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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멀미

배를 오래 탄 사람은 땅에서 멀미를 한다.

某日 by 銘

“크루즈 여행 가자.”

넓게 펼쳐진 캐리어에 원정 경기를 위한 짐을 싸고 있던 태섭의 손이 뚝 멎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냐는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향해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반쯤 개어진 옷을 엉거주춤 들고 있는 꼴이 분명 우스워 보였겠지만 화면 속 대만의 얼굴은 놀리는 기색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크루즈 여행이요? 기가 막혀 되묻자 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시즌 끝나고. 한 6월 즈음에. 날씨도 딱 좋고 괜찮을 것 같은데. 화면 밖의 태섭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침잠 덜 깼어요?”

“나 지금 멀쩡하거든? 아까 러닝 갔다 왔다고 말했잖아.”

졸리긴 무슨. 대만이 입술을 비죽였다. 제 제안을 진지하게 여겨주지 않는 것에 삐진 태도가 역력했다. 태섭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북을 마주 보았다. 개다 만 옷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화면 속의 대만은 그 모습을 보며 편안한 자세로 턱을 괴었다. 태섭이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뜬금없이 무슨 크루즈? 게다가, 선배랑 나랑 둘이?”

“둘이 가는 게 뭐 어때서? 우리가 그런 것도 같이 못 갈 사이냐?”

태섭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사실 이미 예약했어. 잔금 결제까지 다 마쳐서 취소도 못해. 승객 확정해서 빨리 체크인 해야 한다고. 이어지는 말에는 더욱 정신이 아찔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태섭은 찌푸린 미간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랑 가요.”

“다른 사람 누구?”

“선배 친구 많잖아요. 아니면 뭐, 어머님이랑 가시던가.”

“우리 엄마 뱃멀미 심해. 그리고 친구 누구? 이명헌? 최동오? 김수겸? 내가 왜 걔네들이랑 이런 오붓한 여행을 단둘이 가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징그럽다.”

그럼 나랑은 왜 같이 가려고 하는 건데요? 나는 안 징그러워요? 그 말이 태섭의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태섭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에 제 입술을 꾹 깨무는 쪽을 선택했다. 왜 제게 권유를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대만이 저와 있는 것을 가장 편하게 여기고, 같이 운동하며 필연적으로 몸을 부대끼게 되는 땀내 나는 남정네들과는 좀 다르게 대하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정대만이 제 인생에서 특별 취급하는 건 송태섭이 유일하다. 왜냐면 정대만과 송태섭은 단순한 선후배, 친한 형 동생, 또는 동료 선수라고 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관계니까. 중학생 때의 짧은 인연이나 고등학생 때의 주먹다짐까지 먼 길을 가지 않더라도, 세상에 그 어떤 친한 선후배와 형 동생이 입술을 맞대고 몸을 섞으며 서로를 탐한단 말인가. 그것도 술 먹고 본능에 휩쓸려 치는 사고도 아니고 5년이 훨씬 넘은 스테디한 관계로, 서로 외의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시작일을 정하고 사귀는 형태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태섭은 대만이 저와 이 낭만적인 여행을 함께 가겠다고 우기는 게 매우 껄끄러웠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같이 크루즈 타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한 번 타면 며칠 내내 배에 박혀 있어야 할 텐데.”

