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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택하는 행복은

행복해지고 싶니?

某日 by 銘

土屋 アンナ - 黒い涙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피부에 입은 상처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되지만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은 배며 가슴의 안쪽은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곳이라, 충격을 입은 장기는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져서 위액까지 전부 게워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찢어질 것 같은 몸을 끌어안고 태섭은 앞서 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홀몸으로 세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녀의 등이 오늘따라 더 힘들고 작아 보였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좀 잠잠해지나 싶었던 하나 남은 아들이 또다시 얼굴이 엉망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집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심정도 말이 아닐 것이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들으며 태섭은 제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항상 엄마를 실망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못된 아들. 형이 살아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형은 아빠가 돌아가신 후 먼저 주장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을 정도로 의지 되는 사람이었는데, 엄마의 등을 토닥여줄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나는. 송태섭은.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태섭은 아픈 배를 꾹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속이 답답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게 아직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내장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집에 오자마자 태섭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사라졌다. 오빠, 약은 먹고 들어가야지! 여동생의 목소리에도 그냥 탕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방 한가운데에 테이프만 붙여 놓고 치우지는 못한 상자가 보였다. 버려진 모양새로 덩그러니 있는 꼴을 보자 태섭의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태섭은 거친 손길로 상자를 책상 밑에 쑤셔박았다. 허리를 숙여 굳이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 영영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 봉인했다. 하지만 원인을 눈앞에서 치워 버렸는데도 끓어오르는 속은 식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악을 쓰고 싶었다. 심장과 위를 지나 폐까지 차오르는 이 뜨거움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태섭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속도를 높여 달리면 맞을 수 있는 차가운 바람이 답답한 가슴을 뻥 뚫리게 하고 뜨겁게 아픈 울음을 식혀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스로틀을 잡고 속도를 올려도 가슴은 뚫리지 않았다. 뜨거움도 식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노이즈가 낀 회색의 기억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다. 멀어지던 낚싯배가, 검은 옷을 입은 등을 토닥이던 형이, 방을 치우다 무너져 울던 엄마가, 피투성이가 된 대만의 얼굴이, 발에 채여 굴러가던 농구화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부아아아앙, 혹사당하는 엔진이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속도를 올릴 수 없을 만큼 올리고 거대한 트럭도 순식간에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터널을 나온 태섭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태섭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삭막한 회색빛의 도로가 아니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옥수수밭 사이로 곧게 뻗은 일직선의 도로와 그 너머에 아름답게 펼쳐진 푸르고 투명한 바다가 있었다. 열두 살의 태섭이 놓아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의 바다였다. 찬란한 여름의 햇살을 맞으며 태섭은 그리운 얼굴로 슬프게 웃었다. 돌아가고 싶어. 저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 영원히 이 풍경 속에 잠기고 싶어.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니?」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노이즈가 낀 것 같으면서도 맑고, 멀리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가까이에서 들리고, 한 명인 것 같으면서도 여러 명이며, 또 여자인 것 같으면서도 남자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태섭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따지기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고, 회색빛의 도로를 달리다가 뜬금없이 고향의 바다를 마주한 이 시점에서 이상한 목소리 따위가 뭐가 대수냐 싶었으니까. 그래서 태섭은 대답했다.

“응. 행복해지고 싶어.”

형을 죽이고 엄마를 힘들게 만든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괜한 이유로 시비에 걸려 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그만 겪고 싶었다. 엉망인 3학년들이 경기를 망치는 걸 봐야 하는 답답함도 그만 느끼고 싶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지 않는 선배와 연습날마다 말씨름하는 것도 그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태섭을 일으켜 세웠던 구원자가 절망스럽게 무너진 모습을 그만 보고 싶었다. 내민 손을 거절당한 아픔을 그만 느끼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태섭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좋아. 그러면 널 행복하게 해줄게.」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앞이 새하얗게 밝아 왔다.


귀를 찢을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태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에 비친 것은 아주 익숙한 천장이었다. 어두운 색의 벽지에 줄 스위치가 내려온 원형의 등. 태섭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옆에서 알람시계가 제 존재를 과시하며 미친듯이 울고 있었다. 태섭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알람시계를 껐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사이에서 그는 멍하니 방바닥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지?

조금 전까지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경찰이 봤더라면 곧바로 사이렌을 켜고 뒤쫓을 만 했던 속도로 차와 차 사이를 곡예비행하듯 달렸다. 그러다가 고향의 바다를 보았다. 그런데 눈을 떴더니 이번에는 제 방이다. 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온 거지? 꿈을 꾼 건가? 꿈이라면 대체 어디부터가 꿈이었던 거지? 옥상에서 잔뜩 얻어맞은 것?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것? 아니면 오토바이를 탄 것? 태섭은 더듬더듬 제 몸을 만져보았다. 대만의 주먹에 잔뜩 얻어맞았던 얼굴부터 그 무리들에게 잔뜩 걷어채였던 가슴과 배, 다리까지 전부 더듬었지만 태섭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찢어진 흔적도 멍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멍하니 제 몸만 더듬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태섭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이불로 몸을 가렸다.

“태섭아, 안 씻어? 학교 안 가?”

남자 목소리? 태섭은 긴장했다. 이 집의 남자는 태섭 혼자 뿐이다. 몇 없는 친척들도 전부 고향의 섬에 있고, 아라든 엄마든 누군가를 집에 데려올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누구 거지? 태섭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은 그 문짝 만큼이나 커다란 키와 덩치를 가진 청년이었다. 애매한 길이라 더 삐죽거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고 있는, 송태섭과 아주 닮은 얼굴을 가진 청년. 그 얼굴을 본 태섭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태섭은 이것과 비슷한 얼굴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아주 오랫동안 사진조차 보지 못했지만, 굳이 그런 매개체가 필요 없이도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되새겼던 기억 속의 얼굴이었으니까. 태섭은 이제는 눈동자 뿐만 아니라 제 손까지 후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훨씬 골격이 진해지고 선이 굵어졌지만 눈앞의 사람은 기억 속 인물이 확실했다. 태섭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

“응? 왜?”

