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로서 오롯이 나에게
철컹.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멍한 눈으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던 태섭은 그대로 주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힘만 더 드니까 이제는 한숨 쉬지 말자고 다짐한 게 불과 5분 전인데, 몸에서 기운이 빠지자마자 반사적으로 깊은 한숨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쿵. 쿵. 뒤통수를 문에 가볍게 부딪히며 태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다를 보고 싶었다.
지학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산왕을 32강전에서 떨어뜨렸다는 것만으로도 북산은 전국 농구 관계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치수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된 태섭의 부담도 그만큼 따라서 커졌지만, 다행히도 잘 따라와 주고 도와주는 부원들 덕에 태섭은 1년 반 동안의 주장 역할을 무사히 마치고 다음 후배에게 바통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피어나는 벚꽃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학기는 9월부터였지만 미리 넘어가 적응도 하고 언어도 배우기 위해서였다. 힘들 거라는 예상도 각오도 충분히 했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앞으로의 기대에 부풀어 낙관적인 생각을 조금 더 많이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무식해서 용감했다 싶었을 정도로.
170대 초반의 단신 포인트 가드로서 태섭의 주 무기는 단연 빠른 스피드와 뛰어난 드리블 능력이었다. 산왕전에서 드리블로 압박 수비를 스스로 뚫어 본 경험은 그 후 송태섭이 제 능력의 활용 방식을 깨닫고 장점을 더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학생 제의를 한 학교 역시 태섭에게 그 부분을 가장 기대했고, 좋은 성적을 내준다면 지금보다 더 큰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당연히 태섭은 열의에 불탔고 정말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경기를 뛰었다. 같은 팀 선수들과 친해지기 위해 서툰 영어로도 계속 말을 걸었고,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풀타임을 뛴 적은 없지만 스타팅도 여러 번 맡았고 승리도 여러 번 맛봤으니까. 학교도 태섭이 해내는 역할에 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미국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누가 들으면 비웃을 만큼 큰 꿈을 아주 살짝 욕심내어 보기도 했다. 죽도록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하지만 첫 1년이 지나고 바로 아래 학년에 새로운 포인트 가드가 들어오며 태섭의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스턴 출신의 후배는 태섭보다 15cm는 더 크면서도 태섭이 제일로 내세우던 능력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발도 정말 빨랐고 드리블도 잘했다. 시야는 넓지 않았지만 슈팅이 좋아 여차하면 3점 라인에서 스스로 득점도 능히 할 수 있었고, 피지컬이 되니 적극적인 수비도 가능했다. 출장 시간이 점점 줄어들자 태섭은 큰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후배가 혼자 풀타임을 소화한 날, 경기가 끝나자마자 태섭은 화장실로 뛰어갔다. 올라오는 것도 없는데 구역질은 멈추지가 않았다.
다시 출장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후배가 메워줄 수 없는, 태섭이 그 자리에 있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승리의 찬스. 그렇다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뭐지? 장학생으로 입학할 때 주목받았던 요소들은 후배도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의 차이라면 경기를 읽는 눈, 그리고 정확한 패싱 능력일까. 하지만 눈이야 경험이 쌓이면 후배도 가지게 될 터였다. 그리고 후배 역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꾸준한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태섭은 점점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다. 동료들은 그래도 팀의 제1 포인트 가드는 태섭이며 그가 코트에 있을 때가 가장 분위기도 좋고 자신감이 붙는다며 다독였지만, 큰 위로가 되진 않았다. 체육관에 붙어 있는 시간을 늘리고 밤늦게까지 길거리 농구대에서 연습을 해도 답답하기만 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숨이 막혔다.
평소의 송태섭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웬만해선 꺼내지 않는다. 어차피 스스로 극복해 내야 할 일이고, 주변 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힘든 것들이 있을 텐데 괜히 제 얘기를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태섭의 버릇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혼자 감내하고 안고 있다가 때가 되면 툭툭 털어버리는 것. 너무나 미련하지만 태섭은 오로지 그 방법밖에 몰랐다.
그래서 이 시간에 갑자기 전화기를 집어 든 건, 일종의 돌발 행동에 가까웠다.