“그래, 그래서 며칠 내내 그렇고 그런 짓이나 잔뜩 하자고 예약하고 너 꼬시고 있는 거다. 6개월 넘게 아랫도리에 거미줄 쳐서 죽겠다고. 됐냐? 이제 좀 듣고 싶은 이유가 나왔어?”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대만이 발칵 짜증을 냈다. 사귀는 거든 아니든 어쨌든 난 너랑 크루즈 가고 싶다고. 뭐 어때서 그래, 지난번에도 여행 같이 갔잖아. 계속되는 고집에 태섭이 이마를 짚었다. 두개골 안쪽이 지끈거렸다. 그때는 엄밀히 말하면 내 여행에 선배가 억지로 끼어든……. 됐어요, 말을 맙시다. 하지만 이렇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도 어차피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정해져 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알았으니까 스케줄이랑, 뭐 안내 사항 같은 거 있으면 메일로 보내놔요. 허락을 한다. 채치수의 근육만큼이나 단단한 정대만의 무쇠 고집을 꺾을 자신도 없고, 이렇게까지 말을 꺼내오는 이상 무슨 억지를 부려서라도 무조건 데려갈 심산임을 모르지 않기에. 그렇다면 길어지는 말싸움으로 괜히 기력을 빼는 것보다 그냥 순순히 따라주는 게 훨씬 낫다. 그것은 태섭이 대만과 10년을 넘게 알아 오면서 얻은 삶의 지혜, 꾸준히 업데이트되어 온 정대만 사용설명서의 일부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제멋대로 귀찮게 굴긴 해도 어쨌든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해가 될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으니까. 그것 하나를 믿고 내리는 허락이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린 대만이 곧 마우스를 딸깍이기 시작했다. 타다닥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넘어왔다. 태섭도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일어났다.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옷 정리를 마저 한다. 보냈어, 이따가 확인해 봐.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 낸 대만이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태섭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선배.”

“엉.”

“일을 치기 전에 미리 좀 물어보고 하면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해요?”

하지만 허락을 했다는 게 짜증까지 안 낸단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타박을 잔뜩 한 것치고는, 배에 오른 태섭은 꽤 신이 난 얼굴을 했다. 긴 비행시간을 거쳐 로마에서 다시 만나 승선하는 항구까지 또 기차로 이동해야 했던 번거로움과 피곤함이 탁 트인 수평선을 보자마자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직 시차 적응이 다 되지 않은 얼굴에는 수면 부족이 그대로 묻어났지만, 그 위에는 고개만 돌려도 사방에 펼쳐지는 바다를 마주하는 순수한 기쁨과 처음 하는 색다른 여행의 설렘도 함께하고 있었다. 유럽의 아름다운 항구를 배경으로 한 지중해는 생각보다 더 보는 맛이 났다. 첫날은 출국 수속과 안전 교육만으로 오후 시간까지 훅 지나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타고만 있어도 좋네요. 대만을 돌아보며 웃어 보이자 대만이 태섭의 머리를 헝클였다. 형이 돈 쓴 보람 좀 있지?

대만의 말대로 돈 쓴 보람이야 충분하고도 남았다. 고급스러운 음식이 잔뜩 준비된 뷔페식당에서는 가득 채운 접시를 몇 개나 비웠다. 모처럼 식단 생각은 뒤로 미뤄두고 양껏 배를 채웠다. 부른 배를 안고 객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한결 풀어진 기분으로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객실이 오션뷰인 건 더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 생각은 않고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어 바닷바람을 만끽하던 것을 대만이 몇 번이나 불러서야 겨우 뒤돌아설 수 있었다.

대만이 뒤이어 씻고 나왔을 때, 태섭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신문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매일 저녁 객실로 배달되는, 다음 날의 선내 프로그램과 일정을 안내하는 신문이었다. 한껏 집중해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린 얼굴로 뚜껑을 입에 물고 손가락 사이에서 볼펜을 굴리던 태섭이 신문 위에 동그라미 몇 개를 크게 쳤다. 대만이 결국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스카이프 할 때는 엄청 뭐라 했으면서 네가 가장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말이라도 덜 밉게 하지 그랬냐.”

“말을 밉게 한 게 아니라, 이왕 온 거 뽕은 뽑아야죠. 낸 돈이 얼만데.”

