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도시
당신의 근원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바다에서 태어난 이는 평생 바다를 갖고 살아간다.
그건 단지 어부들이 말하는 바다 사나이 같은 소리뿐만은 아니다. 어렴풋한 기억이 시작하는 시점부터 태섭에게는 바다가 함께 했다. 눈을 돌리면 바다가 있었고 발을 옮기면 바다가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고 바닷물을 맛보며 바다 냄새를 맡는 것이 당연했다. 바다와 함께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다와 함께 죽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래서 형을 잃은 후에도 태섭은 여전히 바다를 찾았고 바다에 의지했다. 바다는 송태섭의 근원이면서 송태섭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어린 태섭은 바다를 떠나자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동차로도 기차로도 한 번에 갈 수 없어 비행기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곳. 그마저도 2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거리.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엄마의 말이 너무도 낯설었다. 제 근원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싫다고 떼를 써도 이미 결정된 사항을 되돌리기에 태섭은 너무 어렸고, 세 가족은 결국 그들이 태어난 바다를 떠났다. 떠나면서 그들은 바다에서의 삶을 대부분 버렸다. 가구를 버리고 가재도구를 버리고 책과 옷과 놀이기구를 버렸다. 세 가족이 끝까지 들고 온 고향의 바다는 다섯 상자가 채 되지 않았다.
제 몫의 상자를 들고 태섭은 멀거니 새로운 집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마당과 낮은 담이 있던 정겨운 목조 주택과 달리 이곳은 내부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삭막하고 높은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월세 55만 원의 5층짜리 맨션은 기선제압을 하듯 태섭을 딱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 둘과 성인 여성 하나만 들어가도 꽉 차는 좁은 집은 숨이 막혔다. 이삿짐을 푸는 동안 환영은커녕 경계 어린 시선만이 세 식구의 등 뒤를 따라다녔다.
바다는 마을 사람 모두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태섭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조용히 물장구를 칠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인적 없는 곳에서 몰래 파도에 떠내려 보낼 수 있었다. 원망도 울음도 고함도 그리움도 넓고 깊은 물결 아래에서는 조용히 잠길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혼자 있어도 혼자 될 수 없는 곳이었다. 이웃의 소리도 바깥의 빛도 너무나 쉽게 태섭의 공간을 침범했다. 이사 온 첫날, 태섭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꾹 감은 채 이불을 뒤집어 썼다. 하지만 눈부신 소음은 태섭을 혼자 두지 않았고, 결국 그는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도시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새로운 곳에도 바다가 없지는 않았다. 태섭이 태어난 곳에 비하면 더 좁고 더 시끄럽고 더 어수선한 바다였지만 물비린내도 소금기 어린 바람도 여전했다. 그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태섭은 바다로 향했다. 어디서 잘난 척이냐며 운동장 뒤에서 주먹을 맞았을 때도, 공을 튕기다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더 이상 고향의 언어를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한 학기가 지나도록 내지 못한 입부신청서를 구겨버렸을 때도 무작정 바다를 찾아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바다에는 목이 아플 정도의 높은 벽도 없었고 냉담한 시선도 없었다. 조용한 파도 소리와 탁 트인 수평선만이 존재했다. 발에 밟히는 모래 알갱이를 느끼며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면 온전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차갑고 답답한 도시에서 상처받으면서도 그에 물들어 가는 낯선 제 모습을 발견할 때면 태섭은 어린 짐승이 어미 품을 찾듯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갔다. 적어도 바다의 앞에서는 온전한 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기에.
“혼자 하면 실력이 아깝잖아.”
코트에서 만난 도시의 소년은 태섭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말 제멋대로인 애였다. 이쪽이 초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불쑥 공간을 침범하더니 남의 공을 자기 것인 양 던져댔다. 그러더니 제 앞을 막아섰다. 반응이 없으니 도발까지 해 가면서 끌어들여 결국에는 공을 튕기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해보라며 말도 참 많았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주제에 돌아오지 못한, 바다와 한 몸이 된 형을 떠올리게 했다. 수면 아래 묻은 오랜 기억을 강제로 떠올리게 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놓친 공을 잡지 않은 태섭의 등 뒤로 소년은 아쉬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중에 또 하자! 다음번엔 날 이겨 봐!”
시끄러워.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되뇌며 코트를 떠났지만 그건 태섭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받아 본 호의였다. 폭력과 냉대만이 쏟아지는 곳에서 누군가가 처음으로 태섭과 농구를 해주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래서 태섭은 다시 한번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하고 몇 번이나 더 그 코트에 갔지만 그 소년은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섭은 그 소년 덕에 희망을 보았다. 춥고 외로운 곳에서도 누군가는 자신과 농구를 해준다. 그렇다면, 바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이곳이라면, 적어도 한 명쯤은 더 나와 농구를 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계속 농구를 하다 보면 언젠가 그 소년과 한 번 더 같이 코트에 설 때가 오지 않을까.
방학이 끝난 후 태섭은 구겨 버린 종이를 최대한 잘 펴서 내밀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다시 팀플레이로서의 농구를 시작했다.
그 소년을 다시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키도 얼굴선도 분위기도 머리 모양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지만 태섭은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심 기다렸던 사람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얼굴을 다시 되새겼던 사람이었으니까 덜 자란 시절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의 무리에게 옥상으로 끌려갈 것이라고도. 3년 만에 눈앞에서 마주한 소년은 아주 높고 견고한 벽이 되어 있었다. 눈을 한껏 들어 올려다본 얼굴엔 낯선 적의가 가득했다. 왜? 당신이 왜?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친절이었다. 생소하고 막막한 곳에서 처음으로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이곳에서의 ‘다음’을 약속받은 때였다. 그래서 조금의 희망을 품었었다. 놓을 뻔한 것을 다시 잡고, 도시에서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랬었는데, 나는 그랬는데, 그런데 나에게 희망을 준 당신은 왜 모든 걸 놓은 눈을 하고 있는 거야.
주먹을 맞고 피를 뱉어냈을 때, 태섭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겨 나갔다.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것이 손에서 툭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태섭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공허하게 비어 버린 곳에 슬픈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서 태섭은 온 힘을 실어 대만에게 달려들었다. 무엇이든 부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서지는 것이 결국 제 몸일 것을 알면서도 방파제로 돌진하는 파도처럼 가차 없이 대만을 들이받았다.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쳤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고 주먹질을 해 봤자 이유 모를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섭은 계속해서 피 흘리는 대만을 두들겼다. 그러는 제 모습이 이상해 더 화가 나 악을 썼다.
