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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宿り

비 피하기

某日 by 銘

Penthouse - 雨宿り

체육관에서 나온 태섭을 반긴 것은 콧잔등을 적시는 물방울이었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던가. 젖어드는 가방을 뒤져봤자 우산 비스무리한 것은 흔적도 없을 거란 걸 잘 알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태섭은 힘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달리 힘든 하루, 유달리 지치는 훈련, 유달리 속상한 제 실수와 따라주지 않는 몸. 생일이 가까워지면 태섭은 항상 물먹은 솜처럼 축축 가라앉는 제 몸과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당장 다음달에 있을 인터하이를 앞두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서 더 조바심이 나고 속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달재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걱정하는 한나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주장이 흔들리는 걸 보여 봤자 팀 분위기만 와해될 뿐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너무 힘든걸.

태섭은 고개를 들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 뺨을 적시는 빗줄기 사이로, 지치고 힘든 마음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왈칵 솟았다. 비가 와서 다행이야. 태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왜 비를 다 맞으면서 그러고 있냐. 우산이 없으면 더 빨리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제 몸을 적시던 빗방울이 멈췄다. 눈을 뜨자 커다란 검은 우산이 제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태섭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정대만이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수업이 휴강된 김에 후배들 코칭이나 해줘야겠다며 2시간 동안 전철을 타고 여기까지 왔던 그 사람이었다.

“감기 걸린다.”

“안 걸려요. 날이 이렇게 더운데 무슨.”

“방심하면 큰일 나.”

우산 없지? 집까지 데려다 줄게. 같이 쓰고 가자. 대만이 우산을 자랑하듯 가볍게 흔들었다. 출렁이는 천과 흩날리는 빗방울이 마치 제 마음 같다고, 태섭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바보 같은 선배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을까. 녹초가 되어서는 힘들다고 헉헉 투덜거리는 주제에 융통성 없을 만큼 성실하게 그 모든 훈련 루틴을 다 소화하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때부터? 그 잘생긴 얼굴로 휘날리는 벚꽃잎을 배경 삼은 주제에 졸업하기 싫다고, 너랑 계속 같이 농구하고 싶다고 볼썽사납게 우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짧아진 머리로 체육관에 돌아와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걸 내려다봤을 때부터? 아니면, 이 사람은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의 그 어떤 작은 편린 때부터인가? 정확한 답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만이 베푸는 다정한 친절과 무심하지만 따뜻한 배려가 태섭의 심장을 항상 술렁거리게 만든다는 것.

“집까지는 괜찮아요. 버스 타고 가니까.”

정류장까지만 좀 실례할게요.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고쳐 멨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혹한 건 사실이었으나, 태섭의 집은 여기에서 멀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이니 걸어서는 1시간에서 1시간 반쯤은 걸릴 것이다. 그 긴 시간 내내 대만과 함께 우산을 쓰겠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건 너무 욕심이 티가 날 것 같아서, 태섭은 적당히 버스 정류장까지만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끄덕인 대만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태섭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느라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던 등이 어느새 비에 잔뜩 젖어 있었다. 분명 축축하고 차가울 텐데도 대만은 별말 없이 태섭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대만의 단단한 몸이 얇은 천 한두 장을 사이에 두고 태섭과 맞닿았다. 아, 위험해. 태섭은 속절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한 제 심장을 대만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춥냐? 대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선배 팔 무거워서. 버텨, 인마.

평소에는 훈련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지라 거의 천리 길처럼 느껴지던 버스 정류장이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도 짧기만 한지. 몇 발자국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눈앞에 표지판이 드러났다. 그 앞에서 단단한 팔에 감싸인 채 버스를 기다리며 태섭은 제 옆에 선 대만을 흘끔거렸다. 밀착된 몸 덕에 부실 바디워시의 향과 스킨로션의 향이 섞인 대만의 체향이 선명하게 맡아졌다. 버스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오더라도 아주 늦게 오면 좋겠다고, 대만과 함께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대만과 조금만 더 닿아 있고 싶었다. 태섭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젖은 바닥을 운동화 앞코로 툭툭 찼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저 멀리서부터 털털거리는 버스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차창 앞에 큼지막하게 쓰인 번호는 태섭이 타야 할 것이었다.

