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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의 딸기 케이크

생일 축하해.

某日 by 銘

며칠 전부터 케이크에 눈길이 갔다. 엄마가 종종 들르는 정통 베이커리의 진열대 뿐만 아니라 여자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테리어의 디저트 가게에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머무르곤 했다. 딱히 케이크를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단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굳이 찾아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사업 차 손님을 만날 때마다 롤케이크를 선물받아 오셨던 덕에 케이크류는 어릴 적부터 물리도록 먹어서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도 왜 그렇게 케이크를 쳐다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 살 어린 농구부의 조그만 후배 때문이었다.

방학을 맞아 본가에 내려와 있는 동안 대만은 자청해서 매일 같이 북산 체육관에 출근하며 후배들의 코치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보다 더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한 대만은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고3 때보다 더 날카로운 슛과 지능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자신이 배워 온 것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려 노력했다. 그야말로 선배로서의 귀감 그 자체였고 주장인 태섭에게도 ‘선배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렇게 신뢰받는 OB로서의 나날을 보내던 중 한나가 대회에 제출할 명단을 적고 있는 걸 우연히 넘겨다보게 된 게 바로 이 끊이지 않는 케이크 생각의 원인이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곱슬머리 너머로 글자를 훑어내려가던 시선이 명단의 첫 칸에 닿자마자 붙박인듯 그대로 멈췄다. 4번, 3학년 송태섭, 양서중 출신, 포지션은 PG, 생년월일은 XX0731. 거기까지 읽어내린 대만은 고개를 들고 부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7월 31일. 이달의 마지막 날, 전국대회 출발 하루 전날,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 그리고 송태섭의 생일. 대만은 착잡한 손길로 턱을 문지르며 긴장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걸 어쩐담.

그래서 정대만은 그렇게나 싫어하는 ‘케이크’라는 물건을 며칠째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맛있고, 보기 좋고, 멋스럽고, 제대로 된 케이크로 짝사랑하는 송태섭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짐꾼 노릇을 하기 위해 엄마와 같이 저녁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빵집을 보고 엄마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빵 좀 사갈까? 대만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의 어머니는 빵을 좋아했다. 건강 때문에 자주 드시진 않지만 난 평생 밥 대신 빵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할 정도였고, 때때로 몇 만원 어치를 가득 사다 놓으면 아버지나 대만이 몇 개 손 대기도 전에 며칠 지나지 않아 어느새 전부 사라져버릴 정도였다. 빵이야 학생 식당의 맛없는 메뉴 대신이거나 연습 중간중간 빠르게 허기를 달래야 할 때 먹는 간식 정도로 취급하는 대만은 늘 엄마의 빵 사랑을 신기하게 여겼다.

쟁반을 든 엄마가 즐겁게 빵을 이것저것 골라담는 동안 감흥 없는 얼굴로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맴돌던 대만은 가게 왼쪽의 유리 쇼케이스 앞에 우뚝 멈춰섰다. 그 안쪽에 놓인 다양한 케이크들에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코코아 파우더가 윗면을 가득 덮은 티라미수, 슬라이스된 밀크 초콜렛이 꽃잎처럼 잔뜩 쌓인 초콜렛 케이크, 시럽 묻힌 과일이 다양하게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덮인 새빨간 레드벨벳, 위쪽이 갈색으로 잘 그을린 치즈 케이크, 연갈색 크림이 깨끗하게 발린 모카 케이크……. 각양각색의 케이크들이 조명을 받아 제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한참을 홀린듯이 케이크를 바라보던 대만은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계산을 끝내고 두툼한 봉투를 손에 쥔 엄마가 뒤에 서 있었다.

“케이크는 왜 그렇게 봐? 네가 웬일이야. 먹고 싶어?”

“아냐……. 얼마 뒤에 누구 생일이라 그냥 생각난 김에 구경만 좀 했어.”

“생일?”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얼굴로 입을 가리며 눈꼬리를 잔뜩 휘며 웃었다. 어머나, 세상에~ 대체 누구 생일이길래 우리 아드님이 자기 생일 때도 안 먹던 케이크를 그렇게 구경하고 계신 걸까~? 일부러 간드러지게 내는 목소리가 누가 봐도 아들을 놀릴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모양새라 대만은 신경질 난 표정으로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런 게’ 아닌데?”

“아, 엄마!”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왜, 뭐 찔리는 거 있니?”

