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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쥬메리미?

서른 됐으니까 나랑 결혼하자, 태섭아.

某日 by 銘

1

일방적인 청혼

 

사실 그건 거의 장난이었다. 창창한 대학 시절, 아직 뭣도 모르는 스물 셋넷 정도에 친한 선배와 술을 먹다가 한 장난. 왜 그 얘기를 했었더라. 아마 한나와 결국 이어지지 못하고─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했으니 한나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등신 같은 송태섭.─미국 생활에 치이느라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본 제 처지가 한스럽고 딱해서 푸념을 하다 나온 얘기였을 것이다. 반쯤 풀린 혀로 한탄하는 걸 들은 정대만은 자기는 연애야 어렵지 않게 하는데 전부 석 달을 못 넘긴다고 불평을 했었지.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로 부잣집 곳간 반어법으로 자랑하는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짜증 나서 한 대 쳐주고 싶다는 눈으로 보다가 오늘 술값은 선배가 다 내라고 떠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한 잔 두 잔 건배를 하다가 둘 다 70%쯤 취해서 실없이 낄낄거리던 중, 옆 테이블 커플이 몰래 뽀뽀하는 걸 본 내가 그 얘기를 했었다. 아, 나도 진짜 연애 좀 하고 싶다. 이러다 연애는 고사하고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러면서 잔을 한 번에 비웠더니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던 정대만이 꼬이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어, 대공감. 그건 나도 가끔 생각해.

“이 선배 아까부터 계속 재수 없는 소리 하네.”

“재수 없는 게 아니라……. 연애도 석 달을 못 넘기는데 결혼도 석 달을 못 넘기고 이혼하면 그것도 문제 아니겠냐. 결혼한다고 동네방네 떠들기는 다 떠들고 돈도 돈대로 썼을 텐데.”

“흠…….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선배 생각보다 논리가 있었구나?”

“뭐라고, 이 자식아? 선배 공경을 좀 해라.”

“예이 예이, 선배 공경 노인 공경 나라 공경 농구 공경.”

그 얘기를 꺼낸 건 정대만이 먼저였다. 하나도 공경심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고 소맥이나 한 잔 더 말고 있던 내 손을 턱 잡더니 눈은 다 풀려서는, 꼴에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진지한 얼굴을 하고.

“야, 태섭아. 우리 각자 30대 될 때까지 결혼 못하면 그거 그냥 우리끼리 하자.”

“이보세요, 정대만 선배님. 제가 지금 이만큼 꼴았어도 이게 아니란 건 알겠습니다.”

“아니야, 이 자식아……. 선배 말을 좀 끝까지 들어봐. 앙케이트 보면, 어? 연애든 결혼이든 깨지는 첫 번째 이유가 뭐냐. 바로 성격 차이야. 그런데 너랑 나는 생각보다 성격이 잘 맞고,”

“그거 내가 선배 참아줘서 그런 거란 생각은 안 하시는지?”

“아, 시끄럼마! 조용히 좀 해 봐, 계속 들으라고. 그리고 내가 맨날 여친한테 차이는 이유가 뭔지 알어? ‘농구야, 나야!’ 이거라고. 그런데 너나 나나 이 질문의 답은 딱 하나잖냐. 농구. 여기에서 가치관도 오케이. 첫 번째 이유는 무사히 넘어갔다 이거야……. 그리고 두 번째…”

하여튼 이런 식으로 정대만이 늘어놓는 이유들이 알코올에 절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는 꽤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려서, 얼큰하게 취한 송태섭도 솔깃해져 허락을 한 거다. 뭐, 좋아요. 그럽시다. 총각 귀신으로 죽는 것보단 선배와 결혼하는 게 낫겠죠.

다시 말하는데, 이건 진짜 거의 장난이었다. 90%쯤, 아니, 95%, 좀 더 하면 99%! 거기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정말 대만 선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대만과 결혼해 사는 내 자신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남자와의 사랑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미국 생활을 할 때 룸메이트 덕에 이미 질리도록 봐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랑을 하는 게 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한나를 좋아해 왔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국내는 동성결혼이 안 된다고요.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전제였단 말이다.

그런데 씨발, 신이시여. 저는 왜 1월 1일 오전 12시 2분부터 정대만이 무릎 꿇고 반지 케이스를 내미는 꼴을 현관문 앞에서 수면 바지 차림으로 봐야만 하는 겁니까? 예???

“…형 지금 뭐 하는 건데요.”

목소리가 저절로 떨린다. 열어놓은 현관문이 추워서 떨리는 것도 있는데, 빡쳐서 떨리는 게 한 89%의 지분인 것 같다. 아마 티도 엄청 났을 거다. 왜냐면 나도 지금 내 주먹이 떨리는 게 느껴지거든. 이상한 곳에서 눈썰미 좋은 정대만이 이거 모를 리가 없다고. 그런데 정대만은 그걸 다 알고도 웃었다. 그냥 웃은 것도 아니고, 근사하게 웃었다. 그야 염병, 당연히 근사할 수밖에 없지!! 왜냐면 이 인간은 지금 정장에 코트에 구두까지 풀세트로 맞추고 머리를 올려 향수까지 뿌린 차림으로 아파트 복도에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까!!!

야, 송태섭. 자정 지났으니까 너 이제 서른 맞지. 여전히 근사하게 웃는 얼굴로 정대만이 입을 열었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이 선배는 목소리도 좋다. 하는 말에 비해 존나 쓸데없이. 그리고 이렇게 근사한 웃음, 근사한 목소리, 근사한 차림으로 정대만은 설마설마하던 내게 3점슛 같은 쐐기를 박았다.

“서른 됐으니까 나랑 결혼하자, 태섭아.”

…정대만 진짜 미쳤냐???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저 잘생긴 면상을 주먹으로 몇 번 더 쳐버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추운 날 냉골이다 못해 얼음장일 땅바닥에 왼 무릎을 꿇고 있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 튀어나오려는 욕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지만 최대한 몸을 바르게 하고 속을 가라앉히려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 들어와요, 거기 추우니까.”

그리고 옆으로 비켜주었더니 정대만은 그래도 돼? 하고 묻곤 끙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무릎이야. 다리 저리다. 무릎 위쪽을 툭툭 치는 걸 보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누가 거기서 그러고 있으래요? 그럼 청혼하는데 무릎 정도는 꿇어야……. 아악! 제발 좀 닥쳐봐요, 좀!

집안으로 들어온 대만 선배는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우씨, 역시 1월에 코트는 좀 아니었다. 겁나 춥네. 야, 태섭아. 보일러 조금만 더 올리면 안 되냐? 쫑알거리며 거실 스위치 옆의 보일러 패널을 들여다보는 선배의 모습은 조금 전 동화 속 왕자처럼 청혼을 한 사람답지 않게 그냥 평소의 정대만이었다. 푼수 같고 철 좀 덜 들고 다소 무신경한 마이웨이의 정대만. 1도만 올려놔요. 한숨을 내쉬고 전기포트에 물을 받았다.

인스턴트 커피를 한 봉 까 넣은 머그잔에 보글보글 끓는 물을 붓고 찬물을 약간 타서 내놓았다. 오, 땡큐. 제집처럼 식탁에 앉아 있던 정대만은 여전히 움츠린 어깨로 하얀 김이 잔뜩 올라오는 커피를 후후 불었다. 후룩거리며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시더니 뜨뜻한 게 몸이 풀린다며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한다. 후룩후룩 정대만이 커피를 마시는 소리를 배경 삼아 나도 맞은편에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팔짱을 끼고 한쪽 눈썹을 잔뜩 치켜올린 채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서요.”

“뭐가.”

“이게 다 뭔 짓거리인데요.”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려는 성질을 겨우 눌러 참은 채 묻자 커피를 삼킨 대만 선배는 순수하게 의아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기억 안 나냐? 우리 대학 때 술자리에서 약속했던 거. 둘 다 30대 될 때까지 결혼 못하면 우리끼리 하자 그랬잖아. 아니, 정대만은 왜 이런 소리를 무슨 사람이 영화 약속 까먹은 거 언급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꼴로 해대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상한 짓으로 사람을 들쑤셔놓은 주제에 약속을 잊은 이쪽의 문제인 양 말을 하는 건 또 뭐냐고. 다시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러니까 이게 뭔 헛소리냐고!! 형 지난주에도 선 봤다며!!”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만 선배가 얼굴을 찌푸렸다. 야,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아냐? 이웃에게 민폐다, 태섭아. 아, 그 몇 시인 줄 아는 시간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반지 내밀고 결혼하자 어쩌자 하는 형은 제정신이고요? 아무리 정제를 하려 해도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험한 말을 해대는 나를 기가 찬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대만 선배가 짧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머그잔을 들었다. 표정 뭐냐, 정대만? 기가 차는 건 이쪽이라고요!

“선 보긴 봤는데 별로였어. 그래서 애프터도 안 했고. 어차피 진짜 결혼 생각 하고 나간 것도 아니고, 고모 등쌀 때문이었으니까.”

…아,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문자 그대로 속 터져서 죽을 것 같아. 서른이 되자마자 결혼은커녕 고혈압으로 급성 뇌출혈이 와서 친형이나 안 만나러 가면 다행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뻣뻣해지려는 뒷목을 힘주어 주물렀다. 그 선 본 여자랑 결혼 생각 안 했다는 건 이해 되는데 그럼 나한테는 대체 왜 이러시는 거냐고요, 이 망할 선배놈아.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지. 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서른 될 때까지 결혼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도 했었다. 사회의 결혼적령기야 착실하게 높아지고는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쨌든 나는, 결혼을 빨리 해 안정을 찾고 싶은 생각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총각 귀신으로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가치관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지.

“형, 그때 그건 술 먹고 한 농담이나 장난 같은 거였고요. 내가 그렇다고 정말 형이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했겠냐고요. 그리고 애초에 우리 둘 다 남자라서 결혼하지도 못해요. 알아요?”

“누가 법적으로 혼인신고라도 하쟤? 나야 신고하면 좋지. 좋은데, 안 되는 건 나도 안다고. 그래도 식은 올릴 수 있잖냐. 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좋은 신랑감인데 그냥 이렇게 내쳐?”

“…와, 세상에 그런 소리를 자기 입으로 하는 사람이 진짜로 있구나. 그런데 어쩌죠, 형. 저는 형이랑 결혼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못 찾겠거든요? 아니, 그리고 대체 왜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형 진짜 진심이야?”

“그럼 내가 진심도 아닌데 프로포즈 링을 그 돈 주고 사서 내밀었겠냐? 태섭아, 난 진심이 아니면 말 안 해.”

“돌겠네, 진짜.”

대만 선배가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거부반응을 보일 거라곤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럼 설마 내가 그 자리에서 덥석 오케이하고 반지를 받아들 줄 알았던 거냐고.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정대만의 반응이 기가 막혔다. 한참 동안 질린 표정으로 선배를 쳐다보기만 하던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찬물을 컵에 가득 따르고 한 번에 꿀꺽꿀꺽 전부 들이켰다. 열불 터지는 속에 찬물이 들어가자 그나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질끈 감고 컵을 싱크대 안에 내려놓았다.

“야, 송태섭.”

“왜요.”

“너 이유를 못 찾겠다 그랬지. 그러면 너 말야, 이유 생기면 나랑 결혼할 거야?”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토라진 표정이긴 했지만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정대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벨벳 반지 케이스도. 나는 반지 케이스와 대만 선배를 번갈아 보았다.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이 생각보다 더 진지해서, 나는 대만 선배의 갑작스러운 청혼이 절대 장난만은 아니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형 진짜 진심이구나.”

“아까부터 진심이라고 했잖아.”

멀거니 대만 선배의 얼굴을 보던 나는 천천히 자리에 와 앉았다. 정대만이 어느 정도 진심이라는 걸 인식하고 나자 뜨겁게 타올라 화만 나던 머릿속이 갑자기 좀 차갑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지나치게 마음에 들지 않고 대만 선배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술김에 한 약속을 지키라며 진짜 청혼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람이 진심이라면 이쪽도 진지하게 상대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정대만은 장남의 장남의 외동아들이라고. 그런 인간이 다른 것도 아니고 일생의 무거운 이벤트 중 하나인 '결혼'을 가지고 동성인 후배한테 평생을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정대만을 내 남편으로서 고민해 줘야지 않겠냔 말이다. 그게 스포츠다. 누가 봐도 상대의 패배가 자명한 승부더라도 저쪽이 진심으로 임하는 이상 이쪽도 동급의 적수로서 진지하게 온 힘을 다해 응해주는 것이 예의인.

“그래요. 납득 갈 만 한 이유 생기면 진지하게 생각 해볼게요.”

“진짜? 그럼 나 정말로 네가 나랑 결혼해야 하는 이유 만들어 준다.”

“알았다고요.”

“송태섭 너 지금 네 입으로 똑바로 말했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거 아니다? 너 이유 생기면 진짜 나랑 결혼하는 거다? 나 각서 쓰자고 한다?”

“아오, 진짜 이 인간이 끝까지!”


그리고 나는 1월 2일 오전 6시 41분부터 어제와 똑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 짐 다 뭐예요.”

살벌하게 내뱉은 목소리에도 이른 아침부터 보라색 이사 박스며 거의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은 캐리어와 함께 들이닥친 정대만은 태평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별거 없는데. 내 옷이랑, 유니폼이랑, 속옷들, 수건들, 신발, 뭐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기타 등등. 아, 너네 집에도 농구공은 있지? 이야, 누가 보면 아주 그냥 9박10일 여행 짐 싸서 펜션 오신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걸 왜 전부 이삿짐처럼 싸 들고 우리 집에 이 시간부터 쳐들어온 거냐고!! 아침 댓바람부터 또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이유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내가.”

“그게 지금 이 꼬라지랑 무슨 상관인데요.”

“결혼의 장점을 알아야 그게 네가 결혼할 이유가 되지 않겠냐. 그러려면 최대한 실제로 결혼한 것과 비슷한 환경을 경험을 해야지. 그래야 네가 ‘아, 이게 진짜 좋은 거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걸 느끼면 좋겠다.’ 하고 허락을 해줄 거 아냐.”

“…….”

…아, 짜증 나. 진짜 짜증 나. 또 뒷목이 뻣뻣해진다. 분명 이게 궤변이고 헛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대만 선배의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자꾸 ‘그런가?’ 하는 생각이 설핏 든다. 그게 너무 짜증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짜증 나는 건 정대만에게 반박할 말을 못 찾고 있는 나 자신이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대체 나는 왜 이렇게나 허술한 정대만의 논리를 뚫어내지를 못하는 거냐고.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만 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만 선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잘생긴 얼굴 한가득 얄미운 미소가 떠오른다. 하, 진짜 딱 한 대만 치면 안 되나? 그래도 그 동안의 정을 봐서 이빨은 피해줄 테니. 내가 어떤 심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는 건지 대만 선배는 여전히 태평한 표정으로 빨개진 손끝에 입김을 후 불었다. 손 시리다.

“추운데 나 여기 계속 서 있어?”

“…짐은 형이 알아서 다 옮겨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또 때리거나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기로 했던 안 선생님과의 약속도 있고, 짜증도 화도 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대만 선배를 치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새해 벽두부터 프로농구선수 정 모 씨와 송 모 씨, 자택에서 주먹다짐… 이런 헤드라인으로 스포츠뉴스 1면을 장식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나는 그냥 몸을 홱 돌렸다. 닫히려는 현관을 대만 선배가 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 스트레스 받아……. 토할 것 같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사람을 들여놓고 대놓고 눈앞에서 구역질을 할 수는 없으니 입이라도 찬물로 헹굴 심산이었다. 침실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 불을 켜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났다. 나는 박스를 현관 안쪽으로 들여놓기 위해 발로 힘껏 밀고 있는 대만 선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 요 없는데. 소파는 형 사이즈가 안 될 테고.”

“요 없는 게 뭐?”

“하?”

“침대에서 같이 자면 되잖아.”

“미쳤어요? 내가 형이랑 왜 한 침대에서 자!”

“결혼하면 원래 같이 자.”

“우리 아직 결혼 안 했거든요?! 그리고 내 침대 슈퍼싱글 밖에 안 돼서 둘이 누울 공간도 안 나와요! 형 덩치를 좀 생각하라고요!”

“딱 붙으면 되지 않으려나?”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대만 선배는 멋대로 침실 문을 열고 방을 살피고 있었다. 워낙 선이 없는 사람인 거야 옛날부터 잘 알았지만 지금처럼 남의 집 안방을 이렇게 덥석덥석 열어젖히는 건 선이 아니라 예의범절의 문제 아니야? 기가 막혀 저지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더니 그사이 대만 선배는 눈을 찡그리며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한다. 응, 내가 너 안고 자면 좀 아슬아슬하게 딱 될 것 같다. 이야, 이거 완전 부부 같네. 그치? 누구 멋대로 사람을 안고 잔다 만다야! 절대 싫어요!

거의 게거품을 물며 발악을 했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하루이틀 정도라면 소파를 침대 대용으로 쓰는 거야 별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이 인간이 언제 다시 제집으로 돌아갈 지도 모르는 데다가, 소파는 아무리 푹신해 봤자 결국 소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독신 남성 혼자 사는 스물 다섯 평짜리 집에 뭐 얼마나 좋은 소파를 들여놨겠냐고. 오래 누워 있으면 허리가 결린다. 그리고 허리가 결리면? 농구에 지장이 간다. 그러니 송태섭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저 하나 밖에 없는 좁은 침대에 정대만과 끼어 자는 것.

결국 나는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며 베개 하나를 더 꺼내 침대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신혼 침대 같아서 오싹했다. 밖에서 대만 선배가 짐을 푸는 소리가 났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끔찍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 같았다.