태섭이 우물대는 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도 클라이밍 할 거예요? 저 이거 하고 싶은데. 너 하고 싶으면 같이 하지, 뭐. 그 말을 들은 태섭이 동그라미 옆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그리고 입에 문 뚜껑에 볼펜을 꽂아 딱 소리를 내며 닫았다. 볼펜이 다시 손안에서 굴러갔다. 그거 말고도 또 뭐 있냐? 스킨과 로션을 바른 대만이 젖은 손을 가운에 슥슥 닦으며 태섭의 어깨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른스러운 화장품의 향이 훅 끼치자 태섭이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약간 옆으로 물렸다. 갑자기 확 가까워진 거리감에 조금 당황한 눈으로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어깨 위로 신문을 읽어내리던 대만도 시선을 느끼고 눈동자를 굴렸다.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쪽은 대만이었다. 고개를 기울여 성급하게 입술을 맞대며 태섭을 뒤로 밀었다. 풀썩 소리와 함께 태섭의 등 뒤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았다. 다물지 못한 입 사이로 혀가 침입했다. 아, 분명 오늘 밤에도 프로그램이 이것저것 있었던 것 같은데. 대만의 갈급한 키스를 받으며 태섭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낭패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잠시, 태섭은 몸에서 힘을 빼고 순순히 대만의 목을 안았다. 뭐 어떠랴.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지만 어쨌든 6개월 넘게 거미줄 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는걸. 정대만이 송태섭이 고팠듯 송태섭도 정대만이 고팠으니까. 준비된 것을 즐길 시간은 아직 충분했으니 하루쯤은 이런 식으로 날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만의 손이 허리춤을 붙잡는 걸 느끼며 태섭은 슬쩍 엉덩이를 들어주었다.


크루즈 여행은 일주일의 일정이었다. 첫 사흘은 첫날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일찍 일어나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는다. 낮에는 다양한 선내 프로그램이나 기항지 관광을 즐겼고, 배에서 빈 시간이 생기면 스포츠 센터 한쪽에 마련된 다목적 코트에서 농구를 했다. 둘이서 원 온 원을 할 때도 있었고 구경하던 다른 승객들까지 합세해 팀을 짤 때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조금 쉬면서 배의 여러 시설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다시 방에 돌아와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겹쳤다. 몇 번이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시즌 때문에 금욕하던 시간을 잔뜩 채웠다.

나흘째도 저녁까지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운 좋게 바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을 마시다 근처의 승객과의 스몰톡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날씨나 국적으로부터 시작한 간단한 대화가 커플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지자 순간 짧은 침묵이 불편하게 흘렀다. 태섭은 제 얼굴에 대만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꼈다.

태섭은 활기차게 웃음을 터트리며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능숙한 영어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친한 사이라 함께 놀러 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같이 농구부에서 활동했었어요. 이 사람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선수들과도 아직도 연락을 하고요. 이번에는 이쪽과 단둘이 놀러 오게 되긴 했지만 모두와 친해요.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태섭과 승객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원한다면 충분히 대화에 낄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 되었다는 걸 아는데도, 약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돌려 밤바다만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섭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유쾌하게 장난치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자세였다. 승객들의 흘끔대는 시선에 태섭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저 사람, 자기 두고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니 좀 심심한 모양이에요. 놀아주러 가야지 안되겠네. 대화 즐거웠어요, 좋은 저녁 보내요. 이야기를 마친 태섭이 다시 몸을 돌리고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거북해진 분위기가 불편해 대만에게 핀잔을 주었다.

“같이 얘기 좀 하지, 분위기 다 깨게 뭐예요. 선배 이제 영어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태섭아.”

대만이 태섭의 말을 끊었다.

“내가 왜 굳이 너랑 여기 오고 싶어 했는지 알아?”

장난기가 싹 빠진 낮은 목소리였다. 심상찮은 기운에 어깨를 움찔거린 태섭이 눈만 빼꼼 들어 대만을 쳐다보았다. 곧고 진지한 시선이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태섭은 문득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아, 이거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인데. 태섭은 어색하게 웃으며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했다. 명치께를 툭툭 두드렸다. 미처 긴장을 다 지우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는 모습에 대만이 한숨을 쉬었다.

“난, 이번 여행에서 너와 내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고 싶었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둘만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대만이 제 술잔을 들었다. 느릿하게 잔을 흔들자 반쯤 남은 칵테일이 소용돌이를 쳤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액체가 제 머릿속 같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출렁이는 칵테일을 보며 대만은 말을 이었다. 너도 사실 알잖아. 오래전부터 내가 널 좋아했다는 거. 그리고 너도 나한테 마음 없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연인 사이에 할 짓은 진작에 다 해놓고 아직까지도 진짜 연인의 발끝조차 되질 못했냐. 왜 커플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까 전의 너처럼 부정하는 발언을 해야만 하는 거냐고. 그러면 우리는 뭐냐? 넌 이걸 뭐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태섭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긴장 풀어, 송태섭.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니니까.

