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魅
바다에 홀리다.
송가의 남자들은 바다와 연이 깊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물장구를 치고 물고기를 잡을 줄 알았다. 바다 깊이 오래 잠수해도 지치지 않았다. 파도와 물결의 흐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읽어냈다. 그들이 오른 배에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마치 바다의 사랑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들은 바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아낌없이 타고난 핏줄이었다.
하지만 바다의 사랑을 받는 대가도 그만큼 컸다. 송가의 가족묘에는 남자들의 유골이 적었다. 무탈하게 늙어 침대에 편안히 누운 채 최후를 맞은 이들은 수가 많지 않았다. 열에 여섯일곱은 바다의 품에 안겨 마지막을 맞았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바다에 안긴 송가의 남자들은 유해를 찾기가 유난히도 힘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무더운 여름날이면 할머니는 종종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섭은 할머니의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런 건 그저 동화 같은 옛날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겼다. 산 사람들이 산을 두려워하고 산짐승을 경외하듯, 바다 사람들이 바다를 숭배하느라 만들어 낸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야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마지막이었다. 그 정도로 바다에 해를 많이 입었다면 왜 진작에 섬을 떠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은 적도 있었다. 그것이 생계와 얽힌 복잡한 이야기였음을 이해한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어쨌든 태섭은 송가 남자들의 운명 따위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뿐인 형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대로 바다에서 잃고 유해조차 찾지 못한 뒤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몇 달 뒤, 제가 그토록 정겨웠던 고향의 바다에 홀려 삼켜질 뻔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냥꾼들은 사냥감이 가장 약할 시기를 노린다. 그것은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형을 잃고 잔뜩 가라앉아 우울해져 있던 태섭은 바다를 자주 찾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섬사람들은 힘들거나 슬플 때면 으레 바다를 찾았고, 그곳에서 파도 소리를 듣고 짠 비린내를 맡으며 위로를 받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래서 태섭은 그날도 혼자 드리블 연습을 하다 말고 털레털레 바닷가로 향했다. 백사장에 농구공을 대충 던져두고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흐트러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물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찰싹이는 파도가 발목을 간지럽히는 것이 좋았다. 발을 적시는 물결을 느끼며 심호흡을 한 태섭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는 목과 코가 전부 따가웠고 입에서는 역겨울 정도의 짠맛이 났다. 온몸이 추웠다. 등을 세게 두드리는 손길에 충격을 받은 위장이 물을 잔뜩 토해냈다. 주변에는 잔뜩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구급차의 빨간 사이렌은 시끄럽고 다급하게 울렸다. 정신이 없었고 영문을 몰랐다. 병원에 실려 가 링거를 맞고 검사를 받았다. 혹시 모르니 하루 동안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모든 얼떨떨한 일들이 끝난 후에야 태섭은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태섭은 제가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는 걸 나중에 할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전혀 그런 기억이 없던 태섭은 당황했지만, 할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한 얼굴로 손자의 손을 잡았다.
“태섭아, 너는 바다에서 태어난 바다 사람이지만 바다를 멀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 단순히 물조심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모든 사냥꾼은 사냥감이 가장 약해질 시기를 노려 기회를 엿본단다. 네 마음이 약해지는 게 느껴진다면 바다 근처에는 얼씬도 말거라. 바다를 네 눈에 담지 말아라. 뒤돌아보지 말고 듣지 말고 대답하지 말아라. 그게 홀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태섭아. 너는 바다에 사로잡히지 말거라. 할머니는 몇 번이고 그렇게 당부했다.