“어어, 태섭아.”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응답을 했다. 언제 전화를 걸어도 정대만은 잘 받았다. 선배는 내가 언제 전화를 걸어도 매번 5초 안에 받더라. 신기해하는 태섭에게 대만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어, 내 방에 전화기 하나 더 놔서 그래. 그만큼 정대만은 먼 길 떠난 애인 전화를 허망하게 놓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송태섭이 이런 날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가족이 아닌 정대만일지도 몰랐다.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음성에 태섭은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통화 돼요? 졸리면 더 자고.”
“아냐, 아냐! 돼, 어차피 일어나야 했어. 그런데 갑자기 전화 온 건 좀 놀랍네. 저번에 하고 이틀인가 사흘밖에 안 지났잖아.”
“이틀인가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도 좀 그립길래. 선배 목소리 듣고 싶더라고요.”
“엥? 뭔……. 너 술 먹었냐?”
“안 먹었거든요? 내가 선배 보고 싶다고 하는 게 그 정도로 이상해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보통은 그거, 내가 먼저 치는 대사였잖아.”
약간의 쑥스러움과 멋쩍음, 그리고 그 사이로 느껴지는 순수한 기쁨과 애정. 태섭은 몸에서 힘을 빼며 눈을 감고, 수화기를 조금 더 얼굴에 바싹 붙였다. 그러면 저 너머의 대만과 닿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대만 선배.”
“응?”
“선배네 학교 포인트 가드는 어때요?”
잘하죠? 국내에서 농구 명문으로 소문난 곳이잖아요……. 결국 다른 데 가긴 했지만 김수겸도 지원했었잖아. 그런 데서 뛰고 있으니까 엄청 잘 하겠지? 태섭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즌을 앞둔 그의 일상과 팀 상황을 궁금해하는 애인의 목소리를 꾸며냈다. 말을 하면서도 자꾸 목소리가 갈라지려 해 걱정했는데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사람이 생긴 게 원래 단순해서 그런 건지 대만은 태섭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기색은 아니었다. 흐으음.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하지, 걔도 전국에서 놀던 앤데.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스카우터가 넷이나 달라붙었었다더라.”
“그래요? 진짜 잘하나 보네. 대진 붙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 정도였는지는 몰랐어요.”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 뭐, 너 신경 쓰느라 다른 포인트 가드가 눈에 들어오긴 했었겠냐만은.”
대만이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낄낄 웃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평소였다면 태섭이 곧바로 이 선배 웃기는 사람이라며 핀잔을 줬을 텐데.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야, 송태섭. 괜찮냐? …얘 자나?”
“여기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자요?”
“아씨, 깜짝이야! 말이 없으니까, 놀라서 그렇지.”
“말을 해도 뭐라 하고 안 해도 뭐라 하네. 안 자요.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데 애인 전화 앞에 두고 말이 없어. 헐, 너 설마 다른 놈 생긴 건 아니지?”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졸린 모양인데 그냥 잠이나 쳐 자라, 정대만.”
“아, 야야야야, 끊지 마! 농담도 못 하냐?”
“진심으로 그게 재밌어요?”
대만의 헛소리에 짜증을 낸 태섭이 쿵, 하고 다시 벽에 뒤통수를 박았다. 정적이 흘렀다. 말소리 대신 서로의 숨소리만 오가는 시간이었다.
“호흡은 잘 맞아요?”
“누구랑? 걔랑?”
“응. 걔 나보다 한 학년 아래라면서요. 그럼……. 대충 1년 정도 됐잖아요. 거긴 봄 학기부터 시작하니까. 어때요? 대학은 전국 제패 가능?”
“뭐……. 전국 제패가 가능할지 어떨지는 더 같이 뛰어 봐야 알겠지만, 나쁘진 않아. 괜찮아. 호흡도 잘 맞는 편인 것 같고.”
하지만……. 잠시 말이 끊기더니, 곧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내 포인트 가드는 역시 태섭이 너다 싶다.”
“…네?”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랑 같이 뛰어도, 너랑 뛰었던 때만큼 ‘좋다’는 느낌이 들진 않아. 그래서인가……. 농구를 하면 할수록 네 생각이 더 많이 나더라.”
