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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을 손에 넣는 방법

某日 by 銘

정대만은 원하는 것은 쟁취하려 드는 남자였다. 스포츠 선수로서의 승부욕이나 타고난 정복욕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대개 욕심 나는 것은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갖겠다고 멋없이 억지를 부리는 사내는 또 아니었다. 그는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기울일 수 있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러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잘 아는 영리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 쟁취하고 나면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던 만큼 오래도록 손에 쥐고 아꼈다. 그러니 대만이 그 정도로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은 항상 제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2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농구를 되찾은 후에는 그 정도로 갖고 싶어할 것은 당분간 없으리라 생각했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제가 사랑하던 농구를 완전히 손에 쥐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공백 기간 동안 떨어진 감각을 회복하고 몸을 다시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빠 한눈을 팔 시간 따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대만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근래 그는 새롭게 갖고 싶은 것이 생겨 초조해진 상태였다. 보고 있자면 심장이 두근거려 얼굴이 새빨개지는 건 예사요,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던 것마저도 지금은 귀여워 보이다 못해 한껏 어르며 사랑해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벅차도록 부풀어오른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여잡고 있자면, 아, 정말이지, 농구만큼이나 길이 귀애할 존재라는 직감이 바로 들 정도였다.

문제는 이번에 정대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제 마음대로 안 되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었지만.

“선배 패스 똑바로 안 받죠!”

날카로운 톤의 목소리가 대만에게 일갈했다. 연습 상황을 체크하던 매니저들이 다시 넣어준 공을 받아들며 대만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손을 들어보였다. 비딱한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리다가 이내 뱉어지는 한숨과 함께 가라앉았다. 집중해요. 옹골차고 작은 손이 턱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자자, 다시 연습! 목소리의 주인이 등을 돌릴 때까지 대만은 집요하게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았다.

그랬다. 최근의 정대만은 송태섭이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두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이어지던 연습이 겨우 멈췄다. 다들 땀범벅이 된 채로 수건을 하나씩 목과 머리에 얹고 바닥에 드러눕거나 벽에 기대 늘어졌다. 주전 멤버들이야 항상 연습에 열심이었고, 인터하이 이후 기세가 많이 오른 벤치 멤버들도 거의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연습에 임하는 덕에 체육관 안은 다른 의미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다들 이것 좀 마시고 해요! 부실에서 아이스박스를 옮겨 온 매니저들이 소리치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부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그 옆으로 몰려들었다.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긴 차가운 음료수는 으레 마시는 파란 라벨의 그것이었다. 열기와 갈증에 지친 손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이온 음료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내용물이 줄어들고, 음료수를 쟁취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부원들이 먼저 음료수를 가져가길 기다리며 연습 메뉴가 적힌 파일철에 이런저런 코멘트를 달던 태섭이 제일 늦게 설렁설렁 다가왔다. 파일철을 겨드랑이에 낀 그가 제 몫의 음료수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넌 이거 마셔.”

갑자기 태섭의 옆에서 대만이 불쑥 몸을 내밀었다. 허리를 숙인 대만이 아이스박스 안으로 손을 넣더니 얼마 남지 않은 음료수 사이를 뒤적였다. 잠시 뒤 그의 손에서는 연두색의 이온음료가 딸려 나왔다. 으레 마시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레몬맛의 경쟁 제품이었다. 제 품에 안겨지는 게토레이를 본 태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이걸요? 저요? 왜요?”

“어? 그거 대만 선배 드시려고 넣어 놓으라 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냐, 송태섭 거야.”

“그러니까 나 왜요?”

“마시라면 그냥 좀 마셔. 주장은 특별히, 어? 그런 특별 대우 같은 거라고 생각하던가.”

