휴대전화와 컴퓨터까지…. 그는 자기가 시험을 앞둔 고등학생이 되었는지 고심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치노쿠라의 으름장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내놓으라고 하면 내놔야지. 네 애를 가진 애가 달라는데 모가지를 달라고 해도 당연히 줘야지. 후카츠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미야기가 목을 떼어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 둘 다 기사 찾아보는 건 금지예요.”

“그래, 뿅.”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받을 만한 일은 멀리하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했어요. 나도 그래야 해? 네. 나는 왜. 그래야 내가 행복하니까요. 후카츠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그는 미야기의 등 뒤에서 작은 몸을 끌어안고 휴대전화를 쭉 밀었다. 식탁 가운데까지 미끄러진 기계가 덩그러니 버려졌다.

“말랐네, 뿅.”

“새삼?”

“응, 새삼스럽게. 너무 말랐다, 료타.”

나도 평균은 한다고요. 당신이 덩치들만 보면서 살아서 그래. 그래도 후카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미야기의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허리둘레가 가늘고 잘 짜인 근육을 제외하면 체지방을 찾아보기 어려운 몸이었다.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신경이 쓰였다. 뭐라도 더 먹자. 그냥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뿅. 웃음을 참는지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좋아요. 이번 기회에 아주 굴러다녀야겠어.

그때가 미야기를 만난 지 딱 7년이 되는 해였다. 그 애는 NBA에서 무사히 네 번째 시즌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있었다. 드래프트 당시, 2라운드 거의 마지막에 지명을 받아서 우려를 꽤 듣던 미야기는 직전 시즌에서 출전 시간이 전폭적으로 늘었다. 그에 상응하는 성적도 이루어 낸 후였다. 당연히 스포츠 언론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가 표지를 장식한 잡지도 이미 여럿이었다. 그 잡지들은 물론, 미야기가 대학 리그에 있던 시절의 아주 짧은 기사까지 후카츠는 전부 모아두었다. 다만 당분간의 소식은 멀리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내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단신의 NBA 선수’ 미야기, 깜짝 결혼 발표]

[농구 스타 미야기 료타, 9월 결혼… “상대는 국내 농구선수”]

[미야기 료타♥후카츠 카즈나리, 9월 결혼 발표…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농구팬들 “당황”]

미야기의 자필 편지에는 국내 농구선수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뿐이었는데, 후카츠가 신상을 털리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연예인처럼 몰래 연애하지는 않았으니까. 비시즌의 결혼이 그렇게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그래, 미야기가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음 시즌 복귀가 어려워지지 않았더라면. 양가 부모님과 가까운 지인을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아키타의 9월은 날이 선선해서 손님들이 양복을 입기 좋았다. 배가 불러올 기색도 없이 몸이 날렵한 료타는 하얀 정장을 입고 부케를 들었다. 앞머리만 넘기고 잔 머리카락을 고정한 미야기는 그날 내내 아주 환하게 웃었다. 신나서 사회를 보는 미츠이를 앞에 두고 그가 몸을 살짝 붙이며 소곤거렸다.

“카즈.”

“뿅.”

“행복하네요.”

“행복해?”

후카츠는 눈을 조금 내려서 미야기의 얼굴을 봤다. 그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었다. 메이크업한 얼굴에는 작은 홍조가 감돌았다. 행복한 척 따위가 아니었다. 그 순간에 우리는 정말로 기뻤다. 아마 생을 아홉 번 다시 살아도 그만큼 기쁘지는 못하겠지. 너와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죄책감과 후회를 곁에 두고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나한테 알려준 사건이었다. 널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일이,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우승이었다.

미야기.

후카츠. 후카츠 료타.

기꺼운 마음으로 고쳐 썼다. 단풍이 지는데 료타가 떠나지 않았다. 같은 글자를 공유한 이와 함께 겨울을 맞았다. 그는 여름을 제외한 모든 계절을 멀리서 보냈으므로, 처음이었다.

첫 새벽의 붙박이별

“료타, 곧 눈이 올 거야.“

“벌써요?”

몸을 조심하느라 번번한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다. 료타는 삿포로가 궁금하다고 했지만,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아쉽네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겨울에 머무를지 모르는데. 후카츠는 그의 배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면서 태어날 아이와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요, 후유미랑. 그는 이름을 따로 지어놓고도 종종 아기를 겨울이라고 불렀다. 5개월 후반으로 접어든 료타의 배는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품이 넓은 옷을 입으면 감쪽같아질 정도였다.

후카츠가 살던 오피스텔은 아이를 키우며 살기엔 불편해서 신혼집을 구했다. 본가와 2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침실 두 개와 서재, 아이 방을 둘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짐을 옮겼다. 료타의 어머니가 아키타로 올라와서 한 달여간 함께 지내며 아들을 돌봤다. 그동안 후카츠의 부모님과 친해져서 사돈끼리 여행을 다녀오더니, 일주일 정도는 아예 친가에서 지냈다. 신혼부부는 오붓이 지내게 해줘야지. 카오루 씨, 우리는 빠집시다. 후카츠의 어머니가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서 카오루는 웃고 료타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키타는 늘 이때쯤 첫눈이 온다, 뿅.”

“신기하네요. 어쩐지 춥더라.”

어깨의 담요를 두른 료타가 후카츠에게 어깨를 붙였다. 담요 아래로 빠져나온 두 손을 감싸고 주물렀다. 손끝이 차가웠다. 가뜩이나 몸이 잘 식는 료타는 아이를 가진 후로 손발이 더 차가워졌다. 그래서 후카츠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차를 내려서 쥐여주었다. 그의 뺨에 뽀뽀하고 일어나서 물을 끓였다. 한 쌍을 맞춰 산 도자기 잔에 레몬차를 담아서 건네주었다. 료타가 찻잔을 두 손으로 잡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후 불어서 날렸다. 그는 새콤하고 따뜻한 맛을 무척 좋아했다. 옆에서 따라 마실 때마다 후카츠는 신맛에 미간을 구겼지만.

“자꾸 인상 쓰면 주름진다?”

료타가 손끝으로 후카츠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손이 다시 따뜻해져 있었다. 그것을 붙잡아서 끄트머리에 쪽쪽 입 맞춰 주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담요를 고쳐 두르고 품속으로 꼬물꼬물 들어왔다. 코타츠의 온도를 조금 높였다. 따뜻한 온도에 두 사람 모두 꾸벅꾸벅 졸다가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로 기어들었다. 후카츠의 팔을 벤 료타가 슬금슬금 그의 종아리에 다리를 올려놨다. 두 사람은 다리를 얽고 상체를 붙인 채로 잠들었다.

눈이 오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후카츠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면서 료타를 불렀다. 일어나 봐. 료타, 첫눈이 보고 싶다면서. 잠이 덜 깬 료타가 눈을 비비며 등에 얼굴을 콩 부딪쳤다. 그리고 후카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바깥을 내다봤다. 밤사이 내린 눈이 바닥을 채색했다. 하얗고 조용한 풍경에 료타가 말을 잃었다. 그의 어깨를 감싸고 물었다.