2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

 

 

  

유산소도 못 하고 오전 내내 팔자에도 없는 옷장 정리를 했다. 대만 선배가 가져온 옷을 집어넣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대만은 그 커다란 해외여행용 캐리어 한가득 자기 옷들을 잔뜩 담아 왔다. 간단하게는 양말과 속옷부터 땀복과 셔츠류, 바지, 편하게 입을 맨투맨이나 후드에 코트며 점퍼며 패딩까지. 몇 일치인지 계산도 안 되는 저 많은 걸 대체 어떻게 솜씨 좋게 욱여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 인간 이렇게까지 가방을 잘 싸는 사람이었나. 끝도 없이 나와 거실 바닥에 쌓이는 옷가지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자 정대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우리 집에 살림 차릴 만반의 준비를 하셨네.”

“애초에 그런 각오로 왔다고 아까 말했잖냐.”

“형은 시즌 중에 치과 가기 싫으면 그냥 조용히 있어요.”

살벌하게 경고한 후 대만 선배가 꺼내놓은 옷가지를 종류별로 분류해 옷장이 있는 안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시작한 옷 정리가 생각보다 길어져 결국 점심까지 이어져 버렸다. 막상 넣으려고 보니 내 옷만으로도 공간이 거의 차 있던 터라 옷장을 일부 비워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입는 겨울옷 뿐만 아니라 여름옷까지 꺼내 본 후 안 입는 건 싹 버렸다. 최대한 옷의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개어 넣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는 대만 선배의 옷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나마 나머지는 전부 옷장에 넣을 수 있었지만 겉옷과 셔츠들은 남은 옷걸이가 몇 개 없어 일단 빨래 건조대에 대충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이따가 훈련 끝나고 마트에서 옷걸이 사 올게요. 계속 일어났다 앉았다 한 덕에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말하자 대만 선배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짐 쌀 때는 이렇게까지 많을 줄 몰랐는데……. 웃기고 있네, 누가 봐도 옷장 한 채 통으로 털어온 수준이라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양이더만. 잔뜩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이미 반쯤 소모된 체력에 물고 늘어지며 입씨름을 하기에도 지쳐 그냥 힘껏 째려보는 정도로 끝냈다.


시즌 중에도 훈련은 계속된다. 특히 이번 주처럼 주말과 평일 경기의 텀이 길 경우에는 더더욱. 휴식을 취할 시간은 당연히 주지만 경기가 없는 날이면 단체 훈련이 있다. 지난번 경기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다음 경기에 필요한 전략, 전술의 합을 연습한다. 컨디션을 관리해야 하니 강도를 높이지는 않지만 긴장감을 유지할 정도로는 충분히 몸을 쓴다. 그래서 새벽에 유산소를 하고 와서 오전에는 푹 쉬고 오후부터 있을 훈련에 가려고 했던 건데 쉬기는커녕 정대만 때문에 괜한 힘이나 잔뜩 써 버렸다. 안 그래도 빡빡한 경기 일정 때문에 시즌 중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도 힘든데 정말 모처럼의 꿀 같은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고. 그뿐이랴? 옷장 문을 닫고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12시라서, 점심은 대강 있는 걸로 먹어야 했다. 옷 정리 때문에 시간이 늦어 뭔가 더 요리하거나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는 닭가슴살이라도 좀 구우려 했는데 그걸 굽다가는 내가 감독님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구워질 게 뻔해 얌전히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있는 걸로 운동선수 두 사람이 끼니를 해결하느라 남아 있던 반찬도 순식간에 거덜 났다. 이거 옷걸이가 문제가 아닌데. 훈련이 끝나고 장까지 볼 수 있을지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시간이야 대충 되기는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예상 못한 스케줄이 덜컥 생기는 건 절대 달갑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동선을 짜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설거지를 하는 대만 선배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까 형네 구단 연습장 여기서 1시간 거리 아니에요? XX구라고 들었던 것 같아서.”

“어, XX구 맞아. 1시간……. 그러네, 대충 그쯤 걸리겠네.”

“형네 집에서는?”

“차로 15분에서 20분?”

형 진짜 돌았지? 또 험한 소리가 튀어 나간다. 연습장이 자택에서 가까운 건 큰 이점이다. 불필요한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까. 그만큼 운전하는 피로도도 줄고 개인 운동이나 병원 진료, 휴식 등 자기 몸을 관리할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대만은 그 이점을 포기했다. 매물이나 전세금 같은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거리가 있는 집을 얻은 경우도 아니고, 고작 나랑 같잖은 신혼 놀이를 하겠다고 내 집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프로 선수가 돼서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험한 소리가 안 나갈 수가 없다. 마지막 그릇을 건조대에 올려놓고 물을 끈 대만 선배가 손을 닦으며 말했다.

“시간 그만큼 늘어날 거 알고 들어온 거야. 운동을 몇 년을 했는데 시간 관리 생각도 안 했겠냐.”

“형은 멀쩡하다가 꼭 이상한 곳에서 멍청하게 구니까 그렇죠.”

“남편 될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다, 송태섭.”

“짐 다시 들고 나가.”

이 와중에 저런 장난을 칠 생각이 든다고? 진짜 정대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운동 가방과 패딩을 챙겨 들었다. 집합 시간이 빨라서 먼저 갑니다. 형도 훈련 잘 다녀오시고요. 예의상 인사를 하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는데 부엌에서 몸을 내민 대만 선배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일부러 꾸며낸 게 분명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런다. 잘 다녀와, 자기야. 아악! 저놈의 주둥이 진짜!

대만 선배가 박장대소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현관을 닫으며 나는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속에 애꿎은 머리카락만 잔뜩 쥐어뜯었다. 치고 싶다, 정말 격하게 한 대만 치고 싶다. 따악 한 대만 치면 이 끓는 게 좀 풀릴 것 같은데 진짜 치면 안 되나? 어? 이런 속 터지는 게 정대만과의 결혼이라면 절대로 하기 싫었다.


훈련이 끝나고 대형마트에 들러 장을 잔뜩 봤다. 먹을 입이 둘이니 평소에 사던 양의 두 배를 카트에 담았다. 겸사겸사 생필품도 조금씩 더 샀다. 샴푸라던가, 바디워시라던가, 치약이나 휴지 같은. 그렇게 담다 보니 어느새 카트가 꽉 차 버렸다. 아슬아슬하게 올려진 6개들이 곽 휴지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무슨 도매상도 아니고……. 집에 있는 가장 넓은 장바구니를 가져왔는데도 공간이 부족해 일회용 봉투를 석 장이나 더 사야 했다. 장 본 것을 다 싣고 보니 트렁크도 꽉 찼다.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주소록에서 이름을 찾아 누르자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태섭아. 목소리에 기계음이 섞여 울리는 걸 보니 운전 중에 블루투스로 받은 모양이었다.

“어디에요?”

“집 거의 다 왔어. 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

“잘됐네. 그럼 조금 이따가 내가 전화하면 주차장으로 좀 내려와요.”

“왜? 차에 뭐 있어?”

“어, 장 봤는데 짐이 산더미라. 혼자 한 번에 못 들고 가서요.”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해.”

전화를 끊고 트렁크 문을 닫았다. 본인 때문에 산 거니 짐꾼으로 쏠쏠히 부려 먹어야지. 우유며 샴푸 같은 액체류가 잔뜩 담긴 가장 무거운 바구니를 들려줄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대만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곧바로 내려온 사람에게 짐을 잔뜩 들려 보내고, 집에 들어와서는 장바구니 정리를 같이 했다. 생필품을 창고와 세탁실 등에 나누어 놓게 시키고 이것저것 나온 쓰레기들을 버리고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선배가 요리를 잘 못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녁 준비는 내가 했다. 그 사이에 놀고 있지 말고 청소나 하라고 청소기와 걸레를 쥐여주었다. 전기밥솥의 칙칙대는 소리를 들으며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자니 나 뭔가 너무 신혼 생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 갔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이건 신혼 생활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생긴 막무가내 동거인을 효과적으로 써먹는 방법일 뿐이라고 되뇌면서. 아, 맞다. 오늘 장 본 거 돈 반절 내라고 해야지. 저녁 먹고 나서는 정대만이 여기 있는 동안 받아낼 생활비가 얼마나 될지도 계산을 한 번 해봐야겠다.


식탁에 다시 둘러앉은 건 8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점심도 시간에 쫓겨 대강 먹었다 보니 둘 다 잔뜩 굶주린 상태였다. 잘 먹겠다 어쩐다 하는 말도 없이 서로 일단 밥부터 퍼먹었다. 한 솥 끓인 찌개가 쑥쑥 줄어들 무렵, 갑자기 대만 선배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이 정도면 나 괜찮은 신랑감 아니냐?”

콜록. 갑자기 들려온 말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기도로 넘어갈 뻔한 음식물을 겨우 갈무리하고 제대로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시선을 들자, 밥을 먹다 말고 진지한 얼굴로 턱을 괸 대만 선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아까 집안일 잘 돕지 않았냐? 너한테 잘 보이려고 여기서만 그러는 거 아니야. 나 본가에서도 잘 하고, 우리 집도 와 보면 엄청 깨끗해. 본가 가면 내가 아예 쓰레기랑 청소 담당이야. 아, 쓰레기는 재활용이랑 음식물 다 해당이다. 분리수거 꼼꼼하게 잘한다고 경비 아저씨한테 칭찬도 받았었어. 나랑 결혼하면 이런 건 문제 없다, 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잃었다 쪽에 더 가까우려나. 이 인간은 무슨 이런 걸 자신의 장점으로 어필하는 거지. 보통 나랑 결혼하면 뭐가 좋다는 발언에는 좀 더 거창한 게 붙지 않나? 널 행복하게 해주겠다던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던가, 몇 억짜리 재산이 공동명의가 될 거라던가 뭐 그런 거. 그런데 자기랑 결혼하면 좋은 이유가 자기가 쓰레기를 잘 버리고 집안일을 잘 해서란다. 내가 지금 가사 도우미 들이냐? 이 양반이 의외로 깔끔 떠는 성격인 걸 모르진 않는다. 고등학생 때 연습이 끝나고 어질러진 체육관 정리에 제일 열을 올렸던 것도 대만 선배였고 백호를 볼 때마다 락커 정리 좀 깔끔하게 하라고 잔소리를 하던 것도 대만 선배였으니까. 물론 그런 말 할 자격이 충분하게 자기 락커도 깔끔하게 정리해 놨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혼? 이건 아니다. 그리고 집안일 할 일손이 필요해서 결혼한다는 것도 우습잖아? 미국 생활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농구도 잘 했다. 물을 마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만 선배의 말을 기각했다.

“내 자취 경력이 형의 두 배는 되는 거 알죠? 그건 내가 형보다 더 잘 해요. 형이랑 결혼해도 딱히 이득은 안 될 듯.”

그 말을 들은 대만 선배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얼굴 위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제부터 생각하는 건데 정대만 진짜 가지가지 골 때린다. 왜 내가 자기가 하는 말에 당연히 혹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콧방귀를 끼고 다시 밥을 퍼먹는 나와 달리 대만 선배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인터넷에 그런 썰 돌았잖아. 부부 싸움 하다가 배우자가 잘생겨서 얼굴 보니까 화 풀려서 싸움 질 뻔했다고. 그러니까 너도 기분 안 좋은 날 있으면 내 얼굴 보기만 해도 싹 풀리지 않겠냐. 응? 이런 이유는 어때.”

“나 지금 형 얼굴 볼 때마다 옐로카드 2장씩 적립하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요.”

살벌한 목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척수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얼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정대만이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인 건 인정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미적 기준에는 태웅이보다 대만 선배 쪽이 좀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그건 연예인 얼굴 보는 그런 느낌인 거지, 내가 저 얼굴 옆에 둬서 대체 뭐에 써먹겠냐고?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대만 선배의 얼굴이 나의 화를 풀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로 이딴 헛소리나 해대는 바람에 사람 뒷목 잡게 만든 경우가 더 많지. 차라리 얼굴이 아니라 농구로 어필했으면 조금 고려하는 척이라도 해줬다. 헛소리 좀 작작 하라는 의도를 가득 담아 눈만 들어 사납게 노려보자 대만 선배가 깨갱거리듯 어깨를 움츠렸다. 물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얌전히 같이 밥을 먹기 시작한다. 한결 조용해진 식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잊고 있었다. 정대만이 누군가. 자칭 ‘포기를 모르는 남자’ 아닌가. 대만 선배는 조금 전에 내가 날린 눈빛에도 전혀 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 하나 더 생각났는데.”

“또 쓸데없는 거 말하려고 그러죠.”

“그……. 크흠. 보통 결혼에는……. 음, 그러니까 그것도 꽤 중요하다고 하잖냐. 이거 내 입으로 말하기 좀 쑥스럽긴 한데, 나 어디 가서 못 한단 얘기는 안 들어봤다.”

뭐가 중요한데? 그리고 정대만은 뭘 못 한단 얘기를 안 들은 건데? 문장에 핵심 단어가 없어 대만 선배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가지 않아 멍하니 의아한 얼굴만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에 스쳐간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략된 주어를 깨달아 버린 나는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나동그라지든 말든 곧장 화장실로 달려들어 가 물을 틀고 귀를 씻었다. 미쳤나, 진짜?? 정대만 진짜 돌았어? 사람이 완전히 미친 거야?? 나한테 그런 소리를 왜 하는데!! 어?! 비누 거품까지 풍성하게 내어 아주 귓바퀴 주름 하나하나까지 다 빡빡 닦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며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씨발, 형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 봐요!!! 알았어?! 진짜 거기 잘라버릴 줄 알아!!”


저녁 식사 시간에 그딴 폭탄 같은 발언을 듣고도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죽을상을 하고 베개가 두 개 놓인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의 포근한 보금자리였던 곳이 지금은 거의 뭐 지옥 불 밑바닥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정말 여기서 정대만이랑 같이 자야 한다는 거지. 나한테 다짜고짜 청혼을 하고 자기가 그 짓거리를 잘한다 어쩐다 하는 충격적인 소리까지 해 댄 ‘남자’와 같이 살을 부대끼고. 제기랄……. 나이를 서른이나 먹고 갑자기 정조의 위협을 느끼게 될 줄이야.

뭐야, 왜 그러고 서 있어? 교대로 씻고 나온 대만 선배가 물기가 조금 덜 닦인 얼굴로 화장대 앞에 가 섰다. 건너편 방의 이사 박스에서 꺼내온 자기 스킨로션을 열어 손에 덜어낸다. 그 쿨한 향을 맡고 있으니 아주 오래 전의 흐릿한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실 때, 자기 전에 지나치며 잠깐 들여다보곤 했던 안방의 풍경. 하늘이 어두워지고 짧은 시곗바늘이 10을 넘어갈 때면 엄마는 이부자리를 펴고 아버지는 지금의 대만 선배처럼 편한 차림새로 화장품을 바르셨다. 그러면서 두 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버지의 뱃일이나 우리 삼남매의 일상, 주변 이웃의 소식과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누며 웃고 화내고 안타까워하고 즐거워했다. 그런 결혼의 풍경이 내 기억 속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함께하고 일상의 이야기를 편하게 주고받으며 한 이불을 덮는 부부의 모습, 어떤 때는 조금 급하게 닫히던 방문까지. 그리고 그 장면의 일부를 지금 대만 선배와 같이 재현하고 있다는 게 내 기분을 굉장히 이상하게 만들었다.

“안 자냐? 내일은 너 경기 있잖아. 일찍 자고 쉬어야지. 불 끄고 와.”

어느새 침대 왼쪽에 자리를 잡은 대만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보고 누운 자세로 반쯤 남은 공간을 팡팡 쳤다. 안 잡아먹으니까 얼른 와. 너 안 건드려. 저녁 때 내가 비명을 지르며 잘라버리네 뭐네 했던 것 때문에 쉽게 눕지 않고 서 있는 줄 아는지 목소리가 슬금 움츠러든다.

결국 한숨을 쉬고 불을 끄고 와 대만 선배가 만들어준 자리에 누웠다. 혼자서 넉넉하게 누울 수 있었던 공간이 사람이 하나 더 들어오니 꽉 차서 좁았다. 대만 선배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침대 끝에 걸려 있던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항할 틈도 없이 딸려간 등이 대만 선배의 가슴에 닿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놀란 몸이 굳어드는 걸 분명 느꼈을 텐데도 대만 선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불을 고쳐 덮어 주며 잘 자라는 밤 인사만 남길 뿐이었다. 조금 뒤, 등 뒤에서는 잠에 빠진 남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태평한 정대만과는 달리 새벽이 깊어가도록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3

이 남자가 신혼을 보내려는 방법

 

 

  

굿─모─닝─

진동과 함께 울리는 벨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몇 년 동안 듣고 있는 익숙한 알람이었다. 침대 옆, 화장대 위에서 액정이 하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한 번 비빈 후 알람을 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뒤에서 기다란 것이 불쑥 튀어나와 빛나는 것을 먼저 집어 들었다. 방 안을 시끄럽게 울리던 벨소리가 뚝 멎었다. 5시 반……. 잠기운이 덜 가신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시간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이 집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인식했다. 맞다, 그랬지. 어제 정대만이 다짜고짜 짐을 싸 들고 쳐들어왔었지. 결혼 분위기를 낸다 어쩐다 하면서, 내 침대까지 침범하고. 새삼스럽게 다른 사람의 존재가 등 뒤에서 크게 느껴졌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다시 화장대 위에 올려졌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대만 선배가 다시 몸을 침대에 눕혔다.

“너 일찍 일어나네.”

