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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그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우리는

某日 by 銘

水槽 - カペラ


 

정대만의 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온전히 닿아 오는 시선과 행복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이, 골라 내뱉는 단어가,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마저도 정대만이 송태섭을 마음 깊이 사랑함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사귄 지 1년도 안 된 연인을 지구 반대편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나절이 넘는 시차와 어마어마한 국제전화비를 감당하며 이쪽의 일정에 맞추어 일주일에 몇 번씩 걱정과 애정이 가득 담긴 연락을 해 오는 것만으로도 대만의 마음은 차고 넘쳤다. 그러다 어느 날은 부피 큰 상자에 여러 종류의 간식과 잘 마른 꽃잎, 편지 겸 일기로 가득 채운 두꺼운 노트 한 권, 풍경과 인물의 사진,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백사장의 모래 같은 것들이 국제소포로 부쳐져 왔다. 하나하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 고르고 골라 보낸 그곳의 소식이라는 걸 알았고, 상자에서 나오는 물건마다 태섭의 생각으로 채워져 있다는 걸 알았다. 노트 한가득 적힌 뜨거운 사랑의 표현을 몇 줄 읽어내리던 태섭은 그만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표지를 덮고 말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울렁이는 속을 전부 게워 냈다. 멀건 위액밖에 남지 않은 후에도 식도가 상하도록 목구멍을 헤집고 변기를 붙잡으며 헐떡였다. 그 후로 태섭은 지독한 체기에 물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며칠을 앓았다.

그래서 태섭은 잔뜩 해쓱해진 뺨으로 대만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냥 우리 헤어져요.”

선배의 사랑이 버거워요.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송태섭의 미국 유학 4개월 만에 1년을 갓 넘긴 두 사람의 연애는 끝이 났다.

해후 (邂逅)

1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스물을 갓 넘겼던 앳되고 풋풋한 청춘은 머리가 굵을 대로 굵어진 30대 직전의 청년이 되었다. 그사이 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태섭은 장학회와 연계된 프렙스쿨을 마친 후 그대로 미국의 대학에 진학했다. 저보다 최소 20cm는 더 큰 거인 같은 선수들을 앞에 두고도 담대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배짱이며 악착같이 노력하는 근성, 작은 체구를 보완하는 잽싸고 날랜 움직임 등을 좋게 평가받은 덕이었다. 거기에 4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체계적인 훈련으로 실력을 더욱 갈고닦아, 후순위긴 해도 무사히 드래프트까지 받는 데 성공했다. 그 후로 태섭은 단신의 아시안 선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쭉 미국에서 활동을 했다.

대만은 정석적인 에이스 코스를 밟았다. 농구 명문대의 1군 주전을 거쳐 선순위 드래프트로 국내 리그의 상위권 팀에 들어갔다. 천부적인 바스켓 센스와 재능을 타고난 올라운더는 프로 데뷔를 하자마자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스윙맨으로 자리매김했다. 팀 우승도 몇 번 이끌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만은 국내 농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유명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일이 일어나는 동안 대만과 태섭은 한 번도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뿐만 아니라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태웅과 백호조차 일부러라도 귀국해 참석하곤 하는 북산 농구부 모임에서도 태섭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귀국 자체도 거의 하지 않는 데다가 간간이 국내에 들어올 때조차 가족들과만 시간을 보내거나 한 번에 두셋 정도와만 만나고 말았다. 온갖 야유와 성화를 이기지 못해 태섭이 어쩔 수 없이 단체 자리에 나갔던 날에는 대만이 다른 이유로 불참했다. 겹치는 지인들이 한둘도 아닌 데다가 둘 다 여러 의미의 유명인이라 어쩔 수 없이 간간이 전해 듣는 소식 외에는 서로의 근황을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의 통화가 그들의 마지막 접점이었다. 서로의 연락처는 그저 휴대폰 한구석에 남겨진, 존재하기만 할 뿐인 무언가였다. 그마저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최신식 기계 안에서도, 기억 안에서도. 

사실 연락을 해도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20대 초반에 몰아쳤던 여러 감정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과 함께 금방 스러졌기 때문에. 껄끄러움도 거북함도 슬픔도 버거움도 정열적이었던 사랑과 미련도 삭아 바스러지는 종이처럼, 햇빛에 날아가는 잉크처럼 전부 흐려졌다. 그럼에도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내 온 것은 이제는 그저 관성이었다. 연락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후에도 하지 않았을 뿐이고 만나지 않게 되었으니 계속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고, 완전히 결말 난 오래된 관계를 어떻게든 다시 이어 붙이려 애쓰기엔 그들은 이미 각자의 길을 너무 오래 걸었고 현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 리그를 은퇴하고 국내로 복귀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에도 태섭은 정대만에 대한 걱정 따위는 일절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사라진 연락처처럼 그의 존재도 태섭 안에서 거의 잊힌 채였다. 잠결에 문득 뇌 한구석 어딘가에서 ‘아, 그러고 보니 국내 들어가면 정대만 봐야 할 수도 있겠네,’ 정도의 생각이야 잠깐 들었지만 심각한 고민은 아니었기에 뇌리에서 금방 사라졌다. 정말로 대만과 다시 마주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 상황이 절대로 옛날 연인으로서의 구질구질한 무언가가 될 리는 없을 것이었다. 같은 종목 선수이자 졸업 후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선후배로서의 담백하고 깔끔한 흔적밖에 남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안 그래도 몇 년 동안 지속해 온 미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는 데만도 지나치게 바빠 태섭에게는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고려할 겨를조차 없었다.

정대만은 더 이상 송태섭에게 아무런 우선순위도 중요사항도 되지 못했다.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태섭은 정신이 없었다. 출국 전날까지도 거주하던 집을 파는 일 때문에 밤늦게까지 계약서와 씨름을 한 데다 본가로 미리 부쳤던 짐 두어 가지가 분실되는 바람에 며칠째 운송사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싸웠기 때문이었다. 와중에 에이전시에서는 비행시간 동안 한번 살펴보라며 국내 10개 구단의 특징과 운영 현황, 먼저 컨택이 온 구단들의 제안 조건이 담긴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리가 더 포화 상태가 된 태섭은 제대로 서류를 보지도, 그렇다고 깊은 잠을 자지도 못한 채 열몇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각종 스트레스와 피로에 찌든 상태로 공항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반쯤은 몽롱하고 반쯤은 곤두선 정신은 마치 꿈속을 걷는 기분이 들게 했다. 땅을 딛는 발바닥과 제 옆을 스쳐 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지나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눈을 반쯤 뜬 채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여 제가 나가야 할 게이트로 향하던 태섭은 시간에 늦었는지 정신없이 뛰어가던 누군가를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강하게 부딪치고 말았고,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그만 손에서 놓쳤다. 대차게 튕겨 나간 휴대폰은 다른 사람의 발에 차이고 캐리어에 부딪히며 손쓸 새도 없이 2층 난간 아래로 장렬하게 추락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태섭이 헐레벌떡 뛰어갔을 때는 이미 선명하게 금이 가고 깨져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는 기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태섭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먹통이 된 휴대폰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항에 아직도 공중전화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ATM에서 현금을 찾고 그것을 더 작은 단위의 지폐로 바꾸고 교환기에서 또 동전으로 바꾸는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태섭은 도착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에게 무사히 연락해 제 안위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휴대폰을 떨어뜨려 집에 갈 때까지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에 아라는 대체 공항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어이없어했다.

“하여튼 알았어, 빨리 와. 엄마가 송태섭 온다고 어제부터 맛있는 거 잔뜩 해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맛만 좀 보자고 해도 오빠 오면 같이 먹자고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스물을 훌쩍 넘겼어도 변함없이 맹랑하고 친근한 여동생의 말투에 태섭은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가볍고 경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야. 빨리 갈게.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중간에 전화…… 아참, 오빠 휴대폰 작살났댔지. 몰라, 아무튼 알아서 해!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아라는 엄마와 함께 시간에 맞춰 공항버스가 도착하는 곳까지 태섭을 마중하러 나왔다.

“아들 온다고 어제 늦게까지 이것저것 하셨다면서 뭐 하러 나오셨어요, 그냥 쉬시지. 택시 타면 충분히 혼자 들어갈 수 있는데.”

엄마의 애정 가득한 포옹을 받으며 태섭이 머쓱하게 내뱉은 말에 아라가 옆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이런 특별대우는 오늘이 마지막이거든.”

오빠가 아무리 근육 울퉁불퉁한 운동선수라 해도 그걸 혼자 다 들고 오긴 벅찼을걸. 그러니까 그런 맥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데리러 나와줬으면 그냥 얌전히 ‘감사합니다.’ 하라는 거야. 태섭의 이름표가 달린 커다란 캐리어 세 개를 가리킨 아라가 언젠가의 태섭처럼 눈을 가늘게 접으며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세 가족은 캐리어를 하나씩 끌며 사이좋게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태섭의 연봉이면 진작 더 좋은 집을 얻는 데 보태고도 남았으나, 그가 국내로 완전히 돌아온 후 상황을 보고 이사해도 늦지 않다는 가족들의 의견 아래 그들은 아직도 처음 얻었던 5층짜리 맨션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오랜 추억과 기억이 켜켜이 쌓인 두 번째 터전은 2년 전 태섭이 마지막으로 귀국했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제가 쓰던 방에 캐리어를 내려놓으며 태섭은 조금 감상에 젖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다 치우지 못한 아라의 물건이 조금 남아 있는 걸 제외하면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막 이사 왔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오랫동안 생활하던 곳을 떠나 여기로 온 건 마찬가지이니 그때와 상황까지 똑같다고 볼 수 있으려나. 책상이며 벽지를 가만히 만져보던 태섭의 등 뒤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먼지 냄새 나는 종이 상자를 하나 내려놓은 아라가 손을 탁탁 털었다. 뒤돌아본 태섭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뭔데?”

“오빠 예전 물건들 정리해 놨던 상자. 예전에 쓰던 휴대폰도 여기 있으니까 한 번 켜지나 보라고. 주말이라 당장 사러 나가지도 못하니까.”

오빠 에이전시에 도착했다고 연락은 해야 할 거 아냐? 유심만 끼워서 써. 적어도 주말만이라도. 아라의 일리 있는 말을 들은 태섭은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그 안을 뒤적였다. 잠시 후 태섭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거의 5, 6년 전에나 쓰던 오래된 기계였다. 이거 켜지기는 하려나. 지금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기계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태섭이 ‘송아라!’ 동생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왜! 바깥에서 아라가 소리쳐 대답하자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공기계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핀 예전 건데. 집에 옛날 충전기 있어?”

“흠……. 그건 나도 봐야 할 거 같은데. 내가 버린 적은 없는데 엄마가 버리셨을 수도 있어서. 한 번 찾아볼게.”

“부탁한다.”

조금 뒤, 거실과 안방 서랍을 한바탕 뒤집어엎는 소리가 겨우 멎고 나서야 아라가 기다란 검은 선을 방문 너머로 내밀었다. 여기 있지롱. 충전선을 받아들어 콘센트에 꽂으면서도 태섭은 이 오래된 휴대폰이 제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기계는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빨리 고장이 나니까. 에이전시에 연락하는 것도 문제지만 안 선생님을 통해 소개받은 모 구단의 관계자와 내일쯤 한 번 전화로 인사를 나누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섭은 초조한 눈으로 건전지 모양이 뜨는 검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170 초반의 단신 선수가 농구의 본토에서 준주전급으로라도 오래도록 인정받고 신뢰받으며 뛰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닌 만큼 태섭이 미국에서 한창 활동할 때도 국내 관계자들이 그를 꾸준히 탐내 왔다. 그러니 송태섭이 미국 리그를 은퇴하고 국내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각 구단에서 앞다투어 계약을 맺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이 관계자도 그런 목적으로 태섭의 옛 은사인 안 선생님을 통해 그에게 접촉해 온 것이었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시간을 가지며 천천히 팀을 고를 생각이었던 태섭은 귀국하자마자 예의 차린 비즈니스 통화를 할 생각에 작은 두통을 느꼈지만 안 선생님의 소개를 거절할 수는 없어 싫은 티가 나는 한숨만 혼자 내쉬었다. 말이 너무 길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충전을 기다리며 태섭은 손톱 끝으로 방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다행히 휴대폰은 무사히 충전되었다. 무한재부팅의 굴레에 빠지거나 유심 오류가 나지도 않았고 인터넷 연결도 잘 됐다. 아라와 함께 테스트해 보니 전화도 잘 들렸고 문자도 잘 들어왔다. 여러 앱 실행에도 이상이 없었다. 오래된 기계의 문제인 발열과 빠른 배터리 소모는 어쩔 수 없었지만 바깥을 오래 돌아다니며 쓸 건 아니었으니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켜지 않은 것치고는 제법 무난한 성능이었다.

“이 정도면 주말까진 충분히 쓸 수 있겠네.”

“주말까지가 아니라 그냥 한 2년 더 써도 되겠는데? 요즘 기곗값도 비싼데 돈도 아낄 겸 새로 사지 말고 그냥 이거 써라, 오빠야.”

“내가 휴대폰을 네 돈으로 사냐? 내 돈으로 사지.”

“그러니까 이제 연봉 줄어들 일만 남은 송태섭 돈 걱정해 주는 거잖아. 얼마나 사려 깊고 착한 동생이게요~”

“까분다, 송아라.”

의미 없는 옥신각신이 한바탕 오갔다.

어쨌든 연락 수단을 무사히 쟁취했으니 이제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김에 태섭은 심부름 하나를 자청해서 맡았다. 엄마가 수선 맡긴 옷을 찾아오고 아라가 먹고 싶어 하는 간식거리를 사 오는 가벼운 임무였다. 들고나온 지갑과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 푹 꺼지는 무게감에서 익숙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게 참 우스웠다. 어릴 땐 이런 거 없이도 별문제 없이 잘 살았는데 말이지……. 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태섭은 손끝에 잡히는 묵직하고 네모난 기계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기술의 발전이 뭐길래 이 작은 기계 하나가 없어졌다고 이렇게 불안해해야 하는지. 지금이야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지만 막상 없는 채로 살아야 한다면 또 어떻게든 살 거면서 말이야.

마치 어린 시절의 인간관계처럼.


“○○○호 아들 맞지? 미국에 농구하러 갔다던.”

수선집 아주머니는 태섭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학생 때 교복이나 여러 옷의 기장을 줄인답시고 자주 들락거리긴 했지만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도 아직도 얼굴을 기억하고 계신 게 신기했다. 태섭의 기억보다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아주머니는 엄마가 맡긴 옷을 챙겨주면서 태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많이 컸네. 어른이 다 됐어.”

“어른이라뇨, 아주머니. 저 조금만 더 있으면 서른이에요. 여동생도 20대 중반이고요.”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나? 너도 그렇지만 엄마랑 딸도 얼굴이 크게 안 바뀌니까 매번 봐도 나이를 모르겠어. 어쩜 그렇게 집안사람들이 다 동안이야?”

때마침 일거리를 다 끝내 무료했던 모양인지 아주머니는 태섭을 붙잡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입담이 좋은 것은 만국 공통인지, 제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동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하도 맛깔나게 들려주시는 바람에 태섭도 예의상 맞장구를 치다 말고 어느새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꽤 지나도록 가게에 앉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섭은 다른 손님이 수선거리를 가져온 뒤에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라가 먹고 싶다고 한 간식은 인기가 많다는 말이 맞긴 했는지 들르는 곳마다 재고가 없었다. 네 번째 편의점에서도 허탕을 친 태섭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엄지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냥 포기하고 들어갈까. 편의점을 찾고 찾다 어느새 옆 동네까지 넘어온 참이었으니 이것 하나 때문에 더 멀리 나가봤자 다시 돌아가는 길만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편의점을 네 곳이나 돌았는데도 재고가 없었다면 아라도 충분히 이해해 줄 터였고. 하지만 오랜만의 오빠 노릇을 제대로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기는 있어, 태섭은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곳만 더 가보기로 했다. 이 근처에 편의점 또 있나요? 점원이 알려준 위치를 되새기며 태섭은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행히 다섯 번째의 편의점에는 재고가 조금 남아 있었다. 다시는 송아라가 제게 심부름을 시킬 수 없게 있는 걸 모조리 산 태섭은 검은 비닐봉지를 달랑이며 택시를 잡았다. 아무리 40분 내내 코트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데 이골이 난 운동선수라 해도 아드레날린이나 도파민 없이 몇 km를 걷고 나니 꼼짝도 하기 싫을 만큼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제대로 자지 못한 것까지 더해서, 택시를 타고 오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태섭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깜빡 졸았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기사님의 말에 화들짝 놀라 깬 태섭은 대금을 치르고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그 와중에 수선집에서 찾아온 옷을 두고 내릴 뻔해 기사님이 그를 한 번 불러세우기까지 했다. 오늘 묘하게 정신이 없네. 저를 내려준 택시가 떠나는 걸 잠시 지켜본 태섭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짐을 갈무리했다. 대충 움켜쥐느라 그새 흐트러진 옷을 공중에서 최대한 반듯하게 접으며 발을 옮기던 그때였다.

