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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내렸던 선택

某日 by 銘

1

Dios - 残像

정대만의 연인은 강하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법도 없고,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법도 없다. 늘 혼자서, 몇만 km나 떨어진 타지에서도 항상 기운 찬 목소리로 제 안부를 전한다. 별일 없어? 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다. 별일 없어,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대만의 걱정은 괜한 것이 된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국내 최고의 가드와 매치업을 하게 되었을 때도 전날 밤이야 긴장했지만 다음날엔 ‘안 쫄아!’라는 말과 함께 당당하게 그에게 맞섰다. 20점이 넘는 점수 차에도, 몇 번이고 당하는 존 프레스에도,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포스트업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자, 하나씩!’이라고 외치며 여유롭게 손을 들었다.

내진설계를 꼼꼼하게 한 건물처럼, 강한 지진에 잠시 흔들리더라도 곧 자신만의 중심을 찾았다. 정대만의 연인은 무너지지 않는 성이었다. 벽돌이 떨어지고 창이 깨지더라도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성에서는 지진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간혹 햇살에 드러나는 어렴풋한 흠집만이 그에게도 지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볼 증거가 되었다.

연인이 되기 전의 부끄러웠던 시절, 정대만이 직접 지진이 되어 그를 부수려 했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채치수에게 기대 받는 유망주라는 존재는 정대만의 여린 속살에 박힌 가시와 같았다. 거슬리는 존재감에 가장 역린처럼 여길 부분을 일부러 노려 험악하게 빈정거렸지만 그는 성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공공연하게 마주 도발을 해왔다.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과거의 정대만도 현재의 정대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제 손으로 농구를 버린 사람에게 농구로 도전을 걸어왔다. 박힌 가시가 살 안에서 마구잡이로 날뛰어 염증을 만들었다. 아프고, 쓰렸고, 신경이 거슬렸다. 화가 났다. 정대만은 가시를 뽑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그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쉽게 뽑힐 줄 알았지만 가시는 오히려 존재감을 자랑하며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고, 그 결과는 흉할 정도로 잔뜩 헤집어진, 피고름만이 흐르는 상처로서 남았다.

몇 번의 드잡이 이후 결국 가시의 정체는 그가 아니라 정대만 그 자체였음을, 농구를 놓지 못한 마음이었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정대만은 진정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정대만을 바로 그가 가장 먼저, 기꺼이 맞아주었다. 정대만이라는 지진으로 인한 충격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라며 산뜻하게 웃었다. 림 안에 공을 밀어 넣는 짜릿한 감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도록 완벽한 패스를 건넸다. 정대만이 농구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고 ‘선배’라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정대만은 그가 강할 수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견고한 성벽과 깊은 해자의 뒤편에는 뭐가 있을지 알고 싶었다. 아주 가끔 드러나는 흠집의 흔적을 매만져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정대만은 집요하게 그를 뒤쫓았고,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갈망의 끝에 애정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이 동일함을 확인한 후 관계가 달콤하게 바뀌고 나서도 그는 여전했다. 강하고 단단한 정대만의 연인은 사랑조차 본인처럼 했다. 반지 없는 손가락에 정대만이 여전히 분홍색 편지지나 번호 따위를 받아와도, 끈질긴 미팅 제의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를 채우러 나가도, 술자리에서 쓰러져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아도 모두 괜찮다고 했다. 그래봤자 선배가 나와 사귀는 건 변하지 않는걸요. 더 이상 나 안 좋아해요?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느낄 때마다 정대만은 연인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넘쳐흐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붓곤 했다.

정대만은 연인 만큼 의젓한 연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즉각적으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는 무조건 뱉어냈고 질투가 날 때는 곧잘 심술을 부렸다.

“보고 싶어.”

그러다 보니 항상 투정을 부리는 건 정대만의 몫이었다. 더 성장하고 더 좋은 선수가 되기를 바라 직접 등 떠밀어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보내주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만지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은 그것과는 별개였으니까. 요금의 문제로 길게 이어질 수 없는 통화 때마다 정대만은 연인이 보고 싶다고, 패스를 받고 싶다고, 코트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그립다고 이야기 했다. 정대만의 연인은 나이는 한 살 어려도 정신연령은 열 살쯤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귀엽게 여겨주며 '나도 보고 싶어요.'라는 달디단 말로 달래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현실을 이야기하며 정대만을 타박했다. 선배가 먼저 가라고 하지 않았냐고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그러게, 내가 왜 널 보냈을까. 다시 들어올래? 그런 말로 연인을 웃기면서도 정대만은 그 농담 깊은 곳에 숨겨진 제 진심을 발견하고 괴로워하곤 했다. 더 좋은 농구를 하고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는 것도 진심이었지만 그가 제 곁에,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바다를 품에 가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둑이라도 쌓아 묶어두고 싶은 탐욕이 안쪽에서부터 끓어 올랐다. 오랜만에 제 곁으로 돌아온 연인을 맞을 때마다 정대만은 달력을 찢고 시계를 박살 내며 해와 달을 없애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유학이 끝나고도 연인은 정대만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더 큰 세상의 부름을 받았고, 당연하게도 그 길을 선택했다. 프로리그는 대학리그보다 더 힘들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원래 농구 하면서 안 어려웠던 적은 없었으니까. 정대만의 걱정에도 연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강인한 발걸음으로 새로운 코트 위에 올라섰다. 낯선 언어를 쓰고 낯선 선수들 사이에서 침착하게 공을 가지고 노는 연인을 볼 때마다 정대만의 숨겨진 진심은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네가 그곳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여기에서, 내 옆에서, 나와 같은 코트에서 뛰었으면 좋겠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눈을 뜨면 네가 있었으면 좋겠고 언제든 전화를 걸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정 어린 투정으로 비틀린 진심을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선배 요즘 그런 이야기 좀 자주 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없는 거 알잖아요, 나도 시즌이 있고, 여기에 팀이 있고. 선배도 선수니까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결국 정대만의 연인은 이마를 찌푸리며 그의 지나친 욕심을 지적했다. 그래, 잘 알지. 정대만은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은 커지게 놔둬서는 안 될 욕심이란 걸, 이제는 억지로라도 터트려 바람을 뺄 때가 되었다는 걸.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가려는 이 욕심이 연인을 짓누르고 잡아먹지 않게 하기 위해선 제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날도 공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연인이 모처럼 받은 한 달간의 휴가가 막바지에 접어드는 날이었다. 돌아가는 연인을 배웅하러 나온 정대만은 그날따라 말이 없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일부러 밤을 새운 연인은 자기도 모르게 깜빡깜빡 조느라 더 말이 없었다. 이미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관계인지라 연인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정대만을 앞에 두고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더라도 비행기 안에서 자기 위해 석 잔째의 빈 커피 컵을 버린 연인은 수화물을 부치고 표를 찾아 다시 정대만의 앞으로 돌아왔다. 어깨에 걸친 가방에 잠시 여권을 꽂아 넣고 팔을 뻗어 정대만의 큰 손을 잡았다. 연인은 정대만의 손을 좋아했다. 함께 있을 때면 커다란 손바닥을 매만지고 깍지를 끼면서 손등을 간지럽히곤 했다. 선배 손이 커서 좋아요. 공이든 뭐든 이 손에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손으로 날 잡아줄 때가 제일 좋고요. 어디에 있든 언제든지 손을 내밀면 그곳에서 마주 잡아줄 걸 아니까. 그래서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이면 연인은 꼭 정대만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곤 했다.

손을 잡은 후에도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정대만을 올려다보며 연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선배. 평소엔 안 가면 안 되냐고 그렇게 떼를 쓰더니 웬일이에요. 이제 철이라도 좀 든 거예요?

철이 들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떼를 쓰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사진과 편지로만 널 그리며 외로운 긴 밤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이곳에 있어 달라고, 내 곁으로 돌아와 나에게만 패스를 던져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네가 여기에 있어 준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5연속 풀타임 출전이든 30점 득점이든 뭐든 해 보이겠다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은 제 연인을 곤란하고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정대만은 잘 알았다. 연인은 바쁜 사람이었다. 괴물 같은 신체 조건이 가득한 곳에서 계속 농구를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만 신경을 써도 시간이 모자랐다. 연인은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의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악착같이 기울였다. 그 바쁜 시간 속에서 미련 가득한 말로 몇만 km나 떨어져 있는 사람까지 신경 써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욕심인지 잘 알았다.

연인은 언제든 마주 잡아줄 수 있는 이 손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정대만은 제 손이 연인을 얽어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바닥으로 떨어져 본 사람은 언제든지 바닥이 저 아래에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이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언제든지 낭떠러지를 마주할 수 있음을 안다. 정대만의 이기심은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그 수렁을 내려다 보았다. 시커멓고 끈적한 심연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에게 속삭이곤 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보라고, 정에 호소하고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써 보라고. 계속해서 그렇게 말을 하면 혹시 모르지 않겠냐고, 결국 설득당한 연인을 이 땅에 붙잡아둘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냐고. 들쩍지근한 유혹을 앞에 두고 정대만은 생각했다. 다정하고 따뜻한 제 연인은 바닥에 떨어진 정대만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벽에 흠집을 더하면서도 지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정대만의 곁으로 와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탐욕에 갉아 먹히면서도 정대만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정대만을 위해 깊은 나락으로 걸어 와 줄 것이다. 아, 그만큼 황홀한 쾌락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정대만은 그게 두려웠다. 말도 안 되는 유혹의 단맛에 휩쓸리고 싶어 하는 제가 역겨웠다. 정대만은 밑바닥의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잘 알았고, 형편없던 제가 연인에게 저질렀던 죄도 잘 알았다. 감히 그에게서 농구를 빼앗으려 하다니.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대만은 연인의 강건한 모습이 좋았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더 넓은 세계에 제 이름 석 자를 당당히 떨치는 모습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제 옆에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며 삶을 살아가는 연인도 사랑했지만, 더 높은 곳에서 제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연인을 더욱 사랑했다. 농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농구를 하는 연인을, 선수로서 빛나는 그 사람을 누구보다도 경애했다.

“할 말이 있어.”

그래서 정대만은 출국장 앞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의 손을 놓았다. 앞으로 올라갈 곳도 날아갈 곳도 많은 그의 짐이 되지 않게, 더 이상 제가 그 발목을 잡는 일이 없게.

“우리 헤어지자.”

그게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을 것 같아. 정대만은 그렇게 시커멓게 뒤틀린 제 손에서 송태섭을 자유로이 떠나보냈다. 설령 이 이별이 또 다른 지진이 되더라도 결국엔 그가 다시 바로 설 것을 믿기 때문에, 정대만의 연인은 약해빠진 정대만과 달리 강하기 때문에.

2

ぬゆり - ターミナル (Cover. くろくも)

 

정대만의 연인은 약하다.

송태섭은 항상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었다. 겁도 많았고 무력감도 자주 느꼈다. 세상에는 괴로운 것이 너무 많았다. 예민한 송태섭에게는 힘든 세상이었다. 그래서 송태섭은 일부러 벽을 쌓고 그 안에 숨어 바깥과 자신을 단절시켰다.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주지 않고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아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고 위에 껍질을 덮었다.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졌다. 그렇게 괜찮아지고 나면 송태섭은 농구공을 들고 코트로 향했다.

