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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이름은 닿지 않았습니다.

청춘로망사랑 by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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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철은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았다.

묘한 녹빛이 도는 편지봉투. 철제 락커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렇다고 흔히들 물어오는 러브레터와는 상통하냐 묻는다면, 그것 역시. 신현철은 락커를 착각했나 싶어 도로 열고 닫는 행위를 두어 번 반복했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리고서야 봉투를 제 손에 쥐었는데, 이리저리 뜯어보는 눈빛에는 옅은 의아함이 비쳤다. 봉투 뒷면에 버젓이 적힌 제 이름 석 자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가방 안쪽으로 편지지를 밀어 넣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현철이 형, 어? 편지예요?

신나서 말을 붙여오는 정우성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형이 편지를 받았다고요? 괜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모자라 검지까지 척척 치켜드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턱을 당긴 신현철은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그대로 두었다. 정우성의 목에 제 팔이 감겨 있던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아아, 형! 항복, 항복이요! 제 팔뚝을 두드리는 정우성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합리화까지 마쳤더랬다. 썩 아리지도 않을 목을 움켜쥐고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대충 넘겨 들으며 편지를 가방 깊숙한 곳으로 밀어넣었다.

하여튼.

매를 버는 것도 재주다. 신현철은 뜨거운 뒤통수를 느끼며 자리를 벗어났다. 예정에 없던 스트레칭까지 마친 몸은 하릴없이 가벼웠음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마냥 무겁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남의 성의는 가볍게 여길 게 아니지. 교과서 같은 생각이나 했더랬다. 혹여나 구겨질까 조마조마한 마음도 조용히 들끓었다. 걸음이 빨라진 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이 경건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당장이라도 가방을 뒤적여 편지를 꺼내고 싶었으나 끈적한 몸이 못내 신경 쓰였다. 편지 하나에 이렇게나 예를 갖추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드문드문 받아온 편지가 꽤 쌓인 축이었음에도 그랬다. 역시 색이 문제인가. 그런 맹랑한 결론이나 내린 신현철은 가방을 고이 모셔둔 채 샤워를 마쳤다. 찬물로 몸을 헹궈내고 잠옷을 꺼내입은 채로 다시금 가방 앞에 섰다. 조심스레 꺼낸 각 잡힌 편지지까지 하나의 마음 같다고. 신현철은 내심 설레는 마음을 숨기려 몰래 침을 삼켰다.

안녕, 당신을 봅니다.

나지막한 인사말로 시작한 편지는 음성이 아님에도 꼭 속살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이 일 정도로 담담하고 조곤한 편지였다. 필체를 숨기고 싶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힘이 실린 건지. 일부러 눌러 쓴 듯한 필체는 정갈하고 지나치게 반듯해서 출력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실례되는 생각일까 싶어 다급하게 접어둔 건 둘째고 신현철은 한참이나 편지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널찍한 편지지의 여백이 무색하게도 서너 줄 가볍게 쓰인 것이 전부였다. 으레 듣던 플레이에 대한 칭찬, 어쩌면 칭송, 높낮이 없이 이어지는 평이함에 한껏 묻어난 애정.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어려운 인사를 건넸구나, 신현철은 생각했다.

신현철은 무명의 그 사람이 처음 건넨 인사를 한참이나 곱씹었다. 그다음엔 공백으로 남은 편지지의 말미를 살피고 또 살폈다. 혹여 지우개질 한 흔적 같을 게 있을까 싶어 그랬다. 미련스러운 마음이었다. 감사하다는 생각보다 이 편지지를 도로 접기 싫다는 유치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필체만큼이나 깔끔한 편지지에는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신현철은 제 손으로 글자를 지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을 가해야 했다. 엄지로 편지지의 말간 부분을 두어 번 문질렀다. 역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속살거리는 문자가 귓가를 맴돌 수도 있는 걸까.

제 이름이 지워질까 온갖 공을 들이는 경우는 봤어도 제 이름만 쏙 빼고 편지를 보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진하게 쓴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무지 연상되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이름 없이 글만을 남긴 이의 어조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처음이었다.