결국 쓰레기처럼 옥상에 버려진 태섭은 휴지 조각 같은 눈송이를 보며 고향의 바다를 떠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무력했다. 이정표 삼았던 것이 태섭의 몸과 함께 부서져 나갔다. 이 도시와 태섭을 겨우 묶어주던 것이 사라졌다.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자 제 존재감마저 희미해졌다. 그래서 병원을 나오자마자 태섭은 바이크의 시동을 켜고 무작정 달렸다. 스로틀을 쥐고 속도를 계속해서 높였다. 가야 할 곳도 갈 곳도 잃은 채 무채색의 도시를 그저 달렸다. 위험할 정도로 가속이 붙었지만 속도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고 달린 끝에 고향의 바다를 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평온한 풍경. 항상 품고 살아가던 그의 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태섭은 제 근원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아오는 빛 속에서 태섭은 그렇게 생각했다.
몸이 낫자마자 태섭은 모아 두었던 돈을 털어 고향으로 가는 표를 끊었다. 바다를 보고 싶었다. 아니,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바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간 고향은 고작 4년 만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살던 집도, 이웃의 아이도, 코트의 바닥도,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조차도 대부분이 바뀌어 기억의 조각을 한참 더듬어야 했다. 하지만 바다만은, 물결에 감정을 띄워 보내던 절벽의 동굴만큼은 유일하게 변치 않고 남아 있었다. 습기 찬 돌바닥도 이끼의 냄새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리운 물건들도 시간이 멈춘 것 마냥 삭지도 바래지도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변한 건 바다를 떠나 메말라 가던 훌쩍 자란 태섭이었다.
태섭은 그렇게 그리워했던 바다 앞에서 형의 물건을 쥐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절망도 외로움도 설움도 죄책감도 울음과 함께 모두 토해냈다. 도시의 찌꺼기를 전부 비워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안을 바다로 가득 채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짠 내 섞인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공허하고 버석했던 가슴에 찰랑이는 물결이 가득 찼다. 그 물이 마르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형과 함께 꾸었던 꿈이 보였다. 그래서 태섭은 비가 그친 후 석양이 비치는 고향의 바다 앞에서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그러고 싶었고, 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본능이 이끄는 감각이었다. 경쾌하게 튀어 오른 공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대만은 결국 약속을 지켰다. ‘나중에 또 하자’라던, 아마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할 오랜 약속을. 2년의 공백으로 체력 부족에 시달리는 대만은 몇십 분 넘게 이어진 대결에 결국 항복 표시와 함께 코트에 드러누웠다. 일반적인 경기였다면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에 기대 체력을 조금이나마 더 배분할 수도 있었겠지만 1:1은 그렇지 못하다. 밀착해 수비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하는 승부. 이렇게나 버틴 것도 용했다. 태섭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시체처럼 늘어진 대만을 흘끔 쳐다보았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수건을 얼굴에 잘 덮어주었다. 너 지금 나 장사 지내냐.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살아있는 입이 불만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요. 선배 눈부실까 봐 그러죠. 태섭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조금 전의 대결을 복기해 점수를 계산했다. 태섭이 넉 점을 더 냈다. 진짜 다음번에는 이겼네. 혼자만의 기억이 유쾌해 소리 죽여 웃고 있자니 대만이 후들거리는 팔로 수건을 반쯤 걷고 태섭을 쳐다보았다. 불만스러운 눈을 보니 녹초가 되어 늘어진 모습을 보고 웃은 걸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굳이 정정해주고 싶진 않아 태섭은 눈썹만 까딱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여전히 네 그 짝짝이 눈썹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요? 어쩌나. 선배가 머리 잘라서 난 이제 선배 싫어할 구석이 없는데.”
“까분다.”
걸려온 시비를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대만이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다시 수건을 덮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대만이 복귀해 모든 부원들에게 깍듯이 허리 숙여 사과한 순간부터 태섭은 그를 용서했다. 대만이 다시 농구를 하기로 마음먹고 돌아온 이상 태섭은 그에게 더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농구가 곧 삶이기도 했던 사람으로서 태섭은 대만이 무너진 이유를, 그러고도 농구를 놓지 못해 자기파괴적으로 굴던 심정을 이해했다. 농구를 하기 위해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다시 돌아온다는 게 얼마나 큰 결심과 각오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았다. 잘 아는 만큼 제 것처럼 진지하게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만은 태섭에게서 농구를 앗아가려 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 농구를 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도시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그 덕에 다시 농구를 시작할 수 있었고 태섭의 삶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베풀어 준 그 잠깐의 호의만으로도 태섭은 대만을 충분히 용서할 수 있었다.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선배한테 별로 앙금 남은 것도 없고. 그래도 굳이 속죄하고 싶다면 그냥 계속 여기서 농구나 해줘요. 그거면 돼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건 대만이 약속한 ‘다음’을 돌려주는 일이자 태섭이 이 도시에게 청하는 화해이기도 했다. 태섭이 이렇게 쉽게 감정을 털어버릴 줄은 몰랐는지 대만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뭐해요, 어서요. 몇 번 더 재촉을 하자 대만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2년의 공백에도 다 사라지지 않은 굳은살의 감촉을 느끼며 태섭은 시원스레 웃었다. 이제부터 우리 사이 괜찮은 겁니다? 그럼 연습하러 가요, 선배. 시간 나면 나랑 같이 원온원도 하고. 선배를 눌러줄 때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지역구 중학 MVP 정대만은 농구 잡지에서 먼저 보았다. 진열된 잡지를 보자마자 태섭은 표지의 주인공이 코트에서 만난 소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달의 잡지는 오로지 소년을 보기 위해 샀었다. 텍스트로 묘사된 경이로운 플레이도 몇 번이고 읽었다. 시합 종료 직전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득점한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아무리 잘 써 내렸더라도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이었다는 걸 같이 뛰면서 깊게 깨달았다.