농구는 송태섭의 도피처였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자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드리블을 하고 슛을 하며 놀 때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먹한 가족관계도 눈이 건방지다며 주먹을 휘두르는 불량배들도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올라오는 죄책감도 코트에 올라서면 전부 사라졌다. 코트에서는 '인간' 송태섭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포인트 가드’로서의 송태섭만이 존재했다. 송태섭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태섭이 얼마나 드리블을 잘 하고 빠르게 달리며 날쌔게 수비를 뚫는지만이 중요했다. 그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그래서 송태섭은 또 다른 자신의 존재에, 농구에 기대어 목숨을 이어갔다.

코트에서까지 도망치고 싶을 때면 강한 척을 했다. 이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으니까, 더 뒤로 물러나면 아무것도 없는 심해로 떨어져야만 했으니까 자극받은 복어처럼 괜히 더 몸을 부풀렸다. 그러면 상대는 겁을 먹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숨 쉴 틈이 생긴 송태섭은 아슬아슬하게 도망치지 않고 제 코트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게 겁쟁이 송태섭의 오랜 삶의 방식이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떠나보낸 것들 중에 유일하게 다시 돌아온 존재였다. 중간 과정이 어땠든, 제대로 함께 농구 해보지도 않고 떠나보냈던 사람은 결국 코트로 돌아와 이제는 송태섭의 옆에서 패스를 받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받아주고 최선의 결과까지 이끌어내는 사람의 존재는 단순한 신뢰 그 이상의 감정을 송태섭에게 불러일으켰다. 내밀어 준 손을 배신하지 않겠노라고,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겠노라고 선언하는 당돌함이 벅찼다. 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을 때면 경이롭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래도록 죽음과 가까웠던 송태섭은 정대만의 강렬한 생명력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송태섭은 곧 정대만을 선배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랑은 농구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농구가 거대한 벽을 마주했을 때의 막막함이었다면 사랑은 거대한 지진으로 발밑이 흔들릴 때의 공포였다. 높게 단단히 쌓은 벽 뒤에 숨어 무디게 굴며 자신을 지켜내던 송태섭은 사랑을 하면 겪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전혀 면역이 없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반복되는 오르락내리락 코스에 멀미가 심해서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정대만은 자연재해 같은 지진이었다. 그가 기웃거리며 주변을 맴돌고 벽을 두드릴 때마다 송태섭의 성은 송두리째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다가 겨우 바로 서기를 반복했다. 쌓아 올린 벽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떨어져 나간 벽돌들을 다시 주워 올 겨를이 없었다. 그러면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손이 쑥 들어왔다. 무엇이든 잡아주고 무엇이든 건네줄 준비가 된 커다란 손이었다. 자기 좋을 대로 선을 침범하는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벽 뒤에서 홀로 외로웠던 송태섭에게는 무작정 들이밀어지는 그 손이 전혀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목이 말랐다. 잔뜩 비벼오는 뺨을 다정히 감싸주는 손바닥의 온기가 중독적일 만큼 달고 따뜻했다. 이 따스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송태섭은 처음으로 농구 이외의 것에 조심스레 욕심을 냈고,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송태섭과 정대만은 연인이라는 간지러운 이름으로 상대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송태섭의 연인은 나이는 한 살 많았지만 하는 행동은 철부지나 마찬가지였다. 감정적이고 솔직한 연인은 제 마음을 숨길 줄을 몰랐다. 좋으면 좋은 대로 마음껏 애정을 보였고 싫으면 싫은 대로 질투를 해댔다. 십 년이 넘게 운동을 해 온 건장한 사람을 작고 귀엽다고 표현하는 낯부끄러운 소리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송태섭의 뻣뻣하고 무딘 감정을 제 사랑으로 서서히 적셔 마침내 진심으로 웃게 만들었다. 그 너른 품에 안겨 양껏 사랑을 받다 보면 송태섭의 견고한 벽은 조금씩 형태를 잃곤 했다. 벽돌이 빠진 구멍 사이로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줄곧 없는 것처럼 여겨 왔던 송태섭의 어린 모습이 새어 나왔다. 정대만이라는 사람이 내 것이라는 우월감, 그럼에도 공표할 수 없다는 속상함, 받아오는 번호의 수가 늘수록 커지는 질투, 혹시나 하는 불안감과 집착에 애정을 확인 받고 싶어 부리는 어리광. 자신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송태섭은 질겁을 하며 상처를 덮었을 때처럼 어린 제게도 껍질을 뒤집어씌웠다. 철저하게 가리고 외면하고 억누르며 전부 괜찮다고 이야기 했다. 당신이 계속 내 옆에 있고 나를 좋아하기만 하면 그걸로 되었다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래봤자 송태섭 역시 스물도 안 된 소년에 불과했다. 정대만이 제 앞에서 든든하고 멋진 남자친구 역할을 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송태섭 역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른스럽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또래의 여자애들과는 다른 매력으로 정대만을 제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러니 형편없는 바닥 따위는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되었다.

미국 유학의 기회가 왔을 때 정대만은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적극적으로 등을 밀어주었다. 그게 정대만의 희생임을 송태섭은 잘 알았다. 사귄 지 2년도 되지 않은 연인을 연락조차 제때 하기 힘든 이역만리의 타지에 제 손으로 보내는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순간 정대만의 사랑과 믿음을 배신하는 게 되어 버리니까, 멋있지 않은 남자친구가 되니까. 그래서 송태섭은 이를 악물고 다시 벽을 세웠다.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음식, 완전히 뒤바뀐 기후와 이유 모를 악의에 대처하는 법은 이미 한 번 겪어 잘 알고 있었다. 송태섭은 오랜 삶의 방식을 다시 떠올려 빠진 구멍을 꼼꼼하게 메우고 바깥과 자신을 단절시켰다. 그리고 겁먹지 않은 척 몸을 더 부풀렸다. 허세를 잔뜩 부리며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보고 싶다는 연인의 속삭임에도 다시 들어오겠냐는 농담에도 오히려 더 가시를 세우며 핀잔을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약하고 겁많은 자신을 직시해 버리면 겨우 세웠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원히 도망치게 될 것 같았다.

그때쯤 정대만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명을 받아 정식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의 세계는 대학과는 또 다르다고 했다. 재능 있는 사람을 거르고 걸러 꾸려진 세계는 대학보다 훨씬 더 치열했다. 천부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을 곁들인 꺼지지 않는 불꽃의 남자인 정대만도 스타팅 멤버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통화를 할 때면 정대만은 종종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농구는 내가 제일 잘하는 거고,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거니까─첫 번째는 당연히 너다? 알지?─끝까지 해낼 거긴 하지만, 오늘은 좀 토 나오긴 토 나온다. 진짜 힘들었어. 차라리 김수겸이랑 운동장 100바퀴 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정대만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내뱉는 한탄을 들어주면서 송태섭은 혹시라도 어린 제가 튀어나오지 않게 껍질을 더 꼼꼼하게 뒤집어씌웠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느라 벅차고 힘들 연인에게 제 짐까지 같이 들어달라며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랬어요? 많이 힘들었겠다. 너는? 별일 없어? 응, 나는 별일 없어.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은 겁쟁이인 진짜 모습을 숨기고 계속해서 멋있고 어른스러운 남자친구처럼 행동했다.

“우리 헤어지자.”

그래서 송태섭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인식이 되지 않았다. 분명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는 편하고 익숙한 모국어인데도, 그 말은 세상 처음 접한 외국어처럼 들렸다. 그게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을 것 같아. 이어진 말은 더 기가 막혔다. 송태섭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연인은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빠져나가는 온기가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선배 지금 뭐라고 했어요?”

“헤어지자고 했어.”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요? 오늘 만우절도 아니고, 재미 하나도 없어요, 선배. 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예요? 헤어지자니요?”

“장난 치는 것도 아니고 투정 부리는 것도 아니야. 꽤 오랫동안 고민했어.”

“왜요? 왜 그런 고민을 했는데요? 이젠 내가 싫어요? 내가 너무 멀리 있어서 그래요? 아니면, 어머님이 이제 소꿉장난은 그만하고 결혼하라는 소리라도 하셨어요? 그래서 날 정리하려는 거예요?”

“어느 쪽도 아니야. 지친 적도 없고 질린 적도 없어. 집에서도 그런 소리 안 했어. 우리 엄마가 너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알잖아. 네 문제는 하나도 없어, 태섭아. 이건 전부 내 문제야.”

“그럼 그 문제가 대체 뭔데요. 그 잘나신 머리로 생각한 게 대체 뭐길래 곧 가야 하는 사람 앞에 두고 영영 안 볼 것처럼 끊어내려는 거냐고요.”

송태섭의 힐난에도 정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죄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송태섭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무슨 원망과 저주를 들어도 다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남자의 태도에 송태섭은 심장이 아프게 죄어오는 걸 느꼈다. 정말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굳게 결심했을 때의 표정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코트 위에서만 지성을 발휘하는 제 멍청한 연인이 또 어떤 바보 같은 생각을 했길래 이러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지금의 송태섭에게는 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다. 송태섭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덮은 손이 덜덜 떨렸다.

“나 일단은 들어가야 하니까……. 우리 나중에 더 얘기해요.”

“우리 집에 있는 짐은 정리해서 네 본가로 보낼게.”

“나 미국 가면 바로 전화할 테니까, 받고요. 알겠어요?”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아예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니야. 여전히 우리는 같은 선수고, 선후배 사이니까.”

“전화 받으라고 했어, 정대만!”

“…….”

“들어갈게요.”

송태섭은 캐리어의 손잡이를 끌고 뒤돌아 섰다. 정대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고 어깨를 감싸지도, 입맞춤을 해주지도,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해주지 않았다. 심해 만큼 깊고 무거운 침묵만이 송태섭의 등 뒤를 쫓아왔다. 여권을 내밀고 심사를 받고 탑승 게이트를 찾아 비행기에 오르는 그 모든 순간들이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지독한 악몽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기장의 인사 방송이 끝나고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이별을 선언한 정대만에게서 강제로 떨어지게 되는 순간, 송태섭은 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여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감싼 두 손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3

ぼくのりりっくのぼうよみ - Be Noble (re-build)

 

송태섭의 전 연인은 강하다.

정대만은 한 번 고집한 것은 웬만하면 철회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 능력과 수준을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의 강력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는 고집은 연인인 송태섭마저 꺾기 힘든 것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열 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 동안 송태섭은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차라리 잠에라도 들어 모든 걸 잠시나마 잊고 싶었는데 석 잔이나 마신 커피의 탓인지 심장이 가라앉지 않아 조금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헤어지자고 말하던 정대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죄스러워 하는 얼굴과 완고하게 다물린 입이 생각났다. 그때마다 송태섭은 가슴을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떠야만 했다. 빈 손바닥을 아무리 내려다 봐도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산소가 턱없이 모자랐다.

