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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짝사랑

某日 by 銘

그날 저는 골목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여자가 혼자 훌쩍이는 모습이 꼴사나울 거란 걸 알았지만, 밝고 번잡한 전철이나 버스에서 우는 것보다는 으슥한 골목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울고 있으니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사람들조차 가까이 오지 않았어요. 그것도 다행이었습니다. 나의 추태를 혼자만 알면 되었으니까요. 특히 같은 서클 사람들에게 보였다간 소문 나기 딱 좋은 꼴이었는걸요.

저는 같은 서클의 S군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대학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고 수줍은 미소를 짓는 걸 봐야만 한다는 건 언제 생각해도 꽤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저는 세운 무릎 사이로 한껏 고개를 파묻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어이. 괜찮냐?”

투박하고 거친 말투, 하지만 그와 반대 되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면서 시야가 맑아졌어요. 내게 말을 건 사람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첫인상은 그랬습니다. 키가 크다, 그리고 잘생겼다. 제 앞에 허리를 숙인 그 사람의 다리는 한참이나 길어서, 제가 조금 더 취해 있었다면 팔척귀신이 저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브이넥 티셔츠에 얇은 코트 차림인 것이 처음부터 이 사람을 위해 재단되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습니다. 턱의 흉터가 조금 흠인가 싶었지만 그것조차 이 사람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 살다 보니 이런 연예인 같은 사람을 눈앞에서 보는 일도 생기는구나. 순수하게 감탄했습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 낯선 얼굴을 한참 동안 감상했습니다. 제가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그 사람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그,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여자애 혼자 웅크려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아. 그제야 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웅크려 있었죠.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아마 공들였던 화장도 다 녹았을 흉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S군. 나를 다정하게 난도질하는 당신. 그 생각을 하자 또 눈물이 솟았습니다. 제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자 그 사람은 당황한 얼굴을 했습니다. 아씨, 어쩌지. 우는 여자애를 달래는 법은 모른다고. 그런 혼잣말이 얼핏 들렸습니다. 여전히 거친 말투였지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해서, 저는 원래의 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했습니다.

“짝사랑이란 건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그리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소리 내 울었습니다. 소맷자락을 붙잡힌 채 한참 엉거주춤 서 있던 그 사람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제 앞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안아주는 게 느껴졌습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양털처럼 따스한 품이었습니다. 툭툭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애틋했습니다.

“…너도 나와 같은 처지구나.”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습니다. 그것이 저와 미츠이 씨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울음이 조금 그친 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통성명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미츠이 씨도 우리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학년은 저보다 하나 위, 학부는 체육. 문학부인 저와는 확실히 접점이 없을 법도 했지만, 미츠이 씨처럼 잘생긴 사람이라면 분명 학교 가득 화제가 되었을 텐데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저는 왜 당신을 몰랐을까요? 그렇게 묻자 미츠이 씨는 큭큭 웃었습니다. 나 농구부니까, 수업에는 얼굴 잘 안 비춰서 그랬을지도. 아. 그제야 이 사람의 큰 키가 이해되었습니다.

밝은 곳에서 본 미츠이 씨는 훨씬 번듯하고 훤한 미남이었습니다. 그냥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기만 할 뿐인데 주변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얼굴을 닦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젖고 부은 몰골을 하고 있는 제가 이런 연예인 같은 사람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을 겁니다. 그야 미츠이 씨는 이렇게 누구나 선망하는 시선으로 돌아보고도 남을 사람이니까요. 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 어떤 여자든 원하는 만큼 충분히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남자가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상대는 누구일까. 그 사람은 얼마나 콧대가 높은 여자인 걸까.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해.”

“미츠이 씨의 짝사랑 상대는… 어떤 사람인가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미츠이 씨는 씨익 웃었습니다. 약간 눈가를 찡그리는, 소년 같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였어요. 턱을 괸 미츠이 씨가 어딘가 즐거워 하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일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그것도 꼴사나운 첫 만남, 지금까지 섞은 말이야 자기소개와 통성명 정도. 그런데도 이 사람은 오래 알아 온 친한 지인에게 하듯이 저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습니다. 마치 선이란 게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미츠이 씨는 이상하게도 그런 장난에도 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저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더듬거리며 묘사했습니다.

“어……. 음, 아름다운 여성…일 거라고 생각해요. 미츠이 씨와 잘 어울리는……. 귀여운 것보다는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일까. 도시적인 미인일 것 같아요. 미츠이 씨가 키가 크니까 그 사람도 키가 클 것 같고…….”

그 대답을 들은 미츠이 씨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건 비웃음이라기 보다는 순수하게 재미있어 하는 웃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대답을 들은 어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 유감. 완전 틀렸어. 틀렸다고요? 제가 되묻자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미츠이 씨가 입꼬리를 더 높게 끌어 올렸습니다.

“여자인 것부터 틀렸어. 남자야, 내가 좋아하는 녀석은. 고교의 후배지.”

저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쪽이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그야 이 사람은 누가 봐도 참하고 예쁜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그런 루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게 생겼는걸요. 나라고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 녀석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다. 미츠이 씨는 조금 전까지 떠올라 있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우고 진지해진 태도로 창밖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것을 떠올리는 애틋하고 아련한 표정이었습니다.

“아름답다, 는 건 그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지. 그건 루카와를 위한 표현이니까. 도시적인가. 확실히 옷은 잘 입지만 그걸 도시적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키도 크지 않아. 일반인으로서 평균이니 농구 선수로서는 꽤 단신. 내 눈에야 귀엽지만 남들 눈에는 꽤 건방져 보이는 인상이라 여기저기 시비도 많이 걸리고. 아, 세련되었다는 건 인정. 전부 틀린 건 아니군. 그거 하나는 맞았어. 그래도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야투율 좋은 편일지도.”

“‘농구 선수로서’라면……. 그분도 농구를 하시나요?”

“그래, 하고 있지. 미국에서. 그래서 더 최악의 짝사랑이 됐다고. 핑계를 대서 만날 수도 없으니 말이야. 아아, 정말이지 그 녀석! 유학 프로그램에 신청서 넣은 걸 나에게는 한마디도 안 하고! 나는 그 녀석이 우리 학교로 왔으면 해서 이것저것 조언해주려 했더니, 여름방학 때 한다는 소리가 사실 미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막을 수는 없으니까 가라고 보냈지. 그게 벌써 2년 전이야.”

다시 그때의 서운함이 올라오는지 미츠이 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찡그린 얼굴로 뒷머리를 마구 긁었습니다. 하여간 미야기 자식. 귀여운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한 번 더 투덜거린 미츠이 씨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제 궁금증이 좀 풀렸어?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미츠이 씨가 물었습니다. 그럼 네 짝사랑 상대는 누구인데?

