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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의 이야기

뭐든지 좋은 눈앞의 네게 전할까

某日 by 銘

어둠이 완연히 내려앉은 공항으로 비행기 한 대가 매끄럽게 들어섰다. 도착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의 글자가 ‘착륙’으로 바뀌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대만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한 번 켰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자 입이 써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분명 똑같은 프랜차이즈일 텐데도 희한하게 공항 커피는 더 맛이 없다. 그래도 카페인이 들어있는 건 똑같으니까 졸리진 않겠지만.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근처의 쓰레기통을 조준하고 빈 컵을 한 번에 던져 넣는다. 퉁,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골인을 알렸다. 농구 선수 짬밥 어디 안 간다니까. 대만은 뿌듯하게 웃으며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자켓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승객들이 나오기까진 조금 더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그 기다림마저도 즐거웠다.

이제 내리는 중

메신저가 울렸다.

천천히 나와

빨리 나갈게

오래 기다렸을 텐데

미안

그냥 천천히 나와

허둥지둥하다가 넘어지면 안 되지

 

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애야?

나보다 어리면 애지

그 애한테 보자마자

또 앞니 털리고 싶으신가 보다

주먹을 꽉 쥐는 이모티콘과 함께 첨부된 메시지를 보고 대만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이빨 공격은 대체 언제쯤 멈출 생각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송태섭은 툭하면 그 레퍼토리를 써먹는다. 그런 협박조차 귀여워 보이는 시점에서 이미 다 글렀다 싶었지만.

휴대폰을 조금 더 보면서 기다리고 있자 입국장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승객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가족과 지인을 찾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대만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몇 사람이 먼저 문을 지나고, 그 뒤를 이어 이 밤중에도 동그란 선글라스를 쓴 송태섭이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불쑥 솟아 있는 인영을 발견한 태섭이 피로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태섭은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앞에 꽂아 넣으며 곧장 대만에게로 향했다.

“늦어서 미안요. 설마 그렇게까지 지연이 될 줄이야.”

“그럴 수도 있지. 가방 줘, 내가 들게.”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피곤하잖아, 얼굴이 다 죽었는데. 정 그러면 이거나 대신 들고 있던가.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가져왔는데 거추장스럽다.”

대만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재킷을 건네주었다. 괜찮은데. 태섭이 거절하자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잔말 말고 말 들으라는 뜻이었다. 태섭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메고 있던 백팩을 벗어 건네고 대신 재킷을 손에 들었다. 정대만이 즐겨 뿌리는 향수 냄새가 났다. 묵직한 우디 향. 익숙하고 안심되는 향기에 장거리 비행의 긴장이 풀렸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실내와는 다르게 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 숨통을 틀어쥐는 한여름의 냄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온화한 지역, 또는 덥더라도 건조하게 햇빛만 내리쬐던 지역에서 주로 생활했던 태섭에겐 고국의 열대야가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와, 나 운동까지 하면서 고등학교 어떻게 다녔냐. 벌써부터 콧잔등에 땀이 맺힌다. 그걸 배려해서였는지 대만의 차는 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트렁크에 짐을 싣는 대만을 바라보던 태섭이 툭, 말을 내뱉었다.

“심야버스 타고 가도 됐는데.”

“버스 내려서 또 택시 타야 하잖아?”

“그래봤자지, 뭐. 형도 피곤할 거 아냐.”

“기껏해야 한두 시간 운전하는 거랑 열몇 시간 비행기 타고 오는 것 중에 뭐가 더 피곤하겠냐. 그리고 내가 너 마중 나오고 싶어서 기다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이렇게까지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태섭은 짧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얌전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벨트를 매고 있으니 곧 대만이 뒤따라 타면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든 건 대만의 휴대폰이었다. 이걸 왜 주냐는 얼굴로 쳐다보니 대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악 선곡이나 좀 해달라고. 안 졸리게. 액정에 떠 있는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대부분이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 게다가 저녁 일정을 소화하고 바로 공항으로 넘어왔을 대만이니, 충분히 피곤하고도 남을 것이다. 태섭은 차를 출발시키는 대만의 옆얼굴을 흘긋 건너다보고 액정을 두드렸다. 반짝 밝아진 화면이 나른하게 반만 뜨인 태섭의 눈을 비추었다. 네 자리의 비밀번호는 송태섭의 생일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쓸데없이 로맨틱하다.