결과적으로 이틀을 꼬박 새운 꼴이 된 송태섭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핏발 선 눈으로 제일 먼저 공항의 공중전화를 찾았다. 가지고 있던 지폐를 털어 동전으로 바꾸었다. 지겹게 외우다 못해 몸에 완전히 익어버린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나 전화를 받으라고 일렀건만 몇 번이나 같은 번호를 눌러도 상대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음을 다섯 번쯤 듣고 나니 더 오기가 생겼다. 송태섭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동전을 밀어 넣은 후 손에 익은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통화음이 가고, 슬슬 인내심이 끊겨 나갈 때가 되어서야 상대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정대만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선배, 나예요.”

“…잘 도착했냐.”

“미국 왔으니까 우리 이제 얘기 좀 해요.”

“나는 얘기를 다 했어, 태섭아.”

“웃기지 마요. 이쪽은 시작도 안 했어. 혼자 멋대로 내뱉고 끝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질린 것도 아니고 지치지도 않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나를 떼어내려고 해요? 대체 선배 문제가 뭐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요. 뭐 드라마처럼 시한부 선고라도 받았어요? 무릎에 문제라도 생겼어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는 거예요? 말을 해요, 설명을 해 달라고요. 혼자만 생각해서 결론 내리지 말고 나에게도 이야기를 해줘요.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칠 테니까, 뭐라도 제대로 된 말을 해줘요……. 제발…….

송태섭은 연애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정대만에게 매달렸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고, 나를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더 이상 강한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정대만의 헤어지자는 말이 일으킨 지진은 송태섭이 쌓아두었던 벽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흘러내린 껍질 사이로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나약한 어린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은 정대만이 필요했고 정대만에게 기대고 싶어 했고 정대만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송태섭이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 선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송태섭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송태섭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사과했다. 정대만이 그토록 졸라도 해주지 않던 반지도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멀리 있어서 싫은 거라면 계약을 파기하고 들어가겠다는 소리까지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서라도 정대만을 붙잡고 싶었다. 전화기를 붙잡은 송태섭의 손에는 여전히 정대만의 온기가 빠져나가던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차가움이 싫었다. 이런 건 정대만이 아니었다. 항상 저를 잡아주던,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던 손길을 이렇게 매몰차게 떼어낼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횡설수설하던 송태섭이 또 다시 투둑투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울먹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정대만은 단호했다. 송태섭이 기분 나쁜 기색만 보여도 눈치를 보고 쩔쩔매던 사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건 연인이었던 사람조차 꺾을 수 없는 굳은 고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정대만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널 망칠 거야, 태섭아.”

송태섭은 정대만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가 왜 나를 망쳐요. 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내가 가장 잘 아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해요. 오히려 지금 이러는 게 날 망치는 거예요. 알아요? 원망 섞인 송태섭의 말에 정대만이 힘없이 웃었다. 아냐, 너는 몰라. 이대로 가면 나는 반드시 널 망치고 말아. 정대만이 고통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제 능력과 수준을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의 강력한 자기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네가 잘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선배.”

“너는 강해, 태섭아. 지금은 힘들더라도… 넌 괜찮을 거야.”

“정대만!”

“이만 끊는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푹 쉬어. 비행 고생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정대만은 전화를 끊었다. 뚜, 뚜, 뚜, 일정하게 끊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송태섭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허망한 얼굴 위로 멈추지 않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정대만이 완전히 떠나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나 온화한 날씨와 뜨거운 햇빛 속에서도 송태섭은 견딜 수 없는 심해의 추위를 느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뒤에 줄이 얼마나 서 있든 사람들이 얼마나 순서를 기다리든 아무 상관 없었다. 결국에 끊어낼 거면 다정하게 굴지나 말지, 차라리 차갑게 잘라내 버리기라도 하지, 당신은 왜 마지막까지 그렇게나 따스해서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거야. 한참을 울던 송태섭은 젖은 얼굴을 겨우 들어 전화 부스의 바깥을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벽이 처참하게 무너진 곳에는 역겨울 만큼 푸른 하늘만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송태섭은 최악의 상태를 달렸다. 평소와 같이 운동을 하고 훈련에 참가하지만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곧잘 던지는 점프슛도 다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형편 없어졌다. 연습량을 늘렸음에도 성공률은 여전히 예전의 기록을 한참이나 밑돌았고 운동량을 늘렸음에도 근육은 조금씩 빠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뺏어 오긴 하지만 연습 경기에서조차 턴오버를 당하는 일도 많아졌다. 시즌 전이라 그나마 망정이었지, 시즌이 이미 시작된 후였다면 안팎으로 대차게 욕을 먹고도 남을 일이었다. 팀에서도 처음에는 한 달 동안 너무 편하게 쉬고 온 게 아니냐며 농담을 했지만 저조한 퍼포먼스가 지속되자 심각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이 팀의 주전이었고 팀의 색깔과 가장 잘 어울리는 플레이를 하는 가드였다. 그런 사람이 휴가를 보내고 오자마자 비실거리고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코치진과의 면담도 몇 번 가졌다. 그때마다 송태섭은 떨리는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춘 채 아무 문제 없다고,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슬럼프가 온 모양이라고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화제를 돌려 제가 소화해야 할 훈련 메뉴의 토론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남들의 시선이 깊은 곳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차단했다.

당연하지만 슬럼프가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송태섭 본인이었다. 정대만과 헤어지고 나서 송태섭은 실감을 잃었다. 이 머나먼 타지에서 송태섭이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사라지고 나자 모든 게 부질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깨어 있는데도 여전히 매 순간 악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힘겹게 쌓아 올린 것을 이렇게 허무하게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건 잘 알았지만 무너진 성을 다시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번 겪었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지역에서 정대만마저 잃은 송태섭은 또 무엇을 지팡이 삼아 다시 일어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끔찍한 기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순간 송태섭은 다시 바이크를 타기 시작했다.

이별 후에도 정대만의 소식은 종종 전해졌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게 알려진 후 주변에서는 송태섭을 배려해 정대만의 이야기를 되도록 피하려 했지만, 공통된 지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있는 데다가 같은 일까지 하다 보니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리저리 엮여 흘러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는 지인들에게 송태섭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안 좋게 헤어진 게 아니니까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 형은 요즘 뭐 하고 살아? 가끔은 송태섭 쪽에서 먼저 오랜 지인의 안부를 묻듯 가볍게 운을 떼기도 했다. 지인들과 연락을 하기 힘들 때는 직접 국내의 신문을 알음알음 구해 보기도 했다. 이미 실감을 잃을 대로 잃은 통에 아직까지 피가 흐르는 제 상처까지 스스로 헤집는 꼴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정대만의 흔적을 더듬고 싶었다.

시즌이 시작하고 정대만은 펄펄 날았다. 그 해의 MVP는 벌써부터 정대만이 따놓은 당상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높은 집중력과 좋은 야투율을 보인다고 했다. 다시 코트로 돌아온 후 정대만은 농구에 지장이 갈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생겨먹은 분위기와 달리 웬만하면 술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하고, 대학에 가서는 계절학기나 재수강 등으로 농구 할 시간을 뺏기는 게 싫다며 성적 관리도 미리 어느 정도 해놓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농구에 진심인 사람답게, 정대만은 송태섭과의 이별마저도 그 어떤 빈틈이나 방해 요인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갈무리한 게 분명했다. 평소에는 욱하는 성격에 하찮게 굴어 멘탈이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단단하고 굳은 사람이니, 정대만이라면 이별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더 강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마저도 너무나 정대만다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 정도의 존재 밖에 되지 않았나 싶어 입이 조금 썼다.

침대에 눕자 머리맡의 천장에 스크랩 해서 붙여놓은 정대만의 기사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이나마 언급이 되어 있는 기사들은 전부 잘라내어 덕지덕지 붙여놓은 통에 누가 보면 스토커거나 저주 의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며칠 전 놀러 왔던 정우성이 가위눌리겠다며 진저리를 친 광경이기도 했다. 가위눌리면 뭐 어떠냐, 정대만 얼굴로 귀신 나오면 짜증 나는 거 겸사겸사 핑계 삼아서 주먹질 좀 하고 물리 퇴마 해버리면 되지. 정대만 다시 때려줄 일이라면 언제든지 웰컴이라고. 맥주 네 캔을 연달아 마신 송태섭은 정우성의 등을 팡팡 내리치며 킬킬 웃었다.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해 봤을 때, 결과적으로 정대만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이별을 고한 주제에 성적도 내지 못하고 폐인처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더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을 것 같았다. 오히려 제 손으로 연인을 떠나보내고도 앞을 향해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더 정대만다워서 좋다고 생각했다. 버저비터가 된 3점 슛을 던지는 정대만의 사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던 송태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대만과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너무 충격적이었고 너무 자주 떠올렸던 탓에 이제는 숨소리 하나하나마저 기억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정대만은 자신이 송태섭을 망칠까 봐 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내 곱씹었지만 여전히 그 말의 의미도, 정대만이 어떤 결론의 끝에 그 선택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대만에게도 이별이 충분히 괴로웠다는 건 알았다. 그가 지었던 표정과 들려주었던 목소리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대만이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면, 송태섭은 적어도 정대만 때문에 더 힘들어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나를 망치고 싶지 않아 헤어짐을 선택했는데 지금의 자신이 그 헤어짐 때문에 더 망가져 버렸다는 게 너무 모순적이었다. 이건 제 괴로움만 우선하면서 정대만의 고통을 배신해 버리는 짓과 같았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괜찮을 것이고 이겨낼 것이라고 했다. 그건 정대만이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에 가까웠다. 내가 없더라도 괜찮기를 바란다는 소원이었다. 그래서 송태섭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송태섭이 망가지는 이유가 정대만은 아니어야 하니까, 이제부터 다시 한번 버텨 보고 도망치지 않아 볼 셈이었다. 정대만이 송태섭과의 이별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처럼, 송태섭도 이 이별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건 전 연인을 위한 송태섭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송태섭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람처럼 운동복을 입고 신발 끈을 묶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서 다리와 발목을 풀고 물을 챙겼다. 그리고 두세 번 발을 구른 후,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일상으로의 복귀였다.

4

Aimer - 花の唄

송태섭의 전 연인은 약하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세면대에 기대 선 정대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꽤 형편 없는 몰골을 하고 있다. 까치집을 한 머리에 푸석한 피부와 시뻘건 눈가, 듬성듬성 난 수염까지. 누가 봐도 과음을 해서 상태가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 이렇게 보니까 진짜 못생겼네. 흐린 눈으로 거울을 응시하던 정대만은 고개를 숙이고 찬물을 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여전히 술 냄새가 올라오는 입을 꼼꼼히 헹궜다. 그러고 나니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식탁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둔 트로피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있었던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였다. 리그가 끝난 후 정대만은 압도적인 표 수를 얻어 이번 시즌의 MVP 자리를 거머쥐었다. 시즌이 한창일 때부터 이미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쳐졌던지라 아주 놀랍거나 이례적인 결과까진 아니었다. 시즌 전 경기 출전, 경기당 평균 32분 19초 소화, 20점이 넘는 평균 득점에 경기당 평균 3점슛 개수는 리그 기록을 갈아치웠고 성공률도 40%가 넘었다. 어시스트나 2점슛도 어디 가서 빠질 수치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도 엄청난 성적이었고 팀도 그 활약에 힘입어 플레이오프까지 안정적으로 진출했으니 누구라도 정대만에게 최고의 선수 자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지난 시즌의 정대만은 전성기란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피어났다. 모든 팀의 경계 대상으로 집중 마크를 받았고 컨디션이 특히 좋은 날이면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득점한다는 헤드라인이 쏟아져 나왔다.