실제로 본 대만의 농구는 더 대단했다. 천부적인 바스켓 센스, 모든 포지션을 높은 퀄리티로 소화할 수 있는 재능,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과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깨끗하고 완벽한 3점 슛. 대만의 3점을 볼 때마다 태섭은 그날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나도 너희가 필요 없다며 겹겹이 세웠던 벽을 잠시나마 허물어 버릴 만큼, 멋대로 농구공을 만졌어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을 만큼 아름다웠던 포물선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태섭은 대만이 공을 잡고 뛰어오르면 동경, 경의, 희열, 모든 감정이 뒤섞인 가슴으로 남몰래 전율하곤 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 오해해.”
대만이 이런 말을 해 오는 건 전혀 계산에 없는 일이었지만.
“예?”
“나 3점 던질 때마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눈으로 보는 거 그만하라고.”
오해하니까. 떨어진 농구공을 주우러 가며 대만이 대답했다. 할 말을 잃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섭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 누가 누굴 사랑에 빠진 눈으로 봤다는 거예요. 선배 자의식이 과하네. 애초에 전 한나 좋아하거든요. 발끈해서 반박했지만 대만은 타격조차 받지 않은 얼굴로 눈썹만 슥 밀어 올릴 뿐이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닌데. 그런 눈 맞는 거 같은데. 대만의 뻔뻔한 말에 태섭이 눈썹을 비딱하게 올렸다. 송태섭 특유의 존나 못마땅하다는 표정.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 대만이 킬킬 웃었다. 아, 정말 저 인간 저럴 땐 마음에 안 들어.
악수 한 번으로 화해한 후 대만은 유달리 태섭에게 더 친근하게 굴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몇몇 후배들에겐 벌써부터 ‘형’으로 불릴 정도로 빠르게 농구부와 융화된 대만이었지만, 그가 실없는 소리를 먼저 해대면서 잔뜩 치대는 상대는 송태섭이 유일했다. 싫지는 않았다. 어쨌든 대만의 호쾌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고, 코트에서도 일상에서도 죽이 잘 맞았으니까. 하지만 정대만의 자기중심적인 면은 가끔 참아주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지금 이런 상황.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해 놓고 그걸 당당하게 나한테 들이미는 점. 장난이라고 쳐도 이쪽은 재미없다고. 물론 어느 정도는……. 그것도 정대만의 인간적인 매력이기야 하지만, 태섭은 그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하여간 도시 인간이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아요.
태섭이 서 있던 정면 라인이 아니라 외곽으로 빠진 대만이 퉁퉁 공을 두어 번 튕기곤 한 번 더 3점을 던졌다. 이번에도 골인이었다. 곧바로 그물을 통과하는 완벽한 스위시 샷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신경질을 내던 것도 잊고 태섭은 그 궤적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봐, 지금 또 그러잖아.”
이번 건 어느 정도는 부정할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닫고 대만을 째려보기만 했다. 대만이 잘생긴 얼굴 한가득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태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3점 던지는 내가 그렇게 멋있냐. 나지막한 중저음에 즐거움이 가득 묻어났다. 안 멋있어요. 애초에 3점이 특기면 당연히 잘 던져야죠. 내가 드리블에 주력하는 거랑 똑같지, 뭐. 태섭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멋있다고 해줘.”
“제가 왜 선배한테 멋있단 소리를 해줘야 하는데요.”
“네가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거든.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잘하고 싶어지고.”
“와……, 그거 되게 작업 거는 말투. 선배야말로 사람 오해하게 만들기 딱 좋네요.”
“난 작업 거는 거 맞는데.”
…예? 대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태섭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대만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번 더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공은 정확히 그물을 통과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 황당한 와중에도 태섭은 또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야간 조업을 나간 고깃배의 화려한 불빛에 물고기들이 몰려드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대만의 3점은 그 정도로 항상 사람을 현혹시키는 데가 있었다. 퉁, 코트 위로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좇던 태섭의 멍한 눈앞에 대만이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 태섭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만이 손끝으로 태섭의 드러난 이마를 툭 쳤다.
“이래서 그런 눈 하지 말라는 거야. 송태섭도 나 좋아하나 보다, 하고 작업 걸게 되니까.”
“하하, 하하하. 선배 농담이 심하다.”
“농담?”
“…그런데 잠시만요. 선배 혹시… 방금 ‘송태섭도’라고 했어요?”
아무리 수업 시간에 자주 존다지만 모국어 보조사의 활용법을 모르진 않았다. ‘도’는 이미 있는 것에 무언가를 플러스시킬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정대만은 제 문장에 송태섭의 감정을 더하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송태섭의 감정을 더하기 전부터 이미 기저에 깔려 있던 것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신이 아찔했다. 설마. 아니죠? 그렇다고 해요. 빨리. 선배. 재차 따지는 태섭을 내려다보는 대만의 눈은 뜻밖에도 진중했다. 태섭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해한다는 정대만의 말은 본인 나름의 친절이 담긴 마지막 경고였다는 것을. 그건 네가 눈치채고 갈무리한다면 계속 장난인 척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 집요함을 끝까지 발휘해 보겠다는 신호였다. 태섭은 그게 꼭 제대로 사전 공지도 해주지 않은 채 울리는 소방 훈련 사이렌 같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대응을 하라는 거냐고. 평소에 마음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야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이쪽은 애초에 불이 날 거라는 생각조차 않고 있었는데. 하여간 그놈의 3점 슛이 문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놈의 3점 슛이 송태섭을 정대만과 엮어버린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만은 진지하게 승부에 임할 때 보이던 바로 그 얼굴로, 기회를 날려버린 태섭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어. 송태섭‘도’라고 한 거 맞아. 나는 너 좋아하거든.”
아……. 젠장. 정신을 소매치기당한 것 같아. 태섭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부터였냐는 질문에 대만은 턱을 긁적이다가 자각한 지는 얼마 안 됐다고 대답했다. 대체 어쩌다가…….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탄식하던 태섭은 무슨 말을 들을지가 두려워져 그 얘기까진 하지 말자고 먼저 선수를 쳤다. 절절하게 이어질 고백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머리가 복잡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젖히자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보였다. 꼭 이렇게 사람 싱숭생숭할 때만 하늘은 더럽게 예쁘더라. 태섭은 한숨을 쉬며 눈을 반쯤 뜬 채 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긴장인지 스트레스인지 모를 것 때문에 계속해서 목이 탔다. 아……. 바다 보고 싶다. 태섭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 선배 잘못이에요.”
