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The LOVERS

7년 차 애인 송태섭과 대차게 싸운 정대만의 망한 연애 타로

某日 by 銘

THE LOVERS

 

“그러면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그러는 형은 뭘 그렇게 잘했는데!”

“뭐? 지금 네가 큰소리칠 때냐?!”

“내가 못 칠 건 뭔데! 나도 하루 이틀 참은 줄 알아?!”

“참았다고? 네가 참았다고? 그러는 나는 안 참았던 것 같아?! 너야말로 내 말을 듣기는 해?”

“와, 진짜 어이없다. 그거 지금 누가 할 대사인데? 지금 사람 말을 안 듣는 게 누군데 나한테 적반하장으로 이래요? 어?! 정대만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뭐라고? 야, 송태섭. 너 지금 나한테 말을 그따위로 해?”

“그래, 그따위로 한다, 왜! 내가 못 할 말 했냐?!”

“너 말 다 했어?!”

정대만과 송태섭.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이자 같은 프로리그에서 뛰는 동료 농구 선수이며 4년간의 긴 장거리 연애를 거치고 어느덧 7년 차에 접어든 20대 커플. 그리고 그들은 오늘 147번째 세계대전을 벌였다.


싸우는 게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분명 좋아해서 사귀기 시작했고 서로를 당연히 ‘내 사람’이라 여기며 7년이나 만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인물이었다. 성격도 취향도 가치관도 생활 방식도 거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언젠가 태섭이 했던 말마따나, 농구라는 매개로 엮이지 않았으면 연인은커녕 지인도 되지 못했을 거라는 데 백 번이고 동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알아가고 탐구하는 재미도 분명히 있었고 다르다 보니 서로 보완이 되는 지점도 많았다. 그리고 대만은 송태섭이 저와 비슷한 인물이었다면 절대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정대만은 그 어떤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맞서며 뚫고 나가는 송태섭의 돌격대장적 면모를 가장 우러러보고 경애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일종의 팬심 같은 것이었고 연애는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였다. 태섭이 미국에 있을 때는 열두 시간이 넘는 시차와 공간적 한계로 화상 통화는커녕 메시지조차 제대로 주고받기 힘든 실정이다 보니 서로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만 남아 세상에 다시 없을 절절한 연애를 했지만─수화기 멀리서 정우성이 내가 지금 코네티컷이 아니라 할리우드에 있는 줄 알았다고 비꼴 정도였다─다시 곁에 있게 되니 사정이 또 달랐다.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사건건 부딪쳤고 한 번 상한 감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소한 것에서까지 갈등을 빚었다. 덕분에 그들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난 정말 형을(너를) 이해를 못 하겠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늘의 싸움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충 그런 식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시작은 늘 사소하다. 몇 번씩 당부한 심부름을 또 까먹은 대만을 향한 책망이나 매일 자기 전 나누는 굿나잇 통화를 귀찮게 여기는 태섭을 향한 불평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이미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들은 사람에게서는 짜증스러운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상대는 서운함을 느껴 말에 가시가 돋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미 기분이 상한 이쪽도 덩달아 말이 뾰족해진다. 한쪽이 한숨을 내쉬며 져주지 않는 이상 그렇게 서로를 찌르는 말이 오가다 마침내 고함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싸움들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그들의 염병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인물 중 하나인 송아라 양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쨌든 두 사람은 더럽게도 단순한 인간들이었으므로. 이렇게 불같이 싸워대도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데다가 대만이 태섭에게 약한 만큼 태섭도 대만에게 약했으니, 다음날 얼굴을 보면 또 대충 어영부영 화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저녁쯤에는 슬그머니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면서 몸으로 추가적인 화해를 한 적도 많았고.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방으로 들어간 태섭이 제 겉옷을 집어 들더니 그 자리에서 현관을 열고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이다. 야, 송태섭!! 거기 안 서?! 내 말 다 안 끝났어!! 대만이 한 걸음 내디디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태섭은 그를 싹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버렸다. 대만은 한동안 황당함과 무시당했다는 모욕감에 부들대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마찬가지로 점퍼를 집어 들고 거칠게 팔을 꿰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나도 됐다, 됐어!

쾅! 현관문을 부술 듯이 닫은 대만도 그대로 태섭의 집을 나가 버렸다.


“아니이, 진짜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엉? 내가 그래도 형이고 걔 남친인데에!”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정대만을 보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이명헌과 김수겸은 가만히 눈빛을 교환했다. 저 새끼 글렀지. 완전 글렀다, 뿅.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과 잔뜩 꼬부라진 혀로 태섭을 향한 원망을 쏟아내던 대만이 결국 울화를 못 이기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송태섭이 나한테 그러냔 말이야……. 내가 걔 유학도 4년을 꼬박 기다려 줬는데, 씨이……. 너무한 새끼…… 내가 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에……. 평소에도 목소리 큰 정대만은 우는 소리도 크다. 주변 테이블에서 이쪽을 흘긋대는 걸 본 수겸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명헌은 입맛이 떨어진 모양인지 맛깔나게 구워진 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찬으로 나온 부추김치에만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대학 동기로 4년을 함께 코트에서 기숙사에서 굴렀다는 이유만으로 이 진상질의 희생양이 되어 불려 나온 수겸과 명헌은 지금이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4년 동안 술만 들어가면 사랑하는 송태섭이가 보고 싶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새끼를 견뎌야 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젠 사랑싸움 한탄까지 들어주고 있어야 한다니. 내 팔자야.

“버리고 갈까. 짐짝이다, 뿅.”

“마음 같아서는 1시간 전부터 그러고 싶었다.”

“뭐?! 이 자식들아, 누굴 버려, 엉?! 니네 나랑 4년 동안 몸 대고 산 의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됐어?! 송태섭도 날 버렸는데 니들까지 날 버리기야?!”

