逆境
올해 나이 서른,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를 그만두었다.
Dios - Misery
코트에 발이 닿는 순간 미츠이 히사시는 알았다. 이제 무릎이 꺾일 것이다. 익숙하고 잘 아는 통증이 그를 덮칠 것이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미츠이는 무릎을 움켜쥐고 코트에 쓰러졌다. 놀란 선수들과 심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관중석에서 웅성웅성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부축을 받아 겨우 교체되어 나간 미츠이는 익숙한 의사를 또다시 마주했다. 엑스레이 사진을 살피던 의사는 역시 익숙한 어조와 목소리로 진단했다. 곧바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네 번째 부상이었다.
신문에 보도된 미츠이의 부상 소식을 보고 팀의 팬들은 화를 냈다. 대체 몇 번째 부상이야? 부상으로 시즌 제대로 못 뛰는 게 도대체 몇 번째냐고? 재활한다고 퍼포먼스도 떨어지고, 경기만 뛰면 무릎 걱정 해야 하고. 제대로 써먹기도 힘든데 연봉은 많이 받아 가고. 그럴 거면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건강한 선수를 사 와서 키우는 게 낫겠다. 처음 드래프트 됐을 때나 쓸 만한 선수였지, 지금은 한물 다 가서는. 일본 제일의 슈터 소리를 듣던 것도 옛말이지. 수군대는 비난을 굳이 찾아 듣지 않아도 미츠이도 알았다. 모를 수가 없다. 오히려 본인의 몸이니 더욱 잘 알았다. 더 이상 무릎이 견뎌주기 힘들다는 걸, 이미 한계는 찾아왔고, “이제는 어렵다”는 걸.
농구는 점프가 많은 스포츠다. 지상으로부터 305cm 위의 골대에 공을 넣기 위해서는 무조건 높게 뛰어올라야 한다. 착지할 때 무릎과 발목이 겪는 부하는 당연하게도 상당하다. 매 경기 보호대를 차고 뼈와 관절에 좋다는 음식들을 전부 챙겨 먹었어도, 고등학생 때를 합해 이미 다섯 번이나 부상과 수술을 겪어낸 무릎이 한계를 호소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단지 그게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였을 뿐. 미츠이도 그걸 잘 알았다. 나이를 충분히 먹을 만큼 뛰고 박수를 받으며 코트에서 내려오기보다는 부서진 무릎으로 쫓겨나듯 실려 나올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무시했었다. 외면했었다. 왜냐면 미츠이에게는 농구가 전부였고 곧 삶이었으니까. 인생에서 가장 크게 방황했던 이유도 농구였고 가장 크게 행복했던 이유도 농구였으며 가장 사랑한 것도 농구였으니까. 미츠이는 제 모든 것을 사이드라인 28m, 베이스라인 15m짜리의 코트 위에 바쳤다.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를 위해 살았다. 그가 먹는 음식도, 하는 운동도, 취하는 수면도 모두 더 농구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미츠이 히사시에게서 농구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논할 수 없었다.
다시 코트로 돌아온 후 미츠이는 한 번도 농구를 하지 않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렸던 은퇴의 장면조차도 후련할 정도로 뛸 만큼 뛴 후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꽃을 안고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모습이었지, 이런 식으로 짐짝처럼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무릎으로는 더 이상 40분의 경기를 견딜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말았을 때 미츠이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허망함이었다. 그렇게 사랑하고 숭배했던 것이 한순간에 떠나가는 감각. 그 감각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에게 영원히 버림받았다.
네 번째 부상은 미츠이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수술을 앞두고 누운 병상에서 미츠이는 퉁퉁 부어오른 무릎을 안고 울었다. 고통스러웠다. 신체의 고통은 진통제로 달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삶을 잃은 남자의 마음의 고통은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그에게서 농구를 빼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농구에 바쳤기에, 농구를 하지 않는 미츠이 히사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미츠이에게는 껍데기만 남았다.
병실의 TV에서는 농구 중계가 흘러나왔다. 미츠이는 그 채널을 보지 않았다. 미츠이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코트 위의 동료들은 아직도 농구를 가지고 있었다. 미츠이가 가장 원하고 사랑했던 것은 이 열렬한 신자 대신 그들을 제 사람으로 선택했다. 부럽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몸싸움을 하고 몇 번이고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면서도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발목이 꺾이지도 않는 그들을 질투했다. 대체 어떤 차이가 있길래 그들은 멀쩡하고 미츠이는 이렇게 다쳐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수술대에 오르면서 미츠이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지독한 꿈이면 좋겠다고, 꿈에서 잠들면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마취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고, 다시 농구화의 끈을 묶고 힘찬 발걸음으로 코트 위에 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미츠이를 맞은 것은 익숙한 병실의 천장이었다. 구불대는 지렁이 같은 무늬가 빼곡한 천장, 침대 주변을 둘러싼 커튼, 딱딱한 침대와 뻣뻣하게 버석거리는 이불, 그리고 알싸한 소독약의 냄새. 무통 주사의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철심이 한 번 더 박힌 무릎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미츠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팀 동료들이 병문안을 왔다. 져지를 입고 농구화를 가방에 매단 채 오늘의 경기가 어땠는지를 이야기했다. 누가 몇 득점을 했는지, 누가 멋진 슛을 선보였는지, 누가 어떻게 공격을 막고 수비수를 따돌렸는지, 누가 멍청한 실수를 해서 질타를 받았는지를 늘어놓았다. 미츠이의 괴로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당연하고 즐거운 목소리로. 선택받은 자들이 버림받은 자 앞에서 농구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야기하는 꼴을 미츠이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있는 힘껏 화를 냈다. 베개를 집어 던지고 단단한 과일을 집어 던졌다. 미츠이의 텅 빈 껍데기 안으로 분노와 우울이 차올랐다.
이제는 예전처럼 뛸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자 미츠이는 모든 것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제 무릎이 미웠고 그날의 점프가 미웠다. 오늘의 운세에서 꼴등을 기록한 제 별자리도 미웠고, 하필이면 그날 미츠이를 선발 출장시킨 감독도 미웠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안게 만든 고등학생 때의 제가 미웠다. 저와는 달리 여전히 코트에서 뛰고 있는 동료 선수들이 미웠다. 제게 패스를 했던 가드가 미웠다. 같이 농구를 하던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하자 농구마저 미워졌다. 밉다 못해 싫었다. 까슬해서 손바닥을 거칠게 만드는 농구공이 싫었고 미끄러운 코트 바닥이 싫었다. 심판의 시끄러운 휘슬이 싫었다. 미츠이를 다시 살려내던 그물의 출렁거림도 싫었다. 농구라면 치를 떨었다. 미츠이는 고등학생 때로 돌아갔다. 빛나는 아카기를 보고 싶지 않아 뒤돌아서던 목발 짚은 소년의 모습이 미츠이의 등 위로 겹쳐졌다.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미츠이는 고등학생 미츠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올해 나이 서른. 가와사키의 슈터,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를 그만두었다.
미야기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표를 샀다. NBA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그는 마지막 경기가 끝난 그날 밤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야기의 닦달을 못 견딘 에이전시 직원이 공항까지 그의 여권과 옷가지 몇 벌이 든 짐을 들고 나왔다. 단출한 짐이었다. 짧은 감사 인사만 남기고 미야기는 곧장 출국장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하루빨리 미츠이에게 가야만 했다. 미츠이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의 미야기에게는 미츠이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여권을 내미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열두 시간이 족히 넘는 비행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은은하게 불이 꺼진 조용한 객실은 수면을 위한 완벽한 환경이었으나 미야기는 한숨도 잠들 수가 없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경기의 여파로 혈관에 남아 있는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아니면 미츠이를 만나기 전의 불안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야기는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츠이 히사시의 은퇴 선언은 그날 바로 미야기 료타에게 알려졌다. 당연했다. 세간에 공표하지만 않았을 뿐 그들은 대학 때부터 사귀어 온 오랜 연인이었고, 주변인들은 그걸 모두 알았다. 그래서 가와사키의 프론트에서 일하는 야스다가 미야기에게 미츠이의 소식을 전하는 것도 절대 낯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의 전화는 그동안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미츠이 선배가 은퇴하겠대. 료타 너에게 상담한 적 있어?”
야스다가 심각한 목소리로 전한 말을 듣는 순간 미야기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부상 소식은 신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도 크게 했다. 하지만 그냥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뿐일 거라 여겼다.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재활에 힘써 재차 코트에 오를 거라고 믿었다. 왜냐면 미츠이는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미츠이 히사시는 포기가 서투른 남자니까. 그래서 미츠이가 부상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루트는 미야기의 머릿속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의 미츠이는 그 존재하지 않던 루트를 선택했다. 부상을 이겨내길 포기했다. 해는 사실 서쪽에서 뜨고 우주선 바깥에서 우주복을 벗어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증명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미야기는 야스다에게 미츠이를 최대한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붙잡아 달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시즌 중간에 은퇴 선언이 공식적으로 나가는 건 막아달라고. 몇 개월 뒤면 리그가 끝나. 그때까지만 막아주면 내가 일본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볼게. 알잖아, 그 사람 남의 말은 잘 안 듣지만 그래도 내 말은 좀 들어주는 거. 그 사람을 제일 잘 아는 건 나니까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거야. 폭풍 속을 헤매는 조각배처럼 형편없이 흔들리는 미야기의 목소리에 야스다는 차분하게 그를 달랬다. 우리도 미츠이 선배 같은 좋은 슈터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아. 나도 코트에 올라 있는 미츠이 선배의 모습을 가장 좋아하니까, 최대한 노력할게. 너무 걱정 마. 미츠이 선배가 계속 뛰었으면 좋겠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최선을 다하겠다는 야스다의 말을 뒤로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미야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해에 잠긴 것처럼 폐가 눌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붙잡고 미야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리그가 한창인 한겨울, 흐린 하늘에 눈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미야기는 어느 날의 옥상을 떠올렸다. 지독한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나리타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카나가와까지 먼 거리였지만 돈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미츠이의 곁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피가 나도록 손톱을 물어뜯고 몇 번이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불안과 초조에 미쳐가는 미야기를 보고 택시 기사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손님이 원하는 대로 빠르게 목적지에 내려 주기 위해 속도를 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만 엔권까지 내고 도착한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미츠이 선배! 선배, 있어요? 미야기예요.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며 현관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이 감도는 집안은 싸늘하고 어두웠다. 미야기는 닫힌 방문을 하나하나 열었다. 히사시 씨, 어디 있어요? 좀 나와 봐요. 당신의 료타가 왔다고요. 하지만 주인 없는 집에는 삶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공허만이 공기 중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모든 방의 문을 열고, 남은 건 욕실뿐이었다. 문틈 사이로 따뜻한 습기가 느껴졌다. 욕조가 데워져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욕조만이 따뜻하다. 그건 뭘 뜻하는 걸까. 갑자기 겁이 났다. 미국에서 접한 적 있던 드라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손잡이를 잡으려다 말고 미야기는 그대로 멈춰 섰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문을 여는 것이 두려웠다. 미야기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을 잡아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미야기?”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미츠이 선배? 미야기는 정신없이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목발을 짚고 다리에는 검은 보조기를 찬 남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갑자기 안도감이 밀려와 미야기는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새하얘진 미야기의 얼굴을 보고 미츠이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헛것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내가 귀신이라도 되냐.
