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인내란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니다

2023.05.27

- 역시 선배들이야. 수준 차가 굉장하네. 

도 감독이 부임한 후로 인터하이 첫 경기를 앞두고 OB들과 30분짜리 가벼운 연습경기를 하는 것이 루틴처럼 굳어졌다. 모교를 최강의 자리에 계속해서 올려두겠다는 감독의 의지에 응해 졸업한 제자들은 기꺼이 달려와 주었고, 은사의 요청대로 후배들을 봐주는 일 없이 매번 전력으로 대응해주었다.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산왕의 현역팀은 OB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곧바로 내일을 위해 한 번 더 비디오 분석에 들어가기로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당연히도 좀전의 시합이 화제에 올랐다. 사실상 대학 올스타팀이나 다름 없는 선수들이었으니, 공격도 수비도 웬만한 연습경기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특히나 정우성이 득점의 축이 될 때면 그 매치업 상대까지 아울러 맡곤 하는 최동오는 오늘 고생깨나 한 입장이었다. 

- 동오 너 아까 엄청 압박당하던데, 괜찮았냐?

- 그러게, 무섭더라. 그래도 낙수보다는 덜 힘들었어.

동오의 말에 여기저기서 분통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휴, 선배들한테도 저 진드기를 한번 붙여줬어야 했는데. 맞아, 낙수 선배 너무 힘들어요!! 저거는 산왕산 독자라뿅. 작년에 왔던 선배가 쟤 보는 표정 봤냐? 모두가 한목소리로 진저리를 치는 당사자인 김낙수는 제일 먼저 말을 꺼낸 동오의 등짝을 후려쳤다. 얼른 갈아입고 큰방에 모이기나 해라. 

낙수는 올해 OB와의 시합에는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와준 선배 중 한두 명은 작년 인터하이 때도 찾아와 겨뤄준 사람이었다. 그때 낙수는 연습게임 후반전 교체 멤버로 들어가 전반전의 득점 3분의 1 가까이를 냈던 가드 선배를 맡았고, 낙수가 붙은 후 OB팀의 가드는 후반전 내내 고작 4점밖에 넣지 못했다. 작년에는 OB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시합이 끝난 후 선배들은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를 쳤다. 징그러운 녀석들.

작년 그 집요한 디펜스에 시달렸던 선배는 코트에 들어서다가 낙수를 알아보고는 눈에 미소를 띠며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낙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

반도 같고 부 활동도 같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김낙수와 정성구가 친한 친구라는 사실은 가끔은 장난 섞인 농담거리가 되곤 했다. 그 반 농구부원 중 최장신과 최단신의 조합. 고목나무랑 매미 아니냐, 너희? 십 대다운 무심하고 못돼먹은 농담에 주로 주먹을 치켜드는 쪽은 성구였다. 입 안 닥쳐, 자식들아? 화를 잘 내지 않는 낙수를 대신해 매번 성구가 목소리를 높여준다는 것을 안다. 

171센티미터. 분명 농구를 하기에 넉넉해 보이는 키는 아니다. 한때는 더 클 거라는 희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키는 몇 년 전부터 주변보다 작았고, 김낙수의 농구는 오래전부터 작은 키와 함께 가고 있었다.

입학 당시 낙수보다 더 작았던 동기가 있었다. 아마 잠깐이라 한들 그 곁에 섰을 때는 무심코 삐딱한 안도감도 들었으리라. 벌이었을까. 일 년 사이 신현철의 키는 20센티미터가 넘게 자랐다. 신현철의 온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는 동안, 김낙수의 몸은 변함 없이 고요했다.

재미있게도 정성구와 김낙수를 단단히 묶어준 것 중 하나도 신현철의 갑작스러운 성장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30센티미터에 가까운 키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 장해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지만, 유대감이란 그런 이유로 얄팍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늘 한두 뼘은 더 컸던 성구는 자신의 크기와 무게가 닿지 않는 곳을 보는 법을 몰랐다. 코트에서는 늘 남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낙수는 높이 뜬 공의 궤적을 바꾸는 법을 몰랐다. 낙수도 성구도, 자기 몸의 어떤 것에 붙들려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절절히 이해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키가 큰 축에 속했으나,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중학교 즈음부터 낙수의 키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산왕에 들어왔을 때 키는 지금과 같은 171센티미터,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소수점 아래로도 그리 큰 변화가 없는 숫자다. 처음에는 살짝 내려다보던 친구들을 몇 달 뒤에는 올려다보게 되는 일이 서서히 익숙해질 즈음, 농구선수를 하면 되겠다는 주변의 말도 찬찬히 사그라들었다.