“뭐가?”
“인터하이 앞두고 팀워크를 더 끌어올려도 모자랄 마당에 사람 껄끄럽게 만들었잖아요.”
내가 고백 하나 했다고? 대만이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지금 어이없어할 게 누구 쪽인데. 태섭은 기가 막혔다. 네, 선배가 고백 하나 했다고. 그래서 잔뜩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답하니, 푸핫, 갑자기 대만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옆에 앉은 커다란 것을 올려다보았다. 정대만이 흐뭇한 얼굴로 만면에 그윽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그 만족스러운 표정에 태섭은 절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거 좀 위험할 것 같은 얼굴이지? 의식 저 안쪽에서 빨간불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아……. 의외네, 진짜. 기분 좋게 중얼거린 대만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냥 ‘그래요? 잘 좋아해 보세요.’ 하고 툭 넘길 줄 알았는데.”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사이좋게 강냉이 털었던 같은 성별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는데 누가 그걸 그렇게 대수롭잖게 넘겨요. 당연히 껄끄럽지. 게다가 이쪽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는데.”
“하지만 그때는 쉽게 악수했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버리길래 내가 너한테 크게 의미 있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싶었거든. 나한테 쓸 감정조차 아깝다는 느낌?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듣고 넘길 줄 알았지. 그런데 너도 날 의식하긴 하는구나. 그동안 농구 계속 같이 해서 그런가? 내 중요도가 그때보단 많이 올라가긴 했나 보다. 대만이 즐거운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태섭은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대만이 송태섭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중요하기 때문에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거였다. 쓸 감정조차 아까웠던 게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한 것 자체가 태섭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대만에게 지금 알려주는 게 과연 적절할까? 대만이 왜 태섭에게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려면 중학생 때의 만남이 나와야 했고, 도시에 처음 이사 와 태섭이 겪었던 일들까지 나와야 했다. 그러나 태섭은 굳이 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정대만에게 해야 한다면 더더욱. 대만에게 동정 받고 싶지도 않았고 감정을 전가해 부채감을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태섭은 끝내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충분히 잔잔할 수 있는 수면에 굳이 돌을 던지는 짓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태섭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진 몰라도 대만은 여전히 즐거운 표정으로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나 계속 너 좋아해도 되냐?”
“안 된다고 하면 안 좋아할 거예요?”
“아니.”
“그럴 거면서 뭘 허락을 굳이 받으려고……. 어차피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요.”
정대만은 한 번도 이곳을 떠나본 적 없는 뿌리 깊은 토박이였다. 대만의 집이 이 지역을 거점으로 대대로 사업을 해 왔다는 것을 준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도 부모님이 대만이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는 애들 좀 될걸. 안 선생님 아니었으면 대만이는 해남으로 갔을지도 몰라. 준호는 그렇게 말했었다.
태섭이 바다이듯 대만은 도시였다. 그래서 정대만과 친하고 정대만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더라도 정대만이라는 사람 자체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태섭은 절대로 단번에 Yes를 던질 수는 없었다. 제 잘난 점을 겸손 떨지 않고 당당히 내보이는 태연함도, 흥분하면 금방 시끄러워지는 목소리도, 어떤 때는 지겹게도 다 아는 척 참견을 해 오다가 다른 부분에선 놀라우리만치 무신경해지는 것도, 제게 향한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면도, 선을 넘어 확장되는 영향력도, 심지어는 저 바닷길 끝 전망대만큼이나 우뚝 큰 키까지도, 대만은 태섭이 싫어하는 도시의 일면과 정말이지 닮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태섭은 지난 4년간의 경험으로 절대로 도시가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았다. 게다가 정대만은 자칭 ‘포기를 모르는 남자’가 아니던가. 아, 징글징글하다.
마음대로 해요, 농구에 지장만 주지 말고. 반쯤 포기한 채로 태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대만은 생각보다 더 성가신 타입이었다. 별수 없이 허락을 했더니 벌써부터 남자친구라도 된 것처럼 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체육관에서는 본인도 파김치가 된 주제에 송태섭의 물병과 수건 담당을 도맡더니 연습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꼭 하교를 같이 했다. 태섭의 컨디션을 예민하게 살피는 날카로운 눈은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였다. 좀 적당히 하라고 했더니 이거 농구에 지장 가? 오히려 너 농구만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부수적인 건 다 내가 신경 쓰는 거였는데. 하는 소리나 돌아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대만의 표정에 태섭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기껏해야 아련하게 쳐다보고 짝사랑하기 정도로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행동을 할 줄 알았겠냐고! 허락을 해준 게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태섭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중지로 꾹꾹 눌렀다.
“허락 취소할래요. 저 좋아하지 마세요.”
“뭐?! 그렇게 줬다 뺏는 게 어딨냐?”
“그러는 선배야말로 좋아하더라도 선 좀 지켜요. 사귀는 사람처럼 굴지 말고. 나는 선배 그런 식으로 안 보는 거 알잖아요.”
“마음대로 하라며! 이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인데 어떡하라고!”
대만이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허락을 취소하겠다는 말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건 태섭도 잘 알았다. 사람의 마음은 전등처럼 스위치를 내린다고 해서 꺼지는 게 아니니까.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땔감을 다 태우지 않고서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정대만은 자기 자신을 땔감 삼아 제 불꽃을 더 태우는 미친놈이었다. 그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디펜스 상황보다도 요즘 겪는 대만과의 감정 대립이 훨씬 더 어려웠다. 정대만은 뛰어난 올라운더다. 하나를 틀어막았다고 생각하면 다른 구역에서 다른 수로 능히 득점을 한다. 시간을 끌어 기력을 잔뜩 빼놓아도 림을 노리는 집념은 끝끝내 식지 않는다. 적어도 바이얼레이션 규칙이라도 뒀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공정한 싸움이 될 거였는데. 제 패착을 뼈저리게 느끼며 태섭은 그냥 등을 돌렸다. 지금 대만의 얼굴을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대로 발을 옮기자 대만이 후다닥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송태섭! 대화 안 끝났잖아, 말하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는데?!”
“바다 보러요.”