“어때, 뿅.”

“예쁘다.”

싫지는 않지? 그러네요. 료타가 그제야 키득거렸다. 보고 있어. 차 끓여 올 테니까. 그러자 료타가 옷깃을 잡아챘다. 산책하자. 추울 텐데? 그래도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후카츠는 그에게 두꺼운 옷을 입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보아뱀처럼 커다란 목도리를 칭칭 감아 놔서 료타가 좀 불평했다. 진짜로 굴러다니겠어요. 이 목도리 때문에. 반쯤 파묻힌 얼굴을 빤히 보다가 코끝에 뽀뽀했다.

료타의 발밑에서 눈이 가볍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첫눈인데도 엄청나게 오네. 벌써 쌓였어요. 깨끗한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다. 후카츠는 느릿느릿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작은 발자국 옆을 꾹 밟았다. 두 사람의 흔적이 나란히 남았다. 크기는 좀 달랐다. 그 차이에 헛웃음을 친 후카츠가 어느새 멀리 걸어간 료타를 쫓아갔다. 주머니에서 데운 핫팩 꺼내서 양 뺨에 대고 꾹 눌렀다. 입술이 부리처럼 톡 튀어나왔다. 료타가 그 부리로 종알거렸다.

“한겨울이 되면 더 많이 와요?”

“많이 오는 정도가 아니지. 말했잖아, 전화가 안 된다고.”

“와, 그런 데에서 어떻게 돌아다니지.”

“못 돌아다녀. 너도 여기서 못 나간다, 뿅.”

짐짓 무섭게 이야기하자 료타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핫팩을 든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렸다. 그에 따라 태동도 잦아지고 있었다. 료타는 배에 손을 올리고 있다가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후카츠를 불렀다. 후카츠도 매번 서둘러 달려와서 그의 허리를 안았다. 유미가 발로 차는 소리는 꼭 심장박동 같았다. 쿵, 쿵 하고 뛰는 마음. 후카츠가 살면서 가장 감상적이었던 시기였다.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다. 나갈래요. 료타에게 옷을 단단히 입히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발목이 빠질 만큼 눈이 내려서, 치워 놓은 도로를 따라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후카츠는 혹여 넘어질세라 료타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흰 입김을 뿜으며 한참 걷던 료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찬바람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후카츠는 그것을 손으로 몇 번 쓸어내 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눈에 감싸인 도시를 배경으로 료타가 서 있었다. 먼 곳에서는 동이 터올랐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밝아서, 그 가운데 자신을 바라보는 료타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쪽 장갑을 벗고 손을 뻗었다. 금방 살갗이 붉어지고 손바닥 위에 눈꽃이 피었다. 차가운 줄도 모르고 그것을 손에 꼭 쥔 료타가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여기서 살래?”

“응?”

“너 은퇴하고 나면, 여기서 유미를 키우며 살자.”

후카츠는 이곳, 아키타에서 태어났다. 여기의 겨울이 그를 담고 키웠다. 겨울을 사랑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분명 그 애도 겨울을 좋아할 거야. 춥고 다정한 이 땅이 우리를 품어서 영원하게 해줄 테니까. 후카츠가 두 손을 뻗자, 료타가 한 발짝씩 걸어와서 그 손을 잡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꽁꽁 언 손끝을 잡아서 숨겼다. 다시 한번 천천히 녹아가는 살갗 위에 느릿느릿 입술을 눌렀다. 모든 장면이 하얗고 느리게 흘러갔다. 살아온 모든 세월보다 이 하루가 더욱 긴 것 같았다. 몰아치는 눈 속에서 료타는 맑은 웃음소리를 퍼뜨리며 대답했다.

“좋아요. 같이 살아요.”

우리 겨울이랑 행복하게 살아요.

그 말을 믿었어.

진심으로.

 

 

“후카츠 저놈 얼굴이 폈네.”

“기쁜 척이라도 하랬지 누가 진짜 행복하라고 했냐?”

친구들이 혀를 끌끌 찼다. 저 녀석 속도위반했다고 보는 사람 속 터지게 땅이나 팔 때는 언제고…. 대놓고 욕을 해도 후카츠는 뻔뻔한 얼굴로 사진첩을 넘겼다. 봐, 이게 갓 태어났을 때 사진, 이때는 너무 작고 빨개서 사람 아이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 주쯤 되니까 옹알이도 하고 웃기도 하더라, 뿅. 투박한 말을 늘어놓던 카와타와 이치노쿠라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봤다. 노베와 마츠모토는 이미 입도 못 다문 채로 자그마한 아기 사진을 멍하니 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자그맣고 꼬물거리는 애가 후카츠의 아이란 말이지. 묘하게 눈썹이 짙은 것 같기도 하고. 마츠모토가 사진과 후카츠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엄청 작다. 그렇지, 너무 작지. 어, 너무 자그맣네…. 넋을 잃은 삼촌들 사이에서 바보 같은 말이 오갔다.

“미야기는 건강해?”

“어, 신체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 하더라고.”

그 애가 회복력 하나는 자신 있다고 자랑하던데, 진짜였나 봐. 두툼하고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풀렸다. 노베와 옆 사람의 귀를 잡고 수군거렸다. 무슨 복어 독 제거한 것처럼 사람이 흐물흐물해졌냐. 결혼하면 다 저렇게 되나? 당연히 후카츠도 다 들렸다. 하지만 그는 시원하게 못 들은 척하고 다음 사진을 열었다. 카메라 너머에서 병원복을 입은 료타가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일 저녁에는 료타 데리고 친가에 가서 전골을 먹기로 했다, 뿅.”

“누구 물어본 사람?”

“임신했을 때 자주 먹였는데 입에 맞았나 봐.”

슬슬 여름인데도 전골을 먹고 싶다고 하더라. 말이 안 통한다는 걸 깨달은 친구들은 각자 접시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전골 많이 먹어라. 넌 조금만 먹고 너희 미야기 많이 먹여라.

“이제 미야기 아니다. 후카츠 료타, 뿅.”

“가라, 그냥….”

후카츠는 코웃음을 치고 가방과 옷을 챙겨 들었다. 술은 너희들끼리 먹어. 아이 궁금하면 주말쯤에 와서 보고. 방의 문가에 앉은 카와타가 빨리 가버리라고 문도 열어 줬다. 그가 빈말로도 아쉽다 말하지 않고 쌩하니 도망한 후, 남은 친구들이 피식거렸다. 재수 없긴 해도 보기는 좋다. 후카츠가 저렇게 실없게 구는 거 처음 보지 않냐. 그러게, 잘 지냈으면 좋겠네.