신내림은 무슨. 기사를 볼 때마다 정대만은 자조했다. 송태섭을 떠나보낸 후 정대만은 미친 사람처럼 농구에만 몰두했다. 가장 일찍 운동을 하러 나와 가장 늦게까지 체육관 불을 밝혔다. 2년의 공백 때문에라도 정대만은 이미 누구나 알아주는 노력파였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농구를 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코트에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처럼 농구를 했다. 농구에 집중을 하는 거야 좋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지나치다 보니 당연히 팀에서는 정대만을 걱정했다. 하지만 미친놈처럼 구는 게 성적으로 나타나고 억지로 끌려간 병원에서도 무릎은 멀쩡하다고 진단하니, 더 할 말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불꽃의 남자는 마음 놓고 더욱 자신을 불태웠다. 불타는 집중력 만큼 득점력도 어시스트도 수직상승했지만 그 불은 꺼져가는 장작에 억지로 고농도의 산소를 밀어 넣은 것에 더 가까웠다. 모든 것을 완전히 태우고 장렬히 산화하려는 마지막 불길이었다. 신내림이라기보다는 자해였다.

가만히 있으면 송태섭이 자꾸만 떠올라 죽을 것 같았다. 번개처럼 달려 나가는 송태섭, 패스를 던져주는 송태섭, 골 밑으로 파고드는 송태섭, 도전적으로 덤벼드는 송태섭, 손장난을 하는 송태섭, 먹을 때 눈을 감는 송태섭, 입술을 삐죽이는 송태섭, 편지를 쓰는 송태섭, 웃는 송태섭, 찡그린 송태섭, 졸린 송태섭, 화내는 송태섭. 지금껏 봐 온 모습 하나하나가 매분 매초 떠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대만은 수없이 슛을 던졌다. 공 하나에 송태섭과의 기억 하나를 담아 제 손에서 떠나보냈다.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져넣듯 림 안으로 공을 던져 넣었다. 그렇게 쏘아 보낸 공이 경기 중에만 한정 지어도 몇백 개는 되었을 텐데 송태섭의 기억은 아직도 정대만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버리면 버릴수록 사소한 것까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참다못해 어제는 축하주라는 명목으로 바구니에 술을 쓸어 담았다. 농구 때문에 거의 마시지도 않던 것을 쓰러질 때까지 위장에 부어 넣었다. 알코올에 탁해져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머리는 송태섭의 생각도 강제로 가라앉혔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트로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정대만은 찌그러진 맥주 캔과 빈 술병 사이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트로피를 손에 들었다. 매끈한 금속 위에 선명하게 적힌 제 이름 세 글자를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으로 쳐다 보았다. 수상하는 자리에서는 멋쩍고 벅찬 표정으로 크나큰 영광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댔지만 지금의 정대만에게는 이까짓 것 아무 의미가 없는 금속 덩어리일 뿐이었다. 예술가들은 제 고통을 위대한 업적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대만이 송태섭을 놓아준 고통도 동일한 방식으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정대만의 농구에 ‘승화’라는 훌륭하고 거창한 단어가 붙을 자격이나 있는 걸까.

송태섭은 정대만의 영혼이자 심장이었다. 송태섭이 있기에 정대만의 농구가 있었고 삶이 있었다. 정대만의 모든 처음이 송태섭은 아닐지라도 모든 끝은 곧 송태섭이었다. 농구를 제외하고, 송태섭 정도로 사랑할 무언가는 더 없을 거란 걸 정대만도 잘 알았다. 그걸 무시하고 스스로 파낸 빈 구멍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코트 위에서는 여전히 천부적인 바스켓 센스를 빛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빈 껍데기만 남았다. 영혼을 잃은 남자는 농구를 지팡이 삼아 겨우 발걸음을 내딛는 구십의 노인과 같았다.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노인의 뒤에서 시커먼 심연은 계속해서 달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의 네 모습을 보라고, 얼마나 형편없고 처참한지 아느냐고, 이 모습을 보여준다면 연인은 다시 네 품으로 뛰어 들어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한 번에 거머쥘 수 있을 거라고, 그거야말로 정대만이라는 남자에게 가장 걸맞은 정복이 아니겠느냐고. 오래 전, 모든 것을 부수고 싶어 했던 때처럼 잡음이 잔뜩 낀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크게 웃었다. 사랑해서 욕심 좀 내는 게 뭐가 대수냐? 한창 좋아 죽을 때도 너는 이미 그래 왔잖아. 송태섭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했잖아. 정대만의 이기심이 귀가 솔깃해 자꾸만 고개를 들려 했다.

송태섭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이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만 조금 찔끔하고 말던 녀석이, 생전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던 녀석이 처음으로 아이처럼 울면서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울먹이면서 헤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애원했다. 내가 멀리 있어서 싫은 거면 다시 들어갈게요. 선배 옆에서 뛸게요. 계약 그냥 위약금 좀 물고 파기하면 돼요, 별거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 말 취소해요, 선배까지 나 떠나지 말라고요. 송태섭이 울면서 횡설수설한 그 말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정대만은 저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대만의 심연이, 저 깊은 곳의 어둠이 얼마나 기쁘게 꿈틀거렸는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락의 주둥이는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정대만에게 허락을 하라고 종용했다. 제 발로 오겠다잖아, 여기에 네 잘못은 없어. 이건 송태섭의 선택이야. 송태섭의 의지라고. 그래서 정대만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제 몹쓸 입이 헛소리를 내뱉기 전에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송태섭을 잘라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욕심은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 정대만을 괴롭혔다. 심장을 파낸 빈 자리가 너무도 외로워 송태섭의 꿈을 꾸었다. 홈 경기장에서 정대만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7번을 단 송태섭이 신뢰와 애정이 넘치는 천진한 얼굴로 공을 던졌다. 정대만이 가장 완벽하게 3점슛을 던질 수 있는 위치였다. 그 공을 받아서 들면 정대만은 땀범벅이 되어 잠에서 깼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화장실로 달려가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이 끔찍한 감정이 모두 씻겨 내려가기를 간절히 빌면서 피부가 벌게지도록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고 나면 더욱 자신을 채찍질했다. 어두운 욕심이 고개를 들 겨를이 없을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혹사시켰다. 새벽의 외로움을 느끼고 꿈을 꿀 새도 없이 녹초가 되어 일찍 잠들도록 몸을 굴렸고, 송태섭과 보내던 여가 시간을 다시 추억하지 못하도록 농구와 운동 외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농구 귀신이던 고등학생 때의 서태웅 같은 짓거리를 지금의 정대만이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농구가 좋아 모든 것을 바쳤던 서태웅과는 달리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정대만의 농구는 추악했다. 그 지저분한 농구에 ‘최고’라는 영예가 붙다니, 정말로 부자연스러웠다.

정대만은 들고 있던 트로피를 거실장 위에 올려두었다. 그 동안 받아 온 메달과 상패들을 올려둔 공간이었다. 그 옆에 놓인 검은 전화기는 선이 뽑혀 있었다. 어디에도 연결할 수 없고 연결될 수도 없도록 철저하게 차단된 상태였다. 이별 후 근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대만은 송태섭의 번호를 기억했다. 국제전화 요금이 1분당 얼마인지 동전 하나면 몇 마디를 나눌 수 있는지를 기억하고 이 시간이면 미국은 오전인지 오후인지, 저녁인지 새벽인지까지도 자동으로 계산해 낼 수 있었다. 그게 두려웠다. 제정신이 아닌 정대만이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렁에 잠긴 채 송태섭에게 전화를 걸까 봐, 너를 다시 보고 싶다고, 너를 떠나보내고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이야기 해버릴까 봐. 송태섭에게 죄책감을 심고 그걸 구실 삼아 자유로운 새를 억지로 새장에 집어넣는 짓을 해버릴까 봐. 그래서 술을 사 들고 오며 정대만은 미리 전화선을 뽑았다. 최후의 보루였다.

정대만은 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갔다. 힘없이 주저앉아 리모컨을 눌렀다. 적막이 싫어 뉴스라도 틀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전원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비디오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정대만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게 뭐지. 들려오는 해설은 외국의 언어였다. 화면에 잡히는 경기장도 외국의 것이고 관중과 관계자들도 전부 외국의 사람이었다. 중계 카메라가 입장하는 선수들을 비추었다. 전봇대처럼 키가 큰 선수들이 연이어 카메라에 잡히다가 갑자기 중간이 쑥 꺼지더니 곱슬거리는 작은 머리통이 나타났다. 불량하게 비뚤어진 눈썹에 통통한 입술, 한쪽 귀에만 꽂은 피어스. 송태섭이었다. 아, 정대만은 그제야 비디오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저께 있었던 송태섭의 팀 경기 녹화본이었다. TV에서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함성이 고요하던 침묵을 깼다.

송태섭이 리그에 데뷔한 뒤로 정대만은 그의 팀이 치른 경기를 전부 녹화해서 보관했다. 송태섭이 아직 벤치 신세일 때부터 시작해서 주전이자 스타팅 멤버로 굳건히 자리 잡은 후까지의 모든 기록이 정대만의 거실에 있었다. 그야말로 송태섭 박물관이지. 나중에 네가 명예의 전당 같은 곳에 오르면 내가 이거 다 기부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던 적도 있었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중계가 되다 보니 예약 녹화를 할 때가 많았는데 헤어진 후에도 그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송태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직도 정대만은 자기 전에 공비디오를 밀어 넣고 예약을 걸었다. 하지만 습관이 남아 있기만 할 뿐 녹화한 비디오를 다시 본 적은 없었다. 날짜를 기입해 수납장에 정리를 하고 그 이상은 손을 대지 않았다. 보면 괴로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했다. 그랬는데 어제는 술을 마시느라 미처 비디오를 빼놓지 못했던 것이, 전원을 켜자 자동으로 재생이 된 것 같았다.

차마 비디오를 끄지 못한 정대만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녹화된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송태섭의 리그는 정대만의 리그보다 일정이 3주나 길다. 소화해야 할 경기의 양도 훨씬 많다. 시즌 후반인데다가 속공 플레이가 장기인 녀석답게 체력 이슈가 충분히 있을 법 했는데도 송태섭은 그게 다 뭐냐는 듯 여전히 날쌔고 가벼웠다. 코트에서 가장 작은 체구임에도 여유롭게 공을 가지고 놀며 넓은 시야로 여기저기 패스를 찔러주었다. 키 큰 수비수들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골 밑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약삭빠르게 득점을 하기도 했다. 상대 가드의 수비가 강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3점도 던져 보았다. 국내 리그보다 더 빠른 페이스로 흘러가는 경기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팀원들을 격려하고 경기를 풀어 나갔다. 마침내 경기를 알리는 버저음이 울리고, 송태섭의 팀이 승리를 확정 지었다. 집채만 한 팀메이트들에게 두드림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송태섭은 찬란하게 빛이 났고 눈부시게 강했다. 아나운서들은 연신 송태섭의 성을 부르며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이 이 좁은 땅에서 추악한 농구를 하는 정대만 따위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 잠긴 정대만은 환한 TV 화면 속의 송태섭을 바라보며 심장이 고통스럽게 죄어 오는 걸 느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 태섭아…….”