“바다? 갑자기? 지금 저녁인데? 아니지, 그것보다 진짜로 취소할 거야? 응? 태섭아.”
“제가 좋아하지 말라고 해서 안 좋아할 거 아니라면서요.”
“안 좋아할 게 아닌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말 한 마디로 확확 바뀌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요. 접힐 마음도 아니고 순순히 접을 생각도 없잖아요. 내가 취소한다 해도 똑같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선배 정말 더럽게 감정 못 숨기니까. 페이크는 코트에서만 잘 치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걷기만 했다. 태섭이 조금 앞서가고 대만은 그 뒤를 따르는 형태로. 태섭은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는 이전에도 대만과 같이 왔었다. 굳이 공립인 북산을 선택해서 온 만큼 대만도 학교와 집의 거리가 있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물론 사는 동네가 다르니 방향도 서로 달라서, 타고 갈 버스가 먼저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 헤어지곤 했다. 조금 기다리자 태섭이 탈 버스가 왔다. 거기에서 헤어질 줄 알았는데 대만은 태섭의 뒤를 따라 탔다. 일행이 있음에도 굳이 1인석을 선택한 태섭의 바로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태섭은 창밖을, 대만은 그런 태섭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채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태섭의 집으로 가는 길을 함께 했다.
30분이 지나 버스가 드디어 그들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또 한동안 걸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바다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공기 중을 떠도는 비린내가 강해지는 게 맡아졌다. 어느새 바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태섭이 대만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요. 선배가 올 곳 아니니까.”
그리고 태섭은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그건 태섭의 경고였다. 도시는 당신의 영역이니 그 안에서는 선을 넘으려 들어도 어느 정도 봐주겠지만, 여기부터는 내 영역이고 나는 절대 당신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다는 선언. 대만과 태섭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태섭이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대만의 모습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우뚝 선 머리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태섭의 눈앞에 너른 밤바다가 나타났다. 철썩, 쏴아. 정겨운 파도 소리가 돌아온 태섭을 반겼다. 다녀왔니. 어서 와. 그리운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 앞에서 태섭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파도가 밀려와 태섭의 신발 밑을 적셨다. 굳어 있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 태섭을 괴롭히던 정대만의 생각은 금세 물결에 쓸려나갔다.
역시나 대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송태섭을 챙기려 드는 게 여전했다는 뜻이다. 지난번보다는 본인도 정도를 조절하려고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감정의 근본은 같으니 대충 거기서 거기였다. 이쯤 되니 태섭도 그냥 포기했다. 누가 봐도 이상할 모양새라고 생각해서 더 취소를 하니마니 했던 것도 있었는데, 쌓아 놓은 업보가 있어서인지 정대만이 유달리 송태섭을 챙기고 무르게 굴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한나도 대만 선배가 철이 들었다며 웃었다. 한나 너마저……? 태섭은 암살 직전의 카이사르처럼 괴로워했다.
고교 농구계에 길이길이 회자될 에피소드를 남긴 인터하이가 끝나고 치수와 준호가 은퇴하며 주장직은 태섭에게 넘어갔다. 대만은 남았지만, 자신은 주장 재목이 아닐뿐더러 해 봤자 반년도 못 할 텐데 감투를 써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며 거절했다. 힘든 건 후배가 해야지. 그러면서 낄낄대는 꼬락서니에 태섭은 똘똘 뭉친 수건을 가증스러운 면상 한가운데에 그대로 던졌다. 그리고 대만은 아주 여유롭게 제게 넘어온 패스를 잡아냈다.
주장이 되며 태섭은 스트레스를 꽤나 많이 받았다. 벤치 멤버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포메이션을 정하고 전략을 짬과 동시에 제 연습까지 챙겨야 하니 몸이 두세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주장의 위치를 학교에 인정받으려면 손 놓았던 성적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야 했다. 당연히 대만은 무리하는 태섭을 걱정했고, 말리려 들었다. 대만과의 충돌은 거의 그 지점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농구에 대한 의견 충돌은 둘 다 오케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사적인 부분에서 부딪히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농구를 향한 사랑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근원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었다. 그 때문에 언젠가는 언성이 너무 높아져 폭발한 한나에게 쫓겨나기까지 했다. 화해하기 전까지 체육관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매니저의 권한으로 한나는 두 사람 앞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다시 체육관에 들어가기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태섭은 부쩍 바다를 찾는 날이 많아졌다. 바다 사람들은 힘이 들 때면 바다를 찾는다. 그건 습관이라기보단 영혼에 각인된 삶의 방식에 가까웠다. 그들에게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위로이자 안식이며 재충전이었고, 5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바다의 삶이 더 익숙한 태섭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 안에서 찰랑이는 물결이 완전히 메마르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채워줘야만 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 태섭은 집이 아닌 바다로 향했다. 벤치 멤버도, 포메이션도, 연습 메뉴도 전부 파도에 쓸려 내려가도록 놓아둔 채 멀거니 검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모래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농구공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태섭의 일과였다.
“너 바다 냄새 난다.”
어느 날 라커룸에서 대만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태섭은 의아한 얼굴로 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태섭의 코에는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조금 전 샤워하느라 쓴 바디워시 향밖에 안 났다. 누구 다른 사람한테 더 물어보고 싶어도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대만과 태섭 둘밖에 없었다. 냄새난다고 하니까 좀 신경 쓰이는데……. 집 가서 송아라한테 물어봐야 하나. 짜증 엄청 낼 텐데. 태섭은 뺨을 긁적이며 옆을 돌아다 보았다. 대만은 땀에 절은 운동복을 세탁용 파우치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안 나는데요.”
“아냐, 냄새나.”
“저 요즘 해산물 안 먹었어요. 미역도 안 먹었고. 그런 거 날 리가 없는데.”