“어디……. 어디 갔었어요?”
“요 앞 편의점에.”
“공항에서 바로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불도 다 꺼져 있고.”
“아아. 나갈 땐 보통 끄고 다니니까. 습관이라서.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
대수롭지 않게 사과한 미츠이는 비틀거리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불편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 보행, 살과 근육이 내린 몸, 언뜻 봐도 굵기가 어렴풋이 차이 나는 양다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웠다. 스위치를 올려 불을 다시 켠 미츠이가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그 느릿한 발걸음을 뒤따라가던 미야기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선배……. 부상이 3개월도 더 전인데요. 목발은 이제 뗄 때가 되지 않았나요.”
미츠이와 연애를 하면서 무릎 부상에 있어서는 미야기도 의료 스태프 못지않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야스다에게 전달받은 진단명과 수술 내용대로라면 미츠이의 부상은 지금까지 목발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목발 보행은 6주다. 보조기야 계속 착용하더라도 이 시점이라면 이미 스스로 보행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게다가 이 앞의 편의점이라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 것을. 미야기의 안에서 묘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재활은 잘 하고 있는 거죠?”
“안 해.”
“뭐라고요?”
“재활 안 한다고.”
어차피 농구 그만둘 거니까. 의미 없잖아, 재활 따위. 걷는 거야 지팡이만 있으면 되고. 미츠이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거기에는 아쉬움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다. 심지어는 고통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모든 결정을 이미 내린 사람의 껍데기만 남은 텅 빈 목소리였다. 미야기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농구를 그만두겠다고요?”
“야스다가 말하지 않았어? 그 녀석 너한테 내 이야기 자주 하잖아. 분명 진즉에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설득해 달라고 했고요.”
“그래서였나. 어쩐지 귀찮게 굴면서 사람 물고 늘어진다 했지. 나는 이미 결정을 다 내렸는데 말이야.”
내가 먼저 신문에 제보할까 생각도 했다고. 우체통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그만뒀지만. 자기 딴에는 농담이었는지 미츠이가 킬킬 웃었다. 미야기는 웃을 수 없었다. 미츠이는 비닐봉지에서 꺼낸 물병과 맥주캔을 한 손에 들고 싱크대를 짚으며 냉장고로 향했다. 바닥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절뚝이는 왼 다리가 미야기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왜 혼자서 그런 결정을 해요?”
“뭐?”
“적어도 상담 같은 건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면 내가…….”
“내가 내 인생 결정까지 하나하나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냐? 너, 내 나이 자각하고는 있냐? 난 지금 서른이라고. 누군가에게 뭘 검토받을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어. 은퇴를 언제 어떻게 할지 정도는 내가 알아서 결정해.”
“하지만 나는 당신 연인이야. 이런 중요한 일을 적어도 나에게는 이야기해줄 수 있었잖아요, 혼자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연인이라면 이렇게 참견해도 괜찮은 거냐? 주제넘지 마, 미야기. 너한테 미츠이 히사시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고.”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뭔데! 너에게 말을 했으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했을 것 같냐? 내 부상이 없던 일이 되기라도 하냐고!”
미야기가 언성을 높이자 미츠이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집이 떠나가라 싸웠다. 미야기는 상냥하게 위로하는 방법을 몰랐고 미츠이는 자존심이 강했다. 두 사람은 결국 미츠이의 부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먼 과거의 일들까지 끄집어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운 고성에 이웃이 민폐라고 화를 내고 경찰이 찾아올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경찰을 보내고 나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너덜너덜한 가슴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쉰 미츠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에 가 누웠다. 무릎 때문에 돌아누울 수가 없어 고개만 벽 쪽으로 돌린 자세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미야기와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미야기도 미츠이의 방문을 쾅 닫았다. 문 뒤로 미츠이가 베개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집은 불편한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미츠이는 문득 제 옆에 들러붙어 있는 묵직한 무게를 느끼고 눈을 떴다. 게스트룸에 따로 짐을 풀었을 미야기가 미츠이의 옆구리에 딱 붙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오키나와 출신인 주제에 여름만 되면 덥고 습하니까 저리 떨어지라고 발버둥 치던 녀석이 이 여름밤에 먼저 미츠이에게 달라붙어 있다. 미츠이는 제 옆의 미야기를 바라보다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잠결에 손길을 느꼈는지 미야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기가 은은히 도는 미야기의 갈색 눈에는 더 이상 분노도 짜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안해요, 히사시 씨. 미야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미츠이에게 키스했다. 미츠이가 입을 열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다물린 입술을 핥았고 몇 번이고 쪽쪽 입을 맞췄다. 그저 제 애정을 내보이며 화해를 청했다. 목석처럼 누워 있던 미츠이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미야기의 뺨을 제 손으로 감쌌다. 한동안 물기 어린 소리가 오갔다.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옷을 벗었다. 굳이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미야기는 아래로 내려가 미츠이의 것을 입에 담으면서 스스로 아래를 풀었다. 미츠이가 미야기의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낮은 신음이 흘렀다. 손가락 세 개가 부드럽게 오가게 되었을 때 미야기는 미츠이의 위에 올라탔다. 미츠이의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뒤에 손을 짚어 무게를 온전히 지탱한 후 천천히 내려앉았다. 반년 동안 아무것도 품지 않은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졌다. 미츠이는 미야기의 허리를 잡아 삽입을 도왔다. 미츠이를 반쯤 담은 채 숨을 고르던 미야기가 이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 야릇한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다음날 두 사람은 같이 아침을 먹었다. 전날 목이 쉴 정도로 싸워댄 것치고는 꽤 평온한 식사 자리였다. 미야기는 미츠이의 어머니가 가져다주셨을 게 분명한 음식들을 데우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재료들로 오믈렛을 만들어 내놓았다. 맛있네, 바로 만든 요리는 오랜만이야. 미츠이는 꽤 기쁜 얼굴로 식사를 했다. 미야기의 오믈렛은 거의 다 미츠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야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장을 봐야겠어요. 차 좀 써도 되죠? 미츠이는 그러라고 대답했다.
“냉장고가 거의 비어서 이것저것 사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내가 장을 보러 가면 미츠이 선배는 뭘 할 예정이죠?”
“별로 아무 예정도 없어. 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누워 있거나 TV를 보거나, 답답하면 목발 짚고 조금 돌아다니는 정도지. 재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농구 그만두는 것도 꽤 괜찮아. 이렇게 느긋하게 쉬어본 건 아주 오랜만이거든. 그리고 여전히 농구를 그만두는 이야기를 했다. 미야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미츠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침 뉴스가 나오는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원 온 원 하고 싶진 않아요?”
즐거워했잖아요. 내가 전력으로 부딪혀 오면 재미있다고 더 불타올랐으면서. 미야기의 말에 미츠이가 눈동자만 굴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질린 것 같기도 했다.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힘들고 숨차고 지치기만 하는걸. 어차피 이 다리로는 하지도 못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목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선배와 원 온 원 하고 싶은데. 미야기가 다시 한번 말했다. 료타. 미츠이가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입에 담았다. 미츠이는 강하게 바라는 게 있을 때면 미야기를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만둬.”
낮은 경고가 이어졌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않아. 하지만 난 이젠 농구가 질렸어. 지쳤고. 나는 좀 쉬고 싶어. 그럴 때도 되었잖아, 이 엉망진창인 무릎을 가지고 오래도 뛰었으니까. 네가 내 연인이라면 내가 무슨 결정을 하든 당연히 존중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건가?”
“하지만 좋아했었잖아요, 농구. 이렇게 그만두는 거 아쉽지 않아요?”
미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 미야기는 거기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미츠이는 아직 농구에 미련이 있다. 말로는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저 깊은 무의식에서는 아직 농구를 하고 싶어 한다. 농구화를 신고 공을 던지고 싶어 한다.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미야기는 중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차갑고 외로운 도시에서 홀로 공을 튕기던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준 또 다른 소년을 떠올렸다. 어린 미츠이와의 짧은 만남은 미야기가 결국 입부 신청서를 다시 쓰게 된 계기였다. 그날 미츠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있었더라도 미야기의 공을 집어 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미야기 료타는 없었다.
미야기 소년은 농구 따위 그냥 심심풀이로 혼자 공을 가지고 노는 정도로 취급했다. 같은 코트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 사이에 굳이 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외롭지 않다고 자기암시를 걸었다. 하지만 미츠이와 잠시나마 공을 튕기면서 어린 미야기는 떠올렸다. 형과 승부를 겨루던 때의 흥분감, 재미, 긴장으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감각, 살아 있다는 느낌, 사실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농구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는 진심. 그래서 미야기는 제 쪽에서도 미츠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 농구가 싫고 질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농구를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그가 외면하려 하는 진심을 다시 일깨워주고 싶었다. 미츠이 히사시가 다시 농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미츠이를 처음 안 그 순간부터 미야기는 농구를 하지 않는 그를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미야기는 가장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농구든 뭐든, 시작은 기본기부터기에.
“재활했으면 좋겠어요.”
“미야기.”
“농구 때문만은 아니에요. 물론 농구까지 할 수 있으면 가장 좋고 나는 그걸 제일 바라지만……. 어쨌든 최소한 목발 없이 걸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미츠이 선배?”
당신이 목발을 짚고 있으면 손을 잡을 수가 없다고요. 미야기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냉담하던 미츠이의 표정이 순간 허물어졌다. 예상 못한 이유였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린다. 잘 먹었습니다. 미야기는 작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차 열쇠만 찾아주세요.”