“송태섭!”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갑자기 제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태섭은 저 멀리, 단지 한가운데에 장승같이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태섭이 그 자리에 멈춰서자 남자는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며 곧장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태섭은 남자의 모습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바지춤에서 삐져나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며 땀범벅이 된 이마, 시뻘게진 얼굴과 잔뜩 물어뜯어 너덜너덜해진 입술 따위를 하고 바로 앞까지 뛰어온 남자는 태섭의 어깨를 붙잡더니 그를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몸 구석구석을 정신없이 살펴댔다. 당황한 태섭이 꽥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손을 제 몸에서 떨쳐냈다.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너……. 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별일 없는 거 맞아?”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다짜고짜 달려와서는!”

“괜찮냐고 묻잖아!”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지나치게 멀쩡하니까! 아니, 사람 그냥 수선집이랑 편의점 다녀왔더니 갑자기 뭔데, 이게? 정대만 정신 나갔어요? 남의 집 앞에 다짜고짜 와서는 뭐 하는 거야?”

“다행…… 다행이다.”

팔팔한 반응을 보고 안도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대만이 태섭의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저보다 한참이나 낮은 어깨에 이마를 묻은 대만이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대만이 팔을 들어 태섭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끌어안긴 태섭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나 말거나 대만은 그렇게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놔주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달래서 카페로 데려가고 난 뒤에야 태섭은 대만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대만의 휴대폰에는 태섭의 이름으로 도착한 SOS 메시지와 위치가 담긴 지도, 5초 남짓한 의미불명의 소리가 녹음된 파일이 도착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태섭은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하며 대만에게 다시 휴대폰을 밀어주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휴대폰을 공항에서 떨어뜨려서 한참 전에 쓰던 걸 임시로 꺼냈는데……. 그게 바지 주머니에서 뭐가 잘못 눌렸나 봐요.”

난 내 휴대폰에 그런 기능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네. 여동생이면 모를까 이쪽이 쓸 일이 있어야 말이죠. 머쓱하고 민망한 기분을 해소하고자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을 뱉었다. 아까는 대만이 하도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태섭까지 경황이 없어 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분위기가 좀 진정되고 나니 이런 식으로 옛 연인과 오랜만에 재회한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고 곤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 걱정해서 와 준 사람 바로 가라고 하기도 뭐하긴 했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태섭은 이렇게 된 이상 커피만 후딱 마시고 빨리 자리를 파하자고 생각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어느새 커피를 반쯤 쭉쭉 빨아 마신 태섭과 달리 대만은 제 앞에 놓인 음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돌이라도 된 것처럼 자세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휴대폰만 가만히 내려다보던 대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옛날 비상 연락망이 아직도 나였을 줄은 몰랐다.”

태섭이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천천히 시선을 든 대만이 태섭을 건너다보았다.

“문자 받자마자 정신없이 전화를 돌렸어.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서 누구라도 상황을 알 만한 녀석이라면 전부 찾아서 연락했다. 우리가 연락이 끊긴 지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나한테까지 이런 문자가 올 정도면……. 절대 허튼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

다짜고짜 전화해서 송태섭이랑 오늘 만난 사람 있냐고 횡설수설하니까 다들 미친놈 대하는 반응이긴 했는데. 대만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가 하도 그러니까 치수가 너희 집 아직 이사 안 갔으니 그렇게 걱정되면 한번 가보라고 하더라. 그거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뛰쳐나오긴 했는데…….”

대만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입술을 잘근거리기만 했다. 제가 무슨 식으로 호응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태섭 역시 서먹하게 침묵만을 지켰다. 그렇게 십 분 넘게 이어지던 불편하고 어색한 정적 끝에 대만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나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몇 년 동안 얼굴도 안 봤으면서…….”

“…….”

“하여튼 놀라게 해서 미안해.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고.”

오랜만에 본 사이에 제일 먼저 해야 했을 대사가 이제야 흘러나왔다. 입을 다문 대만이 유리컵을 집어 조용히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차분하게 평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태섭의 컵은 거의 비고 대만의 컵은 반쯤 줄어들 때까지 묵묵한 침묵이 다시금 이어졌다.

“미국 생활 그만두고 들어온단 얘기는 들었다. 기사도 많이 뜨던데.”

이번에도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대만이었다. 가볍게 꺼내진 근황 이야기에 태섭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네. 얘기 많이 나오더라고요.”

“지금 들어온 게 완전히 들어온 거고?”

“네. 완전히 들어왔어요. 오늘 아침 비행기로.”

“그래……. 그러면 자주 보겠네.”

어쩌면 그냥 자주 보는 정도가 아니라 더한 게 될 수도 있겠고. 우리 감독님이 너 눈독 많이 들이고 계시거든. 너 꼭 데려오고 싶다고 구단에 여러 번 이야기하신 것 같더라. 창밖을 쳐다보던 대만이 태섭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옅게 웃었다.

그거야 태섭도 알고 있었다. 두툼한 서류 봉투에 담겨있었던 제안서의 첫 순서가 바로 대만의 팀이었으니까. 에이전시에서도 대만의 팀이 꽤 적극적으로 접촉을 해오고 있음을 넌지시 귀띔해 주기도 했었고, 계약 조건 역시 태섭의 예상보다 더 좋게 제시하기도 했으니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제 막 귀국한 만큼 아직은 정해진 것도 마음 가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건…… 아직 생각해 볼 일이지만요.”

“나도 이 자리에서 영업하려는 건 아니었어. 선택은 어차피 네 몫이고, 다른 팀들도 다 좋은 곳이니까. 예전처럼 너랑 호흡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이야 많이 들지만……. 뭐, 그것도 내가 위대한 송태섭 선수에게 선택받아야 가능한 일 아니겠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를 풀려는지 대만이 능글맞게 넉살을 부리자 태섭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가 그런 소리를 다 할 줄 아네요. 많이 사람 됐다. 야, 나는 선수로서 한 번도 널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그랬어요? 농구하는 거 꼴 보기 싫다고 다 부수러 왔었던 양반이? 야이씨,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과거 이야기가 나오자 비로소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서먹함을 푸는 방법은 역시 추억팔이다 이거지. 그 사건을 첫머리로 북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 두 사람의 테이블에서는 거의 1, 2분에 한 번씩 커다란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도 서로가 절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는 서태웅과 강백호나 북산 농구부 모임에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고함을 치는 채치수처럼,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이야기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친밀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같았다.

“밥이라도 먹을래요? 내일이나……. 뭐 조만간에.”

그래서 카페를 나왔을 때 태섭은, 다소 충동적이긴 했지만, 대만에게 그렇게 제안할 수 있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대만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그래도 되냐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될 건 또 뭐예요?”

“아니, 그냥…….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

말이 좀 생략되고 반복되긴 했지만 대만이 뭘 신경 쓰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사실 태섭도 걱정하던 사안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태섭은 이제 와 과거를 의식해 피하는 것 자체가 더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대만과 한 팀이 되든 되지 않든 한 공간에서 활동하게 된 이상 싫으나 좋으나 계속 얼굴을 보게 될 사이였으니까. 그러니 괜히 흔적밖에 남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불편할 빌미를 남겨둬서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태섭은 언젠가의 별명이었던 ‘돌격대장’답게 대만과 저 사이의 장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에 뛰어넘었다.

“그래도 되니까 날이나 잡아요. 언제가 편해요?”

2

약속은 다음 날 점심으로 잡혔다. 갈 곳도 대략 정해졌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 연습이 끝나고 종종 저녁을 먹던 카레 집이었다. 그 가게가 아직 있다고 하자 태섭이 거기를 가고 싶다고 곧바로 내뱉은 덕이었다. 그 말을 들은 대만은 너는 몇 년 만에 귀국해서 사달라고 하는 게 고작 그 정도냐며 한참을 어이없어했지만, 어쨌든 요청에 따라 순순히 그를 가게에 데려가 주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여길 오랜만에 다 와본다.”

졸업하고는 정말 올 일이 없었으니까. 가게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인 간판을 올려다보며 대만이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온 것인데도 가게는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마치 이곳만 세월의 흐름이 비껴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의 흰머리와 주름이 더 늘고 그들과 동년배였을 아들이 훌쩍 큰 모습으로 아버지를 돕고 있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시간여행을 한 걸지도 모른다 착각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고등학생 때 으레 앉던 창가 두 번째 자리에까지 앉게 되자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인테리어만 안 바뀐 줄 알았더니 메뉴도 거의 안 바뀌었네. 메뉴판을 훑어 내려가던 대만이 한 곳을 짚었다.

“너 기본 맵기 비프카레에 가라아게 토핑이지? 그거 좋아했잖아.”

“뭐야, 그게 기억이 나요? 나는 지금 메뉴판 보면서도 그때 뭐 먹었더라, 하고 있었는데.”

“네가 오죽 먹었어야지. 여기 오면 사장님이 네 주문은 받지도 않았잖아, 맨날 똑같은 것만 먹으니까. 뭐, 너는 카레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웬만하면 늘 먹는 것만 먹었지만.”

“말 듣고 보니 기억난다. 예전에 그랬었죠. 먹는 것만 먹는 건 지금도 비슷해요.”

“그러면 네 건 비프카레에 가라아게로 시킨다?”

“네네. 아, 저 토핑 가라아게 말고 고로케로 바꿀게요. 증량한다고 고기 그동안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지겨워요. 그리고 맵기는 기본 말고 1단계… 아니다, 2단계로요.”

“2단계? 너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아. 예전엔 잘 못 먹었는데, 미국에서 뛸 때 친했던 선수 중에 멕시코 출신인 친구가 하나 있었거든요. 리키라고. 대학도 같이 다니고 소속팀도 지역이 같아서 가까이 살았어요. 그래서 걔 덕분에 좀 많이 먹어서 단련이 됐달까요. 한 번 맛 들이고 나니까 그 후로는 먼저 찾아 먹게 되더라고요.”

“…그랬냐.”

최종 주문은 고로케를 추가한 2단계의 비프카레와 소시지를 추가한 1단계의 치킨카레였다. 주문을 하고 나자 태섭은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추억여행이라도 하는지 감회에 젖은 눈으로 공간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주방에서 들리는 지글지글 소리에 귀를 잠시 기울이기도 했다. 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내부 구경을 하던 태섭이 멋쩍게 시선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사람 앞에 앉혀두고 혼자 이래서 미안해요. 하나도 안 바뀐 게 신기해서.”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신기한데.”

“참, 아까 말한 멕시코 친구요. 우성이랑도 친하거든요. 대학 때는 정우성이랑 저랑 같이 살았으니까 저 보러 왔다가 정우성이랑도 안면 튼 케이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정우성 2년이나 먼저 미국에 있었는데도 영어 잘 안 늘어서 리키랑 얘기할 때 말 조금만 길어지면 제가 통역해 줘야 했던 거? 나중엔 리키가 답답했는지 자기가 먼저 한국어를 배우더라고요. 그래서 셋이 대화할 때면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다 섞어서 이상한 대화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우성이가 동부에서 뛰고 있으니 우리랑 컨퍼런스가 달라서 잘 보지도 못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셋이 노는 것도 꽤 재밌었는데 말이에요…….”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태섭은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의 이야기를 대만에게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정우성을 제외하면 전부 정대만이 모르는 이름에 정대만이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고 정대만이 들어본 적 없는 일화였다. 정대만이 사라진 후의 시간이,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송태섭의 삶이 그 자리에 하나둘씩 펼쳐졌다.

대만은 묵묵히 태섭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뒷이야기를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외에는 큰 반응이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외의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태섭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기분이 완연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앉아 있는 장소와 주변의 환경은 그들이 한참 어울려 다니고 사랑을 나누던 시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는데 눈앞의 태섭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키가 자라고 체격이 더 좋아진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대만은 맞은편의 남자가 너무도 낯설다고 생각했다.

사귀던 시절, 대만은 태섭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학교와 집 때문에 강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 외에는 모조리 태섭과 함께하고자 했다.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면 메시지나 전화로라도 이어져 있으려 했다. 그때마다 태섭은 집착하는 스토커 같다며 질려했지만 대만은 좋아하니까 당연하지 않으냐고 뻔뻔하게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태섭의 일상을, 일거수일투족을, 작은 머리통에 들어찬 생각을 전부 제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정대만은─과장을 조금 보태자면─태섭의 집에 수저가 몇 벌이고 월간농구 잡지는 몇 권인지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대만 본인도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놀랄 정도의 소유욕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의 태섭은 대만이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가 태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기사로 보도되는 이야기와 농구선수로서의 업적이 전부였다. 농구계 관계자들이 아는 딱 그 정도였다. 송태섭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했고 누구와 어울렸는지, 무엇을 먹고 뭘 하며 놀았는지, 머나먼 타향에서의 외로운 밤을 어떻게 견뎠는지, 매일매일 한계에 도전해야 하는 기분이 어땠는지 같은 것들은 하나도 몰랐다. 이전이었다면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제게 털어놓게 했을 이야기들이었지만 태섭이 이별을 고한 후로 완전히 남남이 된 대만에게는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만은 지금의 태섭을 마주하는 것이 다소 힘겨웠고, 어쩌면 조금은 비참했다. 완전히 달라진 스물여덟의 송태섭은 8년간 켜켜이 쌓아 온 송태섭 혼자만의 시간을, 정대만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을 나타내는 증거 그 자체였기에. ……그래도 시간 지나면서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대만은 태섭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숭숭한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밥과 카레를 더 요청해 받아먹기까지 한 태섭과 달리 대만은 음식을 조금 남겼다. 대만이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는 걸 본 태섭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가 웬일이에요? 입맛 없어요?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침을 좀 늦게 먹었더니 배가 금방 차서.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를 20년 넘게 지속해 온 사람이 내뱉기엔 궁색한 변명이라 생각했지만 태섭은 별생각이 없었는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그릇으로 눈을 돌렸다.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대만은 식사에 열중하는 태섭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른 다 됐네, 송태섭. 대만이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밥을 먹었으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자는 태섭의 말에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오후에 일정이 있어서 금방 가봐야 해. 앉아봤자 30분도 못 있고 일어나야 할 거야. 의례적인 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섭은 아쉽다고 대답했다. 대만은 아쉽긴 해서 다행이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스커피를 두 잔 사 들고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어제 그렇게 떠들고 오늘은 밥까지 먹은 것치고는 돌아가는 길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다시 서먹해진 분위기에 태섭이 연신 이쪽을 흘끔대는 게 느껴졌지만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섭이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말을 쉽게 붙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은 대만도 같았으니까.

누군가 보았다면 근황 얘기 같은 걸 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만은 제게 태섭의 근황을 물을 자격이 있는지, 아니, 송태섭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할 자격이 있는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헤어질 당시의 태섭은 대만이 버겁다고 했다. 송태섭에게 모든 마음을 쏟아부을 뿐만 아니라 송태섭도 똑같이 그래 주길 바라는, 정대만에게 전부 내어주고 보여주고 의지해 주길 바라는 그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힘 빠진 목소리로 들려오는 고백에 대만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사랑하기에 행했던 것들이 도리어 사랑하는 사람의 숨통을 옥죄어 버리는 꼴이라니. 세상에 이토록 모순적인 일이 또 있을까. 태섭이 원하는 대로 그를 놓아준 것은 그래서였다. 사랑하는 것을 제 손으로 부수는 일은 한 번이면 족했으니까. 그날 대만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그래서 대만은 제가 던지는 질문들이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를 불러올까 봐 두려웠다. 태섭을 강제로 헤집는 일이 될까 봐 무서웠고 또 제게서 멀어지게 할까 봐 겁이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불씨가 송태섭을 마주하고 다시금 생명력을 얻기 시작한 지금, 그러니 태섭의 앞에서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길을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태섭의 집 앞이었다. 단지 입구까지는 거리가 좀 남았으나 태섭은 발을 멈추고 대만 쪽으로 뒤돌아섰다.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웠어요. 오늘 밥도 잘 먹었고요.”