“진짜 형이야…? 정말로? 준섭이 형이 맞아? 송준섭 맞아?”

“그럼 내가 송준섭이고 네 형이지 또 누구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던진 질문에 준섭은 여상한 목소리로, 그러나 의아한 기색을 담아 되물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태섭은 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툭,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걸 신호로 멈출 수 없는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높게 세워져 있던 댐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태섭의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쏟아 내기라도 할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형, 혀엉……. 준섭이 형…….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태섭의 모습에 준섭은 수건을 내팽개치고 당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목놓아 우는 동생을 넓은 품에 한가득 안고 떨리는 등을 토닥였다.

“왜 그래, 태섭아.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울지 마. 울지 마. 괜찮아, 울지 마. 형 여기 있어. 괜찮아.”

태섭을 달래는 준섭의 목소리는 아주아주 다정했다. 동생과 놀아주던, 농구 코트에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준섭은 울지 말라고 했지만 태섭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목소리가 제 귓가에 실제로 들리는 것에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꿈인 걸까.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인 걸까. 하지만 저를 단단히 안고 있는 두꺼운 팔도, 등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도, 연신 제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전부 피부에 곧바로 와 닿는 것이었다. 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송태섭에 몸에 닿는 송준섭은 정말로 살아 있었다. 맥박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형태로. 그래서 송태섭은 더욱 울었다.

태섭은 몇십 분을 더 울고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눈은 퉁퉁 붓고 코는 잔뜩 막혀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준섭뿐만 아니라 아라와 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까지 받았다. 아주 나쁜 꿈을 꾸어서 그렇다며 대충 얼버무리고 욕실로 들어온 태섭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머리를 감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젖은 얼굴을 한 거울 속의 소년은 바로 어제 아침에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겼다. 무감하게 반쯤 뜨인 눈, 조금 튀어나온 통통한 입술, 비뚜름한 눈썹, 햇빛을 조금만 받아도 쉽게 그을리는 피부,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밀고 곱슬거리는 윗머리와 앞머리만 남긴 헤어스타일. 울어서 퉁퉁 부은 눈만 빼면 태섭이 익히 아는 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거울 속의 소년은 왼쪽 귀의 피어스가 없었다. 태섭은 어색하게 제 귓불을 매만졌다. 피어스만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뚫은 적이 없는 것처럼 구멍조차 만져지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되나.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한몸처럼 끼고 있는 것이 흔적조차 없으니 뭔가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피어스가 있어야 할 자리를 손톱으로 긁던 태섭은 이윽고 한숨을 쉬며 욕실장을 열었다. 매일 쓰던 검은색 왁스 통이 있었다. 왁스의 뚜껑을 열고 태섭은 평소와 같이 머리를 올렸다. 세팅을 마치고 나자 이제 거울 속에는 완전해진 송태섭이 서 있었다. 그걸 보자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 속에서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왁스 묻은 손을 씻은 태섭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식탁에 앉아서 아침을 먹던 준섭과 아라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곧 두 남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특히 송아라는 누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상을 팍 쓴 아라가 물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뭐야, 송태섭?”

“뭐가.”

“그 머리 뭔데. 양아치 같게.”

하? 이번에는 태섭이 인상을 썼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한 그 순간부터 태섭은 이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다. 어린 인상을 지워서 중학생 때처럼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라는 처음 이 머리를 하고 왔을 때도 불량학생 같다며 싫어하긴 했었다. 하지만 벌써 계절은 여름이고, 태섭이 헤어스타일을 바꾼 때로부터 시간도 꽤 지났다. 오히려 익숙해졌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그런 대사를 또 내뱉는 건 역시나 이상했다.

“그러게, 태섭아. 웬일로 머리를 올렸어? 왁스는 생전 써본 적도 없었으면서.”

그런데 송아라뿐만 아니라 부엌에 있던 엄마까지 이런 발언을 한다면. 형 따라하고 싶다고 아랫머리 다 밀더니 이제는 이마 한 번 까보고 싶어진 거야? 준섭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들려오는 모든 말이 낯설었다. 송준섭이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서 송태섭이 피어스도 하지 않고 머리조차 올려보지 않은 세상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틈도 없었다. 작은오빠 안 같아! 인상 더러워 보인다고! 아라가 다시 발칵 짜증을 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동생의 성화에 머리를 다시 감고 나오면서 송태섭은 정말 모든 것이 매우 잘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삼남매가 함께 등교를 하러 나선다는 건 더 얼떨떨했다. 이따 보자, 공부 열심히 하고. 해남대 학교 점퍼를 입은 준섭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 갔고 태섭과 아라는 학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태섭의 위장이 속절없이 울렁거렸다.