목소리 큰 정대만은 쓸데없이 귀도 밝다. 눈을 질끈 감은 수겸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꾹꾹 눌러댔고 명헌은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가만히 휴대폰을 들어 주소록을 뒤졌다. 눈썹뼈를 한참 마사지하던 수겸이 가늘게 눈을 뜨고 명헌을 돌아보았다.

“뭐 하냐?”

“사람 찾는다, 뿅.”

주소록에 있는 공통된 지인을 전부 훑었으나 술 취한 정대만을 데리고 갈 사람은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저 진상 새끼와 싸운 후 집을 나가 버렸다는 송태섭 외에는. 명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대만과 정우성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고 같은 리그에서 뛰는 동료 선수이니 연락처야 당연히 가지고 있지만 그는 송태섭과의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경기장 복도나 화장실에서 마주치면 고개인사를 하고 간단한 근황을 묻는 정도에 불과했다. 제가 모두에게 먼저 살갑게 굴 만큼 다정한 성정도 아닌 데다, 우성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낯을 가린다는 태섭의 성향도 한몫할 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관계뿐이라도 송태섭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상황에서 남자친구를 데리러 발 벗고 달려올 성격이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알았다. 죄송한데요, 이명헌 선수. 그 인간은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이런 대답이나 돌아오겠지. 포기한 명헌이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자 수겸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흐흑, 태섭아아……. 와중에 착실하게 이어지는 정대만의 탄식에 결국 참을성이 바닥난 수겸이 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테이블을 부서뜨릴 기세였다. 놀란 대만은 숨을 들이켜며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명헌은 된장찌개를 한술 뜨며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수겸. 그거 잘못하면 물어줘야 한다, 뿅.”

“그걸 누가 몰라?!”


“집은 알아서 들어가라.”

계산을 하고 나온 수겸이 대만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예상외로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한마디만 더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머리통을 저 쓰레기통에 덩크로 꽂아버리겠다는 분노가 마디마디 깃들어 있었다. 김수겸의 색조 옅은 눈에서 파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옆에 서 있는 명헌도 무저갱만큼이나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두 명의 싸늘한 반응에 입이 댓 발이나 나온 대만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고 작게 꿍얼거렸다. 술이 대강 깬 몽롱한 머리로도 진심으로 열받은 김수겸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한숨을 내쉰 수겸이 오른쪽 어깨에 멘 가방을 한 번 더 추슬렀다. 그럼 우리는 간다. 엉야, 불러내서 미안하다. 미안한 걸 알면 송태섭 선수한테 잘해라, 뿅. 작작 좀 싸우고. 아니이, 그건 걔가 먼저어……! 정대만, 입.

동네 주민인 대만과 달리 명헌과 수겸은 지하철을 타야 했다. 두 사람의 등이 멀어져 가는 걸 잠시 지켜보던 대만은 여전히 입이 비죽 나온 채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꽂았다. 둘과는 반대 방향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며 대만은 태섭을 생각했다. 투정을 듣자마자 미간을 팍 구기며 짜증을 내던 얼굴,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목소리, 마구 삿대질하던 팔, 결국에는 싸늘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차가운 등. 대만은 한숨을 푹 내쉬고 뒷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대만은 정말로 태섭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애인이랑 핏대 올리며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정대만은 특히 더 그랬다. 그는 진심으로 태섭을 아끼고만 싶었다. 태섭을 다정하게 사랑해 주고 싶었고 그가 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바랐다. 정대만이 송태섭의 행복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태섭이 등을 돌린 순간부터 대만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태섭의 오랜 연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번듯한 사내로서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방정식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걔는 날 사랑하긴 하는 걸까. 어깨가 축 처졌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발을 옮기던 대만이 어디쯤 왔나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문득 길가의 불 켜진 가게가 하나 눈에 띄었다. 흰색 커튼이 쳐진 가게 창문에는 문장 세 줄이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고민이 있는 당신에게 답을 찾아드립니다.

연애, 결혼, 사업, 학업, 금전, 직장

○○사주타로

고민이 있는 당신에게 답을 찾아드립니다. 그 문장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답을 찾아준다고.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답. 그건 지금의 정대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대만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게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와인색 천이 깔린 테이블 뒤에서 젊은 여자가 손님을 맞았다. 향초라도 피워둔 것인지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흰색 위주의 인테리어에 주백색 전구가 빛나는 가게는 깨끗하고 아늑했다. 가게 안에는 여자가 앉아 있는 곳 말고도 두 개의 테이블이 더 있었다. 하나는 검은 천, 다른 하나는 남색 천이 깔려 있었고 여러 종류의 카드 세트가 담긴 원목 함이 올려져 있었다. 테이블 사이에는 흰색 칸막이가 있어 옆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인쇄된 검은 천이 걸려 있었고 선반에는 촛대나 수정구슬처럼 신비감을 조성하는 여러 소품이 놓여 있었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대만에게 여자가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타로 보러 오셨어요?”

“예? 아…… 예에…….”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자가 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대만은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예’라고 대답하긴 했으나 사실 대만은 타로가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카드를 뽑아서 점을 친다는 정도만 알았다. 학교 축제에서 타로 부스를 몇 번 보긴 했으나 그 자리에 앉아본 적도 없었다. 고작 카드 따위가 무슨 미래를 보여준다는 건가 하는 불신도 있었고, 애초에 그는 점을 믿는 성격도 아니었다. 점보다 확실한 건 노력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가게에서 같이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은 사주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연초마다 잘 본다는 집에 몇십만 원씩 주고 와서는 올해는 뭘 조심하라더라, 무슨 일이 생긴다더라 이야기해 주는 연례행사 정도에 불과했다. 그랬던 정대만이 제 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니. 정말 사랑 때문에 별걸 다 한다 싶었다.