설거지를 마치고 미야기는 미츠이가 내민 열쇠와 지갑을 챙겼다. 근처의 마트로 차를 몰았다. 운동선수의 식사량은 무시할 수준이 못 된다. 게다가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라면 더더욱. 장을 보고 나니 미야기의 양손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되었다. 예전에는 미츠이 선배와 같이 이만큼 장을 보고 함께 들고 갔었지. 미야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터져나가기 일보 직전인 무거운 봉지를 두 손 가득 들고 트렁크까지 두 번 왕복을 하자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후우, 미야기는 길게 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훔쳤다. 역시 그 사람이 빨리 재활을 하게 만들어야겠어. 일본에 올 때마다 혼자 이걸 이고 지고 할 생각을 하면 엄두가 안 난단 말이야.
미야기가 들고 온 봉지의 상태를 보고 미츠이는 질린 얼굴을 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이래봤자 일주일 치도 안 돼요.”
“나 이제 많이 안 먹어.”
“웃기지 마요. 아까 만든 오믈렛 혼자 다 먹었잖아요. 그거 계란 있는 거 다 깨 넣은 거라고요.”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도우라 할 수는 없으니 냉장고 정리까지도 미야기 혼자의 몫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민망한지 미츠이가 계속 주방 부근을 얼쩡거렸다. 거기 있으면 엄청 신경 쓰이거든요. 미야기의 짜증 섞인 축객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정리가 다 끝났을 때, 미야기는 땀으로 젖은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졌다. 뭉친 티셔츠로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고 있자니 축객령을 받고 사라졌던 미츠이가 조금 쭈뼛거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씻을 거냐?”
“그럴까 싶었는데요.”
“완전히 샤워하지는 말고……. 적당히 씻고 옷만 갈아입어.”
“왜요?”
머뭇거리던 미츠이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원래 재활센터에 가야 하는 날이야. 그러니까 네가 태워다 줘야겠어. 나는 지금 운전을 할 수 없으니까.”
차로 30분 거리의 재활센터로 가는 동안 미야기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신호를 기다릴 땐 핸들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반면에 미츠이는 아무 말 없이 눈이 아플 정도로 햇살이 쨍쨍한 창밖만 내다보았다. 센터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재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프고 힘든 그 기나긴 시간을 이를 악물고 견뎌봤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목발을 떼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목적지가 없는데 걸어봤자 어디로 향할 것이며 뛰어봤자 어디까지 달리겠는가. 수술이 끝난 지가 석 달이 넘었는데도 미츠이는 아직도 진통제를 먹고 있었다. 밤이면 무릎 안쪽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굳어져 각도가 나오지 않는 무릎과 쓰지 않아 근육이 다 빠진 왼 다리는 조금의 부하만 가해져도 날카로운 통증을 선사했다. 미츠이는 그래서 목발을 떼지 못했다. 이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쓸모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 고통에서 달아나고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저의 료타가 그렇게까지 당돌하고 귀엽게 말하지 않았다면 미츠이가 한 번쯤은, 이라는 변덕을 부려줄 일조차 없었을 만큼.
보호자 자격으로 수납을 마치고 온 미야기의 얼굴은 꽤 들떠 있었다. 미츠이가 재활의 의지를 조금이나마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에 차 반짝이는 눈을 하는 게, 어제저녁처럼 사납게 화내는 얼굴보다는 훨씬 나았다. 덥진 않아요? 목마르지도 않고? 연신 조잘대며 저를 챙기려 드는 것이 제법 귀여워, 미츠이는 어쩌면 재활을 정말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내인데 뭐가 덥냐. 그리고 목도 마르지 않아. 괜찮아. 미츠이의 얼굴에 떠오른 작은 미소에 미야기가 같이 웃었다. 역시 당신은 웃는 게 훨씬 나아요. 잘생겼거든. 뭐라고, 그럼 내가 웃지 않으면 잘생기지 않았다는 거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두 사람은 연인 간에 으레 할 법한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시덕댔다. 모처럼 미츠이의 분위기가 풀리자 미야기도 신이 난 듯했다.
앞 사람의 치료 시간이 길어지는지 제시간이 넘었는데도 미츠이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제가 가서 물어볼게요. 미야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예약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호명되지 않아서요. 미야기와 간호사가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혹시, 미야기 료타 선수이신가요?”
미야기가 고개를 돌렸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아, 예. 맞습니다만. 미야기가 대답하자 두 사람이 환한 얼굴을 했다. 정말 맞군요! 저희 아들이 미야기 선수의 엄청난 팬이에요. 일본인으로서 NBA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다고 하던지. 방 벽 전체가 미야기 선수의 포스터랍니다. TV에서 볼 때는 항상 머리를 올리고 계셨는데 오늘은 내리고 계셔서 긴가민가했지 뭐예요.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미야기 료타’라는 이름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미야기의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하나씩 사인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미야기는 잠깐 미츠이 쪽을 보며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정하고 상냥한 천성답게 이내 웃으면서 팬들의 요청을 하나하나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야기 선수가 재활센터에 웬일이신가요? 부상 소식은 없으셨던 것 같았는데요.”
“아, 선배인 미츠이 히사시 선수의 보호자로…….”
미츠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형편없게 망가진 무릎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기 위해 미츠이는 최대한 빠르게 목발을 짚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가 발이 꼬였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츠이가 넘어졌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쓰러져 있는 미츠이에게로 향했다. 미츠이 선배! 놀란 미야기가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왔다. 넘어진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뒤따라온 간호사 한 명이 미야기를 도왔다.
“괜찮아요? 왼쪽 무릎…….”
다행히 바닥과 먼저 부딪힌 쪽은 오른쪽 무릎이었다. 벌써부터 시뻘건 것이 집에 돌아가면 시퍼런 멍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미츠이에게는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제 마음이 부딪힌 무릎보다 백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둘이 함께 있을 때면 미야기는 오직 ‘미츠이 히사시의 연인’ 미야기 료타였다. 미츠이를 사랑하고 미츠이를 위하고 미츠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다정한 연인. 그래서 미야기도 농구의 선택을 받은 사람임을 미츠이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미츠이는 ‘농구선수’ 미야기 료타를 마주했다. 작은 신장과 체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NBA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영웅, 농구 팬들의 우상. 부서진 무릎으로 비참하게 망가진 미츠이 히사시와 달리 여전히 저 위에서 빛나는 찬란한 존재. 미츠이는 미야기의 옆에 있는 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왔다. 미츠이 님, 들어가시죠. 그를 부축한 간호사가 제대로 발을 떼지 못하는 미츠이를 치료실 안으로 이끌었다. 미츠이는 제 뒤를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가와사키, 슈터, 3점, 부상, 그런 이야기들이 듬성듬성 들렸다. 죽고 싶다. 미츠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먼저 재활센터에 가야 한다고 말을 꺼냈던 게 무색하게 미츠이는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미츠이의 상태를 점검한 담당 치료사의 설명도 미야기만 듣고 미츠이는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소음 같았다.
무릎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기계에 다리를 내맡긴 채 미츠이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굳은 얼굴로 벽만 쳐다보았다. 치료사가 아픈지 거듭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치료사는 미츠이에게 더 말을 걸기를 포기하고 적당한 범위에서 기계의 움직임을 조정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끝나고, 아무 관심이 없는 미츠이 대신 미야기가 다음 재활치료의 스케줄을 잡았다. 모레가 좋겠네요. 네, 되도록 오후로 부탁드립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야기는 흘끔흘끔 미츠이의 눈치를 보았다.
“많이 아팠어요?”
미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야기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혼자 말을 계속했다.
“관절이 많이 굳었다고 해요. 각도가 90도를 겨우 넘긴다고. 그래서 집에서도 스트레칭을 꼭 하라고 당부받았어요. 미츠이 선배가 치료받는 동안 배워 왔는데, 저녁 먹고 같이 해보는 건 어떤가요? 참, 다음 예약은 모레 오후 2시에요. 점심 먹고 딱 준비해서 가면 될 것 같죠. 괜찮은 시간대를 받았어요.”
그러나 미츠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미야기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미츠이는 그냥 피곤했다. 오랜만에 잔뜩 움직인 관절이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왼쪽 무릎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더운 날에도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무릎은 차갑게 시큰거렸다. 혈액순환의 문제인지 다른 부위보다 현저히 낮은 체온. 따뜻한 목욕물에 몇 번이나 다리를 담가 찜질을 해도 원래의 온도는 돌아오지 않는다. 정상이 아니라는 이 선명한 증거가 미츠이의 가슴을 더 후벼팠다. 이대로 무릎을 뽑아버리고 싶어. 미츠이는 눈을 감았다.
집에 오자마자 미츠이는 피곤하다며 다시 침대에 가 누웠다. 미야기의 눈앞에서 방문을 닫았다.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미야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농구선수’ 미야기 료타를 마주해버린 이상, 미츠이는 더 이상 미야기를 제 연인만으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팀 동료들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을 향한 분노, 자격지심, 열등감, 패배감, 절망감, 깊은 질투와 시기. 미츠이 히사시는 농구를 하는 미야기 료타를 좋아했다. 작은 체구로도 기세 좋게 코트를 가로지르는 걸 보면 ‘역시 미야기.’라고 생각했고, 여유롭게 경기를 운영하는 걸 보면 제가 다 뿌듯했다. 미야기에게 패스를 받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선택지로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금은 미야기도 농구도 전부 사무치게 미울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미운 것은 미야기와 농구를 미워하는 미츠이 자신이었다. 차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한 미츠이는 다리에서 벗겨낸 보조기를 벽에 집어 던졌다. 쾅 소리가 났다. 놀란 미야기가 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망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미야기는 이내 처참하게 무너져 울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미츠이 선배!”
