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송아라 양의 관찰일지
“아윽……. 흐으…….”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감자칩 봉지를 가지고 나오던 송아라 양은 오빠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방 안을 넘겨다 보자 조금 전 귀가한 송아라 양의 오빠가 배를 감싸쥐고 웅크린 채 뒤돌아 앉아 있었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계속 심호흡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파 하는 오빠를 보며 송아라 양은 고민에 빠졌다. 문 열고 들어가서 오빠 괜찮냐고 물어도 되나? 엄마를 불러야 하나? 송아라 양은 예전에 집에서 쓰러진 오빠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피딱지 앉은 상처에 멍투성이로 정신을 못 차려서 구급차까지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또 그때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까. 송아라 양의 마음에서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태섭아, 잠깐 이것 좀 도와줄래?”
“…네, 엄마. 잠깐만요.”
주방에 있던 엄마가 큰 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웅크려 있던 오빠는 엄마의 말을 듣고 허리를 펴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끄응, 배를 문지르며 한 번 더 신음을 한 오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송아라 양은 몰래 방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던 걸 들켰을까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뭐 도와드리면 돼요? 문을 열고 나오는 오빠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송아라 양은 남몰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열네 살, 중학교 2학년 송아라 양은 하나 남은 오빠가 또 다시 린치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송아라 양의 오빠는 오랫동안 농구를 해 온 건강한 소년이었다. 엄마를 닮아 키가 크진 않았지만 재빠르고 날랬다. 송아라 양도 어릴 때 오빠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작아도 무시할 수 없는 선수. 그 당시 송아라 양의 감상은 그랬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엔 날카롭고 예민했지만 송아라 양은 한 번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적고 성격이 비슷해 자주 티격대긴 해도 오빠는 엄마를 신경 쓰고 동생을 잘 챙기는 좋은 소년이었다. 학교 생활도 농구도 나름 성실하게 했다. 그런데도 오빠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서 시비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이곳으로 막 이사온 직후에도 한동안 부어오른 뺨을 하고 다녔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에도 질 나쁜 선배들에게 걸려 심하게 두들겨 맞고 오더니─이때가 송아라 양이 쓰러진 오빠를 발견했던 날이었다─오토바이 사고까지 겹쳐 1학년 겨울 내도록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후 겨우 퇴원하고 재활을 마쳤나 했더니 또 멍투성이 얼굴로 이빨까지 잃은 채 돌아와 엄마를 기절 시킬 뻔 한 게 바로 올해 초였고. 이런 전적이 있으니 송아라 양이 오빠를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배를 움켜쥐고 아파하던 모습을 발견한 후, 송아라 양은 기회만 닿으면 주의 깊게 오빠의 상태를 살폈다.
인터하이가 끝난 후 오빠는 농구부의 새로운 주장이 되었다. 3학년 선배들이 빠진 후 오빠는 부 활동의 고민으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일이 많았다. 집에 돌아오면 대충 9시 반에서 10시.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이 들어서 다음날 6시부터 아침 운동을 겸해 학교를 간다. 최근에 오빠가 집에 와서 하는 거라곤 자는 일밖에 없는 수준이다 보니 오히려 얼굴 마주치기가 더 어려워, 송아라 양은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늘의 오빠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늦었다. 30분 정도이긴 했지만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다 보니 엄마가 잔뜩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조느라고 내릴 곳을 놓쳤어요. 그래서 걸어오느라.”
“저녁은?”
“먹었어요. 선배랑.”
최근의 오빠는 농구부의 ‘선배’라는 사람을 입에 자주 올렸다. 늦게 오는 날이면 저녁은 항상 같이 먹는 것 같았고, 주말에도 선배를 만나러 나간다고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선배랑 만나기로 했어요, 선배랑 연습 좀 하고 올게요, 선배랑 뭐 사러 가기로 해서요, 선배가 잠깐 불러서요……. 어떤 선배인지도 이름이 뭔지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송아라 양의 직감은 그 ‘선배’가 지난번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오빠와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씻으러 들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송아라 양의 눈이 탐정처럼 날카로워졌다.