“아오 진짜! 아니라니까!”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후배라고요, 후배! ‘그냥’ 후배애? 엄마!! 대만이 꽥 소리를 지르자 엄마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씨, 나 엄마랑 말 안 해! 계산 다 했으면 가기나 해요! 일부러 쿵쾅거리며 가게 문을 밀고 나가는 대만의 귓가와 뒷덜미가 새빨갰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였다. 진짜 누군데 그래~ 엄마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그 뒤를 따라 나오며 엄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지만 대만은 화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서 터졌다. 그런 식으로 한 번 브레이크가 걸리고 나니 괜히 제 손으로 케이크를 사는 것이 멋쩍게 느껴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연습을 시작하는 운동부의 특성상 베이커리에서 사들고 바로 학교로 넘어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전날 미리 사서 집 냉장고에 넣어두기엔 ‘여보, 대만이가 좋아하는 애가 생겼나 봐.’라는 엄마의 귀띔을 받은 아버지까지 합세해 저를 놀릴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대만은 이왕 선물을 할 거라면 태섭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케이크나 동네 베이커리의 올드한 케이크보다는 더 맛있고 더 세련되고 예쁜, 좀 특별한 느낌의 케이크가 탐이 났다.

하지만 그런 케이크는 ‘여자애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테리어의 디저트 가게’에 미리 예약주문을 해야만 했고, 정말로 그러기엔 또 묘하게 어딘가 쑥스러웠다. 건장한 남자애에게 선물하기 위해 똑같이 건장한 남자가 그런 케이크를 사러 간다? 뭔가 그림이 민망하지 않은가. 그래서 서로 다른 두 마음 사이에서 저울질만 계속하던 대만은 결국 그 어떤 케이크도 사지 못한 채 31일이 점점 다가오는 걸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부원들에게는 출발 전날이니 푹 쉬고 컨디션 관리를 하라고 휴식을 줬으면서 정작 태섭은 아침 일찍부터 체육관에 나와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수록 몸을 움직이려는 녀석이니 분명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러고 있을 줄이야. 드리블 연습으로 가볍게 손을 풀고 있는 태섭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대만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야, 송태섭.”

누가 올 것이란 생각을 못했는지 목소리를 들은 태섭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허리를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가에 머쓱하게 서 있는 대만을 발견한 태섭이 가만히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늘은 애들 다 쉬라고 했는데.”

“알아. 나도 어제 같이 있었는데 설마 그걸 못 들었겠냐.”

“그럼 왜 나왔어요? 오늘은 봐줄 사람 없을 거 알면서.”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여기 있을 것 같았으니까.”

“헤에, 그거 일부러 나 보러 왔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이거 주장 달고 사람이 제법 뻔뻔해졌네.”

정곡을 짚은 태섭의 말에 혼자 찔린 대만은 괜히 이전에나 쓰던 퉁명스러운 말투로 핀잔을 잔뜩 주었다. 그 말을 듣자 태섭은 더욱 뻔뻔한 얼굴로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고, 대만은 공연히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점점 붉어지려는 얼굴로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등 뒤에 숨겼던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받아. 대만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태섭의 시선이 쭉 아래로 내려갔다. 대만이 내민 것은 분홍색 크림 위에 딸기가 하나 앙증맞게 올라간 컵케이크였다. 안 그래도 큰 편인 대만의 손 위에 있으니 정말 한 입거리로 보일 정도로 작았다. 태섭이 의아한 눈으로 컵케이크와 대만을 번갈아 보았다.

“생일이라며. 쪼끄만 녀석은 쪼끄만 거나 먹어.”

원래 사주려고 했던 예쁘고 세련되고 맛있는 홀케이크는커녕 이런 손바닥만한 컵케이크밖에 줄 게 없다는 게 민망했던 대만의 말투가 더 불퉁해졌다.

대만은 결국 케이크를 사는 데 실패했다. 결국 부모님의 놀림을 감수하고 베이커리에 달려갔을 땐 케이크는 이미 다 팔려 있었고, 남은 것도 전부 예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게 아니면 가게가 이미 영업을 끝냈거나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될 물건만 있어 아무리 사정하셔도 팔기엔 곤란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서 대만이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때마침 거래처에서 선물받아 오신 이 컵케이크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 컵케이크도 거의 특수임무급의 난이도로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저녁 늦게 달려나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대만을 본 엄마가 '케이크 못 샀어?'라고 대놓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거라도 선물해 줘. 아까 먹었는데 맛있더라. 안 뜯은 거 한 상자 더 있으니까 꺼내줄게, 그거 가져가. 그러면서 턱짓으로 그 컵케이크 상자를 가리키시는 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또 짜증을 내고 방으로 들어와버린 탓에, 정말로 컵케이크라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땐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꺼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방에서 얼쩡거리며 아침 준비를 하는 엄마의 동태를 살핀 후 물을 마시는 척 냉장고 문을 열고 케이크를 슬쩍……. 뭐 하느라 부스럭대냐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빠른 몸짓으로…….

