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오쿠리이누

某日 by 銘

1

카나가와에 이사를 온 후 료타는 종종 어떤 꿈을 꾸었다. 내용은 항상 같았다. 어떤 길 위에 있는 꿈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청량한 밤하늘에는 손톱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주변에서는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와 함께 향긋한 풀내음이 맡아졌다. 료타의 키만큼 높게 자란 수풀이 길의 양옆으로 끝 모르고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마도 산길. 하지만 오르막이 아니니 어쩌면 들길일지도 모른다. 길가에 일정 거리로 늘어선 가로등은 어스름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거기까지 살피고 나면 더 할 게 없어진 료타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밤길을 걷고 있자면 어느 순간 료타의 발소리 사이로 타닥거리는 또 다른 소리가 섞여 들었다. 사람은 아니다. 짐승의 육구가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에 가깝다. 이에 슬그머니 뒤쪽을 곁눈질하면 시야의 바깥으로 일그러지고 검은 것이 보였다. 갯과의 네발짐승과 유사한 모습을 한 그것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료타의 뒤를 따라왔다.

쫓는 것인가?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지? 단지 따라오기만 하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료타는 항상 길을 걷는 중간에 꿈에서 깨었기 때문이었다. 안나의 높은 재잘거림이라던가, 출근하시는 엄마가 현관을 닫는 소리라던가, 자명종의 알람 같은 것들이 매번 료타를 알 수 없는 꿈에서 끌어냈다. 꿈의 끝을 알지 못하고 잠에서 깨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거의 주에 한 번꼴로 꾸는 이 꿈이 예삿일이 아니란 것쯤은 아직 중1에 불과한 료타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두 번이면 단순한 데자뷔지만 그 횟수가 두 손을 꽉 채워 꼽을 정도가 되면 확실한 문제다. 때문에 열 번째로 꿈을 꾼 날, 료타는 이 꿈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료타는 학교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불량해 보이는 눈에 한쪽 귀에는 피어스까지 한 남학생이 종이 치자마자 들이닥치는 걸 본 사서 선생님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꿈과 관련된 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료타의 질문에는 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찾는지 알려주지 않을래? 너무 광범위해서 대답해주기가 어려운걸. 료타는 잠깐 눈을 내리고 콧등을 긁었다. 꿈을 왜 꾸는지 알고 싶어요. 대답을 들은 사서 선생님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책이라면 과학 코너에 가보렴. 460번, 생명과학 쪽의 뇌과학 책들이 도움이 될 거야. 조금 가벼운 내용으로 접하고 싶은 거라면 철학 코너의 140번 심리학 도서들도 참고가 될 것 같고. 료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과학 쪽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료타는 일단 가볍다는 심리학 도서들을 먼저 살피기로 했다. 책장 사이로 들어가 제목에 ‘꿈’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은 모조리 꺼내어 팔 위에 올렸다. 턱 아래까지 쌓인 책들을 위태롭게 들고 넓은 책상 하나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맨 윗 권부터 끌어내려 첫 장을 펼쳤다. 팔락팔락, 일정한 주기로 책장이 하나씩 넘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료타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꺼내 놓았던 심리학 책들을 전부 펼쳐 보고 난 후에는 과학 책까지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료타가 원하는 내용은 그 어느 책에도 없었다. 찾을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꿈이 인간의 욕망과 날것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소망을 대신 충족시키는 도구로서 사용된다거나, 현실의 적응을 위한 무의식적인 노력이 꿈으로 나타난다거나, 렘 수면이 어쩌고 피질 영역이 어쩌고 하는 어렵고 복잡한 말들뿐이었다. 책상에 잔뜩 쌓아두었던 책을 반납 카트에 전부 올려 놓으면서 료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밤길을 걷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오는 개라는 장면이 대체 미야기 료타의 어떤 욕망과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인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어도 이런 심리학적인 분석 도식이 맞아 들어갈 꿈이 아니란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일상의 소재가 꿈의 재료로 쓰인다는 설명도 말이 되지 않았다. 미야기 료타는 산이 아니라 바다에서 살았던 소년이었고, 이사 와서 살고 있는 곳도 높다란 수풀이나 산은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꿈에서 나온 것처럼 커다란 검은 개를 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결국 료타의 꿈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비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료타는 안나가 친구들과 놀러 나간 틈을 타 안방의 책장에서 소녀 잡지를 꺼내 들었다. 안나가 좋아하는 이 잡지에 별자리 운세나 꿈풀이 같은 코너가 실려 있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잡지를 펼치고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던 료타의 눈이 순간 빛났다. 검은 개가 나오는 꿈. 이거다. 료타는 잡지에 코를 박고 내용을 정독했다. 하지만 해당 페이지의 모든 글자를 샅샅이 읽어내렸음에도 그 코너조차도 료타의 꿈을 속 시원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대체로 흉몽이라는 해석이었지만 료타가 이 꿈을 열 번이나 꿀 동안 주변에 별다른 사건사고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것도 도움이 안 되잖아. 짜증 섞인 손길로 잡지를 탁 덮으면서 료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꿈은 뭘까. 자신의 뇌는, 자신의 무의식은 이쪽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걸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료타는 답답함과 짜증을 느꼈다.

그러는 와중에 이 정체불명의 꿈은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올라, 결국 13번째로 꿈을 꾼 다음 날 료타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근처의 신사로 발을 옮겼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신에게라도 빌어서 이 꿈을 그만 꾸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양에서는 13을 불길한 수로 치지 않던가. 이런 꿈을 그 불길한 숫자가 될 때까지 꾸는 건 역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넉넉지 않은 용돈의 형편에 조금 아깝긴 했지만 100엔짜리 동전 두 개를 새전함에 던져 넣었다. 짝짝 두 번 박수를 치고 허리를 숙였다. 눈을 꾹 감고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손을 모았다. 제발 이 이상한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면 적어도 이 꿈이 무슨 뜻인지라도 알게 해주세요. 답답하고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아요. 몇 번이고 그 기도를 되뇌었다.

조그맣고 앳된 학생이 오래도록 기도를 하고 있으니 신경이 쓰였던 건지, 계단을 쓸던 신주가 뒤돌아서는 료타를 가만히 불러세웠다. 무슨 깊은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오랫동안 기도를 하더구나. 사려 깊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료타가 엉망진창인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어도 조회를 빨리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데만 관심 있던 담임이나 싸우지 말라며 의례적인 훈계만 하던 학생주임과는 달랐다. 신주의 부드러운 태도에 조금 경계심이 내려간 료타는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이 사람 신주지. 어차피 이런 이야기야 참배객들에게 지겹게 들을 테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윽고 료타는 조심스럽게 제 꿈을 털어놓았다. 료타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신주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오쿠리이누인 것 같구나.”

“오쿠리이누?”

“그래, 한밤중에 산길을 걸을 때 뒤에 따라붙는다는 개 요괴다.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내륙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야. 실제로 보았다는 전설이 아니라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나도 지금 처음 들었지만.”

내륙이 아니라 먼 섬에서 태어난 료타에게는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오키나와 내에서도 산보다는 바다와 더 인접한 지역에서 살았던 료타는 산짐승 이야기보다는 바다의 전설과 물귀신 괴담에 훨씬 익숙했으니까.

“나름 온순한 요괴다. 단지 길을 걷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해치지 않아.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앞에서 넘어지면 달려들어 잡아먹어 버린다고는 하지만, 그때도 넘어진 게 아니라 사실은 쉬고 싶었던 척 너스레를 떨면 잘 넘어갈 수 있다고 하지. 의외로 귀엽지 않니?”

“어쨌든 달려들 수도 있다는 걸 귀엽다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밤길 가는 나그네를 지켜주는 요괴이니 너무 겁낼 건 없지 않을까. 혹시나 꿈에서 목적지에 다다르면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해 보렴. 그러면 오쿠리이누는 만족해서 돌아갈 거다.”