“비싼 것 사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제가 먹고 싶다고 했던 거잖아요.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면 되니까 선배도 그만 가요. 뒤에 일정 있다면서요.”

요즘 길거리에 쓰레기통도 없던데 컵 버릴 데 없으면 저 주시고요. 제가 집에 가져가서 버릴게요. 태섭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만은 컵을 건네주는 대신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1시 반. 2시 반까지는 넘어가야 했으니 태섭의 말대로 이쯤에서 얼른 가기는 가야 했다. 하지만 대만의 입에서는 ‘그래야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미적이며 입술만 달싹이던 대만은 한참 만에 인사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너 시간 되는 날 밥 한 번 더 먹을까.”

예? 예상치 못한 말에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는 오늘 같은 추억의 음식 말고 비싼 거 먹자. 너 귀국한 기념으로.”

“어…….”

“나랑 단둘이 먹는 거 좀 그러면 다른 애들 불러도 돼. 아니면 북산 모임 한 번 더 하지, 뭐. 간사는 권준호지만 걔도 얘기 들으면 분명 좋다고 할 테니까.”

다소 다급하게 덧붙여진 말에 태섭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뭐, 준호 선배도 오래 못 보긴 했죠……. 그래? 그럼 시간 언제 돼? 너 되는 날 집어주면 내가 준호한테 연락해 놓을게. 대만이 곧바로 휴대폰 달력을 켜며 물었다. 어차피 지금 휴식기라 날짜는 딱히 상관없긴 한데요. 태섭이 머쓱하게 대답하자 대만이 한 번 더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래도 제일 괜찮은 날짜 몇 개만 골라줘. 진짜 상관없는데……. 그럼 이날이랑 이날이랑요……. 음, 이날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 시간만 된다면.

그렇게 날짜 후보를 받아낸 대만은 그 자리에서 곧장 준호에게 메시지 전송까지 마쳤다. 그제야 휴대폰을 집어넣는 대만을 보며 태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 추진력은 여전하네요. 뭐, 어쨌든 날짜 알려줬으니까 이제 됐죠? 들어가요, 얼른. 일정 늦는다. 나도 들어갈 거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대만을 재촉했다. …그래, 가야지. 겨우 꺼내어진 대답을 들은 태섭이 빙긋 웃었다. 오늘 재밌었어요. 놀랍도록 산뜻하고 담백한 어조에 대만은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상이야 진작부터 했었다.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북산 부원들을 만나러 오지 않으려는 건 누가 봐도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정대만 때문일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먼저 이별을 고한 게 저쪽인 이상 태섭이 그 후로도 여전히 저를 마음에 품고 있을 가능성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만도 제 마음에서 태섭을 내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일렁이는 사랑을 억지로 누르고 강제로 죽였다. 그러다 보면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스러질 줄 알았고, 그저께까지만 해도 노력이 성공한 줄 알았다.

태섭의 이름으로 도착한 SOS 문자를 보고 정신없이 뛰쳐나왔던 것은 단순히 과거의 접점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를 걱정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설마’ 하는 두근거림 때문이기도 했다. 그 녀석이 위기 상황에서 날 떠올렸다는 건, 어쩌면, 혹시나, 만약에……. 하지만 지금의 태섭을 보고 대만은 느낄 수 있었다. 스물여덟의 송태섭은 정대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대만은 씁쓸하게 웃었다.

“태섭아.”

8년 만에 부르는 호칭이었다. 다정한 부름에 태섭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가기 전에 미국에서 잘 뛰고 온 대견한 후배 한 번만 안아보자.”

대만이 두 팔을 벌렸다. 갑자기 포옹을 하자는 말에 태섭의 눈썹이 서서히 짝짝이가 되는 게 보였다. 대체 뭔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서 대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못 숨기는 건 고등학생 때랑 똑같네. 대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태섭을 먼저 안았다. 키도 자라고 몸도 커졌지만 태섭은 여전히 한 품에 다 안길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마치 그곳이 제자리인 양, 대만의 품에 딱 들어맞았다. 그 사랑스럽고 슬픈 안정감을 느끼며 대만은 가만히 눈을 감고 태섭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들어가라.”

그리고 대만은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담담하고 조용한 발걸음이었다.

3

집에 돌아와 다 마신 커피 컵을 버리고 있을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물소리 사이로 누군가 열쇠를 철컥인다 싶더니 곧이어 현관 쪽에서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온 모양이었다. 왔어? 목소리를 크게 하며 맞아주자 안쪽으로 들어온 아라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태섭의 등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태섭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누구였어?”

“뭐가?”

“아까 오빠랑 얼싸안고 있던 사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발뺌할 생각은 마라. 오다가 다 봤으니까.”

“…대만 선배.”

태섭이 떨떠름하게 내뱉은 대답에 아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흐응. 의미 모를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더니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헤어진 거 아니었어?”

“헤어진 거 맞아.”

“그런 것치고는 꽤 애틋해 보이시던데요. 두 분.”

“애틋은 무슨……. 그냥 대만 선배가 미국서 잘 뛰고 온 후배 대견하니까 안아보자고 해서 그런 거야.”

“뭐야, 할아버지세요? 나 지금 정대만이 송태섭 낳은 줄?”

“누가 누굴 낳아? 그런 끔찍한 소리 장난으로라도 하지 마라.”

“다시 만나게?”

아라의 질문에 태섭이 순간 손을 멈췄다. 동생의 예리한 시선이 등 뒤에 똑바로 꽂히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잘근대던 태섭은 이내 물을 끄고 다 씻은 플라스틱 컵을 재활용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몰라. 딱딱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몰라? 아라가 기가 찬 어조로 되묻더니 아예 식탁 의자를 하나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No’가 아니라 ‘몰라’인 걸 보니 오빠도 생각 없는 건 아닌가 보네?”

태섭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건조대에서 컵을 하나 꺼내 찬물을 내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라가 콧방귀를 뀌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태섭은 아라에게서 다시 등을 돌렸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다시 만나고 어쩌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야. 태섭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아라가 한 번 더 조소했다. 반쯤 비운 컵을 내려놓은 아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뭐,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건 오빠가 정대만 씨랑 알아서 할 일이니까.”

그대로 발소리가 멀어지고 안방 문이 닫혔다. 태섭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비척비척 발을 옮겨 아라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거운 손길로 제 뒷덜미를 문지르며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야 대견한 후배네 어쩌네 했지만 저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정대만이 아직도 송태섭을 사랑한다는 것이야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어깨를 끌어안은 팔과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길에서도 차마 다 숨길 수 없었던 감정이 넘치도록 묻어났다. 거기에 대고 남사스럽게 무슨 포옹이냐고 한마디를 해주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안겨만 있다가 뒤돌아서는 정대만을 그대로 보낸 건, 너른 가슴에 안기자마자 죽어버린 줄 알았던 제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익숙하고 벅찬 두근거림은 거의 절망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정말로 예전의 감정 따위는 다 흐려진 줄 알았다. 8년 전에는 제 입으로 이별을 고해놓고 뒤에서는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까. 대만을 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정대만과 다시 마주쳤을 당시의 껄끄러움이나 어색함도 감정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거야 오랜만에 만난─심지어는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것도 아닌─사람한테 다짜고짜 그렇게 휘둘리고 끌어안기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이었을 테니 참작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 대만과는 이전의 친했던 지인과 간만에 다시 만나 추억을 이야기하고 근황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흔한 사회인 관계로 끝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만의 품에 안기는 순간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었다.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자신을 안아주는 팔이 너무나 편안하고 따스해서 그대로 울어버리고 싶었다. 긴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온기였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아 뒤돌아서는 대만의 등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매달릴 뻔했다. 순간적으로 뻗어나갔던 손을 놀라 거두며 태섭은 불현듯 깨달았다.

나 아직 정대만을 완전히 지워낸 게 아니었나 봐. 그저 억지로 묻어두고 잊으려 했을 뿐, 사실은 그 사람의 사랑이 그리웠나 봐.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대만 선배한테 마음이 남아 있었나 봐. 두 손에 얼굴을 묻은 태섭이 괴롭게 신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별을 고한 후 그렇게나 빠르게 마음을 지우고 평온해진 게 이상할 정도였다. 대만이 태섭을 사랑하는 만큼 태섭도 대만을 깊이 사랑했었으니까. 대만은 ‘내가 송태섭 많이 좋아하니까 이만큼 져 주는 줄 알라’며 혼자 툴툴대곤 했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분홍빛 로맨스의 달콤한 환상에 취해 어느 날은 영원을 함께하자는 약속까지 선뜻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미국으로 떠난 후가 괴로웠다. 공부와 연습만으로도 훌쩍 지나가는 하루,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해야만 반절을 겨우 알아들을까 말까 하는 외국의 언어, 물갈이는 지독했고 음식도 금방 물려 입맛을 잃는 바람에 증량은커녕 살이 죽죽 내렸다. 그렇게 제 몸 하나 챙기기도 벅찬 상황에서 고향의 연인을 신경 써줄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고 대만이 쏟아주는 만큼 제 마음을 똑같이 돌려줄 수 없어 부담스러웠다. 돌려받지 못하는 마음에 결국에는 정대만이 지치고 사랑이 메말라 버릴까 무서웠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랑받는 게 힘겹고 두렵다고 느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대만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막혀 호흡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태섭은 이별을 이야기했다. 대만의 사랑을 더 받다가는 농구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짓눌려 죽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살기 위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그렇게 대만에게서 벗어난 태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몇 주 지나지 않아 완전한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입맛도 돌아왔고 살도 다시 붙었다. 미국 생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영어도 농구도 쑥쑥 늘었다. 사랑하던 것이 빠져나갔는데도 삶은 망가지거나 허전하기는커녕 놀라울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다 괜찮아졌다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송태섭은 정대만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으니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아도 된다고, 사실은 정대만이 저에게 그 정도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만에게 마지막으로 받았던 선물 상자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사 때마다 들고 다닌 게 그 증거일 테니까. 그때는 그냥 ‘버리는 것도 껄끄러워서’라고, 준 사람과 그렇게 끝나긴 했어도 ‘적어도 물건 자체는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고 거기엔 잘못이 없으니까’라고 자기 자신에게 해명했었지만 사실은 그게 내가 외면해 왔던 미련이자 마지막 마음이었다는 거지. 그러니 대만의 이름을 들은 아라가 그렇게 빈정대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 애는 미리 부친 짐에 섞여 있었던 그 선물 상자가 한 달이 지나도 본가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태섭이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며 온갖 곳을 닦달해 댔는지 직접 지켜본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대만이 아직 태섭을 사랑하고 저도 조금은 그렇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걸까? 태섭은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지금의 태섭은 다른 의미로 대만의 사랑이 무서웠다. 정대만을 다시 안아봤자 이번에도 똑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서른을 곧 앞두는데도 태섭은 대만이 아직도 스물이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품에 안겼을 때 느낀 대만의 마음은 그때에서 하나도 줄어들지도 스러지지도 않은 채였다. 여전히 무거웠다. 시작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태섭에게 아낌없이 쏟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섭은 지금의 저도 그만큼 대만을 사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아직 대만에게 미련이 있고 마음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8년의 세월 동안 태섭의 사랑은 적잖이 흐려졌고 정대만을 대신하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대만이 없는 동안 저만의 것으로 촘촘하게 짜놓은 삶에 얼마나 그를 들여놓을 수 있을지, 기껏 되찾은 평화와 안정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태섭은 아무리 대만의 품에서 영혼의 안정을 찾더라도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다시 안길 수는 없었다. 나이를 먹고 현실을 알아갈수록 인간은 필연적으로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 후로 태섭은 2, 3일 정도 내내 바빴다. 아라와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미뤄뒀던 힘 쓰는 일을 전부 몰아줬기 때문이었다. 집 안 대청소부터 시작해 창고를 정리했고 베란다의 창문을 닦았다. 몇 달 전부터 말썽이었다던 화장실 경첩을 고치고 손잡이를 바꿔 달았다. 듣기 싫게 끼긱대는 뻑뻑한 창틀에는 기름칠을 했다. 태섭보다 먼저 도착해 방 한구석에 잔뜩 쌓여 있던 짐 상자를 하나둘 풀어서 차곡차곡 정리했다. 장을 볼 때면 짐꾼이 필요하다며 꼭 같이 끌려 나갔다. 육체노동을 한 뒤 바닥에 벌렁 누운 채 나 아직 시차 적응도 제대로 못 했다고 불평하면 아라가 그러니까 밤에 푹 자라고 낮 동안 몸 쓰게 시키는 거 아니겠냐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약을 먹거나 억지로 졸음을 참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은 방법이긴 했기 때문에 태섭은 반박할 말도 못 찾고 그냥 끄응, 힘겨운 신음만 내뱉었다.

불평을 하긴 했지만 낮 동안 바삐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일이 태섭도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태섭은 원래도 생각이 많아지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운동이든 청소든 아르바이트든 뭐든, 한바탕 땀을 빼고 나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깔끔하게 비워지고 요동치던 심장도 어느 정도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라와 엄마가 이렇게 일을 잔뜩 주는 게 약간은 고맙기까지 했다. 당장 해야 할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정대만의 생각 따위는 일절 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요 며칠 태섭은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날 헤어진 후 대만은 태섭에게 아무런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커피도 같이 못 마시고 가서 미안하다던가, 잘 들어갔냐던가 하는 가벼운 인사치레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메시지조차 하나도 오지 않았다. 대만의 연락을 은근히 기다리는 제 꼴이 우습다는 건 잘 알았다. 헤어진 지 8년이나 된 데다 이쪽은 먼저 이별을 말한 장본인이다. 게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이야기할 확신조차 없는 주제에 연애라도 하던 시절처럼 묵묵부답인 메신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새라니. 누가 봐도 자격 없는 사람이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얼굴을 다시 볼 사이가 된 이상 태섭은 어떤 식으로든 대만과의 관계는 다시 이어 나가고 싶었다. 이전처럼 아주 친밀한 관계는 되지 못하더라도 믿을 수 있고 가벼운 일상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지인 정도는 되길 바랐다. 그래서 태섭은 조용한 대화방에 제가 먼저 슬쩍 메시지를 한 번 띄워보았다.

「그날 잘 들어갔어요? 일정은 잘 끝냈고요?」

그러나 대만에게서는 여전히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읽지않음 표시가 어느 순간 사라진 걸 봤는데도 말이다. 약속 날 당일만 해도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에 서 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메신저의 갱신이 마치 차단이라도 당한 것처럼 한순간에 뚝 끊기자 태섭은 슬슬 짜증이 났다. 에이씨, 그래, 말아라, 말아. 내가 이제 와서 이 인간에게 뭘 바라겠냐. 휴대폰을 던져놓고 정대만을 욕하며 이불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다음의 연락은 대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왔다.

점심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 태섭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에 시선을 주었다. 평일이 되자마자 곧장 대리점으로 달려가 구매한 신형 휴대폰의 자태가 고왔다.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기기를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조심히 집어 들며 바닥에 앉은 태섭은 알림창에 떠 있는 부재중 전화 세 건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택배는 올 게 없고, 에이전시 분들은 다 저장해 놓았으니까 그것도 아닐 테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태섭은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네, 권준호입니다. 부드러운 미성이 자신을 알렸다. 아, 준호 선배였구나.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번호가 바뀌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던 게 기억났다. 새로 저장해야지 생각은 했었는데 귀국 준비에 바빠 그대로 잊어버린 채 넘기고 지나갔던 모양이었다. 준호 선배. 태섭이 조금 머쓱하게 이름을 부르자 번호의 주인이 반가운 소리로 웃었다.

“태섭이구나. 아까 전화를 안 받던데. 지금은 통화 괜찮아?”

“네, 괜찮아요. 휴대폰이 다른 방에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죄송해요, 세 번이나 하셨던데.”

“아니야, 나야말로 재촉하듯이 해대서 미안하지. 그냥 문자 남겨놨으면 됐을 텐데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났네.”