“저 저거 타야 해요.”

태섭은 이 어마어마한 습기에도 잔뜩 말라 있는 제 입술을 혀로 가만히 훑었다. 어느새 버스가 가까이 오고, 열린 문 앞에서 대만은 태섭의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어주었다. 태섭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져가.”

“그럼 선배는 뭘 쓰고 가게요?”

“난 여기서 집 가깝잖아.”

“그래도 15분은 걸어가야 하잖아요.”

“뛰면 금방이야.”

대만은 씩 웃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보고 있던 태섭은 대만의 입술이 다시 달싹이기 시작하자 화들짝 놀라 우산을 접으며 제 몸을 잽싸게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승객이 탄 버스의 문이 닫혔다. 대만이 하려 했던 말은 굳게 닫힌 문에 막혀 그대로 사라졌다. 요금을 치른 태섭은 일부러 대만이 보이지 않는 반대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잘 가라.’ 대만의 입에서 나올 그 작별 인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주말, 태섭은 우산을 돌려주겠다는 핑계로 대만을 만나러 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거 계속 너 써도 되는데. 수화기 너머의 대만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섭도 그럴까 했었다. 정대만이 쓰던 물건을 제 소유로 하게 되는 건 꽤나 짜릿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대만의 숨결과 손길이 닿은 물건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이름을 불리고 싶었다. ‘정대만의 물건’이 아니라 ‘정대만’에 욕심이 났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큰 우산 우리집에 둘 데 없어요. 뭐, 그렇다면야……. 여전히 조금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대만은 만날 약속을 착실하게 잡아 주었다. 토요일 오후 1시. 역 앞 개찰구에서. 오전에는 훈련이 있어서 시간 빼기가 좀 그렇네. 늦게 만나면 너 돌아가는 길이 그럴 테고.

시간과 장소를 받아적고 2시간 동안 전철에 몸을 싣는 태섭의 심장이 계속해서 쿵쾅거렸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우산의 손잡이를 더 꽉 잡았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태섭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개찰구를 나오니 1시 10분 전이었다. 태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학가라 그런지 주말에도 사람이 많았다. 잔뜩 놀 생각인지 한껏 꾸민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태섭의 앞을 지나갔다. 태섭은 눈을 내려 제 차림새를 점검했다. 품이 넉넉한 반소매 후드 티셔츠에 반바지와 크로스백. 나도 조금 꾸밀 걸 그랬나. 우산 돌려준다는 핑계를 댔으면서 힘을 주면 또 티가 날 것 같아서 일부러 평소 옷차림으로 왔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자 너무 편하게 나왔나 싶어 멋쩍었다.

“송태섭!”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제 이름이 똑똑히 귀에 박혔다. 태섭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손을 흔드는 키 큰 남자가 보였다. 긴 바지에 하얀 티셔츠, 그 위에 걸친 학교 져지, 어깨에 걸린 더플백. 누가 봐도 막 훈련을 마치고 나온 체육계 사람의 그것이라 태섭은 제 모습이 아주 볼품없어 보이진 않겠구나 싶어 조금 안심했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조금 전에 왔어요. 여기요, 우산.”

“아, 우산. 응. 진짜 이거 안 돌려줘도 됐는데.”

“말했잖아요, 이거 너무 커서 우리집에 놓을 자리 없어서 돌려주는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하나 준다고 2시간씩이나 나오는 건 너무 번거롭지 않냐.”

“겸사겸사 바람이나 쐬는 거죠. 더 큰 세상 구경이나 좀 하고.”

태섭의 너스레에 대만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밥 먹었냐? 아뇨.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저 돈 없어요. 당연히 내가 사지, 인마.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선배가 챙겨야지. 와, 그럼 이 동네에서 제일 비싼 거 먹을래요. 이 속물적인 자식. 고등학생 때처럼 실없이 투닥거리며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양 많고 맛있어. 체대 애들 자주 와. 대만이 태섭을 이끈 곳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파는 집이었다. 주말인 데다가 점심 피크타임이라 조금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태섭에겐 오히려 늘어선 대기줄이 반가웠다. 기다리는 시간 만큼 조금 더 대만과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연습 없냐?”