다행히 학교는 기억하던 것과 똑같았다. 교문 앞의 명패도, 금 간 벽돌도, 교정 한쪽에 크게 자리잡은 벚나무도 전부 동일했다. 그늘 없는 운동장을 지나 체육관 쪽으로 가면서 태섭은 오늘은 드리블 연습을 100번은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다. 땀을 잔뜩 빼고 나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체육관 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태섭은 닫힌 문 안에서 들리는 탕 탕 소리를 들었다. 발을 멈췄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치수 선배인가?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채치수는 전국제패를 꿈꾸고 농구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농구를 할 정도로 운동계의 스케줄이 몸에 배인 사나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지? 태섭은 농구부원의 명단을 머릿속으로 쫙 뽑았다. 하지만 송태섭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농구에 미친놈이진 않았다. 아니면 농구부원이 아닐 수도? 그런데 농구부원이 아닌데 농구공을 튕길 일이 있나. 태섭은 조금 긴장하며 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키가 큰 남학생의 뒷모습이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185 부근은 되어 보였다. 농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신장. 근육이 잘 잡힌 탄탄한 몸과 길게 뻗은 팔다리. 커다란 손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꽤 빠르고 섬세한, 좋은 드리블. 하지만 이 등은 태섭이 처음 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인물은 조금 더 드리블 연습을 이어가더니 공을 퉁퉁 튕기며 사이드라인으로 향했다. 적당한 위치에 서더니 튀어오른 공을 집어들고 손 안에서 한 번 빙그르르 굴렸다. 그리고 슛. 태섭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 3점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제대로 된 기억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 시절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눈부신 기억. 튕겨나간 제 공을 잡아다가 몇 번이고 3점을 던지던 하얀 옷의 사람. 즐거워하는 얼굴로 디펜스 자세를 취하던 연상의 소년. 비참하던 어린 송태섭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함께 하는 농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 속의 바로 그 슛. 태섭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이름을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대만……? 그러자 3점을 던진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정대만이었다. 어제 송태섭과 거나하게 주먹다짐을 하고 결국 앞니 두 개를 날려먹은 바로 그 남학생이 이곳에 서 있었다. 중학생 시절 길거리 코트에서 마주쳤던 때와 같은 짧은 머리로, 그때처럼 순하고 올곧지만 어딘가 장난기가 어려 있는 다정한 눈으로.

“뭐냐, 송태섭. 선배 이름을 막 함부로 부르기나 하고.”

공을 주워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대만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책망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너무나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친한 사이에서 으레 볼 법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타박이었다. 송태섭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험악하게 시비를 걸던 정대만이 아니라 나중에 또 같이 농구를 하자고, 그때는 날 이겨보라고 말했던 정대만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보니 멍도 상처도 없고 이빨마저 깨끗하게 그대로였다. 송태섭은 또다시 혼란을 느꼈다. 야, 왜 그래? 너 괜찮아?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태섭의 얼굴을 보고 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태를 살피려고 들이밀어지는 얼굴에 화들짝 놀란 태섭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저 라커룸에 뭘 두고 와서요. 태섭은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 이상했다. 모든 게 다 이상했다.


 

며칠이 지났다. 송태섭은 여전히 이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잠이 들어 깨어나고 나면 다시 원래의, 제가 알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알람시계를 끄고 이불 아래에서 미적대고 있으면 어김없이 송준섭이 방문을 열며 그를 깨웠고 아침 연습차 체육관에 가면 정대만이 먼저 와 있었다. 없어야 할 사람들이 송태섭의 일상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지 5일째가 되었을 때, 태섭은 결국 노트를 펴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제 기억과 달라진 점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첫 번째. 송준섭은 살아 있다. 그는 무사히 바다 낚시에서 돌아왔다. 중학교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지역 대표로서 전국대회에도 올라갔다. 그를 눈여겨 본 해남의 감독이 진학을 제의했다. 학교 재단을 설득해 따 낸 장학금까지 내걸었다. 준섭을 위해 모든 가족들이 고향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대 소속으로서 대학 리그에서 뛰는 중이다. 그는 대단한 선수고 뛰어난 올라운더다. 원래는 만화책이 꽂혀 있던 거실장에는 송준섭이 받아온 상패와 메달이 즐비하다.

두 번째. 정대만은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지역 대회 MVP를 받은 그는 무석중에서 북산으로 진학했댜. 그는 북산 농구부의 에이스다. 압도적인 실력과 재능으로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그는 훌륭한 슈터이고 스코어러다. 북산을 전국대회에 올려보낼 무기다. 2학년이 된 그는 더욱 날카롭게 갈고닦은 실력으로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송태섭과 농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 번째. 송태섭은 북산에서 인정받는 선수다.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그는 명실상부한 북산의 주전 가드로 대우받고 있다. 그가 던지는 패스는 정확히 적재적소에 꽂힌다. 그는 득점을 만들어 내는 시작점이다. 송태섭은 북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포인트 가드다.

거기까지 적어내려간 태섭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제가 적은 것을 한 글자 한 글자 읽던 태섭은 거친 손길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긴 한숨이 흘렀다. 역시 이상했다. 왜냐면 이건 마치... 송태섭이 바랐던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같은, 꿈과 같은 세계이자 존재할 리가 없는 환상 그 자체였으므로.

하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일상은 일상이었다. 크게 달라진 몇 가지의 사실을 제외하면 태섭의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고 오후 8시가 넘으면 하늘은 어두워졌다. 그 시간 변화에 따라 태섭은 수업을 듣고, 농구를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거기에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송태섭은 그냥 이곳에서 계속 살아갔다. 돌아간다…는 표현은 좀 우습지만, 어쨌든 원래 알고 있던 설정으로 세상을 되돌리는 방법 같은 건 몰랐으니까, 그냥 자연의 법칙을 따라 해가 뜨면 일어나고 달이 뜨면 잠을 잤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점점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 태섭은 이제 준섭이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걸 봐도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불쑥 방에 들어온 준섭이 옷을 갈아입느라 제 앞에서 셔츠를 벗어던져도 놀라지 않았다. 형제가 옷장을 같이 쓰는 사이에 뭐가 대수냐며 마음에 드는 준섭의 옷을 몰래 빼내서 입었다. 준섭에게 수업과 훈련이 없는 날이면 같이 원온원을 했다. TV 앞에 붙어 함께 농구 중계를 보았다. 준섭이 마시던 맥주를 한 모금 뺏어 먹었다가 쓴맛에 인상을 찌푸려 잔뜩 놀림을 받기도 했다. 오빠가 하나 더 있는 아라도 천방지축 막내 여동생 그 자체였다. 준섭은 꼬박꼬박 큰오빠라고 불렀지만 태섭은 작은오빠라는 호칭보다 송태섭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더 많이 불렀다. 그래놓고 부탁이 있을 때는 꼭 태섭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럴 때면 태섭은 잔뜩 성질이야 부렸지만 결국 여동생이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었고, 준섭은 태섭이 아라에게 너무 무르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런 식으로 삼남매가 뒤엉켜 다투는 집은 항상 시끄러웠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누군가는 항상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는 두 명이 말다툼을 했다. 오랫동안 보기 힘들었던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별것 아닌 일로 말씨름을 하는 세 자녀를 보며 엄마는 매일같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삶의 고단함 대신 아이들을 보며 얻는 기쁨이 묻어났다. 정말이지 그림 같이 화목하고 행복한 4명의 가족이었다.