미야기는 허둥지둥 미츠이를 끌어안았다. 제 품으로 파고드는 미츠이의 웅크린 등을 연신 쓰다듬고 부드럽게 다독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배. 괜찮아요. 흐느낌 사이로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미츠이는 생각했다. 미야기는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농구를 더 하지 못하는 게?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는 게? 이 더럽고 추악한 감정들을 느끼는 게?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는 게? 미야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나를 달래는 건가? 내가 정말 괜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야기가 지금의 나에 대해 뭘 알기는 아는 건가?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미야기를 떼어내려고 저를 감싸고 있던 팔을 잡았다. 듬직하고 탄탄한 근육이 손 아래로 만져졌다. 볼 운반을 주로 하고 드리블을 강점으로 지닌 가드답게 미야기는 팔근육이 더 발달한 편이었다. 타고난 체구가 있으니 팔의 두께 자체는 미츠이가 앞섰지만 근육량만 따지면 미야기가 앞섰다. 몇천 번을 더듬었기에 미츠이는 미야기의 그런 몸을 잘 알았다. 잘 아는 만큼 제게 닿는 미야기에게서 느껴지는 농구의 흔적을 미츠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농구를 잘라내고 싶었다. 저를 괴롭게 하는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츠이는 고개를 들어 미야기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미츠이가 입을 열었다.
“선택해, 료타.”
나는 이제 농구가 싫어. 그 주황색 공과 나무색 코트가 저주스러워. 네게서 농구가 느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 집에 있는 동안 하나를 선택해. 농구선수 미야기일 것인지, 미츠이 히사시의 연인인 미야기일 것인지. 농구인지 나인지. 망가진 남자의 지독할 만큼 실망스러운 질투였다. 저를 버린 농구에게 연인마저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바닥의 바닥이었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였다. 그러나 미야기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얼굴로 기꺼이 대답했다. 히사시 씨의 연인이죠. 당연하잖아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항상 그랬는걸요.
하지만 미츠이는 알았다. 미츠이 본인도 미야기도 농구가 곧 삶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곧 농구였고, 농구가 없으면 안 되었다. 심지어는 10년 가까이 되는 긴긴 연애사에서마저도 농구를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농구를 빼놓고는 미츠이 히사시와 미야기 료타를 단 100자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미야기가 미츠이의 연인으로 남더라도 그의 몸과 생활 곳곳에 배인 농구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해가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이면 미츠이의 옆자리는 잠깐 비었다. 미야기가 6시 반이면 러닝을 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1시간 정도를 뛰고 돌아와 샤워를 한 후 미츠이가 깨기 전에 그 옆으로 다시 파고들곤 했지만, 운동으로 뜨끈히 달아오른 몸과 펌프질하는 심장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미야기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느리고 절뚝이는 발걸음으로나마 저녁 산책을 나갈 때면 길거리 코트와 마주쳤다. 그들이 몇 번이고 농구공을 들고 맞부딪혔던 자리이자, 동거를 제안하고 진하게 키스했던 추억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스케줄을 잡기 위해 미야기를 찾는 에이전시의 전화를 대신 받을 때도 있었다. 둘이 동거 중인 것을 이미 아는 에이전시에서는 미야기가 아닌 목소리가 전화에 답하면 ‘미츠이 선수’라며 인사를 해 왔다. 늦게까지 깨어 있던 미야기가 농구 중계의 재방송을 보면서 ‘미츠이 선배도 저 정도는 충분히 했었는데……. 멋있었지.’라며 혼잣말을 하는 걸 화장실을 가다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미츠이는 모든 걸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을 버린 존재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고통은 무릎에서부터 퍼져나가 점점 미츠이를 갉아먹었다.
그날 미야기는 일정이 있어 집을 비웠다. 아침부터 공들여 머리를 세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목 위까지 올린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미야기가 좋아하는 향수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 키스 안 해주나요. 잘 다녀오라고? 미야기가 약간의 부끄러움을 담아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에도 미츠이는 졸리다며 눈을 뜨지 않았다. 배웅할 생각이 없는 연인을 잠시 바라보던 미야기는 미츠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요, 점심은 미리 만들어뒀으니까 이따 데워 먹어요.
무슨 일정인지 정확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지난번 에이전시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광고 촬영이나 화보임은 얼추 짐작했다. 미야기는 나이키의 모델이었다. Just do it. 그 카피만큼 미야기 료타를 잘 설명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미야기와 정말 잘 어울리는 카피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들어 했지만, 지금은 그 문장까지 추락한 미츠이를 비웃는 것 같았다. 침대 맞은편 벽에는 미야기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미야기가 경기 중에 플로터를 하고 있는 사진에 바로 그 카피를 박아 고화질로 뽑은 것이었다. 미야기가 보고 싶을 때 대신 보겠다며 에이전시가 보내준 것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미츠이에게 비수로 돌아왔다. 바닥까지 추락한 미츠이와 달리 생동감 넘치는 힘찬 얼굴로 유니폼을 입고 공을 올리는 미야기가 미츠이의 눈에 심하게 거슬렸다. 갈비뼈가 눌린 것처럼 온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들었다. 얼굴 옆에 쓰인 Just do it이라는 글자를 보자 요전에 미츠이를 안고 괜찮다 달래던 미야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뭐가 괜찮고 뭘 그냥 하라는 거냐, 미야기.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농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지 않거나. 농구를 포기하거나, 농구를 포기하지 않거나. 농구를 좋아하거나, 농구를 싫어하거나. 미츠이 히사시의 세상에는 그런 식의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단 말이다. 그러면 농구를 하는, 농구를 포기하지 않는, 농구를 좋아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미츠이 히사시에게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잖아.
미야기의 포스터를 올려다보던 미츠이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몸에서 힘이 빠졌다. 미츠이는 이제 그냥,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야기의 귀가가 늦었다. 광고 촬영이 끝나고 뒤풀이가 이어졌던 탓이었다. 늦는다고 미리 연락해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들어가려고 애썼는데, 디렉터가 그런 자리를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비시즌이어도 식단은 유지해야 한다며 주어지는 잔을 최대한 거절했음에도 얼굴이 새빨개지고도 남을 만큼은 마셔야만 했다.
택시를 타고 집 근처까지 오자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미야기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까지 오는 도중 술은 얼추 깼지만 하루 종일 긴장한 몸은 죽도록 피곤했다. 빨리 씻고 미츠이 선배 옆에서 자고 싶다. 미야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발을 옮겼다.
담 너머로 슬쩍 넘겨다 본 창문은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자고 있는 걸까. 미츠이 선배 잘 있었으려나. 서른이나 된 남자를 하루 혼자 둔다고 큰일이야 생기겠냐만은, 그렇게 옆에서 성화를 부려도 재활도 시큰둥하고 어딘가 묘하게 불안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미야기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을 열었다. 어두운 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음?”
미야기는 코를 킁킁거렸다. 무슨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희미해서 정확히 어떤 냄새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기분 나쁜 구석이 있는 쓴 내였다. 두 사람의 집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이게 뭐지? 밖에서 들어온 건가? 미야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을 옮겼다. 짧은 복도를 지나고 마침내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긴 거실이 나왔다. 마당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 있었다. 그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마루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커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어렴풋한 그림자를 보자 피로와 졸음에 잔뜩 찌푸려 있던 미야기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렸다. 미야기는 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미츠이 선배. 저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미닫이문을 연 순간, 미야기는 한순간에 밀어닥친 냄새에 급하게 코를 틀어막았다. 윽! 짧게 신음하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매캐하고 불쾌한 쓴 내가 미야기를 덮쳤다. 고작 숨을 잠깐 들이켰을 뿐인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콜록, 콜록, 미야기가 코와 입을 막은 손 아래로 기침을 했다. 손을 휘적이며 바람을 일으켜 불쾌한 냄새를 날려 보내려 했지만 워낙 짙게 깔려 있는 탓에 쉽지가 않았다. 왔냐.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미츠이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후, 낮게 숨을 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미츠이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기침을 하던 미야기가 그걸 보고 손을 툭 떨어뜨렸다.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정적이 흘렀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미야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미츠이 히사시!”
미야기는 미츠이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았다. 마루 위에 내팽개치고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양말을 태우고 피부를 뜨겁게 만드는 게 느껴졌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배신당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미야기를 흘긋 올려다본 미츠이가 옆에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탁탁, 두어 번 두드렸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손가락을 비집어 넣어 갑 안을 뒤적거리던 미츠이가 픽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나 보군. 아깝네, 다 못 피웠는데.”
“설명해, 미츠이.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냐. 담배 피우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걸 당신이 왜 피우는데!”
미야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룻바닥 아래에 수북이 떨어진 꽁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씨발, 미야기가 욕을 하며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덮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당신 제정신이야? 미야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 고등학생 때도 담배는 안 피웠잖아. 그게 그나마 잘한 짓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 이건 뭐냐고. 운동 안 할 거야? 재활 안 할 거야? 당신 정말로 농구를 그만둘 생각이야?”
“새삼스럽게 왜 그러는 거냐, 미야기. 처음부터 은퇴할 거라고 했잖아.”
“웃기지 마, 말도 안 돼. 당신 포기가 서투르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농구를 포기한다고? 담배까지 손을 대면서? 당신이 그러고도 미츠이 히사시야? 일본 제일의 슈터야? 그러고도 가와사키의 선수고 쇼호쿠의 14번이냐고!”
“그런 건 다 옛말이다, 미야기.”
이 무릎으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제는 뛸 수도 없는데. 미츠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마루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제대로 가동범위가 나오지 않는 왼 무릎이 불안정하게 덜렁거렸다. 오늘은 달이 예쁘네. 미츠이의 태평한 목소리에 미야기는 울고 싶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고 말해줘. 만취한 미야기 료타가 택시 안에서 꾸는 악몽이라고 해달란 말이야. 어떻게 당신이 이래. 어떻게 미츠이 히사시가 농구를 포기할 수 있냐고. 그렇게 농구를 사랑했던 사람이, 2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욱 매진하고 노력하던 사람이, 부상을 세 번이나 이겨낸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이럴 수가 있냔 말이야. 당신 아직 농구를 놓지 못 했잖아. 아쉽지 않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 했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왜 정말로 영영 끝인 것처럼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건데. 분노와 배신감에 몸을 떨던 미야기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쾅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큰 소리가 나자 이웃집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그 소리를 전부 들으면서 두 사람은 가시지 않는 담배 냄새 사이에 그대로 붙박여 있었다. 한참을 씨근대며 미츠이를 노려보던 미야기가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가 있어.”
당신이 코트에 다시 서기를 그렇게나 바랐는데. 유니폼을 입고 농구화의 끈을 묶어주기를 바랐는데. 한 번 더 내 패스를 받아주고 멋있는 3점을 던져주길 바랐는데. 나는 당신과 계속 함께 농구하고 싶었는데. 미야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공허한 눈으로 보름달을 올려다보던 미츠이는 그 소리를 듣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미야기가 울음을 참느라 딸꾹거리는 소리와 미츠이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지옥처럼 섞여들었다. 하아…….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미츠이가 긴 한숨을 담배 연기처럼 내뱉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포기해, 료타.”
