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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평행세계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는 세계가 또 있을까?

某日 by 銘

“야, 태섭아. 너 평행세계라는 거 믿냐?”

대만이 뜬금없이 물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시선이 대만에게로 향했다. 대만은 입에 빨대를 문 채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공부를 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에 딴소리나 하고 있다 이거지. 태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무슨 헛소린데요.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나 하지. 대학 가서도 낙제할 생각?”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고3 기말고사는 괜찮았잖아!”

“예, 예. 정대만은 천재입니다. 그래서요? 갑자기 웬 평행세계 타령?”

연필을 내려놓은 태섭이 오렌지주스가 담긴 잔을 끌어당겼다. 어디 한 번 들어줄 테니 말을 해보라는 자세를 취했다. 그걸 본 대만이 물고 있던 빨대를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그냥, 교양에서 들은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무슨 교양을 들은 건데요? 철학?”

“물리학……. 수강신청 망해서 겨우 주웠는데 거의 자는 거지, 뭐. 하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난주인가, 교수님이 평행세계 얘기를 했거든.”

대만이 제 앞에 펼쳐져 있던 노트를 테이블 한가운데에 밀어놓더니 태섭의 연필을 집어 들었다. 남의 것을 가져갔다는 미안함이나 머쓱함 없이,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물건을 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태섭이 이거 봐라, 하는 얼굴로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지만 대만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거 봐봐. 대만이 연필로 노트를 툭툭 쳤다. 태섭이 시선을 내렸다. 노트 위에는 생각보다 꽤 단정한 필기들이 적혀 있었다. 대만은 그 위를 태섭의 연필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물리학적으로 평행세계라고 하는 건 양자역학에 기반한……. 양자역학이 뭐냐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수업 듣는다고 다 알면 내가 교수를 하지! 그걸 자세히 알았으면 내가 채치수지 정대만이냐? 웃지 마! 하여간 뭐 하려니까 흐름이나 끊고 말이야. 그럼 나 계속한다? 그러니까……. 그 뭐냐, 그거 알아? 고양이 상자에 넣는 실험?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 나는데, 상자 열기 전까지는 안에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거. 어어, 맞다, 그거. 어쨌든 그런 것처럼 양자역학에서는 관측을 할 때 가능성이 확정되는 거라서, 우리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모든 건 확률로만 존재한다고 해. 실제로 그때가 되어서 직접 본 순간에서야 일어날 사건이 확실하게 정해진다는 거야. 그러니까 양자역학에서는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일정 확률로 그걸 관측한다는 거지. 상자 속 고양이가 살았다, 죽었다라는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50%의 확률로 둘 중 하나를 본다는 소리니까. 어……. 쉽게 예를 들면, 아까 우리 주문할 때 너 오렌지주스 샀잖아? 그런데 원래는 그 시점에 네가 오렌지주스를 살 확률이 60%, 커피를 살 확률이 30%, 뭐 이상한 민트고구마초코라떼 같은 걸 살 확률이 1% 이랬고, 우리는 그중에서 60% 확률에 걸렸다, 그래서 네가 오렌지주스를 산 미래를 보고 있다, 뭐 이런 뜻이란 거야. 그리고 나머지 30%와 1%의 세계도 우리가 보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 존재했을 미래라는 거고. 그러니까 아까 시점에서 송태섭이 카운터에서 오렌지주스를 산 세계, 커피를 산 세계, 민트고구마초코라떼를 산 세계가 각각 평행세계라는 뜻. 좀 이해가 돼?

“…선배 생각보다 똑똑했네요. 이걸 다 설명을 할 줄 알고.”

“뭐, 이 자식아?”

“대충 이해는 했어요. 그러니까 뭐 그런 선택의 차이들 때문에 평행세계가 무수하게 나뉜다 이 소리 아니에요?”

“너도 생각보다 똑똑하네.”

“내가 선배보다 등수 더 높을 텐데. 그건 그렇고, 그래서 갑자기 이건 왜 생각한 건데요.”

태섭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하지만 대만은 평소처럼 사람이 말을 하는데 반응이 그게 뭐냐고 바락거리는 대신 태섭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ㅁ, 뭔데요. 뭔가 이상하게 그윽해지는 분위기에 태섭이 경계를 하며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태섭아. 대만이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너는 내가 농구를 안 했어도 날 사랑했을 것 같냐?”

“아뇨.”

“야!”

질문이 끝나자마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0.1초 만에 내뱉어진 대답에 대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리자 태섭이 눈으로 욕을 하며 입에 지퍼를 채우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서운함 가득한 얼굴로 씩씩대던 대만은 제 컵에 담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넌 나 농구만 보고 만나냐? 나는 너 농구 안 했어도 사랑했을 거야!”

“애초에 내가 농구 안 했으면 선배 만날 일도 없었어요. 여기로 이사 올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농구 안 하는 선배가 얼마나 볼썽사나웠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선배를 만날 일이 없으면 사랑할 일도 없는 거죠. 태섭은 현실적으로 대답했다. 일부러 뱅뱅 꼬인 심리로 심술을 부리거나 못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대만의 양자역학적 평행세계처럼 말을 해보자면 농구를 하지 않고도 송태섭이 정대만을 사랑할 확률은 극히 적었다. 복권 당첨이나 번개에 3번 연속 맞을 확률보다 더더욱. 정대만을 만나고 정대만과 어울리고 정대만과 사랑에 빠진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농구가 있었기에, 송태섭이 계속 농구를 했기에 가능했다. 제일 중요한 그 요소가 없었다면 송태섭의 인생에 정대만이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럴 터였다. 하지만 대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잔뜩 비죽일 뿐이었다. 단단히 팔짱을 낀 대만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농구를 안 했어도 우리가 만났을 수도 있잖아.”