태섭은 또한 달라진 체육관의 풍경에도 금방 적응했다.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그런지 오히려 이쪽의 적응이 더 빨랐다. 이 세계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태섭은 1등으로 도착한 정대만에게 먼저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면 정대만도 같이 인사를 해줬다.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다. 휴식 시간에는 하나 남은 포카리를 나눠 마시다가 간접키스를 했다고 진저리를 치며 장난스럽게 옥신각신했다.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매점빵을 같이 먹기도 했고 훈련 후 수돗가에서 물장난도 쳤다. 대만과 함께 아침 연습을 하는 시간을 기다렸다.

코트 위에서 그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대만이 제 패스를 받아 득점으로 연결시키는 걸 보면 가슴이 벅찼고 미리 맞춰두었던 사인으로 깜짝 페이크가 먹히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외톨이기만 했던 송태섭이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는 감각 자체가 짜릿할 만큼 좋았다. 정대만과 함께 하는 농구가 좋았다. 좋아서 더 몰입했고 좋아서 더 열심히 했다. 태섭의 실력은 쑥쑥 늘었다.

두 사람에 더해 센터인 채치수까지 삼각편대로 활약한 북산은 그 해 최고의 성적을 냈다. 지역대회를 무사히 통과하고 전국에 진출했다. 너희 학교가 해남을 꺾었다면서? 이걸 축하해 줘야 하나, 졸업생으로서 화를 내야 하나. 준섭의 장난스러운 칭찬을 맘껏 즐겼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이어지는 고된 훈련에도 송태섭은 매일이 즐거웠다. 농구가 재미있었다. 이런 게 농구라면 정말 평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야, 송태섭.”

자냐?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대만이 허리를 숙여 코트에 대자로 누워 있던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천장의 조명이 눈부셔 눈을 감고 있던 태섭이 스르르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곧장 보이는 대만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괜히 미운 말을 내뱉었다. 네, 선배가 하도 늦게 와서 지겨워가지고 좀 졸았어요. 참 나, 웬일로 하루 나보다 일찍 나와 놓고는 엄청 유세 부린다, 너. 됐으니까 연습이나 해요. 태섭이 몸을 일으키자 대만이 손을 내밀었다. 그 단단하고 큰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태섭은 명치에 꽉 힘을 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쿵쾅거리기 시작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대만과의 아침 연습 시간은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유용했다. 정대만은 좋은 코치였다. 모든 좋은 선수가 다 좋은 지도자인 건 아니지만, 중학생 때의 짧은 만남에서도 느꼈듯 대만은 제가 파악한 것을 섬세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태섭의 약점이었던 점프슛도 대만과 함께 하면서 점점 성공률이 올라갔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던져도 너댓 개는 튕겨 나갔지만 열에 일곱여덟은 튕겨 나가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래도 날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어. 나는 넣는 족족 거의 들어가니까. 뒤이어 따라오는 자기 자랑은 정말 재수없었지만. 하지만 태섭은 대만의 그런 잘난 척이 싫지 않았다. 아니, 잘난 척뿐만 아니라 이 제멋대로고 막무가내지만 뛰어난 선수인 정대만이라는 사람 자체가 싫지 않았다. 어쩌면 좋았다. 선후배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청사과 같은 풋풋한 감정으로.

대만은 태생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영향력을 미치는 뭔가가 있는 인물이었다. 농구를 포기하지 않은 정대만은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후배, 동기, 선배를 가리지 않고 모두와 허물없이 잘 지냈다. 곱슬머리의 재수없는 3학년 선배도 송태섭과 채치수는 싫어했지만 정대만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대만에게는 그 어떤 재수 없는 소리도 어휴, 하며 웃고 넘겨줄 수 있는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농구를 포기한 정대만이 싸움을 지지리도 못하는데도 패거리 사이에서 리더 대접을 받던 이유가 이거였겠거니, 하고 태섭은 짐작했다. 그리고 정대만의 그런 매력은 송태섭까지도 제게로 끌어당겼다.

굳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때문이 아니더라도 태섭은 대만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대만은 배척당해 벽을 세우던 사람에게 성큼 다가와 같이 농구하자고 손을 내밀던 소년이었고, 합 맞출 사람 하나 없이 답답하게 어긋나는 농구 연습을 이어가던 사람에게 언제든 공을 맡길 수 있다는 든든한 신뢰를 안겨준 선수였다. 농구를 포기할 생각 따위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이었다. 태섭이 힘들 때마다,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그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태섭은 제게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일단 같은 성별이라는 것이 첫 번째, 정대만이 인기가 많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대만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넘쳐났다. 교내에서도 예쁘기로 소문난 도서부의 여학생부터 시작해서 옆 학교의 미인 선배와 대만의 모교인 무석중의 귀여운 후배까지, 누가 봐도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대만을 좋아했다. 그에 비해 태섭은 별로 특별히 내세울 게 없었다. 태섭이 본인의 스타일에 큰 자신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같은 성별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난 것도 아니었고 성격이 붙임성이 좋거나 사근사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태섭은 그때의 소년과 겨우 같이 하게 된 농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마음을 드러냈다가 거절당해서 껄끄러워짐과 동시에 코트에서 신뢰할 사람이 없어지는 게 더 싫었다. 대만과 계속 함께 농구를 하고 싶었으므로 태섭은 제 마음을 숨겼다. 평생 고백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태섭은 제 귀를 의심하며 눈앞의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둘만의 아침 연습을 끝낸 대만이 이따가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얼굴 좀 보자길래 알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부활동을 가기 전에 약속장소인 벚나무 아래로 나갔더니 대만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태섭은 대만이 그런 얼굴을 하는 걸 처음 봤다. 답지 않게 쫄아 있는 것이 우스워 할 말이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냐고, 농구라도 그만둘 생각이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이란.