엄마가 개어놓은 빨래를 들고 가는 척 송아라 양은 오빠가 들어간 화장실을 살폈다. 물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씻고 있진 않은 것 같고. 뭐하는 거지? 송아라 양은 슬그머니 화장실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씨… 이걸 이래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백 퍼 멍들 것 같은데……. 오빠의 짜증 섞인 혼잣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멍? 순간 목소리가 튀어나올 뻔 해 송아라 양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으악.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빨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송아라 양은 다급하게 쭈그려 앉아 빨래를 다시 그러모았다. 흩어진 것들을 주워 모으고 있자니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꺄악! 놀란 송아라 양이 비명을 질렀다.
“아씨, 깜짝이야! 뭔데, 송아라! 아… 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소리는 왜 질러?”
“누가 할 소린데! 오빠가 갑자기 문 여니까 놀라서 그렇지!”
같이 화를 내자 오빠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긁었다.
“근데 여기서 뭐하냐?”
“빨래……. 떨어뜨려서.”
“덤벙대기는……. 야, 이게 뭐야. 다 흐트러져서 또 개야 되잖아. 엄마가 기껏 해놓으신 거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냐. 넌 진짜 이래서 시집은 어떻게 갈래?”
“내가 몇 살이나 먹었다고? 그리고 그거 진짜 성차별적인 발언인 거 알지?”
“예, 예, 잘못했습니다. 오빠가 남자들이랑만 어울려서 여자 분들의 섬세함은 영 못 맞춰요. 수건은 그냥 줘, 내가 바로 접어서 넣을게.”
오빠도 송아라 양의 맞은 편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모으기 시작했다. 수건들을 팔 위에 쏙쏙 얹은 오빠가 다시 무릎을 펴 일어나다 말고 잠깐 송아라 양을 쳐다보았다. 왜? 송아라 양이 묻자 오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집에……. 혹시 연고 있어?”
“무슨 연고?”
“멍 빼는 거나……. 후시딘이나.”
“찾아보면 있을걸? 그런데 갑자기 왜? 오빠 어디 다쳤어?”
“어……. 그… 아까 오다가 걸려 넘어져서. 다리를 좀 세게 부딪혔거든.”
“…찾아볼게.”
“부탁한다.”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 닫힌 문을 보며 송아라 양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송태섭 멍청이. 자기가 지금 반바지 입고 있는 거 까먹었지. 송아라 양은 빨래를 주울 때 똑똑히 보았다. 핑계와는 달리, 오빠의 양 다리가 멍도 상처도 없이 아주 깨끗했던 것을.
엄마가 야간 근무를 하시는 날이었다. 송아라 양이 주번 일을 끝내고 집에 왔을 땐 이미 오빠가 달그락거리며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그럴듯한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오빠가 고개만 돌려 송아라 양을 흘끔 쳐다보았다. 왔어? 손부터 씻어.
“연습은?”
“오늘은 빠졌어.”
“주장이 그래도 돼?”
“하루 정도는 괜찮아.”
엄마가 저녁에 없는 날이면 오빠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일찍 집에 들어와 식사를 챙겼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인 동생이 혼자 밖에서 뭘 먹게 하는 것도 그렇고 집에서 불을 쓰게 하는 것도 위험하니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저녁을 먹는 그 행위가 남매 간의 어떠한 유대감을 지닌 불문율처럼 자리잡혀서, 송아라 양이 중학교에 들어간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남매는 여전히 엄마가 없는 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가방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뒤 손을 씻고 나오니 이미 식탁이 다 차려져 있었다. 농구할 때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오빠의 손은 빠르고 야무졌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한 송아라 양이 젓가락을 집었다. 오후에 엄마가 솜씨를 꽤 발휘해 놓으셨는지 식탁 위에는 좋아하는 것이 가득이었다. 가뜩이나 배가 고팠던 참이었던 송아라 양은 신나게 반찬을 이것저것 집었다. 오빠가 다 먹어치우기 전에 먼저 먹어야 했다. 운동부원 고등학생의 먹성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송아라 양의 삶의 지혜 중 하나였다. 아야……. 물을 마시던 오빠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냈다. 음? 고기조림을 먹던 송아라 양의 시선이 오빠에게로 향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며 컵을 내려놓은 오빠의 오른쪽 입가가 새빨갰다. 아랫입술이 터지고 찢어진 게 눈에 보였다. 피도 좀 났을 것 같은 상처였다. 쓰라린지 오빠가 잠시 손끝으로 상처를 매만졌다.