신주의 설명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 중에 가장 쓸 만한 것이었고 꿈의 내용과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오쿠리이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료타는 그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지켜주는 개. 그렇다면 료타가 오쿠리이누와 함께 가야 하는 목적지는 어디일까? 료타가 걷는 밤의 수풀길은 어디로 연결되는 것일까? 하나의 질문이 해결되고 나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2

오쿠리이누의 꿈을 다시 꾼 것은 여름방학 때였다. 14번째의 꿈이었다. 또냐. 이제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기력도 없어, 료타는 질렸다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발을 옮겼다. 조금 걷고 있자니 어느새 뒤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슬쩍 곁눈질한 뒤쪽에는 아니나 다를까, 검은 짐승의 형체가 있었다. 다시 앞을 보며 료타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이번에도 한참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꿈에서 깰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엔 뭐가 날 깨우려나. 아침부터 놀아달라고 보채는 안나? 설거지하느라 달그락대는 그릇 소리? 이른 아침부터 우는 까마귀?

그런데 이번 꿈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체감상 평소보다 한참은 더 걸은 것 같은데도 료타를 잠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없었다. 아직도 한참이나 펼쳐진 길을 노려보며 료타는 계속 이렇게 걸어도 되는 건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료타가 멈춰서자 따라오던 기척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그 기척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대로 돌아갈 곳도 없고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도 몰랐기에, 긴 고민 끝에 료타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걷기를 선택했다. 한숨을 쉰 료타가 다시 발을 옮기자 짐승의 기척도 재차 료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료타는 어느 순간 길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넓어질 뿐만 아니라 신발 밑창에 밟히는 질감도 달라지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는 잘 다져진 흙길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콘크리트의 느낌이 났다. 그동안의 꿈과는 다른 장소가 나오려는 것 같았다. 료타는 이전에 신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꿈에서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럼 이 앞에는 내가 다다라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건가. 열네 번이나 이런 이상한 꿈을 꿔야 했을 만큼 제가 절실하게 향해야 했던 곳은 과연 어디일까. 료타는 저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료타의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는 여전히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널찍한 농구 코트였다.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하얀 선과 높게 선 두 대의 골대. 이와 비슷한 장소를 아는지 되짚어 보려 해도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흔하디흔한 형태의 야외 코트라, 료타는 열네 번의 꿈을 꾸면서 반드시 와야만 했던 장소가 동네 어디에나 있을 그런 코트라는 사실에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코트여도 뭔가 조금 더 특별한 곳일 줄 알았지. 예를 들면 고향의, 소타와 원 온 원을 하던 곳 같은.

하지만 흔한 코트도 코트다. 료타는 코트를 본 순간 공을 튕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입구를 지나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놀랍게도 코트 위에는 주황색 농구공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치 료타를 위해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다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료타는 제 얼굴보다 큰 농구공을 집어 들고 가만히 고무의 향을 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드리블을 시작했다. 눈앞에 상대 선수가 있는 것처럼 공을 돌리다가 수비의 빈틈을 파고들듯 번개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레이업을 시도했다. 퉁 소리와 함께 공은 림에 맞고 튕겨 나갔다. 진심으로 슛을 넣기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기에 낭패감 같은 건 들지 않았지만 골이 들어가지 않은 게 아쉽기는 했다. 잠시 림을 올려다보던 료타는 굴러간 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찰나, 분명 저밖에 없었을 이 장소에, 이 꿈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초등학생?」

료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료타의 눈앞에는 코트와 골대 대신 둥근 전등이 달린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료타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습관적으로 농구공을 들고 나오면서도 료타는 계속해서 꿈을 생각했다. 여전히 농구를 좋아하기는 해도 그게 열네 번의 꿈까지 꾸어야 할 정도였을까. 오쿠리이누는 왜 꿈에 나왔던 걸까. 꿈에서 들렸던 그 목소리는 또 뭐였을까. 이 열네 번째의 꿈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그런 것들을 한참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료타는 동네를 한참 벗어난 곳까지 와 있었다. 주변은 온통 낯선 풍경이었다. 도로도, 길가의 상점들도, 가로수가 심어진 모양도 전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로의 표지판을 올려다보니 제가 집에서 족히 3, 40분은 걸리는 옆 동네까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얼마나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야? 멋쩍은 기분이 되어 뒷머리를 긁적이던 료타는 곧 짧게 한숨을 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왔던 길을 한참이나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것도 꽤 맥이 빠지는 일이라, 료타는 그냥 이 근처의 코트에서 적당히 농구공을 만지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 몇을 붙잡고 야외 코트의 위치를 알아낸 료타는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공원 한복판에 놓인 농구 코트에는 이미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한쪽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골대 아래에 와글와글 몰려들어 장난을 치다가 자기들끼리 적당히 편을 갈랐다. 반대쪽 코트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손을 풀던 료타는 이내 흥미 없다는 얼굴로 드리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 나온 자리는 아니었으니, 구태여 그 아이들에게 끼워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료타는 그저 농구공을 튕길 수만 있으면 되었고 거기에 다른 이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의 드리블 뒤 레이업을 시도하고 그물을 통과하지 못한 공이 림에 맞아 튕겨 나간 순간, 누군가가 불쑥 자리에 끼어들었다.

튀어 나간 농구공을 대신 집어 든 것은 키가 크고 멀끔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얼굴이 앳된 걸 보니 나이는 료타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3점 라인 밖에 서 있던 소년은 제 발치로 굴러온 료타의 공을 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슛을 쏘았다. 완벽한 자세, 완벽한 슛이었다.

“초등학생?”

그물을 통과해 아래로 떨어진 공을 손에 들자 소년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다정하고 살가운 태도였다. 료타는 순간 움찔했다. 초등학생이냐는 물음에 어젯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도 코트에서 혼자 공을 만지고 있다가 웬 목소리가 끼어들었지. 단순한 데자뷔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꿈이었으므로 료타는 어제의 꿈이 예지몽이었을 가능성도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것은 ‘그건 정말 비현실적인 가정’이라는 결론과 ‘그걸 진심으로 믿냐?’는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뿐이었다. 그래서 료타는 이 정도의 일치야 단순한 우연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설마하니 정말 예지몽이겠어? 그리고 속으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중1이거든.

키도 작고 체구도 작다 보니 이렇게 오해받는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덜 자랐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달갑진 않았다. 제게 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양손을 펼치고 있는 소년에게 조금 부은 표정으로 패스를 해주니 소년은 그것을 받아 들어 세 번의 3점을 더 던졌다. 한두 개 정도는 들어가지 않을 법도 한데 세 번 모두 맨 처음의 슛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스위시 샷이었다. 와아……. 료타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풀린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골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깔끔한 3점 슛을 던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가시가 조금 누그러졌다 생각했는지, 소년은 농구공을 료타에게 다시 던져주고 그 앞에서 즐거운 얼굴로 원 온 원의 수비 자세를 취했다. 엉겁결에 공을 받아 든 료타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손바닥으로 한 번 쳐올려 도발까지 걸었다.

이쯤 되니 료타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저를 막아서는 소년을 뚫기 위해 드리블을 하며 틈을 엿보았다. 바쁘게 기회를 노리는 료타의 눈을 보고 소년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드리블만으로는 나를 못 뚫어. 압박을 해봐, 압박을!”

……아.

료타는 더 이상 공을 잡지 못했다. 힘없는 손바닥에 부딪힌 농구공이 관성력을 잃고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갔다. 소쨩. 료타의 심장이 크게 울렁였다.

료타는 소타의 일을 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묻어두고 지냈다. 그리워하고 동경하며 여전히 애정을 품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소타를 생각하면 깊은 죄악감과 찌르는 듯한 아픔이 동시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카나가와에 이사를 와 농구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하게 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로 소타의 모든 것을 빼앗은 주제에 그 뒤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소년이 바로 그 기억을 건드리고 있었다. 소타가 원 온 원을 하며 농구를 알려주던 장면을, 료타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형과의 마지막 날을.