“하루 쉬라고 했어요. 요즘 너무 강행군이었던 것 같아서. 그래도 나올 애들은 나와 있겠지만요.”

“하여간 보고 있으면 너도 악덕 주장이야.”

“그 악덕 주장이 선배 대학 보내준 거 잊었어요?”

태섭은 어깨를 으쓱했다. 북산 상황은 지난번에 와 봐서 알잖아요. 선배 얘기나 좀 해 봐요. 대학 생활은 어때요? 재미 있어요? 대만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재미는 있지. 힘든 건 비슷하고. 그러면서 대만은 학교 생활과 농구부 생활의 설명과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다. 합을 맞추는 다른 가드의 스타일이 어떻다든가, 훈련은 어떤 식으로 한다든가, 합숙날 저녁에 어떻게 놀았다든가, 동기들과 벼락치기로 밤샘과제를 하다가 누가 튀었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그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태섭은 대만의 말을 들으며 모처럼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축 처지는 몸과 가라앉던 기분은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두 명이서 양이 많다는 햄버그 정식을 네 개나 시켜먹었다. 사이드로 더했던 감자튀김까지 싹 비웠다. 두 사람의 먹성에 주변의 다른 손님들은 꽤 놀란듯 했지만 체대생들이 자주 온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는지 가게 사장은 대만의 옷차림을 보고는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밥을 조금 더 내어주었다. 대만이 넉살 좋게 사장님께 엄지를 들어 보였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나오자 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우산도 돌려줬고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 돌아가는 게 맞는 순서였지만, 태섭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느라 얼굴 보기 힘들어진 정대만 때문에 그 동안 쌓여 있었던 그리움들이 툭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 내기 시작한 욕심은 봇물이 터진 것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몇 시간만 더 대만과 같이 있고 싶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학교 구경이나 좀 시켜줘요.”

그래서 또 다른 핑계를 댔다. 오, 그럴까? 우리 학교 캠퍼스 예뻐. 대만이 신나서 앞장섰다. 사실 대학 캠퍼스 따위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태섭은 그 뒤를 얌전히 따라 갔고 대만의 이런저런 설명에 착실하게 반응해 주었다. 그렇게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야외 코트가 보여 오랜만에 원온원이나 하자고 붙잡았다. 실컷 원온원을 하고 나서는 더우니까 카페라도 가자고 붙잡았다. 카페에서 땀을 식힌 후에는 저녁은 안 먹이고 보낼 거냐며 붙잡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인데도 핑계가 계속해서 쌓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몇십 분, 아니, 몇 분 만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계산을 하러 간 대만의 등을 보며 태섭은 혼잣말을 했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태섭은 여즉 쿵쾅거리고 있는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가게를 나오니 벌써 서쪽 하늘 너머가 검푸른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름의 긴 낮이 겨우 끝나갈 시간이니 지금은 못해도 8시는 넘었을 것이다. 집까지 2시간 거리이니 돌아가면 10시가 넘는 시간. 아무리 남자라 해도 미성년자가 계속해서 바깥을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섭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갑을 가방에 넣은 대만이 하늘을 보고 어이쿠, 놀란 소리를 냈다.

“태섭이 너 이제 가야 되지 않냐. 어머님 걱정하시겠다.”

긍정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달싹이기만 하는 입술을 본 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말 해. 대만의 시원시원한 말과 달리 태섭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목 끝까지 걸린 말이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태섭이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대만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허리를 숙여 그에게 바짝 귀를 들이댔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제 앞에 들이밀어진 대만의 얼굴을 보고 태섭은 순간 숨을 멈췄다. 아, 이거 너무 가까운데. 대만의 체향이 훅 끼쳐왔다.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처럼 부실의 바디워시 냄새는 섞여있지 않았지만 대만이 자주 쓰는 스킨로션의 어른스러운 향은 선명했다. 태섭은 결국 쿵쾅이는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대만의 뺨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당황한 대만이 고개를 번쩍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혼란스러워하는 녹갈색 눈동자와 제가 먼저 사고를 친 주제에 당혹해하는 적갈색 눈동자가 서로를 눈에 담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툭. 투둑.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것이 순식간에 투두두둑 불어나기 시작했다.