마음속으로 산왕 진학을 결심한 것도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

 

이 키로 농구 계속해도 되나. 입부식에 나란히 선 1학년들 사이에서 낙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농구공을 잡은 사람이 산왕에 들어온다는 것은 결코 다른 이유일 수 없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린 것도 본인의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현내는 물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여든 곳에 서자, 문득 겁이 났다. 

그때 옆에서 무심한 대꾸가 돌아왔다.

- 농구 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었냐베시?

- 그렇긴 한데.

- 그럼 하는 거지베시. 하고 싶다며베시.

응, 농구 계속하고 싶어. 

그러고 싶어서 왔지, 여기에. 이 키로도.

- 이명헌베시.

- ...김낙수. 베시는 뭔데?

- 베시. 

+

김낙수는 처음으로 한계와 눈을 마주친 날을 기억한다.

- 시야.

첫 피드백 시간에 낙수가 지적받은 것은 작은 키가 아니었다. 키가 작은 만큼 역시 부족한 체격도, 키가 작음에도 딸리는 스피드도 아니었다. 디펜스 좋던걸. 1학년인데도 체력 분배도 잘하고, 전반전 내내 뛰었지? 그런데 시야가 좁아, 주변을 좀 더 파악해. 자신의 멘토가 된 2학년 선배도, 감독님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공만 보지 마, 버티는 힘이 좋은 건 괜찮은데 백코트에서는 주변도 전부 봐야 해. 

키가 작아서 어쩌니, 그 키로 농구 계속하게? 걱정을 가장하고서 몇 번이나 속을 할퀴고 지나가던 말들이 산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똑바로 마주 보고 나자, 남들이 한계라고들 부르던 것은 그저 어떤 수치에 불과해졌다. 산왕공고 1학년 김낙수의 약점은 키가 아니었고, 여기에서 낙수는 농구를 하기에는 작은 171센티미터짜리가 아니라 그저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은 1학년 가드였다.

그것만으로도 문득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그렇기에 신현철의 갑작스러운 성장도 결국에는 그저 하나의 일화가 되었다. 고만고만한 눈높이에 친근감이 들어 몇 주를 붙어 다니던 사이가 한쪽의 배신(이라고 말할 일은 아니지만)으로 갑자기 갈라지는 일은 없었다. 현철의 머릿속에는 잠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낙수는 괜찮았다.

김낙수는 신현철의 다정함이 이루는 형태를 알고 있다. 제 몸이 삐걱거리면서도 쭉쭉 자라는 내내, 현철은 단 한 번도 너도 나처럼 더 클 거라는 위로를 건넨 적이 없다. 무책임한 낙관은 때로는 고작 생채기에 불과할지라도 상처를 낸다. 거스러미를 뜯는 듯한 그 작고 뾰족한 아픔은 현철도 겪어본 적이 있으리라. 무엇으로도 위로를 가장하지 않는 것은 현철의 투박하고도 세심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낙수는 종종 현철과 함께 뛰었다. 신현철이 무너져가는 제 몸을 부여잡기 위해 달리는 동안, 김낙수 또한 더 자라지 않을 제 몸이 그어놓을 선을 넓히기 위해 달렸다. 높이 뛰지 못할 거라면 더 오래 뛰기 위해. 너 때문에 농땡이도 한번 못 부리겠다, 인마. 운동장에 나란히 뻗어 헉헉거리면서 현철이 가끔 투덜거릴 때면 낙수는 웃었다. 어차피 농땡이 같은 거 안 부릴 거면서. 

- 야, 김낙수.  

- 왜.

- 계속 같이 할 거지. 

뭘, 체력 단련을? 농구를? 아니면, 친구 관계를? 하긴 그게 뭐든 상관없다. 현철은 매일같이 새로이 무너지고 있는 제 몸을 손아귀에 쥐려 싸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테고, 낙수는 한계라는 이름으로 제 세계를 제약하려 드는 말들과 싸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끔은 서로를 필요로 할 테니까. 그러므로 두 사람은 언제든 함께 시작할 수 있었다. 

- 응, 계속해야지. 같이.

+

2학년 인터하이 전 트라이아웃 때 김낙수에게는 유쾌한 별명이 하나 붙었다. 저거 자라야, 자라. 물면 놓질 않는다니까. 낙수의 디펜스에 40분을 시달린 3학년 선배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이며 말했다. 뒤에서 여러 개의 웃음이 터졌다.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포지션이 같은 탓에 낙수에게 제일 자주 당하는 최동오였다.