여러모로 독특한 편지다.

그런 감상을 뒤로 한 채, 도로 봉투에 집어넣은 편지는 자연스레 서랍으로 들어갔다. 간간이 받아온 편지 틈에 집어넣어도, 그 묘한 녹빛은 단연 눈에 띄었다. 신현철을 그게 봉투 탓인지, 제가 받은 하나의 인사말 탓인지 한참 고민하였으나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감사한 일로 뭉뚱그리고 잠을 청했다. 편지 하나에 일희일비 하기에는 다가올 하루가 있지 않은가.

후로 다시 편지를 꺼내보는 일은 없었다. 말 없는 글이라는 게 그렇듯, 거듭 읽을수록 그 이면까지 탐독하고 싶어지는 것이더라. 간혹 안녕, 누군가 건네는 멀건 인사에 담담하던 인사말이 떠오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래도 가끔, 정말 가끔은 그 편지를 공상의 주제로 삼았다.

안녕, 당신을 봅니다.

두 번째 편지를 받은 건 안녕이라는 말조차 흐려질 즈음이었다. 하지만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 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작은 탄성을 뱉으며 곧장 서랍을 열었다. 색색의 편지 봉투를 손끝으로 흩어냈다. 제 기억 속에 남은 색은 분명 녹색인데, 어딜 보아도 그런 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신현철은 제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닌지,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제 책상 위에 놓인 봉투는 녹색이 아니던가.

의구심을 감추며 편지를 마저 읽어내렸다. 전과 다르게 한 장 가득 글이 들어찬 채였다. 그게 꼭 탄력이라도 받은 모양새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전과 비슷한 내용들이 주욱 이어졌다. 은은한 미소는 당연스레 입가에 들어찼다. 섬세한 칭찬 위로 투명한 애정이 드러날 때면 헛질하려는 숨을 정돈하며 그 문장을 재차 읽어내렸다. 과장이긴 하나, 그러 했다.

잃어버린 건지, 사라진 건지 모를 편지가 야속했다. 이제는 흐려져 버린 편지의 내용들이 아쉽고 아까웠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읽기를 멈추지 않았을 텐데. 첫 문장이 저를 찾는 대로, 눈길이 가는 대로, 양껏 문장을 훑었을 텐데. 안녕, 그 말만을 곱씹으며 공상하지 않았을 텐데. 소란스러운 속에도 불구하고 선을 따라 곱게 접은 편지는 봉투에 담아 서랍 아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녹빛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주 깊이.

안녕, 당신을 봅니다.

그 문장을 제 입술로, 소리 없이 발음하며 걸음을 옮겼다. 베개를 바로 놓고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면서도 안녕, 안녕, 저는 봅니다, 당신을, 그 음절들을 곱씹었다. 제 입가를 귓가를 떠나지 않는 음성을 차라리 읊조렸다. 들리지 않는 글에서 소리를 느끼는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신현철은 제가 꼭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라진 편지까지 하나의 괴담 같다.

그러니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감춰 뒀던 편지를 다시 꺼낸 건 분명 타당한 일이었다. 한을 풀기라도 하듯 아주 오래 편지를 읽었고 그 밤은 할애한 시간만큼이나 길었다. 금세 흩어지는 단어들을 머릿속에 붙잡아두는 건 참 어렵다. 신현철은 제가 편지를 거듭 읽고 또 읽는 것의 이유를 그것으로 삼았다. 안녕, 그 인사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푸른 숲을 아우르는 날새 같은 당신을 압니다.