껍데기만 남아 텅 빈, 나지막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다음날의 아침 식사 자리는 아주 차갑고 살벌했다. 미야기는 눈앞의 미츠이를 노려보았고 미츠이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아침 뉴스만 쳐다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30분이 지나도 거의 줄지 않았다. 아나운서의 음성과 식어가는 음식 사이에 흐르던 무시무시한 정적을 깬 것은 미야기가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미츠이. 뒤이어 미야기가 굳은 목소리로 존칭 없이 그를 불렀다. 미츠이가 눈동자만 돌려 미야기를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선배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냐며 곧장 핀잔을 주었을 텐데도 미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것 같은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미야기는 굳게 각오한 선전포고를 한 자 한 자 씹어뱉었다.
“나는 당신 포기 안 해.”
이후는 문자 그대로의 전쟁이었다. 미야기의 선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츠이는 대놓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방에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슬쩍 사라져 있어서 찾아다니다 보면 마당 한구석에서 재를 털고 있는 걸 발견하거나 담뱃갑을 뒷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편의점을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자다가 문득 옆이 허전해 눈을 뜨면 창문 너머로 미츠이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놓인 재떨이에는 우그러진 꽁초가 하나둘씩 쌓여 갔다. 그걸 볼 때마다 미야기는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그게 몸에 해로운 간접흡연의 여파인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야기는 미츠이의 담배를 몇 번이나 빼앗고 꺾고 짓밟았다. 협탁 위에 놓인 담뱃갑과 라이터를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쓸어 넣었다. 그러고 나면 거세게 화를 냈다. 애원한 적도 있고 달래본 적도 있었다. 거실에 앉혀놓고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츠이는 담배를 끊지 않았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하루 만에 한 갑을 다 태우는 미친 짓은 안 한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고 해야 했을까. 애초에 그걸 위안이라 하는 시점에서 다 그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미츠이가 절뚝이며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고 나가는 모습이 점점 익숙해진다는 게 미야기를 비참하게 했다.
담배뿐만이 아니었다. 미츠이는 재활센터에 가는 것도 완전히 그만두었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미야기의 부탁으로 담당 치료사는 계속해서 예약을 잡아주고 전화로 일정을 알려주었지만 미츠이가 그 시간에 제 발로 센터에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억지로 끌어내 차에 태울 때마다 지긋지긋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무리 제대로 다리를 못 쓰는 환자에 운동을 넉 달이나 쉬어 근육이 많이 빠졌다 해도 미츠이는 미야기보다 한 뼘이 넘게 컸고, 체격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힘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츠이의 버티는 힘을 이기지 못해 센터에 가는 걸 포기해야 할 때도 많았고, 작정하고 힘을 써 겨우 치료실에 집어넣더라도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걸 봐야 했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호전이 될 텐데 계속 이런 식이니 미츠이의 무릎 가동범위는 줄곧 90도에서 100도 사이를 맴돌기만 했다. 미츠이는 여전히 왼 다리에 부하를 전혀 주지 못했고 목발을 짚고 다녔다. 자기 전에 처방받은 진통제를 한 알 삼키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재활은 끝까지 거부했다. 보조기에 의존하는 다리의 근육은 점점 빠지다 못해 이제는 육안으로도 차이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모든 걸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하는 미야기는 매일이 고통스러웠다. 미츠이가 농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마저도 포기한 것처럼 회복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싸웠다. 민폐를 죄악으로 여기는 일본 사회의 이웃들마저도 이제는 이 집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에 익숙해져 또 시작이려니 할 정도였다. 매번 미야기의 잔소리에서 시작되는 싸움은 미츠이의 ‘이제는 제발 포기하라’는 소리로 끝났다. 미야기는 예전의 미츠이는 이렇지 않았다며 과거를 들먹였고 미츠이는 과거에 얽매여 고집을 부리는 미야기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미야기는 미츠이야 말로 자신밖에 모른다고 화를 냈고 미츠이는 본인 인생도 아닌 주제에 귀찮게 굴지 말라고 으르렁댔다. 그렇게 서로를 잔뜩 상처 준 후 미츠이가 부서져라 방문을 닫고 나면 미야기는 속상함을 이기지 못해 샤워나 설거지를 하는 척 물을 틀어놓고 조용히 울었다. 웃고 사랑하며 행복하던 연인들은 이제는 서로에게 비수를 꽂으며 심장을 난도질할 말만 골라 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더 할퀼 수 있는지만을 연구하는 것 같았다. 더는 같은 침대에서 잠들지도 않았다. 미야기는 제 짐을 전부 게스트룸으로 옮겼다. 미츠이가 밖에 나와 있으면 미야기는 방으로 들어갔고, 미야기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미츠이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식사조차 같이 하지 않았다. 미야기가 제 손으로 차린 음식을 혼자 먹은 후 자리를 뜨면 그제야 미츠이가 나와서 밥을 먹고 그릇을 씻었다. 의도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메두사의 눈처럼, 서로를 마주하게 되면 그 순간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이 마지막 남은 생명력마저 잃고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비참했다.
한바탕 싸우고 나면 미야기가 우는 것을 미츠이도 모르지 않았다. 싸우고 나서만이 아니었다. 달과 별마저 잠든 것 같은 조용한 새벽이면 벽 너머로 미야기가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괜히 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몇 번이고 베개를 집어 던졌다. 침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미야기의 포스터까지 떼어버렸다. 공처럼 잔뜩 구겨 쓰레기통에 박아버렸다. 그러고 나면 망가진 무릎을 쑤셔대는 고통이 올라와, 미츠이는 시체의 피부처럼 차가워진 수술 부위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미츠이를 특히 괴롭게 하는 것은 미야기의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미츠이를 반드시 코트 위에 다시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 농구가 직접 버리고 내쫓은 사람을 농구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아집이 숨이 막혔다. 미츠이는 미야기가 형편없고 쓸모없는 자신에게 왜 그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츠이는 더는 농구의 농 자도 거들떠보고 싶지 않았다. 농구를, 농구를 했던 미츠이 히사시를 제 인생에서 온전히 잘라내고 싶었다. 전부 기억에서 지우고 편해지고 싶었다. 농구를 생각할 때마다 미츠이를 잠식하는 시커멓고 어두운 감정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미야기는 자꾸만 미츠이에게 농구를 떠안기려 했다. 이제는 살아날 수 없는 농구선수 미츠이 히사시를 어떻게든 살려내려 애썼다. 그 슬프도록 필사적인 발버둥을 보고 있으면 미츠이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미츠이를 괴롭히는 미야기가 미웠다. 미야기를 힘들게 하는 저 자신이 미웠고 아무리 다그쳐도 포기하지 못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미야기가 미웠다. 미야기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미야기가 포기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농구가 미웠다.
미츠이는 거실에 목발을 세워놓았다. 미야기가 게스트룸 밖으로 나오자마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보란 듯이. 미야기가 목발 짚은 미츠이의 모습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미츠이는 미야기의 속셈을 잘 알았다. 일단 목발을 떼고 나면 다리의 힘을 회복시킨다는 명목으로 운동을 시킨다. 필요한 근육을 단계적으로 강화시키고 나면 농구 없이 살지 못하는 미츠이 히사시는 재활 운동 외의 시간에 다시 농구공을 잡기 시작한다. 한 번 다시 잡고 나면 농구할 때의 감각을 잊지 못해 코트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몇 해 전이었다면 충분히 통할 계산법이었다. 하지만 한계를 맞은 미츠이의 무릎은 미야기가 원하는 대로 재활과 사후관리를 하더라도 농구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미츠이의 선수 생활은 네 번째로 코트에서 쓰러진 순간 이미 끝났다. 그래서 미츠이는 더욱 일부러 목발을 가져다 두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나를 버린 농구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사 표현으로 미야기를 아프게 했다.
미츠이는 미야기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미야기와 함께했던 시간을, 나누었던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농구의 존재가 같이 따라왔다. 미야기의 존재를 의식하는 한 미츠이는 계속 농구에게 고통받아야 했다. 미츠이는 제 인생에 남은 마지막 농구가 사라지길 바랐다. 미야기가 없어지고 나면 농구의 기억도 흔적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조리 깨끗하게 지우고 덮어버린 뒤에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야기에게 더욱 상처를 주었다. 농구가 미츠이를 버렸듯 미야기도 미츠이를 버리길 바랐다. 미야기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없는 이 형편없는 미츠이 히사시를 떠나길 바랐고 담배처럼 농구의 기억도 전부 태워 없앨 수 있기를 바랐다.
미야기는 에이전시에게서 미국으로 돌아갈 일정을 조율하는 전화를 받았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들어온 지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거실장에 기대어 선 채 미야기는 직원이 불러주는 일정안을 들으며 지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어제도 미츠이와 한바탕 싸운 탓에 정신이 너무 피곤했다. 미야기의 목소리에 힘이 없자 수화기 너머의 직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미츠이 선수는 여전하신가요.”
미츠이 히사시가 재활을 거부하고 은퇴를 희망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업계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재활센터를 드나드는 스포츠계 인물이 한둘도 아니고, 타 종목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 인사인 미야기와 입씨름을 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였으니 충분히 소문이 나고도 남았다. 그러니 미야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에이전시의 귀에도 흘러가는 상황이 당연히 들어갔을 터였다. 미야기는 힘없이 웃었다.
“미츠이 선배는…….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봐요.”
“하지만 언제까지 설득만 하실 수는 없지 않나요. 미야기 선수께는 다음 리그가 있어요.”
그 말을 듣자 화가 울컥 치밀었다. 미츠이에게는 다음이 없고 미야기에게만 다음이 있다는 표현 아닌가.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는데 에이전시의 직원이 먼저 냉정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결국에는 미츠이 선수가 결정하실 부분입니다. 미야기 선수께서 아무리 애쓰시더라도 그분의 의지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요. 이미 충분히 노력하셨습니다.”
