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행복의 감촉.

백호열

괜찮아?

응. 괜찮아.

뼈 아프진 않구?

으응.

호열이 폭신폭신한 침대 위에 길게 엎드려 누워서 말했다. 베개를 가슴 아래에 끼우고 있어서 어쩐지 꾸욱 눌린 목소리가 났다. 일전이라면 겹쳐누운 몸의 무릎을 집어들어서 가슴을 누르느라 나야 하는 야한 소리인데 베개를 끌어안고 있느라 야하기는 개뿔이 그저 오갈 곳 없는 병자의 신음으로만 들려서 죽을 것 같다. 백호가 울적한 얼굴로 호열의 등허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호열이 괜찮다며 웃다가 자글자글한 진동에 몸을 딱 굳혔다. 그것을 본 백호는 표정이 더 엄청나졌다. 그리고 울 기세로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바보짓 하지 마라 백호야. 호열이 넌지시 말했다. 그럼에도 웃음기가 남아있는 목소리에 백호는 겨우 본인 얼굴에 본인 손톱자국이 길게 남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거다. 양호열이 허리를 삐었다. 현관에서 폼도 안 나게 벌러덩 넘어졌다. 이유(198cm, 28세, NBA 프로 리그 소속 선수, 천연 붉은 머리)는 바로 호열의 옆에 있다. 강백호가 호열의 허리를 삐게 만들었다. 창창한 저녁시간에 문질러놓은 백호의 모든 계획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금일의 강백호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진짜로! 연착도 지연도 시비도 없는 쾌적한 출국!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빠르게 절차를 밟은 입국!  사람이 치여서 밀리기만 하던 택시도 코 앞에서 잡혔고 시종일관 이상한 말을 하던 운전기사들도 오늘은 아주 정중하고 과묵했다. 되려 백호가 말을 더 붙이는 정도였다. 잔뜩 들떠서 오늘 날씨가 좋네 어쩌네 말했다. 들 뜰 수 밖에 없다. 당연하다. 오늘은 강백호의 여섯번 째 입국날.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을 제대로 보는 것도 여섯번 째인 귀국날이다. 태양은 쨍쨍 내리고 하늘은 이렇게 청명할 수 없으니 구름마저도 백호의 입국을 축하하는 것 같다. 연신 헤죽거리면서 길을 걷던 백호는 옆에서 걸어가던 어린아이가,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같은 말을 했어도 너그럽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나로 강백호는 마음의 평수를 따지면, 평수가 뭐냐, 범위라는게 대양같은 남자고, 둘로는 어린아이를 좋아했으며, 셋으로 오늘은… 애인을 제대로 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전화 너머로만 오가던 말 뱉는 얇은 입술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뜨겁다. 콧김까지 뿜을 기세로 씩씩하게 걷던 백호는 캐리어를 돌돌 끌면서 호열이 이사를 했다고 말해준 주소를 찾아서 움직였다. 전화기 너머 또박또박 말해주던 말을 두 번 세 번 되짚으면서 적은 글자. 꼬깃꼬깃한 포스트잇을 얼마나 만져댔는지 접고 편 흔적이 거의 닳아서 얇아져 있었다. 

아리울로 140… 아리울로 140… 입안으로 한참 주소를 중얼거리며 도로명을 염불처럼 외우던 백호는 말끔한 오피스텔 한 쪽에 붙어있는 파란색 도로명에 안색이 아주 환해졌다. 호열이 집이다!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러 유리문을 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백호는 정말로 심장이 너무 뛰어서 죽어버릴 수 있지 않을가 고민하던 차였다. 엄청난 시합을 앞에 두고서도 입 쩍 벌리고 하품이나 하던 그 마인드의 강백호는 죽었다. 원래 사랑이라는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명태도 생태도 북어도 만들고 그런다. 아, 자연의 신비네. 나는 양호열 진짜 사랑하네. 