인터하이가 끝난 후 북산의 농구부원들은 안 선생님 내외가 준비한 3박 4일의 짧은 포상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사모님의 친척분이 경영하신다는 바닷가의 펜션. 고된 훈련으로 지쳐 있던 고등학생들은 모처럼 잔뜩 풀어져 물놀이를 할 생각에 신이 나 며칠 전부터 시끄러웠다. 한나는 아쉽게도 가족 일정이 겹쳐 함께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산왕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입원을 해야 하는 백호는 나도 놀러 가고 싶다며 계속 투덜거렸지만, 그동안 심심하지 않게 자주 보러 가겠다는 소연의 말에 헤벌쭉해져 금세 조용해졌다. 태웅은 그곳에도 농구 코트가 있냐는 질문을 했고, 놀랍게도 있다는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떴다. 반짝반짝 생기가 도는 태웅의 얼굴을 본 대만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가만히 시선을 피했다. 대만 선배, 그렇게 태웅이랑 원 온 원 하는 게 긴장 되세요? 중식이 소곤거린 질문에 대만이 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야, 서태웅 앞에서 원 온 원의 원 자도 꺼내지 마!
그리고 태섭은, 조용했다. 체육관에서 치수의 공지를 듣던 때에도, 기차를 타고 펜션으로 향하는 지금도. 심지어 준호마저도 한껏 들떠 있는 이 객차 안에서 오직 태섭만이 잔뜩 가라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대만과 나란히 앉아 온갖 실없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서 놀았을 텐데, 대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적당히 단답형으로 대답만 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만 돌릴 뿐이었다. 태섭이 상대를 해주지 않자 시들해져 다른 1, 2학년들과 어울려 시시덕대고 있던 대만은 출발한 지 1시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작은 머리통을 의자 너머로 한참 건너보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분명 털썩 앉는 소리도 들리고 인기척도 느꼈을 텐데도 태섭은 대만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턱을 괴고 창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뭔 일 있냐. 애들 다 노는데 너는 왜 그렇게 심각해.”
“별일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좀 자.”
“그 정도까진 아니고.”
여전히 시큰둥하고 심드렁한 말투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태섭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대만이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었다.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 신경 쓰이는 표정은 잔뜩 하고 있으면서 물어보면 대답은 또 안 해요. 그게 더 신경 쓰이게 한다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대만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옆에서 나 심기가 불편하오, 기색을 풀풀 풍기며 시위를 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태섭 쪽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섭은 대만에게 여러 의미로 약했다. 툭,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쉰다.
“진짜 별거 아니에요. 그냥 바다 가는 게 좀 별로라 그래요.”
“너 섬 출신이라지 않았냐? 그럼 바다 가는 걸 더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야?”
“섬 출신도 맞고 바다 좋아하는 것도 맞긴 한데……. 시기가 좀.”
태섭의 영문 모를 말에 대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름만큼 바다 가기 딱 좋은 시기가 어디 있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태섭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한 번 굴리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이맘때쯤에 바다 가면 빠지기 쉬워서 그래요.”
“빠지기 쉽다고? 너 수영 못해?”
“아니, 그 소리가 아니고!”
태섭이 답답하다는 듯 빽 소리를 질렀다. 객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만아, 태섭이 괴롭히지 마.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준호의 타박에 대만이 발칵 성을 냈다. 송태섭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정말 억울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대만이 짜증을 내자 태섭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를 듣고 둘의 대화가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부원들의 시선이 다시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다시 분위기가 진정된 걸 확인한 태섭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나머지 말을 이었다. 홀려서 빠진다고요. 여전히 태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뻑이던 대만이 조금 뒤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물귀신 같은 거?”
“뭐……. 비슷해요.”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야.”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해주신 이야기였는데요. 우리 집 남자들은 바다의 사랑을 받는대요.”
“뭐?”
“뭐, 옛날이야기 같은 거지만. 그래서 저는 남자 친척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바다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리고 아마 그건 제게도 해당이 되는 모양이고요.”