대만이 자리를 잡자 여자가 천 아래에서 코팅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내려다보니 메뉴판이었다. 심플 타로, 심층 타로, 1년 운세, 커플 궁합, 30분 무제한 같은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가격은 대략 1만 원에서 5만 원 사이. 생각보다 비싸네……. 다 이런 건가? 대만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 보니 앉긴 했지만 뭘 고르는 게 좋을지 몰라 한참 동안 메뉴만 들여다보고 있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쉽게 못 고르시겠으면 운세 먼저 골라주셔도 돼요. 연애인지, 직장인지 그런 거요.”

“…연애요.”

대답을 들은 여자가 원목 함에서 카드 세트를 하나 집어 화투처럼 섞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이를 막힘없이 섞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 섞는 거지. 손도 작은데. 메뉴를 보다 말고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대만에게 여자가 이어 물었다. 지금 사귀는 분이 계신 건가요? 대만은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네. 조금 자신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상대가 싸워서 집까지 나간 상태긴 하지만 어쨌든 헤어지잔 얘기는 안 했으니 아직은 사귀는 거라고 봐야겠지.

“보통 사귀는 분 있으신 분들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같은 걸 많이 보세요.”

“그러면 저도 그걸로 볼게요.”

“그건 심층 타로 3만 원짜리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대만이 대답하자 여자가 코팅된 종이를 치우고 카드 세트를 오른손에 쥐더니 순식간에 원형으로 쫙 펼쳐 늘어놓았다. 와, 이걸 어떻게 이렇게 펴지. 이것도 연습하는 건가. 대만은 서커스 묘기를 관람하는 기분으로 여자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을 생각하시면서 일곱 장을 뽑아주세요.”

대만은 넓게 펼쳐진 카드 세트를 쳐다보았다. 족히 칠팔십 장은 될 것 같은 이 더미에서 고작 일곱 장밖에 안 뽑는다고? 겨우 일곱 장만으로 태섭과 제 미래를 알아본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뭐, 애초에 진지한 태도로 이 자리에 앉은 건 아니었으니 대만은 여자가 시킨 대로 카드를 한 번 뽑아 보기로 했다. 송태섭을 생각하면서 뽑으란 말이지. 등 번호 7번에 카드도 일곱 장. 딱 송태섭이긴 하네.

첫 번째로 뽑을 카드에 막 손을 뻗었을 때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가장 중앙의 카드를 뽑으려던 대만은 순간 손을 멈췄다. 그런데 말이야, 이 카드가 나와 태섭이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라잖아. 그런데 혹시 내가 뽑으려는 이 카드가 안 좋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이 카드 말고 옆에 있는 카드가 더 좋은 미래를 나타내는 거라면? 갑자기 부담감이 확 몰려왔다. 손을 엉거주춤 뻗은 채 이도 저도 못 하는 대만을 보고 여자가 한 번 더 말했다.

“크게 고민하지 마시고 그냥 직감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걸 뽑아주세요. 고민이 길어지면 카드와의 파장이 어긋날 수가 있어요.”

대만은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참을성 있게 대만이 카드를 선택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대만은 처음 고르려 했던 것 말고 다른 카드를 뽑았다. 다음 여섯 장의 카드도 비슷했다. 여자의 말대로 직감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걸 뽑으려다 말고 잠시 멈칫한 후에 완전 반대 방향의 다른 것들을 뽑아 내밀었다. 그렇게 일곱 장을 다 뽑고 나자 여자가 육각형 모양으로 늘어놓았던 카드를 하나씩 펼쳤다.

“…저기, 있잖아요. 카드 이게 맞아요?”

원래 이런 거예요? 대만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타로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정대만이라도 눈앞의 그림이 긍정적으로 보이는지 부정적으로 보이는지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자가 펼친 카드에는 연애운에 절대 나와서는 안 될 것 같은 온갖 부정적인 그림들이 즐비했다. 대체 뭔 놈의 칼이랑 검은색이 이렇게 많아? 그리고 저건 뭐야? 해골바가지? 게다가 밑에 쓰인 글씨는 D…Death라고??

음……. 카드를 살핀 여자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안 좋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까지 안 좋은 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그런 느낌. 여자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제일 첫 번째로 펼쳤던 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이 카드가 두 분의 과거를 나타내는 건데요……. 두 분 첫인상이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것 같네요. 아주 좋지 않으셨다던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거나.”

불벼락을 맞은 탑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있는 그림이었다. 충격적인 만남. 대만은 그 속에서 오래된 어느 겨울의 기억을 마주했다. 이젠 다 청산된 일인데도 괜히 목이 깔깔해지는 기분이었다. 큼, 대만은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지금 카드로 봐서는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은 걸로 나오진 않았어요. 서로 갈등이 있고 상처를 많이 입었다고 나오고요. 아마 그건 이 탑 카드…… 충격적이었던 과거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과거에 형성되었던 안 좋은 것들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아니면 두 분의 관계가 너무 빠르게 진전되어서, 그러니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충분히 거치지 않고 시작했다가 지금 그 부작용이 드러나는 걸 수도 있고요.”

“…….”

“두 분 다 고집이 세거나 자존심이 강하신 것 같고, 그게 이 갈등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아요. 이건 전장에서 울타리를 세우고 저 밖을 경계하는 카드에요. 게다가 부상병…… 상처까지 입은 상태죠. 그런 것처럼, 서로에게 상처받고 단단히 벽을 세운 채 ‘너 어떻게 하나 한번 보자’라는 상태로 노려보고만 있으니 계속 부딪히는 거죠. 그래서 이 관계에 스트레스도 심하신 편이고……. 그리고 보통 그렇잖아요, 이미 짜증이 나 있는 상태에서는 남의 말이 더 안 들리는 거. 그러다 보니 또 싸우고…… 그런 식으로 두 분도 관계가 악순환하는 면이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여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대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여자의 말 하나하나가 대만의 가슴에 스트라이크로 콱콱 박혀 들었다. 분명 이 여자는 정대만과 송태섭이 누구이며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 아무 사전지식이 없을 텐데도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일과 원인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덕분에 직구를 맞은 가슴이 아프다 못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 뭐야? 알고 보니 막 신들린 무당인 거 아니야?!