태섭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음악 어플을 찾아 켰다. 최근에 대만이 들은 곡의 목록들이 뜬다. 대부분 감상적인 발라드다. 참, 취향 하고는……. 이것만 봐서는 불꽃남자가 아니라 무슨 촛불남자나 향초남자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것과 완전 정반대의 시끄러운 곡을 틀어주겠다는 의욕이 솟았다. 제 휴대폰 어플과 비교해 가며 힙합을 하나 선곡해 낸 태섭에게 대만이 불쑥 말을 걸었다.

“어머니가 많이 아쉬워하시더라. 네 생일 때문에 먹는 자리인데 네가 없다고.”

“나도 6시간이나 지연돼서 묶여 있을 줄 알았나……. 이래서 미국은 안 된다니까.”

“그 미국에서 오래도 살고 있는 놈이 말은……. 사진이라도 볼래? 아라가 내 폰으로 이것저것 찍던데.”

“송아라가 먹을 거 말고 뭘 또 찍긴 해? 내 그럴 줄 알았지, 이거 봐. 와인, 식전빵, 애피타이저, 고기……. 야경 여기 딱 한 장 있네. 그리고 또 뭐야, 이건. 셀카?”

“최신폰이 잘 나온다나 뭐라나. 이따 보내주려고.”

“웃기고 있네. 찍힌 거 보니까 장비 문제가 아니라 사진사 문제구만.”

태섭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대만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갤러리를 몇 번 더 넘겨본 후 태섭은 대만의 휴대폰을 콘솔박스에 거꾸로 꽂아 놓았다. 야, 차라리 요 밑에 넣어 놓지 그걸 거기다 그렇게……. 대만의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에 태섭은 운전에나 집중하라고 대꾸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드리워진 도로 바깥으로 어둠에 잠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 바다를 보며 태섭은 조금 전 보았던 사진을 떠올렸다. 나이대가 다른 세 남녀가 근사한 야경을 배경으로 한 앵글에 모여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죄책감도 우울도 슬픔도 없는, 잔잔한 행복과 즐거움만이 가득 담겨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준섭이 떠난 후 가족들은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필요한 증명사진 정도는 찍었지만 ‘가족의 추억’으로서 남게 될 사진은 전혀 찍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가족 앨범은 준섭의 중학교 입학식에서 멈춰 있었다. 누군가는 영원히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데 남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죄의식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더 이상 한 명이 없다는 걸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준섭의 사진이 식탁에 다시 등장한 후에야 그들은 조금씩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태섭의 졸업, 아라의 입학, 아라의 성인식, 태섭의 데뷔 경기. 그렇게 각자의 성장 기록은 조금씩 남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가족사진’은 없었다. 역시 이유는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사진은 찍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태섭은 괜히 가족들과 사진을 찍는 게 어색했고, 어머니도 멋쩍어했으며, 아라도 굳이 찍고 싶지 않으면 찍지 않아도 된다는 주의였으니까. 하지만 정대만이 송태섭의 옆에 자리 잡으면서부터 모든 게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들과 오빠의 ‘남자’ 연인이라는 낯설고 어색한 포지션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예상외로 오래 지속되면서 태섭의 가족들도 점점 대만에게 익숙해졌다. 태섭의 안부를 대만에게 묻고, 대만이 태섭을 데려다주는 날에는 차라도 한 잔 내어주었다. 태섭이 미국에서 들어오는 날에는 저녁을 같이 먹기 시작했고 생일날에도 다를 바 없었다. 넷이서 식사를 하고 정대만과 송태섭은 따로 빠지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대만은 송씨 가족의 아들 노릇을 했다. 멀리 나가 있는 태섭 대신이었다. 여자들만 있는 집에 힘 쓸 일이 필요하면 바로 찾아와 도왔고 태섭보다도 그들의 일을 살뜰히 챙겼다. 아라의 연애 상담과 인생 상담을 해주는 것도 대만이었고 어머니의 건강검진 날 보호자로 가는 것도 대만이었다. 큰아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대만을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까지 얼마나 조심스러워하시고 고민하셨을지를 알아서 태섭은 저를 향한 표현이 아님에도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형도 부담되잖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대만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태섭이 네 가족이니까.