입부 후 한 해가 지나 학년이 넘어갈 시기의 상담 자리에서, 김낙수는 시야가 좁다는 반복되는 지적에 가만히 손을 들었다. 넓게 보지 못한다면, 한 점만은 남들보다 더 제대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중학교 때부터 디펜스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 그러면 주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아예 사라진다. 그래도 괜찮겠니. 

산왕에서는 벤치에도 못 앉던 실력이라 해도 타교로 가서는 거뜬히 주전을 맡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산왕에 남는다. 졸업할 때까지 외부 대회에 얼굴 한번 내비칠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주전이라, 딸 수 있다면 따고 싶지. 하지만 막연한 희망사항만으로 안 되는 것들을 부여잡은 채 산왕에 남아 있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낙수에게는 도통 채워지지 않는 약점만큼이나 분명한 강점이 있었고, 그 사실을 낙수 본인도 도 감독도 알고 있었다. 농구를 하고 싶으니까요, 잘하고 싶거든요. 

도 감독이 웃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길이 명확히 서고 나자, 풀코트를 뛰어도 딸리지 않는 체력이나 맡은 상대를 단단히 묶어버리는 집요한 성질은 무서울 정도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넓지 않은 김낙수는 이명헌처럼 코트 전체를 파악하며 완벽한 패스를 보낼 수는 없다. 키도 체격도 작으니 정성구처럼 안정감 있게 골 밑을 장악할 수도 없고, 몸이 가볍지도 않으니 최동오처럼 백코트를 누비며 사람이 필요한 곳마다 자리 잡을 수도 없다. 단신 선수의 장점과 장신 선수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는 신현철을 따라갈 수 없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사실에 불과하다. 사실은 거기 존재하지만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을 무릎 꿇리지는 못한다. 

본디 참는 일에는 익숙했다. 통증은 낙수에게 육체를 인지하게 했다. 아무리 체력에 자신 있는 운동부 남고생들이라 해도 운동장 열댓 바퀴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한계가 다가온다. 한 발 한 발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지친 허벅지와 종아리의 무게가 느껴지고, 박자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공기가 폐포를 쥐어짜는 것이 느껴진다. 

남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지는 그때부터가 낙수에게는 증명의 시작이었다. 육체가 김낙수라는 사람의 한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낙수 본인이 제 육체의 한계를 결정 짓는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존재를 주장하고 근육 가닥가닥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낙수는 비로소 제대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좌절감과 고통에 짓눌리지 않는 희열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낙수 자신의 싸움에 대체 무슨 말을 얹는단 말인가. 교내 마라톤에서 육상부를 제치고 우승을 놓치지 않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참을성은 패배를 견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고, 또 작지만 그만큼 재빠르지는 못한 몸. 참아내는 건 김낙수가 이 몸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우는 방법이었으며, 재미있게도 그 전투는 대부분 승리를 거두곤 했다. 무조건 남들보다 앞서가야만 하는 순간만 아니라면, 낙수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김낙수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쯤은 늘 익숙했기 때문이다. 

+

산왕 농구부에는 백 명이 넘는 부원이 있고, 그네들은 다들 중학교까지는 농구로 제 자리에서 선두를 다투던 학생들이다. 그중 벤치까지 단 12명. 결코 쉽지 않은 숫자이기에 산왕에서 등번호는 하나하나 중요한 이유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번호 배당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다.

3학년이 되면서 김낙수는 8번을 받았다. 12명 중 3학년이 총 8명, 그리고 9번은 2학년이지만 괴물 같은 정우성이다. 8번은 주전 멤버를 제외하면 3학년 중 유일하게 저 9번보다 앞에 있는 숫자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산왕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청소년 농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저 키로 농구 계속할 수 있으려나? 좀 작지. 느린데. 득점력이 약하네. SG라고? 되겠어, 그게? 

그런가? 되던데요, 할 수 있던데요. 등 뒤의 수많았던 조롱에 8번이 답한다.

- 그러니까, 김낙수. 내일은 네가 스타팅 멤버로 나간다.

인내란 그저 막연히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란, 마땅한 때를 기다리다 마침내 손에 쥔 후 결코 놓지 않는 것이다.

자라의 치악력은 약 180킬로그램. 남의 일이라고 가벼이 비웃는 작자들의 손가락 정도는 거뜬히 끊어먹을 수 있는 힘이다. 이제 그 입에는 꿈이 단단히 물려 있다.

김낙수는 거기에서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OO년 IH 

산왕공업고등학교 출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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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32강전  스타팅 라인업 

4번 이명헌

5번 정성구

7번 신현철

8번 김낙수

9번 정우성.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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