탕. 라커 문을 닫은 대만이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바다 냄새 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는 대만의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가방을 옆에 대충 팽개쳐 놓더니 대만이 팔짱을 단단히 꼈다. 여름이 끝난 후 대만은 근육량이 더 늘었다. 일부러 늘렸다기보다는 한창 운동하던 시절의 근육량을 자연스럽게 회복한 것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예전보다 더 두툼해진 사람이 위압적인 기세로 서 있으니 거의 100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말이다, 룰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아. 태섭은 대만이 바다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눈치챘다. 그날 정대만은 도망치고 싶어 하는 송태섭이 바다로 떠나는 걸 봤다.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증거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에 한해서는 기민하게 돌아가는 정대만의 머리가 송태섭에게 바다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도망치고 싶은 일이 산더미일 주장 송태섭이 매일 같이 바다로 간다는 결론이야 안 봐도 뻔할 거고. 그래서 대만은 바다 냄새가 몸에 뱄다며 화를 내고 있는 거였다. 매일 바다에 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도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는 송태섭의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니까 활용해. 안 그러면 너랑 나는 겨울 끝날 때까지 싸울 거다. 난 네가 모든 수단을 다 쓰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선전포고까지. 할 말을 마친 대만은 내일 보자며 먼저 라커룸을 나갔다. 그리고 태섭은 대만이 집에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한참 뒤, 작게 코를 훌쩍인 태섭이 그새 조금 마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바닷물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제가 서 있던 자리가 흥건했다. 그 바닥을 묵묵히 문질러 닦은 후 태섭도 불을 끄고 체육관을 나섰다. 주장을 맡은 후 태섭이 바다에 가지 않은 첫날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주장 역할에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부원들을 다루는 수완도 늘었고 한정된 시간을 분배해 가장 효율적인 연습 메뉴를 짜는 법도 익혔다. 그리고 혼자 다 하기 어려운 부분은 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기 시작했다. 백호의 케어는 소연에게 부탁했고 부원들의 기본적인 코칭은 한나에게, 세세한 코칭은 대만에게 넘겼다. 가끔은 치수와 준호가 놀러 왔다. 그럴 때면 외부 인력도 쏠쏠하게 써먹었다. 쓸 수 있는 건 뭐든 다 써야 했으니까 거리낌 없이 선배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안 선생님께도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며 전통식 저택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같이 가자고 조르는 정대만이 제 뒤에 키링처럼 달랑달랑 달려왔다. 그냥 안 선생님한테 고백을 하시지. 빈정거림이 목 끝까지 차오르곤 했지만 태섭은 선배 공경을 할 줄 아는 바른 학생이었으니 그런 말은 그냥 조용히 다시 삼키고 대만과 함께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리 익숙해지더라도 완벽히 괜찮아질 수는 없으니 바다를 찾는 걸 멈추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빈도는 줄었다. 매일 같이 가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아예 가지 않은 주도 있었다. 그럴 때면 태섭은 바다에 가는 대신 거실에서 빌린 농구 경기 테이프를 보며 노트에 글씨를 끼적였다. 경기를 보며 느낀 감상과 눈에 띄는 플레이, 기억해 둘 전략 포인트들을 적어둔 그 노트에는 두 사람분의 글씨가 섞여 있었다. 태섭의 단정한 글씨와 달리 다른 쪽은 조금 엉망진창으로 휘갈겨져 있었다. 어느 때는 눈을 찌푸리고 이게 ㅁ인지 ㅇ인지 분간을 해내야 했다. 매번 노트를 받아 펼칠 때마다 태섭은 참 쓴 사람 성격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그 글들을 읽는 시간이 싫진 않았다. 그리고 가끔은 노트를 공유하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농구부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이유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다 잘 될 것 같았다. 태어나서 그런 류의 안정감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산은 겨울을 맞았다.
인터하이 본선도 한 번 치러 보긴 했지만 4번을 달고 출전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라 태섭은 그날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다. 오는 동안 간식을 주워 먹어서 입맛이 없다고 적당히 둘러대긴 했다. 주장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봤자 좋을 일은 없으니까. 다행히 의심은 사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있는 게 바보들뿐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태섭은 조금 일찍 식사 자리를 떴다. 올라가는 도중 공용 층의 화장실에서 한참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거의 없으니 올라오는 것도 없었지만 계속해서 배는 당기고 속은 울렁거렸다. 겨우 화장실 칸을 나와 거울을 보니 몰골이 엉망이었다. 침 범벅에 콧물 범벅이고 눈은 젖어서 새빨갰다. 태섭은 한숨을 내쉬고 흐르는 물에 나약함의 흔적을 씻어 보냈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평소와 같은 표정을 연습했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마음에 드는 표정을 뽑아내고 나서야 태섭은 방으로 올라갔다.
“테이블은 아까 일어나 놓고 뭐 하다가 이제 와?”
같은 방을 배정받은 대만이 가방을 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산책 좀 했어요. 태섭은 별것 아니라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제 가방을 열었다. 전날 저녁 엄마와 함께 곱게 싼 짐이 눈앞에 드러났다. 맨 아래에 깔린 세면도구와 잠옷을 꺼내고 있는데 갑자기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왕 산책 한 김에 한 번 더 해라.”
“예?”
“따라와.”
그러더니 점퍼를 꺼내 입고 태섭을 일으켜 세워 다짜고짜 신발을 신겼다. 어라, 만군이랑 섭찡 어디 가? 복도에서 만난 백호가 물었다. 산책 간다. 대만이 짧게 대답하고 태섭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산책을 하자길래 고작해야 호텔 근처나 조금 돌아다니고 말겠지 싶었는데 대만은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타. 뭔데요? 어디 가는 건데요? 기사님, ○○해변이요. 예? 어딜 간다고요? 지금 뭔 소리예요, 선배? 황당해하는 태섭의 항의 섞인 물음에도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만 쳐다보는 옆얼굴에 혼자만의 고집이 뚝뚝 묻어났다. 여전히 기막혀하는 얼굴로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던 태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냥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정대만이 한 번 마음 먹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또 뭣 때문에 저런담. 창밖으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도시를 가득 메운 일루미네이션이 눈앞을 휙휙 지나갔다. 어지러워. 태섭은 눈을 감았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리려고 했다.
택시는 한참을 달려 적당한 곳에 둘을 내려주었다. 기사에게 받은 거스름돈을 정리하는 대만을 보며 태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이거 무단이탈인 거 알죠.”
“알아.”
“그런데 뭔데요, 갑자기. 우리 모레부터 경기에요. 컨디션 조절하고 상대 팀 분석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게 무슨,”
“바다 보여주려고.”