바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거라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빠지기 쉬워요. 예전에도 몇 번 그랬고. 바다로 가는 길에서 자기가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주제에 태섭은 너무도 태연했다. 두려워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순응한,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언젠가는 제게 닥칠 운명임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태도였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여지는 갈색 눈에는 열일곱 나이의 고등학생답지 않게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공허가 감돌고 있었다. 순간 그 홍채 안쪽에서 검게 펼쳐진 심해가 일렁인 것 같아 대만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걸 보면서 이 녀석은 어쩌면 이미 어느 정도는 바다에 삼켜진 걸지도 모르겠다고, 대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다는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태섭이 가장 약해지는 때를 호시탐탐 노렸다. 죄책감이 심해지고 절망감이 강해지는 시기면 어김없이 태섭을 제 품으로 불렀다. 엄마가 형의 물건을 버렸을 때, 고향을 떠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먼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 전학 첫날부터 이유 모를 주먹질을 당하고 단지에서의 농구 놀이조차 금지당했을 때 태섭은 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두 명의 생일과 한 명의 기일이 있는 한여름에도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겼다. 경험이 반복되자 태섭은 제가 바다에 홀리는 이유를 눈치채었고, 할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느껴지면 되도록 바다를 멀리했다.
태섭은 바다가 저를 포기하지 않으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이 아니어도 나중에, 언젠가, 또다시 방심한 어린 양이 제 곁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 바다는 반드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제 품에 안으려 들 것이었다. 그리고 태섭은 뼛속까지 바다 사람이었다. 바다를 볼 때 가장 충만해지고 바다에서 위로받으며 바다를 통해 다시 일어설 기운을 얻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바다에서 태어난 이상 태섭은 바다를 사랑할 운명이었고, 송가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바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니 빠르든 늦든 언젠가 다가올 제 마지막도 아마 아버지와 형과 비슷하리라고, 태섭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은 지 6개월이 갓 넘었다는 3층짜리 독채 펜션은 신축답게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넓은 거실에 놓인 다인용 가죽 소파는 인기가 많아 너나 할 것 없이 차지하고 누우려 들었다. 뒷문을 열고 나가면 곧장 바닷가로 향할 수 있어 몇몇 부원들은 짐을 풀기도 전부터 바다로 달려가 장난을 치기에 바빴다. 그 사이에는 달재도 끼어 있었지만 태섭은 함께 뛰어나가 놀지 않고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묘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벌써부터 바다에 홀린 것만 같아, 조금 불안해진 대만은 괜히 태섭의 옆을 얼쩡거렸다. 선배, 정신 사나워요. 결국 태섭은 조금 짜증이 난 얼굴로 대만에게 쏘아붙였다.
“너는 걱정을 해줘도 뭐라 그러냐?”
“제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무조건 빠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 정도로 걱정 안 해도 돼요.”
“그것도 뭐 확률 같은 게 있어?”
“확률이라기보다는……. 상태가 안 좋을 때 주로 그런달까. 기분이 안 좋거나 뭔가 가라앉거나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럼 지금 기분은 어떤데.”
“그냥 그래요.”
태섭의 말을 들은 대만은 잠시 턱을 긁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태섭의 팔을 턱 붙잡았다. 뭐예요? 그러면 상태가 안 좋을 일이 없으면 되겠네. 영문 모를 말을 하며 씩 웃던 대만이 태섭을 확 잡아끌었다. 으악?! 균형을 잃고 휘청이며 대만에게 끌려간 태섭은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풍덩! 묵직한 소리가 났다. 물 속에 나동그라진 태섭을 보고 먼저 와서 놀던 부원들이 크게 웃었다. 선배!! 꽥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킨 태섭 위로 대만이 엎어졌다. 그 위로 다른 부원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햄버거처럼 덮쳤다. 아이씨, 나 물 먹었다고! 사람들을 거의 발로 차다시피 하면서 겨우 빠져나온 태섭에게 뒤이어 몸을 일으킨 대만이 촥촥 물을 뿌렸다. 아, 정대만! 뭐 하는 거냐고요, 진짜! 으악, 태섭 선배, 저한테도 물 다 튀잖아요!