신현철은 푸른 숲이라는 단어가 참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몇 줄의 선과 드높은 림뿐인 코트를 두고 푸른 숲이라니. 허덕임에 가까운 이 열기는 분명 사막의 것이지, 숲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신현철이 연상하기에는 그랬다. 차라리 바다 쪽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신현철은 이명헌을 떠올렸다. 파랑 하나 허용치 않는 코트 위의 고요함은 차라리 물과 비슷하다고. 범람을 주도하는 근원을 좇아 일렁이는 인파의 양태 또한 그러하지 않던가. 신현철은 그 위를 날새처럼 쏘다니던 정우성의 모습까지 떠올리다가 관두었다. 단 하나도 어울리는 게 없다. 온통 동떨어진 것뿐인데, 상반된 온갖 단어를 얽으면 내가 되기도 하는 걸까.

역시 수신인을 잘못 적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편지를 놓지는 못했다. 글 너머의 그는 분명 저를 투영하고 쓴 것임이 분명하다. 그 사실은 진작 느꼈다. 그럼에도 자꾸만 부정하고 싶어졌다. 단 한 줄에 얽매여 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 편지를 잃어버린 자신이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신현철은 허상처럼 사라진 편지를 복기하고 싶었다. 안녕, 단조로운 인사와 당신을 봅니다, 담백함 뒤로 이어지던 평온한 서술을 따라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놓은 것은 쉽게 사라지고 잊은 것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 한 번의 상실이 깨우쳐 준 교훈이라도 되는 건지, 편지를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사무쳤다. 머릿속에 욱여넣을 생각으로,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면 아예 박아넣을 생각으로 편지를 읽었다. 그것도 안심치 않아 틈틈이 편지의 안부를 살폈다. 이번에는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으리. 그런 다짐이 투영된 행위에 가까웠다.

푸른 숲을 아우르는 날개 같은, 신현철은 인사말 다음으로 그 문장을 외웠고 코트를 누비는 내내 그것을 떠올렸다. 이리저리 몰아치는 정우성을 눈에 담으며 제가 생각하는 날새와 문장 속 그것의 차이를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무엇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른 채 의문에 힘 실을 뿐이었다.

당신 있는 숲에선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소외되지 않고.

세 번째 편지를 받았을 때, 신현철은 시집을 빌렸다. 그런 류의 책과는 그닥 친하진 않았으나, 만일 이 편지에도 답이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한 이면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의 도전이 필요한 순간도 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신현철은 수소문 대신 배움을 택했다. 푸른 숲과 날새. 바로 뒤에 따라붙은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추상성도 흐려지지 않을까. 신현철은 그런 기대를 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담아 차분히 책장을 넘겼다.

다음엔 새가 되고 싶어. 너는 말했다. 새가 되면 가장 높은 나무만 골라 앉을 거야. 흔들리는 나무를 찾아오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그러니 그 문장에 시선이 꽂힌 건 우연이 아니다. 제가 집은 시집에서 숲과 새가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시였다. 신현철은 그 페이지를 아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하나의 과정처럼 그 시를 이어 읽었다. 그리고 너와 나, 새와 나무에 대해 생각했다. 새가 되고 싶다고 한 이유나 가장 높은 나무에 앉겠다고 한 이유.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그럼 아주 흐리멍덩하게나마 깨우치는 것이 있었다.

불투명하게나마 편지의 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즈음, 수로 따지자면 열네 번 정도였을까, 신현철은 거의 사랑에 빠져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떠올리는 데에 할애한 시간만 해도 한 주를 족히 넘을 테였다. 다른 부원의 눈에는 그게 꼭 얼빠진 사람처럼 보였다는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신현철은 이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끌림, 그 정도로 두리뭉술하게 정의할 뿐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판매처를 묻게 되듯, 편지를 쓴 이의 이름을 알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글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너무도 허상이지 않은가. 그런 단정 탓인지, 신현철은 늘 누구라도 붙잡아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시집을 열었다. 편지의 문체는 눈에 익은 지 오래인데도 그것을 낱낱이 뜯어 보며 혹시 어디서 보진 않았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식으로, 제 나름대로 발신인의 흔적을 좇았다. 사랑도 감사도 아닌 그 어중간한 감정만을 품은 채, 깃을 남겨 두고 떠난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하루는 그런 자신이 정말 우스워 웃음이 났고, 어느 하루는 그냥 편지를 도로 가져가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물씬 들기도 했다. 동전의 양면 같은 마음은 매일 같이 전후를 달리 했다. 복잡하고도 끈질긴 마음을 두고, 신현철은 제 인생에 있어 첫사랑보다 더 지독한 사건이 되는 게 아닐까 염려하기도 했다.