지갑을 닫은 대만이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너 기분 안 좋으면 바다 보러 가잖아. 그래서 데려왔어. 태섭은 멍하니 입을 뻐끔거렸다. 대만이 태섭에게 손짓했다. 이쪽이야. 따라와. 집 앞 편의점이라도 온 것 같은 대만의 여상한 말투에 태섭은 한숨만 한 번 더 쉬었다. 지갑이 없으니 혼자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털레털레 대만의 뒤를 따라갔다. 발을 옮기면 옮길수록 익숙한 냄새가 강해졌다. 바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짜증이 가득했는데, 그 냄새를 맡자 순식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태섭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만이 데려온 곳은 국내라고 보기엔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을 한 해변이었다. 흐린 화질로 사진을 찍어놓으면 하와이나 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야자수들. 그래서인지 꽤 늦은 저녁인데도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말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하지만 풍경은 달라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태섭이 익히 아는 바다가 맞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소금기를 띤 물비린내도, 아프게 불어오는 겨울의 바닷바람도 모두 태섭의 바다였다. 태섭의 눈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해서 바다를 제 안에 가득 채우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안의 물결이 다시 찰랑이는 걸 느끼며 태섭은 물가로 다가갔다. 신발을 적실 수는 없으니 적당한 거리에서 젖은 모래만 손에 쥐었다. 손바닥 한가득 차갑고 까끌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그건 어느 정도는 농구공의 감촉과도 닮아 있었다.
“선배도 이리 와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대만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닷물에 모래 묻은 손을 씻고 태섭이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끌고 왔으면서 왜 바다는 안 보고 나만 보고 있어요.”
“내가 봐서 뭐 하냐. 너 보라고 데려온 건데.”
“이왕 온 김에 보면 어때서요. 좋잖아요, 바다.”
“걱정 마. 나도 나름 보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도시의 소년은 바다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하며 태섭은 대만의 시선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것은 대만의 별명처럼 불에 가까운 뜨거움이라기보다는, 강한 조명을 오래 받았을 때와 같은 뜨거움이었다. 조명이 거의 없어 어두운 장소인데도 스포트라이트가 밝게 비춰진 것 같았다. 그건 깊은 골목조차 쉽게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참견 많은 도시의 빛이었다. 그 어떤 것도 정대만의 시선 안에서는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태섭은 힘없이 웃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정대만이 상관하려 드는 게 그렇게 짜증이 났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안심이 된다는 것이. 변한 기색을 먼저 눈치채고 태섭이 가장 위안을 얻는 장소로 데려와 준 걸 고맙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태섭은 바닷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리고 대만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봄에 악수했을 때보다 대만의 손은 훨씬 단단해지고 거칠어져 있었다. 그 위를 가만히 엄지로 문지르던 태섭은 이 필사적인 노력의 흔적들이 퍽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태섭은 농구를 하는 대만이 좋았다. 언제 어디로 패스를 던져도 의도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공을 받아주는 대만이 좋았고, 완벽한 3점을 던지는 대만이 좋았다. 땀방울을 흘리며 행복하게 코트를 누비는 대만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바다의 소년은 도시의 소년과 계속 농구를 함께 하길 원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어울리면서 어느새 그 ‘좋다’는 감정은 조금씩 다른 쪽으로 변해, 어쩌면 농구 말고 다른 것도 함께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섭은 대만의 손을 가까이 당겨와 굳은살 위에 입술을 눌렀다. 대만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대만 때문에 바다를 찾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더 이상 정대만은 송태섭이 흘려보낼 무언가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쓸려나가는 모래보다 더 묵직해진 대만의 존재감이 심장 안쪽에서 느껴졌다. 쿵쾅쿵쾅, 존재감이 너무 시끄러워서 이제는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만이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뻗었다. 뜨거운 손이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얼굴을 감쌌다. 얼굴이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도 태섭은 대만을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본능이 이끄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태섭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든 말든 그냥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도시의 불빛이 곧 어두운 바다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태섭의 첫 키스는 도시의 소음과 바다의 냄새가 함께했다.
1년 뒤, 태섭은 미국으로 떠났다. 경제적인 이유와 가족들 걱정에 망설이던 태섭의 등을 누구보다 강하게 떠밀어 준 것은 바로 대만이었다. 기회는 왔을 때 바로바로 잡아야 해. 그래야 득점을 하지. 정말 그다운 발언이었다. 가. 다녀와. 더 멋진 선수가 되어서 돌아와. 그리고 따뜻한 얼굴로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태섭은 입술을 깨물었고, 대만의 품에서 아주 조금 울었다.
“그런데 거기 사막이라며. 괜찮겠냐.”
너 힘들 때 바다 봐야 하는데 볼 게 없어서 어떡하지. 대만이 걱정하는 게 다른 것도 아니고 송태섭 바다 못 봐서 죽어가는 부분이라는 게 너무 웃겨서 많이 울 수도 없었다. 사진이라도 봐야지 어쩌겠어요. 없는 걸 만들어내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대만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뭔가를 고민하더니 곧 결연한 얼굴로 태섭의 두 손을 붙잡았다. 누가 보면 프로포즈라도 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럼 출국 전까지 실컷 보자. 나 얼마 전에 아빠가 차 사주신 거 알지. 운전 연습도 할 겸 같이 가자.”
그래서 한 며칠 동안 바다 투어를 했다. 태섭의 집에서 출발해 해안 도로를 따라 갈 수 있는 곳까지 쭉 달렸다. 식사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했고 휴식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했다. 잠도 웬만하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잤다. 그리고 섹스도, 적당히 바다가 보이는 인적 없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했다. 태섭은 창문을 열고 싶어 했지만 대만은 아직은 바람이 춥다며 말렸다. 그 대신 어깨 너머로 마음껏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제 위에 태섭을 앉혀놓았다. 깊게 들어오는 게 힘들기도 하고 체력도 많이 필요해서 태섭이 선호하는 자세는 아니었지만 그게 정대만 나름의 배려라는 게 웃기고 귀여워서 그냥 말없이 따라주었다. 하는 도중엔 정작 바다보다 정대만 얼굴을 더 많이 봤는데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기분이 좋았던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출발하기 전에, 태섭은 시동을 걸려던 대만을 붙잡고 몇 번이나 키스해 주었다. 덕분에 입술은 잔뜩 부었지만 웃음은 자꾸만 터졌다.