11층 버튼에 블어운 붉은 불이 도착으로 딱 꺼지자마자 바로 1106호를 찾아서 날아가버리는 강백호는, 아니, 걸어가버리는 강백호는 띵동, 차임벨을 눌렀다가 아무 대답이 없자 한번 더 눌렀다. 띵동. 잠잠한 소리. 왜 호열이가 안 나오지. 머리를 복복 긁던 백호는 아차 싶었다. 보통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시간에는 집 안에 없다. 그 말은 즉슨, 집 안은 셀프로 들어가야 했다. 왜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는지 알 도리가 없던 백호에게 어떤 궁금증의 열쇠가 도로로록 하면서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호열이는 천재 애인답게 천재라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시 포스트잇을 꺼낸 백호는 한 귀퉁이에 찍혀있는 비밀번호를 꼭꼭 눌렀다. 띠리링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면 백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복도에 주방. 옆에는 화장실 겸 욕실. 그 옆에 다용도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게 빠진 거실 겸 침실이 눈에 들어온다. 흰색과 남색. 가구는 적다. 딱 필요한 것 외에는 없다. 백호는 현관에 둔 캐리어를 생각하고, 호열의 방을 둘러본다. 물티슈를 찾아 몇 장 뽑아서 호다닥 현관으로 간다. 캐리어를 눕히고 바퀴를 물티슈로 복복 닦아낸 뒤 주방과 중문 사이에 끼어있는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캐리어를 집어든 채 방으로 옮겨왔다. 짐을 푼다. 이건 호열이 줄 선물, 이건 구식이, 이건 용팔이, 이건 대남이, 그러고보니 영감님 한번 만나러 가야 하는데. 고릴라도 보고 잔뜩 자랑을 해야 한다. 생각과 함께 파도처럼 얼굴이 떠오른다. 

이건 속옷이고. 이건… 계속 써야 할 풀건과 정리가 필요한 물건이 지퍼가 열리자마자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백호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일을 중간정도 끝냈을 때 실내복을 꺼냈다. 욕실로 들어가 비행기에서 구겨진 열 몇시간의 먼지를 말끔하게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 말끔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점점 감겨드는 몸으로, 이해했다. 이건 호열의 냄새였다. 그 향긋함에 백호는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물론 죽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의 그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보송한 이불을 말아 다리에 감으면서 백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렸다. 행복의 촉감은 보슬보슬한 간절기 이불의 안쪽면이었다.

***

잠에 들었다. 삑삑삑 하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백호는 남아있던 수면욕마저 화다닥 날아가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호열이다! 백호는 큰 개처럼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현관으로 나갔다. 그러다 간과한 것이 있다. 모두 완벽한 날이었는데, 문제는 집에 왔다는 말을 호열에게 하지 않았다. 뭐야! 중문 앞 백호의 그림자를 본 호열이 노성을 내질렀다. 히야. 귀엽게 구는걸! 백호가 달려들었다.

***

퇴근길 달콤한 집으로 돌아온 호열은 돌연 현관에서 거구의 괴한에게 덮쳐진다는 생각을 했고, 뭐라 방어를 하기 전에 등 뒤에 닫힌 문에 뒷통수를 세게 박은데다가, 악 소리도 내기 전에 허리가 쿵 소리를 내며 현관과 바닥에 끼어서 이상하게 구부러졌다. 허리가 찌릿 하고 아팠다. 으으, 이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지만 해동중 싸움짱의 흔적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주먹을 말아쥔 호열이 괴한의 얼굴에 그대로 찍어버리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보고싶었어! 호열의 시야가 걷히고, 현관의 센서등 아래 짙은 그림자를 등에 업은 백호가 호열을 엉망으로 끌어안고 온 얼굴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백호? 깜짝 선물처럼 들이닥친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호열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기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허리의 격통이라, 아으으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기는 호열을 보며 백호가 사색이 된 것이 약 삼십분 전.

그렇게 호열의 수발을 들어서 벗기고 씻기고 입히고 눕히는 내내 거의 울면서 호열아 호열아 하는 놈이 죄인 강백호 씨 되시겠다. 호열은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중얼거리면서도 간만에 만난 애인이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살살 다루는 것이 새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일단 강백호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들 그것이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말은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좀 제멋대로 다룬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암만 어른이 되었다 해도 뿌리는 재미를 쫓는 바보 1 정도 되는걸 버리지를 못해서인지 웃긴 일 있으면 당장 정수리부터 활짝 열고 보는 호열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 재미있는 짓을 (비록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경향이 있지만) 한다는데 싫어할 양호열이 아니다. 야, 백호야 이거 웃긴다. 다음에 또 하자. 그런데 허리 삔건 좀 그러니까 다른 방식으로 해보는게 어떠냐. 이런 말이 목구멍 끝까지 꼭 차오르는데 그걸 열심히 짓누르는 꼴이 보기에 우스웠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 파스를 붙인 호열의 등허리를 손 끝으로 살살 쓸어주던 백호를 보았다. 아주 울상인데 얼마나 울상이냐면 누가 보면 초상이라도 난 줄 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초상이 아니라 호상인 격인데 이걸 또 이렇게까지 마음을 쓴다. 호열은 깡똥하게 다듬어놓은 눈썹 끝을 늘어트리면서, 백호야, 신경쓰지마. 했다. 그러니까 백호가 돌연 와락 소리를 내면서, 네 일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하는 것이다. 호열은 잠시만 백호를 보았다가 아주 약간 멍청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네. 애인이 신경을 안 써주면 누가 날 신경을 쓰겠어, 신경 제대로 써 줘야겠네. 중얼거리면서 실실 웃기나 했다.