대만이 약간의 짜증을 담아 대답하자 태섭이 멀거니 연두색의 이온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제가 왜 모두가 마시는 포카리스웨트가 아니라 정대만이 따로 사 온 듯한 게토레이를 마셔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준 걸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뭐…….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렇게 인사하고 얌전히 게토레이의 뚜껑을 따는 태섭을 보며 대만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이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제 앞에서 그 게토레이를 마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몸을 돌리고 마저 휴식을 취하러 물러났다. 만만이 대체 무슨 꿍꿍이래? 반쯤 비운 병을 닫는 태섭에게 백호가 작게 수군거렸다.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부실에서 가져온 아이스박스엔 게토레이가 한 병씩 담겨 있었다. 대만은 매번 그 게토레이를 집어다가 태섭에게 건네주었고, 태섭은 그때마다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주어진 음료수를 마셨다. 그런 일이 2주 정도 반복된 후에는 매니저들은 태섭 몫의 포카리스웨트는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서 일주일이 더 지난 후엔 부원들이 대만보다도 먼저 게토레이를 집어 태섭에게 건네주었고, 일주일이 더 지나자 태섭이 알아서 제 손으로 게토레이를 꺼내 먹었다. 이제 북산 농구부 내에서는 '게토레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송태섭과 정대만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수준이었고, 그건 강제로 음료 증정을 당하는 장본인인 태섭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대만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유명 심리학자의 이름이 붙은 어떤 실험처럼 태섭이 일상 속에서 연두색 이온음료를 볼 때마다 당연하게 대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을. 대만은 먼저 태섭에게 제 존재감을 새겨놓고 싶었다. 같은 학교에서 같이 운동을 하는 사이인데다 얽혔던 일이 있는 만큼 두 사람의 접점이야 많았지만 그 접점들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유한다는 게 문제였다. 대만은 그래서 레몬맛 음료수를 골랐다. 그 이온 음료가 정대만만을 위한 송태섭과의 접점으로 변하는 것을, 그걸 계기로 태섭이 대만을 조금 다른 쪽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학교 행사로 주말 내내 체육관을 쓰지 못하게 된 날이었다. 인터하이가 끝난 뒤 계속 강행군으로 달려왔으니 2, 3일 정도는 쉬어도 괜찮았지만 대만은 아침 식사가 적당히 소화되자마자 농구공을 들고 야외 코트로 나갔다. 그건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몸에 완전히 배인 습관이기도 했고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오면 끼워달라고 해서 경기라도 한 판 할까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따라 코트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금방 따분해진 대만은 연습을 그만두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골대를 올려다보았다. 심심한데 누구 부를까나. 같이 농구를 할 수 있으면 누구든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 대만이 연락할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언제든 농구하자고 편하게 불러낼 수 있고 비상연락망을 보지 않아도 번호를 누를 수 있을 만큼 자주 연락하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으니까. 대만의 전화를 받자마자 출발하겠다고 대답한 태섭은 30분 정도가 지나자 가볍게 숨을 고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뛰어왔냐?”

“먼저 나와 있는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면 좀 그렇잖아요.”

“별로 상관 없는데. 나야말로 갑자기 너 불렀고.”

“겸사겸사 러닝 했다고 치죠, 뭐. 그래서 뭐 할래요? 수비 해줄까요, 1:1을 할까요.”

“몸도 풀 겸 1:1 하자.”

“좋아요.”

분명 본격적인 연습 전에 몸을 풀려고 시작했던 1:1이 승부욕을 자극하는 바람에 내리 세 판을 더 해버리고 말았다. 가을에 접어든 지 좀 되었다 해도 내리쬐는 햇살은 여전히 뜨끈한 기운을 품고 있어, 체력이 소진되는 것보다 더위에 먼저 지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동시에 좀 쉬자는 말을 꺼냈다. 공은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그늘의 벤치에 앉아 가만히 땀을 식혔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침묵이 어색할 사이는 이미 지난지 오래라 분위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조금 뒤, 티셔츠를 들어 땀을 훔쳐낸 태섭이 몸을 일으켰다.

“목 마르니까 마실 것 좀 뽑아 올게요.”

“그럼 포카리도 하나 뽑아줘. 이따가 음료수 값 줄게.”

“됐어요. 체육관 못 쓰는데도 연습에 열심인 선배가 대견해서 오늘은 제가 쏩니다.”

태섭이 주머니에서 작은 동전 지갑을 꺼내 보란듯이 흔들어 보였다. 야, 송태섭. 장난인 것이야 알지만 어린애라도 칭찬하는 것 같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만이 발끈하는 목소리를 냈다. 태섭이 깔깔 웃으며 재빠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대만은 한숨을 내쉬며 빨리 다녀오기나 하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요.”

잠시 후,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온 태섭이 들고 있던 캔 하나를 내밀었다. 대만이 마시겠다고 한 파란색과 하얀색의 제품이 아니라 초록색과 연두색에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준 디자인이었다. 대만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초록색 캔과 태섭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나 포카리 마신다고 했었는데.”