“그럴 수도 있죠. 아, 그런데 전화는 왜 하셨어요?”

“아, 별건 아니고 대만이한테 전달받은 것 때문에. 애들 만나고 싶다고 했다며?”

“아…….”

대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웃는 낯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던 태섭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이쪽의 표정까지는 볼 수 없으니, 준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으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 둘이 먼저 만났을 줄은 몰라서 좀 놀랐어. 대만이가 네 얘기한 게…… 뭐랄까, 굉장히 오랜만이었거든.”

“…….”

“그건 그렇고, 원래라면 대만이한테 메시지 받자마자 연락했어야 했는데 내가 4박 5일로 해외 취재 나가 있느라 정신이 없었어. 어제저녁에 들어왔거든. 한숨 좀 돌리고 나니까 그제야 생각이 나는 거 있지.”

그래서 오늘 짬 나자마자 전화한 거야. 준호의 설명을 들으며 태섭은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주먹을 두세 번 쥐었다가 폈다. 약간의 긴장감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걸 느끼며 방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네요. 대만 선배랑은 어쩌다 보니 길에서 마주쳐서 그렇게 됐던 거고……. 대만 선배한테 사람들 근황 건너 듣긴 했지만 역시 다 같이 한 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 좀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동안 제가 바빠서 자리 잘 안 나가기도 했으니까……. 다들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고. 전화 너머에서 준호가 하하 웃었다. 그럼 잘됐네. 우리도 저번 11월인가에 병욱이 결혼식에서 모인 게 마지막이었거든. 이 김에 오랜만에 불러 모으면 되겠다. 너 편한 날짜는 대만이 통해서 받았으니까 그거 가지고 애들이랑 한 번 맞춰볼게. 참,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다. 잘 지냈지? 몸은 건강하고? 준호가 산뜻하게 건넨 질문에 태섭은 어딘가 틀어막힌 것 같은 소리로 웃다가 대답했다. 네, 잘 지냈어요.

정대만에게 다시 안기기 전까지는.


날짜는 생각보다 금방 잡혔다. 그다음 주 금요일 저녁이었다. 모일 사람이 10명이 넘으니 일정 조정도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호는 만 이틀이 되기도 전에 날짜가 정해졌다며 전화를 다시 걸어왔다. 태섭의 놀란 반응에 준호는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 기자야, 태섭아. 취재 일정 관리하는 데는 이골이 났지.

모임 장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산 모임에 나갔을 때와 같았다. 영걸의 가게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때는 영걸이 일하던 곳이고 지금은 그가 사장이라는 게 조금의 다른 점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식업에 뛰어든 영걸은 몇 년 전 자신이 일하던 가게를 아예 인수해서 독립했다. 의외로 장사에 소질이 있고 수완이 좋았는지 가게가 잘 된다는 소식을 몇 번 전해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긴 했는지 오랜만에 찾은 가게는 그때보다 더욱 번잡해져 있었다. 입구에 걸린 대기 명판에 이름이 빼곡히 적힌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태섭이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누구야! 송태섭 아니냐!”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의 계산을 해주고 있던 영걸이 태섭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크게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떠나자마자 카운터 밖으로 걸어 나와 어깨를 탕탕 두드리는 손길에는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태섭이 반쯤 어색하고 멋쩍은 기색으로 목덜미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 잘 지내셨어요, 영걸 선배. 장사 잘되는 것 같네요.”

“잘 된다기엔 민망하고. 그냥 임대료 내고 재룟값 내고 직원들 월급 안 밀릴 정도지, 뭘.”

“겸손하시네요. 자영업은 그게 제일 어려운 거라고요.”

“애들 보기 안 부끄러워지려면 더 잘해야지 않겠냐. 참, 애들은 5번 룸에 있다. 이쪽 복도로 들어가서 제일 안쪽이야.”

“옙.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태섭은 영걸이 알려준 복도로 들어갔다. 단체 손님용의 큰 방만 따로 모아놓은 곳 같았다. 아직 손님이 들어가 있지 않은지 다른 곳은 전부 비어 있었고, 유일하게 맨 끝 방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복도의 끝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두런두런한 말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태섭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방 안에 있던 눈동자들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태섭아!”

“주장!”

“태섭 선배!”

연예인이라도 등장한 것 같은 반응들이었다. 방 안에 있던 거의 모두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태섭을 맞았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야. 송 선수 비싼 얼굴 몇 년 만에 보네! 사방에서 반가움 담긴 인사가 쏟아졌다. 웃는 낯으로 인사에 바쁘게 응해주며 태섭은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사람들이 다시 앉기를 기다리며 잠시 둘러보니 대충 두셋 정도를 빼고는 전부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느라 수고했다. 맞은편에 앉은 치수가 소주병을 들자 태섭은 얼른 빈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치수의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번졌다.

“왔냐.”

고개를 돌려 막 술잔을 입에 대려던 참이었다. 왼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인사를 해오자마자 태섭은 소주잔을 든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앉을 때는 몰랐는데 그가 선택한 곳은 하필이면 정대만의 옆자리였다. 눈이 마주치자 대만이 고개를 까딱 끄덕여 한 번 더 인사했다. 태섭이 여전히 엉거주춤 굳어 있자 들고 있던 맥주잔을 흔들며 능글맞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왜? 건배라도 해줄까? 미련 가득한 손길로 저를 안아주던 사람답지도 않고 일상적인 연락을 갑자기 무시해 버린 사람답지도 않게 느물대는 태도였다.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직 관계가 발전하지 않았던 열여덟의 여름처럼 가볍고 담백하게 장난스러운 인사를 건네오는 걸 보자 태섭은 보이지 않는 손에 쥐어짜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꽉 막혀오는 걸 느꼈다. 불쾌하고 답답한 감각이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만을 잠시 노려본 태섭이 이내 고개를 젖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넘겼다. 됐어요, 새삼스럽게 무슨. 목을 태우는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딱딱하게 대답하곤 치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지금의 정대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영걸이 직접 신경 써서 준비한 음식이 몇 번이나 새로 올라왔는데도 태섭은 대만과 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뒤에는 아예 대만에게서 몸을 돌려놓았다. 그렇게 거리를 두는 걸 보고 누군가가 슬쩍 질문을 하면 저 사람과는 먼저 만나서 회포를 다 풀었더니 지금은 더 할 얘기가 없다며 웃어 보이곤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는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서, 질문한 사람들도 ‘그런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강 납득한 얼굴로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정대만이라는 주제를 피하며 태섭은 테이블 오른쪽 사람과만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른 사람들은 간간이 자리를 옮기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의 대화에도 끼곤 했지만 태섭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등 뒤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오로지 오른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가끔 뒤통수에 와 닿는 대만의 시선은 그냥 처음부터 느끼지 못한 양 무시했다.

안 그래도 인원이 많아 시끌시끌했던 방 안은 빈 병이 늘어가며 분위기가 고조되자 더욱 떠들썩해졌다. 몇몇 사람은 대화하기 위해 목소리를 더 높이거나 서로 바짝 붙어 귀엣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나 주변이 시끄러운데도 태섭의 귀에는 제 옆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대만의 말이 선명히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만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는 주변 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쉽게 묻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송태섭의 청각세포가 오로지 정대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글자가 하나하나 또렷하게 귀에 박혀 들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이제 결혼 6개월 차인 병욱의 신혼 스토리에 대만이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보이는 것을 태섭이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수씨랑 아주 깨가 쏟아지네, 쏟아져. 나도 결혼하고 싶어지게.”

“진심이세요? 사람이 아니라 농구랑 결혼할 것처럼 구시더니. 막상 결혼 얘기 들으니까 형도 결혼하고 싶어지신 거예요?”

“음, 뭐. 대충 그런 거지. 행복하게 잘 사는 얘기 들으니 좀 부러워서 말이야.”

“에이, 형 인기 많잖아요. 의향만 보이면 결혼하자고 할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텐데 부러워하실 게 뭐가 있어요.”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나만의 운명 찾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잖냐. 타이밍도 잘 맞아야 하고.”

“그렇긴 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 다들 늦게 결혼하는 추세잖아요. 당장 여기서만 봐도 결혼한 사람 저밖에 없고, 회사에서도 비슷한 나이대에서 저만큼 빨리 한 사람은 드물고. 뭐, 치수 선배도 내년에 하신다고는 하지만요.”

“그렇기는 한데, 나도 슬슬 정착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말이지…….”

대만이 큭큭 웃더니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스물아홉이야 요즘 시대엔 결혼하기 빠른 나이기야 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선 빨리 하는 거 드문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말인데 너희 주변에 소개해 줄 만 한 사람 누구 없냐? 내 행복 찾는 데 너희들도 도움 좀 줘 봐라. 대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태섭은 기분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결혼? 지금 정대만의 입에서 나올 단어인가, 그게? 태섭은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 잔에 남은 소주를 콸콸 부었다. 며칠 사이에 제 인생에서 송태섭을 갑자기 뚝 잘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정대만의 태도 하나하나가 신경에 거슬렸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우습다는 것도, 질투 같은 걸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정대만을 먼저 밀어낸 것도 제 쪽이었고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도 붙잡지 않은 것도 제 쪽이었다. 송태섭은 정대만을 선택하지 않았고 선택할 용기도 없었다. 대만이 아무리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 해도 제 손을 다시 잡아주지 않을 사람을 영원히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는 어려울 게 당연했다. 그 역시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한 명의 인간이니까. 그러니 대만이 태섭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행동이었다. 그래, 머리로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대만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태섭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8년 전과 마찬가지로, 돌려주지 못할 사랑을 계속 받는 건 숨 막히고 부담스럽기만 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 감정이 너무도 이기적이라 가소로웠다. 나 갖기는 싫은데 남 주기도 싫다는 거 아냐. 세상에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이 또 어디 있냐고. 태섭은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한 번 더 소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아무리 알코올을 집어넣어도 한 번 엉망이 된 기분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대만을 향한 원망과 속상함만 강해졌다. 그게 더 역겨워서 태섭은 대화도 않고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새로 뚜껑을 딴 초록색 병을 혼자 다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송태섭, 적당히 마셔라. 갑자기 너무 달리는 거 아니냐.”

“그래, 태섭아. 그러다 속 버리겠어. 그렇게 마셔도 괜찮은 거야?”

소주를 물처럼 마시며 순식간에 혼자 반병을 비워버린 태섭을 보고 치수와 한나가 혀를 차며 한 마디씩 던졌다. 특히 치수는 당장이라도 태섭의 손에서 잔을 뺏어 들 것처럼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걱정 담긴 시선과 달리 태섭은 유쾌하게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괜찮아. 저 술 강해요, 아버지 닮아서. 이래 봬도 알아서 조절하면서 마시고 있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 진짜 괜찮아요.”

그게 태섭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러다 피를 토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이 찢어지게 아팠다.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했는지 입안이 바싹 말라 아무런 물기도 나오지 않았다. 물……. 힘겹게 중얼거린 태섭이 마른기침을 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열리자마자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통으로 해를 마주한 태섭이 미간을 찡그리며 얼른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으로 태양의 잔상이 남아 초록색으로 빛났다. 잔상이 조금 가실 때까지 먹먹한 눈을 비비적대던 태섭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 그는 본가에서 한 번도 창문으로 직접 햇빛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월세가 싼 대신 집이 북향인 탓에 해가 잘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다시 눈을 뜬 태섭은 손으로 해를 가린 후 고개를 돌려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밝은 빛이 가득한 방 안의 풍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깔끔하지만 거주의 흔적이 없는 삭막한 분위기, 책상과 스탠드 등 꼭 필요한 일부 가구만 갖춰진 좁은 공간, 피부에 휘감기는 하얀 침구, 창밖으로 보이는 시티뷰. 어제까지도 그가 몸을 뉘었던 오래된 맨션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호텔?”

당황스러웠다. 제 입으로도 말했지만, 태섭은 술이 강한 편이었다. 운동을 하는 몸이니 잘 마시진 않았으나 가끔 술자리를 가질 일이 있을 때면 그는 제일 늦게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도수 높은 술도 눈 깜짝하지 않고 마실 수 있었고 많이 마셨다 싶을 때도 최소한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는 제정신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랬던 자신이 술자리 중간부터 필름이 끊긴 채로 낯선 곳에서 외박을 한 것이다. 나 설마 부원들 앞에서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걱정과 혼란이 반반 섞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태섭은 이대로 누워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체크인을 하기 전에 집에 연락이라도 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어나기 위해 이불을 걷어내려던 태섭은 문득 손 아래에 천이 아닌 다른 물건이 버석거리는 걸 느꼈다. 이게 뭐지? 의아한 얼굴로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들어 눈앞으로 가져온 순간,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제 손에 들린 것은 콘돔 껍질이었다. 그것도 귀퉁이가 찢겨나가 사용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소스라치며 껍질을 내던진 태섭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 옷과 끝이 묶인 채 굴러다니는 콘돔 두어 개가 보였다. 맙소사. 명백한 정사의 증거를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게다가 일어나 앉자마자 중력에 의해 체중이 쏠리며 말하기도 민망한 곳과 허리가 미친 듯이 아파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태섭은 저 뜨거운 밤의 주인공 중 하나가 자신임을 백 퍼센트 확신했다. 상황을 파악한 태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롭게 신음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태섭은 한 번도 누군가와 밤을 보내지 않았다. 주변에서 수도사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의외로 플러팅은 자주 받았지만─고등학생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취급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대학 때까지는 공부며 훈련이며 아르바이트로 바빠 뭘 할 겨를이 없었고 선수로서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욕구 자체가 없어져, 그냥 웃어넘기며 매번 좋게 거절했다. 8년 동안 그렇게 지냈는데 하루 만에 술을 먹고 정신이 나가서 몸의 통제권을 놓아 버리고는 누군가와 질펀하게 하룻밤을 보냈다니. 간밤의 제가 저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짓을 해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섭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었다. 송태섭과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눈을 떴을 때부터 태섭은 혼자였고, 필름이 끊겼던 덕에 뇌세포를 있는 힘껏 쥐어짜도 대체 누구와 이곳으로 왔던 건지 도저히 기억을 해 낼 수가 없었다. 이쯤 되자 심각한 위기감이 닥쳤다. 설령 8년 치의 욕구불만이 술기운에 터져 나왔다 해도 태섭은 유교 사회에서 19년을 교육받고 자란 청년이었으므로 술에 잔뜩 취한 채 모르는 사람과 원나잇을 하지는 않을 최소한의 무의식적 방벽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이곳에 같이 있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북산 부원들─그리고 굳이 더하자면 이영걸─중 하나일 텐데, 그게 제일 문제였다. 아는 사람과 그런 짓을 해서 애매하게 껄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뭐, 사람 깨기 전에 이렇게 도망간 걸 보면 그쪽도 똑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태섭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혹시나 간밤의 단서가 남아 있을까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낼 수 있었다. 옷가지를 주워 입던 태섭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메탈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먼저 떠난 상대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두고 간 것 같았다. 그리고 태섭은 이 시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바로 며칠 전에 그 주인과 시간을 보냈으니 몇 시간 내내 마주한 물건이 눈에 익는 것은 당연했다.

“씨발.”

차라리 다른 사람과 일을 친 게 백 배는 더 나았다. 태섭은 이 자리에서 당장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 시계는 대만의 것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갓 끓인 김치 콩나물국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눈앞에 놓여 있었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두 여자가 저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태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태평하게 위장에 뭘 밀어 넣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국물을 떠먹고 아삭한 콩나물을 씹었다. 밥까지 한 덩이 말아 한 입 크게 삼켰다. 속도 안 좋을 텐데 체할라. 천천히 먹어. 엄마의 걱정 담긴 말에 맛있다는 둥, 속이 이제야 좀 풀린다는 둥, 가족들을 안심시킬 소리를 일부러 해대며 입을 한껏 우물거렸다. 실제로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지만 기계적으로 식사를 했다. 실상이 어찌 되었든 겉으로 보기엔 아침을 잘 먹는 아들처럼 보여 안심이 되었는지, 태섭이 밥 먹는 걸 한참 지켜보던 엄마는 출근 준비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식탁에 남겨진 것은 의무적인 식사를 이어가는 태섭과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눈을 한 아라 뿐이었다.