대만과 태섭을 시작으로 한참 동안 여러 명이 뒤엉켜서 바닷가에서 물싸움을 벌였다. 적당히 하고 들어오라고 말하러 온 치수까지 바다에 빠뜨렸다. 물싸움을 하는 부원들은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편을 갈라 레슬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힘들다. 태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직도 서로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부원들 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 옆으로 대만이 득달같이 달라붙어 뒤에서 목을 확 감쌌다.
“아오, 그만 좀 빠뜨려요. 저 오늘 바닷물 많이 먹어서 배부르다고요.”
“재밌지?”
“예?”
“기분 괜찮지?”
대만이 씩 웃으며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아. 태섭은 작게 탄성을 내다가 피식 웃었다. 네, 기분 좋네요.
대만의 걱정이 무색하게 첫날과 둘째 날은 무난하게 지나갔다. 첫날은 오자마자 시작한 물놀이를 제외하고는 딱히 바다에 나갈 일이 없었고, 다음날은 태연하게 1시간 반이나 해안 길을 따라 아침 러닝을 하고 온 태섭과 마주칠 수 있었다. 둘째 날의 불꽃놀이에서는 조금 멍한 시선으로 밤바다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어깨를 툭툭 치니 금방 정신을 차리고 제 손에 들린 선향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조금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았지만, 이후로도 태섭에게 별일이 없자 대만은 조금 안심했다. 어차피 이 여행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설마 무슨 일이 터지겠냐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고.
그러나 사건은 3일째 되는 날 터졌다. 특유의 넉살과 붙임성으로 이틀 만에 펜션의 주인장과 친해진 대만은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낚시를 하러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왔다. 아저씨가 아시는 선장님이 있대. 점심 먹고 출발하려는데 같이 갈 사람? 대만이 동행인을 구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파 구석에 반쯤 드러누워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던 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호식이 너 갈래? 달재는? 아저씨가 낚싯대랑 이런 거 다 빌려주신대. 대만이 신이 나서 후배들에게 동행을 권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요.”
무섭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부원들의 시선이 전부 태섭에게로 쏠렸다. 태섭은 반쯤은 굳고 반쯤은 일그러진 얼굴로 대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만이 눈썹을 가만히 치켜올렸다.
“왜? 모처럼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런 거 좀 즐겨보면 좋잖아.”
“가지 말라고 했어요.”
배 타고 낚시 갈 생각 하지 마요. 선배뿐만 아니라, 너희들 다 마찬가지야. 태섭은 주변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평소엔 호쾌하기만 하던 태섭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날을 세우는 걸 처음 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태섭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달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 갈게. 표정 풀어, 태섭아. 너 지금 좀 무서워.
난 갈 건데? 대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섭이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찢어버릴 것 같이 매서운 시선에도 대만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일 뿐이었다. 그래, 정대만은 오히려 저를 가로막는 게 있을수록 더 불타는 사람이었다. 태섭이 뜬금없이 바다낚시를 가지 말라고 하자 오기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사람 말 좀 들어요.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니, 가지 말라고 할 거면 뭐 마땅한 이유라도 대던가. 다짜고짜 명령하듯이 그러는 건 뭐냐? 너 뭐 돼? 네가 주장이야? 너 내가 선배인 건 기억하지?”
“배 타는 것도 위험하고.”
“15년 경력의 선장님이 모시는 배가 뭐가 그렇게 위험하겠냐?”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바다라고요.”
“오늘은 날도 맑고 파도도 잔잔한데 뭐가 문제야. 일기예보도 다 찾아봤어.”
“그때는 안 이랬는 줄 알아?!”
그때도 이랬다고요! 똑같이! 결국 성질을 더 참지 못한 태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터져 나온 큰소리에 주변에 정적이 감돌았다. 태섭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는지 대만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차 싶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던 태섭이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야, 송태섭! 대만이 부르는 소리가 펜션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태섭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만이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다.