“내가 널 좋아한다, 태섭아.”

뭐? 태섭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되게 오랫동안 고민했어. 이게 정말 맞는 감정인가 하고.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라서, 결국에 확신했다. 후배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네가 좋다, 태섭아. 예전부터 그랬어. 네가 나랑 사귀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대만은 긴장에 이어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잔뜩 빨개진 귓바퀴와 뺨이 그가 이 고백에 진심임을, 정말로 사랑에 빠진 고등학생임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던 사람의 고백을 들은 지금, 태섭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푸르디푸른 높은 가을 하늘과 알록달록 예쁘게도 단풍이 든 벚나무. 적당히 따뜻한 햇살과 적당히 선선한 공기. 바람이 불면 빨갛고 노랗게 물든 이파리가 아름답게 흩날린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교정, 실력 좋은 감독이 공들여 연출한 청춘영화의 중요한 고백 장면인 것만 같은 이 상황. 그러나 모든 게 이질적이다. 어딘가 어긋나 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분명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현실에 존재한다. 마치 이 세계가 송태섭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주려 하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꿈, 그래, 꿈.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송준섭이 살아있고 정대만이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고 재수없는 3학년 선배가 1학년이 주전이 되는 걸 보고도 조용히 닥치고 심지어는 승산 없던 짝사랑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지기까지 하는 이런 건 현실일 수가 없다. 갑자기 겁이 났다. 본래라면 허락되지 않았을 비현실적인 행복이 밀어닥치는 것이 두려웠다. 태섭아? 대만이 대답을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송태섭은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도망쳤다. 교문을 뛰쳐나가 정신없이 달렸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건 꿈이야. 나는 대체 얼마 동안 꿈을 꾸고 있었던 거지?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됐지? 엄마는? 아라는?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꿈에서 깰 수 있지?

발 닿는 대로 정신없이 달려 도망친 곳은 집앞의 바다였다. 고향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투명하고 푸르러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가 태섭의 앞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피맛 나는 목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섭은 그 이질적인 바닷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도 꿈이야. 태섭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행복해지고 싶다 하지 않았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태섭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그 이상한 목소리였다. 태섭이 놀라거나 말거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행복하지 않았어? 그랬을 텐데.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세계였잖아.」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이상해. 이건 꿈이잖아, 현실이 아니잖아.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연막을 쳐도 결국엔 다 환상이고 신기루일 뿐이잖아. 목소리가 웃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일 수도 있어.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행복하게 해줄게. 잃어버린 가족도, 사랑도, 명예도, 즐거움도, 모든 게 다 네 거야. 여기는 너를 위해 준비된 세계야. 여기에서라면 너는 계속해서 행복할 수 있어. 그게 싫으니? 정말 돌아가고 싶어?」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태섭은 망설였다. 분명 이 꿈에서 벗어나겠다고 해야 하는데,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해야 하는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태섭은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행복했다. 단란한 집도 좋았고 마음껏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농구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태섭의 현실은? 형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은 여전히 짙었고 엄마와는 사이가 서먹했다. 농구를 할 이유도 가치도 없었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태섭이 머뭇거리기만 하며 한동안 대답이 없자 목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시간을 조금 줄게. 그 동안 충분히 생각을 해 보렴. 하지만 사흘 뒤, 모레에는 선택을 해야 해. 이 꿈의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고를 것인지, 아니면 고통이 산재할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은 무를 수 없어. 신중히 고민하렴.」

그리고 목소리는 사라졌다. 해변가에 덩그러니 남겨진 태섭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갑자기 주어진 사흘 간의 유예가 오히려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태섭은 그날 저녁을 걸렀다. 학교에서 점심을 많이 먹어 입맛이 없다는 이유였다. 내일도 새벽부터 연습하러 나가야 한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밖에서는 아직 가족들의 생활소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태섭은 방의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혼자 있어야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좀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온 준섭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이부자리 옆으로 와 동생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열은 없는데……. 혼잣말이 들렸다. 태섭아, 자?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최대한 고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동안 태섭을 내려다보던 키 큰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준섭이 다시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태섭은 눈을 떴다.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몇 년은 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처음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 태섭은 고향보다 훨씬 추운 겨울에 심한 감기를 앓았다. 엄마는 일 때문에 태섭의 간호를 제대로 해줄 수 없었고, 감기가 옮을까 아라는 친구네 집에 며칠 맡겨졌다. 태섭은 낮 동안 약을 먹고 혼자 물수건을 얹은 채 끙끙 앓아야 했다. 축축 처져 기진맥진한 몸과 찢어질 것 같은 목,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막히는 코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때 느껴야 했던 외로움이었다. 태섭은 아직 손바닥의 감촉이 남아있는 이마를 가만히 문질렀다. 이 손이 그때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러면 좀 더 행복했겠지. 나도, 엄마도, 아라도.