이상한 꿈과 똑같이 구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형처럼 굴고 있기까지 한 소년은 마치 잘 빚어져 현실에 도래한 악몽 같았다. 갑자기 눈앞의 소년이 껄끄러워졌다. 하고 싶지 않아. 의욕을 잃은 료타는 농구공을 집기 위해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모처럼의 테크닉이 아깝잖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료타는 소년에게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코트를 떠났다. 다음에는 이기러 와! 나중을 기약하는 소년의 마지막 말도 외면했다.

별것 아닌 에피소드라고 생각했고 금방 잊힐 일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오랜만에 누군가와 한 번 더 농구를 했다는 경험과 다정하게 저를 봐주려던 소년의 태도는 쉽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의 료타는 아주 외로웠으므로, 소년이 보여준 다정한 관심은 료타의 가슴을 다른 의미로 울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는 가슴에 일부러 자신에게 온갖 핑계를 대며 그 코트에 두세 번쯤 더 가보았으나 꿈처럼 다가온 소년은 정말 꿈이었던 것처럼 다시는 만날 수 없었고, 그날을 기점으로 료타의 꿈도 완전히 끊겼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료타는 한 번도 오쿠리이누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료타는 거기에서 모든 것이 전부 끝난 줄로만 알았다.

3

소년과의 만남 이후 농구부에 들어갔던 료타는 고등학교에 와서도 농구부에 입부 신청서를 써냈다. 농구보다 잿밥에 조금 더 관심이 많았던 입부이긴 했으나 이왕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잘 해내고 싶었고 좋은 외부 성적도 기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은 농구에 큰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고 대회 진출에도 거의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실망스러웠는데 그나마 부 활동에 열을 올리는 아카기와도 하나하나 지독하게 맞지 않으니, 일이 마음대로 풀리는 게 없어 료타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 맞아. 완전 안 맞아!”

그날도 손발이 맞지 않는 아카기와 한바탕 입씨름을 한 료타는 불평을 잔뜩 늘어놓으며 체육관을 걸어 나왔고, 야스하루가 뒤를 따르며 짜증을 내는 그를 달랬다.

“기대하고 있어서 그래. 아카기 선배는 누구보다 료타를……”

“뭐?”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힌 것은 그때였다. 꽤 단단한 가슴팍에 정통으로 얼굴을 들이박은 탓에 료타는 얼얼한 코를 부여잡고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본 상대의 얼굴은 일순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지? 어딘가 낯이 익은데. 어디에서 본 적이 있나? 잠시 의아해하던 사이, 순간 료타의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쳐 가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아, 그 사람이구나.

미츠이 히사시. 카나가와 전 중학 MVP. 그리고 중학생 료타에게 원 온 원을 하자고 다가왔던 그 소년.

그때보다 키는 한참이나 더 컸고 머리 모양도 얼굴선도 꽤 달라져 있었지만 앳된 시절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그때의 소년이란 걸 알아채자 료타는 내심 반가움을 느꼈다. 같은 학교였구나. 이 사람도 쇼호쿠에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뒤따라오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농구부에선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거기에 머리를 기른 것도 모자라 이런 불량한 사람들을 보란 듯이 꽁무니에 달고 다니고 말이야…….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는 건가? 왜?

의문을 채 곱씹어볼 새도 없이 미츠이는 료타에게 시비를 걸었다. 땅꼬마라고, 신장도 작은 주제에 무슨 농구냐고. 미츠이의 말에서는 상당한 적대감이 느껴졌고 그것은 료타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 료타를 비웃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농구까지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이 무시당했다는 불쾌감뿐만은 아니었다. 먼저 농구를 하자고 서슴없이 다가왔던 그 다정한 사람이 이제는 농구를 부정하듯이 폄하하는 게 속이 끓었다. 웃기지도 않아. 그래서 료타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야, 긴 머리! 언제든지 원 온 원으로 붙어줄게! 그 대신 말이야, 너 나한테 지면 삭발이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도발에 걸린 미츠이의 무리가 저와 야스하루를 잡으려는 걸 피해 바람같이 도망치며 료타는 속이 뒤틀리는 느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츠이와 부딪힌 그날 밤, 료타는 그 꿈을 오랜만에 다시 꾸었다. 제가 낯익은 산길에 서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료타는 눈썹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이건 또 새롭네. 이거 몇 년 만이더라. 료타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속의 산길은 몇 년 전 기억 그대로였다. 손톱 같은 초승달과 곧게 펼쳐진 흙길,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와 바람을 타고 오는 풀내음. 하나도 달라진 것 없는 풍경이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료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 꿀 때나 걱정스러웠지, 그 강아지의 정체도 다 알아버린 지금은 별로 어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밤 풍경을 즐기며 걷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어쩌면 요즈음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던 제게 무의식이 주는 선물 같은 휴식일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참 평화롭네. 꿈이란 걸 알면서도 피부에 닿아 오는 시원한 밤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져 어느새 자연스레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어느 순간 먼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기척이 느껴졌다. 역시나 싶었고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익숙한 존재가 등장하면서 꿈속의 이 이상한 밤 산책이 어딘가 정겹게 다가와, 료타는 다소 감상적인 기분으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전의 꿈에서 오쿠리이누는 료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 체감되는 거리는 그때보다 더 짧았고 심지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불청객이라도 본 것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라니. 예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료타의 등줄기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무의식 어딘가에서 경고의 적색등이 깜빡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료타는 엄습하는 긴장과 두려움에 점점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벗어나야 해. 걸음을 빨리 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짐승도 그 뒤를 무섭게 쫓아왔다. 맹견이 험악하게 짖으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드는 료타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강점 중 하나였다. 중학생 때는 체육 시간의 달리기 성적을 보고 육상부에서 그를 탐냈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카나가와에 저보다 빠른 고교 농구선수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다리를 재촉하며 달음박질쳐도 저를 뒤쫓는 괴물과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뛰고 있는데도 따돌릴 수가 없었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일그러지다 못해 황천에서 올라온 것만 같은 불결하고 뒤틀린 기운이 등 뒤를 가득 채웠다. 안 돼. 잡히면 안 돼. 료타는 이를 꽉 깨물고 땅을 박찼다.

“으악!”

갑자기 오른발이 어딘가에 걸렸다. 중심을 잃은 료타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세게 나동그라졌다. 맨 무릎이 바닥에 쓸려 사정없이 갈려 나갔다. 까지고 벗겨진 상처에 모래와 흙이 마구 파고들어 고통을 더했다. 아파! 꿈인데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거야?

하지만 아프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료타는 쫓기고 있었고, 지금은 무방비했다. 괴물 개가 짖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제기랄. 료타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세웠다.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얼얼해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다시 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발을 떼기도 전에 료타는 강한 충격을 받고 다시 앞으로 넘어졌다. 맹렬하게 달려와 그를 덮친 커다란 개가 체중을 실어 료타를 짓눌렀다. 더운 숨을 뿜고 흰 침을 뚝뚝 흘리며 이를 잔뜩 내보인 짐승이 사냥감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며 생명이 빠져나가는 충격적인 고통에 료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동공이 커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목을 움켜쥐었다. 익숙한 천장, 어렴풋이 새어 들어오는 바깥의 불빛, 몸을 감싸는 이불의 감촉, 모든 게 조금 전의 일은 꿈에 불과했고 지금은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료타의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쿠리이누에게 물어뜯긴 고통이 여지껏 생생한 가운데, 료타는 제 손바닥 아래로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온몸을 적신 식은땀이었음은 조금 뒤 깨달았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여린 살 속으로 파고들던 감촉은 몇 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선명했다. 충격적인 악몽에 더 잠들 수 없던 료타는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남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그네의 뒤를 따를 뿐이라던 온순한 오쿠리이누에게 이유도 모른 채 무참히 공격당한 충격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4

그날 이후 료타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이번에도 중학생 때처럼 이 꿈을 반복해서 꾸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부 활동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자는 시각도 최대한 미뤘고 잠에 들었더라도 그 산길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장면이 뇌 내에서 재현되려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차렸다. 30분~1시간 단위의 선잠을 반복한 몸은 죽을 것 같은 피로를 호소하며 사흘 만에 한계에 달했지만 료타는 어떻게든 꿈을 피하려 부단히도 애썼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꿈은 료타를 거듭 찾아왔다. 오쿠리이누에게 공격당한 후 처음으로 꿈을 꿨던 날에는 깨어났을 때 실제로 온몸이 다 결렸을 정도로 잔뜩 긴장을 했다. 깨어나기 위해 가로등 기둥에 이마를 세게 들이박아 보기도 했다. 오쿠리이누가 길을 어느 정도 걸은 후부터 나타났다는 걸 기억하고는 아예 시작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을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런다고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몇 번의 시도 끝에 학습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걸었다. 적어도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지루한 시간을 억지로 때우거나 머리를 박는 고통을 느끼는 것보단 훨씬 나았으므로.