그대로 두 손을 얼굴에 묻은 정대만이 무너진 목소리로 흐느꼈다.

5

優里 - メリーゴーランド

 

정대만은 여전히 강한 척을 한다.

정대만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쳐다보았다. 베이지색의 캐주얼 정장을 입고 앞머리를 올린 남자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세련되고 멀끔하게 스타일링 된 외모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짙은 우울과 고통의 흔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마지막까지 점검을 하던 정대만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화장대 위의 향수병 하나를 들어 몸에 두어 번 뿌렸다. 적당히 청량한 바다 같은 향이 퍼졌다. 사놓고 처음 쓰는지라 제 몸에서 나는 향이 어색했다. 손목을 들어 향을 두세 번 맡아 보곤 화장대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금색 웨딩 스티커가 붙어 있는 봉투 사이로 반 접힌 고급스러운 종이 한 장이 삐져나와 있었다. 망설이며 한참 그걸 쳐다만 보던 정대만은 이윽고 한숨과 함께 종이와 차 열쇠를 같이 집어 들었다. 이제는 나갈 시간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로비에는 색색깔의 축하 화환이 가득했다. 신랑이 신랑이다 보니 기둥만큼 키가 큰 사람들이 로비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재킷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정대만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로비 안을 한 번 둘러보았지만 아직 아는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빨리 오긴 했나 보네. 손목을 내려다보니 아직 예식 시작까지 1시간이 좀 넘게 남아 있었다. 신랑에게 인사를 하더라도 사람이 좀 모인 후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정대만은 그쪽은 잠시 미뤄두고 먼저 신부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기웃거리자 어깨가 드러나고 치맛자락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의자에 앉아 선객을 맞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대만 선배. 들어오셔도 되는데.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보고 반 발짝 뒤로 물러나려던 정대만에게 이한나가 밝은 목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이쯤 되니 그냥 나갈 수가 없어서 정대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꽃으로 장식된 환한 방 안에 몸을 들였다. 말쑥하게 잘 꾸민 정대만을 보자 이한나와 함께 있던 여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누구……?”

“고등학교 농구부 선배. 지금은 신랑 팀 선수야. 대만 선배, 여긴 제 대학 친구들이에요.”

“안녕하세요.”

정대만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이따가 보자, 한나야. 인사를 건넨 여자들은 대기실을 나갈 때까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자기들끼리 자그맣게 속닥거렸다. 친구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한나가 고개를 들어 정대만에게 시선을 향했다. 워낙 키가 커서 한 단 아래에 있는데도 눈높이가 비슷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온갖 빛나는 것으로 장식된 이한나를 보던 정대만이 툭 말을 내뱉었다.

“예쁘네.”

“와, 선배한테 그 말 들으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선배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네요.”

“뭐야? 나도 칭찬 할 줄 알아.”

“그건 아는데, 선배가 저한테 이런 칭찬을 할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연적에 가까웠으니까요. 선배의 일방적인 그런 거긴 했지만. 이한나는 그리운 과거를 추억하는 얼굴로 웃었지만 정대만은 ‘연적’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억지로 진정시켜 놓았던 마음이 또 다시 출렁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래서 나올 수밖에 없고 나와야 하는 자리임에도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까지 수백 번 고민했던 건데.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오랜 장거리 연애로 자연스레 식어 그냥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기로 잘 합의한 이별’이었기 때문에, 정대만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송태섭 온대?”

“휴가 날짜 나오는 거 보고 올 수 있으면 온다고는 했었어요. 며칠 전에 들어온 걸로는 알고 있는데, 그러면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절절맸던 첫사랑 결혼하는 자리에 온다니, 그 녀석도 사람이 둔한 건지 낯이 두꺼운 건지…….”

“첫사랑이래 봤자 한참 전 얘긴데요, 뭐. 그리고 그런 다정함이 태섭이 매력이잖아요.”

아, 알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한 번 준 마음을 끝까지 책임지는 그 다정함. 정대만이 사랑했던 송태섭의 일부이자, 사랑했기 때문에 망치기 전에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 일부였다. 송태섭을 생각하느라 정대만이 가라앉은 기색으로 답이 없자 이한나가 눈치 좋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참, 신랑이랑 인사는 했어요? 아직. 여기로 바로 와서. 같은 팀에서 한솥밥 먹는 사이보다 고등학교 후배가 먼저인 거예요? 이 우선순위 영광인데요. 이한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이자 정대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잘 살고. 고마워요, 선배. 축의금 양쪽에 다 내야 하는 건 좀 피 토하는 기분이네. 그래서 선배에게는 두 배로 고맙답니다.

초여름의 신부 이한나는 오늘 정대만 팀의 막내 전력 분석관과 결혼을 한다. 이한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포츠신문의 농구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취재를 위해 경기장과 구단을 오가다 보니 여러 관계자들과도 자연히 안면을 트게 되었고, 그 중 나이가 비슷한 막내 분석관과 2년의 교제 후 결혼에 골인했다. 정작 신랑과 신부 모두와 연이 있는 정대만은 청첩장을 받고서야 둘이 사귀고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청첩장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한나 결혼이면 송태섭도 오려나.’였다. 3년 동안 매니저로서 농구부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코칭스태프 역할을 쏠쏠히 했던 이한나를 생각하면 오랜만의 북산 동창회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입이 썼다. 신랑 때문에라도 무조건 얼굴을 비춰야 하는 자리였지만 송태섭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가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잠시나마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웠던 사람을 눈에 가득 담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마주치게 된다면 굳은 결심을 더 유지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 손으로 송태섭을 다시 잡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대만은 거울 앞에서 수도 없이 연습을 했다. 1년 만에 보는 좋은 선배의 얼굴을 연습하고, ‘잘 지냈냐?’라는 첫 마디의 톤과 ‘잘 가라.’는 마지막 말을 연습했다. 송태섭의 앞에서 쓸 대본 리스트를 만들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을 잘 알았다. 정대만의 대사 한 마디를 쓰면 그다음에 이어질 송태섭의 여러 대사들과 반응들이 줄지어 생각났다. 그 분기점 하나하나마다 만들어지는 수많은 대본을 청첩장을 받고부터 내내 머릿속에 넣어두고 살았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온 자리였지만 송태섭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막상 듣자 가슴이 울렁이며 죄어들었다. 나 정말 괜찮을까. 정대만은 입술을 씹었다.

대기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이한나를 보러 왔는지 대기실 근처에 북산 부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채치수와 권준호를 시작으로 신오일, 정병욱, 오중식 등 당시의 1, 2학년 부원들과 채소연까지. 채치수와 권준호는 여전히 달에 한 번씩은 만났고 채소연처럼 선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농구계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어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과 얼마 전에도 본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던 정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 좋은 권준호가 강백호는 길을 잘못 들어 조금 늦는다고 알려주었다. 잘못 들 일이 뭐가 있냐, 큰길 따라 운전 하면 바로 오더만. 기막혀 하는 정대만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회포를 푸는데 주변이 은은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태웅이 이쪽으로 걸어 오는 중이었다. 선배들의 눈길을 알아챈 서태웅이 멀리서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넥타이 없이 검은 정장에 흰 셔츠라는 기본 조합이었지만 그걸 입고 있는 사람이 서태웅이라는 것만으로도 명품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왔어, 태웅아? 채소연이 환한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그 말을 시작으로 모두가 반갑게 서태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라, 언제 들어왔냐, 지난 시즌 활약 잘 봤다, 그 동안 잘 지냈냐 등등. 서태웅은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필요한 대답은 성실하게 꼬박꼬박 해주었다. 그때,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진 말소리 사이를 톤이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뚫고 나왔다.

“뭐야, 태웅이만 안중에 있는 거야? 주장이라고 대접해 줄 땐 언제고 이젠 나는 아무도 신경 안 써 줘?”

서태웅의 뒤에서 작은 머리통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태섭 선배랑 같이 왔어요. 서태웅이 느릿하게 말을 더했다. 송태섭이 싱긋 웃으며 서태웅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라 재킷은 걸쳤으나 안에는 티셔츠를 받쳐 입고 액세서리를 해, 송태섭다운 패션 스타일도 포기하지 않고 살려낸 차림이었다. 이달재가 가장 반갑게 송태섭을 맞았다. 다시 한번 인사 사이클이 돌고, 목소리들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쯤 오중식이 물었다. 머리 내리셨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와 달리 머리가 눈썹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머리가 송태섭의 불량한 눈썹과 삼백안에서 나오는 기운을 중화시켜 나이보다 더 어리고 귀엽게 보이게 만들었다. 송태섭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꼬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오늘 늦잠 자서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 할 시간이 없었어. 태웅이가 차 가지고 데리러 와서 망정이지.

“늦잠 잔 것치고는 이것저것 걸친 거 보니까 꾸미는 시간은 착실하게 쓴 것 같은데.”

약간 날 선 목소리가 정대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 실수했다. 이건 연습했던 대본에 없었는데. 정대만은 말을 뱉어놓은 뒤에야 약간 낭패감을 느꼈다. 서태웅과 함께 사이좋게 들어온 것도 그렇고 늦었다면서도 고심해서 꾸미고 멋을 내려 한 게 눈에 보여 기분이 조금 상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걸 드러내 버렸다. 정대만의 원래 계획은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은 척 송태섭을 대하고 오늘의 만남을 깔끔하게 끝내는 거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틀어진다.

송태섭이 흠칫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송태섭의 갈색 눈과 정대만의 녹빛 도는 검은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1년 만에 마주하는 갈색 눈동자가 얼핏 흔들린 것도 같았지만, 긴가민가할 정도로 희미했던 그 움직임은 송태섭이 눈을 한 번 깜빡임과 동시에 곧바로 사라졌다. 송태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제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머리는 워낙 시간이 많이 들어서 그런 거고……. 한나 결혼식인데 아무리 늦었어도 아주 대충 나올 수는 없잖아요.”