그러면 이제는 아플 때 이마를 짚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이곳에 남는 게 맞는 걸까?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서는 또 Yes라는 대답이 선뜻 안 나왔다. 그건 본능적인 거부감에 가까웠다. 환상은 그래봤자 환상일 뿐, 제가 속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님을 잘 아는 사람의 반발심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게 두려웠다. 엄마의 실망한 한숨을 듣는 것도 무서웠고, 폭력의 고통도 무서웠다. 학교에서 정대만 패거리를 마주칠 때마다 느끼게 될 무력감과 괴로움도 겁이 났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거야, 송태섭. 여기에 남아있는 것도 이상하고 돌아가는 것도 겁이 나면 뭐 중간에 끼어 있기라도 할 셈이냐? 이런 것도 하나 확실하게 못 고르냐. 넌 대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마음속의 또 다른 송태섭이 답답하게 구는 송태섭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약한 곳을 정확히 찌르는 비난에 숨을 쉬는 게 고통스러웠다. 태섭은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첫날이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다음날에도 태섭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는 아침 연습을 가지 않았다. 대만의 고백에 대답도 하지 않고 도망쳐 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그런 얼굴을 봐 놓고도 뻔뻔하게 평소처럼 연습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해 줄 자신은 더더욱 없었고. 당장 이틀 뒤의 제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는 마당에 좋다 싫다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래서 집에는 평소처럼 연습을 간다고 말을 해놓고 해변으로 갔다. 이질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그 자리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바다를 본다고 어지러운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너른 수평선이라도 봐야 좀 살 것 같았다. 손목시계가 9시 20분을 가리키고 나서야 태섭은 모래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공식 집합시간인 10시까지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체육관에서 다시 만난 대만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겸연쩍은 것 같기도 했고, 자존심이 잔뜩 상한 것 같기도 했다. 대만의 시선이 태섭의 옆얼굴과 등 뒤를 계속해서 집요하게 따라왔다. 시선을 피하려고 슬그머니 치수 뒤에 몸을 숨기거나 한나와 따로 떨어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면 더했다. 사람 하나 뚫겠구만. 그런 시선 때문에 더 피하게 된다는 건 알고 저러는 걸까? 대만은 결국 준호에게 한소리를 듣고 나서야 태섭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태섭은 여전히 연습 시간 내내 저를 벗겨먹을 것만 같은 시선을 간간이 느껴야만 했다.

태섭은 끝끝내 그날 대만이 제게 말을 걸 타이밍을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존재감을 지우고 물 흐르듯 제 할 것만 하고 사라지는 것은 중학생 시절 터득한 기법 중 하나였다. 저를 괴롭히는 학생들의 눈에 띄기 전에 먼저 모습을 감추려고 익혔던 거였는데, 눈에 안 띄어도 안 띈다는 이유로 더 시비가 걸리는 걸 보고는 다 때려쳤었다. 하지만 이미 익힌 게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태섭은 오랜만에 중학생 시절의 경험을 살려 대만을 용케 피했다. 그 꼴이 우습다는 건 알았지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에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웬일로 준섭이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집에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태섭에게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준섭이 고개를 까딱했다. 어, 왔어? 형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훈련이 일찍 끝나서. …정말 웬일이네.

“태섭아.”

방으로 들어가려던 태섭을 부르며 준섭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원 온 원 하러 갈래?”

이미 학교에서 실컷 농구를 하고 온 농구선수들이 집에 와서까지 농구를 한다는 건 객관적으로 좀 우스운 일이긴 했다. 언젠가 아라도 그렇게 농구를 하는 데도 안 질리냐고 물어봤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훈련과 대회를 위한 농구와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농구는 또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태섭은 그러자고 대답하고 준섭과 함께 야외 코트로 나갔다. 어쨌든 몸이라도 움직여야 뒤숭숭한 기분을 좀 떨쳐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몸을 쓰다 보면 오히려 좋은 생각이 날 때도 많았으니까. 선공 네가 할래? 준섭의 말에 태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기 편하게 바지 천을 조금 잡아 올리고 디펜스 자세를 취한 준섭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와 봐! 태섭이 피식 웃었다.

태섭은 무참히 깨졌다. 던지는 슛은 족족 블락 당했고 파고들려는 시도도 매번 가로막혔다. 턴오버도 몇 번 당했다. 반면에 준섭이 쏘는 슛은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림에 빨려 들어갔다. 태섭의 디펜스를 여유롭게 돌파했다. 마치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골대를 향해 돌진했다. 세 번째 판이 끝나고 태섭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코트에 주저앉았다. 낮 동안 열기를 실컷 머금었던 아스팔트는 해가 지고 나서도 뜨끈뜨끈했다. 그 앞에 같이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며 준섭이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무슨 일 있어?”

“뭐가.”

“네 농구가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뭔 소리야.”

“수비에 가로막히면 자꾸 볼 돌리면서 피하려 든다고, 너. 한동안 안 그랬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었잖아. 등을 보이지 말고 압박을 하라고. 상대를 기세로 눌러야지. 준섭은 그렇게 말하면서 태섭의 무릎을 툭툭 쳤다. 도망치지 마, 태섭아. 태섭은 고개를 내려 준섭이 두드린 제 무릎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 준섭의 강한 디펜스를 피해 보려다가 오히려 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아스팔트에 쓸린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살갗이 빨갛게 일어난 상처를 눈으로 직접 보니 쓰라린 통증이 확 몰려왔다. 태섭은 피맺힌 무릎을 움켜쥐었다. 속살이 흉하게 드러난 피부에 다른 것이 닿자 쓰라림은 더 심해졌다. 집에 가자, 태섭아. 너 무릎도 약 발라야 하고. 준섭이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뒤따라 일어나는 태섭의 귓가에는 조금 전 들은 말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도망치지 마.’ 그 목소리는 그날 밤 잠에 들기 전까지 태섭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왔다.

