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로맨스

정대만 × 송태섭

전야 by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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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데이는 용기 없는 사람들을 위한 날인 것 같아. (용기 내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 그것도 맞는데, 우정초코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릴 수 있잖아. 상술이니 뭐니 해도 이런 날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언제 떠보겠어?

하지만 그것도 떠볼 수 있는 처지에서야 가능한 거지.

태섭은 양 손은 무거운 주제에 어깨는 가벼운 대만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만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평범한 이름 석 자는 오늘 하루종일 유행가처럼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대만아! 정대만 선배님! 저기, 대만 오빠! 운동을 (많이) 잘하고 얼굴도 (많이) 잘생긴 그가 인기가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이건 좀 과열된 거 아닌가? 송태섭이 평생 받은 초콜렛 다 합쳐도 오늘 정대만이 받은 것보다는 덜 받았을 게 분명했다. 윈터컵에서의 대활약이 원인이었나. 저 역시 얼굴도 모르는 후배에게 경기 잘 봤다며 편지와 함께 몇 박스 받긴 했는데… 핑크색 포장지의 비율을 보자면 저 사람이 받은 게 압도적이란 말이지. 질투하는 거냐고? 정반대의 심경이다.

송태섭도 정대만에게 초콜렛을 주고 싶어하는 쪽이었으니까.

윈터컵은 끝났어도 농구는 이어진다. 체육관에서 부활동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태섭은 대만이 불러세워지는 걸 딱 세 번 잠자코 기다려주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저 먼저 갈게요.”

“야! 같이 가야지! 잠깐만 기다려봐.”

대만은 허겁지겁 선물을 받아 챙기며 태섭의 뒤를 쫓았다. 태섭의 보폭을 따라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치사하게 먼저 가냐.”

“남이 고백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싶진 않네요.”

이건 100% 진심.

“고백 아니었거든.”

“아니긴 뭘. 딱 고백할 태세던데요.”

“결과적으론 아니었어.”

왜냐하면 고백하지 않았으니까 고백이 아닌 거지. 그건 그렇네, 태섭이 생각한다.

“아우 추워. 송태섭, 나 머플러 좀.”

아직은 겨울이라는 건가.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날은 제법 쌀쌀했다. 대만은 몸을 가볍게 떨며 태섭에게 상체를 내밀었다. 대강 걸쳐진 감색 머플러.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 태섭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과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대만의 머플러를 고쳐 매주었다. 지가 하지 좀. 네 손이 야무져서 좋아.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 나 신발끈 안 풀리게 잘 묶는다?

언젠가 대만은 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뭐해요! 일어나요! 태섭의 경악에도 아랑곳 않고 대만은 농구화의 신발끈을 풀더니 다시 꽉 묶어주었다.

- 됐다. 이제 평생 안 풀린다 이거.

운동장 바닥에 무릎 꿇지 말라고 한참 혼냈었나. 몇 주 뒤, 다같이 러닝을 하던 어느 아침 대만이 눈짓하며 말했다.

- 내 말 맞지? 신발끈.

어, 그러게. 진짜로 그랬다. 대만이 묶어준 신발끈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만이 태섭을 위해 한 쪽 무릎을 꿇는 일도 다시는 없었다. 당연한 걸까, 야속한 걸까.

상념은 금방 깨어진다.

“다 됐어요.”

태섭은 다시 짐을 챙겼다. 대만은 챙김을 받는 동안 얌전히 두 손 무겁게 서 있었다. 진짜 재수가 없었다. 

“추운데 뭐라도 마시고 갈래?”

“그러던지요.”

두 사람은 상점가를 걸었다. 몇 주 전부터 리본이며 하트 장식으로 현란했다. 꼬라지 하고는… 태섭도 이 근방을 한 번 서성거리다 말았었지. 어차피 진심 초콜렛을 사봤자 자연스럽게 주지도 못할 거고.

둘이서 밥은 자주 먹었어도 굳이 커피를 마시러 가는 일은 드물었기에 자주 가는 카페 같은 건 없었다. 선배가 곧 졸업이니 단골 카페 같은 건 이제 생길 수도 없겠지. 졸업. 요즘은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제가 바라는 건 기회가 아니라 단념인데도. 왜 자꾸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이룰 기회를 쫓게 되는지.