저는 미츠이 씨에게 S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처음 만났고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까지도요. 초면의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미츠이 씨가 적당히 맞장구까지 쳐주며 제 이야기를 꽤 잘 들어주었기 때문에 저도 계속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미츠이 씨는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부드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너, 그 사람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얼굴에서 빛이 났어.”

“그랬…나요? 평정심을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실패로군. 좋아하는 걸 몰라볼 수가 없겠던데.”

“…그런가요. 곤란하네요, 그거. 숨기고 싶었는데.”

“어째서? 좋아하면 표현하는 편이 좋지 않나. 그게 사귀게 될 확률도 더 높잖아.”

“좋아하는 티가 나면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되어 버리니까요. S군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흠…….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럼 미츠이 씨는, 그 분께 표현을 했었나요?”

“아니. 그 녀석 좋아하는 여자애가 따로 있었으니까. 그것도 꽤나 진심으로. 그런 녀석한테 내 마음을 퍼붓는 건 미야기의 진심을 무시하는 거잖아. 그러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더 처절한 짝사랑이 됐지.”

물론 기회만 생긴다면 온 힘을 다해 쟁취할 각오는 되어 있지만, 미야기는 아야코를 꽤 많이 좋아하니까. 쓰게 웃는 미츠이 씨를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 그 미야기 씨라는 사람에게 정말 진심이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마저 존중하며 기다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마음이구나. 갑자기 미츠이 씨의 넓은 어깨가 외로워 보였습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잔만 만지작거리는 저를 바라보던 미츠이 씨가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도와줄까? 네 짝사랑.”

“네?”

“나는 미야기가 아야코를 포기하거나 차이기 전까지는 무리지만 너는 아직 승산이 있잖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은 처지의 동료끼리 도와주고 싶어서.”

남자 마음은 아무래도 같은 남자가 더 잘 알지 않겠냐?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 같은데. 멋있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미츠이 씨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홀린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틀 뒤, 저와 미츠이 씨는 그때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농구부 연습을 마치고 온 미츠이 씨는 운동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날과 달리 가볍고 스포티한 차림에 더플백을 메고 있는 것도 스포츠 브랜드의 모델처럼 잘 어울렸습니다. 그만큼 주변의 시선을 받는 것도 여전했지만 미츠이 씨는 눈치가 없는 건지 그런 시선에 이미 익숙한 건지 자꾸 의식을 하는 저와는 달리 주위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저만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길 뿐이었습니다. 춥냐? 져지 벗어줄까? 미츠이 씨는 의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습니다.

도와주려면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미츠이 씨의 말에 저는 S군과의 사이를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처음 미츠이 씨를 보았을 때 왜 제가 울고 있었는지까지 이야기했어요.

“너는 표현을 안 하는 게 문제야. 그러니까 짝사랑 밖에 못하는 거지. 표현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줄 수가 있냔 말이야.”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미츠이 씨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걸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미츠이 씨를 보고 저는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야 미츠이 씨 같이 멋진 사람은 어떻게 표현을 해도 다 괜찮겠지만, 저처럼 평범하고 소심한 여자에게는 그런 건 쉽게 허락되지 않는 걸요. 좋아하는 사람이 곤란하게 웃으며 거절하는 표정을 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단 말이에요. 저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섣불리 한 표현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해요.”

“그렇다 해서 모든 연락이 이 모양이면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건데? 무작정 고백하는 건 또 못하겠다며? 그러면 일단 친해지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미츠이 씨가 제 핸드폰 액정을 검지로 탁탁 치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 안에는 저와 S군의 라인 대화가 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S군. K입니다. 다음 주 연습 스케줄을 조정하려고 연락했어요. 원래 수요일 2시였던 예정을 12시부터로 앞당겨도 괜찮을까요? ……안녕하세요, S군. K입니다. 오늘 연습의 연출부 피드백을 정리해서 전달 드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S군. K입니다. 다름은 아니고 회비의 납부가 아직이어서 확인차 연락을 했습니다. 제가 봐도 사무적인 메시지들이었습니다. 미츠이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서클 활동 외에는 S군과 말을 섞어볼 주제가 없는걸요. S군과 저는 과도 다르고 듣는 수업도 달랐으니까요. 저는 막막해진 기분으로 미츠이 씨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S라는 녀석과 어떻게든 가까워지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하지만 저 중학생 때도 고교생 때도 남자애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남자들과 말을 하는 게 어려워요. 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미츠이 씨는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 나한테는 잘만 말하고 있지 않냐? 그건 미츠이 씨가 저를 편하게 대해 주시니까 저도 어렵지 않아서……. 그 말을 들은 미츠이 씨는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턱의 흉터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역시 이런 소심한 여자는 귀찮은 일만 만드는 거겠죠. 어쩌면 미츠이 씨도 절 도와주기로 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없던 일로 하자고 해도 저는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럼 나를 S의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대해 봐.”

긴 정적 끝에 내뱉어진 미츠이 씨의 말에 저는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습니다. 미츠이 씨를… S군의 연습처럼 대하라고요? 제가 멍하니 묻자 미츠이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그……. 뭐라고 하더라, 그걸.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시 뭐였는데.”

“시뮬레이션이요?”

“그래, 그거. 시뮬레이션. 나는 편하다며? 나중에 S와 있을 때 비슷한 상황이 되면 나와 어울렸던 걸 떠올려서 써먹는 거지.”

꽤나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미츠이 씨를 S군의 연습처럼 대하는 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죠? 저는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 문제가 있는데요. 저는 조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미츠이 씨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뭔데?”

“저, 서클의 일 외에는 S군과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적인 지점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뭐? 거짓말. 과제를 같이 하는 것이나, 날씨 얘기나,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보는 것이나, 같은 방향인 척 귀가하는 것이나, 그런 것도 한 번도 없어?”

“없는데요.”

“너 S를 좋아하는 거 맞긴 하냐? 좋아하면 그런 거 자꾸 시도해 보게 되지 않아?”

“그야 하고는 싶지만……. 사생활을 멋대로 침범하는 것 같으니까…….”

제 대답을 들은 미츠이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른 거겠죠.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저는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피해 얼음물만 홀짝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답이 없긴 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줄은 모르면서 포기도 하지 못하는 미련한 여자. 그러니까 평생 가슴앓이는 가슴앓이대로 하는 짝사랑만 해 온 것이죠. 그때였습니다.

“저녁 먹었냐?”

“네……? 아, 아뇨.”

“그럼 같이 먹자.”

미츠이 씨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미츠이 씨의 음료 잔은 어느새 전부 비워진 상태였습니다. 저도 반쯤 마신 물잔을 내려놓고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습니다. 뭐 먹을래? 좋아하는 거 있어? 계산을 마친 미츠이 씨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 저요? 크게 가리는 건 없는데요... 그러면 텐동 먹자. 오늘 연습 좀 힘들었어서 엄청 배고파. 그러면서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미츠이 씨의 뒤를 저는 허겁지겁 따라갔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는 되지 않았어요. 제 짝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니요? 미츠이 씨가 데리고 간 가게에 앉고 나서도 저는 어색함에 계속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주문을 마친 미츠이 씨가 물을 마시며 저를 돌아보았어요.