후카츠의 어머니는 내킬 때마다 커다란 전골냄비를 꺼내고 아들 부부를 불렀다. 전골은 눈이 올 때 먹는 게 아닌가요? 료타가 그렇게 물으면 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물려서 쳐다도 보기 싫어질 거다. 여긴 맨날 눈이 오거든. 그녀는 남자중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고, 후카츠에게 무뚝뚝한 얼굴과 간지러운 말투를 물려준 사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부부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현 내 대학에서 교수를 했다. 교육자 집안이었다. 료타는 후카츠가 놀랄 만큼 일찍 선수를 그만두고 지도자 코스로 접어든 데 부모님의 영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란히 선 세 사람은 서로를 신기할 만큼 닮아서, 잘 정돈된 분위기를 풍겼다. 료타는 그들 가족 사이에 있을 때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꼭 뿌요뿌요 같은…. 그 이야기를 후카츠의 귀에 소곤소곤 말해주면서 부모님께는 비밀이라고 했다. 마지막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후카츠가 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료타가 당황해서 팔꿈치로 그를 쿡쿡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래, 한 명이 더 필요했는데. 네가 우리랑 똑같이 생긴 아이를 안겨 줘서 좋구나. 얼굴이 새빨개진 료타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두 손으로 접시를 받쳐 들었다. 손 조심, 뿅. 후카츠가 접시에 전골을 덜어 주었다.

“좀 더 주렴. 그거 가지고 되겠니.”

“료타 체해요.”

“얘 팔을 봐. 누가 보면 네가 남편 밥 뺏어 먹는 줄 알고 신고하겠다.”

“먹을 때 웃기지 마세요. 진짜 체하겠어요, 뿅.”

료타도 결국 웃음 참는 걸 그만두었다. 말갛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도 입꼬리를 살포시 올렸다. 도톰한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휘어지는 게 낯익었다. 이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웃는구나. 나도 우리 가족들과 웃는 얼굴이 닮았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료타가 물었다. 카즈나리, 우리 아이는 어떤 얼굴로 웃게 될까요? 왜, 당신과 나는 표정이 꽤 다르잖아요.

“글쎄. 나중에는 우리 셋만의 방법으로 웃게 되지 않을까.”

“그거 기대되네요.”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요. 당신을 닮아가는 내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나처럼 구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후카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숙였다. 료타가 자연스럽게 발꿈치를 들어서 그 뺨에 키스하고, 그가 안아 든 아이의 이마에도 입 맞췄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주 본 얼굴이 기대로 젖어 있었으니까. 료타는 유미를 받아서 잠들 때까지 거실을 돌았다. 후카츠가 무겁지 않냐며 몇 번이나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조금 더 안고 있을래요. 안 무거워. 농구공 들고 있는 것 같아요.”

후카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료타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서양식으로 꾸민 거실에서 두 남자가 한참을 빙글빙글 돈 후에야 유미가 겨우 잠들었다. 떼를 쓰는 건 아닌데, 잠드는 데 한참 걸리네. 당신도 그랬어요? 기억 안 난다, 뿅. 그야 그렇겠지. 료타는 킥킥 웃으면서 유미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러그 위에 주저앉았다. 잠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료타의 허리에 후카츠가 팔을 둘렀다. 너는.

“나 왜.”

“너도 재워 줘?”

“웃기네. 어디 한 번 재워 봐요.”

후카츠가 그의 상체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작은 몸이 순간 번쩍 들렸다가 땅으로 내려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료타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나는 못 할 줄 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들겠다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이러다가 애 깨우겠다며 검지를 펼쳐서 쉿 했다. 눈꼬리며 입술이며 잔뜩 휘어졌다. 그 부드러운 표정들, 서로를 닮아가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은 당연히 입술을 겹쳤다. 마주 댄 살덩어리를 혀로 가만가만 쓸다가 배를 딱 붙인 채로 잠들었다. 료타가 턱 아래에 얼굴을 묻고 색색 숨을 쉬어서 아침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배우자의 숨이 닿은 곳이 간질간질할 때마다 미래를 꿈꿨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겨울에 료타가 눈밭을 밟고 있었다. 늘어뜨린 손은 어느새 그의 허리까지 자란 아이가 자그마한 손으로 붙잡았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 새벽에 꾸는 꿈.

하지만 꽁꽁 얼었던 아키타의 호수도 봄에는 표면이 녹고 물을 흘렸다. 겨울이 늦게 물러나는 땅이었으나, 여름 역시 반드시 왔다.

“괜찮겠어?”

“걱정하지 말아요. 병원에서도 그랬잖아요. 건강한 편이라고.”

료타의 팀은 이미 비시즌 훈련에 들어갔다. 그는 일단 미국으로 돌아가서 재활을 계속하며 몸 상태를 관찰하기로 했다. 후카츠는 아이를 낳은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료타를 걱정했지만, 만류할 명분이 없었다. 그는 임신 중에 이미 빠르게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금도 꺾이지 않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그를 후카츠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래, 그건 료타의 일이자 꿈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카즈나리, 인상 쓰지 말라니까. 바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재활한다고요. 료타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달랬다. 두 손바닥이 팔을 짚고, 턱과 목덜미에 입맞춤이 잘게 붙었다.

“자주 연락할게요.”

“전화, 뿅.”

“그래요. 매일 전화할게.”

너무 내 걱정만 하지 말아요. 애 아빠, 당신 걱정부터 해야 할 걸? 료타가 한쪽 눈썹을 올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니저인가 봐. 그는 후카츠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에이전시 관계자들과의 통화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동안 유미가 옹알거리기 시작해서 품에 안아 달래고, 이유식을 먹이고 등을 토닥였다. 이윽고 통화를 끝낸 료타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벌써 아기 밥 다 먹였어요? 료타는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무 예쁘다. 꼭 천사같이 자네…. 당신 자는 얼굴이랑 똑같아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 귓바퀴가 뜨거웠다. 입술을 살살 붙이는데 아이가 깨서 잠투정하는 바람에 또 한참을 달래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전화해, 뿅.”

“알았다니까.”

료타는 가나가와로 내려갔다가 다음 날 바로 하네다 공항에서 출국할 예정이었다. 미국에 가면 재계약 건으로 시달려야 한다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잘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제 부름을 기다리며 속앓이하는 선수가 아니었으니까. 캐리어를 세운 료타가 양팔을 쫙 펼쳤다. 몸을 숙여서 그의 상체를 끌어안은 후카츠는 팔에 힘을 주고 강하게 당겼다. 료타의 발꿈치가 떠올랐다. 그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가볍게 감은 그가 계속 속삭였다.

“보고 싶을 거예요.”

카즈, 당신을 아주 많이 그리워할게요. 그러니까 힘내요. 내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요. 떠나는 사람은 그인데, 위로받는 건 자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료타는 이미 아는 것이었다. 남겨지는 사람의 마음, 그 안에 움트고 후카츠를 괴롭힐 외로움을. 하지만 후카츠는 상처 없이 단단해진 과일 껍질 같은 남자였다. 흠이 없는 대신, 과거가 없기에 미래의 상처도 예언할 수 없었다.

 

 

 

옷에 남은 바다 냄새가 느리게 빠져나갔다. 손을 뻗어 잡을 수도 없었다. 함께 살던 집과 그의 물건들에는 향이 더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것조차 일주일을 못 가고 전부 사라졌다. 료타가 두고 간 옷에서 향이 사라지고 후카츠도 두 발도 땅으로 내려왔다.