두 사람이 말을 한 번씩 주고받자 주변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송태섭과 정대만이 헤어졌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예전 연인들이 다시 마주친 상황 자체에 긴장한 기색이었고, 아직 모르는 사람들은 연인 치고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대화에 놀란 눈치였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먼저 깨며 무마한 것은 송태섭 쪽이었다. 아직 축의금 안 낸 사람? 나 내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태웅이는 아까 나한테 줬으니 됐고. 다른 사람들은 먼저 내고 온 건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던 정대만이 입을 열었다. 나 내야 해. 같이 가. 그리고 주변에서 뭐라 할 틈도 없이 송태섭의 어깨에 팔을 걸쳐 올린 채로 발을 옮겼다. 당황해서 굳은 몸이 제 팔 안에서 질질 끌려오는 게 느껴졌다. 놀랐겠지.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헤어진 전 연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몸을 붙여 오고 있으니. 그리고 정대만도 놀랐다. 송태섭을 데려 가려 했던 건 맞지만 예전의 습관대로 송태섭이 제 것임을 주변에 어필하며 꽁꽁 끌어안고 엉기려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정대만은 최대한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팔의 힘을 조절했다. 이 정도면 예전의 막무가내 선배 같은 느낌을 잘 냈을까. 여전한 나의 욕심이 친근감의 표시 아래 잘 숨겨졌을까. 정대만은 억지로 앞만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작은 송태섭의 보폭에 최대한 맞추어 걷는다고 발을 늦추었는데도 몇 발짝 가지 않아 두 사람은 축의금을 내는 곳 앞에 와 있었다. 정대만은 신부 측과 신랑 측에 둘 다 봉투를 내밀었고 송태섭의 의아하다는 시선을 받았다. 아, 신랑이 우리 팀 스태프야. 정대만의 설명에 송태섭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마찬가지로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제 것과 서태웅의 것 2개인 줄 알았더니 3개가 딸려 나왔다. 그러고 식권은 또 두 장만 받았다. 정대만은 가만히 눈썹을 밀어 올렸다.

“하나는 뭐야?”

“우성이 거요.”

“우성이? …정우성? 걔가 이한나한테 축의금을 왜 줘? 둘이 아는 사이였어?”

“아뇨, 제가 내라고 했어요. 내 첫사랑이니까 넉넉히 기부 좀 하라고. 원래는 오늘 같이 오려고 했는데, 걔는 산왕 형들이랑 약속이 겹쳐서 결국 못 왔어요.”

송태섭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치를 보거나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정우성과 송태섭이 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대학 때부터 같은 지역에 있었고 리그 데뷔 후에도 연고지가 가까워 자주 왕래하는 사이였으니까. 송태섭의 편지와 전화에서도 정우성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정도로 스스럼없이 구는 걸 보니 속이 조금 뒤틀렸다. 이제는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래서 안 된다는 것도 아는데 자꾸 예전 같은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걔랑 그 정도로까지 친했어? 안면 없는 다른 사람 결혼식에 데려오고 싶을 만큼? 혹시 사귀어? 그런 거야? 이제는 정우성을 좋아해? 정대만은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들을 겨우 삼키고 눈을 내리 깔았다. 연습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감정이 없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연습할 때 썼던 눈썹 근육과 입 근육들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볼품없이 새어 나오는 미련을 지우고 평범한 선배 같은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송태섭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먼저 저만치 가 있었다. 정대만은 반은 굳고 반은 일그러진 이상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분명 제가 먼저 놓아준 것이었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품을 떠나는 송태섭을 보자 이미 잔뜩 구멍 난 가슴이 더 허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결혼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송태섭은 식장 안에서도 정대만의 옆자리에 앉았고 식사를 하러 내려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자리가 그렇게 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존재감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당장에라도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싶고 어깨를 끌어당겨 귓가에 장난스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싶었다. 송태섭이 좋아하는 것들을 앞에 밀어주고 싶었다. 정대만은 자꾸만 습관처럼 튀어 나가려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1년쯤 지났으면 사라질 법 했는데도 몸에 남은 기억은 작은 계기만으로도 다시 불씨를 틔우려 했다. 덕분에 피로연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오늘 잡은 것이라고는 식기밖에 없었는데도 손 근육 전체가 얼얼했다.

이제 막을 내릴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정대만은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대로 격없이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송태섭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먼저 인사를 하는 사이 송태섭이 먼저 모습을 감췄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싶어 조금 기다렸지만 계속 나타나지 않아, 정대만은 그냥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서태웅이 옆에 와 섰다.

“아, 서태웅.”

“선배.”

“태섭이 못 봤냐? 아까부터 안 보이네. 간다고 인사라도 하려 했는데.”

“저도 못 봤어요.”

“네 차 타고 왔다며? 같이 안 가도 돼? 전화라도 해보지.”

“집에 갈 때는 알아서 가겠다고 하셔서.”

“그러냐. 일정이라도 있나 보지?”

“글쎄요.”

서태웅의 싱거운 반응에 정대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다. 오히려 송태섭과 더 마주치지 않고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잠시였지만 그리운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들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송태섭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만하면 괜찮았다. 심장은 계속해서 욱신거렸지만 정대만은 그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서태웅은 지하 3층에서 먼저 내렸다. 들어가겠다고 꾸벅 인사하는 것을 손을 한 번 들어 인사를 하고 보냈다. 4층으로 내려간 정대만은 제 차를 주차해 놓았던 구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곧 제 차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누가 차를 긁기라도 해서 주인을 기다리느라 서성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회색 여름 재킷에 같은 색 바지, 진갈색 구두, 그리고 축 내려온 곱슬머리. 발소리를 들은 송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갈색 눈동자가 정대만에게로 향했다. 송태섭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춰 서 있던 정대만이 입을 열었다. 먼저 간 거 아니었냐. 정대만은 태연한 태도로 송태섭을 지나쳐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열쇠를 밀어 넣고 잠금을 풀었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가네. 간다고 하려고 아까 찾았었는데.”

“또 그대로 가버릴 생각이에요?”

꽉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송태섭이 정대만을 똑바로 쳐다 보고 있었다. 아니, 쳐다본다기보다 노려본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큼성큼 다가온 송태섭이 정대만을 밀쳤다. 엉겁결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니 송태섭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제 차처럼 스스럼없이 문을 여는 것이 기가 막혀 한마디를 하려는데, 송태섭은 억센 손길로 정대만을 잡아채 그를 차 안으로 사정없이 구겨 넣었다. 야, 뭔데! 뒷좌석에 나동그라진 정대만의 뒤를 따라 송태섭이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뒤로 탁 하고 문이 닫혔다. 너 지금 뭐 하는……!

그러나 정대만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매캐하고 쌉싸름한 향이 훅 끼쳐옴과 동시에, 송태섭이 그의 입술을 덮쳤으므로.

6

にしな - 夜になって

미국으로 한 달이 걸려 날아온 청첩장을 받았을 때 송태섭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정대만도 오려나.’였다. 열정적으로 농구부를 돌보고 챙겼던 이한나의 결혼이라면 웬만한 북산 부원들은 다 모이고도 남을 터였다. 그리고 송태섭 역시 좋은 친구의 행복한 새출발을 꼭 직접 축하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정대만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면? 그건 별로 자신이 없었다. 괜찮은 표정을 하고, 잘 지냈냐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태연하게 말을 섞으며 고등학생 때의 추억을 나누고 밥을 먹고 나면 그대로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 그런 거 정말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잖아. 헤어진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닌 건 맞긴 했지만 굳이 다시 한 번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다.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정대만을 처음부터 보지 않거나 그 사람이 아예 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이런 관혼상제는 특별한 일이 없지 않고서야 매번 의리 지켜서 가는 사람이니 그럴 일은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같이 가줄까? 청첩장 얘기를 꺼내자 정우성은 곧바로 질문을 했다. 혼자 가기 그러면 같이 가줄게. 나도 겸사겸사 뷔페 좀 얻어먹고. 그러면서 눈을 찡긋한다. 정우성은 송태섭이 정대만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고, 송태섭이 괜한 일이 아니면 일상 이외의 화제를 입에 거의 올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우성 많이 컸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눈치껏, 친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주려 하는 게 퍽 고마웠다. 칭찬을 듣자 정우성이 씩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송태섭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진짜 같이 가줄 거야? 축의금 많이 내라고 할 건데. 얼마? 최소 50? 야, 나 현철이 형 때도 그 정도까지는 안 냈어! 돈도 많으면서 어딜 내 귀한 친구 결혼식을 맨 입으로 오려고 해. 나는 네 친구 아니야?!

묵시적으로 Yes라는 답을 하긴 했지만, 정우성을 이한나의 결혼식에 데려가는 것이 괜찮은 짓인지는 송태섭에게도 확신이 없었다. 안면 없는 사람을 케어한다는 명목으로 따로 빠지는 게 정대만의 얼굴을 덜 볼 확실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우성과 사귄다는 오해를 사는 것도 딱 질색이었으니까. 정우성을 그런 식으로 본 적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직까지 접지 못한 제 마음을 강제로 없는 취급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뭣보다 정우성도 싫어할걸. 본인만의 허니가 이미 있는 몸이시니.

그런 식으로 차여 놓고도 여전히 정대만을 사랑한다는 게 우습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덜어내려 해 봐도 덜어지지 않는 걸 어떡하라고. 다시 정신을 차린 후에도 국내의 신문을 하나하나 구해 모으고, 피드백을 해주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3점슛을 던지고, 이제는 의미 없어진 기념일에도 그가 좋아하던 케이크를 샀다. 시즌 중이라 먹지도 못할 것을 그냥 사서 냉장고에 넣어만 두고 있다가 곰팡이가 핀 후에야 집안일을 돌봐주시는 분의 손을 빌려 버렸다. 그런 것들이 전부 의미 없는 의식을 반복하는 행위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멈추진 못했다. 이건 송태섭만의 장례식이었다. 언젠가는 형처럼 정대만도 마음 속 바다에 완전히 잠겨 떠나갈 수 있도록 천천히 제 감정을 식히는 과정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정우성이 결국 같이 못 가게 되었다고 전화를 해 왔을 땐 송태섭도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야, 네가 먼저 같이 가준다며! 송태섭과 미국에서 사이가 꽤 돈독해지긴 했지만 정우성 인간관계의 근본은 산왕 사람들이니 그쪽을 더 우선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정우성이 같이 간다는 가정하에 결혼식 대처 시나리오를 고민하고 있었던 건데 그게 전부 틀어져 버렸으니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이 날 수밖에. 너 그럼 축의금은 무조건 내놔. 사내자식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죄를 돈으로라도 갚으라고. 그렇게 뜯어낸 정우성의 돈을 잘 뽑아 하얀 봉투에 넣으면서 송태섭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원점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일 식장에서 마주치면 정대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떻게 인사를 해 오고 어떻게 말을 걸까. 아무리 계산을 해도 명확한 해답 대신 미지수만이 계속되었다. 송태섭은 정대만을 꽤 잘 안다고 자부했었다. 정대만 자체가 감정을 잘 못 숨기는 사람이라 알기 쉽기도 했고, 송태섭도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이나 포지션의 특성상 타인의 기색을 읽는 데는 꽤 능숙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정대만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취해버렸다. 그 후로 송태섭은 정대만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년 전만 해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정대만은 이런 반응일 거라고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정말 그런 반응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확신이 없었다. 덕분에 송태섭은 시나리오의 고민만 거듭하다가 초여름의 하늘이 푸르게 밝아올 때까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바람에 늦잠을 잤다. 퍼뜩 잠에서 깼을 때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느긋하게 준비를 하기엔 글러서, 송태섭은 곧장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 그리고 결혼식장과의 거리가 송태섭 집과의 거리보다 멀 것 같은 사람을 찾았다. 맨 처음으로 강백호에게 전화를 했을 때 길을 못 찾고 있다는 말에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 다음이 서태웅이었다. 다행히 서태웅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고,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송태섭의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30분쯤 걸릴 것 같아요. 그 즉시 스톱워치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머리를 감고 나와 옷을 입었다. 너무 뻗치지 않게 말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평소처럼 세팅할 시간은 없었다. 거울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송태섭은 결국 머리를 만지는 걸 포기하고 적당한 액세서리만 몇 개 골라 걸친 채 하얀 봉투들을 집어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서태웅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귀에 들리는 것은 정대만의 목소리뿐이었다. 참 우습지. 낮고 부드러운데다 울림통이 아주 큰 것도 아니라 이렇게 무수한 소음 사이에서는 쉽게 묻혀 버리곤 했는데도 송태섭에게는 오로지 그것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게. 정대만의 목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쿵쿵대는 소리가 너무 커져서 제 앞에 있는 서태웅이라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송태섭은 심장이 느려지기를, 평상시의 속도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억지로 숨을 참았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숨을 참는 짓을 반복해 겨우 심장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부원들이 서태웅을 먼저 알아본 게 다행이었다. 그 벽 같은 등 뒤에 숨어 제 상태를 그나마 정리하고 나서야 송태섭은 허세를 잔뜩 부리며 괜찮은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늦잠 잔 것치고는 이것저것 걸친 거 보니까 꾸미는 시간은 착실하게 쓴 것 같은데.”