“알아요. 그런데 선배가 나한테 맨날 이거 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선배 주려는 거예요. 선배 생각나서 뽑아 왔으니까 그냥 받아요.”

그렇게 말하며 태섭은 재차 초록색 캔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고도 대만은 음료수를 바로 마시지 않았다. 마개를 열 생각은 않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가는 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뭐해요? 안 마시고. 진작에 제 몫의 생수병을 딴 태섭이 캔만 바라보고 있는 대만에게 물었다. 진짜 포카리 아니어서 안 마시는 거예요? 태섭이 질렸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태섭아. 묘한 손길로 캔을 만지작거리던 대만이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며 눈을 들었다.

“너, 내가 왜 연습 때마다 이거 너한테 줬는지 알아?”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태섭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대만이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는지 가늠하려는 것처럼 한참 그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주장 특별대우 같은 거라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줬잖아요.”

“너 좋아해서 준 거야.”

“뭐라고요?”

“너 좋아해서 준 거라고. 그거 마실 때마다 내 생각 하라고.”

태섭이 제 생각이 나서 이 음료를 뽑아왔다고 말한 순간 대만은 제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음을 확신했다. 그건 태섭이 이 연두색 음료를 대만과 연결된 물건으로 특별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으므로. 지난 한 달 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전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대만은 이쯤에서 태섭을 손에 넣기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해. 그 자리에서 대만은 태섭에게 고백했다. 선후배나 동료 선수로서가 아니라 사귀고 싶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거라고, 조금 염치없을 수도 있지만 여름의 해가 강하게 내리쬘 때부터 제가 그를 마음에 품었노라고. 다소 엉큼한 욕심으로 시작한 계획이었지만 태섭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으니 일생 처음 진지한 사랑 고백을 하는 대만의 심장도 서투른 10대 소년답게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나 태섭은 대만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거북하고 곤란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선배, 저 한나 좋아하는 건 알고 그러는 거죠?”

“알아.”

“그리고 지금 이러는 거 엄청 부담스러운 것도요.”

“당연히 알지.”

“그런데 이 얘기를 왜 꺼낸 거예요?”

“너랑 사귀고 싶어서.”

“선배.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한나를,”

“이한나를 좋아해도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아?”

“네?”

“하루만 사귀자. 나랑.”

뭐라고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태섭이 경악에 차 빽 소리를 질렀다. 손톱으로 캔 마개를 틱틱 튕기던 대만이 태섭의 기겁한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뭐 어때.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지금 너네 둘이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대만의 뻔뻔한 제안에 태섭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대기만 했다.

“그냥 이한나 사귀기 전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하루짜리 체험판 남친은 별로 부담스러울 것도 없잖아.”

태섭은 정말로 반박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대만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평소 말싸움을 할 때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따지고 들던 녀석이 지금은 말문이 막혀 답답해 하는 게 꽤나 귀여워서 대만은 태섭의 반응을 즐겁게 감상하며 천천히 캔을 열었다. 그리고 일부러 더 느긋한 몸짓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태섭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떠올랐다.

대만은 태섭이 오히려 이럴 때 더 물러진다는 걸 잘 알았다. 송태섭은 돌격대장이다. 저를 밀어내는 것은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독하게 뚫어내는 반면 잡아당기는 쪽에는 면역이 없다. 이도저도 못해 어찌할 줄 모르다가 슬슬 뒷걸음질 치기만 한다. 거기에서 가만 두면 흐지부지 없던 일로 해버리고, 좀 더 강하게 당기면 확 끌려온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주면 반대로 또 튕겨나가는 녀석이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대만은 제 손에 쥐어진 관계의 끈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말만 사귀는 거지 평소와 다를 건 없을 거야. 어차피 하루면 뭘 할 시간도 안 되고. 그렇게 부담 안 가져도 돼.”

내 평생 소원이다, 태섭아. 나랑 아예 연애 해달란 말은 지금 안 해. 그냥 하루만 나한테 달라는 거야. 너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건 해줄 수 있잖아. 응? 달콤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태섭을 꾀었다. 태섭은 갈등하는 눈으로 대만을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관계의 열쇠를 쥐는 것은 고백을 들은 사람 쪽이지만 대만은 태섭에게 선택지를 주는 척 교묘하게 열쇠를 건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애 관계에 서툰 태섭이 대만의 속셈을 눈치채고 열쇠를 뺏어올 리도 없어서, ‘하루만 사귀어달라’는 말에 휘둘린 태섭은 그 열쇠를 잡아보지도 못한 채 대만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고 말았다.