비로소 현실이었다.

아니, 그가 있기 전의 후카츠 카즈나리였다. 후카츠는 낮 동안 도우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학교에 갔다. 오후에는 종종 어머니가 와서 손녀를 봐 주기도 했다. 이제 어린 티를 조금 벗은 애들이 보건실로 우르르 몰려가서 키를 재고 돌아왔다. 아이들의 신장과 훈련 경과를 기록하고 코치와 주전 후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원이 워낙 많아서 평가하는 데에만 한세월이었다. 여름에 좋은 성적을 거뒀던 학교들의 경기 영상을 구해뒀지만, 몇 개 보지도 못하고 퇴근했다. 돌아가는 길에 단호박과 오이, 당근, 두부를 샀다. 시판 이유식이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먹이는 횟수도 슬슬 세 번으로 늘려야겠군. 생선과 달걀은 언제쯤부터 먹여야 하지….

단호박을 으깨서 만든 이유식과 두부로 만든 것을 차례차례 먹이고 접시를 치웠다. 휴대전화가 짧은 알람음을 냈다. 나 일어났어요. 저녁 먹었어요? 그 문자를 보고 나서야 정작 자기 식사를 미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이 소화가 느리고 투정이 많아서, 한참을 품에 안고 등을 도닥이며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몇 바퀴째인지 세어볼 생각도 안 들었다. 품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 작고 어린 아기가 옷깃을 잡고 꼬물거렸다. 젓가락도 제대로 못 드는 통통한 손가락. 그 애 손도 이렇게 작았을까. 그는 지금도 농구하는 남자치곤 손이 작은 편이니까 어렸을 때는 딱 이 애처럼 자그마했겠지. 후카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아기를 고쳐 안았다. 그제야 유미가 작게 트림 소리를 내고 방실방실 웃었다. 착하다.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아기가 웃을 때면 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난 지금 점심 먹었어요.]

[식사 거르지 말고 전화 받을 수 있을 때 문자 줘요.]

한 팔에 아이를 안은 채로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뺨과 어깨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우고 빈손으로 아이 뺨을 간질였다. 여보세요, 료타. 뿅. 이야기는 잘 됐어? 그래. 그건 다행이네. 유미 밥 먹이고 잠깐 놀아주고 있어. 뿅. …먼 곳에서 그렇게 신경 쓰다간 다친다. 재활하는 데에 집중해. 그래, 사랑해. 모빌처럼 움직이는 후카츠의 손가락을 잡으려고 바동거리던 유미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배고플 리는 없고, 기저귀도 멀쩡한데. 이거 유미 우는 소리예요? 후카츠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별일 아냐. 애 옷 좀 볼게. 전화를 뚝 끊고 다시 안아 들었다. 밤이 깊도록 아이는 울다가 말다가 하면서 잠들지 않았다. 돌도 안 된 딸이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아이도 모를 터였다. 후카츠는 조심스럽게 훌쩍이는 어린애와 이마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울지 마. 아빠 곧 올 거야.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정말로 기다리면 올 텐데. 하지만 이 애가 산 날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이곳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건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가을이 깊어진 후에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에 아이를 맡기고 그곳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후카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거울은 좀 보고 다니니.”

“봐서 뭐 합니까?”

화장실에서 들여다본 얼굴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후카츠는 딱 남들에게 무관심한 만큼만 자기에게 무관심한 남자였다. 뚱한 얼굴로 나오는 아들을 본 어머니가 픽 웃었다. 꼭 바람맞은 애 같구나.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뿅. 아들이 볼멘소리하든 말든, 냉정한 눈빛을 한 어머니는 후카츠의 앞머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눈가를 간질였다. 한발 늦게 그는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이 일에나 집중하라고 해도 후카츠는 꼬박꼬박 본가로 퇴근했다. 아직 예상 범위 안이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주변 사람들이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니…. 곧 후카츠의 한계는 살풍경한 빈집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신혼집으로 돌아온 그는 무심코 아일랜드 식탁 위를 손으로 쓸었다가 흠칫 놀랐다. 까슬한 먼지가 유령처럼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고작 일주일을 내버려 뒀을 뿐인데.

그 후로 청소 도우미를 주기적으로 불렀지만,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가끔 물건을 챙기기 위해 가보면 꼭 모델 하우스 같았다. 료타가 안나와 머리를 맞대고 종일 고민해서 고른 벽지와 카오루 씨가 추천한 냉장고, 료타의 취향대로 주문한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 무심한 낯을 하고 있었다. 후카츠는 그 냉정한 풍경에서 자기 얼굴을 봤다. 거울에 둘러싸인 기분으로 통화 기록에서 후카츠 료타의 이름을 찾아 눌렀다. 여보세요? 형?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들어서 시계를 봤다. 다행히 미국도 아침이었다.

“그냥, 일어났나 해서.”

“이제 깨서 씻고 나왔어요.”

잠깐만요. 차 문을 닫고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료타는 차에 전화를 연결하고 다시 대화를 이었다. 응, 병원 한 번 들렀다가 다시 체육관으로 가려고요. 몸 상태는 괜찮아요. 재활도 제법 했겠다, 이제 천천히 본래 훈련으로 돌아가야죠. 오래 쉬었더니 좀 죽을 맛이긴 한데, 또 뭘 하든 금방 적응이 되더라. 아, 그리고 다음 주에 사와키타를 한 번 만나기로 했어요. 정규 시즌 시작하기 전에 얼굴 한 번 봐야지.

“경기는?”

“음, 언제 복귀할지는… 모르겠네. 더 노력해 봐야죠.”

작게 웃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평화로운 말투,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벽과 부딪치고 나서 어느 정도는 절망했으리라. 다시는 코트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불안하고 두렵겠지. 두 사람에게는 어떠한 확신도 없었다. 그렇게나 오래 농구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어려웠다. 삶도, 슬슬 어느 정도는 살아본 것 같은데 앞을 내다보면 막막한 일투성이였다. 한참 침묵하던 후카츠는 딱 한 마디만 건넸다.

“괜찮을 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통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후카츠는 문득 멈춰 섰다. 거실의 통창 바깥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전화도 예전보다 뜸해졌다. 다만 횟수를 세지 않아서 정말로 연락을 소원하게 했는지는 불분명했다. 다만, 그래서 사와키타를 만났는지,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 녀석이 자기가 사는 주로 돌아가고 나면 또 속을 터놓을 사람이 있는지 묻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후카츠는 미국의 아침에서 일어난 료타가 전화하면 산뜻한 목소리로 유미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도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윈터컵에 출전하는 주전 선수들이 몸을 풀다가 그들의 감독을 맞았다.