난 6시에 맞춰 놓는데. 대만 선배가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아, 졸려. 춥고 어두워서 일어나기 싫다. 웅얼대며 투정 부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졸린 머리를 비비고 있을 게 굳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의외로 아침에 약하네. 그러고 보니 인터하이와 윈터컵 합숙 때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2년을 쉬면서 부족해진 체력에 훈련이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원래 그런 거였냐, 이 사람. 인터하이 끝나고는 5시 반부터 나와서 연습하길래 원래부터 아침형 인간인 줄 알았지. 10년을 넘게 알아 온 지인인데도 처음 보는 모습이 있다는 건 또 새롭다. 하긴, 같은 팀에서 함께 생활을 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정말 오래된 일이니 여즉 모르는 게 있는 게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새로운 모습을 보니 똑같이 아침에 약한 여동생이 생각나서 조금 귀엽기도 했…….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기겁을 한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대만이 귀엽다니 그런 징그러운 생각은 하지도 마라, 송태섭! 정신 차려! 저 인간은……. 저 인간은 그냥 막무가내인 바보 멍청이라고. 전혀 귀엽게 볼 무언가가 아니란 말야. 저 인간 때문에 잠자리 불편해지는 바람에 어제 한 시 넘어서 겨우 잠든 거 잊었냐?

아침 댓바람부터 드는 이상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이불을 걷어냈다. 체온으로 잘 데워진 이불 안쪽과 달리 밤새 온기가 식은 방 안은 절로 몸서리치게 될 만큼 서늘했다. 으, 얼어붙는 몸에 어깨를 한 번 움츠리며 잠옷 위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일어나게? 대만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졸리다. 잠기운이 덜 가신 혼잣말이 한 번 더 따라붙는다.

“형은 그럼 30분 더 자요. 좀 이따 깨워줄게.”

그렇게 말하자, 끄으응, 긴 신음이 이어졌다. 한숨을 내쉰 대만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너 일어났는데 나만 자고 있으면 되겠냐……. 일어나야지, 나도. 내가 일어난 것과 자기가 원래 스케줄대로 30분 더 자는 게 무슨 상관인 건지 싶었지만, 일어나겠다고 하는 걸 굳이 또 억지로 재울 생각은 없어서 그냥 두었다. 자던 사람들이 다 일어났으니 침대에서 내려와 방의 불을 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쑥 다가온 두꺼운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ㅁ, 뭔. 순식간에 밀착된 뜨뜻한 몸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쪽, 말캉한 것이 뺨에 닿았다 떨어지며 숨결 섞인 말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지는데……. 굿 모닝. 잘 잤어?

“으아아악!! 미친, 정대만!!!”

내가 목청껏 내지른 비명이 수탉의 울음소리 대신 아파트 단지의 아침을 알렸다.


비시즌 휴가 때 1, 2주 정도 본가에서 가족들과 지내는 것 외에는 항상 혼자 생활했으니 누군가와 같이 아침을 먹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아침부터 누군가와 생난리를 치는 건 더더욱 오랜만이었고. 불도 안 켠 방에서 등을 신나게 얻어맞은 대만 선배는 아까부터 계속 부루퉁한 얼굴로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밥만 먹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 같이 아침을 먹으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 나이는 서른 넘게 먹어서는, 애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맞을 만한 짓을 먼저 한 건 저쪽이잖아.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하냐고요, 우리가 뭔 사이라고. 예?

…하지만 밥을 먹으면서 좀 생각해보니 이쪽도 너무 때리긴 한 것 같다. 뽀뽀는 한 번인데 나는 왜 열 대씩이나 얻어맞아야 하냐며 진심으로 억울해 하던 목소리는 기가 막혔지만, 밝은 데서 본 등의 맨살이 시뻘게져 있었던 건 약간 미안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정대만이 삐지는 바람에 세상에서 가장 편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이 괜히 껄끄럽고 불편한 분위기에 감싸이는 것도 싫었고. 뽀뽀를 한 쪽도 아니고 당한 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색해지는 게 싫은 쪽이 먼저 지는 거지, 뭐. 그래서 일부러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만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형 아침 운동 갈 거예요?”

“어.”

1초 만에 돌아오는 단답. 그래도 대답이라도 해주는 게 다행인가. 아예 얘기하기 싫단 건 아니니.

“그럼 같이 뛰러 갈래요?”

“…….”

대만 선배가 스윽 눈만 밀어 올린다.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 같다 싶더니 대답 없이 다시 눈이 내려갔다. 찌개 국물을 한 숟갈 뜨며 딱딱하게 대답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확 가라앉아 툭 내뱉어지는 목소리. 그리고 묵묵히 밥만 먹는 입. 아, 글렀네. 저거 대차게 삐졌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정도로 저기압인 정대만은 잘 풀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식도록 며칠 내버려 두거나 다른 방식으로 달래서 기분을 풀어주지 않는 이상은. 이쯤 되자 나도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거 저기압이 되어야 할 건 정대만이 아니라 내 쪽 아니야? 한나한테도 결국 못 받아 본 뽀뽀를 웬 다른 인간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받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샐러드를 퍼먹던 포크를 탕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니, 얻어맞은 거 그냥 멋대로 뽀뽀한 죗값 치렀다 생각하면 되지 삐지긴 왜 삐져요? 좀생이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리고 그거, 어? 나니까 받아줬지 다른 사람한테 막 하면 성희롱이에요!”

그랬더니 대만 선배가 곧바로 홱 고개를 들었다. 속상함과 억울함이 잔뜩 담긴 얼굴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빽 소리를 지른다.

“그래, 나 좀생이다! 그리고 뭐? 성희롱? 야, 말 다 했냐? 내가 남편 될 사람한테 뽀뽀도 못하냐!”

“그러니까 우리 결혼 아직 안 했다고! 거기다 나 형이랑 결혼한단 소리도 안 했거든요?!”

“결혼한 환경 연출하러 들어왔다고 했잖아! 그럼 좀 맞춰! 손뼉도 합이 맞아야 치지!”

“아오씨, 진짜 그놈의 결혼, 결혼, 결혼! 결혼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래, 이 귀신아, 뽀뽀 해라, 해!! 맘껏 하라고요!! 됐냐!!”

꽥 소리를 지르자 정대만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대만 선배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눈을 내리고 샐러드만 퍼먹으며 무시하기 시작하자 허, 기막혀 하는 숨을 턱 내뱉었다. 미동 없이 한참 이쪽만 노려보던 대만 선배가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드는 소리가 들렸다. 차린 걸 다 먹어 치우는 내내 불편한 공기가 식탁을 가득 메웠다. 망할, 체할 것 같아. 명치께를 툭툭 두드렸다.

이대로 나가면 위경련이 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운동을 거를 수는 없었다. 학생 때부터 계속해 온 루틴은 이제 하루라도 뺄 수 없는 일상이 되었으니까. 뛰는 건 당연히 힘들다. 가벼운 조깅도 아니고 인터벌로 몇 km를 뛰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있나. 또 속도에 익숙해져 감당해질 만 하면 일부러 강도를 높인다. 그래야 몸이 유지가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렇다. 운동선수의 끝없는 자기 단련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단련을 넘어 아침 러닝을 쉬면 몸이 하루종일 찌뿌둥할 지경이 되었다.

“운동 다녀옵니다.”

겨울에는 밖에서 뛰지는 못한다. 안 그래도 추운데 긴 밤 동안 열기가 전부 식어버린 아침은 더 춥고, 나는 추위를 또 심하게 타니까. 나가기만 해도 몸이 금방 굳는다. 그래서 겨울 한정으로 24시간 운영을 하는 집 근처의 헬스장 이용권을 3개월 치 끊었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들이 담긴 작은 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아침부터 한바탕 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거인이니 나간다는 인사는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건넛방에서 이사 박스를 뒤지는 사람한테서 돌아오는 답은 없다. 성격 하고는……. 혀를 한 번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관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러나 손잡이를 돌려 문을 막 밀어젖힌 순간,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뒤에서 내 어깨를 다소 억세게 잡아챘다. 으억. 저항할 틈도 없이 몸이 뒤로 쏠렸다. 탕, 미는 힘을 잃은 현관이 눈앞에서 다시 닫혔다. 또 뭔데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부어 있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덜 한 얼굴의 대만 선배가 서 있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대만 선배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쪽. 뺨에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뽀뽀 네가 해도 된다고 했다. 네가 먼저 맘껏 하라고 했어. 또 때리지 마라.”

그러더니 곧장 변명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다급한 문장 속에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거 진짜 웃긴 양반일세. 아무리 내가 말을 했다 해도, 홧김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건데 그렇다고 그걸 진짜로 하냐? 게다가 했으면 한 거지 또 내 핑계 대면서 때리지 말라고 하는 건 뭐야. 이러니까 좀생이 소리를 듣지. 짜증이 치밀어 한 마디를 해주려고 했는데, 대만 선배의 뒤이은 말에 입은 열지도 못하고 그냥 멈춰버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때도 추위는 그렇게 탔으면서 목도리도 하나 없이 가냐. 앞도 안 여미고. 너 이러면 감기 걸려.”

짜증과 신경질이 가득 담겨 있던 식사 때와는 180도 다른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헬스장이 가까운 걸 믿고 앞을 잠그지 않은 패딩의 지퍼를 대신 채워주는 섬세한 손. 나를 챙겨주는 손길에도 걱정해 주는 목소리에도 장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퍼를 목 끝까지 쭈욱 올리고 패딩에 달린 모자까지 씌워주더니 이번에는 그 모자 위에 한 번 더 입술이 내려앉았다. 운동 잘 다녀와. 게다가 살갑게 배웅하며 현관을 열어주기까지.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적응하지 못해 삐걱거리며 복도로 나와서도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게 뭐지? 이게 다 뭐야? 왜 대만 선배가 이렇게까지 해? 기겁하며 바락거리는 내 반응을 즐기려고 일부러 다정하게 굴며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를 챙겨주고 싶어서 챙겨주는 것 같은 태도였잖아, 방금. 물론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부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런 건 연출도 놀림도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 같잖아?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위장이 뻐근하게 당겨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혼란이 날 덮쳤다.


음악을 들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발을 반복해서 옮긴다는 단순한 행위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트레드밀의 속도를 10으로 올려놓고 5분씩 뛰어도 대만 선배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포시 내려앉던 입술이나 지퍼를 붙잡던 손이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결국 계획에도 없던 웨이트까지 조금 해버렸다. 머신이 정대만 머리채라도 되는 것처럼 콱콱 붙잡아 내리며 삼두를 자극하다가 또 그 인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결국 탕, 손을 놔 버렸다. 오늘 경기라 힘 너무 많이 빼면 안 되는데. 젠장, 이게 다 정대만 때문이야.

운동을 마치고 왔더니 집이 비어 있었다. 식탁에는 수첩을 급하게 찢어 만든 쪽지가 한 장. 집에 택배 와 있대서 가지러 간다. 집에서 점심 먹고 바로 연습장 넘어갈 거야. 경기 잘 해. 이따 보자. 다 읽은 쪽지를 접어서 버리며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속이 복잡한 차에 얼굴을 마주하지 않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이쯤 되니 저쪽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느낌이 풀풀 나서 그게 더 신경이 쓰인달까. 하여간 이래저래 편치만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뽀뽀 같은 거 그냥 자기가 처음부터 안 했으면 됐잖아. 왜 둘 다 불편할 자리를 만드냐고요. 괜히 입술이 닿았었던 부분만 벅벅 문질렀다.


오늘 경기는 지난 주말 이후로 4일 만이었다. 팀메이트들은 3일 동안 푹 쉬었는지 쌩쌩한 몸 상태를 자랑했고, 내 컨디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제 대만 선배 때문에 늦게 잠든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경기가 시작하고 긴장감과 흥분에 아드레날린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금방 사라질 것을 알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늘의 상대와는 1승 차로 순위가 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에 진다면 그대로 순위가 뒤바뀐다. 아직 정규리그가 끝날 때까지 기간이야 충분히 남아 있어 크게 유의미한 순위 변동은 아니었지만 위로 더 올라갈 기회를 굳히려면 승리를 거둬 미리 쐐기를 박아두는 편이 좋았다. 잘 해야지. 선발 출전을 위해 몸을 풀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주먹을 두세 번 쥐었다.

순위를 빼앗기기 싫은 건 모두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독이 바짝 오른 채 높은 집중력으로 경기를 치렀다. 패스 미스도 거의 없었고 공을 받은 사람마다 득점 기회가 올 때면 빠른 판단으로 림을 노렸다. 경기의 느낌이 좋았다. 원래도 좋아하는 농구가 더 좋아지고 즐거워지는, 그래서 더 순수하게 집중하게 되는 감각. 몰입을 하다못해 내가 농구가 되는 것 같은 일체감. 3쿼터가 끝나고 확신했다. 이 경기, 무조건 이긴다.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을 때 전광판에 뜬 결과는 72 : 85로 역시나 이쪽의 승리였다. 한 데 모인 팀원들과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느꼈다. 긴장과 흥분과 행복이 함께하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 아, 역시 나 농구가 좋아.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경기를 마친 뒤 쿨다운을 하던 중이었다. 오늘 스타팅으로 뛴 센터의 하체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있던 후배 한 명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태섭이 형. 그러고 보니 아까 대만이 형 오신 것 같던데요.”

“뭐? 누가 왔다고? 정대만?”

발목을 돌리다 말고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와? 정대만이? 여기까지? 미간이 절로 찡그려진다. 경기 시작이 저녁인 것을 생각하면 훈련 끝나고 식사 하자마자 바로 넘어왔을 게 뻔했다. 대만 선배네 연습장이 여기 근처니까 보러 오는 것 자체는 그렇다 쳐도, 문제는 내 집에서는 여기가 족히 한 시간이라는 거지. 이 늦은 시간에 경기 다 보고 한 시간 운전까지 하면, 집 들어가면 대체 몇 시야? 진작에 들어가서 얌전히 체력 보존하고 쉬기나 하지 여긴 뭐 하러 얼쩡거리냐고. 시즌 중에 코치진도 아니고 현역 선수가 다른 팀의 경기를 보러 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보더라도 보통 TV로 보지 직관은 안 하잖아.

“네, 아까 2쿼터 끝나고 관중석 맨 뒤에 계신 거 봤어요. 캡 쓰고 계시긴 했는데 뭐 워낙 이래저래 튀시니까.”

“진짜 어이가 없네. 그 형은 여긴 왜 왔대, 내일 자기네 팀 경기면서.”

“글쎄요. 직관하면서 전술이라도 빼내러 오셨나.”

그 팀 주장이시잖아요. 후배의 농담에 주변에서 너털웃음이 터진다.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주장인 양반이!! 팀원들에게 모범은 못 보일망정. 어? 매번 형이네 뭐네 하면서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으면서, 꼭 이런 중요한 일들은 한 소리 들을 짓만 골라 하지. 저쪽 감독님에게 감독님네 주장이 컨디션 관리는 안 하고 돌아다니기나 한다고 다 일러바칠까 보다.

쿨다운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어, 태섭아. 신호음이 두 번도 가지 않았는데 느긋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형 여기 왔었다면서요. 인사고 뭐고 다 생략한 채 용건부터 지르자 휴대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닌데? 나 아까부터 집이었는데? 어색하게 한 톤 높아진 목소리. 웃기고 있네, 집은 무슨 집. 정대만이 일부러 태연한 척 하는 말투야 잘 안다. 그것도 지나치게.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목격자 확보했으니까 구라치지 마라. 서늘하게 말하자 한참 만에 쩝,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넘어온다. 에이씨, 안 들키려고 했는데. 안 들킬 걸 안 들켜야죠, 농구판이 넓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맨 뒤에 앉았는데. 시끄럽고, 들어가는 중이에요? 아니, 주차장. 너 기다리는 중. 돌았나, 경기 다 봤으면 빨리 들어가서 쉬기나 하지 사람은 왜 기다려. 그러니까 빨리 나와, 나 너 픽업하고 얼른 들어가서 쉬게. ……금방 나가니까 기다려요. 팀원들에게는 따로 들어가겠다고 전하고 가방을 챙겨 라커룸을 나섰다.

늦게까지 남아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잠깐 인사를 하고 대만 선배의 차를 찾았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걸 발견한 모양인지 한쪽 구석에서 빵 소리가 났다. 공회전하고 있던 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자 미리 히터를 틀어둔 건지 따뜻한 온기가 훅 끼쳤다. 엉덩이에 닿는 의자의 열선도 잘 데워져 있었다. 사람 온다고 미리 해놓은 건가. 운전석을 돌아보자 대만 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기어를 내렸다. 곧이어 부드럽게 출발한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왜 왔어요?”

“너 데리러 왔지.”

“뭘 데리러 와요. 팀 버스 타고 연습장까지 가면 혼자서도 다 들어갈 수 있는데. 게다가 내일은 형이 경기잖아. 컨디션 관리하려면 쉬어야죠.”

“경기장 먼 것도 아니고 여기 잠깐 나온다고 해서 크게 영향 미치지도 않아.”

그리고 너, 여기랑 붙으면 다른 팀이랑 경기할 때보다 더 힘들어하잖냐. 이 팀 가드가 특히 장신이라서. 그런 걸 아는데 네가 혼자 오라고 둘 수가 있겠냐. 데리러 오고 싶지. 대만 선배가 나직하게 뱉은 말에 나는 운전석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대만 선배의 옆모습을 멀거니 쳐다 보았다.

대만 선배의 말대로 오늘 상대한 팀의 가드는 국내에서 뛰는 가드들 중에 키가 제일 컸다. 그만큼 체격도 좋은 편이라 맞상대를 할 때마다 미국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 선수들을 상대했던 경험이 풍부한 것과는 별개로 내가 단단히 각오하고 쏟아야 하는 체력도 정신력도 상당해서, 이 팀과 붙을 때면 늘 평소보다 더 지쳐서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팀도 아니고 해당 선수의 팀 소속도 아닌 대만 선배가 그걸 알고 있다고. 원래도 의외의 부분에서 눈치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이런 것까지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나는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뒷목을 긁었다.