“…선배가 먼저 하루만 사귀는 거라고 했어요.”

정말 딱 하루만이니까! 알았어요? 태섭이 벌게진 얼굴로 괜히 목청 높여 몇 번이고 강조했다. 드디어 떨어진 허락에 대만은 활짝 웃으며 다 마신 게토레이 캔을 저 멀리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정대만은 한 번 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월요일, 대만은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길을 30분쯤 걸어 5층짜리 맨션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적당한 가로등 아래에 서서 새벽 공기를 맡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볍고 빠른 발소리와 함께 대만이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를 나오자마자 대만과 마주친 태섭이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까지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에 껄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선배가 여긴 왜 있어요.”

“오늘 우리 사귀는 날이잖아. 그래서 데리러 왔지.”

“누가 사귀……!”

버럭 화를 내려던 태섭은 어젯밤의 통화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는지 분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루만 사귀자는 내용에 합의를 하고 났을 때 태섭은 이렇게 된 거 빨리 대만과 사귀어 버리고 치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대만은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일부러 태섭을 애태울 겸 남은 주말 동안 가족 일정을 핑계로 ‘연인의 날’을 개시하는 걸 조금 미루었다. 그리고 주말이 끝나가는 어제에서야 태섭의 집에 전화를 걸어 월요일 하루 동안 사귀자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태섭은 여전히 제가 정대만의 연인 타이틀을 가지게 된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피하는 걸 귀엽게 바라보던 대만은 이내 턱짓으로 단지 입구를 가리켰다. 그럼 가자. 태섭이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것처럼 대만의 뒤를 따랐다.

학교에 가는 내내 태섭은 고장 난 마리오네트처럼 삐걱거리며 옆 사람을 경계했으나 의외로 대만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엔 평소처럼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걸었고 버스에서도 그저 옆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간간이 나누는 이야기도 일상의 담백한 주제들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 태섭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고, 10분쯤 지나서는 긴장도 풀렸는지 대만이 옆에 있든 말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만은 버스의 덜컹거림에 따라 맥없이 흔들거리는 태섭의 몸을 잠깐 쳐다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기대어 자라고 제 어깨도 내어주고 은근슬쩍 손도 잡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한 달의 노력을 들여 겨우 얻어낸 하루다. 이 귀한 시간을 욕망에 휘둘려 함부로 쓰고 태섭의 경계심을 올려서는 안 되었다. 지금도 제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그 손바닥 위가 제 영역인 양 스스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드러눕는 걸 가지는 쪽이 더 완벽하지 않은가. 그걸 위해서라면 대만은 얼마든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계획에 따라 대만은 하루종일 정말 평범하게 행동했다. 사귀는 사이인 것을 계속 들먹이지도 않았고 특별한 뭔가를 굳이 하려 들지도 않았다. 월요일 내내 두 사람이 한 건 고작해야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도시락 먹기, 밥 먹고 나서 매점에 음료수 사러 가기, 복도에서 종례 끝나길 기다렸다가 부 활동 하러 가기,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저녁 먹기 정도였다. 사귀기 전에도 매일 같이 했던 일들이었다. 덕분에 해가 저물어 갈수록 태섭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고, 계산을 마치고 라멘집을 나왔을 때는 답답함과 혼란이 뒤섞인 얼굴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뭐해? 집에 가야지.”

“이게 끝이에요?”

“뭐가?”

“오늘은 우리가, 그, 하여튼 ‘사귀는’ 날이라면서요. 그런데 정말 이게 끝이에요? 같이 밥 먹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고 어디 같이 가고?”

“하루 정도니까 특별하게 뭐 할 건 없을 거라고 했잖아. 별로 부담도 안 되고 괜찮았지?”

지갑을 가방에 넣은 대만이 산뜻하게 되물었다. 태섭의 눈썹이 사정없이 비뚤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자고 손짓을 하는 대만의 모습에 속이 터진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선배는 정말 이걸로 괜찮아요?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섭의 목소리 끝이 가볍게 떨렸다.

“난 괜찮은데.”