“S랑 단둘이 밥 먹은 적도 없을 거 아냐?”

“없…죠.”

“그러면 여기부터 시작하자고.”

그렇게 말하며 미츠이 씨는 이전의 그, 약간 눈가를 찡그리는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거, S군의 연습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너무 데이트 같은 그림 아닌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로 저와 미츠이 씨는 종종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라인 아이디도 주고받았어요. 이런저런 시합과 연습 스케줄로 바쁜 와중에도 미츠이 씨는 여유가 날 때마다 S군의 연습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착실히 지켰습니다. 미츠이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숙제’도 한 번씩 내주곤 했습니다. S군한테 먼저 연락을 해 보라던가, 다음번 연습이 끝난 후에는 옆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서클 이외의 주제로 세 마디 이상 해 보라던가 같은. 제 사랑을 코칭해 주는 걸 의외로 즐기는 표정이었기에 이 사람 꽤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은 종종 들었지만 미츠이 씨 말이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미츠이 씨와 미리 해 본 덕에 S군과도 서클 활동 이외의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나고 비는 시간에 단둘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제가 이번 학기에 듣는 교양 수업이 S군이 지난 학기에 들었던 것과 같았기 때문에 과제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핑계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모든 용기를 짜내어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엄청나게 심장이 뛰었습니다. 혹시나 S군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다행히 S군은 웃으면서 흔쾌히 제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미츠이 씨는 크게 웃었습니다. 거 봐, 연습하니까 괜찮지? 그러면서 주먹을 내밀었습니다. 그 큰 손에 제 주먹을 콩 맞부딪히면서 저도 같이 웃었습니다. 미츠이 씨에게 고마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미츠이 씨를 이전보다 더 편하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리감을 줄이자 미츠이 씨와도 금방 더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연극 서클의 연출부였기 때문에 미츠이 씨의 농구부처럼 어느 정도는 강제된 회의나 연습 스케줄이 있었고, 그런 날은 활동이 늦게 끝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이 먼데도 통학을 하고 있는 터라 서클 활동이 있는 날이면 학교 근처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보통 9시가 가까워져서, 처음 이 얘기를 했을 때 미츠이 씨는 늦은 시간에 여자아이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다며 같이 저녁을 먹고 역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S군이 이런 걸 보면 분명 오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후로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요.

그런 시간들이 지나 어느덧 미츠이 씨와 저의 연습 만남은 두 달째에 들어섰습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미츠이 씨를 처음 만났는데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어요. 그 무렵 저는 미츠이 씨와의 연습 덕에 S군과도 많이 가까워져, S군이 본가에서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타지에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으며, 어릴 때 크게 아팠던 적이 있다는 것 같은 사적인 사정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츠이 씨는 진도가 많이 늘었다고 대견해 하는 얼굴로 웃었습니다. 그 소년 같은 웃음은 변함없이 멋있어서 보고 있으면 괜스레 저까지 얼굴을 붉히게 되었습니다.

“여, K.”

그리고 날씨가 부쩍 추워졌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캠퍼스에서 마주친 미츠이 씨가 친구들과 있던 제게 아는 척을 해 왔습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 가벼운 수다를 떨며 다른 건물로 옮겨 가던 참이었어요. 오늘은 연습이 없는 건지 미츠이 씨는 운동복 대신 니트에 코트 차림이었습니다. 게다가 머리를 올리고 구두까지 신은 것이, 수업을 들으러 왔다기보다는 데이트를 가는 차림에 가깝게 한껏 멋을 낸 느낌이었습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더플백에는 목도리가 걸쳐져 있었어요. 친구들의 시선이 전부 모델 같은 미츠이 씨에게 쏠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미츠이 씨. 저는 같이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어디 가시나요?”

“아아, 모임이 있어서. 수업이 끝났으니 이제 막 가려는 참이다. 너는 오늘은 저녁까지였던가?”

“네, 맞아요. 이다음이 오늘의 마지막이네요.”

“금요일까지도 고생이군. 그래, 수고해라.”

“안녕히 가세요.”

미츠이 씨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멀어져 갔습니다. 미츠이 씨가 충분히 멀어져 그 큰 사람이 작은 성냥처럼 보이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동시에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K쨩! 저 미남은 누구야? 어떻게 K쨩의 시간표를 알고 있어? K는 S군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학교에 그 정도로 친해진 남자가 있었단 말이야? 어떻게 저런 사람을 알게 됐어? 동시에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잠깐만, 그렇게 질문을 하면 나 어지러워. 제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하자 친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눈은 여전했어요. 저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으로 답을 해주었습니다.

“체육학부의 미츠이 씨야. 우리보다 선배고……. 여러 일로 도움을 받고 있어서 알게 되었어. 그리고 나 아직 S군 좋아하는 거 맞으니까 괜한 소리는 그만둬. 미츠이 씨에게 실례야.”

“미츠이… 미츠이……. 이름이 묘하게 낯이 익은데……. 아! 그러고 보니 같이 수업 듣는 T가 운동부잖아. 그 애한테 우리 학교 농구부에 잘생긴 사람이 있다고 들은 적 있어. 분명 그 사람 이름이 미츠이였던 것 같은데.”

“응, 맞아. 그 미츠이 씨.”

“아아, K! 그런 미남을 알고 있었으면 우리에게도 소개를 시켜줬어야지!”

“미츠이 씨 여자친구 있으려나~”

“있지 않을까? 아까 그 옷차림, 누가 봐도 데이트룩 아니었어?”

“그렇지만 ‘모임’이라고 했잖아. 1:1의 약속은 아니니까 혹시 모르지.”

친구들의 재잘대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차가워진 뺨을 감싸는 척 슬그머니 입가를 가렸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 한 평범한 여자인 제가 그런 연예인 같이 멋있는 남자와 아는 사이여서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다는 게 기분이 꽤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의 우쭐함도 있었어요. S군의 호감을 사서 저를 울게 만들었던 Y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라는 우스운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있잖아, K. 미츠이 씨 여자친구 있어?”

“여자친구는 없어.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은 있대.”

“아, 아쉬워! 없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미츠이 씨가 좋아하는 사람 혹시 K인 거 아니야? 말하는 목소리 꽤 다정했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야! 그런 장난 하지 마, 실례라니까.”