“어차피 타이밍 봐서 따로 할 말이었는데 그냥 지금 기회도 생겼고 해서 바로 꺼낸 거야. 하지만 최소한 여행 끝날 때까지는 답을 좀 듣고 싶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야 네가 날 허락해주면 좋은 거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나는 이런 거 더 못 해 먹겠거든. 그래서 거절당하면 난 이 여행을 마지막 추억으로 갖고 너랑 이러는 거 아예 그만둘 거다.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선후배 사이로 정말 돌아가는 거지.”

대만은 ‘선후배’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그 은근한 압박을 모르지 않아, 태섭은 괜히 다 비워진 잔에서 얼음만 꺼내 씹었다. 그걸 본 대만의 얼굴에 조금 씁쓸한 빛이 돌았다. 하지만 곧 웃었다. 평소처럼, 소년 같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로. 태섭이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잔에 대만의 잔이 부딪혔다. 탕, 맑은 소리가 났다. 대만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진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한 잔 더 할래, 아니면 방으로 돌아갈까?


다음날 아침, 태섭은 가족들과 통화를 한다는 핑계로 운동을 가는 대신 맨 위층으로 나갔다. 몇십 개는 되는 선베드와 널따란 수영장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여름날이라지만 이른 아침부터 수영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기에 갑판 위는 조용했다. 난간 하나를 붙잡고 몸을 기댄 태섭은 착잡한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하아…….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대만이 이 이상한 관계를 순순히 유지해줬다는 것 자체가 그가 많이 양보해 줬다는 뜻이었으니까. 대만은 처음부터 태섭을 제 바운더리 안에 두고 싶어 했다. 품 안 가득 붙들어 지지대이자 땅이 되어주고자 했다. 그것이 대만의 애정이었다. 잤으니까 책임진다는 소리 같은 거 하면 턱에 흉터 또 생길 줄 알아요. 하지만 첫 관계 때 태섭은 냉정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몸을 겹치면서도 관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태섭에게 필요한 것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일생의 안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삶을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한 발이라도 잠깐 빼놓을 수 있는 징검돌이었으므로.

태섭은 땅이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단단한 흙을 밟는 것보다 출렁대는 파도 위를 떠다니는 것이 더 익숙했다. 어딘가에 속하기보다는 번지는 물결을 따라 흘러 다닐 운명이었다. 부평초 같은 유목민에게는 고정된 울타리와 풍족한 환경은 오히려 감당하기 버거운 부담이었다. 누군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포옹을 받는 것보다는 소파에 앉아 요동치는 감정을 곱씹어 소화하며 혼자 맥주를 마시는 게 더 편했다. 대만을 좋아하고 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태섭에게는 이 정도가 딱 알맞았다. 선후배보다는 가깝고 연인보다는 먼 사이, 어중간하고 어정쩡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킬 수 있는 거리감. 그래서 태섭은 지금의 대만이 편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평온하게 사랑하고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대만은 모든 게 확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 연인 아니면 친구.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이 회색지대를 참아줬다는 게 역설적으로 그만큼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는 뜻이라, 태섭은 답답하게 짓눌리는 기분에 천천히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렇다고 대만을 완전히 밀어내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쨌든 좋아하니까. 아, 차라리 그 사람이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을 텐데. 태섭의 한숨이 바닷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태섭은 힘이 들 때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자연스럽게 바다를 찾았다. 푸른 물결에 고민과 괴로움을 흘려보내고 뒤돌아서면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으로 다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섭의 사방을 둘러싼 바다는 어머니처럼 안아주는 정겨운 대자연이 아니라 광활한 감옥이었다. 흘려보낸 것이 매분 매초 제 눈앞에 다시 되돌아 와 포말로 부서지는 광경은 고민을 지워주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장치였다. 이 화려하고 큰 배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태섭은 피할 곳 없는 코너에 몰렸다. 어쩌면 정대만은 이걸 처음부터 계획하고 제게 크루즈 여행을 권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교활하게 굴 줄은 모르는 사람인 것이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기한을 이 정도밖에 안 주는 것도 너무하지 않냐,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몸에서 다시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태섭의 고민이 얼마나 깊든 간에 시간은 착실하게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지난 나흘도 의외로 빠르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3일은 더 빨랐다. 빈 시간마다 어떻게든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 안은 너무도 화려했고, 눈길과 손길을 잡아끄는 게 많아서 문제였다. 대만이 내준 커다란 숙제 때문에 뭔가를 제대로 즐길 기분은 아니었지만 막상 또 이끌려 가면 시선과 정신을 빼앗겨 몇 시간을 훅 날려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아차 하는 기분이 되어 허겁지겁 또다시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 생각이 튈 만 하면 끊겨버리는 흐름에 매번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하는 머릿속이 답답했다. 태섭의 그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만은 태섭 대신 저녁마다 배달되는 객실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이런저런 걸 같이 하자고 제안하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밤에는 또 어김없이 입술을 겹치며 은근슬쩍 몰아붙였다. 그 모든 게 마치 태섭에게 제대로 깊게 고심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 같아서 더 열이 받았다. 대답을 해 달라며. 그러려면 생각을 할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냐.