“선배, 우산, 우산!”

“어? 어, 어.”

대만의 더플백에 둥그렇게 굽은 우산 손잡이가 끼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태섭이 그의 팔을 탕탕 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대만이 허겁지겁 우산을 폈다. 검은 천이 흐린 하늘을 가림과 동시에 두 사람을 적시던 빗줄기가 멈췄다. 타다다다닥, 우산 위로 빗방울이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어깨가 젖는 것을 피하기 위해 태섭은 무의식적으로 대만에게 붙었다. 태섭의 팔뚝에 대만의 가슴이 닿았다. 또 다시 어정쩡한 침묵이 흘렀다.

“그, 역까지만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태섭이 먼저 침묵을 깼다. 어, 으응. 응. 데려다 줄게. 대만이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때처럼 한 우산을 쓰고 비가 오는 길을 걸었다. 어깨동무는 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계속해서 툭툭 부딪히는 서로의 몸이 지나치게 의식되었다. 태섭은 메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핥았다.

한바탕 쏟아붓던 소나기가 그새 지나가려는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약해졌다. 태섭은 눈을 들어 우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치려나. 조바심과 아쉬움이 차올랐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기습뽀뽀를 한 직후에 한 우산을 쓰고 가는 이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정대만과 가까이 붙어있다는 만족감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욕심이 채워지는 기쁨을 멈출 수가 없어서.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고 거리도 점점 좁아졌다. 어느새 태섭이 나왔던 개찰구의 입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섭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대만과 웃고 떠들면서 가벼워졌던 몸이 다시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가고 싶지 않아. 태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송태섭.”

개찰구 직전까지 몇 발자국 남겨두지 않은 자리에서 갑자기 대만이 걸음을 멈췄다. 우산을 벗어날 수 없는 태섭도 뒤따라 섰다. 대만이 고개를 돌려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미미한 혼란이 어려 있는, 그렇지만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 감도는 얼굴이었다.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너 아까 나한테 뽀뽀 왜 했냐.”

“…갈게요.”

태섭은 그대로 역에 들어가려 했다.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러나 대답을 피하며 돌아가려는 태섭을 대만이 붙잡았다. 커다란 손에 그대로 덥석 잡힌 제 팔을 태섭이 기막히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뭔데요, 놔요. 간다니까요. 팔을 털어 대만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강하게 틀어쥐일 뿐이었다. 놓으라니까요? 태섭이 신경질을 냈다. 싸움이야 태섭이 더 잘하지만 힘 대결로 가면 무조건 대만의 승리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강하게 짜증을 내며 대만을 뿌리치려 애썼다. 존 프레스를 뚫기 위해 드리블을 하며 기회를 만든 것처럼, 팔을 빼낼 틈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정대만은 틈을 주지 않았다. 되려 태섭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개찰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뭐냐니까요?! 결국 태섭이 한껏 커진 목소리로 역정을 내자 대만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비 그치면 가.”

“뭐라고요?”

“비 그칠 때까지 내 방에 있으라고.”

우산도 없잖아, 너. 그러니까, 지금은 가지 마. 비 그치면 그때 가. 그렇게 말하는 대만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첫 차를 타고 돌아가는 태섭을 대만이 바래다주는 자리였다. 여전히 공기 중에는 흙내음이 섞인 물 냄새가 떠다녔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아직 저물지 않은 새벽달이 먼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역까지 가는 길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태섭이 한껏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개찰구의 앞에서 대만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평소 기상 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일찍 일어나서인지 여전히 눈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졸려서 반쯤 뜬 눈으로도 개찰구를 넘어 들어가는 태섭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좇았다. 갈게요. 태섭이 인사하자 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들어가라.

등을 돌려 역사 안으로 들어가며 태섭은 가만히 제 어깻죽지를 매만졌다. 그 아래 남아 있을 잇자국이 기분 좋게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태섭은 제 손에 들린 커다란 검은 우산을 내려다 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꿈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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