“…형이 그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너에 대한 건 다 알아. 네가 어떤 플레이를 즐겨하는지, 페이크를 치기 전에 어떤 눈빛을 하는지, 경기가 잘 안 풀릴 때 얼마나 눈썹이 찌푸려지는지, 네가 던진 패스가 골로 연결되면 얼마나 환한 표정을 짓는지 그런 거 전부 다 알아. 나한테는 다 보이니까.”

그러니까 나랑 있을 땐 굳이 숨길 필요 없어.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지치면 지친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차 안에 울리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눈물겹게 다정했다. 이 사람,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었나. 괜히 온몸이 간질거려 애꿎은 손등만 벅벅 긁었다. 그러다 피부 까진다. 이건 또 언제 봤는지 나를 타박하며 조수석을 잠시 돌아 본 대만 선배가 눈을 찡긋했다. 남편 좋다는 게 뭐냐. 나 괜찮은 신랑감 맞지? 아까 전의 진지함은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장난스러워진 어투에 나는 결국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잘 가다가 초 한 번씩 안 치면 죽는 병이라도 있나.”

4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

“가기 싫어.”

“자꾸 헛소리 하죠?”

오전부터 또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유는 당연히 오늘도 정대만. 아니, 프로 생활이 몇 년인데 지방 원정 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짐을 다 싸놓은 더플백을 옆에 둔 채 소파에 누워서 시위하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지기 직전이다. 어쨌든 본인도 가야 하는 건 아니까 짐은 다 싸기는 싼 거잖아. 그런데 왜 나가기 직전에 또 이러냐고. 진짜 이거 올해 서른하나 맞아? 알고 보니 열세 살인 거 아님?

“지금 안 나가면 집합 시간 늦어요.”

“…….”

“한 대 맞고 기분 잡친 채로 갈래, 아니면 그냥 순순히 갈래.”

“뽀뽀해줘.”

뽀뽀해주면 얌전히 갈게. 하? 갑자기 튀어나온 소리에 잔뜩 인상을 쓰고 쳐다보니 대만 선배가 자기 뺨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하루 자고 와야 하니까 내일 밤까지 못 보잖아. 우리는 아침에 올라와서 바로 연습장 갈 테고, 너는 내일도 경기 있고. 그게 그놈의 뽀뽀랑 뭔 상관인데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절로 튀어 나갔다.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올려다본 대만 선배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눈썹을 찌푸린다. 내일 밤까지 계속 못 볼 텐데, 그 긴 시간 잘 참고 기다리라는 뭐 그런 응원인 거지. 그걸 내가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돼? 좀 눈치 있게 알아들어라.

“고작 하루잖아요. 나 안 보는 게 뭐가 그렇게 큰 대수라고.”

“내가 정대만 예비 남편 보고 싶어 하는 게 대수가 아니면 뭔데.”

“아오씨, 형이랑 결혼한다는 말 아직 안 했잖아! 왜 자꾸 기정사실화 시키는데!”

“아, 몰라, 몰라. 하여튼 네가 뽀뽀 안 해주면 나 집합 안 가.”

“자꾸 이딴 식으로 애처럼 굴면 나 형네 감독님한테 전화해요. 그 팀 주장이 자꾸 개소리하면서 원정 안 간다고 떼쓴다고, 이런 선수 그냥 방출시키라고 말할 거야.”

딱딱하고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으니 다시 머리를 눕힌 대만 선배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저거 저거 눈 굴러가는 소리 나는 거 보소. 본인도 억지 부리고 있다는 인식은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곧장 일어나서 가방을 챙겨 들 줄 알았는데 정말로 뽀뽀를 안 받는 이상 안 나갈 셈인지 대만 선배는 계속 미동도 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올라오는 열을 주체할 수 없어 또 한숨이 팍 터졌다. 시계를 보니 이제는 정말 정대만이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각이다. 저거 진짜 빨리 내보내야 하는데.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짜증도 함께. 가야 하는 건 저 인간인데 왜 초조하게 애타는 게 내 쪽이어야 하냐고! 이거 입장이 너무 뒤바뀐 거 아니야?

“아, 진짜!”

발을 신경질적으로 쾅쾅 구르며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눈썹을 밀어 올리는 정대만의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딱 한 번만이에요. 다음 원정 때도 이러면 그땐 진짜 얄짤 없어. 내가 형 엉덩이를 걷어차든 그쪽 감독님한테 이르든 집 문을 잠가 놓고 처음부터 못 들어오게 하든, 어떻게든 쫓아낼 줄 알아. 그 말을 들은 대만 선배는 씨익 만족스럽게 웃더니 그제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눈까지 감고 아주 당당하게 제 볼을 내민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정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살다 살다 남자한테 뽀뽀하는 날이 오는구나……. 뭐, 경기하다가 후배들이 괜찮은 골을 넣으면 그게 대견하고 장해서 가끔 한 번씩 해준 적이야 있었지만, 그건 그래봤자 가족에게 해주는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지금 이건 좀 다른 의미잖아. 게다가 나랑 결혼이니 뭐니를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한테 해야 하는데. 순간 후회와 낭패감이 밀려왔지만 한 번 내뱉은 이상 무를 수도 없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내민 채 정대만의 볼에 돌진했다. 쪽.

…그런데 이거 좀 이상하다? 정대만 얼굴이 이렇게 면적이 좁고 말랑했나? 뭔가 조금 도톰하게 튀어나온 것도 같고. 내가 광대에 입술을 댄 건가? 그런데 정대만이 광대가 이렇게까지 도드라진 얼굴은 아니잖아. 게다가 중간이 갈라진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야? 사람 피부가 갈라질 수 있어? 나 지금 에일리언 뭐 그런 거랑 뽀뽀함?

잠깐만. 아, 미친. 설마…….

“으아아악!!!!!”

정대만 이 미친 인간 고개 돌렸잖아!!!


농간을 부려 남의 입술을 강제로 빼앗은 죄로 등짝이며 팔뚝을 계속 얻어맞고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차이면서 대만 선배는 집에서 쫓겨나갔다. 탕, 드디어 현관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맥이 풀리면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 기운 없어. 아침부터 이게 또 뭔 난리냐고. 아직도 접촉 사고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입술이 부어오르도록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 댔다. 짜증 나, 기분 나빠. 이거 진짜 성희롱으로 신고해 버릴까 보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덩치 큰 누군가가 쑥 빠져나가고 나자 스물다섯 평짜리의 집은 다시 온전한 나만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건넛방에 자리 잡은 이사 박스와 커다란 캐리어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애초부터 그쪽은 창고처럼 쓰던 곳이라 자주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오롯이 내 것으로 돌아온 침대에 대자로 벌렁 드러누우며 나는 사흘 만에 되찾은 온전한 휴식과 자유를 만끽했다. 마음이 넉넉하고 편했다. 이런데 무슨 결혼이야.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고 편한데. 이것 봐,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무풍지대의 고요한 바다 같잖아.

하지만 정대만과의 이 기묘한 동거는 금방 끝나지 않았다. 대만 선배가 짐을 싸 들고 내 집에 쳐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적응의 동물인지라,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대만 선배와 같이 사는 것에 그새 꽤 적응을 하게 되었다. 장을 보고 나면 영수증 금액을 반으로 나눠서 그날 즉시 계좌이체, 관리비와 공과금도 반절은 계좌이체. 식사는 2인분씩 준비를 하고 빨래는 더 자주 돌린다. 아침이면 세면대 앞에서 나란히 칫솔을 물고, 화장대 공간도 반씩 나눠서 자기 물건을 올려놓는다. 침대에는 여전히 베개가 두 개고 현관 옆 바구니에도 차 열쇠가 두 개다. 신발장 앞에도 운동화 두 쌍과 슬리퍼 두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식사도 같이, 잠자리도 같이, 운동도 같이, 서로를 상대 팀으로 만나는 날이면 출퇴근도 같이. 각자의 팀 활동을 제외한 모든 생활을 같이 한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게 되자 이전처럼 탄단지만 적당히 맞춰 먹고 끝낼 수가 없어 뭐라도 하나씩은 각 잡고 만들게 되었다. 꽤 손이 가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에 냉장고를 열면 서로의 입맛과 영양을 고려한 저녁 메뉴를 당연하다는 듯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번 초인종으로 문을 열어주기 귀찮아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었고 대형마트 적립이 되는 내 신용카드는 화장대 서랍에 넣고 공동으로 썼다. 정대만의 이름이 붙은 택배와 등기를 받았다. 수령인의 관계는 가족. 직장동료라고 하려 했는데 집에서 등기를 받았더니 집배원 분이 알아서 가족으로 해주시는 바람에 수정을 할 수도 없었다. 경기가 없는 날이 겹치면 저녁에 소파에 끼어 앉아 다른 팀 중계를 같이 보거나 예전에 선물 받았던 2인용 게임을 함께 했다. 아침 운동을 다녀온 후에는 NBA 중계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다가 누구 하나가 거실에서 환호를 하면 무슨 일이냐며 욕실에 있는 사람이 크게 소리쳐 물었다.

죽부인이나 바디필로우처럼 허리를 끌어안긴 채 자는 것에도 익숙해져 더는 수면 부족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나든 대만 선배든 한쪽이 원정 경기로 떠나 있을 때 잠을 더 못 잤다. 그렇다고 해서 정대만이 없어 허전했다거나 그리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건 옆에 붙어 있던 인간 난로가 없어지니 자꾸 추워서 잠이 깨는 쪽에 더 가까웠다. 새벽 3, 4시쯤 문득 스미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깨고 나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몸을 감추면서 정대만이 그거 하나는 좋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그 사람 하나 없다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게 말이 되는가 싶어서. 그리고 대만 선배가 이걸 몰라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알았다면 이걸 이유 삼아 결혼을 하자 어쩌자 시끄럽게 굴었을 테니까. 이미 한 달을 넘게 그러고 있는 것처럼.

대만 선배는 같이 사는 내내 틈만 나면 남편이 있으면 좋은 이유라는 개소리를 별의별 상황에서 잔뜩 해댔다. 찬장 가장 높은 곳에 올려둔 그릇을 꺼내야 했을 때는 의자를 가져오려 하기도 전에 자기가 손을 뻗어서 내려주고는 ‘키 큰 남편 있으면 이런 게 좋다, 태섭아.’라는 소리를 했고, 스탠드가 고장 나 이케아에서 새로운 걸 사 왔을 때는 그 기다란 박스를 자기가 들고 가면서 ‘남편 있으면 짐꾼으로 쏠쏠해.’라며 어필을 했다. 주방 전등이 나가 전구를 갈아야 했을 때도 식탁까지 밟고 올라가야 했던 나와 달리 의자에만 올라가도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며 ‘이런 거 얼마든지 편하게 해줄 남편 하나 들여놓는 게 어떠냐.’고 능글거렸다. 이 인간 대체 배우자라는 존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돌쇠? 머슴? 아니, 나 진짜 가사 도우미가 필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세 번 다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곧바로 반박하며 기각시켰음은 물론이다.

그랬더니 언제 하루는 소파에서 농구 중계를 보던 내 옆에 와 앉더니 들고 있던 담요를 자기 무릎부터 내 무릎까지 길게 펼쳐서 덮어주었다. TV 보는데 춥지 말라고 이렇게 섬세하게 챙겨주는 남편은 어떠냐.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짝짝이로 만들며 올려다보았더니 씩 웃어주는 꼴이 얄미워서 내 쪽에 얹힌 담요를 걷어 대만 선배에게 다 밀어주었다. 형 무릎이나 잘 사려요. 나이 먹고 겨울만 되면 관절 시리다고 하는 양반이.

대만 선배의 온갖 어필을 다 단칼에 기각시키며 여전히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걸 잔뜩 보여주었지만 적어도 그때만큼은, 심야 영화를 같이 보고 감상을 이야기하며 집에 오던 길에 ‘같이 놀아줄 남편 있으니 덜 외롭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곧바로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살면서 그렇게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전에는 나와 농구를 해주는 형이 있었고, 형이 바다로 떠난 후로는 챙겨야 할 동생이 있었다. 전학을 와서는 주변의 모든 것에 짜증과 신물이 나 굳이 누군가와 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외로워할 틈도 없이 많은 일이 몰아쳤다.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타향에 있을 때야 늦은 밤이면 그런 느낌을 간간이 받곤 했지만, 정우성과 재회하고 백호와 태웅이가 내 뒤를 따라 유학을 오면서 그마저도 싹 사라졌다. 국내로 돌아온 후로는 농구를 하느라 바빠 누군가를 내 삶에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지금 와서 다시 따져 보면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것도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때 되면 언젠가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누군가를 소개받는 일에도 소극적이었던 것 자체가 그다지 외롭지도 절실하지도 않았다는 방증이었을 것이다. 독립을 하고 나와 보니 혼자만의 삶이 생각보다 훨씬 편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다 해도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인 기분이 되는 때는 있었다.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집이 어둡고 추울 때라던가,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날 혼자 식사를 차릴 때라던가,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달력을 넘길 때라던가. 그럴 때면 보통은 그냥 몸을 움직였다. 집안일을 만들어 해치우고, 러닝을 하러 가고, 길거리 코트를 찾아 나서고, 그마저도 안 되면 잤다. 그러고 나면 괜찮아졌기 때문에 굳이 연애로 이런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요즈음은 많이 달랐다. 이것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하지만 확실히 대만 선배가 집에 들어온 후로는 허전하다거나 어딘가 쓸쓸하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똑같은 불 꺼진 어두운 집이어도 뒤이어 들어올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고,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왁자지껄 떠들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매일 같이 온갖 사소한 이유로 말싸움을 해댔지만 그게 싫거나 지긋지긋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때는 대만 선배에게 시끄럽다는 핀잔만 주고 말았다.


2, 3일 전부터 몸이 좀 무거운가 싶더니 오늘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축 가라앉았고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는데도 이마 안쪽이 지끈거렸다. 증상을 인식하자마자 몸살임을 직감했다. 어쩌다 보니 지방 연고지 팀과의 경기가 한 데 모여버리는 바람에 지난주 내내 하루걸러 남쪽을 갔다가 동쪽을 갔다가 북쪽을 가는 원정 스케줄을 맛본 데다가 날씨까지 갑자기 영하 15도까지 뚝 떨어져 버린 탓이었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소리를 끄던 내가 계속 누워만 있으니 결국 대만 선배가 졸린 소리를 내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팔이 내 몸을 넘어 화장대의 휴대폰을 집어 드는 게 느껴졌다. 소리가 멎고,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은 대만 선배가 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관자놀이에 입술이 살짝 내려앉았다. 사전 동의 없는 굿모닝 뽀뽀로 아침부터 한바탕하고 짜증을 담아 맘껏 하라고 소리를 지른 후로, 대만 선배는 이렇게 으레 가벼운 입맞춤으로 아침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그때마다 온몸이 근질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요즘은 짜증을 내는 것도 지쳐 그냥 말 더럽게 안 듣는 커다란 개 한 마리 키우는 셈 치고 내버려 두는 상태였다.

“웬일이야,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많이 졸려?”

“…형.”

“응, 태섭아.”

“나 몸살 온 것 같아요.”

조금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대만 선배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내려와 불을 켠 대만 선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등 뒤에서 냉기를 막아주던 것이 이불을 빠져나가자 순식간에 한기가 스며들어 몸을 잔뜩 움츠렸다. 너 식은땀 나네. 커다란 손이 젖어있는지도 몰랐던 이마를 닦아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집에 약은 있어?”

“종합감기약이랑 진통제.”

“그럼 일단 지금은 그거 먹자. 9시에 병원 문 열면 같이 가고.”

일단 따뜻하게 하고 있어. 이불로 나를 조금 더 꼼꼼하게 감싸준 대만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약이랑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찾아올게. 쉬고 있어. 방문이 닫혔다. 밖에서 서랍을 뒤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다지 미덥진 않았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니 일단은 정대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사이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태섭아, 일어나 봐.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겨우 눈을 떠보니 대만 선배가 물컵을 들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그릇이 하나. 이거 참기름 냄새인가.

“냉장고 뒤져봤는데 다 아플 때 먹기엔 좀 애매한 것들이라 일단 흰죽이라도 끓였다.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먹을 만은 할 거야. 이거 먹고 약 먹자.”

대만 선배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헤드에 베개를 받치고 기대 앉게 하는 손길이 생각보다 꽤 능숙해서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정대만은 외동아들이니까 살면서 누군가를 간호해 본 적도 딱히 없었을 텐데. 예전에 여친들을 챙겨준 흔적 같은 거려나. 이 사람 연애할 때 제법 다정한 남자친구였을지도.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숟가락이 들이 밀어졌다.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에는 죽 그릇을 들고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든 대만 선배가 어느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 해.”

“…먹여주려고요?”

“그럼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다 큰 남자들 사이에 남사스럽게.”

“너 지금 숟가락 들 힘이나 있냐? 앉아 있는 것도 겨우 하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잔말 말고 입 벌려. 아 해.”

숟가락이 한 번 더 재촉하듯 들이 밀어졌다. 이 나이나 되어서 누가 떠먹여 주는 걸 아기새처럼 받아먹어야 한다는 게 창피했지만 대만 선배의 말대로 지금은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기에 결국 얌전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죽은 따뜻하면서도 혀나 입천장을 데지는 않을 정도로 충분히 식어 있었다. 간을 맞추기 위한 간장 맛도 조금 났다. 먹을 만해? 고개를 끄덕이자 대만 선배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자, 한 숟갈 더 먹자. 어린애라도 다루는 것 같은 말투였다.