뜻밖에도 오쿠리이누는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길옆으로 늘어선 풀숲 사이에서 간혹 은은한 기척이나 적대적인 시선이 느껴지긴 했어도 이전처럼 직접적으로 길을 따르며 뒤를 쫓는 형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중학생 때의 마지막 꿈처럼 또 갑자기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으나 예상외로 몇 달이 지나도록 료타의 꿈은 검은 짐승의 존재가 빠져 있는 그대로였다.

무의식의 오쿠리이누가 꿈의 주인에게 흥미를 잃은 건지 아니면 현실의 부 활동에 모든 신경이 다 쏠리는 바람에 감상적인 장면을 상상해 낼 기운도 없던 탓이었는지 꿈의 빈도도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덕분에 바깥 공기에 찬 기운이 스미기 시작했을 때는 오쿠리이누 뿐만 아니라 꿈이란 것 자체를 거의 꾸지 않게 되어, 겨울 대회의 예선이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엔 료타는 오쿠리이누의 존재 자체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습을 감춘 오쿠리이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라도 하듯, 미츠이의 험악한 친구들이 갑자기 료타를 불러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다.

“미야기!”

방과 후 체육관에 가기 위해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온 료타는 제 이름을 크게 부르는 굵은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찌푸린 남학생이 복도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료타를 쏘아보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미츠이의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젠장. 가만히 미간을 찌푸린 료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어깨를 쫙 펴며 딱딱하게 물었다.

“뭡니까.”

“따라와.”

“지금부터 부 활동에 가야 하는데.”

“선배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운동부 녀석들은 버릇이 꽤 잘 든 줄 알았는데. 비아냥대는 꼴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하든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게 뻔해 료타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버티든 버티지 않든 어딘가에 끌려갈 건 자명했고, 끌려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눈에 선했다. 빌어먹을. 또 이렇게 되는 건가. 고등학교에 와서는 좀 평온하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아니지, 사실은 그날 미츠이와 부딪혔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도발을 걸었으니 신경이 거슬린 미츠이가 저를 손 봐주려 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반년이나 넘게 지난 시점에서, 이제 와서 저를 괴롭힐 마음을 먹었다는 게 조금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동안엔 뭘 하다가?

“이 자식아, 귀가 먹었어?!”

생각에 잠긴 료타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미츠이의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두 사람을 흘끔거리더니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아직 교실에 있던 일부도 불안한 눈빛으로 복도 창문을 살피는 게 보였다. 료타는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순순히 따라가 제 몸을 샌드백으로 헌납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결국 료타는 짧은 고민 끝에 발을 떼었고,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의 비웃음을 받아야 했다.

미츠이의 친구가 료타를 등 떠밀어 데려간 곳은 옥상이었다. 장소 선정이 너무 정석적인 양키들의 그림이라 조금 맥이 빠질 정도였다. 옥상 문이 열리자마자 료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저를 기다리고 있던 미츠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폼 잡고 있는 건 여전하군. 괜히 씁쓸해지는 입안을 혀로 가만히 훑었다.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옥상에 있는 것은 미츠이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있는 놈까지 포함하면 다섯인가. 그에 비하면 이쪽은 료타 하나. 지나치게 불리한 싸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료타는 여기에서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얕보이면 얕보일수록 폭력은 더 흡족하게 날뛰는 법이니까.

“불량만화냐? 진짜로 있구나, 이런 거.”

그래서 일부러 턱을 치켜들며 패거리를 비웃었다. 나이를 열일곱이나 먹은 주제에 혼자인 후배를 데려다가 린치를 가하려는 비겁함을 한껏 깔보았다. 긴장과 두려움에 떨려 오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감추었다. 눈앞의 미츠이처럼 잔뜩 폼을 잡고 당당한 태도로 그를 노려보았다. 료타를 내려다보던 미츠이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료타는 눈썹을 올리며 더욱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츠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의 그 일그러진 눈썹이 싫어.”

“나는 네 살랑거리는 긴 머리가 싫어.”

료타가 도발을 맞받아치자 미츠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료타는 제 뺨에 가해진 강한 충격을 느꼈다. 내 이름이 뭔지 정확히 말해! 미츠이가 격앙된 소리를 질렀다.

양키 짓을 하는 것에 비해 제대로 알고 쓴 주먹은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지만 미츠이의 체격이 체격이다 보니 실린 힘 자체는 상당했다. 그 덕에 입안이 터진 모양인지 혀끝에 미끌거리는 액체가 느껴졌다. 주먹을 맞고 비틀거린 료타는 겨우 균형을 잡고 입을 가렸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시뻘건 피가 손바닥 가득 묻어났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료타는 피 묻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점점 울분이 북받쳤다. 료타는 이를 악물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했다고? 나는 농구밖에 안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야. 그런데 난 왜 지금 와서 이유도 모르고 당신에게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해야 해?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누군지도 모르는 나한테 그렇게 다정하게 다가왔었잖아. 다음에도 농구를 하자고 했잖아. 테크닉이 아쉽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의 당신은 왜 이 모양인 건데. 왜 그렇게 날 부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데.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서. 이제는 내 농구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진 주제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미츠이를 기다렸던 어린 시절의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코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이 전부 무의미해졌다. 이유도 모르고 얻어맞은 순간 미츠이에게 품고 있던 일말의 기대마저 모조리 사라졌다. 주먹을 꽉 쥔 료타는 턱을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미츠이의 머리카락을 보자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나마 제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으며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료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제 어깨를 잡는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주먹을 맞고 움츠러들기는커녕 분노한 얼굴로 미츠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되려 미츠이가 놀랄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료타는 미츠이가 채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곧장 머리를 들이받았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미츠이의 코피가 터졌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츠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저를 붙잡은 료타를 힘껏 뿌리쳤다. 밀쳐지는 힘에 나동그라질 뻔한 몸을 바로 세우고 료타는 다시금 미츠이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야! 패거리들이 료타의 복부를 걷어차 미츠이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나 내장이 뒤흔들리고 피를 토할 것 같은 아픔에도 료타는 굴하지 않았다. 으아아아! 절규와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미츠이에게 덤벼들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체중을 잔뜩 실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뒤에서 팔을 붙잡혀 끌려 가면서도 악을 썼다. 빠져나가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이거 놔! 놓으라고! 발악하는 료타의 얼굴에 패거리들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문득 시야 옆쪽에서 미츠이가 무언가를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돌리니 발길질을 당한 농구화가 쓰레기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안 돼. 료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눈동자가 굴러가는 농구화를 애처롭게 좇았다.