“이 카드랑 이 카드는 일반적으로 힘들었던 한 사이클이 끝나고 새로운 여명이 밝아 오는 걸 의미하는데요. 카드만 놓고 봤을 때는 이 새로운 여명이라는 게 두 분의 악순환하는 관계를 끊어내는 게 아닐지 싶은 생각이 좀 들어요. 조언 자리에 나온 이 카드가……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놓고 떠나는 카드거든요.”

여자가 왼쪽의 카드 하나를 가리켰다. 달이 뜬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람 하나가 여덟 개의 금색 성배에서 등을 돌려 떠나고 있었다. 카드를 보자마자 대만은 그 그림이 무엇인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송태섭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버리던 오늘 오후의 송태섭. 대만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조언이란 말이야? 태섭이가 날 떠나는 게? 이 카드처럼 우리가 7년이나 되는 연애 기간을 포기하고 제 갈 길 가면서 헤어지는 게 조언이라고? 정말로?

“어머, 손님.”

여자가 깜짝 놀라며 테이블 아래에서 급히 티슈를 뽑았다. 대만은 그제야 제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 위에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을 인식하자 아직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머리에 갑자기 설움이 북받쳤다. 흐어어엉.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남자가 내기엔 상당히 꼴사나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만이 울먹였다. 선생님, 저는 걔랑 헤어지기 싫어요. 제가 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말도 안 돼요. 이게 어떻게 조언이에요, 허어엉.

대만이 진심으로 울기 시작하니 여자는 무척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안절부절못하며 쩔쩔매던 여자는 어색하게 팔을 토닥여 대만을 달래려 애썼다. 어차피 카드는 카드일 뿐이고, 미래를 위한 조언인 거지 예언이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카드가 이렇게 나왔다고 해서 정말로 두 분이 헤어지신다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조언이라 하셨잖아요, 태섭이랑 제가 헤어지는 게 조언이라고 나온 거잖아요……. 끄으흡……. 여자의 위로에도 대만이 받은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몇 분을 더 꺼이꺼이 울었다.


다음날 눈을 뜨고 나서도 대만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몸은 무거웠고 기분은 바닥을 기었다. 대만의 머릿속에는 어제 본 해골바가지 카드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덟 개의 잔에서 등을 돌리던 그 카드가 보란 듯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우울해진 대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어차피 점이란 건 미신이며 재미에 불과하다. 과거를 조금 맞췄다 해서 모든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을 것도 없다. 그동안 정대만의 신조대로라면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혹시나 카드가 보여준 미래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불안했다. 대만은 슬쩍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신저에 접속해 태섭과의 대화방을 열었다. 갱신되지 않은 대화방은 별것 아닌 일상 이야기를 하며 킥킥대던 그저께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메시지 하나하나에 태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코끝이 매워지며 우울감이 몰려왔다. 눈꼬리가 젖어 드는 걸 느끼며 코를 훌쩍이던 대만이 키보드 화면을 띄웠다. 잘 잤냐. 슬그머니 한 문장을 보내 보았다. 화해도 안 한 사이에 꺼내기엔 좀 어이없는 말이다 싶긴 했지만 이전에도 대충 이런 식으로 물꼬를 트다 보면 어느 순간 왜 싸웠는지조차 잊고 다시 화기애애해지곤 했으니, 나름대로 경험에서 우러난 선택이었다.

지금 시간 오전 8시 33분. 평소 송태섭의 생활대로라면 지금쯤 아침을 먹고 나서 자리를 치우고 있을 것이다. 배지가 쌓이는 게 지저분해서 싫다며 알림을 빨리 보는 편이니 10분 내로는 메시지를 읽고 답을 하겠지. 대만은 메신저를 나와 괜히 다른 앱을 이것저것 켜보며 태섭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태섭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읽지않음 표시가 사라지지도 않았다. 오후쯤 슬쩍 걸어본 전화도 기나긴 신호음만 이어질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라에게도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그런 건 송태섭이랑 알아서 좀 해결을 보시라고 발칵 짜증을 내던 게 고작 2주 전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바쁜 일이 있었겠지. 자기 전에는 연락이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달달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제자리에 묶어두었다. 그러나 대만이 열심히 돌린 행복회로가 무색하게도, 자정이 지나도록 태섭은 연락 두절이었다.

“아, 미치겠네, 진짜!”

대만은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답답하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차를 몰고 태섭의 집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너 왜 연락 안 받아?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렇지 너 정말 이럴 거냐? 하루 종일 내 연락도 안 보고 대체 뭘 했는데? 어? 성질대로 마구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태섭의 입에서 정말로 ‘어, 이럴 거야. 형 진짜 지긋지긋하니까 우리 이제 그만 만나.’라는 소리가 나올까 무서워서였다. 그놈의 조언 카드, 그놈의 등 돌리던 남자.

사귄 이래로 태섭이 대만의 연락을 받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일이 있으면 항상 미리 이야기를 했고, 갑작스러운 일이라 사전 통보가 여의찮았을 때면 당일에 화장실을 가는 짧은 틈에라도 사정을 알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1이 사라지지 않는 대화방을 보며 대만은 서러움을 느꼈다. 마치 고등학생 때 같았다.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한 뇌는 쉽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타고 올라왔다. 대만의 머릿속에는 각양각색의 문장으로 제게 이별을 고하는 태섭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매몰찬 표정, 짜증 섞인 목소리, 질렸다는 눈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송태섭이, 끼어들 구석도 찾지 못한 채 멀거니 그걸 바라만 보고 있는 정대만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다.

…훌쩍. 결국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대만의 베갯잇을 축축하게 적셨다.


“고생하셨어요.”