며칠 전 만난 야스다도 같은 말을 했었다. 미야기가 한탄 섞어 늘어놓는 자초지종을 들은 야스다는 안 그래도 처진 눈썹을 더 축 늘어뜨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료타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데도 미츠이 선배가 굽히지 않는다면……. 미츠이 선배의 말대로 포기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그 사람이 포기를 이야기할 정도라면 본인도 진지하게 생각한 거겠지. 그 사람을 설득하지 못했다 해서 너무 죄책감 갖지 마. 료타 너는 충분히 잘해주었어. 야스다의 위로에 미야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일까. 정말 내가 충분히 잘한 게 맞을까. 어젯밤의 싸움에서 미츠이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발 포기해, 료타! 나는 네가 농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괴로워 미칠 것 같다고! 울부짖듯 소리친 미츠이가 피폐한 얼굴로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목 안쪽이 뻐근하게 아파졌다. 미야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고등학생 때, 미츠이와 대립하던 옥상의 장면이 떠올랐다. 불량 학생들과 분위기 잡고 있는 것이 반은 속상하고 반은 우스워, 그러지 말고 농구나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외쳤던 삭발 내기 원 온 원을 주먹으로 돌려받았던 그때. 내밀었던 손을 무참하게 거부당하고 쓰레기 같다는 무력감을 느꼈던 그때. 미야기는 그날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했고 오히려 괴롭게만 했어. 구해내고 싶어서 그렇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 사람은 잡지 않았어. 도리어 내 이기적인 집념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했어. 내가 설득하려고, 위로하려고 했던 말들이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어. 나는 정말로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걸까. 나와 가장 가까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구해낼 수 없는 엉터리인 걸까. 죽음을 불러낸 괴로운 말로 형을 영영 잃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사람까지 잃어버리고 마는 걸까. 나는 주변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걸까.
사랑하기 때문에 미츠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방황하던 시절에조차 놓지 못했을 만큼 염원하던 곳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야기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미츠이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고 미츠이를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미츠이를 생각하면 느껴지는 것은 두근거리는 설렘과 봄날 같은 따뜻함이 아니라 심장을 불로 지지는 아픔과 매캐한 탄내뿐이었다.
“……비행기 표, 가장 빠른 일정으로 부탁드립니다.”
미야기는 무언가에 갉아먹힌 것처럼 다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출국 날짜는 곧바로 잡혔다.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여전히 미츠이와의 냉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야기는 출국 전까지 해야 할 일을 하나둘씩 해치웠다. 미츠이가 먹을 것을 넉넉히 만들어두고 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한 벌씩 더 나와 있던 식기들을 깨끗이 씻어 집어넣었다. 분리수거를 싹 하고 이불을 빨아 말렸다. 그동안 폐를 끼쳤다며 이웃에게도 정중하게 선물을 돌렸다. 미야기가 없는 동안 다시 가사를 도와주러 오실 분께 이런저런 메모를 남겼다. 자동차 점검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필요한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출국 전날이었다.
게스트룸에 벌여두었던 물건들을 치우고 가방을 쌌다. 들어올 때부터 옷가지 몇 벌과 여권만 겨우 챙겨 온 터라 도로 들고 갈 짐도 많지 않았다. 팀 동료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선물용으로 몇 상자 산 게 전부였다. 짐을 다 싸고 나니 방 안이 순식간에 휑해졌다. 썰렁해진 공간을 잠시 둘러본 미야기는 방 한쪽에 놓인 작은 책상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랍을 열고 펜과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조금 괴로운 얼굴로 그 위에 천천히 편지를 써 내려갔다.
다음 날 새벽 5시 반, 미야기는 평소와 같이 눈을 떴다. 머리를 감고 양치와 세수를 해서 잠을 깨웠다. 장거리 비행 때는 편한 것이 무조건 최고임을 알기에 머리 세팅은 따로 하지 않았다. 미리 꺼내놓은 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생활감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책상에 올려두었던 물건을 집고 문가에 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게스트룸 밖으로 나온 미야기는 이 여름에도 굳게 닫힌 채인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아직 6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다시 내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배 아래로 가장 얇은 여름 이불을 덮은 미츠이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누워 있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지 느린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미야기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다시 문을 닫았다. 손에 들고 있던 정갈한 편지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어른스럽고 깔끔한 글씨체로 수신인이 적혀 있었다. ‘미츠이 히사시 님께.’ 미야기는 편지를 뒤로 하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끼익, 탁. 집안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
미야기 료타는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츠이 히사시는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
미츠이는 며칠이 지나도록 식탁에 올려진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나가다 시야 한구석에 하얀 물건이 걸려도 최대한 무시했다. 그 안에 적힌 것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제 손으로 미야기를 쳐낸 만큼 그가 하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가사 도우미가 미야기의 편지를 방의 책상 위에 잘 보이게 올려놓았을 때, 미츠이는 울컥 올라오는 짜증과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찢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면의 무언가가 그것만은 가로막았다.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채 봉투를 한참 들고만 있던 미츠이는 험한 말을 내뱉으며 편지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쑤셔 박았다. 생전 써본 적도 없던 자물쇠에 열쇠를 채웠다.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열쇠를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서랍 구석 어딘가에 처박았다. 미야기와의 마지막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꽉 닫힌 서랍처럼 제 마음마저 닫아 버렸다.
미야기가 다음 시즌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츠이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야스다도 더는 미츠이를 말리지 않고 그의 의사를 윗선에 전달했다. 은퇴식은 따로 열리지 않았다. 비시즌인 것도 있었고 당사자가 부상 중이라 거동이 불편한 것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미츠이 본인도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팀을 위해 헌신해주어 고맙다며 만들어 준 감사패와 커다란 꽃다발은 자택으로 직접 배송되었다. 꽃다발은 가사 도우미가 화분에 꽂아 정리해 주었으나 감사패가 담긴 상자는 그대로 창고행이 되었다. 마루 그늘에서 제 은퇴 소식이 실린 기사를 가만히 읽어내린 미츠이는 옆에 놓여 있던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부싯돌을 당겨 불을 켜고 신문에 불을 붙였다. 제 마지막을 불길에 실어 날려 보냄으로써 불꽃의 남자는 그렇게 ‘농구선수’ 미츠이 히사시의 완전한 장례를 치렀다.
간혹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한 심경 따위를 취재하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귀찮게 연락을 해 오는 것만 제외하면 농구를 떠나보낸 자리는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잠도 실컷 잤고 TV도 많이 보았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예능도 드라마도 많았다. 그것조차 무료해질 때면 몇 해 전 코구레에게 선물 받았던 책을 읽었다. 담배를 사러 가는 김에 편의점 간식을 하나하나 사 들고 와 도장 깨기 하듯 맛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조용하고 잔잔한 여름날이 이어지는 게 좋아 조금 더 일찍 은퇴할 걸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농구 없는 일상을 즐기던 미츠이는 제 앞에 놓인 우편물을 보고 얼굴을 잔뜩 굳혔다. 월간농구의 금월 호가 배달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독을 끊겠다는 전화를 한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착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던 미츠이는 담배를 집었다.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들어가자 쿵쾅대던 심장은 조금 진정되었지만 엉망진창이 된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야기와 매일 같이 실랑이를 하면서 까먹은 쪽에 가까웠을까, 아니면 농구를 버리겠다고 잔뜩 말한 주제에 사실은 차마 다 버리지 못했던 미련이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구독 취소를 하지 않은 것은 미츠이의 큰 실수였다. 예상치 못하게 농구를 다시 마주한 미츠이의 속이 크게 울렁였다. 결국 반도 피우지 못한 담배를 비벼 끄고 세면대를 붙잡은 채 점심으로 먹은 것을 한바탕 게워냈다. 은퇴 선언을 한 후 한동안 멀쩡했던 왼 무릎이 미친 듯이 아려왔다.
세상에 날 도와주는 게 아무것도 없군. 온 서랍을 뒤져 찾아낸 진통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움켜쥐고 미츠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토 씨. 절뚝거리며 방을 나와 가사 도우미를 불렀다. 병원 예약 전화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은 이틀 뒤로 잡혔다. 운전을 할 수 없는 미츠이는 병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미야기가 있을 땐 이건 편했지. 현관에 걸린 차 열쇠를 만지작거리던 미츠이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가사 도우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츠이 씨, 택시가 온 것 같아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후 미츠이는 목발을 짚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조만간 차고에 박혀 있는 차를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는 말에 처방전을 써주면서도 주치의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미츠이 씨, 수술을 한 지 벌써 넉 달이 넘었습니다. 수술 부위는 이미 아물었어요. 지난번 검진 때 같이 엑스레이를 보면서 설명도 드렸고요. 부하를 많이 주면 아플 수야 있지만 일상적인 보행이나 생활에서는 진통제가 필요할 정도의 통증을 느낄 일은 없습니다. 그건 오히려 심리적 요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네요. 그런데도 계속 아프다면 재활을 통해 주변 근육을 강화하고 힘을 길러 관절을 받쳐주게 할 일이지, 계속 목발을 짚으면서 다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아요. 미츠이는 의사의 끝없는 잔소리를 대강 흘려들었다. 어쨌든 처방전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이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병원 약국에서 진통제 병을 받아 나온 미츠이는 잠시 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았다. 3층의 정형외과부터 1층의 수납처를 거쳐 지하의 약국까지, 모처럼 많이 걸었더니 무릎이 뻐근하게 아파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조금 쉬었다 가자고 생각하며 나뭇잎 새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던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츠이 선배? 맑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아는 척을 해 왔다. 미츠이가 시선을 돌렸다. 잘 아는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카기. 아니지……. 사쿠라기. 미안하다, 입에 붙어서.”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된다고 예전부터 말씀드렸는데.”
“아직 아카기도 아카기로 부르는 마당에 너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냐.”
“그건 그렇네요.”
하루코가 웃으면서 미츠이의 옆에 앉았다. 손 아래로 감싼 배가 불룩했다. 아카기 하루코와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쇼호쿠를 졸업하면서부터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오빠인 아카기 타케노리의 지지 아래 어느 정도는 가족이 되는 것까지 고려하는 만남이었다. 양친이 없는 사쿠라기의 외로움을 잘 알기에 주변에서는 두 사람이 빠르게 결혼을 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사쿠라기는 제대로 프로 선수로서 자리를 잡아야 하루코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며 청혼을 미루었다. 하지만 나는 천재니까 하루코를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거라더니 정말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식을 올린 것이 두 해 전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겼다. 신이 난 사쿠라기가 동네방네 자랑을 해댄 덕에 병원에 있던 미츠이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왔었다. 그때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려, 미츠이는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었다.
“아이는 괜찮냐?”