친구들의 장난에 저는 펄쩍 뛰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철렁 내려앉아 쿵쿵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저는 빨리 강의실이나 가자며 친구들을 보챘습니다. 다행히도 바깥이 꽤 추웠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떠드는 걸 멈추고 얌전히 발을 옮겨주었습니다. 이다음의 화제 역시 과제의 내용이나 교수님에 대한 불평불만 등으로 자연스럽게 채워져, 그날 친구들에게서 미츠이 씨의 이름을 더 듣는 일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미츠이 씨 쪽이었습니다. 레포트를 쓰느라 늦게까지 깨어 있던 저는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미츠이 씨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오, K. 아직 안 잤냐. 누가 들어도 술기운으로 발음이 꼬인 미츠이 씨의 목소리가 이쪽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변이 왁자지껄한 걸 보니 아직 바깥인 것 같았습니다. 미츠이 씨, 괜찮으세요? 걱정을 담아 묻자 미츠이 씨는 큭큭 웃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멀쩡히 걸어서 돌아가는 중이니까.

“그보다 늦은 밤에 미안하다. 수업은 잘 마치고 들어갔냐.”

“네, 수업은 잘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제 안부를 물으실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많이 마셨나요?”

“뭐, 아무래도 모임이니까……. 오늘은 즐거운 자리기도 했고. 뭐냐, 설마 걱정해 주는 거냐?”

“걱정이 안 되겠나요. 이렇게 늦은 밤에. 이런 상황이었으면 전화한 게 누구라도 걱정했을 거예요.”

“이야, 나 후배에게 이런 대접 받아 보기는 처음인데. 이거 좋은 후배를 뒀잖아, 나.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너 정말 상냥하다니까.”

미츠이 씨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 정말이지 이 사람, 이렇게까지 전화기 너머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요. 많이 마셨으면 얼른 들어가세요.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자 미츠이 씨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느새 미츠이 씨의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던 시끄러운 소리도 한결 잦아들어 있었습니다. 말 없는 숨소리만이 오가는 것이 1, 2분 정도 흐르고, 어딘가에 몸이라도 기대는 것인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마침내 미츠이 씨가 긴 한숨을 뱉었습니다. 이봐, K.

“나 오늘 미야기를 만났다.”

“네? 미야기 씨 미국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들어왔어, 며칠 전에. 그쪽은 지금이 방학이라서. 그래서 오늘이 미야기의 환영회를 겸해서 모이는 자리였고.”

정말로 2년 만에 보는 거야. 그 녀석은 유학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미국 대학에 들어갔어. 그래 놓고 방학 때도 영어 공부를 할 겸 돈도 모을 생각이라며 아르바이트하겠다고 아예 일본에 들어오지 않았거든. 그렇게 못 본 사이에 키도 조금 크고 피지컬 보완해 보겠다고 벌크업도 열심히 하고 말이야……. 이래저래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지 뭐냐. 회상에 잠긴 채 이야기하는 미츠이 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느릿했습니다. 나 그 녀석에게 둘러주려고 목도리를 가지고 갔었어. 조금의 침묵 뒤에 미츠이 씨가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툭 내뱉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츠이 씨의 더플백에 목도리가 걸쳐져 있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캠퍼스에서 봤을 때는 이따가 추울 때 두를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미야기 씨를 위한 것이었군요. 저는 갑자기 답답해져 오는 가슴에 창문을 조금 열었습니다. 난방기구를 너무 세게 틀어놓았던 걸까요.

“너도 성을 듣고 대충 눈치챘겠지만 미야기는 오키나와 출신이라서 추위를 많이 탄다. 윈터컵을 한창 준비할 때는 겨울이 되자마자 한 번 감기에 크게 걸렸어. 포인트 가드라 말도 많이 해야 하는데 기침 때문에 목이 다 쉬어서는 말이지……. 그러니까 왜 목도리를 안 했냐고 물었더니 습관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귀엽게 투덜거리는 거야. 그런데 요즘이 또 딱 12월 초 아니냐. 그 생각이 나서 들고 갔었어. 미야기는 추워하는 주제에 또 패션에 몰두한다고 두껍게 입으려 들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습관 안 된 놈이 추워하면 대신 둘러주려고 했지.”

그랬는데……. 목도리를 가져왔더라고, 미야기가. 미츠이 씨는 잔뜩 힘이 빠져 중얼거렸습니다. 난 그 녀석을 챙겨주고 싶었는데 미야기에게는 내가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어. 코트에서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선배에게 제일 의지한다고 이야기했던 주제에. K……. 나는 모르겠다. 2년 사이에 미야기의 모습이 바뀐 것처럼 그런 점까지 바뀌어 버렸다면 어떡하지? 의지할 선배로서도 있지 못한다면 나는 미야기에게 뭐로 남을 수 있는 거지? 미츠이 씨의 목소리에는 괴로움이 잔뜩 묻어났습니다. 어딘가의 담벼락에 기대앉아 결국 둘러주지 못한 목도리를 매만지며 시무룩해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미츠이 씨가 필요해요.”

그 말은 저도 모르게 내뱉어졌습니다. 뱉고 나서도 저조차 당황해 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니까요. 전화 너머의 미츠이 씨도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미츠이 씨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괴로움을 조금 떨쳐내어 한결 가벼워진, 평소의 미츠이 씨 같은 호탕한 웃음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내가 필요하지. 나 없으면 네 짝사랑은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

그 뜻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깨닫자 숨이 턱 막혔습니다. 늦은 밤에 실례가 많았군. 술주정뱅이의 한탄을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럼 잘 자라. 제가 혼란스러운 머리에 뒤이을 말을 찾지 못한 사이, 미츠이 씨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뚜뚜 소리가 들리는 전화기를 들고 저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까는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져서 당황했지만 사실 저는 이 감각을 압니다. 가슴이 죄어드는 것도, 이 사람이 힘들 때 나를 찾아주는 데서 느껴지는 뿌듯함과 애틋함도, 특별하게 대해진다는 기쁨도, 조금 더 의지해 줬으면 싶은 기대감도 저는 이미 과거에 많이 느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진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아주 잘 알아요. 모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건 최근까지도 제가 S군을 떠올릴 때마다 느껴오던……. 아, 세상에. 저는 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어떡하죠. 저, 어느새 S군이 아니라 미츠이 씨를 좋아하게 된 모양입니다.