엄마는 한 상자를 다 가져가라고 했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한 개를 겨우 꺼내오는 게 최선이었다.

내민 것을 받을 생각은 않고 멀거니 저와 컵케이크를 번갈아보기만 하는 태섭의 태도에 대만은 점점 초조해졌다. 공친 건가……. 창피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긴, 생일에 제대로 된 케이크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걸 주는데 누가 그걸 반갑게 받겠어. 제기랄, 정대만 등신아. 그놈의 가오가 뭐라고 케이크 사는 걸 질질 끌어서……. 도망쳐서 어디 벽에 머리라도 대차게 들이박고 싶었다.

“선배가 웬일이에요, 이런 걸 다 챙겨주고.”

웃음기 어린 태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상상과 달리 행복한 웃음을 잔잔하게 지은 태섭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선배한테 뭘 받을 거라고 생각을 못해서 조금 얼떨떨하네. ……왜! 내가 뭐 주는 게 그렇게 이상하냐?! 창피함이 대폭발한 대만의 신경질에 태섭이 소리 내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고마워서 그러죠. 그렇게 말하며 대만의 손에서 컵케이크를 가져간 태섭이 플라스틱 컵의 뚜껑을 조심조심 열었다. 오, 예쁘게 생겼다. 순수하게 감탄하더니 그 자리에서 곧바로 컵케이크 위쪽의 크림을 검지로 찍어 맛본다. 크림도 딸기맛이네. 그리고 태섭은 곧바로 컵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우물우물, 자그마한 입에 대만의 분홍색 마음이 가득 들어찼다.

“음, 맛있네요, 이거.”

진짜 맛있다. 코끝과 입가에 크림을 묻힌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 얼빠진 얼굴로 그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며 대만은 제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거 어디서 샀어요? 뭉개지는 발음마저 귀여웠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태섭의 통통한 입술을 바라보던 대만은 문득 생각했다. 키스하고 싶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지금 무슨 헛소리냐고, 파렴치하다고, 참으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이성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 외침은 대만의 끓어오르는 충동을 이기기에는 지나치게 역부족이었다. 송태섭.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컵케이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태섭이 시선을 올려 대만을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턱을 잡아올리자 놀란 태섭이 반사적으로 입에 담겨있던 것을 삼켰다. 대만은 그대로 그 위에 입술을 겹쳤다. 상큼하고 단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처음으로 입에 넣은 송태섭은 딸기맛이 났다.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몰랐다. 떨리는 숨과 함께 입술을 떼어냈을 때 바로 눈앞에서 본 태섭의 눈동자에 제가 한가득 담겨 있어서, 대만의 입은 뇌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기 멋대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이거 내 첫키스야. 생일 선물로 같이 줬다.”

뱉어놓고 보니 제가 생각해도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싶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게 좋아하는 녀석의 입술을 멋대로 뺏어놓고 할 만한 소리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태섭이 눈썹을 짝짝이로 만들더니 코웃음을 쳤다.

“뭔 소리야, 진짜. 자의식 과잉이에요? 왜 그게 나한테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곧바로 내뱉어지는 비난과 면박. 그러나 세게 나온 말과 달리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되돌아간 태섭의 눈썹엔 의외로 싫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대만을 마주 보며 나머지 빵을 태연하게 우물거릴 뿐이었다. 어라? 그 묘한 태도에 대만은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컵케이크를 다 먹은 후 태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만을 잡아 끌고 코트로 향했다. 이왕 온 거 슛 폼이나 좀 봐주세요. 오늘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정대만 독차지해야지. 그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별 의미 없는 말일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독차지’하겠다는 표현에 20대 청년의 가슴이 뜨겁게 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정신없이 연습을 돕다가 배가 꼬르륵거리는 느낌에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잠깐잠깐 공을 그러모을 겸 휴식을 취한 걸 제외하면 정말 이른 아침부터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연습을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배고픈데 좀 쉬고 밥이나 먹으러 갈까. 대만의 말에 태섭은 강아지처럼 좋다고 뛰어나왔다. 지금이면 밥 세 공기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나서 조잘대는 옆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귀엽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대만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우리 체육관 문 닫고 갔었냐?”

“…어라, 그러게요. 문 닫아 놓으면 더우니까 그냥 나왔던 거 같은데.”