“어제 정대만이랑 있었어?”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맞은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태섭이 크게 기침을 했다. 씹던 밥풀이 순간 다 튀어나올 정도의 큰 기침이었다. 사레가 들린 태섭이 콜록거리자 아라가 물컵을 밀어주고 휴지를 뽑았다.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한 태섭이 반쯤 쉰 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정대만 이름이 왜 나와?”

“어제 달재 오빠한테 물어봤으니까.”

오빠 아직도 안 들어왔고 전화도 안 받는데 혹시 지금 같이 있냐고, 자리 많이 길어지는 거냐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아홉 시쯤에 대만 선배가 데려다준다고 같이 나갔단 얘기를 다 해줬거든. 내가 달재 오빠한테 연락한 게 자정 넘어서였는데 뭐 저쪽 아랫지방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같은 시내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안 들어올 이유가 대체 뭐겠어? 안 봐도 뻔하지. 아라는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다. 그 당시 주변에 비밀로 하던 연애를 제일 먼저 눈치챘던 것도 아라였고 태섭의 목소리만 듣고도 둘이 헤어졌다는 걸 단박에 알아챈 것도 아라였다. 그랬던 여동생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다는 건 이미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한 채 확신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어, 태섭은 더 발뺌할 수도 없었다.

태섭이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은 국을 먹는 데만 집중하자 아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릇 그냥 싱크대에 넣어두면 설거지는 내가 이따가 할게. 먹고 들어가 쉬어. 아라까지 안방으로 사라지고 나자 태섭은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은 속이 잔뜩 울렁거렸다. 위장이 조금 진정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태섭이 긴 한숨을 내쉬며 식탁 위에 엎드렸다. 멍하니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를 바라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알 굵은 손목시계가 하나 딸려 나왔다. 그 주인의 존재감만큼이나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물건을 바라보던 태섭은 아예 팔에 얼굴을 묻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어떡하지. 미국에서 활동을 할 때야 출국하고 피해버리면 끝이었겠지만 아예 귀국한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앞으로 리그에서, 코트에서 계속 그를 마주할 생각을 하자 목이 깔깔해지면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송태섭 망할 새끼야, 대체 왜 그랬냐고. 술은 또 그 자리에서 뭐 하러 그렇게 마셔대서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고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학을 해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결국 태섭이 찾아낸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없던 일인 척하는 것.

결심한 태섭은 드디어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뒤쪽에 놓인 수납장의 네 번째 서랍을 열고 그 안의 약상자를 뒤적였다. 아마도 아라가 사놓았을 게 분명한 분홍색 갑을 꺼내 설명서에 적힌 대로 두 알을 뜯었다. 식탁으로 돌아와 말랑말랑한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이제 조금 뒤면 허리의 통증도, 여전히 아래가 벌어져 있는 것 같은 둔중하고 얼얼한 감각도 전부 사라질 터였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불편한 감각이 자꾸만 꿈틀대는 것을 억지로 무시하며 태섭은 비척대는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대만과의 밤을 제 몸에서도 없던 일로 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다.

사흘이 지났지만 정대만과의 대화방은 놀랍도록 잠잠했다. 위에서부터 다섯 번째쯤에 있는 정대만의 이름을 노려보던 태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이 인간도 모른 척하고 있는 거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는 건 정대만도 이 일을 꺼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니까. 사흘 내도록 은은하게 일렁이던 불안감과 불편함이 한결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렇게 계속 모른 척, 없는 일인 척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일도 없고 대만 선배와 나도 괜찮을 수 있을 거야. 나른한 안도감을 느끼며 태섭은 손바닥을 꾹 말아쥐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탕탕 두드렸다. 네, 나가요! 안방에 있던 아라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며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방문자와 아라가 대화를 나누는 듯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 뒤, ‘감사합니다.’ 아라가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송태섭 씨, 택배요.”

아라가 태섭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택배? 태섭이 고개를 들자 아라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몸을 비켰다. 그 뒤로 현관 앞에 놓인 갈색 종이 상자가 하나 보였다. 구겨지고 찌그러져 반쯤 헐어버린 상자였다. 표면에는 오래된 우체국 마크가 그려져 있었고 모서리마다 투명한 박스 테이프가 몇 겹으로 발려 있었다. 그걸 보고 택배의 정체를 알아챈 태섭은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건 미국에서 부칠 때 분실된 줄 알았던 제 짐 중 하나였다. 8년 전 대만이 보냈던, 그리고 제가 차마 버리지 못해 거처를 옮길 때마다 같이 들고 다녔던 바로 그 상자였다.

태섭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칼 줄까? 아라가 묻는 것도 무시하고 떨리는 손으로 테이프를 뜯었다.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한 끝에 겨우 테이프를 벗겨내고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태섭은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부여잡았다. 우웩. 조금 전 먹었던 점심이 목구멍 너머로 올라왔다. 횡경막이 조여들고 배가 수축하는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마구 흘렀다. 놀란 아라가 급히 달려와 태섭의 등을 두드렸다. 오빠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괜찮을 리가 없지. 두 달 가까이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며 험하게 굴러다닌 흔적이 역력한 겉 상자와 달리 그 안의 물건들은 너무나도 온전했다. 모든 게 태섭이 마지막으로 상자 뚜껑을 덮기 직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안에 든 물건들이 절대 깨지지 않도록 소중히 곱게 단단히 포장했던 제 손길을 떠올리며 태섭은 더 게울 게 없을 때까지 연신 구역질을 하며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4

모임 날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훈련을 마치고 온 대만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피곤했다. 안 그래도 휴식기 동안 무뎌진 몸을 끌어올리기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며칠 잠까지 설쳤더니 한계가 오고 만 것이었다. 몸 관리하는 것도 프로의 소양인데 말이지…….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던 잔소리를 정작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한심했다. 금방이라도 기운이 빠져 주저앉기 직전인 몸에 억지로 힘을 불어넣으며 대만은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는 10층을 지나 11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들어가면 좀 누워 있어야겠다. 바닥에 내려놓은 더플백을 다시 짊어지고 1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걸 기다렸다.

“왔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몸을 틀자마자 대만이 마주한 것은 제 집 현관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태섭이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대만과 달리 태섭은 태연하게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더니 느긋하게 기지개까지 켰다. 엉덩이 배겨서 죽는 줄 알았네. 안 그래도 허리도 아픈데. 태섭의 퉁명스러운 혼잣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 하긴요? 보면 알잖아요. 사람 기다렸지.”

“그러니까 왜 여기서 사람을 기다리냐고.”

“그야 정대만이 내 연락을 안 받으니까?”

대만이 따져 묻자 태섭은 눈썹 높이를 짝짝이로 만들며 도리어 힐난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 대만이 멍하니 되묻자 태섭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침부터 몇 번이나 메시지 보내고 전화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으니 내가 뭐 어떡해요. 별수 있나? 직접 오는 수밖에. 그래서 주소 물어물어 왔더니 또 사람이 없네? 그런데 오전부터 전화 안 받았던 양반이 이제 와서 건다고 또 받겠어요? 그래서 그냥 기다렸어요. 선배 올 때까지. 태섭의 말이 이어질수록 대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지긋지긋한 불면의 원인이자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서 있다니. 대만은 하늘의 장난이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저 다시 농구 시작한 후로 착하게 잘 살았잖아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훈련하느라 휴대폰을 하나도 못 봤어. 요즘 아침부터 강행군이라. 그래서 연락 온 것도 전혀 몰랐다. 미안해.”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든 건 제 잘못이었으니 사과는 해야 했다. 억지로 열린 입에서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비딱한 시선으로 대만을 올려다보던 태섭이 들으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풀었다. 사과는 됐어요. 비시즌 훈련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온 저도 잘한 건 아니니까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 뒤로 복도에는 귀신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대만은 태섭을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용건이 있어서 왔을 송태섭도 뭔가를 망설이는 듯하면서 쉽사리 다음 말을 꺼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십 분쯤 대치했을까. 조금 정신을 차린 대만이 한숨을 내쉬며 태섭을 지나쳐 현관 앞에 섰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 그리고 그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내키지도 않았고 여기까지 온 태섭의 의중도 짐작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차가운 돌바닥에 계속 앉아 있었을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들어오라는 말에 태섭은 조금 놀란 표정을 하더니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태섭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가방을 놓아둔 대만은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캡슐커피 하나를 꺼내 기계에 밀어 넣고 레버를 내렸다. 자꾸만 거실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커피 머신에 애써 고정하며 대만은 제 허벅지를 한 번 꼬집어 보았다. 통증은 날카로웠으나 현실감은 없었다. 그럴 만하지. 송태섭이 이렇게 8년 만에 집에 들이닥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일이 또 어디 있다고. 커피 머신의 웅웅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만은 이게 현실이 아니라 깜빡 졸아버린 제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집에서 느껴지는 다른 이의 기척은 아주 선명하다 못해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했다.

머그컵 두 잔을 들고 돌아오자 거실장 앞에서 사진 액자를 감상하고 있는 태섭이 보였다. 커피 왔다. 목소리를 내자 태섭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커피를 받아 든 태섭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옆의 1인용 소파에 앉은 대만은 사진에서 도통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태섭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왜 온 거야?”

본론으로 직행하자 태섭이 눈동자만 슬그머니 굴려 대만을 쳐다보았다. 묘한 눈이었다. 경계심을 가지고 기색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바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눈으로 한동안 대만을 응시하던 태섭이 고개를 숙이더니 가방 주머니를 열고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속 시원히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뜸 들이며 딴짓만 하는 태섭에게 대만도 슬슬 짜증이 나려 할 무렵이었다. 마침내 태섭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이거 돌려주려고요. 선배 거잖아요. 조명을 받은 금속 시곗줄이 반짝였다.

제 시계가 왜 태섭의 가방에서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대만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였다. 빌어먹을. 상황을 깨달은 대만은 진심으로 낭패했다. 순식간에 모든 피가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차게 식었다. 어쩐지 저게 며칠째 안 보인다 했지.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시계 따위를 신경 쓸 정신도 없어 그냥 어디 드레스룸 구석에 잘못 뒀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그날 허둥지둥거리다가 호텔에 그대로 두고 온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게 송태섭의 손에 들어갈 일이 어디 있다고. 대만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눈앞에 호텔에서의 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모임 다음 날에 가방 정리하는 데 저게 나왔어요. 짐에 섞여 들어갔나 보더라고요.”

그러나 태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였다. 놀란 대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새 컵을 다시 집어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태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물건이니까 돌려줘야 하잖아요. 그냥 택배로 부칠지 고민했는데 그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고, 비싸 보이는데 택배 부쳤다가 어디 부딪혀서 망가지거나 분실되면 그게 더 문제일 것 같고. 그래서 직접 주러 왔어요. 그렇게 말하는 태섭의 얼굴이 지극히 태연했기에, 대만은 순간 태섭이 저와 밤을 보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조금의 기대를 했다.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머그컵을 붙잡은 손끝이 하얗게 변해 있는 걸 보곤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금방 눈치챘지만.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거구나. 너는 그걸 말하기 위해 굳이 이곳에 왔고. 태섭의 의중을 깨달은 대만은 가만히 입술을 물어뜯었다. 태섭이 그걸 원한다면 대만은 그렇게 해주어야 했다. 진작에 끝난 관계를 여태 놓지 못한 건 이쪽 혼자였고 제대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서 먼저 일을 치고 만 것도 이쪽 아니던가. 그러니 정대만에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었다.

「가지 마요.」

태섭을 위해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런 말에 홀려서는 안 됐으니까.

 아버지를 닮아 술에 강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던 태섭은 30분 만에 소주 한 병 반을 마시더니 금세 푹 고꾸라졌다. 쿵 소리를 듣고 돌아본 한나가 내 저럴 줄 알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태섭아, 송태섭. 정신 좀 차려 봐. 어깨를 흔드는 한나를 보고 오일이 건너편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냥 내버려 둬. 조금 자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그러나 완전히 곯아떨어진 듯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태섭이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저렇게 계속 놔둬도 되겠냐는 걱정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자리를 정리할까. 치수의 말에 준호가 아직 9시밖에 안 됐는데 2차도 안 가고 벌써 파할 거냐며 크게 아쉬워했다. 권준호 사회인 되더니 술만 늘었네. 대만이 농담을 건네자 준호는 세상에는 술을 부르는 사건이 너무 많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말을 필두로 최근의 시사를 화제에 올리며 주변이 다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쉽게 파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대만이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송태섭 데려다줄게. 나도 내일 훈련 있어서 슬슬 가 봐야 하니까. 더 마실 사람들은 알아서 하고.”

“네……. 그럼 태섭이는 선배한테 부탁드릴게요.”

저도 오늘은 좀 더 마시고 싶어서. 술잔을 쥔 달재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라, 오늘의 주인공님 책임지고 잘 모셔다드릴 테니까. 그렇게 몸도 못 가누는 송태섭을 업고 나와 택시를 잡던 때였다.

“정대만……?”

등 뒤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래, 정대만이다. 이제 좀 깼냐? 술을 그렇게 마시더니 제일 먼저 기절해서는.”

“나 왜 업혀 있어……. 우리 어디 가…?”

“가지. 너희 집에.”

“우리 집?”

“그래, 너희 집. 술 취한 송태섭 빨리 데려다줘야 나도 우리 집엘 가지 않겠냐. 그보다 너 깼으면 내려와. 무겁다.”

“싫어. 이러고 있을래.”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대만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야, 송태섭. 대만이 어이없어하며 조금 날카롭게 이름을 불렀다. 싫어, 안 내려가. 정신만 대충 들었지 여전히 술에 취한 게 분명한 태섭도 고집을 부리며 대만의 목을 꽉 감쌌다. 잔뜩 근육을 키운 팔뚝이 숨통을 꽉 죄어 오자 그렇다고 태섭을 바닥에 내동댕이칠 수도 없었던 대만은 항복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러고 있어라, 있어……. 나 참, 취객 업어다 주다 내가 질식사하게 생겼네. 허락을 받자 안심이 되었는지 등 뒤의 말썽꾸러기는 금방 얌전해졌다. 그새 또 잠에 빠졌는지 태섭의 느린 숨소리가 이어졌다.

택시는 생각보다 금방 잡혔다. 커다란 남자가 같은 커다란 남자를 업고 있는 꼴이 눈길을 끈 모양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몸을 못 가누는 태섭을 조심히 내려놓고 뒷좌석에 꾹꾹 밀어 넣었다. 취한 녀석은 편하게 누워 갈 수 있게 혼자 태우고 저는 조수석에 탈 셈이었는데, 몸을 빼려는 순간 태섭이 갑자기 대만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어디 가요. 가지 마요. 같이 있어. 나 혼자 보내지 마.

엉거주춤 팔을 붙잡힌 채 대만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쿵쿵쿵쿵,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사이 태섭은 아예 대만의 손을 끌어오더니 뺨을 비비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사귀던 시절 몇 번 보았던 어리광 섞인 잠버릇이었다. 대만은 넋을 잃은 채 택시 뒷좌석에 누운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손님.”

택시 기사가 그를 부르고 나서야 대만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뒤에서 다른 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예, 죄송합니다. 대만은 허둥지둥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한 번 나간 얼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 집 주소도 태섭의 집 주소도 기억나지 않아 어물거리던 대만은 결국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냥 가까운 호텔 아무 데나 가주세요. 그렇게 대만은 택시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태섭에게 무릎베개를 해준 채 단단히 굳어 있었다. 술 취한 남자가 되는 대로 부린 주정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쿵쿵대는 심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의미 모를 입속말을 하면서 엉겨 붙는 태섭을 데리고 겨우 체크인하고 나자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태섭을 침대에 내려놓은 뒤 대만은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어지러웠고 착잡했다. 가지 마요. 같이 있어요. 나 혼자 보내지 마. 태섭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대만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건 그냥 긴 타향 생활에 지치고 외로웠던 송태섭의 무의식일 뿐이야. 그 자리에 있던 게 내가 아니었어도 그 녀석은 가지 말라고 했을 거야. 자기가 믿는 사람들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벅찬 감정과 설레는 희망을 억지로 무시하며 몇 번이고 싹을 잘랐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겨우 떨쳐낸 대만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편하게 재우려면 옷이라도 벗겨줘야지……. 야, 송태섭. 팔 좀 줘 봐. 축축 늘어지는 태섭을 겨우 추슬러 티셔츠와 양말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잘 자라. 가슴팍을 두어 번 토닥이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어디 가냐니까…….”