미야기 씨의 겨울 방학 동안 미츠이 씨는 그 사람과 자주 만났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고교 때부터 친한 사이라 원래도 단둘이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와의 연습 만남이 취소되거나 미뤄지는 일도 빈번했고, 만났을 때에도 미야기 씨와의 일을 한참 들어야 했습니다. 미야기 씨의 짝사랑 상대인 아야코 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나, 미야기 씨가 그 위로의 일환으로 술을 사달라고 먼저 연락을 했다는 것이나, 미야기 씨의 농구가 더 늘었다는 것이나, 미야기 씨가 자취방에 놀러 와서는 집안일을 제대로 하라며 냉장고 정리를 잔뜩 해주고 갔다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몇십 분 동안 늘어놓고 나면 미츠이 씨는 앗, 하는 표정이 되어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내 얘기만 했군. 너는 요즘 S와 뭐 없냐? 제게 화제를 돌리는 미츠이 씨를 보며 저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과제로 바빠서 특별한 건 없었어요. 이번에 쇼핑을 도와 달라고 할까 싶기도 하고. 오, 그거 괜찮지. 많이 늘었잖냐, 너. 제 거짓말에 뿌듯한 표정을 하는 미츠이 씨를 볼 때마다 저는 처음 이 사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제가 미츠이 씨와의 만남을 포기하지 못했던 건,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왜냐면 미야기 씨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 사람은 아야코 씨라는 여성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아야코 씨를 향한 사랑이 실패해도 미야기 씨가 미츠이 씨를 연애 상대로서 좋아할 리는 없을 거라고, 그렇다면 미츠이 씨가 보답 받지 못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같이 어울리던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줄 수도 있다고……. 그런 음침한 생각을 조금은 했습니다. 물론 저도 원래였다면 이런 생각은 전혀 안 했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좀 미안한걸. 내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던 건데 미야기와 어울리느라 네겐 전혀 신경도 못 써주고.”

미츠이 씨는 이렇게나 다정하니까요. 그러니, 혹시 모르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너 S에게 쇼핑 도와 달라고 하려 한다 했지. 미리 같이 가줄까?”

“…좋아요. 같이 연습해 주신다면.”

“좋네. 언제 갈까? 나 목요일은 자율연습이라 한 번 정도는 뺄 수 있어.”

“응, 목요일 괜찮아요. 수업 끝나고 가주시는 거죠?”

“그래. 그런데 뭘 사려는 거냐?”

“주말에 부모님의 25주년이라, 그 선물을 좀. S군도 매년 준비한다고 하길래 도움을 받을까 했어요.”

사실은 이것도 거짓말이었습니다. 부모님의 25주년은 2년 전이었고, 결혼기념일 자체도 이토록 추운 겨울이 아니라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었어요. 하지만 미츠이 씨와 같이 있기 위해서라면 저는 얼마든지 말을 꾸며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건 미츠이 씨 본인에게 배운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어릴 적부터 학습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온 학생이었고요. 제게 코칭을 해줄 때 미츠이 씨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습니다. 기회를 쟁취하려면 영악해질 줄 알아야 한다고, 그게 바로 농구에서 말하는 페이크라고. 그래서 저도 페이크를 쓰는 겁니다. 비록 제가 하는 건 농구는 아니지만요.

그런데 목요일에 다시 만났을 때, 미츠이 씨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미츠이 씨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미야기와 싸웠다.

“미야기 씨와요? 왜요?”

“미야기가 농구 경기 표를 구했으니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거든.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이기도 해서 정말 가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딱 오늘이잖냐……. 그런데 너와 이미 선약이 있고, 네 약속을 또 미루기에는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못 간다고 했더니 기껏 선배 생각해서 구해 왔더니 여자애랑 놀러 갈 생각에 헤벌레한 거냐고 시비나 걸고 말이야! 빌어먹을, 말을 귀엽게 하는 법은 전혀 모르는 녀석인 건 알았지만.”

헤벌레 한 적 없다고 했더니……. 미츠이 씨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니야, 이 얘기는 더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애초에 우리가 싸운 건 아야코 이야기를 잘못 꺼내 미야기의 화를 돋운 내 탓이니까.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도 미야기에게 화내고 싶진 않았어. 내가 화를 내서 미야기에게 크게 잘못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었고, 또 뭣보다 지금은 미야기를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서 미움을 사고 싶은 바보가 어디 있겠냐. 하지만 그 녀석이 건방지게 굴기 시작하면 나는 항상 휘말리게 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가 올라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자괴감 가득한 미츠이 씨의 얼굴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미야기 씨가 밉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미츠이 씨는 미야기 씨야말로 상냥한 사람이라고 했었습니다. 말투는 좀 건방질지 몰라도 알고 보면 다정한 이야기들만 하고 있다면서요. 하지만 정말로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은 같이 경기를 보러 가 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스케줄을 이해해주고 보내준다고요. 미츠이 씨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아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나 다정한 미츠이 씨가 화를 내게 만들고 속상하게 만드는 미야기 씨를 저는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미야기 씨도 미츠이 씨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 거예요. 제가 건넨 상투적인 위로에 미츠이 씨는 가만히 웃었습니다. 나도 안다. 미야기는 이해심이 많으니까. 말만 들으면 이해심이 많은 사람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습니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미츠이 씨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금 안 하고 이따가 할 거야. 어쨌든 이쪽의 약속이 먼저잖냐.”

미츠이 씨는 그렇게 말하고 길 앞쪽으로 턱짓을 해 보였습니다. 가자. 저는 미야기 씨의 일은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미리 알아봐 두었던 가게로 앞장섰습니다.


미츠이 씨와 미야기 씨가 화해를 했다는 건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사람 수고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났었어요. 저도 너무 어린애처럼 굴었죠. 선배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미야기 씨는 그렇게 말하며 본인도 같이 사과했다고 했습니다. 그날의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다른 경기를 같이 보러 가기로 했다고, 이번에는 미츠이 씨가 푯값을 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였습니다.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시간이 또 생긴 미츠이 씨의 목소리가 꽤 수줍고 즐겁게 들려서, 저는 약간 따끔거리는 가슴으로 그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었습니다.

전화의 말미에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미츠이 씨는 들뜬 목소리를 했습니다. 오, 그런데 이것도 꽤 괜찮은 소재이지 않냐. 너도 나중에 S와 뭘 같이 보러 가 봐. 너희는 연극 서클이니 연극의 표라던가를 미끼로 쓰면 좋겠군. 아니면 아예 다른 방향으로, 스포츠 같은 것으로 할 거면 그건 이쪽에서 표를 구해줄 테니까 부탁만 하라고. 이제는 S군과 별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는 얌전히 대답했습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미야기 씨는 1월 초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연말연시의 짧은 겨울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열흘 간의 농구부 합숙을 떠났던 미츠이 씨는 합숙이 끝나자마자 배웅을 위해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미츠이 씨가 미야기 씨를 챙기는 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야 그렇지 않나요. 미야기 씨가 없다면 이런 미츠이 씨를 독차지하는 건 저뿐이니까요. 그러니 하루 정도는 미야기 씨에게 빌려주어도 괜찮았습니다. 어차피 미야기 씨는 미츠이 씨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빌려주어도 별로 받지는 않았겠지만요.