주전 중의 두 녀석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엄격하게 교육받은 선수였으므로 훈련과 연습 경기에서 한 번도 사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후카츠는 그들을 활용하기로 했고, 두 사람은 실제로 4강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팀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에 그 애들의 호흡이 엇나갔다. 상대 팀의 슈터가 던진 슛이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통과했다. 단 1점 차이로 이루어진 패배였다. 그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키타로 돌아온 후에 패스를 놓쳤던 아이가 후카츠를 따로 찾아와서 말했다. 감독님.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코트 위에서 누군가를 미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떤 잘못은 반드시 저지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애를 탓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입학을 결정했다. 청춘 가운데에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 같겠지만, 아마도 그곳에서는 더 많은 일이 벌어질 터였다.

“유미.”

딸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숨을 죽이고 아이를 받은 후카츠는 유미를 침대에 눕히고 곁에 모로 누웠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다. 계속 미루기만 하던 피로가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후카츠는 까무룩 잠들었다가 새벽에 눈을 떴다. 커튼을 들추자, 아파트 사이가 조금씩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통잠을 자는 아이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티브이를 켜고 소리를 아주 작게 줄였다. 경기 중계 속에서 료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연일 복귀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와 미야기 료타의 부활은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이 쏟아지는 때였다. 후카츠는 멍하니 화면 구석의 작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초조한 얼굴, 조금씩 뒤척이는 다리.

료타는 그 해에 다시 코트로 돌아가지 못했다.

새해가 밝고도 일주일이 더 지난 후에 어머니가 전골을 먹자고 하셨다. 료타가 돌아가고 나서 한 번도 먹지를 않았구나. 휴일에 가족끼리 좀 먹자. 후카츠는 그랬던가, 하고 생각하면서 전골에 들어갈 채소 중에서 하나를 골라 이유식을 만들었다. 이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 소고기도 갈아 주었다. 식탁에 아기 의자를 놓고 함께 식사했다. 저녁에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자를 때가 돌아왔다. 료타는 1월 말부터 조금씩 출전하기 시작했다. 한 경기의 출전 시간은 10분을 못 넘겼고, 당연히 기록도 좋지 않았다. 결혼 전의 주가가 높았기 때문에 세간의 평가는 더 혹독했다. 통화로 농구 대신 아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유미는 이제 몇 가지 단어를 말할 수 있었다. 어리숙한 발음으로 ‘카즈’, ‘료타’ 했다. 아이 옆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부르는 소리를 들려줬더니 료타가 오랜만에 즐거워했다.

“우리가 전화하면서 부르는 걸 따라 하나 봐.”

“애 때문에 찬물도 못 마시겠다, 뿅.”

직접 듣고 싶다. 카즈, 보고 싶어요. 그 말이 후카츠를 조금 일으켰다. 이제 손이 덜 가나 싶다가도 걷기 시작하면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아이를 겨우겨우 돌봐냈다. 료타가 돌아오면 보여줄 생각으로 일기 비슷한 걸 적었다. 버릇이 무섭다고, 훈련 일지와 똑같이 적어놔서 조금 웃긴 꼴이 되었다.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료타는 그걸 읽으면서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웃었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부터 다시 도전하는 기분이에요. 어쩌면 멈추게 될 수도 있겠지만, 포기하면 안 돼요. 포기하면 경기는 그대로 끝나는 거니까. 고등학교 때 감독님이 하신 말이라며 그는 샐쭉 웃었다. 휘어진 눈꼬리에는 옅은 기대감까지 머물렀다. 그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도 그렇게 웃어 보이는 사람이었고, 후카츠는 두 번이나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일 년의 루틴처럼 료타는 한여름만을 후카츠에게 내어주고 다시 집을 나섰다. 가나가와로 내려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잠깐 만난 뒤 하네다 공항에서 출국하는 일정이었다.

옅은 소금기가 남은 집안을 돌아보던 후카츠는 문득 추위를 느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도 느끼지 않았던 감각. 가슴 한 군데가 뚫려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낯선 느낌에 홀린 듯이 비행기 표를 찾았다. 전날 내려간 료타를 따라갔다. 들뜬 표정의 여행객과 피로에 젖어서 눅눅해진 몸으로 출장을 떠나는 직장인과 그 모든 목적을 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서 외딴섬처럼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익숙한 바다 냄새가 인파를 헤치고 스쳐 지나갔다. 커다란 가방 하나를 어깨에 걸친 료타가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향했다. 출입국에 익숙한 그는 한 번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멀어졌다. 후카츠는 공항의 어둠 가까이에서 멍하니 읊조렸다.

넌 떠날 때 뒤도 돌아보지 않는구나.

아니, 돌아가는 것이었구나.

후카츠는 그날 무엇이 단단한 얼음 호수에 금을 냈는지 알아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피로 따위가 아니라, 그 애. 후카츠 료타. 첫사랑이자 연인이자 배우자. 언제까지고 곁에 두고 아껴주고 보살피고 싶은 단 한 사람. 그가 절대로 손 닿는 곳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는 사실, 현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지 버텼다. 너무 짧은 여름을 곱씹으면서.

 

 

 

백화점의 아동복 매장에서 옷을 몇 벌 샀다. 품에 안은 아이는 노란색 원피스를 붙잡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아빠, 나 이거 사 줘. 단어 하나도 어렵게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어디서 말이 늘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보육원을 일찍 보내서 그런가. 후카츠는 아이 옷과 자기가 입을 스포츠 브랜드의 옷 몇 벌을 트렁크에 던져 놓고 카시트에 유미를 앉혔다. 조수석 앞에 붙여 놓은 둥글둥글한 강아지 인형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유미도 그 모양을 잠시 따라 했다. 인형 옆에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찍은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바로 출발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후카츠가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에 아빠 올 거야.”

“료타 아빠?”

“응, 료타 아빠.”

아이가 멀뚱멀뚱 후카츠를 마주 봤다. 세 살짜리도 두 살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한다지만, 이 어린애의 머릿속에 료타가 온전히 남아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이 그를 사랑하듯이 우리 아이가 그를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후카츠는 날이 밝자마자 유미에게 노란색 원피스를 입히고 단발머리를 빗겨주었다. 고무줄을 예쁘게 묶어주려고 해도 두툼한 손은 자꾸 엇나가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머리띠를 씌우고 손을 잡았다. 엘리베이터까지만 걷고 내려가서는 아빠한테 안겨야 한다, 뿅. 유미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잰걸음으로 현관문을 벗어났다. 신발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튀어 나가려는 아이를 재빨리 잡아서 안아 들었다. 유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나 잘 걸어. 혀를 내두른 후카츠가 이마를 콩 맞댔다. 그게 문제야. 제발 혼자 걸어 나가지 마. 뚱한 표정의 부녀가 서로를 노려보기를 몇 분, 료타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아이를 발견한 료타는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그가 서두른 탓에 캐리어가 바닥에 연신 부딪히며 요란하게 덜컥거렸다. 아이를 와락 받은 료타가 환하게 웃었다.

“카즈!”

후카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택시에서 내려서 급히 뛰어왔는지 조금 상기된 뺨이 손바닥에 닿았다. 어쩐지 실감이 안 났다.

“…어서 와.”

“다녀왔어요.”