거기서 정대만이 시비를 걸어올 줄은 몰랐다. 놀라 돌아보자 이쪽을 보고 있던 정대만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녹빛이 은은하게 도는 검은 눈동자가 송태섭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송태섭은 그 홍채 안에서 어딘가 언짢은 기색을 읽어냈다. 왜? 무엇이? 송태섭이 이한나의 결혼식에 오면서 꾸몄다는 게? 송태섭은 혼란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거 기분 나빠 하지 말라고. 기대해 버리잖아, 당신이 다시 손을 내밀어줄 것처럼 생각 되니까.

하지만 당신은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리지 않지. 당신이 포기를 모를 수 있는 건 무겁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당신은 자신을 잘 아니까, 그 모든 것까지 포함해 거듭 고민해서 내린 최적의 결정이니까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거야. 그러니 선배는 나를 놓기로 한 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잖아요. 내가 갖는 이런 기대감은 신기루일 뿐이잖아요. 지금의 당신은 그냥 고등학생 때처럼 말 얹기를 좋아하는 선배일 뿐인 거잖아요.

그래서 송태섭은 눈을 한 번 깜빡여 순간 치밀었던 헛된 감정들을 전부 지워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히 친해서 적당히 대드는 고등학교 후배처럼 정대만의 시비를 받아쳤다.

“한나 결혼식인데 아무리 늦었어도 아주 대충 나올 수는 없잖아요.”

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 이제 연인이 아닌 두 사람이 취해야 할 적당한 선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예요, 대체. 예전처럼 어깨를 끌어안으며 붙여오는 몸도, 정우성의 이야기를 하자 험악해지는 눈빛도, 억지로 지어보려 애쓰는 평범한 표정도, 전부 예전처럼 지나치게 잘 읽혀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축의금을 내고 부원들에게 돌아가는 등 뒤로 정대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꽂혀오는 등이 타오르듯 아팠다.

식장 안에서 정대만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정대만은 같은 팀 사람들과 신랑 하객석에 앉으려 했지만 친척들만으로도 이미 자리가 반 이상 차 어쩔 수 없이 신부 쪽으로 넘어와야만 했다. 그리고 하필 그나마 빈 테이블에 송태섭과 서태웅, 강백호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엉겁결에 정대만까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는데 하필 그게 송태섭의 옆이었다. 앉고 나서야 그걸 자각한 정대만이 낭패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지만 자리를 바꾸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으니 둘 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진행되는 예식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송태섭은 시야 외곽에서 움찔거리는 정대만의 손이 신경이 쓰여 예식 내내 집중을 하지 못했다.

정대만의 움찔거림은 예식 중에만 그치지 않았다. 피로연장에 내려가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접시 한가득 송태섭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담아 오더니─송태섭과 정대만은 입맛이 꽤 달랐다─그걸 테이블에 가져오고 나서야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표정이었지만 순간 보이는 눈빛만으로 수를 예상해야 하는 일에 이골이 난 송태섭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그걸 송태섭 앞에 놔줄 수도 없어 꾸역꾸역 먹고 있는 건 더 어이가 없었다. 진짜 멍청이인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갖다주고 싶어서 몸을 들썩거리고, 종업원이 다 먹은 접시를 치우러 오면 그걸 또 도와주고 싶어서 손을 움찔거리는 게 다 보였다. 이쯤 되자 송태섭은 여러 의미로 속이 끓었다.

이럴 거면서 나한테 헤어지자는 말은 왜 했어. 전화로는 그렇게 단호하게 끊어냈으면서 직접 봤을 때는 왜 이 모양이냐고. 끊어냈으면 계속 선을 긋던가, 이렇게 미련이 남았으면 무릎이라도 진작에 꿇고 빌던가. 선은 선대로 그으려고 애쓰면서 굴기는 왜 자꾸 절절하게 굴어서 사람을 미치게 하냐고. 대체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데요. 본인이 먼저 헤어지자고, 동료 선수에 선후배로 남자고 얘기해 놓고서는 왜 나를 후배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대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냐고요. 정대만의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었다.

당신이 나보고 이겨내라고, 괜찮아지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괜찮지 않게 만드냔 말야. 제발 날 좀 그만 흔들어요. 지금도 충분히 강한 척 하느라 벅차다고요. 어떻게 다시 세운 벽인데 그걸 또 무너뜨려고 들어요. 말을 뱉었으면 똑바로 해내요. 자기가 한 말 끝까지 책임지는 건 당신이 제일 잘 하는 짓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 괴롭히지 말고 제발 그대로 하란 말이야, 당신답게.

그래서 정말로 멱살을 잡아주러 갔다. 그렇다고 이런 좋은 자리에서 남들 다 볼 때 잡을 수는 없으니까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잡고 흔들 생각이었다. 정대만이 지하 4층에 차를 대놨다는 건 아까 주워들었다. 서태웅에게는 알아서 가겠다고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4층을 한 바퀴 돌면서 정대만의 차를 찾았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차들 중에서 정대만의 것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1년이 지났어도 번호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쯤 되면 좀 잊을 법도 하지 않았나. 제가 우스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앞에서 정대만을 기다렸다. 식사는 아까 마치는 걸 봤는데도 계속 내려오지 않아 속이 탔다. 빨리 해치워버리고 집에 가고 싶은데. 짜증나. 송태섭은 발을 탁탁 굴렀다.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차 앞에 있는 게 송태섭이라는 걸 인식하자 정대만의 발이 멈췄다. 굳은 표정이 잘생긴 얼굴 위를 스쳤다. 먼저 간 거 아니었냐. 낮은 목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뚜벅뚜벅,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쪽으로 다가온다. 태연한 척하지만 떨리는 손이 보인다. 내딛는 속도가 느려진다. 송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송태섭은 저 신체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저건 겁쟁이 송태섭이 평생 숨겨 오려 노력하던, 견고한 벽 뒤에서 혼자만 알려고 덮어버렸던 형편없는 바닥이다. 정대만은 송태섭과 달리 강하고 굳건했다. 항상 활개치며 불타 올랐다. 헤어질 때에도 괴로워하긴 했지만 단호했다. 그 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제가 할 일에 주력했다. 결국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그래서 제대로 하라고 멱살 좀 흔들어 주면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선을 찾아갈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줄 알았던 정대만이 겁쟁이처럼 군다. 송태섭과 같은 바닥을 보인다. 씨발. 송태섭의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가네. 간다고 하려고 아까 찾았는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태섭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대로 가면 정대만은 도망친다. 겁쟁이인 제 모습을 들키지 않을 곳으로, 다시 강한 척 할 수 있는 곳으로 영영 떠난다. 송태섭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송태섭은 막을 새도 없이 끊겨 나가던 마지막 전화를 떠올렸다. 잡은 손을 놓던 공항의 정대만을 떠올렸다. 제게서 등을 돌리던 정대만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그래서 송태섭은 물었다. 또 그대로 가버릴 생각이에요?

정대만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녹빛 도는 눈동자를 보자 송태섭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정대만이 도망치기 전에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를 쑤셔 넣었다. 야, 뭔데! 너 지금 뭐하는…….! 당황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입술을 들이받았다. 열어주지 않으려는 것을 사정없이 깨물고 씹어 억지로 벌렸다. 혀를 밀어넣고 정대만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정대만의 혀를 찾아 제 것을 얽었다. 잃었던 실감이 되살아났다. 드디어 제대로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피맺힌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었다.

깊은 물 속에 서서히 잠기게 하려 했던 마음이 몰아치는 파도에 다시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한 번 물 밖을 떠난 마음은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도가 치면 칠수록 물에 휩쓸리기는커녕 모래사장 안쪽으로 더 들어오기만 했다. 송태섭은 떠날 생각을 않는 제 마음을 다시 주워들었다.

송태섭은 더 이상 강한 척을 하지 않는다.

송태섭에게는 정대만이 필요했다. 그래서 온몸으로 애타게 정대만의 입술을 갈구했다.

 

 

7

MY FIRST STORY - 告白

정대만은 다급하게 송태섭의 어깨를 밀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걸 느끼면서도 송태섭은 꿋꿋하게 버텼다. 미국에서 정대만보다 체격이 더한 사람들과도 매일 같이 몸싸움을 해 왔다. 이 정도로 쉽게 밀리진 않는다. 몇 분 동안 차 안에서는 밀어내려는 사람과 밀리지 않으려는 사람의 힘 싸움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정대만이 항의하듯 막힌 입 사이로 뭉개진 소리를 냈다. 제 손을 떼어내려던 정대만의 팔과 한창 씨름하고 있던 그때, 송태섭의 코끝에 문득 은은하게 남은 바다 향이 스쳤다. 아, 이 미친 인간. 향의 정체를 알아차린 송태섭의 속에서 뜨거운 것이 다시 한번 치밀었다. 그리고 송태섭이 힘이 빠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대만은 그를 완전히 밀쳐냈다. 숨을 몰아쉬면서 당혹한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를 눈으로 송태섭을 쳐다본다. 송태섭도 숨을 헐떡이며 젖은 입가를 닦았다. 정대만이 사나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내 향수를 선배가 왜 쓰는데요.”

뭐? 정대만이 어처구니없다는 소리로 되묻자 송태섭이 다시 한번 따져 물었다. 내 향수를 선배가 왜 쓰냐고요. 오늘 뿌리고 나온 거, 내가 쓰는 거잖아요. 선배 취향 절대 아니라고 했던 걸 왜 뿌리고 나왔는데요. 그리고 차 안은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송태섭의 매서운 기세에 정대만은 정곡을 찔린 듯 멍하니 입만 뻐끔거렸다. 송태섭은 여전히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 멍청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던 정대만이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면 넌 내 걸 왜 쓰는데. 송태섭이 제 다리 아래에 구겨져 있던 쿠션을 엄청난 힘으로 집어던졌다. 퍽 소리가 났다. 쿠션을 정통으로 맞은 정대만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송태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썼냐고? 그게 지금 선배가 할 말의 전부야? 내 향수를 왜 썼냐고?!”