미야기 씨가 떠난 후, 저희에게는 기말고사와 봄방학이 있었습니다. 이제 4학년이 되는 미츠이 씨는 완전히 농구부의 주전이 되었기 때문에, 방학 중에도 훈련의 문제로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학교 근처에서 지냈습니다. 저 역시 가을 문화제에서 공연할 대본의 작성과 편집, 그리고 부 활동 모집 주간에 선보일 짧은 연극의 연습 등으로 정기적으로 학교에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는 시간이 겹치지 않아 저희는 직접 만나기 보다는 주로 라인을 통해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습니다. 미츠이 씨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았어요. 미야기 씨도 다시 돌아간 미국에서 학기를 소화하느라 바쁜 모양인지 미츠이 씨에게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덕분에 그 겨울은 정말로 오롯이 저와 미츠이 씨만의 시간이었습니다.

방학이어도 여러 가지 핑계로 S에게 안부 인사는 틈틈이 하라는 미츠이 씨의 코칭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저는 S군을 좋아하지 않았고, S군에게 신경을 쓸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Y씨의 SNS에서 방학 중인데도 S군과 함께 하는 사진들을 봤다는 이야기도 굳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꾸며내고, 뻔히 국내에 있는 S군을 어학연수라며 겨울 방학 동안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버렸습니다. 제가 미츠이 씨에게 전할 짝사랑의 이야기가 많지 않은 것에 대한 적절한 핑곗거리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렇게 거짓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미츠이 씨는 한 번도 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봄의 지역 대회를 대비한 연습으로 힘들어서 제대로 인과관계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고, 언젠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미츠이 씨가 감정에 둔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제게는 꽤 좋은 일이었습니다.


4월, 신학기가 되었습니다. 3월이 되자 미츠이 씨를 만날 시간은 더더욱 나지 않았습니다. 라인도 뜸해졌습니다. 간토 선수권 대회를 한 달 앞두고부터는 미츠이 씨의 스케줄이 새벽부터 밤까지 연습으로만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에 제가 미츠이 씨를 다시 본 건 입학 주간이 끝난 체육관의 게시판 앞이었습니다. 인쇄소에서 복사해 온 신입 부원 모집 포스터를 교내 게시판 곳곳에 열심히 붙이고 있던 저를 발견하고 미츠이 씨가 먼저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여, K. 오랜만이다. 종강 전에 비해 머리가 조금 길어진 미츠이 씨는 여전히 스포츠 브랜드의 모델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미츠이 씨. 연습에 가시는 건가요?”

“아니, 매니저들이 부원 모집 자리에 얼굴을 잠깐만 비춰달라고 해서 거기에 가려는 중이다. 연습은 그 뒤에 갈 거야. 그보다 너 3학년 아니었냐? 왜 이걸 네가 혼자 다 하고 있어? 후배한테 시키지.”

“혼자 다 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일단 부착물 담당. 직접 나누어주는 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어요.”

나름 제일 힘든 건 착실하게 넘겼답니다. 제가 너스레를 떨자 미츠이 씨가 피식 웃었습니다.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는 웃음이었습니다.

“참. 너 금요일 오후에 시간 되냐?”

“금요일이요? 음……. 이번 학기는 오전 수업밖에 없으니 되긴 되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럼 나 농구 하는 거 보러 올래?”

미츠이 씨의 말에 저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미츠이 씨가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항상 굴뚝 같긴 했습니다. 저는 농구를 모르지만 이 사람이 경기를 하는 모습이 멋있을 것 같다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겨울의 대회는 제가 갈 수 없는 다른 현에서 치러진 데다가 다른 부가 연습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러 가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저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츠이 씨가 먼저 권유를 해 온 것입니다. 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에 다른 학교와 연습 대항이 있어. 부 활동 주간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고 선수권 대회 앞두고 치르는 평가전 같은 것이기도 하고. 이쪽이 홈이니까 이왕이면 우리 쪽 관중으로 채워서 기를 꺾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지.”

“갈게요.”

저 꼭 가서 미츠이 씨를 응원할게요. 제 말에 미츠이 씨가 다시 한번 웃었습니다. 그 정도로 강제하는 건 아니긴 했는데. 어쨌든 와준다니 고맙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지면 쪽팔리니까 반드시 이겨야겠군. 그리고 미츠이 씨는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체육관을 빠져나갔습니다. 미츠이 씨가 가고 나서 저는 서클의 포스터에 빨개진 얼굴을 묻은 채 한참 동안 심장을 가라앉혀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조금 전에 미츠이 씨가 한 그 말이, ‘제가 오니까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말이… 마치 승리를 제게 바치겠다는 그런 연극적인 느낌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미츠이 씨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설렐 수밖에 없는 건 세상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머릿속으로 옷장의 환경을 점검하면서 뭘 입고 가면 좋을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금요일, 미츠이 씨가 알려준 체육관으로 갔을 땐 이미 관중석의 80% 정도가 차 있었습니다. 저는 적당히 사람이 너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자리를 골라 앉았습니다. 남자라고는 아버지 뿐인 저희 집에서 스포츠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 이런 경기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코트에서 몸을 풀며 공을 던지고 있는 미츠이 씨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꽤 기대가 되어 저는 입꼬리를 들썩이며 두 손을 무릎 위에 꼭 모았습니다.

미츠이 씨가 농구부의 주전이라는 건 본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농구에 문외한인 저도 미츠이 씨가 정말 잘하는 선수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미츠이 씨가 던진 공이 그물을 통과할 때마다 팀의 사기가 크게 올라간다는 것도 잘 보였습니다. 쉴 새 없이 코트를 누비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는 그 사람은 정말로 멋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주변의 들뜬 분위기에 동화되어 미츠이 씨의 이름을 힘차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흥분 되는 감각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그날의 경기는 미츠이 씨가 각오한 대로 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저는 체육관 앞에서 미츠이 씨를 기다렸습니다. 이 벅차고 기쁜 감상을 라인으로 남기기보다는 얼굴을 직접 보고 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미츠이 씨가 직접 초대를 해주었는걸요. 그러니 잘 보러 왔다고 직접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나 나올 사람들은 거의 다 나오고, 체육관 앞에는 혼자 서 있는 저와 반대편에 모여 있는 여러 명의 여성들 뿐이었습니다. 미츠이 씨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이 팬클럽 같은 사람들이구나 싶었습니다. 프로가 아닌데도 팬클럽이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 전 경기에서 본 미츠이 씨의 활약상을 다시 떠올리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황색 운동복을 입은 상대 선수들이 먼저 뒤편의 주차장으로 떠나고, 미츠이 씨는 우리 학교의 선수들 사이에 섞여 나왔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미츠이 씨가 팬클럽의 여성들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미츠이 씨 저쪽으로 먼저 가시려나. 어차피 이후에 수업이 없어 시간이 많았던 저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살짝 욕심내어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조금 아파 잠깐 앉아 있을 곳이 없을까 살피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미츠이 씨가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냐? 라인이라도 하지. 그랬으면 좀 더 일찍 나오려고 했을 텐데.”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기다린 거니까. 오늘 경기 잘 봤다는 말씀을 직접 드리고 싶었거든요.”