곱슬머리가 살짝 풀어진 료타가 아이에게 뺨을 비볐다. 간지러운지 유미가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며 팔다리를 동동 흔들었다. 유미는 어린애치고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정말로 자기 아빠인 줄 알고 그러는 것인지는 미지로 남았다. 후카츠도 그것을 그리 중요히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 어차피 아이도 그를 사랑하게 될 거다. 가슴 졸이지 않아도 료타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다. 후카츠는 그의 캐리어를 끌어오며 말했다. 올라가자, 좀 쉬고 저녁 먹어. 그래요. 오늘 외식할까? 대답은 아이의 몫이었다. 료타는 아이를 가뿐히 고쳐 안고 눈을 맞췄다.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좋아.”

엘리베이터에서 남는 팔이 없는 료타는 대신 상체를 붙여 왔다. 그는 반 뼘 낮은 어깨로 후카츠의 팔을 문지르더니, 유미를 품에 넣은 채로 후카츠의 뺨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요. 입술이 가까워지는 순간 청량한 소금기가 코끝을 살짝 스쳤다. 후카츠는 고개를 숙여서 그와 맞대고 코끝을 문질렀다. 간지러워. 이번에는 료타가 킥킥 웃으며 어깨를 들썩일 차례였다. 그는 천진하게 웃으며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느리게 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놓은 후에 아이를 잠깐 소파에 내려놓았다. 얇은 겉옷은 자연스럽게 소파 팔걸이로 갔다. 그날 료타는 오랜만이니까 비싼 저녁을 먹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동안 아이가 포크 쓰는 모습을 신기하게 봤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유미의 식사를 도우려 했다. 후카츠는 그런 료타를 빤히 보다가, 그의 접시를 당겨서 스테이크를 잘라 주었다. 한 점을 입에 갖다 대 주고 나서야 료타가 정신을 차렸다.

“그냥 둬도 돼.”

“그래도.”

“스스로 먹게 가르쳐야 한대, 뿅.”

눈썹을 늘어뜨린 료타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아이를 계속 흘끔거렸다. 후카츠는 종업원이 채워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느릿하게 운을 띄웠다. 료타, 슬슬 아이랑 좀 더 지내야 하지 않겠어? 료타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역시 그렇죠. 마침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사진을 받아 볼 때마다 너무 아쉽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자라는 걸 옆에서 보지 못한다는 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받은 료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년쯤에 귀화하면, 다 같이 미국에서 살까요?”

“뭐?”

식기가 테이블에 부딪혀 쨍하는 소리를 냈다.

꿈처럼 뭉클거리던 기색이 사라지고 당황한 낯이 되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온 종업원이 이번에는 료타의 물잔을 채우고 물러났다. 눈치 좋은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한참 동안 이 테이블에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직원에게 ‘저 테이블 싸움 났던데.’라고 할지도 몰랐다. 이내 료타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미국 오라니까요.”

“내가 거길 왜 가.”

아이랑 같이 살라면서요. 미국에 안 오면 어떻게 살아요? 아키타로 오면 되잖아. 료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지만, 쉽게 흥분하는 기질도 있었다. 벌써 광대뼈 근처가 조금 붉게 올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왜 말이 안 돼.”

“그렇잖아.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해요.”

“아키타에는 구단이 없어?”

“있으면 뭐, 내가 어디 다친 것도 아닌데 NBA를 제 발로 나오는 게 제정신인가….”

료타는 말을 줄이면서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더 먹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를 신경 쓰느라 몇 조각 먹지도 못한 고깃덩어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마저 먹어. 자기 식기를 내려놓은 후카츠가 그것을 도로 밀어놓았다. 그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애도 아닌데 음식 가지고 투정하지 말고.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문 료타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미가 자그마한 손을 뻗었다.

“어디 갔다 왔어?”

“응, 그냥 화장실. 우리 유미, 맛있게 먹었어?”

애써 눈꼬리를 접은 료타가 냅킨으로 유미의 입가를 닦고 안아 올렸다. 예쁘다, 우리 딸. 레스토랑을 나가면서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이의 원피스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유미 옷에 뭐가 묻었네. 거기 넣어 놔. 손으로 빨아야겠는데, 내가 할게요.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다스리는 것 같았다. 욕실과 주방 근처를 한참 오가던 료타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섰다. 차가운 물을 따르다가 조금 흘렸는지, 한숨을 쉬었다. 내친김에 식탁을 닦고 냉장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말은 목소리가 작아서 꼭 혼잣말 같았다. 난 당신이 이해가 안 돼. 남들은 가고 싶어서 난리가 난 곳인데…. 생각해 봐요. 어릴 때부터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다니면서 이것저것 겪어보는 게 유미한테도 좋지 않겠어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결국 열이 오른 료타가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카즈, 뭐라도 말을 좀 해!”

“할 말 없어.”

“왜?”

후카츠는 살갗이 굳어버린 것처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료타가 소파에 앉은 후카츠의 어깨를 잡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싸늘한 온도로 료타를 올려다봤다. 그는 낯선 모습에 잠깐 움찔했다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카즈, 미국이 왜 싫은지 말을 해 줘야 알지. 낯설어서 그래요? 외국이라고 지레 겁먹을 거 없어요. 나도 처음에나 그랬지, 결국 다 익숙해진다니까요. 하지만 후카츠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집과 가족이, 직장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나도, 나도 당장 가자는 건 아니에요.”

료타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이마를 묻었다. 등 뒤에서 작게 숨 쉬는 소리가 났다. 떼어내려고 움켜쥐었지만, 완전히 내치지는 못하고 배 위에 얹어진 손을 꽉 잡았다. 나 미국에서 사는 집도 있고, 셋이서 살 집을 새로 구해도 되고…. 내가 먼저 가서 귀화도 정착도 다 알아볼 테니까 천천히 정리하고 와 줘요. 응? 그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거의 애원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약하게 구는 것인데,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 후카츠는 어렵게 팔을 떨쳐 내고 침실로 돌아갔다.

짧은 여름이 전쟁통으로 변했다.

“생각해 보는 척이라도 해요.”

“그럴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아무리 애원하고 설득해도 후카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번번이 제 말이 무시당하자, 료타도 결국 화가 났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싸우고 성질을 피우고 서로를 욕하기 일쑤였다. 방까지 따로 쓰려는 것을 후카츠가 으름장으로 놓아서 침실에 가둬 놓았다. 신경질을 내던 료타는 휴대전화와 액자를 집어던지고 등을 돌린 채로 잠들었다.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가려 했다. 눈을 붙일 생각도 없던 후카츠는 곧바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료타가 놀라서 맞닿은 입술을 깨물었다. 윗입술이 찢어지고 핏물 한 방울이 베개 위로 뚝 떨어졌다. 새하얀 베갯잇에 동그랗게 난 붉은 자국을 빤히 내려다보던 료타가 후카츠의 가슴을 내리쳤다. 둔중한 통증이 상체를 울렸다. 후카츠는 딱 한 번만 맞아 주었다. 그가 다시 팔을 들자, 두 손으로 낚아채고 목덜미를 깨물었다. 짧은 비명을 지른 그가 이내 후카츠의 어깨에 팔을 내려놓았다.