누가 왔었나? 한 걸음 앞으로 나온 태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체육관 문을 연 그때였다. 탕! 팡!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색색깔의 무언가가 눈앞에서 마구 날아다녔다. 생일 축하합니다!! 여러 목소리가 크게 합창을 했다. 엇, 태섭이 당황해 주춤한 사이 커다란 손 하나가 머리 위에 무언가를 푹 씌웠다. 은색 술이 달린 노란 고깔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손이 태섭의 팔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체육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언제 분 건지 공 대신 색색깔의 풍선이 굴러다니는 바닥에 태섭을 세워놓고는 부원들이 그 주변을 빙 둘러쌌다. 그 사이를 비집고 케이크를 든 달재가 앞으로 걸어나오자 부원들이 한 박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송태섭/주장님, 생일 축하합니다! 와아아아!

부원들의 환호성이 하도 대단해서 소리만 들으면 태섭이 아니라 본인들의 생일인 줄 알 지경이었다.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섭이 후, 입김을 불었다. 19개의 초가 모두 꺼지자 우렁찬 박수 소리가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아까 터트리지 않은 폭죽이 하나 남았는지 뒤쪽에서 탕 소리가 났다. 생일 축하해, 태섭아.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태섭 선배, 생일 축하드려요! 왁자지껄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고깔모자를 벗은 태섭이 달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

“풍선은 여기 와서 다같이 불었고 소품은 어제. 케이크는 며칠 전에 예약했다고 들었어. 소연이 아이디어였어. 다같이 축하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쉬는 날이라고 내가 집에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미리 너희 집에 전화해서 알아봤지.”

그사이 초를 뽑고 케이크를 잘라낸 한나가 일회용 접시 위에 커다란 조각 하나를 담아 포크와 함께 내밀었다. 자, 이건 오늘의 주인공 몫. 사람이 흩어진 사이로 태섭의 옆에 가까이 온 대만은 그제야 부원들이 준비한 케이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생크림이 깨끗하게 발리고 윗면에는 커다란 딸기가 장식된 쇼트 케이크였다. 거기에 태섭의 이름이 적힌 초콜릿 플레이트까지. 손바닥만 한 컵케이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성이었다. 새삼 초라해지는 느낌에 대만은 말없이 뒷목만 긁적였다.

접시를 받아든 태섭은 잠시 묘한 눈으로 케이크를 바라보더니 제일 먼저 크림 묻은 딸기를 집어 먹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그 다음엔 케이크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한나가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어때? 가게에서 제일 인기 많은 케이크랬는데.”

“그럴 만 하다. 맛있어. 역시 한나 안목다운걸.”

그런데 아침에 먹었던 딸기가 더 맛있는 거 같아.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로 대만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쿡 찌르기까지 했다. 태섭이 말한 ‘아침에 먹었던 딸기’가 제가 줬던 컵케이크임을 깨달은 대만의 입꼬리가 점점 실룩이기 시작했다. 조금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절로 쫙 펴졌다. 큼흠, 내가 센스가 좀 좋지. 히죽히죽 웃음이 자꾸 배어나왔다.

“뭐예요? 오늘따라 둘이 사이가 더 좋네요.”

한나의 말에 대만과 태섭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태섭이 갑자기 케이크의 크림을 손가락으로 푹 퍼서 대만에게 묻혔다. 하아? 코끝에 하얀 크림을 단 채로 황당해 하던 대만이 곧은 눈썹을 딱딱하게 굳혔다. 야, 송태섭 너 이리 와.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걸었다 이거지? 대만이 질세라 크림을 묻히기 위해 접시를 뺏어들려 하자 태섭이 크게 웃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그를 피했다. 경기 중인 것처럼 날쌘 몸놀림으로 잽싸게 피해 다니는 태섭을 몇 번 쫓아다니더니 잡기 어렵다 판단했는지 씩씩대다가 소리를 질렀다.

“야, 강백호! 송태섭 좀 잡아봐!”

“에엥? 왜?”

“아, 좀 잡으라면 잡아봐! 너희 주장 생일빵 좀 먹여주게!”

“아, 그런 거야? 그럼 당연히 잡아야지~”

“으아악! 오지 마! 백호 너 이거 배신이야!”

태섭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북산에서 제일 월등한 운동량을 자랑하는 백호를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등 뒤에서 팔을 단단히 붙잡힌 태섭은 크림으로 곱게 화장을 한 모양새가 되었고, 백호에게서 풀려나자마자 복수를 위해 대만을 붙잡으려 날뛰었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벌인 두 사람은 머리카락과 얼굴이 전부 크림으로 범벅이 된 채 샤워실로 쫓겨났다. 먹을 걸로 장난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한나가 한바탕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킥킥대는 태섭을 보고는 더 화를 내지 못하고 한숨만 크게 한 번 내쉬었다. 그래… 요즘처럼 굳어 있는 것보단 차라리 웃는 게 낫다. 가서 씻기나 해, 주장. 애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게. 안 선생님이 카드 주셨어.