“네. 오늘 정기검진이었는데 잘 자라고 있다고 해요. 참, 아이는 아들이에요. 나중에 자라면 같이 농구 할 수 있겠다고 하나미치 군이 기뻐했어요. 아, 혹시 하나미치 군이 이야기한 적 있나요?”
“아니, 요즘은 통 연락하지 않으니까.”
미츠이는 무의식적으로 보조기가 채워진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하루코가 앗,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죄송할 일도 아냐. 그렇게 말하며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려던 미츠이는 옆에 하루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손을 물렸다. 미안하다, 임산부 앞에서. 미안할 일도 아닌데요. 미츠이의 말을 똑같이 돌려주며 하루코가 작게 웃었다.
“은퇴하셨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덕분에 잘 쉬고 있지.”
아직도 뛰는 녀석들이 조금 불쌍할 정도야. 은퇴하니까 평화롭고 좋거든. 늘어져라 늦잠도 잘 수 있고, 식단 관리 때문에 맛있는 음식 참아내던 것도 더 안 해도 되고. 미츠이는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은퇴를 해서 정말 기분이 좋고 후련하다는 목소리로 있는 힘껏 괜찮은 티를 냈다. 그런 미츠이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하루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몸이 안 따라주면 답답해요. 그렇죠?”
하루코가 불쑥 입을 열었다.
“머리로는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림이 그려지는데, 몸이 안 따라줘서 실패하면 정말 속상해요.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요.”
“……멀쩡하게 해내는 놈들한테 괜히 골이 나지.”
“저렇게 할 수 없는 나에게 실망하기도 하고요.”
“안 그래도 나 때문에 화나는데 시원찮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더 화가 나.”
“응, 자존심이 상하죠. 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날 멋대로 판단하는 게 싫어.”
“슛은 못하더라도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인데 말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미츠이의 반응이 뚝 멎었다. 그가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하루코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천천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사실 저도 선수 은퇴한 적 있어요. 운동신경이 영 안 따라줘서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그만뒀거든요. 그래도 농구는 여전히 좋아하니까, 응원하면서 계속 농구부를 드나들었어요. 그렇다 해서 쇼호쿠 농구부를 응원하러 따라다니던 때가 항상 좋았다고 할 수만은 없었지만요. 농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하나미치 군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많이 부러워했고……. 또 코구레 선배가 료난과의 경기에서 3점을 넣었을 때는 솔직히 엄청 분했으니까.”
약간의 그리움을 담아 작게 웃은 하루코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코구레 선배도 6년간 열심히 노력했죠. 그렇다면 나도 그만두지 않고 3년을 더 노력했으면 코구레 선배처럼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루카와 군이나 하나미치 군처럼 중요한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로는 충분히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3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농구를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분했어요.”
하지만 쇼호쿠는 여자 농구부가 없으니까 선수로는 뛸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다른 방식으로 농구부에 들어왔어요. 그 뒤는 미츠이 선배도 아시는 내용이죠? 하루코가 미츠이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하루코는 농구부의 새로운 매니저가 되었다. 정식으로 부원이 된 하루코는 아야코를 도와 쇼호쿠의 농구부를 잘 지탱했고, 그녀가 졸업할 즈음에는 쇼호쿠는 미래의 선수층까지 탄탄한 꽤 괜찮은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코트에서 뛰는 게 아니잖아.”
그러나 미츠이는 하루코의 말을 냉정하게 끊었다. 농구공을 처음 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평생 선수로서 코트 위에서만 살아온 미츠이에게는 ‘농구’란 곧 ‘농구 경기’를 의미했다. 경기를 할 수 없다면 농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미츠이는 강제로 경기를 할 수 없게 된 제 상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경기를 하게 만들려는 미야기의 지긋지긋한 집념과 미츠이를 받아주지 않는 농구 간의 괴리가 괴로웠다.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농구를 더 할 수 없었으면서도 매니저로 들어왔던 게 만족스럽다는 듯 말하는 하루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루코는 그 말에 실망한 듯 조금 힘이 빠진 어조로 되물었다.
“미츠이 선배는 제가 농구를 완전히 그만뒀다고 보시는군요?”
“사쿠라기 네가 조금 전에 은퇴했다고 했잖아.”
“역시 그렇군요……. 다들 그렇게 보기는 해요. 그렇다면 쇼호쿠 시절 미츠이 선배에겐 매니저는 어떤 존재였나요? 단순히 물이나 수건을 가져다주는 사람? 귀찮은 행정 처리를 대신 하는 사람?”
순간 미츠이의 말문이 막혔다. 짧게 한숨을 내쉰 하루코는 섭섭한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선수에게까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속상해요.
“저는 농구를 그만두진 않았어요. 쇼호쿠의 매니저였을 때도, 쇼인 대학의 스카우터인 지금도, 사쿠라기 하루코는 항상 농구를 하고 있어요. 단지 선수로서 하고 있지 않을 뿐이죠.”
그렇게 말하는 하루코의 목소리는 당당하고 결연했다. 선수가 아닌 다른 위치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했다. 드리블을 하고 슛을 던지는 것만이 농구는 아니에요, 미츠이 선배. 저는 중학생 때 3점은 못 던졌기 때문에 대신 러닝 슛은 엄청나게 연습했어요. 그래서 레이업 정도는 하나미치 군에게도 가르쳐줄 수 있었답니다. 그런 것처럼요, 이 농구를 못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농구를 찾으면 되는 거예요. 물론 아직도 가끔은 질투가 나요. 제가 스카우트한 선수들이 전일본대회에서 활약하는 걸 볼 때도, 하나미치 군의 경기를 볼 때도.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농구는 따로 있으니까 코트 위의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하기만 할 필요는 없어요. 하루코가 미츠이의 왼쪽 다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선수도, 코치도, 의료팀도, 프론트도, 스카우터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농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츠이 선배. 서툰 하루코도 하루코의 농구를 계속해 냈던 것처럼, 선배도 충분히 선배의 농구를 계속하실 수 있어요. 저는 미츠이 선배가 이 다리를 최후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하루코는 미츠이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시선을 주었다. 아까 미츠이가 담배를 꺼내려다가 다시 집어넣은 곳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미야기 선배가 싫어하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미츠이는 쓰게 웃었다. 긴 한숨이 담배 연기 대신 미츠이의 입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걸 피우면 내가 농구를 더 할 수 없다는 걸 미야기가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쥔 미츠이가 갑 표면을 엄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한참 만에 그는 고해성사를 하듯 하루코에게 미야기와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야기는 포기하지 않아. 내가 계속 자신의 패스를 받아주길 원해. 그 소리를 듣는 게 싫었어. 나는 이제 무슨 수를 써도 그 녀석이 원하는 건 해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미야기에게 더 화를 냈지. 사실은 선수로 더 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난 거였는데도. 미츠이는 자조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정말 형편없는 남자 아니냐. 고등학생도 아닌데 또 화풀이나 해버리고 말이야. 하지만 미야기는 나를 너무 닮았어. 그 녀석을 보고 있으면 농구가 보이고 농구를 사랑하는 내가 보여. 그걸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속절없이 부러워해야만 하는 내가 최악이라고 느껴져서 미야기를 대신 괴롭혔어.”
그리고 결국 그 녀석은 나를 떠났어. 그럴 만도 하지. 미야기도 나를 보는 게 힘들었을 거야. 이렇게 엉망진창인걸. 누가 이런 남자의 옆에 있고 싶겠냐. 미츠이는 착잡한 손길로 담뱃갑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금방이라도 하나 빼내 물고 불을 붙이고 싶어 하는 씁쓸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턱의 흉터만큼이나 깊은 흔적으로 남은 미야기의 이름이 아팠다. 저를 버리길 바라며 일부러 상처를 준 건 이쪽인데도 정작 상처를 입은 건 미츠이 쪽이었다. 하루코는 미츠이의 웅크린 어깨를 바라보다가 저 멀리 미국이 있을 어딘가의 하늘로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사실은 잡고 싶으셨을 거잖아요. 미야기 선배도, 미야기 선배의 농구도. 조용한 목소리가 미츠이를 건드렸다.
“그렇다면 잡으세요, 미츠이 선배. 아직 이 다리는 끝난 게 아니잖아요.”
미소 지은 하루코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날 저녁, 미츠이는 마루에 앉아 오랜만에 담배 없이 진지한 생각에 잠겼다. 하루코와의 대화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드리블을 하고 슛을 던지는 것만이 농구는 아니라는 말을 오래도록 입 안에서 굴렸다. 이 농구를 못하면 다른 농구를 찾으면 된다는 말을 곱씹었다. 되풀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반년 가까이 농구를 외면해 왔던 내면에서는 온갖 감정이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위로를 받다가도 반발심이 치고 올라왔다. 이해할 수 있다가도 거부감이 들었다. 안도하다가도 반감을 가졌다. 미야기가 떠난 후 처음으로 잠들지 못하는 여러 밤을 보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하루코가 건넨 말들은 미츠이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사 도우미가 준비해놓고 간 저녁을 먹은 후 미츠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TV 앞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머뭇거리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드라마 대신 스포츠 방송을 틀었다. 일부러 농구 경기를 방송하고 있는 채널을 찾았다. NBA든 국내 리그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찾아낸 경기를 끝까지 보았다. 얼굴과 이름을 익히 아는 선수들이 나와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공의 궤적과 선수들의 움직임을 좇고 해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방송이 끝난 후에는 한 데 모아놓은 종이 쓰레기 사이에서 월간농구 금월 호를 찾아 들었다.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인쇄된 모든 글자를 남김없이 전부 읽었다. 아직도 구독 취소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미츠이는 야스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스다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럽게 은퇴해 로커를 아직 비우지 못했으니 짐을 정리하러 가겠다는 말에는 더욱 놀란 목소리를 했다. 꼭 안 나오셔도 돼요. 제가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구장에 있는 거랑 피트니스 룸에 있는 것만 비우면 되는 거죠? 미츠이는 단번에 거절했다.
“너야말로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가서 정리하겠다니까.”
잠시 말이 없던 야스다는 내일 11시까지 오면 된다고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 일부러 훈련 전으로 시간을 잡아준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과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겠지. 미츠이는 무릎을 움켜쥐며 씁쓸하게 웃었다.