“말씀드렸듯이 얼마 동안은 상황을 좀 더 봐야 하니까요, 혹시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종 공구 소리와 말소리로 시끌시끌하던 집안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현관을 닫고 한숨을 내쉰 태섭은 비척비척 걸어가 거실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푹신한 감촉이 등에 느껴지자마자 안도감과 함께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좀 자고 싶다. 긴장 풀린 몸을 축 늘어뜨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지난 사흘 동안 예민해진 신경으로 잠까지 설쳤더니 무지하게 피곤했다.

‘오빠, 혹시 지금 집에 좀 와 줄 수 있어? 아랫집에서 방금 올라왔는데 욕실 천장에 물이 샌대. 나 좀 전에 화장실 물청소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봐.’

사흘 전,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아라는 당황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여동생의 다급한 SOS에 태섭은 전화를 끊자마자 반도 못 마신 커피를 그대로 반납하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엄마는 한창 일하실 시간이고 아직 대학생인 아라가 이런 걸 자세히 알 리도 없을 테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섭은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아랫집 상황을 살피고, 관리사무소를 부르고, 화장실을 폐쇄한 본가 대신 엄마와 여동생을 제 집으로 실어 나르고, 업체에 전화를 돌려 방문 날짜를 잡았다. 이틀 뒤에나 올 수 있다는 업체를 기다리며 비슷한 문제를 보인 블로그와 카페 글을 몇백 개나 읽었다. 밤에는 바닥 타일을 다 깨부수는 꿈까지 꿨다. 거의 노트북으로 들어갈 기세인 태섭을 보고 엄마가 그렇게까지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달래셨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섭에게는 이렇게 걱정하고도 남을 문제였다. 미국에서 우성과 함께 자취하던 시절, 스튜디오에서 이와 비슷한 일로 6개월 가까이 관리인과 집주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매일 같이 옥신각신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영어는 아주 빠르게 늘었지만 저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로 위장병까지 도질뻔했다 보니 이번에도 혹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당연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오늘 방문한 업체는 이것저것 검사를 하더니 타일을 깨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공사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단을 들려주었다. 공사도 몇 시간이면 끝낼 수 있고 물도 바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기술의 발전이란! 태섭은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곧바로 공사를 해달라고 주문했고, 몇 시간의 소란 끝에 그를 괴롭히던 문제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혹시 모르니 며칠 상황을 봐야 한다고는 했지만 꼼꼼한 공사 현장을 쭉 지켜보았던 태섭은 이제 더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 쪽은 끝났으니 아랫집 천장 수리비만 견적 받아서 물어주면 되는 거지. 태섭이 한 번 더 길게 한숨을 뱉었다. 예상 못 한 목돈이 뭉텅이로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싸하게 아팠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늘어져 있던 태섭은 문득 왼손에 쥔 휴대폰이 울리는 걸 듣고 팔을 들었다. ‘공사 잘 끝났어?’ 송 씨 가족의 단체 대화방에 아라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잘 끝났어. 태섭은 찍어둔 사진을 몇 장 올려 상황을 보고했다. 때마침 엄마도 휴식 시간이었는지 잠깐의 차이를 두고 읽지않음 표시가 두 개 다 없어졌다. 태섭이가 고생했네. 엄마의 메시지가 먼저 올라왔다. 진짜로! 이번에 오빠 덕분에 살았다. 땡큐땡큐. 아라가 동의했다. 웬일로 제 오빠를 진심으로 찬양하는 여동생의 모습에 태섭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우면 이따가 맛있는 거나 좀 사 와. 오빠다운 메시지를 남기고 깔끔하게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엇.”

그대로 앱을 닫으려던 태섭이 화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깨끗할 줄 알았던 목록에 빨간색 표시가 딱 하나 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태섭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빨간색 알림 왼쪽으로 향했다. 잘 잤냐. 태섭이 사흘이나 읽지 않았다고 뜨는 그 메시지의 주인은 이름 석 자 대신 불타오르는 빨간 하트로 저장되어 있었다. 정대만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이걸 잊고 있었네. 태섭은 멋쩍은 기분에 가만히 턱을 긁었다.

그날 대만이 아침부터 보낸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보긴 보았었다. 그런 식으로 운을 떼는 게 정대만 나름의 화해를 청하는 제스처이자 애교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직 기분이 다 풀리지 않은 터라 그대로 알림창을 밀어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코웃음도 한 번 쳐주었다. 이번엔 그렇게 쉽게 안 넘어가요. 그렇다고 해서 대만을 오래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싸운 이유도 사실은 별것 아니었고 어제보다는 화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으니까. 싸움의 시작이 정대만의 투정이긴 했어도 제 잘못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저쪽이 먼저 꼬리를 만 이상 이쪽만 계속 화를 내고 있기도 좀 그랬다. 그럼에도 메시지를 무시한 건 약간의 심술이었고 제가 정말로 속상했었고 화가 많이 났었음을 강조하는 의미였다. 그래서 대충 한나절 정도만 시위하며 애간장을 좀 태우다가 저녁쯤엔 못 이긴 척 슬쩍 답장을 해줄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차에 아라의 연락을 받고 정신이 팔려 정대만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거였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사흘씩이나. 태섭이 쩝 입맛을 다셨다.

“백오십 퍼센트 삐졌겠지.”

하여간 삐돌이 정대만. 퉁명스럽게 툴툴대는 걸 볼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사정 설명도 없이 연락을 사흘이나 씹은 건 이쪽 잘못이니까……. 태섭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원래도 태섭은 모든 연락과 알림에 재깍재깍 반응하는 사람이지만 대만에게는 특히 더 빠르게 답하려 애쓰곤 했다. 소식 주고받기 힘든 장거리 연애 4년의 여파로 정대만이 송태섭 한정으로 연락에 민감하게 구는 편이라는 것도 잘 알았고, 그 힘든 시기를 끝까지 견뎌주고 제게 전부 맞춰준 것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유학생 시절만 생각하면 태섭은 늘 대만에게 약해졌다.