“입술 왜 그래? 또 누구랑 싸웠어?”
“아니야. 그냥 부딪혀서 그래.”
“뭐 어디에 부딪혔길래 입술이 그렇게 찢어져? 전봇대에라도 박았어?”
“내가 눈이 없는 줄 아냐……. 연습하다 부딪혔어.”
“님 조금 전에 연습 빼고 왔다 그러지 않았음?”
“…그 전에 조금 하고 왔어.”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이 긴 걸 보니 거짓말인 게 뻔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 송아라 양의 눈이 가늘어졌다. 송아라 양은 오빠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입술 외에는 어디 더 찢어지거나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멍도 안 들었고. 오른쪽 뺨은 조금 부은 것 같긴 한데. 기분 탓인가? 요근래 오빠의 얼굴을 자세히 볼 일이 없었다 보니 좀 긴가민가 했다. 송아라 양의 집요한 시선을 느낀 오빠가 미간을 구겼다.
“뭘 그렇게 봐? 밥이나 빨리 먹어.”
“오빠야.”
“왜.”
“이제 농구부 주장씩이나 하는 주제에 또 맞고 다니냐.”
반은 걱정, 반은 한심함이 담긴 목소리로 송아라 양이 말했다. 오빠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눈만 들어 송아라 양을 쳐다보았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눈이었다. 한참 동안 송아라 양의 얼굴을 쳐다보던 오빠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밥을 한 술 떴다.
“그런 거 아냐.”
“그러면 입술은 왜 그러는데.”
“말했잖아, 부딪혔다니까.”
“웃기고 있네. 차라리 오빠가 전교 1등을 했다는 걸 믿겠다.”
싸움박질도 적당히 해. 엄마 아시면 또 걱정해. 송아라 양의 야무진 말에 오빠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너, 엄마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식사에만 집중하는 오빠는 어딘가 화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쪽지시험을 앞둔 송아라 양은 친구의 집에서 같이 공부를 한 후 늦게 귀갓길에 올랐다. 엄마에게는 오후에 미리 전화를 해둔 상태였다. 태섭이 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까? 괜찮아요, 여기서 금방인데 뭐. 오빠도 주장 되고 바쁘잖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렇게 발랄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미 계절이 늦가을에 접어든 지도 한참이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걱정 없이 돌아다녔을 시간대인데도 바깥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이틀 전부터 고장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 밑을 지날 때면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읽었던 괴담집이 생각나, 송아라 양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으으, 그냥 송태섭 보고 데리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과거의 발언을 후회하며 송아라 양은 두 팔로 제 몸을 꼭 감싼 채 걸음을 재촉했다.
“…집 근처까지 오는 건 그만둬요. 가족들이 보니까.”
그때였다. 송아라 양의 귓가로 오빠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흠칫 놀란 송아라 양은 땅바닥을 보고 있던 눈을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빠? 어디 있는 거지? 주변을 살펴보니 맨션과 맨션 사이 골목에 누군가와 서 있는 오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반가움에 큰 소리로 오빠를 부르려 했던 송아라 양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심각한 분위기에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그러는 걸로도 부족해요?”