백호가 울적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한 달 있을 건데. 호열이 답했다. 응. 허리 금방 나으려나. 호열이 웃어버렸다(그리고 중간에 허리에 힘이 들어가서 멈췄다). 사나흘이면 낫지. 조금 놀란건데. 백호가 호열을 내려다보다가 살금살금 손을 옮겨 호열의 날개뼈 위에 올라간다. 그래? 그리고 손톱을 세워서 옷 위로만 약간씩 덮인 살을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이 새끼 이거 못 움직인다고 손부터 나가는 거 봐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예상 그대로 몸부터 더듬는 모양에 호열이 어이가 없고 귀엽기도 해서 콧방귀를 흥흥 뀌었다. 

야, 너는 오자마자 애인 몸부터 만지냐? 뭐 할 수도 없으니 주무르기라도 해야겠는지, 아예 호열의 엉덩이 위에 올라타서 옆구리를 양 손으로 삭삭 쓸어올리는 것에 호열에 웃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눗. 아차 싶었던 백호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려는게 침대가 눌리는 방향이라던가 무게중심의 변화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싫은건 아닌데 웃겨서 그래. 웃겨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니 말로라도 긍정을 표현을 해야지 안 그러먼 덩치만 커서 개만치로 꼬리를 말아놓고 끙끙댈 것이 자명해서 호열은 흥흥 소리를 내기만 했다. 

침대 옆에 앉았다가 섰다가 일어나서 돌아다녔다가 하며 백호는 정신사납게 움직여댔다. 시차를 극복하려 낮잠을 좀 잤더니 게게 풀렸던 마음이 지금 호두알처럼 딱 아물린 모양이었다. 원래대로 라면 밤중에 나가서 밥도 좀 먹고 산책도 좀 하고 하며 재미는 모르겠고 나름대로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려고 했건만 다 날려먹은 지금에서야 이런 것 따위, 하등 쓸모가 없다. 다시금 백호는 마음이 젖은 솜처럼 눅눅하고 울적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웅얼거렷다. 미안해. 아마 다섯번째 사과였던 것 같다. 호열은 고개를 살짝 틀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백호의 무릎을 보았다가 어깨나 한번 으쓱였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은 팔을 풀어서 침대의 빈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더블 베드의 이불 한 구석에 구겨진 이불이 놓여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백호가 누워서 호열이다 호열이 하면서 행복에 녹녹하게 젖어있던 곳이었다. 누워. 호열이 담백하게 말했고 백호는 짙은 눈썹을 팔자로 만든 채 호열의 말을 따라 그의 옆에 누웠다. 정직도 하게 반듯하게 천장을 보고 누은 것을 보고 웃어버린 호열은 그대로 백호의 가슴팍을 토닥여주었다. 네가 와 줘서 좋아. 정말이야. 킁, 하고 코 먹는 소리가 들린다. 스물 여덟이나 먹어놓고 이럴 때에는 하나같이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곤 하여서 호열은 참을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백호야.

엉…

내가 너를 안아주고 싶은데, 보다시피 내가 지금 이런 꼴이잖냐.

어엉…

네가 나를 안아줄 수는 있지?

엥?

뭘 그렇게 모른다는 투로 봐. 빨리 안아달라는 소리야.

호열은 웃으면서 백호가 반쯤 몸을 일으키는 것 까지 보다가, 그가 겨울 이불이라도 되는 듯 두툼한 몸으로 등판을 완전히 덮어버려 안는 것을 느끼고 와르륵 웃어버리고 말았다. 백호가 호열의 왁스기 묻은 머리카락을 코로 헤집으면서 온 얼굴과 옷 위로 나온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와서 좋아? 백호가 물었다. 네가 와서 좋아. 호열이 답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커튼은 꼭 닫혀있고 아무렇지 않은 접촉만 남는다. 행복의 감촉은 간절기 이불의 촉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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