그래서 태섭은 아무리 정대만이 짜증 나고 피곤하게 굴더라도 이번에는 화내지 않고 꾹 참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나잇값 못하는 양반 나니까 받아주지 또 누가 받아주겠냐는 생각도 조금은 하면서. 하여간 송태섭 진짜 정대만 존나게 사랑한다니까. 태섭은 휴대폰을 잠시 가슴 위에 내려두고 양 뺨을 탁탁 내리쳐 기합을 불어넣었다.

미안, 나 메시지 이제 봤다. 진짜 미안해요. 집에 급한 일이 좀 있었어. 걱정했죠? 형은 뭐 해요, 지금? 잠잠한 대화방에 사흘 만에 보낸 메시지는 아주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어투였다.

그런데 웬걸.

“…이 인간이?”

일주일이 다 되도록 답장이 없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이마에 핏줄이 바짝 돋는 것을 느꼈다. 스크롤을 세 번이나 올렸는데도 두 사람의 대화방에는 태섭의 메시지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형 화 많이 났어요? 미안해요, 바빴어도 형한테는 어떻게든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죽일 놈이다, 진짜. (싹싹 비는 이모티콘)

…화 많이 난 거 같으니까 더 말 안 할게요. 11시네. 잘 자요. 

굿모닝. 나 운동하러 왔어요. (기구 앞에서 찍은 사진)

형 오후에 시간 되면 영화 안 볼래요? 송아라가 이거 재밌다고 하던데. (해시태그) 형 취향일 것 같더라. 우리 영화 보고 저녁도 맛있는 거 먹어요. 오늘 내가 살 테니까 비싼 거 먹어도 돼요. 아니면 형 집에서 같이 뭐 해 먹을까요? 나 자고 가게?

아니, 애인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면 당연히 덥석 물어야 하는 거 아님? 정대만이 이렇게 줘도 못 먹는다고??? 천하의 정대만이??

내일은 화 풀리면 좋겠다. 잘 자요. 사랑해.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계속 연락 안 되니까 걱정된다고요. 형 보고 싶어.

아직도 화났어요?

나 오늘 달재랑 약속 있어요. 미리 보고함.

와 답 진짜 안 하네 읽기는 읽으면서 답만 안 하는 것도 용하다

설마 이것도 무시하나 (일부러 조금 야하게 찍은 사진 2장)

전화 안 받아요?

형 전화 좀 받아봐요.

정대만 뭐 하는데 전화 안 받냐고

내가 전화 받으라 했다 나 오늘 아침에만 세 번 걸었어

형 진짜 계속 이럴래? 훈련도 멀쩡히 나가고 다른 사람들은 다 만나면서 내 연락만 이렇게 씹어?? 당신 나 이제 더 안 볼 거야? 나랑 헤어지기라도 하게??

이것도 답을 안 해? 설마 내 번호 차단한 거 아니지? 어???

야 정대만

야!!!!!!!!!!

제가 보낸 메시지들을 다 읽고 나니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평소엔 잘 하지도 않던 말까지 해 가면서 다정하게 살살 달래려 하던 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부아가 치밀어 입이 험해지는 게 한눈에 보여서였다. 태섭은 끓어오르는 열을 삭이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길게 뱉었다. 그래, 한 이틀 정도 잠수 타는 거야 태섭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7년 연애 중에 손에 꼽을 만큼 크게 싸운 거였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이건 진짜 너무 간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정대만이 유치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라지만 나 집에 급한 일 있었다고 사정 설명도 했고 사과도 몇 번이나 했잖아. 그리고 이만큼이나 먼저 숙이고 들어가 줬으면 됐지, 대체 얼마나 더 자존심을 세워줘야 하는데? 화가 나는 것도 나는 건데 무엇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한담. 태섭은 짝짝이 눈썹으로 한참 동안 대화방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 태섭의 뇌리에 별안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렇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게 아니었는데. 누워있던 태섭이 강시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삐삐삐삐. 세 번째의 오류음이 났다. 숫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살피면서 눌렀는데도 그랬다. 황당한 눈으로 번호 키와 집 호수를 번갈아 보던 태섭이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 이것 봐라?

“비밀번호를 바꿨어?”

제가 대만의 집 비밀번호를 헷갈리거나 잘못 눌렀을 리가 없었다. 대만이 이 집을 얻었을 때 태섭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른 번호였고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숫자였으니 당연했다. 인사불성이 되어도 1초 만에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몸 안에, 손끝에 단단히 박힌 그 네 자리 숫자는 바로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날짜였으니까. 그런데 그걸 바꿨다고? 다른 번호로? 나한테 말도 없이 요 며칠 사이에? 태섭은 빡친 얼굴로 입술을 질근거렸다. 2,500일이 훌쩍 넘은 디데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몰려오는 배신감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대던 태섭은 혹시나 하고 또 다른 네 자리의 숫자를 눌러보았다. 삐삐삐삐, 네 번째의 오류음이 났다. 그래, 당연히 내 생일로는 안 했겠지. 사귀던 날짜를 집어치웠는데 퍽이나 오붓하게 애인 생일로 해놨겠다.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럼 이번에는 정대만 생일. 그 정도로 단순하게 설정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였다. 다섯 번째의 오류음과 함께 태섭은 5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의 집 앞에서 대낮부터 틀린 번호를 계속해서 누르고 있으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도 남았다. 계속해서 복도를 울리는 삐삐 소리에 아랫집에서 현관을 열어보는 소리가 났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앞집 사람도 태섭을 흘끔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얼굴이라도 아는 사이였으면 덜 민망했을 텐데 몇 년을 같은 동에 살아도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게 바로 개인화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이었다. 빈손으로 올라온 앞집 사람이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태섭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경계심 가득한 시선에 태섭은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형 집인데 저한테 말도 없이 비밀번호를 바꿔 버려서요, 하하하하…….