“‘그때’가 언제를 말하는 건데? 너 무슨 일 있었냐?”
“신경 꺼요. 별거 아니니까.”
2층의 2학년 방으로 올라간 태섭은 가장 안쪽에 있는 제 자리에 모로 누웠다. 아침에 다 개어둔 이불을 하나 끌어와 몸 위에 덮었다. 야, 태섭아. 대만이 옆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너 진짜 뭐 있었어? 사람 낚시 가는 거에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을 해. 고집을 부리던 조금 전과 달리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뭔지는 몰라도 ‘배를 타고 가는 바다낚시’가 태섭에게 중요한 무언가임을 눈치챈 것 같았다. 태섭아? 야, 대답 안 할 거야? 대만이 태섭의 팔을 쿡쿡 찔렀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 없이 누워만 있던 태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갈 거예요?”
“뭐, 갈 생각이긴 한데…….”
“그럼 가요. 내가 뭐라고 선배 노는 걸 막는담. 선배 말대로 내가 주장도 아닌데.”
“너 그런 목소리로 말해봤자 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거랑 똑같은 거 알지.”
“대신 꼭 돌아와요.”
무슨 일 있어도 꼭. 그렇게 말하는 태섭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대만은 멈칫했다. 대체 뭐가 송태섭을 이렇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지금의 태섭은 마치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 같았다. 그래서 대만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태섭을 달랬다.
“날도 이렇게 맑고, 항구 근처 조금 돌면서 기분이나 내는 건데 뭔 일 있겠냐. 네가 뭔 걱정을 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괜찮을 거야.”
“…그래요.”
“그럼 나 놀다 온다?”
“그러세요.”
“그래, 쉬어라. 이따가 저녁 먹을 때 보자.”
대만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하필이면. 태섭은 베개에 제 머리를 쾅 박았다. 8년 전 바로 오늘의 기억이 태섭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항구, 낚시, 바다, 그리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가던 사람.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바다에 오는 게 껄끄러웠던 건데 심지어 이제는 동일한 기억이 되풀이되기까지 한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태섭이 괴롭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 거실에 있는 대만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방까지 올라왔다. 대충 들어보니 다들 낚시라는 지루한 행위에는 흥미가 없어 대만 혼자서 다녀오려는 것 같았다. 그걸 듣는 태섭의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오후가 되자 먼바다 쪽 하늘부터 조금씩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데. 주방 창문에서 그 모습을 보던 태섭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대만이 출발한 지 고작 두어 시간 남짓 지났다. 이제 한참 낚싯줄을 드리우고 입질을 좀 즐기고 있을 테지. 슬슬 재미 보기 시작했을 텐데 일찍 접고 들어오기는 하려나. 태섭은 초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녁 먹기 전까지는 온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여전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태섭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정대만은 괜찮을 거라고 저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5시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정도일 줄 알았던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1시간가량 지나자 장마철 소나기 같은 수준이 되었다. 오늘 맑다고 했었는데. 중식이 창밖으로 팔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대만이 아직 안 들어왔어? 3층에서 내려오던 준호가 물었다.
“네, 아직이에요.”
“배에는 전화도 못 거는데, 괜찮으려나.”
“주인 사장님께 전화 드려볼까요?”
“응, 배 언제 들어오는지 아실지도 모르니까 한 번 드려보자.”
거실에서 무릎을 세우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앉아 있던 태섭은 준호와 중식의 대화를 더 들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2층으로 달려 올라가 제 짐을 뒤졌다. 맑다는 일기예보만 보고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으니, 그 대신 후드 집업을 하나 꺼내 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신발을 신었다. 준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태섭아, 어디 가? 항구에요. 그리고 태섭은 문을 열었다.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를 잠시 쳐다보다가 바깥으로 내달렸다. 지금 제가 바다에 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었다.