그렇지만 농구화를 더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번개같이 밀어닥친 미츠이가 패거리를 밀치고 료타에게 직접 주먹질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언젠가의 꿈에서 무자비하게 목덜미를 물어뜯던 이빨 같은 손이었고, 구슬플 정도로 처절한 분노가 담겨 있는 손이었다. 미츠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억센 주먹에 얼굴이 돌아가고 눈이 부어오르며 코피가 터졌다. 머리가 울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료타는 미츠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를 마주 보는 미츠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료타는 기어이 몸을 빼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게 다시 머리를 들이받았다. 피를 흘리며 상처 입은 개처럼 신음하는 얼굴에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패거리들에게 다시 붙잡혀 무참히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몸을 일으켜 미츠이에게 달려들어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제게 잔뜩 두들겨 맞은 미츠이가 결국 의식을 잃은 후에도 료타의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 료타가 반항할 기력 없이 축 늘어진 후에야 패거리들은 린치를 멈췄다. 료타를 그대로 내팽개친 그들은 정신을 잃은 미츠이를 부축하며 황급히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온 옥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료타는 바닥의 한기와 폭력의 고통이 뼛속까지 사무치는 걸 느꼈다. 온몸이 산산조각이라도 난 것 같았다.

때마침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얗고 차가운 덩어리가 피범벅이 된 얼굴 위로 하나둘씩 내려앉았다. 힘없이 내려앉은 눈송이는 피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안 그래도 희미했던 존재감이 세상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질없고 의미 없는 추락이었다.

……쓰레기 같아.

인생의 첫눈을 맞으며 료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5

료타는 겨울이 다 지나도록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미츠이 패거리와 싸운 후 오토바이 사고까지 겹치면서 긴 입원 기간과 재활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입을 모을 정도로 부러졌던 뼈는 전부 멀끔하게 붙었지만 사고 이전으로 몸을 다시 끌어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더 녹록지 않았다. 지겨울 정도로 기나긴 회복 기간을 거치고 마침내 등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새 학기가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2학년 첫 등교 날, 종이 상자의 봉인을 뜯고 농구화를 꺼내는 료타의 가슴은 드디어 농구를 할 수 있다는 벅찬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몇 개월을 아무것도 못 한 만큼 올해는 아카기, 코구레와 함께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도 단단히 다졌다. 병문안을 왔던 야스하루에게 괜찮은 1학년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올해는 현 예선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품었다. 이제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츠이가 료타를 막아섰다. 료타가 돌아왔다는 걸 알자마자 미츠이는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달아나도 집요하게 쫓아오던 꿈속의 개처럼 그를 물고 늘어지며 끈질기게 괴롭히려 들었다. 복귀한 첫날부터 그렇게 시비를 걸어온 것도 모자라 며칠 뒤에는 외부인까지 끌어들여 농구부를 부수러 왔다. 그날의 옥상에서처럼 료타를 다시 한번 산산조각 내고 고개조차 들지 못할 만큼 완전히 짓밟으려고 했다. 료타뿐만 아니라 관계없는 다른 부원들과 매니저인 아야코까지 건드릴 정도로 극단적으로 굴었다. 사쿠라기와 그의 친구들에게 묵사발이 나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료타가 박살이 나야지만 제가 살 수 있을 것처럼, 아니, 오히려 저까지 이 자리에서 완전히 부서져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끝까지 발악했다. 저와 마찬가지인 피투성이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미츠이를 보며 료타는 분노를 넘어선 답답함을 느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 나를 부수는 일에 이렇게나 집착하느냔 말이야? 내가 대체 당신에게 뭐길래? 내가 부서지는 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대체 왜 그렇게 나를…… 농구부를 미워하는 거야?

보다 못한 코구레가 들려준 이야기가 끝나자 료타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맥이 빠졌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배신감과 원망 대신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차올랐다. 당신이 농구를 그만둔 이유가 그거였구나. 기대주 역할을 해낼 수 없는 자신에게 실망해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농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토록 강렬하게 증오하게 되었던 거였어.

농구를 사랑했던 자신을, 한 사람을 바닥까지 절망시킬 만큼 농구가 큰 존재였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외면하려는 미츠이의 모습이 슬프도록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료타는 그에게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소중했던 존재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이 잿빛으로 물드는 느낌이 어떤 것일지 너무도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다 밝혀진 후에도 격렬하게 농구를 거부하던 미츠이는 2년 만에 옛 은사를 마주한 뒤 결국 무너져 내렸다. 제 마음을 더 외면하지 못하고 농구가 하고 싶다며 주저앉아 흐느꼈다. 움츠러든 어깨가 처량하게 떨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료타는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마침내 진심을 내보인 미츠이를 용서했다.


며칠 뒤 료타는 체육관 앞에서 미츠이와 마주쳤다. 밴드가 덕지덕지 붙고 시퍼런 멍이 남은 얼굴은 그날과 동일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뭡니까, 그 머리? 설마 돌아오려고……?”

“시끄러워.”

놀란 얼굴로 묻자마자 미츠이는 인상을 구기며 강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리고 제가 먼저 몸을 돌려 체육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리는 통에, 어쩌다 보니 료타가 그의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라커룸 안을 둘러보던 미츠이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로커 하나를 열고 그 안에 제 가방을 올려놓았다. 잘 개어진 운동복과 농구화를 꺼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료타는 네 발자국쯤 떨어진 그를 계속 흘긋거렸다. 료타의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을 텐데도 미츠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료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벤치에 앉아 출정을 앞둔 장수 같은 표정으로 농구화의 끈을 하나하나 꿰고 있을 따름이었다. 미츠이를 신경 쓰느라 평소보다 환복이 늦어진 료타는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라커룸을 나서게 되었다. 복도를 지나 체육관까지 들어가는 짧은 길이 숨 막히게 어색했다.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열린 문 사이로 부원들이 연습을 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미야기.”

계속 조용하기만 하던 미츠이가 갑자기 료타의 이름을 불렀다. 문 앞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아까 설마 돌아올 생각인 거냐고 물었지.”

“……예. 뭐.”

조금 전의 장면을 떠올린 료타가 우물거리며 머쓱하게 대답하자 미츠이는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이걸 알아둬. 난, 포기가 서툰 남자야.”

말을 끝낸 미츠이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것도 정자세의 아주 깊은 각도였다. 히이익. 료타가 경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체육관이 조용해졌다. 열네 쌍의 눈동자가 전부 미츠이의 정수리로 향했다.

“농구부에 큰 폐를 끼쳤습니다.”

미츠이가 정중하고 깍듯하게 사과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양키들을 잔뜩 이끌고 와 농구부를 폐부시키려 하던 사람이 멀끔하게 돌아와 제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은 놀랍도록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제 생각에도 고작 사과 한마디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았는지 미츠이는 한동안 허리를 들지 않았고, 그것은 아카기와 코구레를 비롯해 체육관에 있던 그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숨 막힐 정도로 기나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료타 쪽이었다. 들으란 듯 한숨을 크게 내쉰 료타는 주먹으로 미츠이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쳤다.

“적당히 하고 일어나요. 나 같으면 2년 쉰 게 아까워서라도 이럴 시간에 드리블 연습이나 더 했겠다.”

퉁명스럽게 핀잔을 준 료타는 얼빠진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미츠이를 지나쳐 체육관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안녕, 야스. 나도 공 좀 줄래? 어? 어……. 여기 있어. 야스하루가 얼떨떨하게 건네준 공을 받아 들고 료타는 다시 뒤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여전히 체육관 문 앞에 멀대처럼 서 있는 미츠이였다. 이봐요, 미츠이 선배. 료타가 입을 열자 이번엔 체육관 안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얼른 들어와서 연습이나 해요. 전국 제패를 해내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요.”

부원들이 경악에 찬 눈으로 저를 보거나 말거나 료타는 오랜 지인이라도 맞이하는 것처럼 씩 웃으며 미츠이에게 농구공을 던져주었다.

그날 밤, 료타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화창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풀내음이 맡아지는 여상한 풍경이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초승달 걸린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던 료타는 늘 그랬듯 가로등 아래를 지나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게 몇 번째의 꿈인지는 더 이상 세지 않은 지 오래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발을 옮긴다는 행위만 멍하니 반복하고 있던 료타는 언젠가부터 뒤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섞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쿠리이누였다.