“말도 안 돼.”

“진짜야. 어쨌든 원했던 대로 너랑 사귀었잖아. 내가 언제 또 송태섭 남자친구 타이틀을 달아보겠냐?”

“말만 남자친구지 남자친구 같은 짓은 하나도 안 했잖아요!”

“남자친구 같은 짓이 뭔데?”

“예?”

“연애해도 사실 다 똑같아. 같이 밥 먹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고, 어디 같이 다니고.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뿐이지. 그리고 난 오늘 그런 걸 네 연인으로서 즐겼어.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아니면……. 우리 송태섭 군은 뭐 다른 걸 기대했나?”

“무, 뭐예요! 떨어져!”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미는 대만에게 놀란 태섭이 빽 소리를 쳤다. 으하하, 너 반응 진짜 재밌다. 어깨까지 떨며 크게 웃음을 터트린 대만이 다시 몸을 물리자 얼굴 뿐만 아니라 목까지 시뻘게진 태섭이 대만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사람 놀리지 말라고요! 옹골차고 매운 발차기에 아픈 다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대만은 한참이나 웃음을 그치지 못했고 태섭이 결국 ‘그래요, 맘껏 웃어라, 웃어!!’ 라고 소리를 치고 나서야 겨우 입을 가리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사귀자는 말 괜히 들어줬어. 태섭이 씨근거리며 등을 돌렸다.

“항상 생각하지만 너 정말 다정하단 말이지.”

“갑자기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내가 아쉬울 게 그렇게 걱정되면 말이야.”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은 대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태섭의 옆에 섰다. 또 뭔데요!? 잔뜩 날을 세운 태섭이 바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자 대만은 아까처럼 빙긋 웃었다. 그리고 태섭의 날 선 표정이 잠시 허물어진 틈을 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쉽게 빼내지 못하게 손깍지까지 곰지락곰지락 끼웠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태섭의 얼굴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마지막으로 욕심낼게.”

네가 말한 남자친구 같은 짓. 집 가는 길에는 손 잡고. 괜찮을까? 잔잔한 웃음기가 어린 대만의 부드러운 얼굴에 태섭의 눈썹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손을 잡는다는 사소한 행위도 진지하게 허락을 구하는 대만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풀려 가는 것 같았다. 지금이다. 대만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는 태섭의 경계심 너머로 관계의 끈을 살짝 잡아 당겼다.

“아니면 하루 더 사귀어줘도 되고. 나야 그쪽이 더 좋지.”

일부러 평소보다 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내어 진담은 아니라는 척을 열심히 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말이 무겁게 느껴지면 송태섭은 바로 부담감을 느끼고 뒷걸음질 칠 테니까. 그러니 여지만 살짝 드러내면서 언제든지 부채감 없이 거절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선택권을 쥐여주는 것이다. 덫을 놓은 대만은 태섭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가만히 기다렸다.

태섭은 눈을 내려 대만에게 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긴장했는지 작은 혀가 살짝 빠져나와 마른 입술을 핥는 게 보였다. 귓바퀴에 잠시 붉은 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태섭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요. 이쪽은 하루면 충분해요.”

그러나 잡힌 손은 빼지 않은 채였다.


말이야 하루면 충분하다고 쏘아 붙였지만 태섭은 대만이 ‘남자친구 같은 짓’을 원 없이 할 수 있도록 하루 더 사귀는 걸 허락해주었다. 너 정말 다정하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태섭의 앞에서는 어른스러운 척 그렇게 말했지만 대만은 속으로는 기쁘고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송태섭이 의외로 남을 외면하지 못하는 녀석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대만의 심정을 깊게 헤아리다 못해 먼저 저를 갖다 바칠 줄이야. 제 딴에는 꽤 큰 결심이었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섭이 귀여워서 대만은 당장 달려들어 입맞춤을 퍼붓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두 사람이 두 번째로 사귀는 날은 그 주의 토요일로 정해졌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대만의 말 때문이었다. 데이트라는 단어에 태섭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걸 허락해 준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목을 움직여 겨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만이 기쁜 얼굴로 웃는 걸 보고는 온 몸이 새빨개져 거의 도망치듯이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송태섭이 삐걱거리는 게 심상치 않더니,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대만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섭은 평소와 달리 한껏 힘을 준 차림새로 나와 있었다. 누가 봐도 송태섭 스타일의 데이트룩이라 그 자리에서 터질 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 진짜 얘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지. 이한나한테 이걸 줄까 보냐.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지고 말 거야. 태섭이 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는 걸 알자 대만은 오늘 하루가 매우 즐거워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데이트 코스의 첫 시작은 영화관이었다. 볼 영화를 고를 때까지는 무난했다. 보고 싶은 장르가 갈리긴 했으나 평상시 같은 약간의 투닥거림과 가위바위보 끝에 합의가 잘 이루어져 나름 성공적으로 의견을 도출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발권대에 부착되어 있던 할인표를 보던 대만이 실실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커플 할인 20%. 우리 이거 해당 되네. 그 말을 들은 태섭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우리가 무슨 커프으…!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고 고통스러워하는 태섭을 보며 대만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자자, 애인님, 커플 할인 받으러 얌전히 가실까요.”