이 모든 일이 거짓말 같아. 후카츠는 료타를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냈다. 검지부터 하나씩. 숨을 헐떡거리던 료타가 자기 명치를 감쌌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는 울지 않았다. 오는 모습을, 자신에게 보이지 않았다. 료타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내가 살아가는 곳으로 와요.”

후카츠.

난 거기서 꿈을 찾았어요. 수없이 무너지고 후회하고 다시 일어나서 기어코 내 자리를 얻어냈다고…. 후카츠, 카즈나리. 나에게 불씨를 지폈던 모든 것이 그 땅에 있어요. 난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그가 얼굴을 묻은 어깨가 축축했다. 온도 높은 물이 스며들어서 또다시 균열을 일으켰다. 몸도 차가운 앤데, 어째서 끌어안을 때마다 이렇게 뜨거울까. 후카츠는 눈을 감고 그의 속삭임을 잘라냈다.

“그렇게 해 봐.”

“카즈, 제발.”

“네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는 갈 생각 없어.”

그렇게 미국이 좋아서 귀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면 혼자 해. 그러자 료타가 후카츠의 어깨를 밀치며 일어났다. 하얀 이불이 무릎에 걸려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혼자라니?”

“너 혼자 가라고.”

“당신을 두고 떠나라는 거예요?”

“그래.”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요?”

후카츠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나리! 그 모습을 본 료타가 뾰족한 것에 찔린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갈라졌다. 화를 내고 있지만, 그건 분명히 비명이었다.

“카즈나리!”

“난 아키타를 못 떠나. 이곳이 싫다면 그냥 이혼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과 결혼했는데. 나는 정말로, 절대 떠나지 않을 각오를 한 거예요.”

“말은 바로 해야지. 넌 이미 나를 떠났어. 아니, 나와 유미를 떠났지.”

“내가 언제.”

“삼 년 동안 네가 한 번이라도 가족을 우선으로 한 적이 있어?

“그건… 당신도 동의한 일이잖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아니면 내가 선수고 뭐고 그만두고 아키타에 처박히기를 바라요?”

“못 하겠어? 그런데 왜 나한테 그걸 바라는데?”

그때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놀란 료타가 고개를 돌렸다. 방문 바로 앞에서 유미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빠…. 숨통이 턱 막혀왔다. 아이가 그렇게 우는 소리를 후카츠 역시 처음 들었다. 삼 년 동안 질릴 만큼 들은 소리인데도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료타는 허겁지겁 달려가서 문을 열고 유미를 끌어안았다. 유미,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아빠가 미안해. 제발 울지 마. 우리 아가…. 그는 그제야 울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아이를 달래고 재운 료타는 실이 풀린 것처럼 화장실 바닥에 늘어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나오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다가 먹은 것도 없는 속을 게워 냈다. 잠긴 문고리를 뽑아낼 듯이 돌리던 후카츠는 비상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고 료타의 상체를 팔로 받쳤다.

“일어나.”

“놔….”

“몸 다 상해. 제발 가서 누워.”

“나는, 카즈, 내가.”

“료타, 숨 쉬어.”

질질 끌려 나온 료타가 바닥에 몸을 늘어뜨렸다.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나는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유미 곁에 있어 줘야지⋯. 그랬는데, 이렇게. 내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끔찍해질 수도 있었군요. 꿈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을 아이한테 보여줬어요. 카즈나리, 당신은 알았어요? 우리가 아이한테 이런 부모가 될 거라는 사실을? 료타는 벽에 등을 대고 오래도록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지독했던 새벽이 끝나고 그가 말했다.

“좋아요. 우리 이혼해요.”

“료타, 진정해. 그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야.”

“그냥 한 말은 없어요. 카즈, 모든 말은 이루어지기 마련이에요.”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으려고 했지만, 바다 냄새가 묻은 옷깃은 모래알처럼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쓰러지듯이 거실 통창에 두 손바닥을 대고 이마를 기댄 료타가 중얼거렸다.

카즈나리, 난 오늘의 나를 용서 못 할 것 같아요.

물론 당신도.

지난한 싸움이 계속됐다. 다만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반대였다. 료타가 싸늘한 얼굴로 이혼을 요구했고 후카츠는 거절하며 화를 냈다.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다가 끝내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욕설을 빌미로 또 싸웠다. 서로에게 한 파울을 셀 수도 없었다. 후카츠는 아무나 잡아서 심판으로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공정하게 심판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 실수를 저질러도 몰수패를 선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은 패를 붙잡고 서로를 계속 모욕하고 밀어내야 했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료타가 소송을 걸겠다고 소리를 지른 후에야 싸움이 끝났다.

“소송은 안 돼.”

“그럼 합의해요.”

“애 자라서 인터넷 쓰고 기사 보는 거 금방이야. 유미가 자기 부모 이름 검색할 때마다 재판장 사진 보게 하고 싶어?”

“부모가 눈앞에서 싸우는 꼴 보며 사는 것보단 낫겠죠.”

잠시 숨을 고른 료타가 덧붙였다.

“아이를 위하는 척하지 말아요. 그냥 당신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 싫은 거겠죠.”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그와 아이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였다고. 하지만 한계와 바닥을 다 드러낸 이상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했다. 체육관 벽에 기대서 멍하니 있는 후카츠에게 코치가 말을 걸었다. 감독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정신이 든 후카츠는 펜 끝으로 기록지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래요? 표정이 안 좋으시길래 아프신가 했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별일이네요.”

“그렇습니까.”

“네. 감독님은 좀, 뭐라고 해야 하지. 애들이 가끔 우리 감독님 기계가 분명하다고 하는 거 아세요?”

코치가 실없이 웃었다. 제가 이른 건 비밀로 해주세요. 워낙 완벽하시니까 존경 좀 섞어서 다들 그러는 겁니다. 뭐, 그런 소리 자주 들으셨죠? 그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다음 훈련을 시키기 위해 학생들에게 걸어갔다. 혼자 남은 후카츠는 그 말을 곱씹었다. 코치의 말이 옳았다. 학생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고, 기억에 담아두지도 않던 단어였다. 그것은 서른이 넘은 후에야 날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완벽은 무슨,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지. 사랑하는 사람 뒷바라지 하나를 못 해서 놓치는 게, 씨발⋯ 그게 어떻게 완벽한 사람이야.

어린애라서 그랬을 뿐이다. 후카츠 카즈나리도 단지 어린 청년이라, 그를 처음 만난 시절에는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이제 그 확신 가득한 물살은 없었다. 현실이 강 위로 떨어져 물길을 찌그러뜨리고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날벼락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세월이 흘러서 아이가 생기면 곧 비참함을 배워야 했다. 료타, 네가 날 가르쳤다.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나는 너로 인해 무너지는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다. 미야기 료타, 네가 이겼어.