오빠는 평소와 달리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같이 있는 사람은 밤의 어둠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빠보다 키가 훨씬 크고 체격이 더 좋은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오빠의 말에 상대가 무어라 대답을 한 것 같았지만 그쪽도 목소리가 낮아 여기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빠가 곤란한 한숨을 내쉬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항의하듯 뭔가를 이야기 하기 시작하자, 오빠가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끊었다.
“그 얘기는 진작에 끝난 줄 알았는데요, 선배.”
“…….”
“나도 알아요, 내가 선배한테 그 부분 빚 진 거.”
오빠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빠진 어깨가 툭 떨어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송아라 양은 오빠의 입에서 나온 ‘선배’라는 말에 놀라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오빠가 자주 말하던 농구부의 ‘선배’일 게 분명했다. 같은 부원이면 분명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을텐데, 그 선배에게 말하는 오빠의 목소리는 너무나 딱딱하고 날카로워서 도저히 그런 사이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아, 설마……. 부 활동으로 운동을 택해본 적은 없지만 운동부 내의 위계질서와 서열관계가 강하다는 건 송아라 양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작년의 오빠가 한 번도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것도 오빠를 싫어하던 3학년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송아라 양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 ‘선배’는 오빠를 괴롭히고 있다. 아무리 주장이어도 오빠는 아직 2학년이다. 여름이 지나고도 은퇴하지 않은 3학년 선배라니,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이 느껴졌다. 송아라 양은 이제 거의 확신했다. 배를 감싸쥐며 고통스러워 했던 것도, 멍이 들겠다며 한탄했던 것도 다 그 선배가 주먹과 발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선배는 매일 같이 밤늦게까지 오빠에게 기합을 주고 주말까지 불러내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빠가 중학생 때의 달재 오빠 못지 않게 붙어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오빠가 했던 말을 들어보면, 이젠 집 근처까지 와서 위협을 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사람인 거야. 송아라 양은 화가 났다. 그리고 그렇게 린치를 가하는 선배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오빠가 조금은 존경스러웠다. 송아라 양은 여전히 내용 모를 대화를 하고 있는 두 인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남자가 오빠의 턱을 단단히 붙들었다. 남자의 손길에도 쉽게 반항하지 못하고 가만히 붙잡혀만 있는 오빠의 뒷모습에 송아라 양은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가 어떻게 병원에서 돌아왔는데! 우리 오빠가 다시 농구 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 같은 농구부 선배라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오빠한테 이럴 수가 있어?!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야, 이 나쁜 자식아!!!!!!!!!!!”
결국 송아라 양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교과서와 문제집이 두둑히 담긴 가방은 맞으면 꽤나 아플 것이었다. 있는 힘껏 가방을 휘두르며 송아라 양은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송아라?!?!! 동생을 알아본 오빠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송아라 양은 거의 몸을 던져 부딪히며 남자를 오빠에게서 밀어냈고, 으헉!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남자는 옆으로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같은 운동부원이어서인지 남자의 몸은 거의 벽이나 바위처럼 단단했다. 부딪힌 곳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송아라 양은 씨근거리며 두 다리를 딛고 넘어진 남자의 앞에 당당히 섰다.
“선배!!! 미친, 정대만 무릎!!!”
어……. 그런데 이건 뭐지.
오빠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남자에게 다급히 뛰어갔다. 아야야……. 넘어질 때 땅과 잘못 부딪혔는지 남자가 왼쪽 무릎을 감싸쥐고 있었다. 선배, 무릎… 무릎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송아라 양은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남자의 무릎을 감싸는 오빠의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야, 송아라!! 너 뭐하는 거야, 지금!! 이게 얼마짜리 무릎인 줄 알아?!”
오빠가 송아라 양을 돌아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인간 무릎 덕분에 뽑을 수 있는 점수가 몇 점인지는 아냐고?! 화를 내는 오빠의 모습에도 송아라 양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인데...? 송아라 양의 머릿속이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백색소음으로 물들었다. 야, 태섭아……. 그때, 무릎을 쥐고 주저앉아 있던 남자가 오빠의 이름을 불렀다.