금방 씻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생크림이 생각보다 잘 안 지워진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냥 물로 몇 번 헹궈내면 되겠지 싶었는데 뜨거운 물로 씻어도 기름기가 번들거렸고 비누 거품도 잘 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묻은 걸 닦을 때도 샴푸를 몇 번이나 짜야했다. 다음부터는 생크림 케이크로 장난치면 안 되겠다. 이거 씻는 것도 일이네. 눈을 꾹 감은 채 더듬거리며 수도꼭지를 연 대만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옆에서 태섭이 대답했다. 이런 생일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어딘가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쏟아지는 물 아래로 거품을 씻어내던 대만은 그 말을 듣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리자 저처럼 물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씻어내리는 태섭의 모습이 보였다. 축 처진 갈색 곱슬머리, 살짝 내리감은 눈,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입가에 은은하게 걸려 있는 작은 미소. 최근 들어 내내 봐 왔던 짝짝이 눈썹의 호랑이 주장은 온데간데 없고 순수하게 오늘을 만끽하는 10대 소년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 즐거웠냐?”

대만의 말에 태섭이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의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어서일까, 이 공간 전체가 후끈한 수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더 촉촉하게 빛나는 것 같은 적갈색 눈동자가 또 다시 대만을 한가득 담았다. 눈이 마주치자 태섭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네. 즐거웠어요.”

선배 덕분에.

그리고 샤워실 안의 말소리는 거기에서 끊겼다. 아니, 더 이상 아무런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만은 다시 한 번 키스했고 태섭은 거부하지 않았다.


2시간의 이용 시간 동안 열다섯 명이 넘는 운동부원들은 뷔페를 거덜낼 기세로 먹어치웠다. 순식간에 쌓이는 접시 무더기가 살짝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그 후에는 생일도 축하했고 밥도 배부르게 먹었으니 일찍 들어가 쉬라는 태섭의 말에 모두들 순순히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같은 방향인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섭은 대만과 함께 돌아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없이 그늘 아래를 골라서 걸었다.

“큰일났네.”

“뭐가?”

“오늘 저녁 못 먹을 것 같아서요. 엄마가 생일이고 전국대회 전날이니까 기운 나게 맛있는 거 해주시겠다고 그랬는데.”

배가 너무 불러요. 뷔페를 갈 줄 알았으면 학생 식당에서 점심 조금만 먹는 거였는데. 태섭이 조금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또 뭐라고. 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그거 몸 좀 움직이면 금방 꺼져.”

“이제 집에 바로 갈 건데 움직이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럼 들어가기 전에 농구 한 판 해줄까?”

“싫어요. 야외 코트에는 그늘 없잖아요.”

지금 햇빛이 얼마나 센데. 하늘을 올려다 본 태섭이 이마를 찡그렸다. 대만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가로수 사이로 비치는 작은 빛줄기조차도 눈부시게 따가웠다. 한여름의 햇빛이란. 조금 올려다보았을 뿐인데 눈앞에 벌써부터 까만 잔상이 아른거렸다. 시선을 내리고 눈을 비비며 대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네, 농구는 못하겠다. 다시 학교 갈 거 아닌 이상은. 태섭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학교 다시 가자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네가 가고 싶으면 가줄게.”

“됐어요. 오전에 농구 실컷 해서 오늘은 충분히 만족해요. 오늘은 내가 선배 독차지했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던 태섭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맞다. 그래서 말인데, 고마운 선배한테 줄 게 하나 있거든요. 줄 거? 태섭의 말에 대만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대만은 태섭에게 뭘 받을 이유가 없었다. 컵케이크를 주긴 했지만 그건 태섭의 생일 선물이었고, 농구부 OB로서 부원들의 연습을 챙겨준 걸 감사해 한다기엔 이미 그 이유로 태섭에게 저녁을 한 번 거하게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게 뭘 준다고 하니 그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응, 줄 거. 제대로 된 답은 들려주지도 않고 앵무새처럼 한 번 더 말을 반복하기만 하며 태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쪽.

갑자기 태섭의 얼굴이 훅 높아진다 싶더니 대만의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야, 너… 잠깐… 지금 무슨……. 얼떨떨해진 대만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작은 곱슬머리가 상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만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윽고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틀어막은 대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은 분명 한여름의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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