우여곡절 속에 일곱 번째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로써 이 화려한 여행은 끝이었다. 아직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태섭은 정대만이 언제쯤 결론을 물어보려나 싶어 아침부터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대만은 평소 같은 얼굴로 선장의 환송 행사를 보며 그동안 재밌었다, 그치? 라고 물어볼 뿐이었다. 네, 그렇네요. 재밌었어요. 그렇게 대답을 해주면서 태섭은 찝찝하고 껄끄러운 목으로 겨우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한 게 무색하게, 대답을 할 기회는 바로 오지 않았다.


하선을 한 뒤 태섭은 심한 멀미를 앓았다. 배를 오래 탄 사람들은 오히려 땅에서 멀미를 한다. 항상 발밑이 흔들리는 것에 익숙해져 되려 단단한 뭍을 밟으면 몸이 적응하지 못해 어지럼증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지독한 땅 멀미에 비행기 표도 미룬 채 호텔 침대를 벗어나지를 못하면서 태섭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나 고작 일주일 밖에 안 탔는데. 변기를 붙잡고 헐떡이는 태섭을 보며 대만은 가만히 혀를 찼다. 누가 섬사람 아니랄까 봐 너는 육지에서 멀미를 하냐. 선배……. 섬도 육지인 거 알긴 아는 거죠?

대만이 사 온 약을 먹고 계속 누워 있는데도 빙글빙글 도는 머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눈을 감고 시야를 차단해도 어둠 속에서 뇌가 밤바다처럼 출렁대는 느낌이 들었다. 약을 먹어도 그때만 조금 가라앉았지, 머리를 들고 바닥에 발을 짚으면 다시 어지러움이 몰려와 몸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증상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잠기운이 덜 가셔 멍한 머리가 더 몽롱하게 흔들렸다. 답답함에 명치께를 두드리며 태섭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화장실만 겨우 갔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아직도 많이 힘드냐?”

얼음을 띄운 물병을 협탁에 내려놓은 대만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무심하지만 다정한 손길이었다. 뭐 좀 먹을 순 있겠어? 어제 오후에 배 내리고서부터 종일 굶었잖아.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먹으면 속이 요동쳐 모든 걸 게워낼 것 같았다. 못 먹으니까 기운을 더 못 차리는 것 같은데……. 대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찡그렸다.

“빈속이지만……. 약 더 필요해?”

“먹어도 별 효과 없어서…….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그냥 좀 더 잘게요. 커튼이나 좀 쳐 줘요. 수면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11시가 넘은 환한 대낮에 잠이 올 리도 만무했지만 태섭은 눈을 감았다. 제 몸도 못 가누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작 멀미로 병원에 간다는 것도 좀 우스웠으니까. 가만히 웅크려 있으니 대만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착 소리와 함께 눈앞이 조금 어두워졌다. 태섭은 이불을 조금 더 올려 덮었다. 그대로 나가겠거니 했는데, 이불 한 귀퉁이가 들리더니 침대 반대쪽이 푹 꺼졌다. 꾸물거리며 옆자리에 누운 대만이 뒤에서 태섭을 끌어안았다. 가슴을 감싼 팔이 단단했다. 뭐 하는 거예요. 태섭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대만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송태섭 재우기.