몸이 아프니 입맛도 없던 차라 죽은 반절을 겨우 먹었다. 그만 먹을래요. 대만 선배는 좀 더 먹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내 이마에 다시 맺히기 시작하는 식은땀을 보고는 얌전히 그릇을 치웠다. 뒤이어 내밀어진 물컵과 약을 받아 들어 단번에 삼켰다. 아직 6시 반밖에 안 됐으니까 좀 더 자. 이따가 병원 가기 전에 깨워줄게. 다시 눕는 걸 도와준 대만 선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순수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 묻어 있는 손길이었다. 여전히 몸은 무겁고 이곳저곳이 쑤셨지만 그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눈을 감자 졸음이 금방 쏟아졌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입술이 내려앉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간호를 하는 정대만은 퍽 섬세하게 굴었다. 사람이 한 군데씩 허술한 것도 여전해서 문제였지만. 잠결에 기침을 했는지 중간에 한 번 깨워 꿀물을 먹였을 때는 꿀을 너무 타는 바람에 머리가 띵할 정도의 단맛이 돌아 삼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뱉어냈다. 병원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을 때는 맨투맨의 앞뒤를 바꿔 입히는 통에 두 번이나 입었다 벗었다 해야 했다. 형 벗기는 건 잘하는데 입히는 건 영 별로네요. 너 제발 이런 때 그런 말 좀 하지 마라…….

그래도 병원에서는 곧 죽을 사람이라도 데려온 것처럼 세상 심각한 얼굴로 증상을 설명하고 진지하게 진단을 들으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수액을 맞는 동안엔 약국에서 미리 약을 받아왔고, 감독님께 대신 전화를 해 내가 훈련을 빠지고 쉴 수 있게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새 어디서 죽까지 포장해 와 차 뒷좌석에 실어둔 채였다. 집에 오자마자 약을 한 포 뜯어 먹이고 주머니에서 비타민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아냐는 볼멘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제가 더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냥 그만두었다.

약을 먹고 다시 누워 있자니 물을 가득 끓인 포트와 머그잔을 머리맡에 놓아주며 대만 선배가 물었다.

“나 이제 훈련 가야 해. 혼자 있어도 괜찮겠냐?”

“내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알아서 약 먹고 쉬고 있으면 되니까 그냥 가 봐요.”

“계속 많이 아프면 전화하고.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시즌 중에 그쪽 팀 주장을 이런 걸로 빼앗아서 되겠나.”

“그거야 그렇지만……. 나한테는 농구만큼 너도 중요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 봐요. 나 잘 거야.”

일부러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하며 등을 돌려 누웠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듯 계속 머뭇대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눈을 꾹 감았다. 현관이 닫히고 나서야 몸에서 긴장이 빠졌다. 이제야 좀 조용히 쉴 수 있겠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일까. 한참 자다가 일어나 혼자 죽을 데워 먹고 따뜻한 물을 따라 마시고 약을 챙겨 먹는 그 모든 순간이 묘하게 썰렁했다. 팀원들의 걱정 담긴 연락에 답을 해주고 어두워지는 창문을 혼자 바라보는 내내 무언가 텅 빈 느낌이었다. 전기담요도 난방도 충분히 훈훈할 만큼 틀어져 있는데도 어딘가 추웠다.

그래서 그날 밤 괜히 응석을 부렸던 걸지도 몰랐다. 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지 한 달 반 만에 처음으로 대만 선배를 마주 보고 누웠다. 평소와 다른 자세에 조금 놀란 시선이 닿자 슬며시 눈을 감고 그 품을 파고들었다. 뻣뻣하게 굳은 상대의 팔을 느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기댔다. 나 안아줘요. 밤에는 추워. 아프다는 걸 공연히 핑계 삼았다.

 

5

결혼과 상대의 고민

 

“결혼하면 좋나요?”

그 질문을 한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꺼낼 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2주가 넘도록 내 머릿속을 반복해서 맴돌던 것이었으므로, 꼭 오늘 이 시간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밖으로 내뱉게 될 이야기이긴 했다. 그런데도 그걸 다른 날들이 아니라 굳이 오늘 꺼내게 된 건 팀원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사이에 문득 정대만의 이름이 섞여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대만과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정대만의 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이름을 듣자마자 우리 사이에 얽혀 있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린다는 충동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나. 시끌벅적하던 말소리가 뚝 끊기며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꿀꺽. 정적 사이로 누군가가 입에 담고 있던 물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지 않으면 더 민망해진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왼쪽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며 상세한 질문을 한 번 더 던졌다.

“감독님은 결혼 15년 차시고, 주장도 5년인가 되셨잖아요. 결혼하니까 좋으세요?”

내 질문을 받은 두 명의 유부남이 서로를 잠시 마주 보았다. 뭐……. 나쁘진 않지. 어쨌든 같이 살자고 결혼한 거잖냐. 주장 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딘가 시원찮은 답변이었다. 그래서 결혼한 게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한쪽 눈썹이 저절로 들썩거리려는 게 느껴졌다. 그 맞은편에서 소고기뭇국을 한 숟갈 떠먹은 감독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안 좋다. 오늘 아침에도 와이프랑 또 한바탕 하고 나왔어. ……오. 어쩐지 뭔가 아침부터 저기압이신 것 같더니 그래서였나. 그래도 현역 시절엔 팬들한테까지 소문날 만큼 알콩달콩 연애하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형수님은 또 뭣 때문에 그러셨대요?”

“애가 공부를 안 하는 게 내 탓이란다. 유전자는 두 사람분인데 왜 그건 전부 내 탓이 되는 거냐고.”

“에이, 아들내미 아직 초등학생인데 공부 좀 안 하면 어때서요. 좀 봐주시지. 형수님 또 속상한 말씀 하셨네.”

얼굴만 보면 바가지 긁어서 귀찮아 죽겠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건 왜 안 했냐, 저건 언제 할 거냐……. 와이프 친정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니까. 사람이 질투는 또 얼마나 많은지 감독 인터뷰 한 번 했다 하면 아나운서 예뻐서 좋았겠다고 툭툭 건드리고. 아, 피곤하죠, 그런 거. 그럴 땐 혼자 살 때가 좋았지 싶다니까요. 잔뜩 질린 목소리로 한탄하는 감독님을 주장 형이 위로하고 맞장구를 쳐준다.

아, 역시나 이런 대답인가. 유부남이 끼는 술자리에서 으레 듣던 이야기들이 똑같이 반복된다.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 누군가의 존재가 귀찮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마음, 서로를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싸움, 맞춰가는 것의 어려움. 하지만 그럴 걸 알면서도 결혼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고 이 어려움을 끊지 않고 지속하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 나는 그걸 알고 싶었던 건데.

대만 선배와의 동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 더 심도 깊게 알아갈 뿐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생활 방식이 거의 180도 달라서 한바탕 말싸움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각자 알아서 하자고 결론 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대만은 끊임없이 청혼에 준하는 말을 해댔고 나와 함께 살고 싶음을 어필했다. 습관적인 장난인가 싶으면 진심으로, 또 진심인가 싶으면 농담처럼. 그래서 대만 선배의 생각을 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왜 굳이 나와 결혼이라는 형태로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건지, 정대만이 입에 올리는 ‘결혼’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지, 그 제안대로 정말로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생각인지 같은 것들을. 대만 선배에게 직접 묻는 게 제일 나았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내가 정말로 결혼 생각이 있다고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신나 할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였다. 그래서 대신 기혼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누군가와 이토록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좀 이해가 될까 싶어 물었던 건데 기혼자의 토로가 10분 넘게 이어지는 내내 원하는 답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저는 결혼하니까 좋던데. 다른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난 비시즌 기간에 3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식을 올렸던 가드 후배였다. 신인인데 결혼도 빠른 편이라 순서 안 지키고 같은 팀 형들보다도 먼저 간다고 놀림을 잔뜩 받았었지. 저는 아침에 자는 얼굴만 봐도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같은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새신랑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행복에 겨운 빛이 났다. 주변에서 장난 섞인 야유가 쏟아졌지만 새신랑 후배는 수줍은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얘는 결혼식장에서도 정말 기뻐 보이긴 했었다. 입장하는 신부를 보며 입이 찢어져라 싱글벙글하는 걸 보고 하객석에서 다 같이 놀리듯 웃던 게 아직도 기억 나니까. 야, 인마. 너는 신혼이잖아. 감독님의 타박이 번개 같이 떨어졌다.

“넌 신혼인 녀석이 싫으면 그게 더 문제야. 결혼한 지 6개월도 안 됐는데 좋아야지.”

“6개월이면 그나마 아직 좋을 때지. 조금만 더 지나 봐라. 이제 첫 부부싸움 한 번 대차게 하면 그때부터는……. 거기서 더 지나면 내가 오빠 같은 사람이랑 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 나온다.”

“제수씨 성격 좋잖아. 그런데 싸울 때 그런 소리 하냐?”

“어휴, 감독님. 저희 와이프 한 번 터지면 장난 아니에요. 저 지난번에 쫓겨나서 지석이네 가서 잔 거 모르세요?”

“그럼 결혼하면 신혼 때만 좋아요?”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더니 감독님과 주장 형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큼, 크흠. 뭐, 꼭 그런 건 아니긴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인께 바가지를 긁히는 유부남의 비애를 잔뜩 늘어놓고 계셨던 감독님이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싫기만 하면 결혼 생활 유지 하고 있겠냐.

“어쨌든 내조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음 든든한 일이니까. 애 재워놓고 둘이 술 한잔하거나 오랜만에 데이트하고 있으면 연애할 때 기분도 좀 나고, 예뻐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들처럼 프로로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도와주고 희생해줘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런 건 또 고맙고 미안하고 잘해주고 싶고 그런 거지. 솔직히 신혼 지나고 나서는 사랑보다는 그냥 와이프가 우리 집에 있는 게 당연하고 이미 묶인 사이고 하니까 계속 이어 왔다는 편에 가깝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단순히 좋다, 싫다로만 말할 수가 있겠냐.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도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거고.”

결혼은 복잡한 거야. 감독님의 말에 주장 형도 진지한 얼굴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겠다는 표정이신 거 좀 열받네. 이쪽은 얘기를 들어도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태섭이 네가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냐? 왜, 결혼 생각 있어? 너 만나는 사람 있었던가?”

“그러게, 웬일이냐. 누구 소개해 준다고 해도 시큰둥하던 애가. 진짜 우리 몰래 연애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만나는 사람도 뭐 그냥……. 맨날 똑같죠. 그래도 저도 나이가 나이잖아요. 서른 되니까 슬슬 생각할 때가 되었나 싶어서.”

“하긴, 태섭이 넌 어머니밖에 안 계시니까 빨리 결혼해서 며느리 하나 데려가는 게 효도긴 하겠다. 대학생 때부터 아들 혼자 멀리 보내두고 사시느라 걱정 많으셨을 텐데 옆에 누가 있어 주면 안심되지.”

…며느리가 아니고 사위일 수도 있다는 게 좀 문제이긴 한데. 물론 그렇다고 진짜 집에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고 그쪽이 일방적으로 우리 집 사위가 되고 싶다고 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김에 너도 선 한 번 보는 건 어때.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 그 정도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야, 사람을 빨리 만나서 사귀어 봐야 결혼도 빨리하는 거지. 그래, 이렇게 된 거 다음 주 수요일 어떠냐. 그때 우리 오프잖아. 와이프 후배 중에 괜찮은 사람 있어. 나도 잘 아는 앤데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애가 싹싹해서 주변 사람도 잘 챙겨. 너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지금은 진짜 괜찮아요, 주장.”

금방이라도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 것 같은 주장 형의 기세에 나는 있는 힘껏 상냥하고 착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생각이 들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수요일, ○○호텔 라운지에서 오후 7시에 보는 걸로 말해놨다.]

…분명 이쪽은 괜찮다고 거절했는데. 주장의 추진력이 좋은 거야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농구가 아니라 다른 부분까지 적용될 줄은 몰랐지. 다짜고짜 도착한 문자를 보고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선을 볼 생각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도 딱히 없었는데 이렇게 멋대로 약속을 잡아버리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다시 연락드려서 정말 괜찮다고, 없는 걸로 해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래도 약속까지 다 잡힌 마당에 취소하는 것도 너무 예의 없는 행동인가 싶어 고민이 되었다.

“그래, 한 번쯤 만나는 것 정도야.”

그냥 적당히 식사를 하고 이야기 좀 나누다가 헤어지면 그만이다. 아는 사람, 그것도 국내에 데뷔했을 때부터 쭉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동료의 소개인데 싫다고 무작정 파투를 내는 것보다는 인사 정도는 하고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뭐, 그리고 혹시 알까. 직접 만나봤더니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면 또 어떻게 연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건 미국에서 배운 처세술이기도 했다. 인맥을 적극적으로 만들진 않더라도 만들 기회가 생기면 아예 걷어차지는 말 것.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고 있냐?”

이 사람이 좀 복병이려나.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욕실에서 나오는 대만 선배를 쳐다보았다. 춥지도 않은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를 시원하게 드러낸 채 머리의 물기를 털고 있다. 안 추워요? 대만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뜨거운 물로 샤워했는데 뭘. 그러면 밖에 나왔을 때 더 춥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입에 올리진 않았다. 별것 아니에요.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놓으며 대답하자 대만 선배가 미심쩍어 하는 콧소리를 냈다.

“별것 아닌 얼굴이 아닌데. 너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을 때면 그런 표정 짓잖아.”

“내가 무슨 표정을 짓는데요.”

“안 그래도 제대로 안 뜨는 눈 더 제대로 안 뜨고 입은 댓 발이나 튀어나오는 표정.”

내가 그런 얼굴을 했나. 입이 튀어나왔다고 하는 게 신경이 쓰여 괜히 입술을 감쳐물고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것 아니에요. 뭐, 그러면 다행이고. 재차 부정하자 대만 선배는 흥미를 잃은 듯 몸을 돌리고 젖은 수건을 세탁 바구니 안에 던져넣었다. 골인. 국내 제일이라 불리는 슈터다운 포물선이었다. 의례적으로 박수를 쳐주니 이쪽을 보고 연극배우인 척 과장해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한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침대 위에 미리 꺼내져 있던 잠옷용 티셔츠를 던져주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형. 나지막한 부름에 대만 선배가 옷자락을 끌어내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형 연말에 선 봤잖아요. 그때 어땠어요?”

“뭐? 갑자기? 어땠냐고 물어도……. 본 지 좀 돼서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우리 집 처음 쳐들어왔을 때 그랬었잖아요. 선 봤는데 별로라 애프터도 안 했다고. 얼마나 별로였던 건지 좀 궁금해서.”

“아……. 아. 어, 그랬지. 그냥 말 몇 마디 해 보니까 관심사도 잘 안 맞고 할 말도 없더라고. 난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만 해 왔던 놈인데 음악 하는 사람이랑 뭐가 맞겠냐.”

“그런 사람을 소개받은 것도 신기하네.”

“말했잖아, 고모 등쌀이었다고. 고모 아시는 분 딸이야. 나이 비슷하고 하니까 만나 보라고 연결하신 거지, 거기에 내 특수성은 하나도 고려가 되지 않았다고.”

“형의 특수성이 뭔데요. 형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내가 특별하지 않을 건 또 뭔데. 그건 그렇고 뜬금없이 이건 왜 물어? 왜. 송태섭 질투하냐?”

대만 선배가 능글맞게 웃으며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내 옆에 몸을 바짝 붙여 앉았다. 허리를 한 팔로 깊게 감싸 안고는 진짜 개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 위에 자기 턱을 올려놓으며 은근슬쩍 애교 부리듯 비빈다. 떨어져요. 날카롭게 말해도 꼼짝을 안 한다. 응? 질투해? 대만 선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질투 안 해요. 형이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걸로 질투를 해. 그리고 질투했다고 해도 벌써 두 달은 더 지난 일로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좀 웃기지 않아요?”

“왜 무슨 사이가 아니야. 남편 될 사람의 과거를 되짚다 보면 이전 상대가 문득 거슬리고 그러는 거지.”

“형이랑 결혼 안 한다고 했다.”

“그래, 그래. 형 아직 프로포즈 링 보관하고 있다. 손가락 꾸밀 생각 들면 언제든 말해.”

“형 진짜 미쳤죠?”

“그럼, 미쳤지. 송태섭한테.”

“징그러우니까 나가서 자. 거실로 꺼져요.”

짜증을 잔뜩 담아 쏘아붙여도 대만 선배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볼에 입술이나 부비고 있을 뿐이었다. 저리 가라고요! 사람이 무슨 술 취한 아빠처럼 굴어. 손바닥으로 아예 얼굴을 밀어내자 그제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몸을 떨어뜨린다. 만나봤더니 별로였던 사람을 현장에서 어떻게 거절했을지 정보라도 좀 얻으려 했더니만 쓸데없는 소리나 잔뜩 듣고 볼이나 뺏기다니. 하여간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대만 선배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닦다가 정신이 피곤해져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눕혔다. 벌써 눕게? 네, 누구 덕에 힘들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대만 선배가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불을 끄고 와 옆자리에 누웠다.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으니 어깨를 쿡 찌르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오늘은 나 안 보고 자?”

“…….”