다음날에도 태섭은 아침 연습을 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을 정도로 늦잠을 잤다. 제 귀에 달라붙던 도망치지 말라는 목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던 탓이었다. 덕분에 태섭은 9시가 다 되어서야 보다 못한 아라가 그를 지르밟는 바람에 겨우 눈을 떴다. 형은 왜 나 안 깨우고 갔어?! 큰오빠가 가기 직전까지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던걸. 태섭은 허겁지겁 씻은 뒤 버스를 타러 뛰쳐 나왔다. 다행히 시간 맞춰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호흡을 진정시키며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결정은 내렸니?」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태섭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한은 오늘 밤까지야. 마지막까지 충분히 고민하렴.」 목소리는 한 마디를 더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사흘째였다. 태섭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도 현실로 돌아갈지 꿈의 세계에 남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어제는 농구하느라 너무 바빴잖아. 좀 참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작은 소리로 불평해 보아도 전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건 잘 알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태섭은 다시 울렁이기 시작한 위장을 붙잡고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태섭은 대만에게 붙잡혔다. 둘이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따로 빨리 하고 오겠습니다. 3학년 주장 선배에게 그렇게 보고를 한 대만은 태섭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수돗가 앞까지 끌려나간 태섭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뭔데요, 연습 분위기 다 깨면서.”

“너 계속 그렇게 나 피하기만 할 거냐?”

“내가 선배 언제 피했다고요.”

“피하고 있잖아.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심지어는 그때도 피했잖아. 이번에도 피할 셈이냐?”

“선배 고백에 대답 안 하고 도망친 건 미안해요. 그건 저도 좀 당황해서 그랬고요.”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야.”

대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팔짱을 끼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비죽인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초등학생?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의아해하던 태섭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기…기억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기억을 못해. 올 초에 신입부원 들어오던 날 그때랑 똑같이 생긴 애가 키만 좀 더 자란 채로 뒷짐 지고 서 있었는데.”

너 요즘은 머리 올리고 다니지만 원래는 내리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지. 대만이 태섭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덕분에 끈기를 잃고 흐트러진 태섭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위로 축 흘러내렸다. 태섭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피하지 마라, 태섭아.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너는 내가 다가가려고만 하면 피하냐. 아니, 말하고 보니까 역시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이

정대만을 피할 수가 있지? 내가 이렇게 먼저 손까지 내미는데. 너는 내가 탐이 안 나냐?”

다시 인상을 쓴 대만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이번에는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제 뺨을 가만히 긁었다. 어쨌든……. 할 얘기는 그게 다야. 끝. …정말 그게 다예요? 고백 답 언제 할 거냐고는 안 따져요? 뭐, 그건 때 되면 네가 하겠지. 빨리 해주면 더 좋고. 아니면 지금 해줄 거야? 아뇨. 이 자식, 즉답하네……. 사람 상처받게. 동정표 유발하지 마요, 선배. 예전처럼 풀어진 분위기에서 가벼운 말씨름이 오갔다. 태섭의 비딱한 눈썹을 본 대만이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 피하니까 좋잖아. 재미있고. 하여튼 얘기 끝났으니까 들어가자. 인터하이 가야지.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툭툭 치고 먼저 발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태섭은 어제 준섭에게 들은 말을 같이 떠올렸다. ‘도망치지 마.’ 그리고 ‘피하지 마.’ 무언가 제 안에서 얼핏 가닥이 잡힌 것 같았다.

그날 밤, 태섭은 바다로 나갔다. 때아닌 밤 산책에 가족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날이 더우니 잠깐 편의점이나 다녀올 겸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보내주었다. 오빠, 올 때 나 아이스크림! 아라의 명랑한 목소리가 태섭을 배웅했다.

집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아라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준섭이 좋아하는 음료수, 엄마가 좋아하시는 간식거리를 조금 산 태섭은 운동화를 끌고 해변으로 발을 디뎠다. 부드러운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질였다. 어둠에 잠겼어도 여전히 푸르고 맑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태섭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결정은 내렸니?」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응, 내렸어. 태섭이 대답했다.

“현실로 돌아갈래.”

의외의 대답에 놀랐는지 목소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정말? 정말로 현실로 되돌아 간다고? 이 행복한 세계를 버려두고? 그게 네 선택이야?」

“응, 내 선택이야. 나는 현실로 돌아갈 거야.”

「신중하게 고민한 결과가 정말로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간다는 선택이라니? 이곳에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데도 그걸 걷어찬다고?」

목소리의 비난에 태섭이 큭큭 웃으며 어깨를 활짝 폈다.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약간의 슬픔과 미련, 그리움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결연한 의지가 같이 스며들어 있었다. 기지개를 한껏 켜면서 태섭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여기에서는 정말 행복했어. 형도 있고, 정대만이랑 같이 농구도 하고, 코트에도 맘껏 서고.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이 매일 벌어졌지. 여기에서라면 난 정말로, 네가 말한 대로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전국대회를 우승할 수도 있고,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서 최고의 농구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커플이 되어서 오랫동안 사랑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행복해지고 싶다는 내 소원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야. 결국 도망에 불과하잖아.”

「도망치는 게 어때서. 더 행복한 곳으로 도망치는 게 뭐가 나빠? 계속 그 자리에서 고통받는 것보단 훨씬 낫잖아.」 

“그런데 난 여기에서도 도망치려고 했어. 대만 선배가 준 기회에서 도망쳤고, 형의 디펜스에서도 도망쳤어.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고 피했을 때 내가 얻은 건 결국 아무것도 없었어. 승리도 얻지 못했고 좋아하는 사람도 얻지 못했어. 나한테 남은 건 흉하게 까진 무릎의 상처뿐이야. 있잖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친 결과가 행복한 꿈이라면, 여기에서 도망치면 이 뒤에는 뭐가 있어? 더 행복한 꿈이 날 기다려? 그렇게 할 수 있어? 그건 아닐 거 아냐?”