내가 여름 휴가로 네 고향으로 여행을 갔을 수도 있고, 네가 수학여행으로 여기에 올 수도 있지. 아니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났을 수도 있고. 그리고 농구를 안 하는 대신 네가 선택한 무언가가 또 나와 연결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 나는 그렇게 믿어. 우리가, 아니면 우리 중 하나가 농구를 하지 않았더라도 우린 언젠가 분명히 또다시 만나서 사랑했을 거라고. 대만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양자역학적으로 계산된 미래의 확률을 이미 들여다본 사람 같은 말투였다. 태섭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혀를 가만히 굴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일단 제 고향과 여기는 비행기로만 2시간 반이 걸리고요……. 공항 내려서도 차를 한참 더 타고 가야 해요. 당연히 관광지에서도 멀고요. 그렇게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리고……. 글쎄요, 저는 농구 안 했으면 제가 뭘 했을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버지처럼 뱃일을 배웠겠죠. 그런 환경에서 선배처럼 도시 오브 도시인 사람과 마주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선배는 어제 먹은 참치캔에 들어갔던 참치를 누가 잡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가 농구 안 했으면 나는 선배를 사랑할 일이 없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둘 다 농구를 안 하면 더더욱 그렇고.”

하지만 태섭의 논리적인 반박에도 대만은 계속 자신만의 양자역학적인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경기 중간 작전 타임 때처럼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태섭을 설득하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의 모든 평행세계가 다 서로와 연결되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난 우리가 연결될 평행세계에 더 집중하고 싶고, 분명 그런 세계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너 아까 배 얘기했지. 우리 아빠 수산물 무역회사 하는 거 내가 말한 적 있었냐? 나 농구 안 했으면 아마 그거 물려받았을 거야. 그랬다면 너와 만날 확률도 분명히 있었을 테지. 그리고 만약 내가 농구를 하고 네가 농구를 하지 않은 경우라면 넌 분명히 내 팬이 되었을 거야. 내 플레이 볼 때마다 네가 짓는 표정이랑 시선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고. 그렇게 팬이 되었으면 내 경기를 보러 오고 싶어 했겠지. 그러면 그것도 만날 확률이 생기는 거잖아.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든 너와 만나기만 하면 그 후에는 무조건 난 널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농구를 안 해도 분명 사랑했을 거야. 너와 나는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선배 되게 감성적이네. 운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다 하고.”

“넌 생겨 먹은 게 로맨틱한 게 하나도 없고. 아니, 진짜로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사랑했을 거라고?”

“없어요. 실제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대체 왜 가정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애초에 전제가 틀렸잖아요. 선배는 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 반대도 항상 참이란 법은 없잖아요? 내가 무조건 선배를 사랑할 거라는 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에요?”

“뭐? 너 그 발언 뭐야. 그러면 다르게 만났을 땐 날 사랑 안 할 거라고? 이렇게 멋진 애인을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

“선배랑 나랑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발언은 좀 양심 없는 거 아닌가? 그런데다가 농구까지 안 한다고요? 그럼 내가 정대만을 왜 만나?”

대담은 거기에서 끝났다. 태섭의 말에 완전히 삐져서 토라진 대만이 더 말을 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짢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로 노트를 거둔 대만은 수업의 유인물을 펼치고 보란 듯이 거기에만 시선을 처박기 시작했다. 그거 내 연필인데. 돌려달라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태섭도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눈앞에는 조건부확률을 구하는 객관식 문제가 펼쳐져 있었다. 가방에서 연필을 한 자루 더 꺼낸 태섭은 종이를 한참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 문제를 푸는 대신 대만의 확률 이론을 빈 곳에 가만히 끼적였다.

송태섭이 농구를 하지 않는 사건 A와 송태섭과 정대만이 연애를 하는 사건 B가 있다.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이 10%고 사건 A와 사건 B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이 0.001%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건 A가 일어났을 때 사건 B가 일어날 확률은?

거기까지 써 내린 태섭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어 제 머릿속을 떠다니는 평행세계의 확률을 지워냈다. 이런 식으로 확률 계산을 해 봤자 결국 남는 것은 극악의 개연성일 뿐이었으므로.

태섭은 고개를 들어 대만을 흘끔 쳐다보았다. 어느새 집중을 하기 시작한 얼굴에는 언짢음은 가시고 조용한 차분함만이 떠올라 있었다. 턱을 괴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태섭은 가만히 생각했다. 당신은 또 다른 사랑의 평행세계를 생각하지 않는 내가 로맨틱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만약 당신의 말이 맞다면 그 무수한 우주 가운데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는 이 단 하나의 우주만을 믿는 것이 더 로맨틱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태섭은 이 생각을 대만에게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았으니까.

시선을 거둔 태섭은 다시 연필을 들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테이블 위에서 놀고 있는 대만의 다른 손을 가만히 잡았다. 정대만을 달랜다, 달래지 않고 내버려 둔다. 동시에 존재하는 그 두 가지 확률 사건 중 정대만을 사랑하는 저만의 우주를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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