“아아. 고맙다. 정말 이겨서 다행이지. 기껏 사람 보러 오라고 해 놓고 지면 인사 받을 자격이 없잖냐.”

“질 리가 없는 경기였던데요.”

“아냐, 오늘 상대한 학교도 꽤 강호교다. 주전들이 졸업하고 아직 합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서 그렇지, 여름의 대회에서는 또 모르는 일이야.”

미츠이 씨는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언가 대화를 더 잇고 싶었지만 농구에 문외한인 제가 괜히 아는 척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우스울 것 같기도 하고, 또 이쪽을 빤히 쳐다 보는 여러 쌍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해서 저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저분들에게는 안 가보셔도 되나요? 미츠이 씨의 팬클럽이신 것 같은데.”

“갈 거야. 하지만 네가 저 사람들보다는 더 먼저니까.”

…사실, 그 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는 이미지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미츠이 씨의 ‘네가 먼저’라는 말의 타격감이 너무 컸거든요. 그 말은 제가 미츠이 씨의 지인이기 때문에 먼저 인사를 하러 왔다는 뜻일 겁니다. 공연을 할 때도 그런 것을요. 하지만 말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으니까, 피켓까지 만들어 가며 미츠이 씨를 더 오래 응원해 왔을 사람들보다 제가 더 우선순위라는 게 기분이 좋아서, 저는 속으로 조금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나, 미츠이 씨와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학교는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대회의 성적이 잘 나와야 프로 지명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열심히 노력하던 미츠이 씨가 MVP로 선정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습니다. 제 축하 메시지에 미츠이 씨는 네가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따로 찍어 저장해 두었습니다. 미츠이 씨의 메시지를 볼 때마다 푸르른 5월처럼 제 마음에도 생기가 가득 돌았습니다.

그즈음 S군은 Y씨와의 교제 사실을 서클에 공식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겨울 방학 때부터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큰 동요는 없었습니다. 다들 박수를 쳐주며 잘 사귀라고 축복을 해주었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S군을 향한 마음이 꺼진 후였으니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이 주제를 핑계로 미츠이 씨와의 술 약속을 얻어냈습니다. 마치 아야코 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미야기 씨처럼 말이에요.

어쩌면 그 비유가 잘못이었을까요? 소문을 이야기하면 그림자가 비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미안한데, 누군가가 합류를 해도 괜찮을까? 문학부 건물의 앞에서 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미츠이 씨가 나오는 저를 보자마자 물었습니다. 미야기가 끼어도 되냐고 해서.

“미야기 씨요?”

“어. 학기 끝나서 일주일 전에 들어왔거든. 오늘 예정이 있냐길래 너랑 마실 거라고 했더니 같이 마셔도 되냐고 묻길래. 이 녀석 이런 식으로 먼저 끼겠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웬일이지. 미국에서 사람이 변했나.”

“…….”

“불편하면 거절할 테니까.”

“아뇨, 괜찮아요. 미야기 씨 오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츠이 씨에게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미야기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미야기 씨가 미츠이 씨를 그런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둘이 함께 있는 걸 봐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제 허락이 떨어지자 미츠이 씨는 미야기 씨에게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럼 먼저 가 있자, 미야기는 다른 곳에서 오느라 조금 늦을 거다.

저희는 학교 근처의 이자카야로 갔습니다. 가격이 싸고 음식도 괜찮아서 인기가 많은 곳이었어요. 예약을 해 둔 모양이었는지 미츠이 씨가 이름을 대자 금방 자리로 안내되었습니다. 일행이 한 명 더 올 거라는 말에 점원이 조금 곤란해 하긴 했지만 운 좋게 때마침 4인석이 하나 나서 그쪽으로 옮겨 앉을 수 있었습니다. 미츠이 씨는 생맥주를 시키고 저는 레몬 츄하이를 시킨 뒤 한참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늦어서 죄송함다.”

조금 톤이 높은 목소리, 장난스러운 어조. 분명 그 정도로 작은 키는 아니겠지만 미츠이 씨의 키가 눈에 완전히 익어버린 제게는 한참 작게 느껴지는 남자가 갑자기 쑥 나타나 미츠이 씨의 옆자리에 몸을 들이밀었습니다. 오, 왔냐. 미츠이 씨가 옆으로 더 비켜주며 그 남자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야기 료타입니다. 남자가 저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미야기 씨. 예전에 미츠이 씨에게 들은 대로 꽤 불량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까무잡잡하게 태운 피부나 한쪽 귀에만 걸린 피어스나 왁스로 바짝 세운 곱슬머리 같은 것들이 특히나요. 게다가 검은 반소매 티셔츠 위에 청자켓을 입고 목깃에 선글라스를 꽂아둔 것은 미츠이 씨의 차분한 차림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운동계...? 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 정도였습니다.

“K입니다. 미야기 씨의 이야기는 자주 들었어요.”

그렇게 인사에 답하자 미야기 씨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건방지다는 평가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이 반만 뜨여 있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은 의외로 꽤 귀여운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야기 씨는 곧 아까 전의 그 건방진 시선으로 되돌아 가서 미츠이 씨를 곁눈질하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쳤습니다.

“제 이야기를요? 뭔데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에 대해 무슨 소리를 한 겁니까, 미츠이 선배. 후배의 흉이나 본 건 아니죠?”

“그래, 흉봤다. 지금처럼 건방지고 재수 없게 구는 꼬맹이라고.”

“아, 미츠이 선배 또 고2 때 같은 말을.”

“윽.”

미츠이 씨가 정곡을 찔린 것 같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걸 본 미야기 씨는 짓궂은 얼굴로 맑게 웃었습니다. 여기 생 하나 주세요. 지나가는 점원을 붙잡고 주문을 마친 미야기 씨가 다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멋대로 끼어서 죄송합니다. 미츠이 선배를 뜯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제게는 흔치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매번 빌붙는 것 같잖아! 네게 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그렇지만 저는 미국에 있으니 선배의 다른 후배들에 비해 기회가 없는 건 맞잖아요.”

“…누가 미국에 가라고 했냐.”

미츠이 씨가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미츠이 씨가 미야기 씨의 미국 활동을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야 잘 압니다. 미야기 씨의 농구 이야기를 할 때면 매번 미국에서 잘 해내고 있는 게 대단하다는 말을 반복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미츠이 씨가 왜 미국에 갔냐며 심술을 부리게 되는 건 미야기 씨의 입에서 나온 '후배'라는 선이 있는 단어 때문이겠죠. 역시 미야기 씨는 미츠이 씨에게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저는 속으로 조금 기뻐졌습니다. 훨씬 마음 편하게 이 삼자대면의 술자리를 즐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츄하이를 마셨습니다.