대만은 7시가 훌쩍 넘어서 펜션으로 돌아왔다. 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한 지 오래였다. 현관에서 우비를 벗으며 대만이 멋쩍게 웃었다. 아, 나 배에서 쫄딱 젖어서 선장님 댁에서 옷 대충 말리고 왔다. 연락 못 해서 미안. 펜션 전화번호를 모르겠잖냐. 그리고 대만은 저를 쳐다보는 부원들의 이상한 시선을 마주했다.
“왜?”
“태섭이 안 만났어?”
“태섭이? 걔가 왜?”
“1시간 전에 너 찾는다고 항구 나갔는데. 그래서 마주쳐서 같이 있다가 오는 줄 알았지?”
준호의 말에 눈을 크게 뜬 대만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차에서부터 들었던 태섭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맘때쯤에 바다 가면 빠지기 쉬워서 그래요.
홀려서 빠진다고요.
상태가 안 좋을 때 주로 그런달까. 기분이 안 좋거나 뭔가 가라앉거나 그럴 때 있잖아요.
가지 마요.
…대신 꼭 돌아와요.
대만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일단은 항구를 향해 달렸다. 인도를 따라 뛰면서 혹시나 하고 옆을 스치는 해변을 계속 살폈지만 사람 같이 생긴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높게 철썩이는 시커먼 파도가 백사장의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대만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 설마. 제발,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한참을 전력 질주해 도착한 항구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꽁꽁 묶여 정박한 배들만이 거센 물결을 따라 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송태섭! 대만은 목청껏 태섭의 이름을 부르며 배 위를 살폈다. 혹시나 비를 피하려고 남의 배에 잠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위이잉 울리는 사이렌 사이로 파도가 높으니 바다에 접근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씨발, 욕을 짓씹어 내뱉으며 대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간 거야. 송태섭! 그는 다시 길을 따라 달렸다. 대답해, 송태섭! 야!
얼마나 더 달렸을까. 대만은 드디어 태섭을 발견했다. 그는 항구에서 십 분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씨발, 저 미친 새끼가! 야, 송태섭! 계단을 찾을 틈도 없어 대만은 무작정 난간을 넘어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렸다. 대만의 운동화 안으로 고운 모래가 잔뜩 흘러 들어왔다. 알갱이들이 버석하게 밟히는 걸 무시하고 대만은 다시 일어나 뛰었다. 송태섭!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다.
분명 목소리가 들릴 텐데도 태섭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태섭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종아리를 넘어 허벅지까지 잠긴 채였다. 대만은 허겁지겁 태섭을 따라 바다로 뛰어들었다. 밀어닥치는 파도에 몇 번이나 다리가 꺾일 뻔 했다. 겨우 휘청여 중심을 잡으면서 바짝 버텼다. 무릎 부상 때문에 하체 근육에 신경을 쓴 게 이런 때 도움이 되다니.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대만은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대만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내딛는 것과 달리 태섭은 바닷속에서도 꼿꼿했다. 여전히 땅 위를 걷는 것처럼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바다가 태섭을 위해 편한 길을 깔아준 것만 같은 불가능한 보행이었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게 보여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정대만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그는 태섭을 뭍으로 끌어내기 전까진 뒤돌아설 생각이 없었다. 대만은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태섭의 팔을 잡았을 때는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찬 상태였다. 대만보다 키가 작은 태섭은 벌써 상체가 반쯤 잠겨 있었다. 대만은 입술을 꽉 깨물며 태섭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태섭은 끌려오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무언가가 태섭의 발목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상체는 딸려 오는데 다리가 딸려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당겨봐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대만은 그제야 태섭의 ‘옛날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바다는 송태섭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내려다본 태섭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무표정이었다. 대만이 몇 번이나 뺨을 두드려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오히려 몽유병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해, 땅에서만큼 힘을 쓰기 쉽지 않은 대만이 무게중심을 잃고 그에게 딸려갈 뻔했다. 아, 미친, 진짜 손 많이 가네! 겨우 몸을 바로 세운 대만이 육성으로 짜증을 냈다.