송태섭은 그렇게 말하는 정대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대만의 헌신을, 바다보다 깊은 진심을, 턱없이 부족한 장작으로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강렬한 불꽃을, 마음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날 활용해.’ 언어도 문화도 기후도 사람도 전부 다른 머나먼 타지 생활. 힘들면 힘들수록 더 센 척하며 꿋꿋이 발을 옮기던 송태섭이 결국에 무너지고 부러진 날, 설상가상으로 모든 게 그를 가로막고 세상에 혼자 남겨둔 것만 같던 날, 유일하게 전화가 닿았던 정대만은 모든 걸 듣고 나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언젠가의 농구 코트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송태섭의 승리를 위한 수단이 되기를 자처했다.

고독과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기묘한 관계였다. 일방적인 넋두리만 주로 이어질 뿐인 늦은 밤의 통화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기분전환 코스도,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내기 위할 뿐인 짐승 같은 섹스도, 모든 게 다 기묘함 그 자체였다. 대만은 정말로 태섭을 위해 기꺼이 활용당했고,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활용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세간에서는 그걸 ‘연애’라고 부르고 있었고, 어느덧 10년 차의 공인된 커플이 되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많은 감정이 태섭의 안에서 휘몰아쳤었다. 하지만 태섭은 제가 느낀 것들을 10년 동안 대만에게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서도 코트에서도 그리고 제 삶에서도 주장이어야 했던 송태섭의 짐을 정대만이 기꺼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그 덜어진 무게만큼 태섭은 대만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리고 송태섭은 빚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됐다. 남이 제게 진 빚은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어도 제가 진 것은 끝끝내 갚아야만 마음이 편했다. 이 기묘한 관계가 절대로 ‘연인’이라는 파스텔 빛의 무언가로 불릴 만한 게 아님에도 그냥 내버려 두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실체야 어찌 되었든 정대만이 송태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장단에 겉으로나마 어울려주는 것으로 태섭 나름대로 빚을 갚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목숨 빚만 해도 그렇게 10년을 갚아 오고 있는데, 거기에 감정의 빚까지 지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채무자에게 불리한 계약이니까.

하지만 오늘 가족들과 대만의 사진을 본 순간 태섭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대만에게 진 빚은 평생을 바쳐도 갚을 수 없을 거라고, 준섭의 죽음 이후 오랜 트라우마에 잠겨 있던 태섭의 가족들마저 치유해 준 이 사람을 놓아주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이제는 수단으로서의 활용을 떠나 그냥 송태섭의 인생에서 정대만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태섭은 창에서 눈을 떼고 여전히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대만을 돌아보았다. 뭐 할 말 있어? 시선이 느껴졌는지 대만이 잠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만이 형.”

“음?”

“고마워.”

“뭐가, 갑자기.”

“그냥, 전부 다. 지난 10년 동안의 모든 게.”

태섭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대만은 조금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30대에 접어든 지가 한참인데도 그 표정에서는 여전히 10여 년 전 북산의 코트에서 보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어, 괜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뭔데, 갑자기. 너 뭐 나한테 잘못한 거 있냐? 미심쩍어하는 대만의 목소리에 태섭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내가 오래전부터 형한테 못한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뭔데?

“사랑해.”

그리고 송태섭은 진심을 담아 웃었다.

제 평생을 정대만에게 주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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