심하게 공격 당했던 이전의 기억이 있다 보니 다소 긴장하며 뒤쪽을 곁눈질했으나 우려했던 적대감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중학생 때의 첫 꿈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면 오늘은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 건가. 완전히 마음이 놓인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패턴으로 보았을 때 여기서 갑자기 달려들진 않을 것 같아 료타는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처음의 패턴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서는 금방 잠에서 깰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조금은 있었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아까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료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최신 노래의 멜로디를 가볍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발에 밟히는 바닥의 질감이 뭔가 바뀌는 것 같다 싶더니 조금 뒤 눈앞에 드러난 것은 철제 펜스로 둘러싸인 야외 코트였다. 어라, 이거……. 료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어린 미츠이 선배를 만났을 때도 이런 비슷한 꿈을 꿨는데. 이거 혹시 그때 꿈에서 본 코트 아니야?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빼어 넘겨다 본 펜스 안쪽에는 주황색 농구공이 굴러다녔다. 그걸 본 료타는 확신했다. 맞네, 똑같네. 이건 그때 거기야. 뇌란 건 신기하구나. 어떻게 5년 전 꿈의 장소를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는 거지?

코너를 돌아 어렴풋한 기억 속의 입구를 발견한 료타가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을 때였다. 멍! 갑자기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요괴답게 일그러진 형태를 띤 검은 개가 천천히 료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쿠리이누를 본 것은 처참하게 물어뜯기던 때가 마지막이었던지라 료타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를 감쌌다. 하지만 검은 개는 그저 몇 걸음 앞에서 료타를 올려다보며 온순한 태도로 천천히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료타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오쿠리이누가 가까이 다가와 료타의 냄새를 맡았다. 킁킁대는 가벼운 콧김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너, 미츠이 선배와 연관이 있구나. 아니면 네가 바로 그 사람인가.”

료타의 말에 오쿠리이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싶더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며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꼬리가 정답을 대신 알려주는 것만 같아 료타는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등을 쓰다듬어주자 개는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료타의 손길을 받기 시작했다. 뻣뻣한 감이 있는 검은 털을 매만지면서 료타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료타는 저도 모르게 오쿠리이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중학생 때 신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어. 이 꿈을 너무 많이 꿨거든. 열 번을 넘게 꾸니 심각한 문제다 싶었지. 그때 만난 신주가 네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 목적지까지 왔을 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했다면 네가 만족해서 돌아갔을 거라고. 지금 갑자기 그 말이 떠올라서 자세히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내가 그랬던 적이 없더라. 코트에서도 그렇고 꿈에서도 그렇고 한 번도 네게 고맙단 말을 한 적이 없었어. 뭐, 코트에서의 일은 네가 정말로 그 사람이라면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하여튼 그래서, 음, 하고 싶은 말은.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인사를 하고 싶단 거였어.”

미미하게 뺨을 붉힌 료타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이 모든 게 내 착각이고 지레짐작일 수도 있지만, 뭐, 말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혼잣말을 끝낸 료타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고마워요, 미츠이 선배. 그날 당신이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다음에는’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다시 농구를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농구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들어갔더라도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겠죠. 하지만 당신 덕분에 나는 더 늦지 않게 지금까지 농구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내가 있어야 할 곳, 가야 했던 곳으로 이끌어주어서…… 농구라는 길을 찾을 때까지 함께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말을 끝낸 료타는 진지한 태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오쿠리이누가 머리를 들어 촉촉한 코로 료타의 뺨을 툭 쳤다. 그리고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마구 핥아댔다. 으악, 잠깐만! 제게 달려드는 오쿠리이누를 겨우 진정시켜 떨어뜨려 놓은 료타가 축축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어쩐지 제 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사람이 웃는 모양처럼 휘어진 것 같아, ‘개도 웃을 줄 아나?’ 료타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멍멍! 높은 소리로 짖으면서 몸을 일으킨 검은 개가 코트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료타를 돌아보며 꼬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료타가 멀거니 보고만 있자 농구공 주변을 맴돈 뒤 다시 입구 쪽으로 다가오며 몇 번 더 짖었다. 농구공 가지고 놀자고? 료타가 묻자 검은 개는 신난 기색으로 주변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마치 주인에게 놀자고 조르는 것 같은 귀여운 모양새에 료타는 웃음을 터트렸다.

“개인데도 농구할 수 있긴 해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귀를 찢는 시끄러운 소리가 평화로운 밤의 풍경을 덮쳤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료타의 눈앞엔 조금 전까지의 농구 코트와 오쿠리이누 대신 어두운 벽지가 발린 제 방의 천장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료타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머리맡에서 자명종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전 5시. 초여름의 이른 아침이 푸르게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시계를 확인한 료타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을 개고 상쾌한 기분으로 창문을 열어 새벽의 공기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쩐지 오늘 아침의 체육관에는 미츠이가 먼저 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6

긴 세월 동안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던 게 환상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그날부로 오쿠리이누의 꿈은 완전히 끊겼다. 더는 만날 수 없는 오쿠리이누 대신 료타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이미 1년을 같이 보낸 두 선배와 2학년들에 이어 다섯 명의 1학년들이 새롭게 합류했다.

그리고 미츠이도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두들겨 패고 이빨을 날려 먹은 게 언제였냐는 듯 두 사람은 형제처럼 사이좋은 콤비가 되었다. 같이 연습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같은 하굣길을 걸어 귀가를 했다. 실없는 농담을 하고 스스럼없이 장난을 쳤다. 진지한 농구 이야기를 나누고 타교의 선수들을 분석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옆자리를 꿰찼다. 같은 가드진으로서 눈빛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최적의 타이밍에 공을 건넸다. 더 이상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츠이의 복귀로 BEST 5 체제가 완성된 쇼호쿠는 현 예선에서 미우라다이, 스미노, 다카바다케와 츠쿠부까지 어렵지 않게 꺾으며 8강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강팀으로 명성이 자자한 쇼요와 료난까지 이기고 전국대회 진출을 확정 지었다. 작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창설 이래 최대의 성적이자 아카기의 오랜 염원을 이룰 첫걸음이기도 했다. 전국대회를 목전에 두고 료타는 왼쪽 손목을 꽉 쥐었다. 소타의 꿈이기도 했던 산노와의 결전을 제가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속이 크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히로시마로 향하는 신칸센은 조용했지만 그건 부원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라거나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예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 대진표에서 쇼호쿠가 죽음의 조에 속한 걸 본 데다가 토요타마의 선수진에게 대놓고 도발 당하기까지 한 후로 부원들은 급격히 말이 없어졌다. 일부 벤치 멤버들은 정말로 크게 동요해 기가 조금 죽은 것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료타 주변에 앉은 부원들은 긴장이고 자시고, 그런 것쯤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자고 있었다. 아카기야 듬직한 주장이었고 루카와는 어디서나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는 녀석인 데다 사쿠라기도 워낙 쇠심줄 같은 신경을 지녔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료타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연신 힐끔거렸다. 미츠이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작게 코까지 고는 중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진 이 사람도 다른 부원들과 함께 산노가 상대라는 것에 긴장하고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평하게 곯아떨어져 있는 게 언뜻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토요타마야 그렇더라도 산노를 생각하면 큰 불안감이 몰려와 료타는 미츠이와 달리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으니까. 중학생 때긴 했어도 전국대회를 한 번 경험해 봤던 사람은 역시 다르다는 건가. 료타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미츠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료타는 급히 놀란 숨을 들이켰다. 좀 전까지 곯아떨어져 있던 미츠이가 어느새 눈을 뜨고 료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그렇게 쳐다볼 정도로 내가 잘생겼다던가?”

“……그 낡아빠진 작업 멘트는 대체 뭐예요?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그러는 넌. 여자애도 아닌데 왜 아까부터 날 그렇게 보지?”

“사람이 자리가 마주 보고 있으니 좀 볼 수도 있지.”

“그런 것치고 너무 노골적으로 훔쳐보지 않았냐?”

“그러니까 훔쳐보지 않았다고요! 당신 자의식이 과해.”

“긴장돼?”