마지막까지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앞집 사람이 문을 닫자마자 태섭은 대만의 번호를 한 번 더 눌렀다. 혹시나 하고 걸어 본 전화는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오늘은 훈련이 없는 날인 걸 뻔히 아는데도 이런다는 거지. 얼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태섭은 대만과 더 연락을 시도하는 대신 그의 집 비밀번호를 알만 한 또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로 했다.

“어머니, 저 태섭이에요. 잘 지내셨죠? 통화 잠깐 괜찮으세요?”

바로 대만의 가족이었다.

“형 집에 잠깐 왔는데 번호 키가 계속 틀렸다고 해서요……. 혹시 최근에 형 집에 오신 적 있으세요?”

“응? 아니? 대만이 집은 지난달에 너희랑 같이 저녁 먹은 날이 마지막이었는데. 비밀번호 1209 아니니?”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형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지금 일이 있는지 통화가 안 돼서요……. 혹시 어머니는 아실지 하고 전화 한 번 드려봤어요."”

“으응, 우리한테는 그런 얘기 없었어. 희한하네. 대만이가 애 아빠나 나한테면 몰라도 너한테는 그런 거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형이 요즘 바빠서 깜빡했나 봐요. 그냥 나중에 형 있을 때 다시 와야겠어요.”

“그래, 그래. 대만이 때문에 괜히 너만 헛걸음했네. 미안해.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

“아뇨, 아뇨……. 어머니가 사과하실 필요는……. 저야말로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하죠.”

“그런 말 말래도! 태섭이 네 전화는 언제든 환영이야. 대만이 걔는 참, 아무리 덜렁거려도 덜렁거릴 일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걸 까먹는다니? 응? 둘이 그렇게나 집을 오가는 사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나 집을 오가는 사이에 갑자기 이쪽을 이런 식으로 차단해 버리는 건 대체 무슨 심리일까요? 저야말로 어머님 아들의 머리 뚜껑을 좀 따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태섭은 적당한 웃음과 조만간 형이랑 들르겠다는 인사로 통화를 마쳤다. 현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금속 문을 험악하게 쳐다보던 태섭이 흥,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나중에 형 있을 때 다시 와야겠다고?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정대만이 이 집에 기어들어 오는 모습을 보고 가야겠습니다. 어머님 아들 멱살을 잡아 흔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참을 것 같거든요. 태섭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시각 오후 3시 48분. 단단히 결심하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요, 정대만 씨.


대만은 8시 반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1층 경비실 앞에 5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 저녁도 거른 채 사람을 기다리던 태섭도 잔뜩 지쳐 그냥 집에 갈지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처음 두세 시간 정도는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바닥나자 그럴 수도 없었다. 경비실에 부탁해 휴대폰을 충전하는 동안 할 게 없어진 태섭은 멍하니 앉아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캄캄해지는 주변 풍경에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 살짝 울적해지기도 했다. 웬 총각이 몇 시간째 사람을 기다린다며 이러고 있으니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경비원이 잠시 말을 붙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과 배달 기사들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태섭을 흘끔거리고 지나갔다. 그런 긴긴 기다림 끝에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걸어오는 걸 본 순간, 태섭은 지쳐 있던 몸에 열이 확 도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에서 본 대만은 뭔 중요한 자리에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잘 빼입은 차림이었다. 게다가 머리를 올려 한껏 멋까지 낸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태섭의 눈썹이 절로 일그러졌다.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경비실 앞에 사천왕처럼 진을 친 모습에 대만이 우뚝 멈춰 섰다.

“…네가 왜 여기 있냐.”

웅얼대는 느린 말투였다. 그걸 들은 태섭의 눈초리는 더 매서워졌다. 술 먹었어? 날카롭게 던진 질문에 대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미안하다든가, 언제부터 기다렸냐든가, 춥지 않았냐든가, 그런 말조차 하지 않고 저를 무시하는 모습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태섭은 대만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대만이 제 앞을 스쳐 지나간 순간, 태섭은 들큼한 알콜 냄새 사이에서 낯선 향기를 맡았다. 순간적으로 열 오른 피가 머리로 몰리며 눈앞이 새카매졌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정신이 아찔했다.

태섭이 고개를 홱 돌렸을 때 대만은 막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참이었다. 언제 얼빠지게 앉아 있었냐는 듯 득달같이 일어나 뛰어간 태섭이 반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거칠게 잡아챘다. 덜컹, 큰 소리가 났다. 조금 놀란 눈을 한 대만을 똑바로 노려보며 태섭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태섭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태섭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대만을 쏘아보았고 대만은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14층입니다. 조금 뒤 안내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도망치듯 앞서 내리는 대만의 뒤를 따르며 태섭이 기분 상한 걸 숨기지 않은 말투로 빈정거렸다.

“웬일로 이렇게 근사하게 입으셨을까요, 정대만 선수. 뭐 좋은 술이라도 드셨어요?”

“…대학 동기 결혼한대서 청첩장 모임 다녀온 거야. 거기서 몇 잔 마신 것뿐이고.”

“대학 동기 누가 결혼하는데.”

“은수. 너도 예전에 만난 적 있잖아. 그 축구 하는 애.”

“아, 그래? 은수 형이 그런 향수를 쓰는 줄은 몰랐네. 그 형 취향이 그런 라인인가 봐? 살냄새 엄청 좋다, 응. 향수 이름 좀 알아 오지 그랬어. 아주 진동을 하는데 사람 궁금해지게.”

“…….”

“형 나랑 깨지려고 이래?”

“…….”

“일주일이야,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부재중 전화, 메시지, 내가 얼마나 많이 연락했는지 알아? 알겠지. 1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알겠지. 그런데 다 알면서 왜 답은 안 하는데? 형 기분만 기분이야? 연락 씹힌 나는 얼마나 걱정되고 기분 더러울지 한 번이라도 생각이나 해 봤어? 그리고 형 저거 비밀번호도 바꿨더라. 왜? 집에 뭐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내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으세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태섭의 말에 대만이 머리가 아픈 듯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지친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섭아. 화 많이 난 건 알겠는데 나 지금 멀리 나갔다 와서 피곤하다.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뭐라고? 피곤? 피이고온? 야, 씨발, 정대만.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올 말이야?!”