그렇게 며칠 간의 로드트립을 마치고 돌아오니 떠날 날이 가까워져 있었다. 국내에서의 마지막 날들은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비자가 거의 출발 직전에 나오는 바람에 몇 번이고 대사관을 들락거리며 노심초사하느라 대만에게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항상 오빠를 응원하는 똘똘한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대만은 태섭의 출국 시간도 몰랐을 터였다. 물론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은 어떻게든 태섭의 가족과 연락을 해서 알아내기야 했겠지만, 둘이 사귀고 있다는 건 지금은 아라 밖에 모르니까. 그래서 아라가 눈치좋게 엄마를 데리고 빠졌을 때 태섭은 소매 아래로 슬그머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아라가 눈을 찡긋했다.
“이거 가져가.”
대만이 황색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둘둘 말려 테이프로 꽁꽁 싸매진 것이 누가 봐도 수상했다. 뭔데요, 이게? 폭탄 같은 건 아니죠? 나 잡혀가서 미국 못 들어가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 또 까분다. 태섭이 농담을 하자 대만이 그의 코끝을 툭 쳤다. 미국 가서 뜯어봐. 어차피 기내에 칼 반입 안 되니까 오픈 못할 거잖아. 지금 뜯으면 안 돼요? 손톱으로 잘 하면 뜯길 거 같은데. 안 돼, 비밀이야. 대만의 단호한 대답에 태섭은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며 수상한 서류 봉투를 짐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갈게요.”
“가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야 하는 두 연인의 마지막 인사는 꽤 멋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인사 안에 담긴 걱정과 애정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해서, 태섭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뜨고 더 이상 지상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도 태섭은 저 아래 어딘가에서 제 뒷모습을 좇고 있을 대만을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가 조금 보고 싶었다.
아직 장학회에서 숙소가 나오지 않아 이틀 정도는 호텔에 묵어야 한다고 안내를 받았다. 태섭은 별로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별이 여럿 달릴 정도의 좋은 호텔까진 아니지만 침구도 깨끗하고 싱글룸인 것치고는 방도 아주 좁진 않아서 이틀 정도라면 있을 만했다. 태섭을 안내하러 나온 직원은 하루 쉬고 모레 아침 8시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시차 적응에 필요하면 먹으라며 약통도 하나 건네주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잔 탓에 태섭의 정신은 너무도 멀쩡했다. 이걸 지금 먹을지 일단 내일까지 잠을 참아볼지 고민하던 태섭은 그냥 얌전히 약통을 가방에 넣었다.
“…아.”
그때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걸렸다. 대만이 준 서류 봉투였다. 잠도 안 오는 김에 이거나 뜯어보자 싶어 태섭은 방 안에 마땅한 도구가 있는지를 찾았다. 성경도 있고 어메니티도 있고 물도 있는데 칼은 없다. 하긴, 누가 여기서 그 칼 가지고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지. 그래서 태섭은 없는 손톱 끝으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냈다. 얼마나 잘 싸매놨는지 중간에 정대만을 좀 때리고 싶기도 했지만……. 사귀다 보니 그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 옮았는지 결국에는 봉인 해제에 무사히 성공했다.
서류 봉투를 뒤집자 침대 위에 떨어진 물건들은 카세트테이프 하나와 전화카드 6장이었다. 꽤 거금 썼네. 전화카드 한 장에는 쪽지가 스카치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전화하고 싶으면 이거 써. 익숙한 필체였다. 최대한 단정하게 쓰려고 한 게 눈에 보여서 귀여웠다. 카드들을 옆으로 잘 치워놓고 태섭은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테이프에는 아무런 라벨도 메모도 없었다. 뭐 식상하게 목소리 녹음이나 음성 편지 이런 건 아니겠지. 눈썹을 까딱거리던 태섭은 제 워크맨을 꺼냈다. 그리고 테이프를 집어넣고 이어폰을 꽂은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철썩― 쏴아―
버튼을 누르자마자 흘러나온 소리에 태섭은 입을 틀어막았다. 테이프에는 파도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힘들 때마다 집 앞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였다. 바닷바람이 춥긴 했는지 간간이 대만이 옷을 여미거나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때마다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눌러 참은 채 태섭은 대만이 보내준 바다를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재생이 끝나자마자 전화카드를 집어 들었다. 당장 대만에게 전화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예, 여보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선배. 태섭이 그를 불렀다. 울음을 억지로 참아서인지 목소리가 자꾸 잠기려고 해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태섭이냐? 대만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잘 도착했어? 전화 건 거 보니까 봉투 뜯었나 보네. 뜯자마자 바로 쓴 거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대만이 싱글벙글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테이프 들었어요.”
그것만 듣고도 태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대만이 크게 웃었다. 깜짝 선물 괜찮았지?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대만이 말을 이었다. 야, 그거 녹음한다고 얼마나 추웠는지 알아? 날씨 풀린대서 얇게 입었더니 바닷가는 왜 그렇게 춥냐? 게다가 막상 녹음했더니 소리 잘 안 들려서 몇 번씩이나 다시 하고. 몰래 하는 거라서 너랑 마주치면 안 되니까 아라한테 네 스케줄까지 받아다가 움직이고, 어?
대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섭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방 안의 사물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바깥은 불야성이었다. 낯선 가로수와 넓은 도로들이 자신이 지금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새벽이 늦었는데도 인적이 끊기지가 않는 거대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태섭은 생각했다. 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이, 잊을 만하면 들리는 경찰차의 사이렌이, 취객의 시끄러운 고성방가가, 밤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선 마천루가, 자신이 싫어했던 그 도시의 요소들이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대만과 어딘가 닮아 있다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그와 닮은, 그를 태어나게 하고 그를 만들어 온 정대만의 근원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태어난 이는 평생 바다를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도시에서 태어난 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송태섭에게 있어 정대만은 곧 도시와 같다. 그래서 태섭은 미국에 있는 동안 바다를 볼 수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곳에는 바다가 없는 대신 대만이 있으니까. 결국 제가 사랑하는 것이 여기에도 존재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을 타고 따뜻함이 퍼지기 시작했다. 낯선 환경에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그 따뜻함은 마치 대만의 품에 안겨 있을 때와 비슷한 온도였다. 그래서 송태섭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메트로폴리스의 한복판에서 가만히 웃었다.
그건 바다가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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