미츠이의 난데없는 말에 료타는 흠칫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훔쳐봤다느니 어떻다느니 우겨대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한 녹색으로 빛나는 미츠이의 눈동자가 마치 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료타는 대답 없이 헛기침을 하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우물대는 소리로 대답하자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양손으로 료타의 얼굴을 덥썩 잡은 미츠이가 그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했다. 뭔데요?! 입술이 양옆에서 눌리는 바람에 엉망이 된 발음으로 항의하자 미츠이가 짝 소리가 나게 료타의 뺨을 한 번 두들겼다.

“아파! 진짜 뭐냐고요, 갑자기!”

“정신 차려. 또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지 말고.”

“뭐라고요?”

미츠이가 두들긴 뺨이 아직도 얼얼해 료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료타가 신경질을 내거나 말거나 태평하게 도로 자리에 앉은 미츠이는 아까처럼 팔짱을 낀 자세로 다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더니 눈꼬리를 휘며 빙긋 웃었다.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한 미츠이가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통에, 료타는 귓가와 목덜미가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젠장, 이 사람은…….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뭐, 이 자식아? 사람이 신경 써서 격려를 해줘도.”

“당연히 잘 할 겁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허망하게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건 미츠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굳은 결의와 각오가 담긴 료타의 말에 미츠이는 조금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씩 웃었다. 당연하지. 올라온 이상 더 높은 곳까지 가야 하지 않겠냐. 이 미츠이 히사시가 있는 쇼호쿠라고. 기세 좋게 자신만만해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료타는 피식 웃었다. 미츠이의 당당하고 뻔뻔한 목소리는 듣고 있으면 정말로 모든 게 다 잘 될 것처럼 믿게 되는 힘이 있었다. 호쾌하게 웃는 미츠이를 보며 료타는 조금 전까지 불안하게 울렁거리던 제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토요타마를 이긴 쇼호쿠는 정말로 산노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몇 년째 우승 트로피를 놓치지 않은 최강자와 올해 처음 인터하이에 올라온 공립고교의 맞대결이란 결과가 정해진 이야기일 것 같았지만, 승패는 모두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최종적으로 전광판에 뜬 점수는 79:78. 쇼호쿠의 승리였다.

그러나 쇼호쿠의 선전도 2회전까지였다. 사쿠라기의 부상과 미츠이의 체력 고갈이 겹치며 주전 선수가 둘이나 빠진 쇼호쿠는 다음 상대였던 아이와학원에게 크게 패배했다. 야스하루와 코구레가 함께 분전했고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미츠이도 후반에는 억지 고집을 부려 중간 출전했으나 이미 잔뜩 벌어진 점수 차를 단숨에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휘슬이 울렸을 때 속상함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몇몇 부원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루카와의 눈빛은 형형해졌고 미츠이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도 분하다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료타는 울지 않았고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그 역시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산노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걸 알았기에 3회전의 패배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밤, 아드레날린이 다 빠지지 않은 탓인지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던 료타는 조심스레 일어나 산책을 나섰다. 같은 방을 쓰는 2학년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 죽여 문을 여닫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여관 밖으로 나왔다. 후텁지근한 여름밤의 공기가 훅 끼쳤다.

료타는 적당한 곳에 기대어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나가와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여름의 별자리를 이어보며 유카타 앞자락을 펄럭여 땀을 식혔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있던 료타는 저뿐인 줄 알았던 곳에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길게 빼니 다리의 난간에 기대선 커다란 인영이 하나 보였다. 어스름한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미츠이의 것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밖에서 부원을 마주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료타는 의외라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뭐 해요? 이 시간에.”

목소리를 들은 미츠이가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미야기냐.”

잠이 오지 않아서. 미츠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난간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어두워서 뭐가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졸졸 흘러가는 냇물의 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경기장에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였으면서. 당장엔 잠이 안 오더라도 누워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누워 있으면 생각이 많아져.”

그렇게 말하는 미츠이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2년 동안 방황하지 않고 꾸준히 농구를 했더라면, 조금 더 빠르게 제 마음을 깨닫고 이른 복귀를 했더라면, 복귀 후에도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 체력 훈련에 시간을 더 할애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라는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미츠이가 농구부에 가지고 있는 책임감과 미안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료타는 아무 말도 얹지 않고 생각에 잠긴 그의 곁을 가만히 지켰다. 한참을 난간 아래만 바라보던 미츠이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 료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넌. 코트를 제일 많이 뛰어다니는 건 너잖냐.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저는 미츠이 선배와는 달리 농구를 쉰 적이 없어서.”

“야.”

발끈하는 미츠이의 목소리에 료타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히 제 반응을 재미있어하는 모습에 미츠이는 인상을 쓰며 불만스러운 어조로 투덜거렸다. 하여튼 전혀 귀엽지 않은 놈. 미츠이 선배 매번 나한테 그 소리 하는 것 같은데, 귀여웠으면 후배를 잘 예뻐해 주기라도 할 셈이었어요? 웃기지 마라, 누가 너 같은 녀석을. 영양가 없는 실랑이가 몇 번 오가더니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옅은 풀내음을 맡고 작은 벌레 소리를 들으며 료타는 어쩐지 익숙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비록 밤하늘엔 손톱 같은 초승달 대신 저물어 가는 반달이 걸려 있고 제가 서 있는 곳은 가로등이 늘어선 산길 대신 여관 앞의 짧은 다리 위이긴 했지만, 옆에 있는 것이 미츠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동일한 구석이 있었다. 료타는 미츠이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지난 3개월간의 일을, 그가 함께해 준 이 여정을 가만히 회상했다.

“그래도 당신에겐 고마워요. 여기까지 데려와 줬으니까.”

료타가 꺼낸 말에 미츠이가 놀란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농구부에 복귀한 날 료타에게서 제일 먼저 ‘미츠이 선배’라고 불렸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하나미치도 루카와도 아카기 선배도 전부 다 잘했고 제 역할을 다해주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시에 이건 당신이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당신에겐 특히 고마워요.”

“……미야기.”

“있잖아요, 미츠이 선배. 사실 나는 코트에서 당신을 가장 신뢰해요. 당신이라면 내 신호와 의도를 절대 놓칠 리 없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나는 윈터컵에서도 당신이 언제든지 내 패스를 받아줄 거라고, 중요할 때 훌륭한 돌파구가 되어줄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다음 경기도 함께 걸어주세요. 더 높은 곳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계속해서.”

말을 마친 료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반쯤은 얼이 빠지고 반쯤은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던 미츠이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요약하자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소리입니다. 알겠죠? 겨울까지 톡톡히 부려 먹을 테니 각오하라고요.

7

인터하이가 끝나고 아카기와 코구레가 입시를 위해 은퇴하며 차기 주장직은 료타에게로 넘어갔다.

전국구급의 주전 센터와 믿을 만한 식스맨이 빠지고 사쿠라기마저 당분간 재활로 떠나있게 된 만큼 새로운 인원의 육성은 필수 불가결했으나, 주장 역할도 관리자의 입장에서 남의 연습을 상세히 챙기는 것도 처음이었던 료타에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아카기에게 주장 역할을 어떻게 했었는지를 묻기에는 저를 믿고 4번을 넘겨준 그의 안목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 같았고, 궁극적으로는 제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니 이 고민도 혼자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체육관에 혼자 남아 끙끙대는 료타를 며칠 지켜보던 미츠이는 마침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하냐?”

너보다는 내가 더 경험이 많고, 무엇보다 선배잖아. 그러니 난 당연히 네가 이것저것 물어보러 올 줄 알았다. 그렇게 오면 얼마든지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정작 넌 혼자 끙끙거리느라 눈 밑만 시커메져서는. 그래서 답이 나왔냐? 해결이 된 게 뭐가 있는데? 미츠이가 화난 어조로 하나하나 내뱉는 말에 료타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좀 더 의지를 하란 말이다, 미야기.”