가만히 있으면 백 퍼센트 몸 돌릴 때까지 귀찮게 굴 걸 알기에 얌전히 몸을 돌려주자 어둠 속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자, 태섭아. 내 몸을 끌어안은 대만 선배가 부드럽게 밤 인사를 건넸다. 아이를 재우듯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수요일 오후 6시 47분. 약속 장소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비뼈 안쪽에서 심장의 쿵쿵대는 울림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선이다. 소개팅도 거의 안 해봤는데 갑자기 선이라니. 단어가 1/3 길이로 짧아진 대신 무게감은 세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대만 선배에게는 오늘의 일정을 따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저녁에 약속이 있어 늦게 올 거라고만 이야기했다. 어쩌면 형 왔을 때까지도 나 없을 수도 있어요. 무슨 약속이길래 그렇게 늦게까지 안 오려고 해? 나 두고 바람 피우냐? 또 개소리한다, 정대만. 그렇게 핀잔은 주었지만 집을 나오는 순간까지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했다. 두 달 넘게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사람에게까지 알리지 않는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숨기는 것만 같잖아. 하지만 약속 잡힌 사람과 정말로 결혼을 고려하며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굳이 대만 선배에게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선 자리 나간다 했다가 또 며칠 내내 화내고 삐지면 어떡해. 더구나 오늘은 정대만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괜히 이 얘기를 꺼내서 그 사람의 컨디션과 멘탈을 흩트려놓고 싶지도 않았다. 당일에 그러는 건 경기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정신 공격 한 것 같잖아. 그건 스포츠맨십에도 어긋난다고.

엘리베이터가 다 올라가기를 기다리며 심호흡을 하다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았다. 포멀한 캐주얼 정장에 평소와는 달리 올리지 않고 적당히 만지기만 한 곱슬머리, 거기에 두꺼운 겨울용 코트를 입고 무늬 없는 짙은 색 목도리까지 둘렀다. 분명 장소와 만남의 목적에 맞는 제대로 된 옷차림인데도 자꾸만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보여 어딘가 어색했다. 머쓱한 기분에 습관적으로 귓불을 매만지다가 엄지에 걸리는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아, 피어스 빼는 거 깜빡했다. 지금이라도 빼는 게 낫겠지? 그런데 주머니에 대충 넣어놨다가는 잃어버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땡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라운지 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글렀네. 결국 피어스는 빼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디뎠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주장 형의 말대로 꽤 미인이었다. 굵게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와 도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원한 이목구비, 길고 곧은 목에 예쁜 손가락, 슬렌더하고 옷맵시가 좋은 체형. 게다가 웃는 얼굴이 서글서글해서 호감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인상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대만 선배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아마 옷차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옷은 시상식이나 결혼식처럼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곳이 아니면 거의 입지 않는 나와 달리 눈앞의 사람은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가 마치 제 피부처럼 편안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조금 긴장한 채로 자기소개를 했다. 송태섭입니다. 주선해주신 분과 같은 소속팀에서 뛰고 있어요.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요…….

상대는 모 대기업에 다니는 마케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는 이쪽보다 한 살 연하, 형수님과는 대학 동아리를 같이 한 선후배 사이. 농구는 잘 모르지만 친한 언니의 남편이 선수이니 몇 번 따라가서 본 적은 있다고 했다. 룰을 잘 모르니까 재미를 쉽게 못 느끼겠더라고요. 하지만 태섭 선수가 잘 알려주시면 재미를 붙일 수 있을지도요. 그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는 눈매가 얼핏 누군가와 닮아 자꾸만 시선이 갔다.

둘 다 뭘 먹지 않고 온 터라 저녁을 함께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상대는 제법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대화를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모르는 주제가 나와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들어줄 줄 알았고 알려줄 것이 많은 좋은 질문을 던졌다. 반대로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했다. 덕분에 공통분모는 많지 않았지만 적잖이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호텔 1층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는 심리적인 벽도 비교적 많이 내려가 있었을 정도로.

그 덕이었는지 커피를 마시면서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 경험, 소개팅, 선, 결혼. 스물아홉이면 아무래도 요즘 세태 상 결혼을 생각하기엔 이른 편이긴 한데 저는 괜찮은 상대만 있다면 빠르게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그래서 사람 만나는 데 딱히 소극적이진 않아요. 아직 2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은 내가 올해 들어 네 번째로 만나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동안 만났던 분들 중에서는 저는 태섭 선수가 제일 느낌이 좋아요.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고, 더 알아가고 싶고. 태섭 선수는 어떠세요? 결혼이라던가, 이런 만남 같은 것들이요. 저는……. 테이블 아래로 바짓자락을 한 번 말아쥐었다.

그래서 나도 솔직히 이야기했다. 신경 써서 주선해주신 자리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보기 위해 나온 건 아니었다고, 그리고 아직은 결혼이나 연애 생각이 크게 있진 않다고. 어쨌든 저는 농구가 좀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미안함을 담아 겸연쩍게 웃었다. 물론 오늘 시간은 저도 모처럼 너무 즐거웠지만요. 첫 만남에 이렇게 길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에요. 저희의 타이밍이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눈앞에서 퇴짜를 놓은 상황임에도 상대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이해한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럴 수 있죠. 각자의 속도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친구로서는 연락드려도 되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 상대를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돌아오니 벌써 11시가 가까웠다. 대만이 형 벌써 들어왔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차장에서 슬쩍 올려다본 창문은 예상외로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어라, 아직인가? 차가 밀릴 시간은 아닌데.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오겠거니 싶어 올라오는 생각을 지우고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문을 열자 역시나 캄캄한 실내가 나를 제일 먼저 맞았다. 그런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복도의 불빛에 의지해 문득 내려다본 발치에는 운동화가 두 켤레였다. 게다가 한 켤레는 내 발이 들어가고도 한참 남을 큰 사이즈. 이건 정대만이 집에 있다는 뜻인데. 설마 벌써 불 다 끄고 자고 있나? 짐작이 가질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타임스위치를 눌러 현관 등을 켰다.

“송태섭.”

그리고 그 순간 어두운 안쪽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노란 조명의 끝자락에 소파에 귀신처럼 앉아 있는 커다란 인영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깜짝이야! 있으면 불을 좀 켜고 있지 거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약속이길래 정장까지 차려입고 나갔다 오냐. 추위 그렇게 타는 놈이 코트까지 입고.”

기분 나쁜 티가 풀풀 나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왜 이런 식으로 시비야. 이 인간 오늘 졌나? 운전하느라 오늘 경기 결과 확인을 못 했다. 그렇지만 졌다고 해도 좀 이상하다. 정대만은 호승심이 강한 사람이지만 졌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감정에 휩싸여 남에게 허투루 구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실책이 컸던 경기라면 아쉬움도 자책도 크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내면에서 알아서 소화해야 할 감정이다. 제 감정에 휘둘려 주변 사람에게까지 함부로 구는 건 프로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실격이다. 정대만도 오래 운동을 해 온 이상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서 나는 대만 선배가 왜 이렇게까지 저기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뭣 때문에 혼자 삐지셨냐고요. 몰려오는 피로에 짧게 한숨을 쉬고 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

“그럴 약속이 있었어요. 형한테 다 알릴 의무는 없잖아요.”

“의무? 하……. 그래, 의무는 없지. 의무는 없긴 한데.”

대만 선배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다랗고 큰 것이 천장을 향해 쑥 솟아오른다. 노란 조명이 밝혀진 현관을 향해 어둠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대만 선배는 삐진 정도가 아니라 단단히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만 선배가 위협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야차 같은 눈이다. 순간 느껴지는 위압감에 어깨가 절로 흠칫 떨렸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대만 선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선 봤다며, 송태섭.”

내가 왜 이 얘기를 다른 사람 입에서 들어야 하는 거냐? 화가 잔뜩 난 남자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6

결혼보다도 이혼을 먼저

 

 

“내가 왜 이 얘기를 다른 사람 입에서 들어야 하는 거냐?”

화가 잔뜩 난 남자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대만 선배는 10년이 더 넘은 언젠가의 기억 속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함부로 성질을 내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도 16cm 가까이 되는 덩치 차에서 나오는 압박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긴장감에 쿵쿵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꾹 내리누르려 애쓰며 떨리는 손을 슬며시 주머니 속으로 감추었다. 목 안쪽이 바싹 말라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대체 이 얘기를 어디에서 들은 거야. 내가 선을 보러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같은 팀원들은 물론이고 엄마나 여동생, 그리고 하다못해 옛 북산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 만남이니 구태여 누군가에게 말할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대만이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설마 그 호텔에서 누가 날 보고 정대만 SNS에 찔렀나? 가능성이 없진 않다.

“나 선 본다는 거 누가 말했는데요.”

“경준이 형이.”

1초도 지나지 않아 즉답이 떨어진다. 젠장맞을. 주장 형의 동생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 같은 팀이었지. 대만 선배와 출퇴근이며 생활을 같이 한 게 두 달이 넘어가니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게 이제는 어느 정도 알음알음 소문이 났다. 그 사람도 그래서 대만 선배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정대만의 동거인의 일이고, 정대만과 가장 친한 후배의 일이니까. 예상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복병에 급격하게 정신이 피곤해진다. 내가 눈만 게슴츠레 뜬 채 말이 없자 대만 선배가 더욱 인상을 썼다.

“왜 말 안 했냐?”

“말해서 어디에 쓰게요. 말해봤자 화내고 삐지기나 했을 거잖아요.”

“당연히 화내고 삐지지.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

“왜요?”

이쪽도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화내고 삐지는 거 보는 게 싫어서 일부러 말을 안 했던 건데 그래도 말을 했어야 한단다. 왜?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귀찮은 짓을 해야 하는데? 화내고 삐질 걸 알면 처음부터 그럴 일 없게 말 안 하는 게 당연히 더 낫지 않아? 아무도 피곤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굳이 두 사람 다 기분 상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느냔 말이야. 대만 선배의 말이 나에겐 그저 엄청난 억지로만 들렸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내 케어를 바라는 자기중심적이고 재수 없고 억지스러운 태도. 그게 원래 정대만인 걸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 제멋대로 구는 정대만을 두 달을 넘게 받아주고 있잖아. 대체 어디까지 더 해줘야 하는 건데? 어디까지 내 인생에 멋대로 들어올 셈이냐고?

‘왜요?’ 너 지금 ‘왜요?’라고 했어?”

“나도 보고 싶어서 보러 간 것도 아니고, 선 봤다고 그 사람이랑 만나기 시작하거나 결혼하겠다고 나설 것도 아닌데 그걸 왜 형한테 말해야 하냐고요. 그리고 내가 선을 보든 말든 형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형도 봤었잖아?”

“그건 여기 들어오기 전의 일이잖아! 넌 내가 있는데 선을 볼 마음이 드냐?”

“그러니까 당신이 내 집에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눌러앉은 거랑 내가 선 볼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왜 상관이 없어! 내가 두 달이 넘게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하, 그래요, 말 잘 했다. 결혼? 겨얼호온? 나도 형이랑 결혼할 생각 없다고 두 달 넘게 말하고 있죠? 그러면 좀 적당히 하라고!! 왜 싫다는 사람한테 자꾸 그러는 건데!! 형이 나한테 끈질기게 청혼을 한다고 해서 그게 정대만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무슨 자격 같은 게 되지는 않는다고!”

그 순간 현관 등이 꺼졌다. 집안이 다시 어둠에 휩싸였기 때문에 내가 내지른 소리를 듣고 정대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대만 선배가 무언가를 겨우 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정말 나랑 결혼하기 싫어?”

“네, 싫어요. 형이랑 두 달을 같이 살았어도 나는 아직도 형과 결혼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형이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어. 같이 사는 거, 그래, 그건 뭐 그렇다 쳐요. 집세 때문이든 덜 심심하고 싶어서든 단순히 사람이 고파서든 뭐든 정대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왜 굳이 그걸 ‘결혼’이라는 형태로 하자고 사람을 두 달이 넘게 괴롭히고 있는 거냐고요? 결혼을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랑 해! 형 좋다는 여자 많잖아! 대체 왜 나한테 들러붙어서 이러는 건데요!”

“내가 너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만 선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배신 당하고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씨근대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내 양 볼을 꽉 붙잡았다. 양옆으로 잔뜩 짓눌린 입술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뭐 하는……! 웅얼거리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정대만이 제 입술을 내게 부딪혀왔기 때문에.

씨발, 이거 첫 키스인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랬다. 당연하지, 연애 경험이 없는데 키스 경험이 있었겠냐? 첫 키스는 꼭 사랑하는 상대와 하고 싶다는 소녀만화 같은 감성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더 로맨틱한 상황에서 제대로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빼앗길 줄이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에게.

정대만의 키스는 대단히 거칠었다. 사랑을 표현하거나 성감을 올리려는 달콤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일방적으로 탐하고 빼앗아 가는 사냥에 가까웠다.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씹어대더니 벌어진 사이로 우악스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반항하는 몸을 신발장에 찍어 누르며 체격을 앞세워 포식하려 들었다. 억지로 얽히는 물컹한 근육에 헛구역질이 올라오려 했다. 정대만의 커다란 손은 어느새 내 얼굴이 아니라 턱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계속 무력하게 열린 채 정대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손톱을 세워 손등을 마구잡이로 긁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분명 긁힌 상처가 꽤 아프게 났을 텐데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그게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이런 일방적인 무력감은 지긋지긋해. 특히 당신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필사적으로 턱 근육을 움직였고, 입안에 가득 들어찬 것을 콰득 씹었다. 정대만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분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나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패 죽일 것 같은 목소리로 축객령을 씹어뱉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서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삐리릭,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고 복도의 불빛이 신발장에 기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비추었다. 탕. 문이 닫혔다. 이제 스물다섯 평짜리의 작은 집에는 온전히 나만 남았다. 조금 전까지 얼얼하도록 빨리던 혀에서는 미끈거리는 피 맛이 났다.


정대만이 집을 나가고 나서 한참 동안 양치를 했다. 잇몸에 피가 날 정도로 칫솔질을 하고 입을 몇십 번이나 헹구었다. 강제로 입 안을 파고들며 훑어 올리던 감촉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아 이대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결국 변기를 붙잡고 한참 헛구역질을 했다.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다가 그 살갗의 감촉마저 정대만의 혀와 비슷하게 느껴져 소름이 끼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침실로 돌아와서는 하나 더 나와 있던 베개를 다시 옷장에 쑤셔 박았다. 이불을 덮었다가 두 달 간 배인 타인의 체취를 맡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세탁 바구니에 밟아 넣고 새로운 이불을 꺼내 덮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오던 36.5도의 온기가 순간 떠올랐지만 그딴 것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김없이 새벽 3시쯤 잠에서 깼지만 억지로 눈을 다시 뜨지 않았다.

정대만은 내 집에서 사라졌지만 그 사람이 두 달 동안 여기저기 남겨 놓은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옷장을 열면 내가 입을 수 없는 길이의 코트가 한쪽에 걸려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는 두 개째의 노트북이 놓여 있었고 식기 건조대에도 화장실의 양치 컵에도 물건이 두 벌씩이었다. 정대만이 제 것처럼 가져다 쓰던 담요가 소파 위에 굴러다녔다. 그게 꼴 보기 싫어 정대만이 쓰던 것을, 정대만이 가져왔던 것을 모두 건넛방에 있는 그의 이사 박스에 처박았다. 울컥 끓어오르는 감정에 휩싸여 집안 곳곳을 샅샅이 헤집어 전부 치워놓고 나서야 내 물건까지 1/3 정도는 그 이사 박스에 처박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제기랄. 대상 없는 욕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다가 원래 내 물건이었던 것은 하나둘씩 어쩔 수 없이 다시 꺼내 놓았다. 같이 쓰지 말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물건을 보이지 않는 곳에 전부 치우고 나면 화가 가라앉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나니 빈 곳이 너무 잘 보이기 시작했다. 청소기에 엉겨들 것이 없어진 콘센트도, 갑자기 넓어진 침대도, 반절이나 비어 버린 옷장도, 1인 가구라기엔 지나치게 채워진 냉장고도, 그리고 언제 돌아와도 깜깜하고 싸늘할 뿐인 집도 전부 다 남의 것인 양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걸 느낄 때마다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도리어 더 강해졌다. 벌써 몇 년 동안 살아 온 내 집이었는데도 공간 자체에 거부감이 들어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경기 일정이 없는 걸 핑계로 이틀 정도는 본가에서 뭉개 보았지만 연습장까지 가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이내 그만두었다. 그다음엔 호텔에서 묵었다가 1박만으로도 지출이 생각보다 큰 걸 보고 조용히 접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집을 전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천근만근인 발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동안 열린 적 없는 현관 앞에는 정대만의 이름이 붙은 택배가 와 있었다. 바깥 생활을 하면서 좀 가라앉은 것 같았던 성질이 다시 폭발하듯 올라왔다. 상자의 안에 뭐가 있든 말든 그냥 아무 데나 집어던져 박살 내고 싶었다. 하지만 남의 물건이니 함부로 하지는 못하고 이사 박스가 있는 방에 던져넣은 뒤 문만 닫아버리고 말았다.

섬유유연제를 들이붓다시피 한 이불 빨래가 잘 말라 옷장에 다시 들어간 지 오래임에도 정대만은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이전에 말싸움을 했을 때처럼 은근슬쩍 들어와 맛있는 걸 내밀며 벌써 화해한 척 굴지도 않았고 미안하다는 연락을 따로 하지도 않았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않았는지 사람이 없는 틈에 짐을 가져간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 주제에 TV를 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게 코트에서 뛰고 팀원들과 웃어젖히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보자마자 열이 올라 소파의 쿠션을 브라운관에 집어던졌다. 제멋대로 남의 공간에 들어와 일상을 잔뜩 뒤집어 놓은 뒤에 또 제멋대로 화를 내고 다시 돌아오지 않은 그 사람의 모든 행동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정대만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안 괜찮은데 왜 저 인간은 괜찮지?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야? 오히려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을 한 건 저쪽인데 왜 애꿎은 내가 이런 감정들을 느껴야 하는 거냐고. 이거 너무 주객전도라는 생각 안 들어? 아무 연락이 없는 건 두 배로 괘씸했다. 그딴 식으로 쫓아내긴 했어도 미안하다고 진지하게 사과를 했으면 다시 받아 줄 의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벌써 몇 주가 지나도록 모른 척을 하신다 이거지. 지금 나랑 장난해? 자기 잘못을 똑바로 마주하는 건 당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었잖아. 그런데 왜 이 건은 없던 일처럼 무시하고 처음부터 이곳에 없던 사람처럼 구는 거냔 말이야. 이런 식으로 사고 치고 한순간에 사라진 주제에 자기 혼자 괜찮아서는 안 되잖아.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굴어버리면, 나는, 씨발, 그러면 멋대로 남겨진 나는 어쩌란 건데요.