네가 던져주는 타이밍이 3점 슛에 아주 찰떡이었는데. 나도 그거 계속 받아먹으러 미국 같이 갈 걸 그랬나 봐. 마지막 말들은 고등학생 때 같은 장난기로 가득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태섭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제 안에서 터져 올라오는 걸 느꼈다. 토치라도 지진 듯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태섭은 수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목구멍 위로 무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욱……. 흐윽…….”
또 조용해진다 싶더니 뒤이어 들려오는 억눌린 울음소리에 대만은 불에라도 덴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울고 있다. 송태섭이.
대만은 태섭이 북받쳐 우는 걸 처음 보았다. 옥상에서 제 패거리에게 린치를 당했을 때도, 부담감에 슬럼프가 잠깐 찾아왔을 때도, 졸업식 때도,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도 태섭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더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더 힘차게 달려들었다. 이 정도면 눈물 자체가 없는 놈이 아닐까 싶을 정도라, 섹스할 때 쾌락에 겨워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랬던 송태섭이 울고 있다. 전화 너머로.
막힌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더니, 곧 태섭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대만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참 동안 태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위로해줘야 하는데, 달래줘야 하는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형……. 대만이 형.”
코를 훌쩍이며 태섭이 울먹거렸다. 보고 싶어요. 형이 진짜 너무 보고 싶어. 나 지금 형이 너무 필요해. 그리고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대만은 입술을 꽉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30분은 더 울고 난 후에야 겨우 흐느낌이 멎었다. 속을 진정시키느라 딸꾹대는 호흡마저 멈출 때까지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듣고만 있었다. 한참 뒤에야 태섭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새벽부터 전화해서는. 꼴사나웠겠다.”
“이제 다 울었냐.”
“응.”
“울고 나니까 좀 괜찮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거면 그런 거고 아닌 거면 아닌 거지 그런 것 같은 건 또 뭐냐는 타박에 태섭은 피식 웃었다. 킁, 아직 먹먹한 코를 한 번 더 훌쩍인 태섭이 옆에 뭉쳐놓은 휴지 다발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골인, 정대만보다 멋진 3점 슛. 그 혼잣말이 들렸는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이 넘어왔다. 제가 우는 동안 같이 일어나 앉아 있었는지 대만이 다시 눕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쌩쌩해진 모양이네.”
“선배.”
“왜.”
“선배는 진짜 웃긴 사람이야.”
“뭔데 또 다 울자마자 시비냐.”
“걔랑 많이 친해지지 마요. 선배 포인트 가드는 나라며. 내가 정대만 3점 평생 질리도록 던지게 해줄 테니까.”
“눈만 뜨면 사람 무릎 걱정하던 놈은 어디 가고 갑자기 이런 악질적인……. 기다려 봐, 지금 통화하는 너 송태섭 아니지. 아까 소리 끊겼을 때 사람 바꿔치기했지? 누구야, 정우성이야?”
“개소리할 거면 자라고 했다.”
“개기는 거 보니까 내 애인 맞네.”
기분을 풀어주려고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모르지 않았다. 태섭은 고개를 숙여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경기에 나가기 직전, 라커 문을 닫기 직전처럼. 고마워요, 선배. 뭐가. 뜻 모를 감사 인사에 대만의 퉁명스러운 말이 뒤를 이었다. 태섭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울면서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선배는 나 평생 데리고 살아야 돼. 그러니까 어? 다른 포인트 가드랑 친하게 지내기만 해 봐, 치과 또 갈 줄 알아요.”
“이게 대체 무슨 맥락의 협박인데? 그리고 너 이빨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라, 나 지금 진짜 소름 돋았다.”
황당해하는 정대만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태섭은 또다시 깔깔 웃었다.
“그냥 내가 그만큼 사랑한다고.”
“뭐?”
“나 이만 씻고 자러 가야겠다. 또 전화할게요, 대만이 형.”
야, 잠깐만 끊지 말아봐! 태섭아! 그거 한 번만 더 말…! 아무렇지 않은 척 뱉긴 했지만 막상 뱉어놓고 보니 좀 부끄러워서 태섭은 대만이 뭐라 더 떠들거나 말거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가 끊기자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살아 있는 건 모두 다 죽어버린 듯한 고요함 속에서 태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어둡고 낯설고 외로운 곳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다시 괜찮아질 것 같았다.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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