역시 잠깐의 헤프닝으로 삼는 게 좋으려나. 그런 마음이 든 건 비로소 감정으로부터 한발 물러설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애초에 발신인을 찾는다는 것조차 무의미한 포부였다. 그런 포부를 가진 것치고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이밀어지는 편지 탓에 잠복 따위는 생각도 않았고, 그깟 편지에 쩔쩔매는 걸 들킬까 봐 선뜻 탐문을 이어가지도 못했다. 곧잘 펼치던 부분만 들뜬 시집을 흘겨보다가 관두었다.

시집 틈에 끼워둔 편지는 한동안 들춰보지 않았다.

단 하나의 뿌리도 허투루 길 뻗지 않습니다.

신현철은 잃어버린 편지를 되찾았다. 그건 의도 없는 우연이었다. 실없이 방문한 그곳엔 주인이 없었고 고개를 든 참에 구석에 튀어나온 종이가 눈에 보였다. 그래서 그걸 집었을 뿐이다. 그게 제가 애타게 찾던 그것일 줄은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잔뜩 꽂힌 책 틈에 끼워둔 게 비집고 나온 건지, 하얀 종이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눈높이 즈음에서 알짱거리는 종이를 그냥 넘기기엔 호기심이 지나쳤다. 쓰레기통으로 갔어야 할 종이를 또 구석에 밀어뒀나 싶어 집은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여 중요한 종이일까 싶어 펼친 것에는 낯익은 필체가 오밀조밀 들어차 있었다. 아니, 필체 따위는 그닥 중요치 않았다. 안녕, 그렇게 시작하는 그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봉투는 어디로 간 건지 알맹이만 남은 편지가 제멋대로 접혀 있었다. 그 탓인지 전보다 번진 글씨 안에는 여전한 애정이, 구겨진 편지지 안에서도 유구히 느껴지는 마음이 있었다.

신현철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편지를 읽어내렸다. 잃어버려서 읽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애정을 제 안 가득 품었다. 두 번, 세 번. 길지 않은 문장을 빠르게 읽었다. 그리고는 원래대로 접어 그 틈에 끼워두었다. 본래 제 것이었던 편지를 가져갈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더라면 거짓이었겠지만, 이 편지를 도로 숨겨야만 했을 그의 마음을 떠올렸다.

뭐 해, 뿅.

자리 비울 때엔 언질이라도 해 주지.

불청객이 요구도 많네, 뿅.

능청스레 웃어보인 신현철은 이명헌을 보았다. 무언으로 얼룩진 짙고 고요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련한 인사를 건네며 돌아가려는 신현철을 불러세운 건 이명헌이었고, 그냥 심심해서 들렀어. 가볍게 얼버무린 건 신현철이었다. 감정 묻지 않은 이명헌의 동공은 어느 때나 흔들림 없다. 그 탓이었나. 신현철은 제가 환청처럼 듣던 목소리가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제가 보는 당신의 다정을 믿습니다.

발신인을 알고 나니 다소 직설적으로 적어낸 말이 꼭 바람처럼 들렸다. 삼키다 못해 게워내려 종이를 붙잡은 주제에 필체를 숨길 생각은 했다는 점이 이명헌다웠다. 지나치게 추상적인 문장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직설이 그러했다. 답을 얻어냈으나 그닥 명쾌하진 않다. 밀어뒀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불투명한 문장으로 한 번, 단단한 필체로 한 번, 굳은 봉투로 한 번. 양껏 감춘 감정에서 망설임을 느꼈다. 이명헌이 어떠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지 알 것 같아, 차마 쉬운 결론을 내놓을 수 없었다.