나는 몇 주가 지나도 이 집이 비어 보여서 화를 참을 수가 없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나 멀쩡한 거냐고.


이번주에 정대만의 소속팀과의 경기가 있었다. 덕분에 며칠 전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코트 위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날들은 훈련이 있어 그나마 괜찮았지만 경기를 앞두고 주어진 하루의 휴식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짐을 싸 들고 헬스장에서 잔뜩 뛰고 왔는데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짜증도 초조하게 맥동하는 심장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손댈 일 없었던 노트북을 열었다. 게임을 몇 판 했지만 재미가 붙기는커녕 질리기만 해서 그냥 꺼버렸다. 키보드 아랫부분을 손끝으로 가만히 두드리다가 안부를 묻는다는 핑계로 미국의 지인들에게 화상통화를 걸었다. 시즌 중이라 그런지 연결되지 않는 통화 창을 몇 번이나 마주해야 했지만 마침내 오프였던 한 명이 요청을 받아주었다. 그래봤자 함께 활동했던 과거를 되짚으며 추억팔이를 할 뿐이었지만 잠시나마 정대만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시간을 때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저녁에는 일부러 식사 약속을 잡았다. 상대의 일정 때문에 장소가 조금 멀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멀리 나가야 한다는 건 집에서 떨어져 있을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둘 다 정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까지 일부러 붙잡고 늘어진 후에야 귀가를 했다. 집에 와서는 곧바로 씻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들기엔 조금 일렀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른 생각이 올라올 구석을 최대한 차단하고 의식을 정대만에게서 멀리하려 애썼다.

그랬던 노력이 무색하게 다음날 경기장에서 정대만을 마주하는 순간 목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사람 하나 잡고도 남을 정도로 매서운 내 시선을 느꼈을 게 분명한데도 정대만은 복도나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뿐만 아니라 코트에서 몸을 풀 때조차도 절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양 팀의 다른 선수들이 둘이 싸우기라도 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예, 뭐 비슷하죠. 그걸 싸운 거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는데 그게 어떻게 싸운 거야? 어? 그보다 정대만,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쯤 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 씨발. 내가 오늘 경기 반드시 이겨준다. 이쪽을 신경 안 쓰고는 못 배기게 해줄게.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리그 창설 이래 최대 점수 차로 이겨주겠다는 혼자만의 투지를 활활 불태우며 농구공을 힘주어 탕탕 튕겼다.

그러나 다짐한 대로 엄청난 점수 차를 내지도 못하고 3쿼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완전히 교체되어 나와야만 했다. 4개째의 퍼스널 파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대만이 자꾸 시야에 걸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 계속 실수를 범했다. 나를 마크하는 상대 팀 가드를 더 힘주어 밀치고, 수비를 하다 핸드체킹이나 공격 방해를 해버리기도 했다. 송태섭 뭐하냐! 정신 안 차릴래!! 감독님이 쩌렁쩌렁하게 노성을 터트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릴 때마다 더 초조했다. 연습도 아니고 실제 경기에서 뭐 하는 거야. 정대만의 코를 눌러주려 했잖아. 빨리 냉정을 찾아야 해. 감정에 휩쓸려서 이러는 건 프로로서 실격이라고. 아니, 그런데 정대만이 먼저!!!! 결국 3쿼터 중간에 후배와 교체되면서 오늘 승리는 물 건너갔다는 걸 단박에 직감했다. 젠장, 이게 다 정대만 때문이야. 나만 망할 수는 없으니 같이 망해 버리라고 저주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대만의 슈팅이 빗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정대만의 슈팅은 오늘따라 특히 더 깔끔했고, 특히 더 날카로웠다. 또 한번 완벽한 스위시 샷이 터졌다. 망할 인간. 이제는 저 인간이 다른 팀인 것조차 짜증이 났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경기를 운영해야 할 포인트 가드가 흔들렸으니 다른 선수들에게도 영향이 없을 리가 없었다. 교체된 후배가 남은 시간을 침착하게 잘 끌고 나가주었지만 이미 기세를 탄 지 오래인 상대 팀의 터지는 득점을 선방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커룸에서도 강하게 피드백을 받았다. 뭐라 덧붙일 거리도 없었다. 상대가 교묘하게 유도한 곳에 걸려든 것도 아니고 내가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거칠게 굴어 받아 버린 파울들이었으니까. 미숙하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 경기에서는 정신 차리겠습니다. 당연히 차려야지.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너는 잘 하던 애가 갑자기 왜 그랬냐, 태섭아. 응? 정대만이랑 뭔 일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해결도 좀 하고. 감독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정대만과의 일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계속 이럴 것이다. 다음 라운드도, 그다음 라운드도 이 팀과 만날 때마다 비슷한 결과가 나오겠지. 프로로서의 태도가 아닌 것도 문제고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도 문제다. 우리 팀이 항상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는 정대만네 팀을 저격하고 발목을 붙잡는 데 정평이 나 있는 이유가 뭔데. 내가 정대만을 잘 알아서 그 인간을 잘 봉쇄하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말려들어서야 되겠어?

그래서 주차장에서 정대만을 기다렸다. 잘 빠진 흰색 차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눈썹을 잔뜩 치켜올린 채 팬들의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허우대 좋은 인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대만은 나를 흘긋 쳐다보기만 했다. 인사도 아는 척도 없었다. 헛웃음이 터졌다.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정대만이 뒷좌석에 선물을 놓기 위해 차 문의 잠금을 풀자마자 잽싸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뭐 하냐?”

운전석을 연 정대만이 허리를 숙이고 안을 들여다보며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더 비딱하게 기울이며 정대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의 성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긁을 수 있는 건방진 표정도 함께 지어주면서.

“눈 있으면 보이잖아요?”

“내려. 나 집 가야 해.”

“그 전에 형이 가야 할 곳이 있을 텐데.”

“어디를.”

“우리 집에 짐 있잖아? 가져가요.”

“…됐어. 안 가져갈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내가 뭘 알아서 해요? 내가 입지도 쓰지도 못하는 데다가, 전자기기들은 비밀번호 다 걸려있어서 건드리지도 못하는 걸 뭐 어떻게 하라고?”

“그럼 버리던가.”

“지금 장난해?”

“장난 아니거든?”

“아, 됐고, 나 형이 내 집에서 짐 다 뺄 때까지 여기서 안 내릴 거거든요? 여기서 노숙하다 얼어죽든 말든 할 거니까 형이야말로 알아서 해요.”

“…….”

내가 안전벨트를 차고 팔짱까지 끼면서 시위를 하기 시작하자 정대만은 피곤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거 웃기네? 자기가 한숨을 왜 쉬지? 지금 한숨을 쉬어야 할 게 누군데? 곤란하고 난감하고 환장하겠는 건 이쪽이거든? 고개를 홱 돌려 정대만을 노려보았지만 그새 허리를 편 사람에게는 내 찌를 듯한 시선이 닿지 않았다. 여러 개의 박스와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뒷좌석 문을 닫은 정대만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이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건다. ─목적지를 말씀해주세요. 자동으로 켜진 내비게이션의 경쾌한 음성이 차 안을 울렸다.

“우리 집.”

“야, 정대만!”

“목적지를 ‘우리 집’으로 설정합니다.”

“진짜 이럴 거야?! 내 집에서 짐부터 빼라고 했지!”

“내비나 보고 말해. 주소 어디인 것 같은지.”

정대만이 지친 목소리로 한숨 섞어 내뱉은 말에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뜬 지도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파트, ◇◇편의점, □□은행, ○○초등학교. ……뭐야, 이거 우리 집이잖아. 아니, 그런데 여기를 왜 자기가 '우리 집'이라고 불러? 어이가 없네? 내가 황당해 하고 있는 사이에 정대만은 파란 화살표의 경로를 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체육관을 벗어난 차가 도로에 부드럽게 진입했다.

“왜 형 차에 ‘우리 집’ 주소가 내 집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같이 살았으니까.”

“형이랑 내가 같이 살았던 거랑 내 집 주소를 ‘우리’ 집으로 등록해 놓은 게 무슨 상관이냐고. 당신 집도 멀쩡하게 있잖아.”

“…….”

정대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눈썹이 점점 올라가고 눈이 시릴 정도로 노려보고 있는데도 도시고속도로를 탈 때까지 묵묵부답으로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 그래. 말을 말자. 정대만에게 뭘 기대한 내가 등신 새끼지. 속이 답답해 한숨을 팍팍 내쉬며 다시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노란 가로등 불빛이 휙휙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의외로 차가 별로 안 막히네. 참 더럽게 평화로운 풍경이다.

왜 그렇게 등록해 놨는지 듣고 싶어? 차는 전체 경로의 1/3쯤을 오고 나는 조금씩 졸리기 시작할 즈음, 갑자기 정대만이 고요하던 침묵을 깼다. 흘끔 눈을 돌려 앞을 응시하는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이나 해보세요. 이미 기분이 잔뜩 상한 상태였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불만이 잔뜩 묻어나는 시건방진 말투로. 공경심따위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내 태도에 정대만이 다시 한번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석 창문에 팔꿈치를 얹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관자놀이를 짚는다.

“너랑 계속 같이 살 줄 알았으니까.”

그 사람답지 않게 기운 없고 조용한 대답이었다.

7

도장을 완전히 찍기 전에

 

정대만이 이렇게까지 기운 없는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그야 내가 봐 왔던 정대만은 항상 당당한 사람이었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서 우는 소리조차 계산적이고 전략적으로 할 만큼 치밀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정대만은 내가 십 년 넘게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맥없는 표정과 가라앉은 눈은 이 사람이 정말로 어딘가 텅 비어 버렸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만 같은, 약간의 불씨만이 겨우 남아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깜부기불이었다. 정대만이 이렇게까지 약해질 수가 있는 사람이었나. 낯설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느낌. 내가 이 사람의 이런 부분을 봐도 괜찮은 건가.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운전석 쪽으로 눈동자가 돌아갔다.

“누구 맘대로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왜 형이랑 계속 같이 살아.”

하지만 신경이 쓰이고 조금은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과는 별개로 좋은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던 내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사고방식과 고집 아닌가. 그리고 조금은 이 남자의 정말로 포기하지 않는 그 성정이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무수한 거절의 소리를 듣고도 내가 정말 자신과 결혼해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거잖아. 하긴, 불가능할 정도의 그런 집념이 이 사람을 국내 제일의 슈터로 만든 기반이지. 내가 좋아하던…….

…아니, 아직도 좋아하는,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좋아할 모습이기도 하고.

“나는 결국 네가 승낙할 줄 알았거든.”

여전히 관자놀이를 짚은 채인 정대만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나는 눈썹을 한껏 치켜올리며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조금 감상에 잠겨서 딱한 감정을 느낄 만 하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성질을 돋운다. 두 달 동안 눌러앉았던 게 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게 아니니 두드리면 열린다 이런 식의 행동이었던 거냐고. 결국 내가 지쳐서 승낙할 때까지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을 셈이었어? 이게 사람이 아니라 거머리였나? 아니, 그것도 그건데 대체 왜? 왜 이렇게 이 사람은 나와의 결혼에 집착하지? 누가 나랑 결혼하면 돈이라도 준다디?

“왜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으니까.”

“뭘요.”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잠깐만. 뭐?

“내가 티를 그렇게나 냈으니까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물론 처음엔 내가 일방적으로 굴긴 했지만……. 좀 익숙해지고 나면 투덜거리면서도 다 받아주는 걸 보면서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어느 정도는 너한테도 감정이 생겨났다고도 생각했고. 그런데 설마 전혀 모르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냐? 네가 그랬잖아? 두 달을 같이 살았지만 내가 너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걸 듣는 순간 다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더라. 그러면 내가 그동안 무수히 말하고 보여줬던 내 마음은 뭐가 되는 거지? 어느 정도는 네 옆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잖아. 언제든지 넌 다른 사람을 선택해 내 곁을 떠날 수 있고, 그럴 생각도 있고, 나는 그냥 일방적으로 같이 살자고 하는 귀찮은 사람 정도로 여겼다는 거고. 그게 화가 났어. …그렇다고 화내면서 억지로 그랬던 건 내 잘못 맞다. 많이 늦었지만, 미안해. 그러면 안 됐는데.”

“잠깐만…….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예상 못 하게 듣게 된 고백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대만이 날 좋아한다고? 우리가 십 년을 더 넘게 알고 지냈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말이 돼, 이게? 너무 이상한 명제라 마치 세상 처음 접한 외국어처럼 들렸다. 하지만 내가 혼란에 빠져 있든 말든 대만 선배는 여전히 운전을 하면서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두 달 넘게 별소리를 다 하기는 했지만……. 네가 나와 결혼해줬으면 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원래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단계를 밟았어야 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네가 한 번도 날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걸 아니까,”

“아니……. 그, 형, 일단 잠깐만 좀 닥쳐봐요. 나 지금 너무 갑작스럽거든요? 생각 정리 좀 해야겠으니까.”

‘너무 갑작스럽다’는 말에 대만 선배는 이쪽을 건너보며 짧게 한숨을 쉬긴 했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어 주었다. 다시 조용해진 차 안에서 나는 선배와 함께 살던 지난 두 달간의 일을 머릿속으로 회상했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다짜고짜 내민 반지, 자기 집의 절반 정도는 떼어온 것 같던 커다란 이사 박스, 한 침대에서 엉겨 잠들던 밤, 질색을 해도 분위기를 탈 때마다 기어이 해주던 입맞춤, 아플 때 돌봐주던 손길, 경기를 하고 오면 꼭 해주던 마사지, 원정으로 외부에서 묵는 밤이면 반드시 걸려 오던 전화, 우리 엄마 생일을 자기가 2주도 더 전부터 신경 쓰던 모습, 그런 것들이 하나둘씩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폭탄 선언을 들은 지금은 ‘아, 설마 이랬던 것도 전부 날 좋아하기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난 그 당시엔 전혀 몰랐다고! 모를 수밖에 없잖아! 처음 우리 집에 우격다짐으로 들어올 때부터 ‘결혼 생활의 연출’이라고만 얘기했으니까, 나는……. 나는 다 그런 건 줄 알았지! 정대만이 ‘남편’으로서의 자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를 뻐기기 위해 그런다고만 생각했지, 처음부터 날 좋아해서 이랬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애초에 이 사람 이전까지 그런 티 낸 적도 없고! 단둘이 만나 그렇게 술 먹고 밥 먹고 커피 먹고 놀면서도 한 번도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내가 아는 정대만 전 여친만 해도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게 여섯 명인데.

…그러고 보니 이 선배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지? 최소한 3, 4년 전부터는 누굴 만나는 걸 못 봤던 것 같은데.

“태섭아.”

“조용히 좀 있으라니까?”

“너, 정말 싫었냐?”

“뭐가요.”

“내가 너한테 했던 것들. 결혼하자고 졸랐던 거. 정말 싫기만 했어?”

어느새 차는 신호등의 빨간불에 멈춰 서 있었고 대만 선배는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진지한, 그리고 어딘가 아픈 얼굴이었다. 매사에 당당하고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내 앞에서 상처 입은 티를 이렇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뭐라고 형이 그런 눈을 하는 거예요. 속이 은근하게 울렁거렸다.

“싫었으면 솔직히 말해. 더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너한테 더 미움 사고 싶지 않아.”

미움을 산다고. 억지로 키스 당하고 혀를 깨물었던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그럴 만 하다. 결혼하기 싫다고 강경하게 말한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당장 나가라고까지 했으니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고도 남았겠지. 그럼 내 입장은? 나는 정말로 대만 선배가 미웠나? 이 사람이 싫은가? 키스 당한 건 차치하고 일단 이성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송태섭은 정대만을 어떻게 느꼈나?

정대만의 억지가 싫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두 달가량의 신혼 놀이를 즐겼냐고 한다면, 그것도 또 아니다. 혼자 꾸려 가는 데 익숙하던 내 삶에 누군가가 불쑥 침입해 자신의 존재감을 가득 새겨놓는 감각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유쾌하다고 하긴 어려웠다. 대만 선배가 결혼하고 싶다며 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29년 동안 유지해 온 인생의 규칙들을 전부 재정비해야만 했다. 이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양보해야 했다. 그만큼 집주인의 권리로 양보 받은 것도 많았지만 막상 생활하다 보면 또 어긋나고 부딪히는 바람에 몇 번씩 다시 조정하고 맞춰가야만 했다. 그건 감독님이나 주장 형의 말대로 정말 귀찮고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작업이 끝나 정말로 서로가 딱 맞아 들어갔을 때는……. 솔직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안정감이 있었다. 내가 건넨 패스가 대만 선배의 슛과 득점으로 정확히 연결되었을 때와 같은 느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완벽히 합일되었을 때 따라오는 기쁨, 설렘, 벅참, 두근거림, 행복, 이 순간을 ‘이 사람과 함께’ 영원히 간직해도 좋을 것 같다는 작은 생각,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며 느끼는 편안함과 따스함, 성공적으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독점적 관계가 주는 묘한 포만감과 충족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나는 그래서 대만 선배를 쫓아낸 뒤에 더 화가 났던 걸지도 몰랐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집의 모습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 이 사람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딱 맞물리게 조정해 놓은 톱니바퀴가 쑥 빠져버린 게 속상해서, 본인이 멋대로 시작한 일에 어떻게든 장단을 맞춰놨더니 또 멋대로 중간에 그만두고 사라진 것에 조금은 배신감까지 느껴서.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두 달 간의 생활로 내가 대만 선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혼란스러웠고,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나를 대만 선배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나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참지 못한 뒤차가 경적을 크게 울리고 나서야 대만 선배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 엑셀을 밟았다.