태섭이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게슴츠레 눈을 떴다. 가슴 위에 얹힌 대만의 손을 잡은 태섭이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지 마요. 같이 있어. 택시에서 내뱉은 것과 똑같은 문장이었다. 자꾸만 저를 붙잡는 소리에 대만은 지그시 입술을 물고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태섭아. 왜 자꾸 내게 그런 말을 하고 날 잡으려고 들어. 넌 더 이상 날 사랑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잖아. 내가 옆자리에 있는 걸 알고는 그렇게나 불편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지금 내가 누구로 보이는데?”

답을 기대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한탄하듯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자 태섭이 초점을 맞추려는 듯 한동안 미간을 찡그리더니 대답을 툭 내뱉었다.

“누구긴 누구야……. 정대만이지.”

선배 말고 이렇게 생긴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만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달 넘게 굶은 사람이 음식을 보자마자 덤벼드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대만은 태섭을 덮치며 정신없이 그 입술을 탐했다. 혀가 섞이고 비음이 샜다. 그리고 태섭은 제게 달려드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았다. 익숙하게 제 목을 감싸는 팔을 느끼며 대만은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기억을 다시 떠올리자 자괴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태섭은 술자리에서 대만과 거리를 둠으로써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함께 점심을 먹은 날에도 느끼기는 했으나 한 번 더 제대로 확인당하고 나서야 완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대만은 이제 정말로 마음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법이니 괜히 남의 결혼 생활에 관심을 보이며 소개를 해 달라고 졸랐다. 이미 8년 동안 마음을 삭여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아, 이젠 태섭도 저도 다 괜찮아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심이 무색하게 술 취한 사람의 의미 없는 말에 휘둘려 일을 쳤다는 사실이 대만을 괴롭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지점은, 이 일 때문에 지인으로조차 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대만으로서는 태섭이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직접 찾아와 시계를 돌려주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태섭이 먼저 진실을 숨긴 이상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그의 의사를 이번에는 충분히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게 최소한의 책임이고 사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영원히 덮어놓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없어진 건 알았는데 그게 너한테 있었을 줄은 몰랐네. 찾아줘서 고맙다.”

그 후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대만은 굳은 표정으로 돌려받은 시계를 만지작거리기만 했고, 태섭도 대만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커피만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자 태섭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 시간 얼마 안 남아서 가봐야겠어요. 잘 마셨습니다. 컵은 거기 둬. 내가 치울게. 대만이 따라 일어서자 태섭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고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배웅은 안 해도 돼요.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했어요. 몸을 돌린 태섭은 그대로 문을 열고 대만의 집을 떠났다. 현관 너머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대만은 얼굴을 감싸며 힘없이 소파에 다시 주저앉았다.


 

매미가 우는 여름 저녁이었다. 여전히 낮의 열기가 남아 있는 공원의 벤치에서 그들은 서로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대학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교복 아닌 교복 차림이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미지근한 음료수 캔을 반씩 나눠 마셨다. 나중에 캔을 받은 사람이 손으로 무게를 재 보더니 앞선 사람이 더 많이 마셨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당연히 상대는 펄쩍 뛰며 반박했고, 이렇게 시작된 말싸움은 캔을 나눠 마시느라 발생한 간접키스의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는 것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빈약한 논리가 다 떨어졌는지 둘 다 금방 조용해졌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편안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을 자꾸만 어색하게 흘끔거리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사이 해는 착실하게 서산을 넘어가 어느새 어둠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랑 간접키스한 게 그렇게 싫었냐는 질문이었다. 상대는 조금 놀란 눈으로 질문한 사람을 쳐다보더니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답이 없다가 그렇진 않았다고 머쓱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참으로 멋없는 질문에 멋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들은 이 대화에 내포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슬슬 집에 갈까. 대만이 몸을 일으키자 태섭도 따라 일어났다.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 공원을 떠나는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매미 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여름밤이었다.


 

원하는 게 있거나 마음먹은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알리라는 말이 있다. 남의 시선 때문에라도 억지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뿐더러 주변인들이 도움 되는 여러 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북산 모임에서 ‘사람을 소개받고 싶다’고 했던 대만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섭에게 시계를 돌려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은 중식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당시의 후배 중 태섭 다음으로 대만을 거리낌 없이 대하던 게 중식이긴 했지만 졸업한 뒤로 둘이서만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거의 없어, 대만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대만이 후배의 연락을 거절할 성미는 아닌지라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여보세요. 중식아. 웬일이냐.

그날 잘 들어갔냐는 의례적인 인사를 두어 마디 나누고 일주일간의 근황을 곁다리로 조금 이야기하고 나자 그제야 중식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사실 연락드린 건 다름은 아니고요, 그날 형이 소개해 줄 만한 사람 없냐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소개팅 안 하실래요? 저희 누나 후배인데, 저도 잘 아는 분이에요. 좋은 사람인 건 제가 보장할 수 있고요.”

예상 못 한 용건에 대만은 조금 당황했다. 마음 정리를 위해 다른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한 게 본인이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새 인연이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거 나도 마음의 준비 같은 게 좀 필요했는데. 대만이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중식은 상대의 정보를 몇 가지 더 꺼내놓았다. 칭찬과 호감이 잔뜩 담긴 코멘트였다. 외모도 준수하고 성격 좋기로도 주변에서 정평이 났다는 설명을 들으며 대만은 가만히 생각했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기회가 들어왔을 때 받아들이는 게 좋겠지. 어쨌든 나만 정리하면 되는 문제고, 이런 일까지 생겨버린 이상 송태섭에게 더 손 안 대려면 다른 곳에 마음 돌리는 게 제일이니까. 마침내 결심한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얘기 들으니 네 말대로 괜찮은 사람 같네. 한번 만나보고 싶고. 대만이 선선히 대답하자 중식은 안심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제가 연락처 보내드릴게요. 얘기는 다 되었으니까요, 두 분끼리 말씀 한 번 나눠 보세요.

연락처를 저장하며 본 상대의 프로필 사진은 들었던 대로 제법 괜찮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 웃고 있는 얼굴이 시원시원하고 반듯해서 마치 모델 같았다. 여행지에서 찍었는지 바다를 등지고 하얀 난간에 기댄 모습에 눈길이 갔다. 등 뒤에서 일렁였을 푸른 배경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던 대만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도 바다를 좋아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훈련이 없는 날을 골라 자리를 가지고 그날 바로 애프터를 신청했다. 상대도 대만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응했고, 그런 식으로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진 후에는 곧 연인 사이가 되었다. 관계의 발전을 먼저 제안한 것은 대만이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그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걸 숨기지 않던 상대는 대만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대만의 연인은 중식의 말대로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제 사람을 잘 챙겼고 같이 있는 이를 편안하게 해줄 줄 알았다. 대화를 이끄는 재주가 있어 다양한 이야기로 함께하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특수하고 독점적인 관계인 만큼 저를 높은 우선순위로 여겨주길 바라는 것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구속이나 질투가 심한 편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최적의 연애 대상이었다. 문제는 정대만 쪽이었다.

대만도 나름대로 제 연인을 좋아하긴 했다. 다만 애정이 아닌 인간적인 호감이었다. 아주 가까운 지인. 아무리 애써도 그 이상으로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새로운 불씨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에 큰 고마움도 느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끔은 진심으로 사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직 상대에게서 태섭의 희미한 파편을 발견할 때뿐이었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심리 실험 같았다. 그 괴리에 미안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대만은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다. 훈련으로 바빠도 매일 연락을 잊지 않았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만나 짧게라도 시간을 보냈다. 적당한 분위기를 탔던 날에는 수줍음 담긴 입맞춤도 나누었다. 선물 받은 커플 아이템을 순순히 가지고 다녔다. 일부러 연애 중이라는 걸 내보이고 강조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지금의 상대를 사랑할 수도 있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새로운 연애가 겉으로나마 슬슬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태섭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아주 핑크빛이네요.」

데이트 때 찍은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로 설정해 두었더니 그걸 본 모양이었다. 시계를 돌려준 후 한 달 넘게 아무런 연락이 없더니 갑자기 그런 메시지로 운을 뗀 태섭에게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데, 뒤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밥 한 끼 먹죠?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선배한테 좀 도움받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슬슬 팀 결정해야 하는데 에이전시랑 아무리 논의해도 결론이 잘 안 나네요. 현역 선수이자 북산 최고의 BQ를 자랑하는 정대만 씨의 조언이 필요해요. 태섭이 줄줄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으며 대만은 이 만남 요청에 응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지금 태섭과 만나는 게 잘하는 일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태섭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송태섭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날의 일이 뒤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잊어버리고 묻어두고 싶어도 문신처럼 새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억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대만을 괴롭혔다. 하지만 여기서 태섭을 피해버린다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둘 다 호텔에서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기로 합의했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 일도 없던 선후배 사이’에서 평범한 도움 요청을 거절하는 건 그림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도 그날 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암시해서 상황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대만은 껄끄러운 목 뒤로 침을 한 번 삼킨 후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태섭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 언제 볼까.」

의외로 태섭은 그날 저녁에 바로 대만을 만나고 싶어 했다. 이런……. 선약이 있는데. 곤란한 상황이 됐다.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한참 고민에 잠겨있던 대만은 어쨌든 태섭의 문제가 더 무게가 있다고 판단했다. 데이트는 하루 미뤄도 상관없지만 팀을 구하는 문제는 미루기엔 좀 그렇지. 연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뭐. 우린 다음에 보면 되니까. 아쉬움은 담겼으나 시원스러운 허락에 대만은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남겼다.

「그런데 오늘 만난다는 후배는 누구?」

「고등학교 후배. 송태섭이라고. 너도 뉴스에서 이름 들어본 적 있을걸.」

「고등학교 후배였어? 관계가 꽤 먼데? 그런데도 먼저 찾을 정도면 학교 다닐 때 자기가 그 사람한테 꽤 의지 되는 든든한 선배였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의 천진한 말에 대만은 목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의지 되는 든든한 선배라……. 그렇게 느꼈다면 다행이지. 내가 그 녀석한테 못한 짓이 좀 많아서 말이야. 연인은 의례적인 말이라 생각했는지 그게 뭔 소리냐며 크게 웃었지만 대만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태섭의 생각으로 마음이 온통 어지러웠다.


태섭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먼저 와 있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예약한 룸은 조금 작긴 해도 아늑하고 조용했다. 늦어서 미안. 대만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하자 태섭은 괜찮다고 대답하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제 건 정했어요. 선배 것만 정하면 돼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았으나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었다. 그냥 너랑 같은 거 시켜줘. 태섭이 한쪽 눈썹을 가만히 치켜올리더니 벨을 눌렀다. 주문을 받은 서버가 나가자 룸 안이 도로 조용해졌다. 대만은 물을 마시며 테이블 너머의 태섭을 건너다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사람을 불러냈으면서 태섭은 말을 꺼내기는커녕 테이블 한쪽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애꿎은 냅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대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예?”

“조언 필요하다고 약속 잡은 거잖아. 그래서 어디서 결정을 못 하고 있는 거냐고. 어차피 이 단계쯤 오면 최종 후보 두 개 놓고 저울질하고 있을 거야 뻔하고.”

“아……. 그거요.”

태섭이 한 박자 늦게 어색하게 웃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배 말대로 최종 후보는 두 곳이에요. 아직도 결정을 못 한 건 둘 다…… 장단점이 뚜렷해서고요.”

“장단점? 후보가 어디길래 그래? 아, 그런데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 건가. 막판 조율 끝날 때까지는 대외비잖아.”

“별로 상관없어요. 엠바고를 걸어둬서 그렇지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니까. 한 곳은 G 구단이에요.”

팀 이름을 듣는 순간 정말 송태섭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G 구단은 6강 플레이오프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 있는 리그 중위권 팀이었다. 다만 그 이상의 성적을 낸 것이 손에 꼽는 데다 매번 중요할 때 꺾이는 바람에 팬들에게 오랜 한이 맺히게 한 팀이기도 했다. 선수진을 보강하고 감독을 새로 데려와도 결과는 항상 거기서 거기. 그러다 보니 모기업의 지원도 점점 시들해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송태섭이 입단하더라도 미국에서의 연봉을 맞춰줄 수는 없을 터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일반인의 비유대로라면─대기업보다는 스타트업 같은 환경을 선호하고 그런 곳에서 더 열의를 보이는 태섭의 성향이라면 후보에 올려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라면 역시 그거겠지……. 혹사당할 위험. 송태섭이라는 보장된 선수를 샀으니 더 높은 곳을 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굴린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럼 다른 팀은 어딘데?”

“다른 팀 말이죠……. 거기가 지금 제일 큰 고민이에요.”

“왜? 모기업 사정이 뭐 안 좋나? 애초에 그런 곳이라면 네 에이전시가 최종 후보까지 두려 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런 곳은 아니에요. 오히려 환경은 좋아요. 에이전트도 거길 계속 추천하고 있고. 그냥 내가 고민인 거지.”

“어디길래?”

“선배도 잘 아는 곳인데. 국내 최고의 슈터가 있는 팀이니까.”

태섭이 약간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대만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팀의 장점은 선배가 더 잘 알 테니 굳이 말 안 할게요. 단점은…… 네, 역시 그거죠. 선배가 있다는 거.”

“내가 거기 있는 게 뭐가 어때서.”

딱딱한 목소리가 곧바로 튀어 나갔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어조였다는 걸 내뱉고서야 깨달았다. 대만은 아차 하는 기분에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대놓고 거리를 두는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욱하는 성질이 나와 버렸다. 제가 태섭이 그으려는 선에 기분 나빠할 자격은 어디에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안 그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데다 이쪽은 만나는 사람도 생긴 마당이니 더더욱.

미안. 짧게 사과하자 가만히 앉아 있던 태섭에게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돌발행동에 눈썹을 찌푸린 대만과는 달리 태섭은 서버가 다시 들어와 음식을 늘어놓을 때까지 한참을 소리 높여 웃어댔다. 하아……. 문이 닫히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그친 태섭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대만을 건너다보았다.

“그렇네요. 선배가 그 팀에 있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우리 사이에 뭔 일이 있었다고. 안 그래요? 태섭이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러니 같은 팀에서 얼마든지 뛸 수도 있는 거죠. 우리가 그런 것도 못 할 사이는 아니니까.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혼잣말인 것 같기도 하고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한, 어딘가 자조적인 중얼거림이었다.


송태섭, S 구단에 새 둥지 틀어…

S 구단 유니폼 입게 된 송태섭…

S 구단, 송태섭과 ○년·○억 원에 계약 체결…

특정 시간이 지나자마자 같은 내용을 담은 스포츠 뉴스가 포털 사이트에 우르르 올라왔다. 몇 분 전 S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보도자료를 내보내며 엠바고가 풀린 것이었다. 이 사람 그때 만난 후배 맞지? 자기 팀으로 오네? 연인이 메신저로 직접 기사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태섭이 입단을 결정했다는 것은 전날 미리 전해 들었다. 기사 내일 나간대요. 내일부터는 공식적으로 한솥밥 먹는 식구예요. 잘 부탁합니다. 장난스러운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대만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태섭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전혀 달갑지 않았다.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거실장 위로 시선을 돌리자 구단 유니폼을 입은 제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 왔을 때 태섭이 도통 눈을 떼지 못하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대만은 사진 속의 제 얼굴에 태섭의 얼굴을 겹쳐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왜 하필이면 여기로 오는 거냐, 태섭아. 네가 가까이 있으면 나는, 나는……. 다 접지 못한 마음에 괴롭게 흔들리는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지러운 기분에 밤새 뒤척이기만 하던 대만은 결국 한숨도 제대로 못 잔 채 훈련장에 나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기계적으로 몸을 푸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송태섭으로 가득 차 있었다. 99%는 태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의 복잡한 고민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묘한 두근거림과 벅찬 설렘이 함께 들어 있어 대만을 더욱 괴롭게 했다.

때마침 코치님이 들어오며 코트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선수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 뒤로 팀 운동복 차림의 태섭이 감독님과 함께 서 있는 게 보였다. 새로운 사람이 기존의 선수들과 상견례를 하는 자리였다. 소개를 받은 태섭이 웃는 얼굴로 한 발짝 나섰다. 좋은 기회로 미국물을 오래 먹기는 했지만 그 대신 국내 리그는 경험이 없으니 자신을 늦깎이 신인이자 막내라고 생각하고 편히 대해 달라는 너스레에 여기저기서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우렁찬 환영 박수와 함께 간단한 상견례가 끝나고 선수들은 마저 몸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리고 태섭은 당연하다는 듯 대만의 옆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내가 구면이라 편한 건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 옆에 가서 빨리 친해지는 게 더 낫지 않겠냐.”