하지만 힘에서는 대만이 훨씬 우위였다. 온 힘을 다 짜내 쓰며 대만은 두 손으로 태섭의 팔을 잡고 아득바득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만의 힘을 이기지 못한 태섭의 한쪽 발이 결국 떨어져 나오며 중심이 뒤쪽으로 쏠렸다. 대만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태섭의 상체를 한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물살을 헤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대만이 태섭을 물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바다가 성이 난 듯 거세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태섭의 키만 한 파도가 번개같이 밀려와 두 사람을 덮쳤다. 어푸푸, 어찌어찌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면에서 물을 잔뜩 먹은 대만이 구역질과 기침을 동시에 했다. 그렇게 바닷물로 샤워를 하고도 태섭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대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수평선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바다가 순간 잠잠해졌다. 태섭은 조금 더 품에 고쳐 안은 대만이 일렁이는 바다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내가 얘를 놔줄 것 같아? 웃기지 마. 난 송태섭이 있어야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북산의 귀한 주전 가드를 고작 너 따위에게 이렇게 뺏길 줄 알고? 네가 얘 가족들을 얼마나 처먹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절대 송태섭까지 처먹지는 못할 거다. 내가 그렇게 안 둘 거거든.”
대만의 도발이 거슬렸는지 다시 바다가 거센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만은 저를 쓸어버릴 것만 같은 바다의 기세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섭에게 집착하는 바다를 비웃었다. 네가 송태섭의 가족들을 사랑한다고. 하, 참 대단한 사랑이다. 그렇게 대단해서 남김없이 다 처먹어야 직성이 풀리냐? 코웃음을 친 대만이 매서운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넌 절대 송태섭 못 가져. 왜냐면 얘는 얌전히 네게 먹혀주러 온 게 아니라, 자기가 바다에 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날 찾으러 여기로 뛰쳐나온 애거든. 네가 아니라 날 위해 있는 애란 말이야. 그런데도 그렇게 데려가고 싶다면, 그래, 어디 한 번 데려가 봐.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반드시 얘를 끌어낼 거야. 네가 아무리 높은 파도를 불러내고 이딴 물결로 가로막으려 들어도 절대 이 정대만을 이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거든. 그래서 송태섭을 포기한다는 건 애초에 내 선택지에 있지도 않아.”
너에게 빼앗기지 않아. 얘는 내 거야. 송태섭은 진작부터 내가 찜했으니까 네가 양보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만은 다시 태섭을 물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뭍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바다의 방해도 심해졌다. 거의 손에 다 넣었던 사냥감을 빼앗기게 생긴 바다는 길길이 성을 내며 날뛰었다. 같잖은 인간 따위가 제 것을 빼앗아 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높은 파도가 몰아쳤다. 하지만 대만도 집요했다. 무릎이 풀릴 뻔하고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낄 때마다 그는 악을 쓰면서 더욱 태섭을 꽉 붙잡았다. 두 존재의 악착같은 힘 싸움이 이어졌다.
마침내 승리한 쪽은 대만이었다. 몇 번이나 물을 먹고 파도에 휩쓸려 정신이 어지러워지면서도 대만은 끝내 태섭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기어이 모래사장 위로 기어 나오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의 발치에서 사냥감을 놓친 바다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태섭의 발목을 잡으려 애써도 파도는 뭍에서는 힘을 잃기 마련이었다. 고작해야 신발과 다리를 적실 뿐인 하찮은 물결을 보고 대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가 들이치는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배를 부여잡고 한참을 웃었다. 짜릿한 승리감이 흘러넘쳐,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 태섭의 주변은 온통 암흑이었다.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에 태섭은 순간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만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항구로 달려갔다. 정박한 배들의 사이를 뛰어다니며 정대만의 이름을 불렀고 들어오는 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다 못해 폭우로 변했을 때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자꾸만 그의 눈앞에 8년 전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해변으로 달렸다. 난파된 건 아닐까, 백사장에 밀려오진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배의 불빛을 더 잘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마주해서는 안 될 검은 밤바다를 마주한 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래서 태섭은 결국엔 제가 송가 남자들의 운명대로 바다에 집어삼켜진 줄 알았다.