분명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츠이 씨와 미야기 씨의 모습에서 묘한 것이 자꾸만 느껴졌어요. 취기가 올라와 나른하게 풀어진 미야기 씨의 눈이 미츠이 씨를 바라보는 모양이라든지, 헛손질로 접시를 쳐서 다 떨어뜨릴 뻔한 미츠이 씨를 챙겨주는 손길이라든지, 미츠이 씨가 저와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순간 스쳐 가는 얼굴빛이라든지. 술을 마시면 취해야 하는데 오히려 테이블 위의 잔이 늘어날수록 저는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습니다.

“아, 나 잠깐만 화장실.”

미츠이 씨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미야기 씨와 둘만 남은 테이블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왠지 미야기 씨의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서, 저는 아무런 알림도 와 있지 않은 라인을 괜히 한 번 확인하는 척을 했습니다.

“미츠이 선배 잘생겼죠?”

갑자기 미야기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네? 놀라 고개를 들자 저를 쳐다보고 있던 미야기 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딸꾹질을 할 뻔해 저는 억지로 숨을 멈췄습니다. 미야기 씨는 여전히 특유의 반만 뜨인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까처럼 기분 좋은 취기에 부드럽게 풀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빙하나 심해 같은……. 그런 깊고 어두운 눈이 제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저 사람 고등학생 때도 인기 많았어요. 루카와만큼은 아니었지만, 농구부로 다시 돌아온 후에는 러브레터나 선물도 꽤나 받았으니까.”

“그랬나요……. 그럴 만하죠. 미츠이 씨라면. 지금도 대학에서 인기가 많은걸요. 얼마 전에 경기를 보러 갔는데 팬클럽도 벌써 있더라고요. 그게 정말 미츠이 씨다웠달까.”

“팬클럽이라면 고등학생 때도 있었어요. 커다란 주황색 불꽃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면서 미츠이 선배를 응원했었죠. 뭐, 다 미츠이 선배의 친구들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홋타 선배는 뭘 하고 지내려나. 그것도 나름의 인연은 인연이라 가끔 신경 쓰인다니까.”

미야기 씨는 미츠이 씨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거기에서는 제가 모르는 이야기와 제가 모르는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나왔습니다. 사실 그것까지는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요. 미츠이 씨와 미야기 씨는 고등학교의 선후배이니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때의 에피소드가 나오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언급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농구부로 다시 돌아왔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로 제 앞에서 꺼낸다는 게 자꾸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게 더 있습니다. 대체 저는 왜 미야기 씨의 말속에서 적의를 느끼고 있는 거죠? 배척 받는 기분이 든다고요. 여기는 당신이 범접할 공간이 아니라는, 미츠이 히사시와 미야기 료타만의 무엇이라는 영역 표시 같은 걸 보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그걸 느낄수록 저는 더 혼란스러워지고 답답해집니다. 왜냐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분명 미야기 씨는 미츠이 씨를,

“K씨 미츠이 선배 좋아하죠?”

“ㄴ,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에 빠져 있던 저는 미야기 씨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습니다. 분명 앉아 있으니 눈높이는 비슷할 텐데 저는 미야기 씨에게 내려다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미야기 씨가 선전포고를 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쪽도 그렇거든요. 나는 고3 때부터였어.”

미야기 씨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을 저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같은 일본어인데 지독하게 다른 외계어처럼 들렸습니다. 그야 그렇잖아요? 미야기 씨도 미츠이 씨를 좋아한다고요? 심지어 3년이나? 정말로 말이 안 되잖아요. 미츠이 씨보다 이 사람이 그를 더 오래 좋아했다고요? 그런데 왜 미츠이 씨는 그걸 몰랐죠?

“하지만 미야기 씨는, 아야코 씨를 좋아한다고……. 미츠이 씨가 그렇게 말했는데…….”

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미야기 씨가 아까처럼 동그래진 눈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하! 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아, 진짜 미츠이 히사시. 미야기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본인의 맥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공항에서 키스를 하려다 만 거였어? 내가 아직도 아야쨩을 좋아하는 줄 알고? 헛웃음 섞인 중얼거림이 미야기 씨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덜컹. 저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미야기 씨가 내뱉는 말들을 제정신으로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거의 랩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인사를 남기고 저는 가방을 낚아채 이자카야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미츠이 씨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제가 먼저 뛰쳐나왔던 다음날에도, 그로부터 며칠 후에도 미츠이 씨는 저의 안부를 묻고 연락이 없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저는 1학기 동안에는 서클의 활동이 많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최대한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바쁘기도 했습니다. 4학년 선배들이 취활을 위해 은퇴하면서 연출부 내의 유일한 3학년인 제가 메인 연출이 되어 연습을 이끌어 가야만 했으니까요.

반 년 동안 그렇게 자주 라인과 전화를 주고받았던 게 무색하게, 한 번 마음먹고 연락을 끊어내자 미츠이 씨와의 연결도 쉽게 끊겨 나갔습니다. 더 이상 새 알림이 뜨지 않는 그 사람과의 대화창을 보며 저는 미츠이 씨의 연락처를 제 휴대폰에서 완전히 지웠습니다.

미츠이 씨를 다시 마주한 건 8월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은 시작된 지 오래였지만 서클의 정기 연습 때문에 학교에 온 참이었습니다. 그저께 극장의 답사를 다녀온 후배가 조명 하나의 위치를 변경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었기 때문에, 저는 걷는 중에 도면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동선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어 조용한 캠퍼스에서 생각에 한참 잠겨 있는데 갑자기 저 먼 앞쪽이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낯익은 운동복을 보고 농구부임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 사이에는 미츠이 씨도 섞여 있었습니다. 3개월이 지났어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었습니다. 미츠이 씨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던 저는 급히 근처의 나무 그늘 뒤로 몸을 피했습니다.

몸을 숨기면서도 이거 너무 엉성하지 않으려나, 혹시 발견되면 어떡하지,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야 하나, 하는 여러 생각들을 했는데 다행히도 미츠이 씨는 다른 선수들과 장난을 치느라 저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미츠이 씨는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길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제 눈앞을 바람처럼 지나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지난 반년간의 일이 마치 환상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싱숭생숭해진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던 저는 조금 전의 장면을 되새기다가 문득 위화감을 하나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츠이 씨의 왼쪽 귓불에 검은 링 피어스가 매달려 있는 걸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제가 알던 미츠이 씨는 액세서리는 귀찮고 불편하다며 목걸이나 팔찌조차 멀리했던 사람인데, 3개월 사이에 갑자기 귀를 뚫었다니요. 생경한 일이었습니다. 그 낯선 모습에 잠깐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제 머릿속에 불현듯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그 번개 같은 깨달음에 저는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거군요. 그런 거였어요. 미츠이 씨는 이제 그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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