코트 위를 활보했다. 날새가 무얼까. 너는 왜 그런 단어를 끌어모아 나를 표현하려고 했을까. 적시에 넘어오는 공은 제 손바닥에 알맞게 감긴다. 묵직하게 울리는 체육관의 소음은 한낮의 소란과 가깝다.

농구라는 스포츠는 이상하지, 뿅.

그런가.

저 높은 림에 닿을 기회를 얻기 위해 한참이나 바닥을 기어야 되잖아, 뿅.

신현철은 손 뻗었다.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도약했다. 제 손바닥에 걸린 공을 그대로 림에 집어넣고도 아주 잠깐동안은 공중을 딛고 있었다. 한 번도 주위를 둘러본 적 없었다. 문득 시선을 돌린 그곳에 자리한 인파는 꼭 숲 같다. 장정 하나하나가 나무 같다고. 제가 떨어질 때엔 체육관이 크게 울렸다. 삽시간에 흩어지는 뒤통수를 보다가, 그 틈에서 이명헌을 찾았다. 림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불이 되어야 해.*

제 눈앞에 놓인 녹빛 봉투를 보다가 마냥 흔들리고만 있던 하얀 종이가 떠올랐다. 림이, 그 아래 몇 그루의 사람과 쉽게 날아가지 않던 시선 따위가. 혼란한 상념에 곧잘 읽던 시의 구절을 투영했다. 신현철은 그제야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허무가 아님을 자각했다. 팔자에 없던 시집까지 펼쳐가며 찾고 싶었던 상대가 이명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편지의 처분을 고민하지 않고 관계의 향방을 그리던 모습을 깨달았다. 실없는 웃음은 조소도 자조도 아니었다. 그로써 이미 정의된 일을 한참이나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불길이 번지듯, 그렇게.

주석을 달 때가 되었다.

안녕, 당신을 압니다.

신현철은 하얀 종이를 꺼내었다. 편지지라고 할만 한 것을 선뜻 찾지 못한 탓이다. 책상 앞에 빌붙어 한참이나 빈손에 펜을 굴렸다. 멋대로 끄적여둔 활자 위에는 여러겹의 선이 낭자했다. 구불거리는 모양새가 꼭 고뇌를 표방한 것만 같다. 그러다 재미난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첫 문장을 적어 내렸다. 제게 온 편지의 그것을 모방이라도 하는 것처럼 온힘 실어낸 첫 줄이었다.

안녕, 당신을 압니다.

그 문장을 시작으로 짤막하게 두어 문장 덧붙였다. 시집을 한 권이나마 읽어두길 잘했다. 신현철은 내심 뿌듯한 감정을 감추며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신현철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제가 받은 편지 봉투를 비워냈다. 여태 받아왔던 편지를 모두 뭉뚱그려 한 봉투에 밀어넣고는 빈 봉투에 제가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넣었다. 신현철. 과장스레 곧은 글씨로 적힌 세 글자의 이름이, 이번에는 수신인이 아닌 발신인이 될 차례였다. 제게 온 편지에는 제 이름만 실려 있었으니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수신인 불명의 편지는 반송되지 않고 수거되지도 않은 채 제자리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신현철은 제 가방 깊숙한 곳에 그 편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조금 은밀하게 편지 배달을 마쳤다. 시침이 한 폭은 더 움직인 후에야 그 편지는 제 주인에게 가닿았다. 신현철은 그런 이명헌의 안부를 묻지는 않았으나, 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와닿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천천히 와. 어떤 암시에도 새는 날개깃을 정돈하고. 이명헌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녹빛 봉투가 보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 현철,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뿅, 조금 뒤에 따라붙는 어미. 신현철은 문 앞에 서 있을 이명헌을 반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네 번째 편지가 찾아왔다.


안녕, 당신을 봅니다.

길 잃은 당신의 편지는 옳은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글에 담긴 당신의 마음을 봅니다.

추신, 아직 이름은 닿지 않았습니다.


*양안다,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61p, 암전 인용

*짧은 내용을 실었습니다. 본편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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