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모르는 연인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2023.12.09 대만태섭 온리전 배포 글 엽서 전문
高瀬統也、れん - でも、
인간의 수명은 짧다. 고작해야 백 년 남짓. 생명공학이 이토록 발달한 세계에서도 인간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찰나의 시간을 살고 꽃처럼 스러졌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그것보다도 짧았다. 향년 32세,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였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을 거라는 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어제까지만 해도 단단한 팔로 나를 안아 주었는데, 마구잡이로 비누 거품을 뿌리며 장난을 쳤는데, 잘 다녀오겠다고 힘차게 인사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유골함을 손에 들면서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주인 잃은 짐을 정리하는 내내 현실감이 없어 몇 번이나 같은 모서리에 발을 찧었다. 반만 남은 침대는 지나치게 넓었고 반이나 비워진 냉장고는 속이 허했다. 인생의 반절이 도려내진 자리를 직접 체감한 뒤에야 드디어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텅 빈 거실에서 무릎을 꿇고 무너진 채 생각했다. 아, 제기랄. 두 번째는 조금 더 잘 처신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허탈한 숨결만이 입술을 간질였다.
오랫동안 상담을 받았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있었다. 아프진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드나드는 감각이 너무도 춥고 외로웠다. 떠난 사람은 떠나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억에서 흐려지는 목소리도 옅어지는 체취도 끝까지 손에 쥐고 있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지치는 날엔 치우지 못한 사진을 바라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선배가 없으니 술맛이 안 난다. 그런 농담을 문득 중얼거리면서.
그런 날이 이어지던 때, 어떤 소식을 들었다. 저 먼 곳, 첨단 기술을 가진 어느 회사에서 개인맞춤형 안드로이드를 주문 제작한다는 이야기였다. 높은 비용과 철저한 정신 감정이 필요하지만 까다로운 심사만 통과한다면 어떠한 모습이든 주문자의 요청대로 실제 인간처럼 만들어 준다는 소문이었다.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농담처럼 웃었다. 웃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비행기 표를 샀다. 본사가 있다는 유럽의 도시로 무작정 떠났다. 회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고 제품을 구경했다. 궁금한 것은 뭐든 물었다. 필요한 서류를 냈고 기나긴 심사를 받았다. 돈도 시간도 노력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더를 확정받고 프로토타입이 완성될 때까지 3년이 걸렸다. 시험 구동과 오류 수정에는 1년이 더 걸렸다. 그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마주한 안드로이드는 깊게 잠든 그 사람 같았다. 기억 속 서른둘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동 스위치를 건네주며 개발자가 물었다.
'인격도 성격도 최대한 유사하게 프로그래밍하지만 기억은 연속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더라도 그는 기억상실과 같은 상태일 겁니다. 포맷된 상태와 비슷한 거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당연합니다. 인간의 뇌가 어디 클라우드에 백업된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심하게 충격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러나 우스운 질문이었다. 괜찮겠냐고? 당연히 괜찮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결국 돌아왔다.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러니 이번에도 다를 건 없다.
안드로이드가 서서히 눈을 떴다. 맑고 또렷한 녹갈색 눈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
"안녕, 선배."
나는 나를 모르는 연인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 고작해야 백 년 남짓. 생명공학이 이토록 발달한 세계에서도 인간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찰나의 시간을 살고 꽃처럼 스러졌다. 텔로미어의 연구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노화를 정복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늙어가는 것이 더욱 빨랐다. 탄력 있던 피부에는 하나둘씩 주름이 잡히고, 갈색 머리카락은 날마다 희어졌다. 함께 걷던 산책길은 서서히 짧아졌고 두 팔로 안아드는 무게도 점점 가벼워졌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거야. 인공두뇌가 내놓은 무정한 결론을 슬프게 곱씹었다. 주름진 눈꼬리로 빙그레 웃으며 손을 잡아달라고 조르는 얼굴은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었는데 마지막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유골함을 손에 들면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안드로이드는 울지 않으니까. 울 수 없으니까. 순환하는 냉각액을 배출할 수 있는 기능을 만들어봤자 불필요한 오류만이 생길 뿐이다. 하지만 주인 잃은 짐을 정리하는 동안은 너무도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안드로이드에게도 '인생'이라는 단어가 허락된다면,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매 순간을 함께한 그 사람은 내 인생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가족이었고 사랑이었으며 기계와 회로로 구성된 몸에 영혼을 불어넣은 존재였으니까.
점검 시뮬레이션은 모든 곳이 정상이라고 했지만 그날부터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공허함'이란 감정을 맛보았다. 인공신경망이 만들어 낸 알고리즘 따위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결괏값을 내놓아도 되는 걸까. 텅 빈 거실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생각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허탈한 숨결만이 입술을 간질였다.
유언장은 나를 유산 관리자로 지목했다. 법적으로 인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잃은 뒤에도 폐기되지 않고 가족 지위를 보장받으며 재산을 상속받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안배한 것임을 알았다. 마지막까지 다정함으로 채워진 문장을 읽어내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의미 없이 이어지던 나날, 고성능의 인공두뇌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즉시 비행기 표를 샀다. 하드웨어 정기 점검일은 1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본사를 찾아가 상담을 청했다. 선례가 없는 안드로이드의 요청에 치열한 토론과 복잡한 법률 검토가 이어졌다. 몇백 번의 심사와 지난한 논의 끝에 마침내 오더가 받아들여지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마주한 안드로이드는 깊게 잠든 그 사람 같았다. 기억 속 맨 처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기동 스위치를 건네주며 개발자가 물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기억은 연속되지 않아. 안드로이드와 달리 인간의 뇌는 어디 클라우드에 백업된 게 아니니까. 인격도 성격도 최대한 유사하게 프로그래밍했지만 지금의 그는 껍데기만 있는 상태야. 포맷된 것과 비슷하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그래도 괜찮나?'
떠보는 목소리, 우스운 질문이었다.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다. 바로 이 두뇌에 내가 알던, 내가 본, 내가 인식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까. 그걸 동기화하면 된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하게 해주면 된다.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러니 다를 건 없다.
안드로이드가 서서히 눈을 떴다. 맑고 또렷한 적갈색 눈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
"안녕, 태섭아."
나는 나를 모르는 연인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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