살짝 갈라지려는 목소리를 겨우 갈무리하고 대만이 말하자 다리 스트레칭을 하던 태섭이 가만히 눈을 들었다. 어딘가 언짢은 기색이었다.

“되게 사람 쫓아내려고 드네.”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소린지 알아요. 그래도 오랜만에 다시 한 팀 된 건데 나도 감회에 좀 잠겨 보자고요. 거의 10년 만이잖아요? 그거 말고 더 할 말 없으면 등이나 좀 눌러주시고요.”

“야, 송태섭.”

“그 무서운 목소리는 뭐예요? 내가 부탁 못 할 거 했나. 우리가 이런 것도 못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태섭이 약간의 불만을 담아 내뱉은 말에 대만은 순간 멈칫했다. 조언을 얻고 싶다며 가졌던 식사 자리에서 나왔던 말이 지금 태섭의 입에서 한 번 더 나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런 것도 못 할 사이에요?’ 그 말에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상이 어떻든 일단 지금의 두 사람은 ‘별일 없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으니까. 그러니까, 상대를 친근하게 대하고 스트레칭을 도우려 몸에 손을 대도 아무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친한 선후배 사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 대만은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태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으며 상체를 깊게 숙였다. 그날 밤처럼 태섭의 너른 등을 내려다보며 대만은 조금 떨리는 손을 뻗었다. 입속으로는 그 주문 같은 문장을 되뇌면서, 친분이라는 면죄부 속에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불꽃을 감추면서.

5

 

태섭은 정규리그 전 열리는 컵대회에서 처음으로 국내 무대 데뷔 경기를 치렀다. 송태섭을 보기 위해 지방 원정까지 온 팬들로 경기장이 만석이 될 정도였다. 온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태섭은 여유로운 얼굴로 코트에 올랐다. 경기 시작,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점프볼 경합이 벌어졌다. 센터가 이쪽으로 쳐낸 공을 태섭이 가볍게 잡았다. 씩 웃은 그가 드리블을 하기 시작하자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환성이 쏟아졌다.

아직 호흡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섭과 다른 선수들은 한두 번씩 신호가 어긋나곤 했다. 하지만 정대만은 달랐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북산의 기적’이라 불리는 그해 여름 경기를 함께 치렀던 경험은 어딜 가지 않았는지, 태섭은 대만이 기회를 포착할 때마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에 공을 던져주었다.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시기에 공을 넘겨받은 대만은 날카로운 슛을 던졌고 그 공은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최종 점수 76:72로 그날은 아쉽게 패배하긴 했으나 송태섭과 호흡을 맞춘 정대만은 혼자서만 23득점을 뽑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열린 정규리그에서 송태섭-정대만 듀오는 그야말로 S 구단의 최대 무기가 되었다. 원체 호흡도 잘 맞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데다가 사적인 사이도 괜찮으니 코치진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조합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여러 인터뷰나 목격담으로 둘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가깝다는 것이 알려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팬들 사이에서도 당연하게 세트 취급을 받으며 부부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팬들의 그런 이야기에 더욱 불을 지핀 것은 대만의 행동이었다. 정대만이 연애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설마 송태섭이랑?’이라고 되물을 정도로 대만은 태섭을 유달리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장에서나 퇴근길에서나 애착 인형처럼 태섭을 데리고 다녔고 평소에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정대만 근황이 궁금하면 송태섭에게 물어보고 송태섭 근황이 궁금하면 정대만 계정에 가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런 상황을 태섭이 다소 난감해하는 것이야 대만도 알고 있었다. 태섭은 대만의 부름을 대체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불러낸 장소로 나올 때면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올린 채 이젠 나 말고 애인이랑 놀 때가 되지 않았냐며 묻곤 했다. 놀자고 하니 놀아주긴 하겠는데 이러다 선배 진짜 차인다니까요. 거기다 제 연애를 걱정해 주는 소리까지 듣고 나면 대만은 기분이 언짢음과 동시에 깊은 괴로움을 느꼈다. 태섭이 그렇게 매번 ‘후배’로서 내뱉는 말들은 그들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확인 사살하는 문장이었으니까. 그럴수록 대만은 태섭이 이전에 했던 말에 더욱 집착했다.

“너한텐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 건데. 그럼 우리 사이에 이런 것도 같이 못 한다는 거냐?”

그 문장을 꺼내면 태섭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틀린 논리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대만은 태섭과의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 말을 더욱 방패처럼 내세웠다. 사그라들지 않는 제 마음에 가면을 덧씌우며 태섭과 어떻게든 더 같이 있을 핑계로 써먹었다.

피상적인 관계라고는 해도 가장 원하는 사람이 옆에 있게 되자 연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소홀해졌다. 본래 리그가 개막하면 바쁜 일정에 주변인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마련이었지만, 그 이유로는 다 해명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람을 등한하고 있다는 건 대만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근 한 달 만에 하게 된 데이트에서 태섭의 이름을 듣자마자 연인이 벌떡 일어섰을 때도 대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냥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고, 지극히 건조한 시선으로 이 모든 상황을 대할 수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드라마 같네. 눈앞에서 뿌려지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도 그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눈을 가려 대만의 왼쪽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눈을 깜빡여 물방울을 흘려낸 대만이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건데. 조용히 내뱉은 목소리에 맞은편에 서 있던 사람이 기가 막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뭐 하냐고? 그러는 너는? 너는 지금 뭐 하는 건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만을 공격했다. 씨발, 입만 열면 태섭이, 태섭이, 태섭이. 야, 내가 지금 너랑 데이트하러 나왔지 송태섭 이야기 들으려고 나왔어? 들어주고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 지금 이거 얼마나 오래됐는지나 알아? 심지어 지난주에 너 뭐라고 했어. 일 있어서 못 만난다고? 일? 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송태섭이랑 바다 드라이브하러 간 게 그 잘나신 일이었냐? 나는 뭔 추가 연습이라도 잡혔나 했더니만 기가 막혀서. 너 나는 대체 왜 만나는데? 어?! 나는 대체 왜 만나냐고! 그럴 거면 그냥 송태섭이랑 사귀면 되지, 왜 네 옆에 있는 사람 기분을 엿같이 만드냔 말야! 처음에는 나름 이성적으로 따지던 목소리가 감정이 격앙되며 점점 커져 나중에는 고함이 되었다. 레스토랑 내부가 한순간에 조용해지고 옆 테이블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러나 대만의 귀에는 한 문장을 빼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송태섭이랑 사귀면 되지! 대만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터졌다. 안 그래도 태섭이랑 사귀었었는데 말이야……. 아주 오래전에.

“웃어? 너 지금 웃어? 야, 이 개새끼야.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웃음이 나와?”

사람을 우습게 알아도 정도가 있지, 내가 그래도 너랑 1년을 만났는데! 네가 진짜 어떻게 나한테……! 원망을 토로하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손님. 상황을 보던 서버 두 명이 더 이상의 소란을 말리기 위해 급히 달려왔다. 그 소리에 결국 울음이 터졌는지 상대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 필요 없어. 다 쓰레기 같아. 앞에서 던진 것이 대만의 가슴팍을 강하게 때리고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200일 기념으로 맞췄던 반지와 생일 선물로 주었던 손목시계였다.

“넌 진짜 개새끼야. 다시는 연락하지 마.”

가방을 집어 든 상대는 곧장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대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냅킨을 집어 젖은 셔츠 위를 툭툭 두드렸다. 안절부절못하던 서버들을 괜찮다며 돌려보내고 대만은 테이블 한쪽에 놓인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과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익숙한 전화번호를 툭툭 눌렀다. 신호음이 두세 번 이어졌다. 여보세요.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대만이 용건을 내뱉었다.

“같이 마셔줄래? 방금 헤어졌어.”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만 이어지던 시간이 2, 3분쯤 지나고, 한숨과 함께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입구에 들어서자 바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긴 채 잔을 만지작대는 대만이 바로 보였다. 물까지 맞았다더니 생각보다 훨씬 멀끔한데. 하긴, 1시간이면 진작에 다 마르고도 남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태섭은 대만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제 도착을 알렸다. 멍하니 허공에 박혀있던 대만의 시선이 태섭에게로 향했다. 왔냐. 그러더니 다시 잔으로 눈이 돌아갔다. 태섭은 대만의 잔을 흘끔 쳐다보았다. 커다란 얼음과 함께 위스키가 담겨 있었지만 딱히 입을 댄 것 같지는 않았다. 논알콜로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좀 덜 달게요. 제 주문을 기다리고 있던 바텐더에게 이야기를 하고 태섭은 대만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폈다. 조금 전 어디 가십지에 뜨고도 남을 정도의 이별을 당한 사람답지 않게 정대만은 평화로워 보였다. 반쯤 뜬 눈에는 약간의 피로감만이 은은하게 묻어났다. 화가 나 있거나 속상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드디어 해방이라도 된 사람 같았다. 그걸 보자 입이 마르는 느낌이 들어 태섭은 잔이 나오자마자 음료를 들이켜 목을 축였다.

“좋은 사람 같았는데. 잘해 주지 그랬어요.”

한참 뒤 태섭이 내뱉은 말에 대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술을 한 모금 마신 대만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나랑은 그만 놀고 애인이나 만나러 가라고 했잖아요.”

“그런 소릴 했었지.”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듣더니. 내일 어디 커뮤니티에 목격담 돌아서 소문나도 난 몰라요.”

“돌라고 해. 내가 나쁜 놈인 건 맞는데 뭐.”

“…아니, 그렇다고 선배가 나쁜 놈이란 소린 아니었고.”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잖아.”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말이 목구멍 지척까지 올라왔지만 태섭은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음료와 함께 삼키는 걸 택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더 크고 위험한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오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생각은 삼켜버릴 수가 없었다. 9년 전의 이별과 1년 전의 아침이 태섭의 머릿속에서 선명히 되살아났다. 심장이 불안하게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유리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태섭은 들리지 않게 긴 한숨을 뱉었다. 말이야 핀잔주듯 내뱉었어도 대만의 이별에 제 책임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건 책임이라는 한 단어로 간단히 정리하고 치워버릴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태섭도 공범이었다.

한 팀이 되었으니 연인보다 이쪽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더 많은 것이야 당연했지만, 대만이 태섭을 대하는 태도에는 동료를 넘어선 묘한 뭔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기사에서 ‘브로맨스’ 타이틀을 달 정도로 스스럼없는 스킨십을 하거나―한 번은 승리를 거두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대만이 태섭에게 볼 뽀뽀를 하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얼마 없는 개인 시간을 태섭에게 더 할애해 함께 놀러 다니는 것 같은. 연인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송태섭보다는 뒷전이라는 티가 은근히 났다. 반지까지 나눈 상대가 있는 사람의 행동이라기엔 참으로 부적절했다. 대만의 연인이 이제야 터진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태섭은 대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선배 이러다 차여도 난 몰라요. 그때 가서 내 탓 하지 말고. 그 정도의 말뿐인 경고만 날리며 정대만을 내버려 두었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대만이 제게 쏟는 관심을 내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만과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닫고 일주일 동안 잠 못 이루며 고민을 거듭하다 시계를 들고 찾아갔던 날, 태섭은 내심 그가 저를 잡아주길 바랐었다. 제 거짓말을 따지고 들길 바랐고 그런 건 없던 일로 할 수 없다고 화를 내주길 바랐었다. 질린 표정을 지어도 뻔뻔하게 송태섭의 선을 넘어오던 스무 살의 정대만을 기대했다. 그러면 못 이긴 척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도 있었고, 애초에 그럴 각오로 가기도 했었다. 현관 앞에서 집주인을 기다리면서 숨기고 싶었던 것을 제 손으로 꺼내어 놓아야 하는 두려움을 감내할 용기를 짜냈다. 그러나 대만은 태섭을 잡지 않았다. 현관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잡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십오 분 넘게 서성이는 동안에도 태섭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를 시작했음을 광고하듯 알리기 시작했다. 정대만은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고 이제 두 사람은 영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못 박는 행위였다. 숨 막히는 괴로움에 태섭은 며칠 밤을 숨죽여 울었다. 이 잘못 끼운 단추의 원흉인 주제에 고통스러워하는 제 이기적인 마음을 비난하고 또 비난하면서도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고 이번 감정은 생각보다 금방 가라앉았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눈물에 녹아 나온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며칠 실컷 울고 나자 태섭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이제 정대만 생각 같은 거 그만 좀 해야지. 구질구질하게 남아 있던 건 다 잊고 깔끔하고 담백한 선후배 사이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대만이 올린 데이트 사진들을 일부러 들여다보고 게시글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토할 것 같은 감각을 몇 번이나 꾹 참았다. 한 달을 그렇게 자신을 고문하고 나니 그제야 대만을 보내줄 자신이 생겼다.

조언을 핑계로 불러냈던 건 마지막 확인 같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대만이 날카롭게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태섭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있었던 감정과 사건을 전부 부정하며 모든 가능성을 한 번 더 확인 사살하는 그 말은 분명히 가슴 아프긴 했지만 모든 걸 결심하고 나온 태섭에게는 조금쯤 후련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슬픔과 시원함이 섞인 기분으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그들의 관계를 재정의했다. 송태섭은 정대만의 연인은 될 수 없어도 후배는 될 수 있었다.

물론 결심이야 했어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정대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꾸만 속에서 찌꺼기 같은 감정이 불쑥불쑥 치고 올라왔으므로. 제가 가장 사랑했던 선수와 다시금 한 코트에서 뛴다는 벅찬 감정도 한몫 더했다. 스트레칭을 도와달라는 말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고 우리가 이런 것도 못 할 사이냐는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실수를 덮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부 후배로서지만, 설령 선을 조금 넘더라도 고등학생 때의 우리는 ‘특별한 선후배’였으니까, 관계가 발전하기 전에도 우리는 다른 부원들보다 더 친밀하게 지냈으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는 우리 사이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변명과 핑계였다. 그 발뺌하는 선 긋기를 대만은 의외로 쉽게 납득한 듯 보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정대만도 비슷한 짓을 하기 시작했고 송태섭은 그걸 딱 잘라 내칠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정대만은 휴식 시간이면 송태섭의 허벅지를 베고 눕고 제 집처럼 찾아와 이사를 돕고 차가 나올 때까지 출퇴근길을 함께하고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불러내 시간을 보냈다. 누가 보면 정대만이 사귀는 사람이 송태섭인 줄 알 정도였다. 덕분에 대만을 볼 때마다 태섭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파도치는 심장을 억지로 눌러야만 했다. 다 정리된 관계에서 저를 잔뜩 흔들어 놓는 이 사람이 밉기까지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왜 이러는 거냐는 질문을 던진 날, 대만은 한참 말이 없다가 그 문장을 돌려주었다. 우리가 이런 것도 못 할 사이냐? 말문이 막힌 태섭에게 대만은 계속 이야기했다. 같이 운동하고, 맛있는 거 먹고, 놀러 다니고, 그런 것도 못 할 사이냐고. 난 네 선배고 넌 내 후배잖아.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고 동료잖아. 그럼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너 내가 불편해? 기분 상한 투로 따져 묻는 목소리가 태섭을 달콤하게 유혹하며 깊은 곳을 후벼팠다. 그래서 태섭은 대만을 더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배덕감과 죄악감 사이로 은밀한 충족감을 느꼈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현실을 외면했다.

그렇지만 정말 일이 이렇게 되니 입이 썼다. 단체주문한 간식거리를 들고 훈련장을 찾아온 대만의 연인과 삼자대면했던 적도 있었기에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알아 더욱 미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심으로 정대만과의 관계를 축복해 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태섭은 잔을 놓고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럴 수 없는 내가 제일 나쁜 놈이지.

“연애 또 하고 싶어요?”

질문을 들은 대만이 태섭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대만의 잔은 반쯤 녹은 얼음만 남기고 거의 빈 상태였다. 글쎄. 대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고민 중.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고민 중인 건 또 뭐래.”

“하는 게 좋을지를 모르겠어서.”