“으… 추운데 아무 데나 들어가요.”

대만이 고른 아무 카페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작고 조용한 카페. 다른 손님은 없었다. 아, 이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다. 태섭은 빠르게 자리를 잡는 대신 메뉴판을 훑었다. 시그니처 메뉴: 쇼콜라 라떼.

“그거 마시려고?”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대만이 물었다.

“전 라떼요. 선배는요?”

“난 저거.”

“엥? 선배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따라 마시고 싶을 수도 있지.”

“초콜렛을 그렇게 많이 받아놓고서요?”

거참 이상하네. 대만은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들었다.

“계산할게요.”

“뭐예요? 왜 선배가 사요?”

“왜?”

“저번에도 햄버거 사줬잖아요.”

“그랬나.”

“그랬죠. 이번엔 제가 살게요.”

태섭은, 쉽게 말하면 빚지고 못 사는 타입. 더치페이를 하던가 본인이 내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대만은 가끔 그런 태섭을 신경쓰이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그 따끔따끔한 감정은 주로 다음을 기약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이 다른 부원들보다 가까워진 데엔 그런 성향 차이가 일조한 셈이다.

태섭은 쟁반 위의 음료를 내밀었다.

“자요, 선배 거.”

“땡큐.”

스팀밀크와 녹인 초콜렛을 섞고 휘핑크림을 얹어 자바칩 토핑까지 잔뜩 뿌린다. 우와, 보기만 해도 혈당 올라. 데이트할 때도 안 시킬 법한 메뉴를 태연히 마시고 있는 대만을 보며 물었다.

“맛있어요 그거?”

“맛있지. 누가 사준 건데.”

정말로? 정대만이 이상하게 굴 때는 늘 무슨 꿍꿍이가 있다. 대만은 휘핑을 크게 떠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송태섭한테 발렌타인 초코도 다 받아보네.”

“네? 그게 어떻게 발렌타인 초코예요. 커피 산 거지.”

“오늘 발렌타인 데이고. 여기 초콜렛 들었고. 그럼 발렌타인 초코 아냐?”

아, 이거군. 건수 잡아서 놀려먹겠다는 거였다.

“…아, 네~ 선배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근데 운동부 후배한테 의리 초코 받아서 뭐에 쓰게요?”

태섭이 심드렁한 듯 말하자 대만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의리 초코야?”

“네?”

“아니잖아.”

“뭐라는 거야, 이 사람.”

대만이 갑자기 널 위해 준비했다며 하트 박스를 내밀어도 이만큼 놀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태섭은 제 표정에 일순 당혹감이 밀려왔다 빠져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놀려 먹는 건가? 어떻게 반응해야해? 태섭의 머릿속이 빠르게 팽팽 돌았다.

“옛다. 운동부 선배가 주는 초콜렛 받아라.”

태섭은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내려다 보았다. 하트 모양 박스. 핑크색 리본. 핑크색 리본? 핑크색 리본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나? 이번엔 아예 생각이 멈춰버렸다. 아, 얼빠진 얼굴. 이건 정대만 전문인 줄 알았는데… 대만은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뭔데요…”

“안 열어봐?”

만약, 만약 이 모든 수작질의 의미가 내가 상상하는 게 맞다면… 열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치 빨개진 귀 끝이 지금 태섭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듯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언제부터 맞닿아있던 거지? 갑자기 몰아치는 감정들에 생각이 가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본을 풀었다. 십자로 교차된 부분을 한 번 더 풀어낸다. 속으로 심호흡을 한다. 끌어낸 리본을 옆으로 밀어내고 박스를 열려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왜 안 열어? 대만이 눈으로 물었다.

태섭은 흐름에 올라타기로 했다.

“저기요. 제가 먼저 준 거예요. 알아요?”

“뭘?”

기어이 제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야 말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똑바로 들려줘야지.

“발렌타인 초코, 말이에요. 제가 선배보다 한 발 빨랐다고요.”

대만은 드디어 제게 배달된 진심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답변을 내놓는다. 

“하루종일 너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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