“으음…….”
그런데 누군가가 잠꼬대를 했다. 우물거리는 낮은 소리가 머리 위에서 잠시 들리더니, 그 누군가가 태섭을 바디필로우라도 되는 것처럼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놀란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맡아지는 화장품의 향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정대만.”
그러고 보니 제가 누운 곳은 부력이 강한 물속이 아니라 푹신한 매트리스였다. 차가운 물 대신 따뜻한 이불이, 심해의 수압 대신 대만의 굵은 팔이 태섭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맥이 탁 풀렸다. 태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만의 가슴에 이마를 푹 기댔다. 돌아왔어. 깊은 안도감이 태섭의 핏줄을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아 태섭은 대만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깼냐…….”
졸음기가 잔뜩 묻어난 낮은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흐아암, 대만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태섭을 조금 고쳐 안으며 이불을 목 바로 아래까지 덮어 주었다. 춥진 않냐. 네. 괜찮아요. 짧은 대화가 오갔다. 너 바다에 빠졌었다. 하품을 하면서 잠이 조금 깬 듯 여상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태섭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뒷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내가 끌어냈어.”
대만이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너 때문에 힘쓰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직도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다 아파. 바닷물도 많이 먹어서 당분간 소금 간 있는 음식은 들여다보기도 싫어. 말하는 건 가벼운 투정이었지만 그 폭우와 높은 파도에서 사람 하나를 구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란 건 태섭이 가장 잘 알았다. 베테랑 안전대원도 그런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대만은 그런 곳엘 뛰어들어 송태섭을 기어이 바다에게서 다시 빼앗아 왔다. 그 과정에서 어떤 한판승부를 벌였을지가 괜히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태섭은 그에게 위험하게 왜 그랬냐는 소리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바닷물이랑 빗물에 다 젖어서, 오자마자 나 씻는 김에 너도 같이 좀 씻겼다.”
“…저 정신 지금 들었는데요?”
“그래서 씻기는 것도 고역이었다고. 아, 뭔데, 그 침묵……. 이상한 짓 하나도 안 했거든? 이것도 아까 체온 잘 안 돌아오길래 안고 있었던 거야.”
나는 원래 몸이 좀 뜨거우니까. 대만은 그렇게 덧붙이며 태섭의 이마와 뺨, 맨살이 드러난 팔을 만져보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제 몸을 덮을 때마다 태섭이 움찔했지만, 대만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태섭을 여기저기 주물럭거리던 대만이 다시 손을 떼며 혼잣말을 했다. 많이 돌아왔네. 아까는 시체 같았는데.
“물에 빠져서 피곤할 텐데 좀 더 자라. 애들한테 이 방에 우리 둘만 두라고 했으니까 조용하고 괜찮을 거야.”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난 다시 잔다. 그러더니 정말로 몇 분 되지 않아 다시 작게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태섭은 잠시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대만의 앞머리를 슥슥 정리해 주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조곤조곤한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대신 선배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죄로 미움 좀 단단히 샀겠네요. 바다에 가면 안 되는 건 이제 내가 아니라 선배일 것 같은데. 선배는 다른 의미로 삼켜버리려 들지도 몰라요, 바다는 의외로 성격 나쁜 구석이 있으니까.
“…뭐, 어차피 상관없나.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돌아올 것 같으니.”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대만의 살아 있는 심장 소리가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쿵쾅거렸다. 바다조차 이기지 못한 그 꺼지지 않는 불꽃의 소리를 가슴 깊이 새겨들으며 태섭은 대만의 등을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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