“제발 좀!”

태섭은 절대 발권대에서 인정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대만은 태섭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뻔뻔하게 저희가 사귀는 사이임을 어필했다. 대만이 커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들 앞에서 스킨십을 해 보일 의향도 있음을 알리자 태섭이 질겁을 했다. 미쳤냐며 대만을 두드려 패는 태섭의 모습이 의외로 부끄럼 타는 커플의 일면으로 보였는지 그들은 생각보다 쉽게 20% 할인을 쟁취할 수 있었고, 태섭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표정으로 손에 들린 영화표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태섭이 머리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 건 한나랑 받아야 하는데 왜 내가 대만 선배랑…….”

“어차피 나는 하루짜리 남친인데 뭐 어때. 한나랑도 나중에 커플 할인 실컷 받으면 되지.”

하지만 오늘 네 애인은 나니까, 나한테 집중해. 대만이 몸을 기울이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태섭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태섭은 진짜 싫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송태섭은 책임감이 강해 제가 한 말은 지키려고 애쓴다. 나름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다시 대만에게 가까이 붙어 걷기 시작하는 태섭을 보고 대만은 약간의 사심을 담아 그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았다.

‘커플’ 콤보까지 구매하고 착석한 후에도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탄산음료를 빨던 태섭은 제가 고른 영화였음에도 상영 내내 쉽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대만과 함께 영화를 본 게 처음이 아닌데도 연인으로서 나란히 앉아 있으니 새삼스럽게 엄청나게 의식이 되는 모양이었다. 팝콘을 먹다가 문득 손이 닿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통을 엎을 뻔하기도 했다. 괜찮아? 대만이 낮게 귀엣말을 하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무릎 위에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스크린 불빛 사이로 다 보였다. 그 후 2시간 가까이 옆자리에서 계속 꼼지락거리는 제 ‘남자친구’를 느끼며 대만은 어둠에 잠긴 입꼬리를 가만히 밀어 올렸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러 간 가게에서도 대만은 굳이 커플 세트를 시켰다. 말만 커플 세트지 구성 자체는 그냥 평범한 2인 메뉴였음에도 태섭은 이름을 듣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목이 탔는지 음료수가 나오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켜 반이나 비우기까지 했다. 오히려 그렇게 의식하는 티를 낼수록 더 이상해진다는 걸 알긴 하는 걸까. 그걸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대만은 일부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태섭의 손을 잡았다. 놀란 태섭이 고개를 들었을 땐 ‘사귀는데 뭐 어때.’라고 경쾌하게 말하며 엄지로 손등을 살살 매만졌다.

식사를 마친 후엔 오락실에서 농구 게임도 하고 아이쇼핑도 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을 활동들로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대만의 완급조절이 잘 먹혔는지 시간이 갈수록 태섭은 삐걱거리던 것도 많이 덜해져 이전에 단둘이 놀러 다닐 때처럼 점점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해가 저물 즈음엔 커플이라는 것도 일종의 컨셉 장난처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 거부감이 많이 가신 목소리로 남자친구에게 이런 것도 못 해주냐며 동전을 빌리기도 했다. 대만에게 빌린 동전으로 자판기에서 게토레이를 뽑는 태섭을 보며 대만은 오늘의 마지막 계획을 슬슬 실행하기로 했다. 그럼 이쯤에서 쐐기를 한 번 더 박아야지.