두 번이나 네 인생의 오점이 될 수는 없다. 다시는 그 발목을 붙잡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심판 없는 삶에서 후카츠는 손을 들었다.

벤치로 돌아갈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 미야기가 유미의 두 손을 잡고 복도로 나오고 있었다. 작은 손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미야기는 아이 곁에 쭈그려 앉아서 피식 웃었다. 잘했어, 유미. 그러고는 손을 놓고 안으로 슬쩍 들어갔다. 후카츠는 눈으로 그를 쫓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딸의 머리카락을 휙 쓰다듬었다. 료타 아빠가 그렇게 인사하래? 응, 그래야 착한 어린이랬어. 아이의 팔 아래를 받치고 안아 들려고 했는데, 유미가 몸을 틀어서 쏙 빠져나갔다. 여섯 살 난 딸아이는 걷고 뛰는 걸 좋아해서 더는 아빠 품에 앉혀 다니지 않았다.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다.

아이는 곧장 주방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미야기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후카츠는 빠르게 샤워하고 젖은 머리를 완전히 말리고 나왔다. 거실에서 노는 아이를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지켜보던 미야기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 잘랐네요.”

“자르라며, 뿅.”

“네, 이제야 꼴이 좀 낫네.”

후카츠는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말이 심해. 미야기가 코웃음을 치고 옆에 놓인 찻잔을 쭉 밀었다. 무의식적으로 집어 들었더니 따뜻한 녹차 향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레몬차 안 먹고.”

“임신했을 때나 먹었죠.”

조금은 건들거리는 어조였지만,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던 송곳이 전부 떨어져 나간 듯했다. 아주 오랜만의 평화였지만 그 모든 일이 있기 전과 헷갈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미야기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두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알게 모르게 겁이 많은 애였으니까. 우리가 싸울 수 있는 한 예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겠지. 그래도 더는 고통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기 몫의 차를 홀짝이던 미야기가 거실 한편을 가리켰다. 그가 늘 사진들을 놓아두던 자리에 액자들이 돌아와 있었다. 후카츠가 깜빡 잊고 꺼내놓았던 것은 물론이고 서랍 속에 숨겼던 것도. 우리가 더는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유미에게는 우리 둘 다 가족이니까요. 그건 허락이었다. 더는 숨기지 않고 그의 사진을 봐도 좋다는 허락에 후카츠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니까. 그렇다면, 너는.

“하나 가져가.”

“난….”

미야기가 코를 찡긋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아이 사진은 있어요.”

“내 사진은 버렸다는 거네.”

“당연하지.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사진 속에서 당신이 눈을 무시무시하게 뜨고 있었으니까.”

“잘생겼다고 해줄 땐 언제고.”

“그런 콩깍지가 필요했으면 합의할 때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바늘에 쿡 찔린 것처럼 헛숨이 샜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야기가 사진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끝 액자를 차례차례 훑다가 하나를 골라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가 뺏기라도 할 것처럼 품에 안고 캐리어가 있는 방으로 도망갔다.

그날 밤 후카츠는 또다시 몰래 미야기의 방문을 열었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항상 자는 도중에 무언가를 끌어안곤 했다. 옆에 누운 후카츠나 베개가 없으면 이불이라도 말아서 다리를 올리고 잤다. 원래는 안 그랬어요. 당신이랑 얽혀서 자다가 생긴 버릇인가 봐. 그렇게 웃던 얼굴이 불쑥 기억났다. 방 한복판에 엉거주춤 멈췄던 후카츠는 이내 느릿느릿 침대로 다가갔다. 가지런히 누운 미야기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모른 척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뺨에 입을 맞췄다.

“이 정도는 용서해 줘.”

얇은 여름 이불로 그의 어깨를 꼼꼼히 덮어 주고 방을 나왔다. 셋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아침을 먹었다. 보육원에 도착하면 교사가 “아버님들, 오셨어요.”라고 인사했다. 한 번은 미야기가 대신 운전을 해주기도 했다. 하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한 농구부원 한 명과 마주쳤다. 자기 감독님과 꿈 같은 농구 스타를 알아본 녀석이 헉, 하고 놀랐다. 미야기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그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바람처럼 학교를 빠져나갔다. 몇 발짝 앞서서 체육관으로 향하는 동안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눈 깜짝할 새에 소문이 돌았는지, 저녁쯤에는 천연덕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랄한 코치가 한마디 얹었다.

“감독님.”

“조용히 하시죠.”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전 늘 똑같습니다, 뿅.”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떠들었다. 감독님, 그거 아세요? 저희도 이혼 신청서만 다섯 장을 썼습니다. 세 장은 그 사람이 찢어버렸고 두 장은 제가 숨겼다가 태워버렸죠. 지긋지긋한 일이죠. 결론이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결론이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게… 누구 하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좀 구질구질해도 뭐 어떻습니까. 서로 그런 꼴도 봐 가면서 사는 거죠. 인상을 조금 구기고 그를 바라보던 후카츠가 툭 던졌다. 제가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감독님이 잘못하셨네요.”

“…….”

주말에는 후카츠도 오전 훈련만 잠깐 봐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조용했다. 아이 방을 열었더니 유미와 료타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낮잠을 재우다가 같이 잠들어 버렸나. 좁은 아이 침대에서 몸을 웅크린 게 영 불편해 보였다. 감긴 눈꺼풀 앞에 손을 흔들어 본 후카츠는 미야기의 다리 밑에 팔을 밀어 넣었다. 침실까지 옮겨도 깨지 않았다. 그도 자신 못지않게 밤잠을 설치는 모양이었다. 새근새근 낮잠을 자는 미야기 옆에서 노트북으로 학교에 제출할 서류를 한 장 만들었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데 그가 침대에서 불쑥 손을 뻗어서 뺨을 툭 건드렸다. 홑겹 이불 사이에서 잠에 취한 얼굴이 빠져나왔다.

“왜 그러고 있어요. 불이라도 켜고 하지….”

“그냥.”

후카츠는 그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았지만,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됐다. 아니, 딱 이만큼 무르지 않을 때는 어려운 일이었다. 후카츠는 꽤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

“응….”

“집에 왜 오겠다고 했어?”

그가 작게 하품했다. 말끝이 둥글고 무뎠다. 나도, 그냥…. 빚지고는 못 살겠더라고. 미야기가 픽 웃고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한쪽 뺨이 베개에 부드럽게 눌렸다. 눈동자가 좀 더 또렷해진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손을 겹쳤다. 우리가 영광스러웠던 시대는 다 끝났다고 해도, 당신이 내게 준 건 돌려주고 싶었어요. 그때 내가 잘된 건 다 당신 때문인 것 같았거든.

“돌려주지 마.”

“카즈나리.”

“그대로 가져가도 돼. 더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어.”

연한 색깔의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는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느릿하게 뜨면서 대답했다. 못 할 거 같아요. 카즈나리, 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게 남았으니까.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코트가 나를 버릴 때까지 계속해 보고 싶어요. 그래, 예전에 당신이 한 말이 맞아요.

내가 당신을 떠났어요.

날 용서하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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