“뭘 재워요, 내가 애도 아니고.”

“그냥 눈 감고 있는다고 잠이 바로 올 것도 아니잖아. 이러고 있으면 좀 올지도 모르지.”

얼른 잠이나 자, 아픈 녀석아. 그리고 대만은 조용해졌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느끼며 태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짝 붙어 있는 대만의 존재가 의식되면 의식될수록 잠이 들기는커녕 의식은 더 또렷해졌다. 분명 누워 있는데도 속이 점점 메스꺼워졌다. 정대만의 존재에 다시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태섭은 이불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구역질을 할 것 같아 잠을 청하는 척 최대한 깊게 숨을 쉬었다.

“배에서 내린 거 후회하냐?”

갑자기 대만이 입을 열었다. 땅 멀미 심하게 하잖아. 안 내렸으면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뜬금없는 말에 태섭이 눈을 떴다. 의중을 알 수 없어 자주색 커튼이 빛나는 것만 멀거니 바라보다가 피상적인 답변을 했다.

“그런다고 안 내릴 수는 없었잖아요. 여행은 끝났고, 어차피 내려야 했으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무슨 소리예요? 안 그래도 말썽을 부리는 속에 뜻 모를 말까지 연거푸 들으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되묻자 대만의 손이 태섭의 명치께를 지그시 눌렀다. 커다란 손바닥의 볼록한 부분이 울렁이는 부위를 정확히 짚었다. 대만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려야 하잖아. 여전히 주어 없는 말에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던 태섭은 잠깐의 생각 끝에 그가 제 상태를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선택권 줄 것처럼 말해놓고 강요하는 거 최악이에요. 이거 파울이라고요, 그것도 U-파울. 생각할 시간도 제대로 안 주고 방해나 해댄 주제에.”

태섭의 볼멘소리에 대만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들켰나. 역시 송태섭 눈치 좋다니까.

“나는 너한테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거든.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넌 생각을 안 할 때 제일 나은 결정을 내려. 예를 들면, 나랑 여행 오는 거 같은 거 말이지.”

그러니까 재고 따지고 수 싸움 하지 말고 그냥 네 본심을 말해. 대만이 태섭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건지 불편한 건지 태섭이 목을 잔뜩 움츠리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입술을 댔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거야. 네가 치열하게 머리 굴려서 포장한 결론이 아니라. 태섭은 입술을 꾹 물었다. 이제는 메슥거리는 것이 멀미의 증상인지 긴장의 일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태섭이 답이 없자 대만이 한숨을 쉬었다. 또, 또 머리 굴리지. 생각하지 말고 말을 하랬더니. 혼자 멀미하게 두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간호해주는데 뭐가 문제야. 야, 너 지금 마지막 기회를 이만큼이나 주고 있는 게 안 보이냐. 정대만 사전에 원래 이런 거 없다고. 내가 5년 넘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잖아. 그러면 이젠 내가 듣고 싶은 말 좀 해줄 때 안 됐냐? 아니면 진짜로 나랑 선후배만으로 남고 싶어? 태섭은 고개를 돌려 대만을 쳐다보았다. 조금 상처받은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선배는 너무 무거워요.”

태섭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내가 멀미하는 건 선배 때문이라고요. 지금도 토할 것 같아. 하지만 속이 메슥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등을 타고 퍼지는 체온의 따뜻함과 몸을 꽉 잡아주는 팔은 모순적이게도 안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아마 더 아팠을 거라고. 멀미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정대만이지만 그걸 가라앉히고 돌봐주는 것도 정대만이라고. 태섭은 어느새 대만이 제 손을 붙잡고 손목 어딘가를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돌아보았다.

“선후배 사이로만 남으면, 이 방 나갈 거예요?”

“어, 나갈 거야. 나는 사귀지 않는 사람이랑 이러고 못 있어.”

“그래요. 그럼 가지 마요. 옆에 있어.”

그리고 태섭은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저기가 멀미에 좋은 혈자리라고 했던가. 한 번 땅에 제대로 발을 디디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지긋지긋한 땅 멀미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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