시간에 맞추어 택시를 타고 가니 문 앞에 야스다가 갈색 상자 두 개를 들고 나와 있었다. 로커룸으로 가는 내내 둘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미츠이는 야스다에게 할 말이 없었고 야스다는 미츠이에게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얼굴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커룸에 도착한 미츠이는 야스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짐을 꺼내 담았다. 예비용 수건과 양말, 무릎 보호대, 문 뒤에 붙여놓았던 사진들, 팬들에게 선물 받았던 불꽃 모양의 마그넷 등등. 그가 손을 올릴 때마다 물건이 하나둘씩 로커에서 사라졌다. 그는 농구선수 미츠이 히사시의 흔적을 제 손으로 하나하나 지웠다. 그것은 마치 유품을 정리하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피트니스 룸의 짐까지 전부 정리하고 나자 야스다가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미츠이는 전혀 다른 방향의 말을 했다.
“훈련 참관을 할 수 있을까.”
은퇴해서 이젠 외부인이니 안 되려나? 가볍게 농담도 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해 눈이 커진 야스다가 미츠이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세요? 진심이 아니면 말할 이유가 없지. 미츠이의 답을 듣고는 조금 묘한 표정을 했다. 뭐야, 그 얼굴은. 미츠이는 괜히 고등학생 때나 쓰던 험한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우물거리던 야스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다른 선수들을 봐도.”
야스다의 처진 눈썹에는 걱정과 우려가 잔뜩 묻어났다. 미야기를 통해서든 여러 사람의 입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말이든, 미츠이가 부상 이후 얼마나 크게 힘들어하고 방황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의 근심이었다. 하지만 미츠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용히 대답했다.
“그걸 알아보려고 참관할 수 있는지를 묻는 거야.”
묘한 얼굴로 미츠이를 바라보던 야스다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연락드려 볼게요. 부탁한다.
다소 급작스럽게 준비된 훈련 참관과 선수단과의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현관문 근처에 대충 상자들을 내려놓으며 미츠이는 한숨과 함께 땀을 닦았다. 팔근육도 많이 빠지긴 했군. 얼얼한 양쪽 전완근을 힘주어 주물렀다.
욕조가 데워지는 동안 식사를 하고 그릇을 씻었다. 밖을 오래 돌아다닌 탓에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무릎을 따뜻한 물에 담가 찜질을 했다. 무릎뿐만 아니라 땀에 젖은 몸도 욕조 속으로 집어넣었다. 목욕재계라도 하는 것처럼 꼼꼼히 몸을 닦았다.
모처럼 개운한 기분으로 욕실을 나온 미츠이는 아직 열기가 덜 가신 몸에 선풍기를 틀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서랍 안에 손을 넣었다. 대충 기억나는 곳을 몇 번 뒤적이자 열쇠가 하나 쥐어졌다.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다가 맨 위쪽 서랍의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둔중하게 철컥거리는 느낌이 났다. 미츠이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맨 위쪽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뜯지 않은 흰 봉투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조금 구겨진 겉면에는 정갈한 글씨로 ‘미츠이 히사시 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미야기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식탁에 올려두고 간 것이었고, 미야기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미츠이가 제 손으로 영원히 봉인하듯 쑤셔 박았던 것이었다.
미츠이는 단정하게 쓰인 제 이름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언젠가의 미야기를 매만지던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마치 미야기를 눈앞에서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진지한 눈으로, 미츠이는 한 달 만에 봉투를 뜯었다. 곱게 접힌 한 장짜리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드디어 미야기의 편지를 펼쳤다.
미츠이 히사시 님께.
간만에 편지를 씁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항상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썼던 게 몇 해나 되었을까요. 이러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지금처럼 밤중에, 어두운 방 안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적어야 히사시 씨가 읽고 기뻐할까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곤 했어요. 덕분에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아침 훈련을 나가야 했지만 그것조차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참. 지금은 새벽 1시 12분입니다. 아마 당신은 자고 있겠죠.
내일 미국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휴가가 끝났거든요. 오전 비행기라 아침 일찍 떠납니다. 간다는 인사를 직접 얼굴을 보고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예의 없는 후배를 마음 넓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히사시 씨와의 일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당신이 재활을 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가 싸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당신에게 다시 농구를 돌려줄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여러 번 곱씹었지만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히사시 씨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아는 히사시 씨를 생각하고 했던 모든 행동들이 실패로 돌아왔습니다. 그건 꽤 뼈아픈 일이었습니다.
히사시 씨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했었죠.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직도 농구를 하는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코트를 떠난 당신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당신을 더욱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이 사랑했던 그곳으로 이끌어 주고 싶었어요. 그러면 당신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내민 손은 오히려 당신을 고통스럽게만 했습니다.
그래도 히사시 씨.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미야기 료타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당신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을 겁니다. 몇 주, 몇 달, 몇 해, 몇십 년이 지나더라도 나는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내가 아는 미츠이 히사시는 포기가 서툰 남자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내 믿음이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떠납니다.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
제가 없더라도 부디 몸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미야기 료타.
미츠이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편지지를 보며 그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미츠이는 미야기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자신의 감정을 전가해 그를 부수려 들었다. 하지만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멍든 얼굴로도 미야기는 미츠이를 받아들여 주고 용서해주었다. 단지 미츠이가 다시 농구를 하러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미야기는 언제든지 그때처럼 미츠이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츠이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가만히 손끝으로 눌렀다. 미야기가 내민 손이, 한 번도 거둔 적이 없던 그 손이 미츠이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츠이는 서랍을 뒤졌다. 가장 아래의 서랍까지 샅샅이 뒤진 끝에 그는 언제 샀는지도 가물가물한 편지지 몇 장을 찾아냈다. 미츠이는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비닐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스탠드를 켜고 의자를 당겨 앉는 그의 왼쪽 다리는 여전히 불안정한 각도였지만 깨끗했다. 검은 밴딩이 들어간 빨간색의 보호대를 제외하고는.
잠시 심호흡을 한 미츠이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바른 글씨로 맨 윗줄에 수신인의 이름을 썼다.
료타에게.
그걸 시작으로 미츠이는 천천히 편지를 써 내려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몸을 기분 좋게 식혀주는 여름의 밤바람이 열린 창문을 통해 살며시 불어왔다.
- 후기
지난한 글이었습니다. 최대한 잘 마쳐보려 고민과 수정을 거듭했는데, 그 노력만큼 제가 담아내고자 했던 이야기가 읽어주시는 분들께 충분히 전달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본계 트친님과 대화를 하다 생각났던 소재였는데요, 처음에는 깊은 심연의 엔딩 밖에 생각나지 않아 글로 옮기는 걸 조금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고민을 하다 보니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더라도 해피엔딩을 암시하며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결말낼 수 있도록 스토리를 보강해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루코와 미츠이와의 대담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미츠이는 포기가 서툰(와루이한) 남자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알려주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포기하면 시합 종료라고 했던 안자이 감독님이, 고등학교 때는 사실은 농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물어본 노리오가 그 역할을 해주었다고 봤고요. 이번의 미츠이에게도 미야기가 그 역할을 잘 해주었다면 정말로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죠.
저는 미야기/태섭이는 유약한 면이야 있더라도 진정한 내면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이 됐든 힘든 상황을 있는 힘껏 감내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캐릭터의 강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미야기는 정말로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포기해 본 경험도 없고, 강제로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게 맞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아낼 수 있는 탈인간급 멘탈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반면에 미츠이는 정말 힘들 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자기파괴적으로 굴기도 하는, 오히려 평범한 수준의 약함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포기해 본 경험이 있기에 똑같은 상황에 처하는 걸 두려워합니다. 높은 프라이드를 갖고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만큼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러니 항상 어떻게든 뚫고 나가려 노력하고, 정말로 뭔가를 그만둬 본 적 없는 미야기는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 채 강제로 무언가를 그만둬야 하는 미츠이의 불안감과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감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이 글 내에서의 미츠이는, 농최날 때도 그리고 지난 세 번의 부상 때도 농구를 향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미야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번에도 미츠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주면 미츠이가 스스로 자극을 받을 거라 예상했지만, 본문에서 보셨다시피 미츠이는 이번은 다르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았죠.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미츠이의 절망을 미야기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최대한 자신의 방식대로 위로했지만 그건 미츠이가 필요로 하는 방식이 아니었어요. 여기에서 둘은 필연적으로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미츠이에게 공감해주고 귀담아들을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슬램덩크 세계관 내에서 농구를 그만둬 본 적 있는 또 다른 사람인 하루코(소연) 밖에 없다고, 무조건 하루코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츠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미야기가 아니라서 아쉬워하실 분들도 계실까 싶은데, 저는 미야기를 직접 일으켜 세우는 건 항상 미츠이지만 미츠이를 직접 일으키는 건 미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미야기는 미츠이가 일어난 뒤에 그가 다시 할 수 있음을 믿어주고 곁에 있어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문제에서 미야기는 손을 내밀지 않는 게 오히려 맞았다고 봤습니다. 미츠이의 은퇴 선택을 존중해주고 옆을 잘 지켜주기만 했어도 미츠이는 시간이 좀 지나면 스스로 마음 정리를 하고 다시 재활을 시작했을 거예요. 하지만 미야기도 농구하는 미츠이의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갑작스런 은퇴 선언의 충격도 컸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했죠. 게다가 비시즌 휴가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결실을 봐야 한다는 조급함까지 겹쳐서 충분히 미츠이에게 시간을 주지 못하고 압박한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야기와 미츠이는 같은 결로 농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깊은 이해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또 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 한 번 어긋나면 정말 이렇게나 안 맞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충분히 어긋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지만 정말 중요한 때에는 오히려 독이 되는 관계인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번 글에서 그런 지점을 활용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에, 결국에는 서로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서로에게 돌아가게 될 관계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야기는 언제고 미츠이가 돌아오길 기다리겠다고 쓰고, 재활의 의지를 찾은 미츠이도 미야기에게로, 미야기와 자신이 사랑하던 농구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겠다는 편지를 쓰는 엔딩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렇다한들 전반적인 분위기가 참 심연이라……. 교류회라는 즐거운 자리에 이런 글을 내어놓아도 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작업한 것을 엎을 자신은 없었고……. 그래서 괜히 이렇게 주절주절 후기 겸 해설 겸 변명을 3쪽씩이나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부상 고증도 신경을 아무리 썼더라도 관계자가 아닌 이상 엉망일걸 알아서 더 부끄럽네요. 이런 글입니다만 그래도 대태이니(?) 조금이나마 예쁘게 봐주셨으면 하는 작은 애교를 부려 보며, 그럼 후기는 이만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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