태섭은 괜찮다고 했으나 대만은 부득불 그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제 됐으니 들어가겠다는 것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 잠깐이면 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태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입술이 맞닿았을 때는 허리가 찌릿할 정도의 전율이 흘렀다. 좋아하는 애랑 키스하면 이렇게 기분이 좋구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황홀경에 취해 마구잡이로 탐해버릴 것만 같았다. 키스를 하자마자 놀라 굳어버린 태섭의 몸을 느끼며 대만은 최대한 이성을 잡으려 노력했다. 태섭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웠고 더 말랑했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편인 게 물고 빨기 딱 좋은 입술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충동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태섭이 더 놀라지 않을 정도로만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낸 후 쪼는 듯한 입맞춤을 가볍게 남기며 떨어져 나왔다.

“잘 들어가.”

그렇게 말하며 시원스레 웃어 보이자 태섭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대만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제 입을 가리고 홱 등을 돌려 곧장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쾅쾅대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숨죽여 웃은 대만은 엄지로 제 입술을 슬쩍 문질렀다. 오늘 하루 제법 태섭과 잘 사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주 내내 태섭은 대만을 거의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부 활동 때야 관리·감독을 하고 호흡도 맞춰야 하는 입장이니 말은 하긴 했지만 코멘트가 거의 1/10 수준으로 확 줄고, 복도나 운동장에서 마주쳤을 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못 본 척 옆을 지나쳐 갔다. 금요일쯤에는 태웅까지도 태섭 선배와 싸우시기라도 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주말에 송태섭이랑 놀았는데 그때 내가 좀 화나게 했나 봐. 그렇게 대답해 주면서도 대만은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태섭의 행동 하나하나가 대만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라커룸이나 샤워실에 둘만 남았을 때는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로 더 느물거리며 말을 걸기도 했다. 그때마다 태섭은 그를 한 번 노려볼 뿐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대만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줄다리기의 승자는 제가 될 것임을 잘 알았기에.

대만이 생각하기에, 지금 태섭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정대만의 감정을 마주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를 완전히 잘라내느냐. 둘째, 아무리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감정을 돌격대장답게 정면으로 한 번 감당해 보느냐. 그리고 송태섭은 정대만을 영원히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됐다. 팀워크의 문제도 그렇지만 대만은 태섭이 저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각별하게 여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태섭이 절대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를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제 손안에 온전히 떨어지길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이었다.

풍년을 맞은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는 게 이런 기분이려나. 대만은 제가 쐐기를 박았던 태섭과의 데이트를 회상하며 입술을 가만히 핥았다.


토요일 저녁, 대만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엄마에게서 전화기를 넘겨받은 대만이 대답을 했는데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여보세요? 대만이 한 번 더 묻자 그제야 씨근대는 숨소리가 넘어오는 게 들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태섭이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나와요. 나 선배 집 근처니까.”

대만은 일부러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잔뜩 애가 단 태섭이 어떤 말을 할 지가 기대되어 벌써부터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 근처의 공중전화로 가니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태섭이 초조하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발을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나 때문에 뛰다가 못 참아서 전화를 했구나. 그걸 알아챈 순간 대만은 제가 승리했음을 확신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뿐이었다.

“송태섭.”

이름을 부르자 태섭이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대만의 태평한 얼굴을 보자마자 입술을 꽉 깨물더니 벼락같이 달려와 그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내가! 씨이, 젠장…! 선배 때문에! 차마 다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 뒷말이 무엇이었을지는 대만도 알고 태섭도 알았다. 결국 더 참지 못한 대만이 웃음을 터트리자 태섭이 분통 터진 얼굴로 주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힘이 잔뜩 실린 주먹이 대만의 가슴과 팔을 퍽퍽 내리쳤다. 정대만 진짜 싫어. 당신 완전 최악이야. 나는, 나는 한나를 좋아하는데. 그런데 당신이 그런 짓을 해 버려서.

화를 주체하지 못해 울음기까지 섞이기 시작한 태섭의 목소리에 대만은 한참이나 작은 몸을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계속해서 울분을 토하는 태섭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며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그래, 넌 잘못 없어, 태섭아. 나쁜 건 나야. 내가 꼬신 거고 넌 그냥 넘어간 것뿐이니까 얼마든지 원망해도 돼.”

대신 너한테서 원망 듣는 만큼 아주아주 깊이 사랑해줄게.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것을 꽉 움켜쥐며 대만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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