「…….」

“그렇다면 나는 그냥 현실로 돌아갈래.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보겠어. 이곳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들이 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 말대로 해볼래. 정말로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면 뭘 얻을 수 있을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

「너는 정말 바보구나.」

“어, 나 바보 맞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한데 학교 성적이 좋진 않거든.”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비난했지만 태섭은 그저 소리내어 즐겁게 웃었다.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선 소년의 등은 찬란하게 빛이 났다. 한동안 침묵하던 목소리는 이윽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좋아. 선택을 했으니 너를 돌려 보내줄게. 대신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너는 여기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게 될 거야. 형과의 단란했던 한때도, 농구를 포기하지 않은 선배와의 즐거웠던 시간도, 너를 행복하게 했던 모든 것을 전부 잊어버릴 거야. 그럼에도 돌아가겠다면.」

그래도 돌아갈 거야. 태섭이 대답했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안 목소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네가 선택한 대로 있는 힘껏 도망치지 말아봐.」 그리고 태섭이 원하는 대로 그를 돌려보내기 위한 다음 순서를 밟았다. 「자, 눈을 감아.」 태섭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주변이 다시 어둠 속에 잠기고,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풀썩, 끈 풀린 인형처럼 제 몸이 푹신한 백사장 위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태섭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어렴풋이 울리는 목소리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그 정도의 의지라면, 네가 결국에는 그곳에서도 행복을 쟁취할 수 있길 바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대만의 말에 태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음……. 별것 아니에요. 그냥 왠지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아서. 태섭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만의 등 뒤에 서 있는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선지 한참이 된 지금, 벚나무의 무성한 잎들도 초록색이 아닌 다른 색을 갈아입었다. 위에서 보면 빨간색이지만 아래에서 보면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는 게 꽤 조화로워 예뻤다. 조금 감상적인 기분으로 단풍을 구경하던 태섭이 다시 대만에게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대만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잔뜩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태섭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그냥 체육관에서 하면 되지 굳이 여기까지 불러내서는.”

“아니, 뭐……. 체육관에는 애들 눈도 있으니까.”

“뭔 얘기를 하려고 다른 애들 눈치까지 봐요.”

그때 일 사과하려고요? 거의 6개월은 지났는데 뭐 이제 와서……. 안 해도 돼요. 인터하이 열심히 뛰어준 걸로 퉁칠게요.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그거 말고! 사과 말고 다른 할 말 있다고! 태섭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대만이 발끈했다. 그러더니 큼큼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 태섭아. 대만이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사실, 내가 널 좋아한다.”

“예?”

“후배로서가 아니라 그, 다른 의미로 널 좋아하거든. 너랑 사귀고 싶다. 그, 이게, 내가 너한테 한 짓도 있고 해서 되게 염치없는 발언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그것까지도 다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 하는 고백이다.”

태섭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요근래 자꾸 저를 훔쳐보고 눈이 마주칠 성싶으면 재빨리 홱 돌려버리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장을 맡은 후배가 걱정되어서 그런다거나, 치수 선배처럼 군기를 잡아대는 게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는 이유라고만 생각했지 설마하니 이런 것 때문이었을 줄은. 태섭은 엄청나게 쑥스러워하고 있는 대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벌칙이나 장난인가 싶었는데 이렇게나 얼굴을 붉히고 있으면 눈이 없지 않은 이상 절대로 착각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와, 이거……. 좀 위험하네. 태섭은 마른침을 삼켰다. 억지로 잠재워두었던 심장이 제 존재를 과시하며 쿵쾅거렸다.

“선배 그럼 나랑 키스할 수 있어요?”

“어?”

“뭐 키스는 그렇다 치고……. 더한 것도 할 수 있겠어요? 그럴 마음이 들어요?”

“뭘 그런 걸 다 묻… 당연한 거 아니냐? 좋아하는 이상 당연하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네가 막 연습하다가 그냥 훌렁훌렁 옷 들어서 배 까면서 땀 닦고 이런 거 안 했으면 좋겠,”

“좋아요.”

“뭐?”

“좋다고요, 사귀는 거.”

태섭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나도 선배 좋아하니까. 어쩌면 내가 더 먼저 좋아했고. 하지만 뒷말은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대만이 거의 달려들듯이 태섭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대만은 기쁜 얼굴로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태섭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았다. 기겁한 태섭에게 정강이를 몇 번이나 걷어차이고 나서야 대만은 겨우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씨, 뭐하는 거예요, 아직 학교에 애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기뻐서.”

네가 거절할 줄 알았어. 아니면 최소한 대답을 피하거나. 그런데 좋다고 해줘서, 그게 기뻐서 그랬어.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대만에 태섭은 괜히 저까지 부끄러워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달아오른 뒷목을 긁적이며 태섭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해서 뭐해요……. 좋으면 좋은 거지. 응, 그래서 고맙다. 안 피해서.

“그런데 너, 아까 그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는 말은 뭐냐? 여기서 고백이라도 받아본 적 있어?”

“음? 아뇨, 받기는 무슨……. 나 10번 넘게 차인 거 선배는 못 들었어요? 그냥, 뭔가 위화감이 들어서요. 데자뷔 같은 거겠죠. 여기에서도 자주 차였으니까.”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단풍 든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새파랗고 예쁜 가을 하늘에 잠깐 아련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안 그래도 선선해지는 날씨에 찬 기운이 감도는 바람까지 불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들어가요, 좀 춥다. 여전히 싱글벙글한 대만을 재촉하며 태섭은 체육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등 뒤에서 우수수 단풍잎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축하해.」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그런 목소리가 잠깐 들린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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