태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여기서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알아? 자그마치 5시간이야! 지금 형이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피곤할 것 같은데?! 어?! 분노한 태섭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벽과 계단에 부딪혀 증폭된 목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누가 복도에서 이렇게 싸워……. 개념이 없나? 밤중에 이게 뭐야, 시끄럽게. 들어가서 싸울 것이지……. 열렸던 문이 하나둘씩 도로 닫히며 주민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침내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나자 태섭이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 열어요. 난 나중 없어. 난 오늘 이 자리에서 형이랑 담판 지으려고 왔으니까 더 창피해지기 싫으면 들어가서 얘기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태섭은 가디건을 벗어 거실 소파에 내팽개쳤다. 일교차 큰 저녁 기온에 옷깃을 여몄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속이 끓었고 온몸이 뜨거웠다. 씨근대는 숨소리를 내며 등을 돌리자 제 집인데도 신발을 벗을 생각은 않고 그대로 현관 앞에 서 있는 대만이 보였다. 태섭이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말해 봐요.”

“…뭘.”

“연락을 왜 안 받았는데.”

여전히 날이 잔뜩 서 있었지만 복도에서 소리를 지를 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였다. 참고 이해하려 해볼 테니 솔직히 말이나 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부글대는 성질을 죽이고 한발 양보한 태섭과 달리 대만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불편한 기색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러기를 몇 분째. 태섭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날 즈음, 대만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집에 급한 일 있었다며. 나도 그럴 사정이 있었어.

“그래서 그 사정이 뭐냐니까?”

“…….”

“형. 나 지금 형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 날리고 싶은 거 엄청나게 참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도 형이 내 남자친구니까 일단 참아주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그 사정이 뭐냐고요. 홧김에 누구랑 뭐 원나잇이라도 했어요?”

“아니야! 넌 내가 그런 쓰레기 자식으로 보이냐?”

“요 일주일 나한테 했던 짓은 쓰레기 자식이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

“그럼 이거라도 먼저 말해요. 나랑 깨질 거예요? 헤어지고 싶어요? 그런 거야?”

태섭이 굳은 목소리로 재차 따져 물었다. 대만은 어찌할 줄 모르는 눈으로 태섭을 바라보았다. 속 시원히 뭘 털어놓을 생각은 않고 우물쭈물하는 태도에 태섭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어차피 Yes or No잖아요.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 대답해, 정대만. Yes야, No야? 태섭이 언성 높여 채근했다. 금방이라도 또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을 주저하던 대만은 점점 울먹거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결국엔 툭, 투둑.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도 몰라…….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헤어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하잖아……!”

그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허어엉, 끄흡, 으흐윽……. 흑……. 서럽게 통곡하는 정대만을 보자 태섭의 머리끝까지 올라 있던 열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하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태섭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멍하니 대만을 쳐다보았다. 이게 뭔 헛소리야. 그 와중에도 대만은 타일 바닥에 무너진 채 그날의 체육관에서나 들었던 것 같은 감정 실린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밀려오는 심란함에 태섭이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을 내쉬고 현관으로 다가간 태섭은 대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 그래요. 누가 나랑 형이 헤어지는 게 더 낫단 소리를 해.”

“타로가, 끕, 흑.”

“타로?”

“그날 타로 봤는데, 흑, 거기서 그랬단 말이야…….”

그리고 대만은 울음과 딸꾹질 섞인 소리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태섭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그날 술 먹고 타로 봤다가 안 좋은 결과가 나왔고 그게 계속 마음에 남는 바람에 연락할 기분이 아니었다는 거지? 자기는 나한테 잘해주고 싶은데 실제로도 툭하면 다투기나 하고 내 화만 돋우는 것 같으니까 그 타로 결과가 진짜 같아서 신경 쓰였던 거고, 타이밍도 기막히게 내가 사흘이나 연락이 안 되니까 정말 헤어져야 하나 고민하면서 땅굴 좀 팠다 이거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걸 진짜로 믿어요?”

그렇게 타박하는 태섭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실렸다. 대만이 울면서 사실을 털어놓은 순간부터 태섭의 화는 이미 다 풀린 상태였다. 술김에 들은 점사를 가지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할 만큼 정대만이 저를 사랑한다니, 태섭은 눈앞의 남자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라면 지난 일주일 제 복장을 터져 나가게 했던 거야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자꾸만 피식피식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웃지 마. 대만이 잠긴 목소리로 부루퉁하게 말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난리를 쳤다는 사실이 갑자기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더 크게 웃어대며 송태섭은 제 커다랗고 귀여운 애인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부드럽게 이마를 어루만졌다. 모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으로 눈을 뜬 대만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입을 벌린 채 무방비한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는 태섭의 얼굴이 보였다. 간밤에 실컷 울린 눈은 살짝 부은 듯했고 밤새 물고 빤 목덜미에는 붉은 기가 만연했다. 배부른 얼굴로 소유권 주장의 흔적을 바라보던 대만이 손을 뻗어 태섭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장난을 치다가 동그란 맨 이마에는 입을 맞췄다. 으응……. 태섭이 결국 미간을 찡그리며 짜증을 냈다. 어이쿠. 대만이 잽싸게 어깨를 토닥였다. 늦게까지 혹사당한 사람 벌써 깨우면 안 되지. 적당한 압박감 담긴 느린 두드림이 편안했는지 태섭의 숨소리가 이내 다시 노곤해졌다. 우울했던 날이 다 언제였냐는 듯 창밖에서 울리는 까치 소리도 반가웠다. 그런 잔잔하고 행복한 아침의 풍경 속에서 대만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사랑하는 태섭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역시 점 같은 건 믿을 게 못 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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