미츠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날 겨울까지 톡톡히 부려 먹겠다고 한 건 너잖아. 얼마든지 활용당해줄 테니까 마음껏 쓰라는 거야. 지금 쇼호쿠에서 안자이 선생님을 제외하고 나만큼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선배다운 권위가 부족해 간과하고 지나갈 때가 많지만 미츠이는 모든 부원의 강점과 약점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을 만큼 날카로운 눈을 지닌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좋은 코치까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건 료타도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최근에는 혼자 고민에 빠져 있느라 미츠이가 도움이 될 거란 걸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도 맞았다. 어색하고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료타를 보며 미츠이는 재차 따져 물었다. 또 혼자 그럴 거냐? 결국 료타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도록.

이후로 두 사람은 함께 체육관에 남았다. 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부원 개개인의 연습 메뉴를 짜는 데 몰두했고 새로운 선수 조합을 토론했다. 그러다가 슬슬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부 운영에 대한 건 잠시 내려놓고 음료 내기나 저녁 내기 1:1을 하며 기분 전환을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츠이는 주말에도 툭하면 료타를 불러냈다. 저까지 졸업하고 나면 현재 상태에서는 루카와 외의 쓸 만한 득점원이 없는 게 문제라며 료타에게 슛 연습을 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료타가 다른 일정이 있어 만남에 응하지 못하는 날이면 새로운 날짜로 다시 약속을 잡아주기 전까지 윈터컵을 앞둔 주장이 빠졌다며 잔뜩 핀잔을 주었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안나가 삐졌을 때와 아주 유사하게 구는 게 지겨워 싫은 소리를 하다가 몇 번 티격태격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귀찮을 정도로 저와 시간을 보내려는 미츠이가 이상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까지 신경 쓰기엔 주장으로서의 미야기 료타는 너무 바빴고 너무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날도 료타는 저녁 늦도록 미츠이와 체육관에 남았다.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만 성공할 수 있던 프리스로는 감각을 한 번 몸에 제대로 익히고 나자 힘을 덜 쓰고도 훨씬 쉽게 공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잘하네. 실력이 많이 늘었어. 미츠이가 뿌듯한 목소리로 건네는 칭찬과 함께 오늘치 슛 연습을 드디어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11월에 접어들자 밤공기가 퍽 쌀쌀했다. 체육관을 막 나왔을 때는 아직 몸의 열기가 다 가시지 않아 제법 상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졌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땀과 물기가 식자 점점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한기를 느낀 료타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는 척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료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걸 본 미츠이가 놀리듯 물었다.

“춥냐?”

“안 추워요.”

“어깨 움츠리고 있으면서?”

“이건 자세 때문에 그런 거고요.”

“추우면 내 가쿠란 걸쳐도 되는데. 벗어주리?”

“절대 사양이니까 여자애한테나 발휘할 그런 매너는 그만둬요.”

“사람이 챙겨 준대도 그 모양이냐? 네가 그러니까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그 모양인 게 아니라, 남자끼리 옷 벗어주는 건 누가 봐도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친한 사이에 뭐 빌려 입을 수도 있는 거지!”

“지금은 빌려 입는 게 아니라 당신이 먼저 그 ‘매너’ 같은 거 시전해버린 거잖아요?!”

밤중에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꽤 컸던 모양인지 하굣길 근처의 주택가에서 요란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왈왈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입을 다물었음에도 개는 주인이 저지하는데도 쉬지 않고 짖어댔다. 이런, 우리가 제대로 자극해버린 모양이네. 미츠이가 곤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빨리 가죠. 잘못한 건 없었지만 개가 반응할 정도였으면 저희들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리다 못해 집안의 사람들에게까지 전부 들렸을 게 뻔했으니 묘하게 찔리고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시선을 한번 교환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발을 빨리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주택가에서 조금 멀어졌을 즈음, 료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생각났는데요. 저 개 꿈을 꽤 오래 꿨었거든요.”

“개 꿈?”

“네. 개 요괴가 나오는 꿈이었어요. 오쿠리이누라는.”

“심지어 요괴라고? 그거 흉몽 아니야? 괜찮은 거냐?”

“괜찮았어요. 꿈꾸고 사고 난 적도 없고. 뭐, 꿈에서는 한 번 물려 죽긴 했었는데.”

“뭐라고?!”

“어차피 꿈인데요, 뭘. 죽고 나서도 별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그 꿈 자체를 꾸지 않은 지 꽤 됐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요괴가 나오는 불길한 꿈에서 죽기까지 했었는데 너무 안일하게 구는 것 아니냐?”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안일하게 굴어도 되는 이유도 나름 다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료타는 미츠이 쪽을 돌아보고 씩 웃었다. 미츠이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지만 료타는 정답을 알려주는 는 대신 즐겁고 장난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우왓!”

순간 료타가 크게 휘청였다. 길의 무너진 틈에 운동화의 끝이 걸린 탓이었다. 평소였다면 잘 피해 갔을 구간을 미츠이를 보느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골목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어디를 잡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균형을 잃은 료타는 성대하게 앞으로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야야……. 부딪힌 무릎이 아파 인상을 썼다. 땅에 주저앉은 채 입술을 깨물고 다리를 세웠다. 무릎을 살피기 위해 바지를 걷어 올리는 료타의 모습을 미츠이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림자가 담벼락 너머로 길게 늘어졌다.

“괜찮냐?”

“아뇨, 아파요.”

료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맨다리가 드러나고, 다행히 까지지는 않은 무릎이 보였다. 그래도 부딪힌 자국이 새빨갛고 얼얼할 정도로 아픈 걸 보니 분명 내일 아침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 게 뻔했다. 쯧. 무릎의 뼈를 문지르던 료타는 가볍게 혀를 차고 다시 바짓단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일어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아씨, 깜짝이야!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서 있었던 미츠이가 어느새 앞에 쭈그려 앉아 굳은 표정으로 료타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요! 사람 놀라게.”

미츠이의 앞에서 꼴사납게 놀란 게 창피해서 괜히 성질을 부렸다. 그러나 미츠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도 않고, 비켜주지도 않았다. 그저 흉흉하게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조금 전까지 맨살이 드러나 있었던 료타의 다리를 거쳐 헐렁한 티셔츠 아래에 자리 잡은 배와 가슴, 드러난 목선, 피어스가 걸린 귓불과 통통한 입술을 거쳐 당황한 료타의 눈을 훑을 뿐이었다. 뭐지, 뭔데. 그냥 시선일 뿐인데도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탐미하는 눈으로 저를 훑는 미츠이의 이상한 태도에 료타는 문득 겁이 났다.

피식. 미츠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읽은 모양이었다. 비웃음당한 것 같은 느낌에 료타가 발끈했다. 제 몸을 훑은 것까지 포함해서 한소리를 해주려고 기세 좋게 입을 연 순간, 료타는 제 입술에 닿아 온 감촉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미츠이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료타에게.

겹쳐진 입술은 료타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거칠고 농밀한 어른의 키스였다. 읏, 응, 흐읏……. 입 안을 유린하는 굵은 혀에 삼키지 못한 침이 고이다 못해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 안쪽에서 절로 힘겨운 신음이 샜다. 뭔데, 뭐야. 미츠이 선배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건데. 당황한 료타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미츠이는 고개를 꺾어 더 깊게 파고들며 료타를 진득하게 탐했다. 밀어내려 해도 단단한 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놓아줄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피하지 못하게 뒷목을 단단히 잡아 아예 고정까지 시켰다.

미츠이의 손이 료타의 다친 무릎을 움켜쥐었다. 도드라진 관절을 엄지로 문지르더니 손을 내려 바짓단을 끌어 올렸다. 료타의 맨다리를 쓸고 종아리를 주물렀다. 여전히 입술은 떼지 않고 료타의 혀를 빨아들이고 있는 채였다.

이대로는 잡아먹힌다. 미츠이 히사시에게.

료타는 산소가 부족해 점점 멍해지는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담벼락에 늘어진 미츠이의 그림자가 순간 개의 모습처럼 보인 것도 같았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그런 커다란 검은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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