“왜요, 한 번 드라마 찍고 나니까 역시 좀 쪽팔려서?”

“드라마는 무슨……. 오늘 일은 별로 신경 쓸 것도 아니야.”

“그럼 뭣 때문에 고민 중인 건데요?”

대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태섭을 완전히 돌아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섭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정한 호칭이었지만 어딘가 공허한 느낌이 있었다. …왜요. 태섭이 조금 불퉁하게 대답하자 대만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연애했으면 좋겠어?”

대만의 질문을 들은 순간 태섭은 숨이 턱 막혔다. 연애했으면 좋겠냐고?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 마음 같아서야 멱살을 틀어쥐고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태섭은 아까 전의 말을 삼켰던 것처럼 이번에도 목 끝까지 울컥 올라온 서러움을 꾹 눌러 삼켰다. 송태섭은 정대만의 연인은 될 수 없지만 후배는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 태섭은 심드렁한 얼굴로 빨대를 물며 최대한 후배 같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선배가 연애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연애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건가.”

“안 할 수도 있지. 후배가 진심으로 부탁하면.”

“…선배가 연애 안 하는 걸 내가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딴 부탁을 진심으로 해요.”

연애 안 하면 정대만 3점 성공률이 더 늘어나나? 태섭이 빈정거리자 대만이 또 한 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긴 하네. 그럼 아까 말은 없던 걸로 해. 그렇게 말한 대만은 잔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옅은 황갈색 액체를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는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자켓을 집어 들었다. 다 마셨으면 가자. 내일 연습 경기 있으니까 얼른 집 가서 쉬고 몸 관리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어깨에 얹혔던 대만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섭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바에서 나온 대만이 자켓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차 열쇠를 꺼냈다. 입구 바깥에서 대만을 기다리고 있던 태섭은 그걸 보자마자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훅 밀어 올렸다.

“차를 끌고 왔어요?”

“원래는 걔 만나는 일정이었으니까. 레스토랑 나왔는데 거기에 계속 대 놓을 수는 없잖아.”

“아니, 그러면 여기서 술을 마시면 안 됐죠. 운전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송태섭 부른 거 아니겠냐. 술동무 해주는 김에 대리도 좀 해 달라고. 술값으로 대리 값까지 퉁치는 거지. 얼마나 경제적이야.”

“…선배는 그냥 입 다물고 앞장서기나 해요.”

푸흐흐 웃음을 터트린 대만이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처 공영 주차장에 대놨는데 주차비가 얼마나 나오려나 모르겠네. 아까 보니까 좀 비싼 것 같긴 하던데. 대만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거리의 소음을 타고 흩어졌다.

태섭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앞서가는 대만의 등을 바라보았다. 듬직하게 곧고 넓은 등이었다. 예전에는 저 넓은 등에 한껏 기대어 어리광을 부린 적도 있었다. 보는 눈이 없으면 길 가는 중에라도 슬쩍 뒤에서 끌어안아 보기도 했었다. 앉아 있는 대만을 뒤에서 덮치고 어깨에는 턱을 얹어 매달리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대만은 그렇게 내가 좋냐며 허리에 둘러진 태섭의 손을 꽉 잡았다. 어깨에 턱을 얹었을 땐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춘 적도 있었다. 창피해진 태섭이 짜증을 내는 걸 보면 황당해하면서도 귀엽다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저 이렇게 바라볼 수만 있을 뿐이었다.

태섭은 단란하던 과거에 저 대신 다른 사람을 끼워 넣어 보았다. 이제는 전 연인이 된 그 사람을 덮어씌워 보았고 그다음으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연예인이나 아나운서의 얼굴을 덧댔다. 제가 아닌 사람과 연애를 하는 정대만을, 또 다른 사람에게 등을 내주는 정대만을 상상했다. 그리고 어쩌면은, 본인을 빼닮은 아이 두엇이 매달리게 내버려 두는 정대만까지도. 문득 혀끝에 피 맛이 돌고서야 태섭은 제가 입술을 엉망진창으로 씹어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 만약에요.”

피 맛 때문이었을까. 태섭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로 연애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예요?”

반쯤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태섭의 말을 들은 대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을 붙박인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대만이 참았던 숨을 토하듯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도 말했잖아. 진심으로 부탁하면 안 할 수도 있다고.”

“…….”

“왜. 부탁하게?”

마지막 문장은 꽤나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대만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태섭은 대답을 꺼내놓지 못했다. 아니라고, 그냥 한 번 물어본 것뿐이라고 얼버무려야 하는데 지퍼라도 채워진 것처럼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만은 단지 질문을 던졌을 뿐이고 대답을 강권하거나 종용하지도 않았는데 시선을 받으면 받을수록 태섭의 가슴은 더욱 오그라들었고 혀는 더욱 굳어졌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농담이었어.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피식 웃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주차장 저기 있네. 빨리 가자.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태섭을 채근하며 다시 발을 옮겼다. 키가 큰 만큼 보폭도 넓어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대만의 등이 훅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대만의 등을 보며 태섭은 제가 이 장면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답을 떠올렸다. 대만과 8년 만에 같이 점심을 먹었던 날. 그날 저를 안아본 후 망설임 없이 등 돌려 제 갈 길을 가던 대만의 모습이 지금의 시야 위에 겹쳐졌다. 그 순간 태섭의 심장이 크게 일렁였다. 놓치고 싶지 않아.

“연애하지 마요.”

태섭의 입에서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앞서가던 대만이 발을 뚝 멈췄다. ……뭐? 대만이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대만이 되물었다. 태섭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막아두고 억눌렀던 게 무색하게 한 번 실체화 된 마음은 더 이상 걷잡을 수가 없었다. 쿵쿵쿵쿵, 갈비뼈 안쪽이 거대한 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엉망이 된 입술을 한 번 더 씹으며 태섭은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선 대만을 바라보았다.

나는 정대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 등에 매달리는 것도, 저 입에서 불리는 이름도, 저 눈이 담는 것도, 저 손이 붙드는 것도 오직 나였으면 좋겠어. 나는 정대만의 옆에 있고 싶고 정대만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정대만이 나를 잡아줬으면 좋겠어. 그게 아무리 버겁고 무겁더라도 상관없어. 지난 1년간 그렇지 않은 정대만을 마주하고 상상하는 게 더 괴로웠으니까……. 아무리 외면하고 누르려 해도 송태섭이 정대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바꿀 수가 없으니까.

“진심으로 부탁하면 들어줄 수도 있다면서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연애하지 마요.”

“야, 송태섭. 내가 그건 농담이었다고…….”

“나 사실 선배한테 거짓말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선배를 다시 만난 이후로도 계속.”

태섭은 살짝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한결 분명해진 눈으로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깊게 숨겨두었던 것을 제 손으로 꺼내어 보일 용기가 생겼다.

“나 아직 선배 좋아해요.”

그 말을 들은 대만은 눈앞에 벼락이 떨어지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충격에 휩싸인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멀거니 서 있는 대만을 바라보며 태섭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거짓말만 한 건 아니에요.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진짜로 선배한테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었더라고요. 그날… 우리 점심 먹고 선배가 집 앞까지 나 바래다줬던 날.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사실은 아직도 선배를 좋아했고 나 편해지자고 그걸 억지로 묻어뒀을 뿐이었다는 걸. 그런데 외면했어요.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던 게 나인데 지금 와서 사실 좋아하고 있으니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무서웠거든요. 똑같은 결말일 것 같아서.”

겸연쩍게 웃어 보인 태섭이 제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건 선배가 식어버리는 거였어요. 그때의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서 선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선배는 항상 나에게 더 많은 표현을 받고 싶어서 조르던 사람이었고. 좋아하니까 잃고 싶진 않았는데 선배가 원하는 만큼, 계속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을 만큼 내가 뭘 해줄 자신이 없었어요.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선배 마음은 그때랑 달라진 게 없는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다시 시작해봤자 똑같은 이유로 고민하게 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모른 척하고 그때처럼 묻고 가려고 했어요. 시간 속에 묻어두면 또 잊혀지고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대차게 실패했지만요. 태섭이 낮게 중얼거리며 신발 앞코로 땅을 툭 찼다. 얼마 전에 깨달았는데 내가 그때 묻어둘 수 있었던 건 선배랑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선배가 내 눈앞에 있으니까 자꾸 선배 생각만 났어요. 모른 척해야 하고 더는 감정 가지면 안 되는데 계속 신경 쓰이고, 쳐다보게 되고, 연락해 줬으면 좋겠고. 정작 선배는 다 정리하고 새 출발까지 했는데 나는 혼자서 아직도 구질구질해서는. 엉망이 된 입술을 한 번 더 질근거린 태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있죠, 선배. 오늘 진짜로 물 맞아야 했던 건 선배가 아니라 나예요. 모른 척하고 묻자고 결심까지 다 한 주제에 미련 남은 걸 못 버려서 선배가 자기 애인보다 후배를 더 신경 쓰는 것도 그냥 내버려 뒀거든요. 그러는 거 받고 있으면 내가 아직도 선배한테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1년 동안 몰래 자기 위로 한 거예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U파울 한 거죠. 진짜 이기적이지 않아요? 그런데 별수 있나, 나는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었는데.”

일부러 두 팔까지 벌려 가며 과장되고 불량하게 스스로를 조롱한 태섭은 희미하게 웃으며 팔을 툭 떨어뜨렸다. 그래서 선배한테 또 이기적인 부탁 하는 거예요. 연애하지 말라고. 내가 다른 사람 사랑하는 정대만 못 보겠어서. 말을 마치고 떨리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쌓여 있던 감정을 전부 인정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 막혀 있던 가슴이 한결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이쪽만의 사정일 뿐, 이야기를 듣고 난 대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태섭을 바라보던 대만이 두세 번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제기랄. 손으로 눈가를 덮은 대만이 끓어오르는 걸 삭이려는 듯 떨리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에 태섭은 속으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진짜 답이 없는걸. 나 힘들 때는 저리 가라고 해놓고 지금 와서는 다 정리한 사람한테 아직 좋아하니까 눈길 돌리지 말라고 하는 거 어디 익명 게시판에서 두고두고 씹히고도 남을 소리잖아. 아마 화를 내겠지? 어쩌면 멱살을 잡히거나…… 한 대 맞을지도 모르고. 더는 후배로 생각 안 하겠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몰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태섭은 제게 원망을 퍼붓는 대만을 상상했다. 고작 상상만으로도 갈비뼈 안쪽이 뻐근하게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잘못 끼운 단추의 시작이 저였던 만큼 태섭은 대만과의 관계가 어떻게 망가지던 전부 겸허히 책임지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초조하게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태섭은 자꾸만 옆으로 빠지려는 시선을 억지로 대만에게 고정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 둬야지.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꽉 깨문 대만이 가로등을 짚고 비틀대며 등을 돌렸다. 단단하던 어깨가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여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금속 기둥을 내리칠 것처럼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숙인 대만이 감정을 다스리려 씨근대는 소리와 긴장한 태섭이 가늘게 내쉬는 숨소리만이 어두운 길가에 울렸다.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정적이었다. 그러던 대만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또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나 정리 못 했어.”

“…네?”

예상 못 한 문장에 태섭이 멍하니 되묻자 대만이 한 번 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정리 못 했다고. 정리한 거 아니야. 나도 그냥…… 묻어둔 거지.”

대만의 이어진 말에 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대만은 반쯤 먹혀들어 간 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패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감정은 사라진 적이 없었어. 후배니 동생이니 뭐니 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야. 너랑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어서 내가 핑계 댔던 거야.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섭이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대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툭, 툭, 차오른 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땅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예요? 정말로? 태섭이 넋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나는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착잡한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린 대만이 다시 몸을 돌려 태섭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태섭은 대만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렴풋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애들이랑 영걸이네 가게에서 모였을 때 너 나한테 거리 뒀지. 이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옆에 있는 거 불편해하고. 그때 느꼈어. 아, 우리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이제는 정말로 끝났다는 걸 받아들여야겠구나. 나는 아직 널 좋아하지만 너는 아닌 걸로 보였으니까. 그래서 하루빨리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아니면 최소한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고. 그냥 같이 운동하는 선배로만 있어야 한다고.”

“…….”

“태섭아. 나는 우리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네가 그랬잖아. 내 사랑이 버겁다고. 내가 너 좋아해서 했던 게 오히려 널 힘들게 만들었다고.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이제야 널 다시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됐는데 내 일방적인 감정 때문에 네가 또 멀어지게 된다면……. 나는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애들한테 사람 소개해달라고 그랬던 거야. 다른 사람 만나면 내 마음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고 너도 내 눈치 안 봐도 되니까. 그러면 선배로라도 네 옆에 당당히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다짐해 놓고 술 취한 애한테 손댄 시점에서 이미 대차게 실패한 것도 모자라 쓰레기 확정이긴 했는데. 대만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네가 시계 내밀었을 때 나는 솔직히 그 자리에서 몇 대 처맞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없던 일인 것처럼 거짓말하는 거 보고 무척 놀랐고…… 많이 착잡했어. 거리 유지 못 한 내 잘못이었으니 당연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했지만, 완전히 없는 취급 하고 싶을 정도로 네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엄청 자괴감 들었으니까. 그래도 나중에는 다행이다 싶더라. 적어도 송태섭한테 그 자리에서 절연은 안 당해서.”

마지막 문장은 농담조였지만 대만이 정말로 농담 삼아 한 말이 아니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항상 몸에 지니던 물건이 없어진 것도 모른 채 자리를 떠났던 걸 생각해 보면 그날의 일은 저뿐만 아니라 대만에게도 큰 고민이자 충격이었을 게 분명했으므로. 그런 일을 잠시라도 이렇게 가볍게 올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대만이 얼마나 괴로움을 삼키고 삼키며 스스로를 비난하고 원망했을지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때의 태섭이 그랬듯이.

태섭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시계만 만지작거리던 대만을 떠올렸고 사진 속 정대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만 마셔대던 제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을 품고 주변을 맴돌면서도 필사적으로 서로를 외면한 채 평행선을 달리려 애쓰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우리는 다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건데. 태섭은 따뜻한 안도감과 동시에 깊은 허망함을 느꼈다.

“…난 선배가 그렇게 수긍해 버릴 줄은 몰랐어요.”

뜨겁게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삼킨 태섭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선배가 날 잡으려 들 줄 알았어요. 왜 거짓말을 하냐고 다그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모른 척할 셈이냐고, 정말로 마음이 없었으면 아무리 취해 있었다지만 나랑 끝까지 갔겠냐고 추궁하면서. 내가 알던 선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요. 갑자기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우리 사귈 때 선배 엄청나게 제멋대로였잖아요? 뻔뻔하고 당당했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만약에 선배가 그런 식으로 굴었으면 인정하려고 했어요. 내가 선배랑 다시 시작하기는 무서워서 모른 척한 거였다는 이야기까지 다 하려고 했고요. 그날 굳이 선배 집까지 찾아간 이유가 그거였어요. 나도 나름 마음먹고 갔던 건데.”

마침내 모든 진심을 솔직하게 내뱉고,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태섭이었다. 그 자리에서 발을 뗀 태섭은 가로등 아래의 대만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홉 걸음. 태섭의 보폭으로는 대만의 눈앞까지 딱 아홉 걸음이 걸렸다. 태섭은 그게 마치 그들의 지난 시간 같다고 생각했다. 막상 걷기 시작하면 이렇게나 가까운데 눈으로 보면 먼 거리.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거슬러 갈 수 있는데도 정말로 되돌아가기엔 묘하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리.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애매한 거리였다. 대만의 눈앞에서 발을 멈춘 태섭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연애 다시 하고 싶어요?”

한참 말이 없던 대만이 태섭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연애했으면 좋겠어? 태섭이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예요? 진심으로 부탁하면 안 할지도 모르지. 흠, 어떻게 할까나. 대만의 대답을 들은 태섭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대만은 아무 말 없이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태섭이 다음에 할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은은한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로 대만의 눈을 마주 보던 태섭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뇨. 연애했으면 좋겠어요.”

태섭의 말을 듣고도 대만은 알겠다거나 싫다거나 어느 것도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슬슬 집에 갈까.”

대만이 몸을 돌리자 태섭도 그 뒤를 따랐다. 가로등 밑을 떠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로 서로 높이가 다른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그 그림자들은 어느 순간 언젠가의 여름밤처럼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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