“야, 넌……. 넌 나보다 내 무릎이 더 중요하냐…….”
“아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무릎이 있어야 선배가 3점을 던지지!”
“야! 너 나랑 사귀어, 내 무릎이랑 사귀어!”
누가 네 애인이야! 남자가 울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오빠와 송아라 양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던 자리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하고 거북한 침묵이 갑자기 세 사람을 감쌌다.
“…애인?”
송아라 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씨발……. 오빠는 욕을 하며 남자의 무릎에 그대로 얼굴을 박았다. 무너져 내린 오빠의 귀끝이 유니폼 색만큼 새빨개져 있었다.
“…집 근처까지 오는 건 그만둬요. 가족들이 보니까.”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왜 맨날 못 데려다 줘서 안달인 거예요. 선배 집 방향도 완전 반대면서. 태섭이 질린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절레절레 흔들리는 조그만 머리통을 내려다 보며 대만이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걸 어떡하라고.”
“학교에서 그러는 걸로도 부족해요?”
“당연히 부족하지, 너랑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선 백호며 태웅이며 방해 요인이 너무 많잖아. 아니, 그리고 강백호는 왜 그렇게 너한테 친하게 구는 거야? 남의 애인한테 찰싹 달라붙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걔는 동생 같은 애잖아요.”
“그냥 우리 사귀는 거 애들한테 얘기 하면 안 되냐?”
“그 얘기는 진작에 끝난 줄 알았는데요, 선배.”
태섭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정대만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연애 사실을 비밀로 한다. 처음 사귈 부터 했던 약속이었다. 새로운 북산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괜히 유일한 3학년 부원과 주장의 연애 사실을 밝히면 팀 분위기만 묘해질 것 같다는 태섭의 판단 때문이었지만, 대만은 항상 그 제한사항에 안달을 내곤 했다. 얼굴만 봐도 좋아 죽을 연애 한 달 차 커플이 눈치 보느라 스킨십도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는 항의가 매일 같이 빗발쳤다.
“나도 알아요, 내가 선배한테 그 부분 빚 진 거.”
그러니까 사람 다 나간 라커룸에서 선배가 나 덮쳐도 아무 말도 안 하잖아요. 태섭이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선배 때문에 옆구리에 멍 다 들었어요. 알긴 해요? 그전에는 사람 힘들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깊게 넣어서 배앓이하게 해놓고……. 그날 얼마나 고생했다고. 태섭이 그렇게 말하며 쏘아보자, 대만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민망한 얼굴로 턱의 흉터를 긁었다. 그만큼 좋은 걸 어떡하냐……. 괜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만 한다.
“어쨌든 지나간 일이니 됐고……. 가요, 선배.”
시간 늦었어요. 나도 들어갈 거고. 태섭이 어깨에서 가방을 고쳐멨다. 태섭이 인사를 했음에도 대만은 여전히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제 애인을 내려다 보았다.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대만을 보며 태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순순히 돌아갈 생각은 없나 보구만. 에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태섭이 제 가방끈을 잡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입술을 슬쩍 내밀자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간 쓸데없이 로맨틱한 것만 좋아해……. 굿바이 키스를 하지 않으면 사람을 안 보내주는 게 말이 되냐고. 대만이 태섭의 턱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키 차이의 각도에 맞게 고개를 조금 더 올려주고 다가올 입술을 기다리는데…….
“야, 이 나쁜 자식아!!!!!!!!!!!”
이 목소리는…… 송아라?!?!! 태섭이 기겁을 하며 눈을 떴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가방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여동생의 얼굴이 선명했다. 야, 잠깐!! 잠깐만!!! 태섭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상황은 이미 늦었다. 퍽! 송아라의 몸통박치기에 정대만이 장렬하게 나가 떨어졌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멀거니 서 있던 태섭은 데굴데굴 굴러가는 대만을 보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선배!!! 미친, 정대만 무릎!!!”
태섭이 꽥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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