“야이씨, 네가 먼저 물어봤잖……. 아으…….”

“그래요, 대답 해줄게요. 그걸 뿌리면 선배가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썼어요. 정대만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차여 놓고도 자존심 없이 썼다, 왜! 선배를 못 잊어서, 그래서 코 아프다고 그렇게 싫어했던 그 매캐한 걸 그냥 썼다고! 됐어요? 어?!”

한참 언성을 높인 송태섭이 씨근거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신경질적으로 제 얼굴을 쓸던 송태섭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정대만은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풀파워로 쿠션을 맞은 충격의 여파인지 1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그리워하고 잊지 못했다고 말하는 송태섭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정대만은 입술을 꽉 씹었다. 기뻐하면 안 돼. 설레서도 안 돼. 여기서 녹아내려서는 안 돼. 송태섭을 받아주면 안 돼. 정대만은 송태섭을 밀어내야 했다. 제 손에 다시 쥘 생각을 해서는 안 됐다. 떠나보낸 새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창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됐다. 애초부터 그럴 각오로 놓아준 사랑이었다. 그에 수반하는 괴로움을 감당하는 건 온전히 정대만의 몫이다. 송태섭의 다정함에 기대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됐다. 정대만은 이때를 틈타 고개를 들려는 시커먼 괴물을 억지로 짓눌렀다.

“태섭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사이는 아닌 것 같다. 나 지금 가야하고,”

“나한테 필요한 건 그딴 50ml 밖에 안 되는 향수가 아니에요, 선배.”

송태섭이 정대만의 말을 단박에 끊었다.

“나한테 필요한 건 187짜리의 허우대 멀쩡한 정대만이라고요. 그건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송태섭은 정대만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손바닥 아래로 맞닿은 피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잡고 싶어 하는 건지 빼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제가 먼저 잡았다. 송태섭은 그대로 정대만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선배 아직도 나 사랑하는 거 알아요. 취향도 아닌 남의 향수를 사서 쓰고, 정우성 얘기 하니까 질투나 하고, 계속 사람은 못 챙겨줘서 안달이고, 덥석덥석 품에 안는 버릇은 고치지도 못했고. 그렇게 미련 가득하다고 온몸으로 광고는 다 해놓고 왜 도망을 가려는 거예요. 왜 선배가 겁쟁이가 됐어요. 그건 항상 내 역할이었는데. 송태섭이 한숨을 쉬었다.

“선배가 있으니까 미국도 갔던 거였어요. 선배가 있어 줘서 버틸 수 있었던 거였다고요. 나는 원래 약해요. 겁쟁이예요. 매일매일 도망치고 싶어요. 지금도 코트에 오를 때마다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요. 이 거인들을 못 뚫을지도 모른다고, 저 벽을 넘지 못해서, 볼 운반을 못해서 100점이 넘는 점수 차로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매일같이 날 좀먹어요. 하지만 선배도 힘내고 있고, 또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정대만 애인인 나도 비슷한 사람이 되려고 했어요. 그게 날 미국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어요. 그런데 선배가 갑자기 내 손을 놓았잖아요. 내가 그렇게 붙잡았는데 무슨 소리를 해도 죽어도 안 받아줬잖아요.”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선배가 날 망칠 거라던 그 말을 납득할 수가 없어요. 그날에야 망치려 들긴 했지만 그때는 선배도 선배가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예외인 거죠. 다시 돌아온 이후로 선배는 그러려고 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나를 망치다뇨, 선배는 내가 무너지면 손을 잡아 꺼내줄 사람이에요. 내가 아는 정대만은 그런 사람인데 왜 날 망치기 싫다면서 떠났냔 말이에요.

송태섭의 목소리에 괴로운 빛이 감돌았다. 정대만과의 마지막 전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다. 처참하게 무너지던 절망감을, 내 일부가 강제로 도려 나가지던 고통을, 온기가 손안에서 빠져나가던 차가운 감각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은 한 번이면 족했다. 송태섭은 정대만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솔직하게 바닥을 내보였다. 내면의 어린 송태섭이 가장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 놓지 마요. 나 정대만 없으면 안 돼.

“…내가 내민 손이 널 꺼내주는 게 아니라면?”

송태섭의 말을 다 듣고 난 정대만이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송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순수한 의아함이 담긴 시선이 정대만을 향했다. 정대만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통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운은 떼었지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망설이던 정대만이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미국에 있는 게 싫어.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니까.”

내가 얼마나 큰 욕심을 갖고 있는지 넌 몰라. 정대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널 묶어두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추악한지 넌 모른다고. 내가 내미는 손이 널 꺼내주는 게 아니라 나락으로 잡아당기는 걸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잖아.

“편지를 받고 전화를 해도 채워지지 않아. 잠깐 돌아온 너를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어. 미국 가라고 네 어머님보다 더 열심히 등 떠밀어 놓은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웃긴데, 존나 후회했다고.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 몰랐으니까.”

“야, 정대만.”

“고작 그것 뿐이었다면 안 그랬겠지. 그런데 아무리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여권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지는 않아. 재발급하는 그 며칠 만이라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몰래 숨기거나 없애는 시나리오를 진지하게 고민하진 않는다고. 진짜 사랑하면, 거기서는 벅차니까 국내 들어와 뛰는 게 어떻겠냐고 꼬셔볼 생각도 안 해. 네가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치열하게 거머쥔 기회를 포기하라는 소리를 한다? 말이 안 되잖아. 심지어 그게 진짜 네 몸이나 커리어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로지 송태섭이 정대만 가까이 있어 줬으면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런 거 너무 위험하지 않냐? 너한테 농구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너한테서 농구를 뺏고 싶어 했다고. 너를 더 위로 밀어주기는커녕 이 아래에, 내 옆에 묶어놓고 싶어 했단 말야. 단지 내 욕심 하나 때문에. 그때처럼.”

시간이 지나면 좀 익숙해져야 하잖냐. 너랑 떨어져 지내는 것도, 내 마음대로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도. 그런데 식지가 않는다고. 이게 꺼지질 않아.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하는데, 그러면 어떡해. 네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아주 압도적인 선수가 나타나서 다 휩쓸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이게 정상이야? 이게 사랑이냐고? 내가 진심으로 네가 아래로 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진짜로 그런 짓을 해서 다 망쳐버리기 전에 멈출 방법은 너한테서 떨어지는 것밖에 없잖아. 결국 감정이 북받친 정대만의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정대만은 손을 들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 얼굴을 가렸다. 이런 흉한 걸 송태섭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차 안에는 한동안 정대만이 훌쩍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을 몰라도 이렇게 모르나…….”

우는 정대만을 보던 송태섭이 기가 찬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보세요, 정대만씨. 송태섭이 얼굴을 가린 정대만의 손을 끌어내렸다. 정대만은 버티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송태섭의 힘이 더 셌다. 울음을 참으려고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이 얼핏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진짜 정대만 사랑하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닦아주며 송태섭이 혀를 끌끌 찼다.

“웃긴다, 진짜. 내가 정대만 이기적인 거 모르고 사귄 것도 아니고. 선배는 원래 고등학생 때부터 욕심쟁이에 제멋대로였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이타적으로 굴어서 이 사달을 내.”

“너 이 와중에 나 욕하냐.”

“선배는 욕 좀 먹어도 싸요. 아……. 진짜 선배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 치던 그 세월이 다 아깝다. 너무 후회된다. 고작 이딴 이유에 내가 그렇게나 상처를 받았다니.”

“야, 임마. 이딴 이유라니…!”

정대만이 여전히 울먹이면서도 발끈하자 송태섭이 피식 웃었다. 일단 울음 좀 그쳐봐요, 왜 이렇게 계속 울어. 닦아도 닦아도 솟는 눈물에 결국 소매를 물리며 송태섭이 젖은 손목을 털었다.

“선배가 욕심 내는 그 모든 게 정말로 곤란하기만 했고 날 망쳐버릴 것만 같았다면 애초에 선배를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예요. 처음부터 도망쳤을 거라고요. 나는 겁쟁이니까. 하지만 나는 선배랑 사귀었죠? 그게 뭘 뜻하는지 생각을 좀 해 봐요, 이 바보야.”

송태섭이 정대만을 끌어안았다. 불이라는 별명 값을 하는 정대만의 높은 체온이 맞닿은 곳을 통해 송태섭에게도 퍼져 나갔다. 따뜻해. 편안하게 몸이 풀리는 느낌에 송태섭은 눈을 감았다. 심해에 잠긴 익사체처럼 차갑던 제 몸이 드디어 살아있는 사람 같은 온기를 되찾았다. 그 감각이 가슴 저리도록 황홀하고 행복했다. 그래. 이래서 나는 당신이 필요했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건 오직 당신 뿐이니까.

“선배가 욕심 내는 게 좋았어요. 누군가가 나를 온전히 원한다는 감각이 좋았다고요. 선배는 그게 나를 추락하게 만드는 손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선배가 끌어당겼기 때문에 바다에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어요. 선배가 내 땅이었고 닻이었어요. 만약에 내가 정말 미국에서 실패하더라도 의지할 곳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됐어요. 그래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데, 그랬는데 정작 선배가 그걸 몰랐다고요? 나랑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으면서? 이거 진짜 나 사랑한 거 맞아?”

야! 나는 사랑해서 널 보내준 건데! 그리고 너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잖아! 정대만이 억울한 목소리로 성을 냈다. 송태섭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한 번만 더 사랑했다가는 큰일 나게 생겼네. 그래서 저 지금 다 얘기하잖아요. 게다가 선배가 정말로 그럴 사람 아닌 것도 다 아는데 뭘 그렇게 혼자 사서 걱정을 했어요. 진짜 그런 짓 하는 것 같으면 앞니 또 갈아 끼워서 정신 차리게 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러니까 이상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내 손이나 다시 잡아줘요. 말했잖아요, 나 정대만 필요하다고. 송태섭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바닷물이 정대만의 발밑으로 밀려왔다. 정대만의 발목을 잡고 있던 시커먼 괴물이 밀려오는 물결에 형태를 잃고 흐트러졌다. 끈적한 어둠이 저 수평선까지 덮어버릴 줄 알았는데 송태섭의 바다는 오히려 정대만의 심연까지도 전부 쓸어 가 버렸다. 그리고 그것마저 사랑한다며 물밑으로 가라앉혀 제 몸 속으로 끌어안았다. 송태섭은 애초에 정대만의 작은 어둠 따위에 정복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시커먼 괴물 대신 발목을 간지럽히는 물결을 느끼며 정대만은 언젠가의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밀물과 썰물이 있고 파도가 있다. 바람과 달에 의해 잠시 멀어지더라도 때가 되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다. 그 법칙은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반드시 땅에게로 돌아온다. 그래. 내가 너무 몰랐네. 내가 너무 멍청했어.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혼자만의 논리에 빠졌었어.

정대만은 마침내 한숨 같은 말을 토해냈다. 미안하다. 송태섭이 다 안다는 얼굴로 웃었다. 겁쟁이 둘은 드디어 손을 맞잡았다.

혼자 된 이들은 약하다.

그렇지만 둘이서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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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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