남은 길을 달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두 달 동안 함께 탔던 게 수십 번은 될 텐데도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숨이 막히도록 어색하고 조용했다. 대만 선배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계기판의 숫자가 변하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보는 척 그 옆모습을 가만히 흘끔거렸다. 말을 걸어야 하나 싶었지만 무슨 말로 운을 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같이 들어가는 거 오랜만이네요? 예전 생각 난다? 아이씨, 왜 다 생각나는 게 이상한 구남친 대사 같은 것밖에 없냐고!

기껏해야 30초나 될까 한 짧은 시간이 마치 3분처럼 길게 지나가고,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복도를 지나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 가방 속 물건이 덜그럭대는 소리와 두 사람분의 발소리 밖에 없었다.

“짐 어디에 뒀어?”

현관이 닫히고, 거실 불을 켜는 내게 대만 선배가 물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문 앞에 선 채였다. 원래 있던 방에요. 대답을 해주자 그제야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몇 주 동안 굳게 닫혀 있던 건넛방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물건들이 난잡하게 쑤셔박힌 이사 박스와 캐리어를 가만히 쳐다보던 대만 선배는 이내 패딩을 벗고 묵묵히 웃옷 소매를 걷어붙였다.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인 물건들을 틈 사이로 어떻게든 집어넣으며 최대한 안정적인 형태를 만들려 애쓰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옷을 다 갈아입고 올 때까지도 건넛방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가에 기대 서서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내가 너무 아무렇게나 넣어놔서 지금 조금 뒤적인다고 될 게 아닐걸요. 정리 해야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오늘은 절대 못 가져갈 거예요.”

내 말에 대만 선배가 우뚝 손을 멈췄다. 잠시 물건들을 들여다보더니 자기 생각에도 그렇겠다 싶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상자 안쪽까지 깊게 들어가 있던 팔을 쑥 빼낸다. 위태롭게 걸려 있던 쉐이빙폼 통이 빠져나오는 손끝과 부딪혀 바깥으로 퉁 튀어나왔다. 데구루루, 바닥에 떨어져 내 발치로 굴러온 통을 집어 들었다. 이리 줘. 대만 선배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손만 내밀었다. 넓게 펼쳐진 손바닥 위에 통을 올려주자 대만 선배는 그걸 상자에 대충 쑤셔 넣고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내리며 무릎을 폈다. 옆에 널브러져 있던 패딩을 집어 들고 팔을 꿰는 동안 선배는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꿋꿋하게 방바닥만 내려다보며 옷을 입었다.

“그럼 내일 와서 정리할게. 아침 먹고, 대충 여덟 시쯤 올 테니까.”

“…….”

“잘 자라. 오늘 경기 고생했다.”

지퍼를 채운 대만 선배가 문가에 서 있던 나를 지나쳤다.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을 짚고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양이 꽤나 거슬렸다. 왜 날 보지 않아? 왜 다시 경기장에서처럼 사람을 무시하려 들지? 차에서는 좋아한다느니 어쩌느니 자기 할 말은 사람 충격 받든 말든 다 해놓고, 싫었냐는 질문에 대답 안 한다고 출발도 안 하고 빤히 쳐다만 보던 게 누군데 지금 와서 또 갑자기. 정말 이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싶어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사람 감정이 일방적이야?

그래, 뭐 일방적인 건 그렇다 치자.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 때부터 정대만이 일방적이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거랑 이건 다르지!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나 좋아한다며? 선 보러 다녀왔다고 화내고 그런 식으로 입술 뺏어간 것도 다 그것 때문 아니었냐고. 그런데 왜 또 날 피하냐고! 자기만 감정 다 쏟아내고 나면 다야? 어? 애초에 이 신혼 놀이 자체부터가 저쪽의 일방적인 감정 표현이긴 했지만, 바로 그 일방적인 감정 표현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됐단 말이다. 그러니까 또 이딴 식으로 세상에 자기 감정 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거 용납 못 해. 당신이 마음 편히 날 피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내 인생에 이런 식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들쑤셔 놓을 거면 끝까지 책임지란 말야. 당신이 그런 말, 그런 행동을 해버려서 나는 안 괜찮아졌으니까 당신도 똑같이 안 괜찮아야 공평하잖아.

그래서 정대만의 커다란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고 가요.”

“…뭐?”

“자고 가라고요. 지금 10시가 넘었는데 언제 또 형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와. 피곤하고 번거롭게.”

대만 선배가 나무토막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어쩌라고. 내가 한 쪽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자 대만 선배가 가만히 눈가를 찌푸렸다. 자고 가라고? 벌써 난청 왔어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되묻자 선배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자. 고. 가. 요. 한 음절 한 음절 강세를 주어 한 번 더 말하자 대만 선배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오늘만 정대만 한숨 몇 번째 듣고 있는 거냐? 아주 땅이 꺼지겠다, 꺼지겠어.

“그럼 소파에서 잘게. 이불만 꺼내 줘.”

“형 사이즈도 안 맞는데 소파에서 어떻게 잔다 그래요. 침대에서 자요.”

“그럼 네가 소파에서 자게?”

“뭔 소리야. 내가 집주인인데 왜 내가 소파에서 자.”

소파 쪽을 보고 있던 대만 선배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다. 그럼 뭐 어쩌자는 건데? 대만 선배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베개 꺼내줄 테니까 같이 자자고요. 형 여기 있었을 때처럼.”

그러자 정대만의 표정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대만 선배가 오른손으로 제 입가를 덮더니 두어 번 천천히 문질렀다. 진심이냐?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대만 선배는 바람 빠진 소리로 헛웃음을 한 번 터트리더니 아예 마른세수를 했다. 씨발……. 미치겠네, 진짜. 손바닥 아래로 정대만의 뭉개진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자기가 미치긴 뭘 미쳐, 미치고 싶은 건 이쪽이지. 여전히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꼴을 가만 보다가 몸을 돌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됐고,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요. 양치할 거면 그 박스에서 칫솔이랑 알아서 꺼내 오고. 형 옷도 다 거기 있으니까 그것도 알아서 챙겨요.”

“정말 진심 맞아?”

…이건 또 뭔 소리야.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얼굴에서 손을 치운 대만 선배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뭐가요. 뭐가 또 진심 타령인데요. 그냥 늦었으니까 자고 가라는 거잖아.”

“그거 말고 같이 자자는 거.”

“그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정말로 너랑 같은 침대에서 자도 괜찮은 거냐? 내가 그런…… 짓을 해서 나가라고 한 거잖아. 그런데 지금 같이 자자고? 너 진지하게 잘 생각하고 말 해. 괜히 욱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 나중에 후회할 말 하지 말고. 정말 나랑 같이 자도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내가 진심으로 그 소리 한 거 맞으면 형이 뭐 어쩔 건데요.”

“진심이면……. 나는 좋지. 같이 자는 거지.”

“그럼 됐네. 자면 되잖아요. 못 잘 게 뭐 있어, 이미 두 달을 부대끼고 잤는데.”

“이거 봐, 너 욱해서 하는 소리 맞잖아.”

“아씨, 욱한 거 아니라고! 그럼 뭐 내 진심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데! 이번엔 내가 형한테 키스라도 할까? 아니면 뭐 옷이라도 벗고 잘까요? 어? 그러면 믿을 거야? 인정해 줄 거냐고!”

“왜 또 말이 그렇게……. 하……. 아니다, 태섭아. 나 그냥 내일 아침에 다시 올 테니까 우리 둘 다 좀 가라앉히고 내일 다시 보자.”

급격하게 힘이 빠진 표정으로 입을 다문 정대만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등을 돌렸다. 으득. 그 뒷모습을 보자 이가 갈렸다. 목구멍 저 깊은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정대만이 잠금장치를 누르기 전에 눈앞에 보이는 패딩 모자를 강하게 낚아챘다. 으헉. 중심이 뒤로 쏠린 정대만이 놀란 소리를 내며 다리를 크게 휘청였다. 그 패딩 모자를 내동댕이치듯 손에서 놓고 나는 핏발 선 눈으로 정대만에게 화를 냈다.

“뭘 가, 가지 마. 뭐 어딜 간다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형이 왜 가냐고. 아, 말하니까 진짜 열받네. 왜 형은 맨날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가?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거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난 그냥 여기 있었는데, 그냥 내 인생 살고 있었는데 형이 먼저 왔잖아. 그렇게 먼저 와서는 가만히 있던 사람 다 건드려놓은 거 형이잖아! 형 때문에 난 이제 잠도 제대로 못 자. 맨날 새벽 3시에 한 번씩 깨서 피곤해 죽겠어. 형 때문에 냉장고에 잔뜩 있던 것도 혼자 억지로 먹다가 반은 버렸어. 알아? 그리고 두 달 동안 대체 남의 집에 물건은 또 뭐 그렇게 많이 갖다 놓았고 남의 물건은 또 뭐 그렇게 많이 쓰셨대요? 이것도 형이 쓰던 거고, 저것도 형이 쓰던 거고, 이 집의 온 사방이 다 정대만이야. 진짜 전세 계약만 아니면 집부터 치워버렸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이틀 동안 본가에서 뭉개고 있다가 송아라한테 한소리나 듣고. 진짜 기분 엿같아. 정대만이 뭐라고 내가 내 인생도 감정도 통제 못 해서 오늘 경기까지 다 망쳐야 하는 건데? 이게 다 형이 남의 인생 들쑤셔놓고, 이것저것 다 건드려놓고 책임도 안 지고 멋대로 가버려서 그렇잖아. 그래 놓고 혼자서 괜찮은 얼굴로 농구는 또 존나게 잘 하고. 짜증 나, 왜 형은 괜찮아? 안 괜찮아야 하는 게 오히려 형 아니야?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맨날 화내고 성질부리고 있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자고 가! 형 때문에 내 주변이 싹 다 망했으니까 형이 전부 책임지고 여기 남아 있으라고! 같이 자는 거든 뭐든, 난 형이 안 괜찮을 짓 혼자 괜찮고 멀쩡하게 다 할 거니까! 알았어?!”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휩싸여 뇌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온갖 말을 다 토해내고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대만 선배는 씨근덕거리는 나를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몇 번 지근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알았어. 자고 갈게.”


그래서 좁아터진 슈퍼싱글 침대에 남정네 둘이 다시 함께 누웠다. 대만 선배는 어떻게든 침대 끝에 바짝 붙어 이쪽과 떨어지려고 했지만 보란 듯이 그쪽으로 돌아 누우니 결국 팔을 둘러 내 몸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팔이 저리고도 남을, 아주 불편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밤새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팔을 올리고 하도 불편해하는 기색이길래 뭐 끙끙대다가 밤이라도 새실 셈인가 싶었더니 이 인간은 일찍 잠드셨다. 불을 끈 지 대충 30분도 안 돼서 들리기 시작하는 고른 숨소리가 기가 막혔다. 말이랑 행동이 일치라도 했으면 덜 밉기라도 하지, 진심이니 뭐니 꼴값이란 꼴값은 다 떨어놓고. 진짜 짜증 난다. 정대만이 잠들면 꽤 깊게 곯아떨어지는 타입이란 걸 잘 알아서 괜히 앞머리나 한 움큼 쥐고 세게 잡아당겨 주었다. 새치라도 있었으면 그거 핑계로 다 아프게 뽑아버렸을 텐데 쓸데없이 모발도 건강한 게 더 얄미웠다.

오히려 잠이 안 오는 건 이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심장이 뛰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바람에 잘 수가 없었다. 당신이 멀쩡한 게 짜증 나니까 안 괜찮을 짓을 잔뜩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정작 또 괜찮지 않은 게 이쪽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번 이렇다. 정대만과 있으면 나는 늘 지는 사람이 되고 흔들리는 사람이 된다. 심지어는 이 말도 안 되는 ‘좋아한다’는 고백에조차 흔들린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동요하고 싶지 않은데, 이 사람이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눈앞에 보이는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에 속절없이 휘둘리고 만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언젠가처럼.

그렇지만 선배가 미운 건 아니다. 가끔은 싫지만, 진짜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을 만큼 싫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단번에 답하기도 어려워. 정말 복잡한 존재다. 정대만이라는 사람은. 그래서 화가 났다. 한 마디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난해한 감정을 자꾸만 느끼게 되는 게 싫었으니까, 너무나 낯설고 혼란스러웠으니까.

내가 선배에게 느끼는 감정이 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첫 단부터 잘못 떠서 완전히 엉망이 된 송아라의 목도리처럼, 너무 복잡하게 꼬여버려서 이제는 제대로 된 형태도 올바른 코의 위치도 찾을 수가 없어졌다. 아까 전까지는 감정에 휘둘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정말로 대만 선배의 짐을 전부 빼거나 고집을 부려 굳이 함께 잔다고 해서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엉망인 것에 섣불리 손을 대 봤자 더 엉망이 될 뿐이라는 건 지겹게 학습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쑥대밭이 된 목도리를 고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개판으로 엮인 실을 전부 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바르게 떠 나가는 것. 그리고 그건 아마 이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함께 맞는 아침은 놀랍도록 익숙하면서도 끔찍하게 어색했다. 당연하겠지. 하루 몸을 맞대고 잔다고 해서 이미 쌓인 앙금이나 어젯밤 내뱉은 말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5시 반에 울리는 알람을 듣고 일어나 세수를 해서 잠을 깨우고 아침을 준비해 식탁을 차리는 내내 서로의 손발은 착착 맞아 들어갔지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만 선배는 나와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식탁에서도 그냥 묵묵히 제 몫으로 차려진 밥과 국을 떠먹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굿모닝 뽀뽀를 당하고 대만 선배를 잔뜩 때렸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랑 똑같네. 인간 고집 하고는.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 내가 말해야지 뭐. 어쩌겠냐.

“밤중에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슬며시 운을 떼자 대만 선배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고개는 숙인 그대로, 녹갈색 눈동자만 스르륵 밀어 올린다. 탐색을 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여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참 나, 그렇게까지 경계 안 해도 되거든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런 핀잔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삼키고 어제 새벽 내내 생각했던 것을 차근히 풀어놓았다.

“형이 남편으로서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어요. 정대만을 남편으로 두면 이런 건 받고 살 수 있겠고 이런 건 내가 해 줘야겠고 하는 각은 나왔거든요? 그런데 결혼 생활은 그런 역할 분담이나 기브 앤 테이크만으로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평생을 함께 하기를 약속하는 거니까, 거기엔 정이든 사랑이든 전우애든 하여튼 어떤 감정적인 교류가 분명히 있어야 그 긴긴 시간 동안 유지를 할 수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게 없고 말이에요.”

“…….”

“일단 형이 날 좋아한다고 먼저 얘기했으니까 형 쪽부터 얘기해 보자면요, 나는 형이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날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그동안 형이 했던 건 결혼 생활의 그럴듯한 흉내고 기능성을 광고하는 연출이지, 사랑의 행동은 아니었잖아요. 나도 그래서 더 헷갈렸고 짜증 났던 것 같고.”

“…….”

“그러니까 아직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그게 변함없는 진심이라면, 어제 형이 차에서 말했던 대로 해요. 처음부터 제대로 단계 밟아요. 지난 두 달은 체험판 같은 거였다 치고.”

그 말에 대만 선배가 아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게 뜨여진 눈에는 갑작스러운 혼란, 놀람, 감격, 기쁨, 의심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선배의 눈 안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머쓱해져 이번에는 내가 눈을 내리깔았다. 샐러드 야채만 포크 끝으로 쿡쿡 찔러대며 남은 말을 천천히 이었다.

“…나도 내가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기능적으로 이런 걸 할 수 있겠구나는 알게 됐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 뭘 해줘야 할지는 몰라요. 형도 알지만 나 연애 경험이 없거든요. 사실 사랑도 잘 몰라요. 맨날 짝사랑하다 차이기나 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나보다 사랑 훨씬 많이 해 본 형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우리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처음부터 알아가요. 결혼은 그런 뒤에 다시 이야기해요. 일단 우리가 이거 먼저 해 본 후에. 그게 내가 어젯밤 내린 결론이에요. 끝.”

모든 말을 다 듣고도 대만 선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슬쩍 눈을 들어보니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대만 선배는 반응을 기다리다 못한 내가 샐러드 야채를 반쯤 퍼먹을 때가 되어서야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태섭아. 그러더니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른다.

“왜요.”

“나 하나 허락받고 싶은 게 있거든.”

“뭔데요.”

“키스해도 되냐.”

“뭐라고요? 미쳤어? 안 돼요.”

“처음부터 하자며!”

“누가 처음부터 키스를 해!”

“그런 처음도 있는 거야!”

“됐고! 시끄러우니까 밥이나 먹어요. 마음 바뀌어서 진짜 쫓아내기 전에.”

윽. ‘진짜 쫓아낸다’는 말에 대만 선배가 어깨를 움츠렸다.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다시 묵묵히 밥이나 뜨기 시작하는 게, 송태섭 미쳤구나 싶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은 귀여웠다. 그래서 다음 말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건네기로 했다.

“설거지는 형이 해요. 원래도 아침에는 형이 했잖아.”

https://youtu.be/SFgIPa6HaLs?si=tPYCqAhGGmlU5ahs

yama -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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