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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상열지사(男男相悅之事)

부제: 신준섭의 관찰일지

[안내]

* 라이트 모드에서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 상하편 합본입니다.


"어— 연애는 아직까지 생각이 없어서요. 특별히 하고 싶은 상대도 없고요."

곧이어 컵이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방금 '나는 연애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한 목소리의 주인이 허둥대는 소리가 들린다. 신준섭이 입을 가렸다. 

신준섭,  금년 18세. 그는 지금 남남상열지사(男男相悅之事) 한복판에 있다. 주연은 두 명. 한 명은 존경해 마지않는 같은 학교 선배이자 동아리 주장. 다른 한 명은 경쟁 학교 동갑내기 에이스. 그렇지만 그는 정말이지 옛날부터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위와 같은 사달이 나기 약 한 시간 전, 신준섭은 간만의 휴일에도 여전히 3점 슛 500개를 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꽤 가혹한 소리로 들리지만 그에게 있어 이미 하나의 루틴이 된 지 오래라 오히려 하지 않으면 그는 묘한 불안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정환성격상 이 루틴을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지만 먹는 거에 비해 연습량이 많아 살이 계속 빠지고 있던 터라 이와 관련해 신준섭은 주장으로부터 한소리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준섭은 내키지는 않더라도 섭취하는 열량을 늘리려 노력 중이었고 그 일환으로 근처 카페에 들렀다. 바닷가 근처에 자리 잡은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넓은 통창을 통해 바다가 한 눈에 보였고, 은은한 음악이 낮게 깔린 조용한 곳이었다. 발이 닿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이런 곳이 학교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안 신준섭은 이곳에 간간이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음료 맛이 괜찮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거고 그게 아니라도 이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점원에게 생과일 주스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가지고 나가도 되지만 모처럼 남은 휴일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이때 뒤편 파티션에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렸다. 꽤 넓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많지 않았던 터라 집중한다면 내용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남자 두 명이라. 칸막이 뒤쪽에 자리를 잡은 걸 보면 꽤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준섭은 사려깊게 주의를 돌려 그들의 의향을 존중해주었다. 과일이 그라인더에 갈리는 소리, 그리고 약간의 짤그락거리는 소리. 아마 곧 음료가 나올 것이다. 기대감에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뒤이어 한 남자의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신준섭은 손가락을 멈췄다. 점원이 신준섭 앞에 곱게 갈린 블루베리 주스를 내놓았지만 아까까지의 기대감은 살짝 증발했다. 

'으음. 공교롭네.'

저 낮게 깔린 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버린 탓이다. 저 목소리를 모를 리 있나. 생각해보면 학교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아는 사람 한두어 명 만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 마주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게 어제 "오늘은 휴일이니 푹 쉬고 다음 연습에서 보자"라는 말을 남긴 사람을 오늘, 우연히 들어온 카페에서 마주칠 확률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둘의 집도 반대 방향이니 사적으로 학교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우연이 신준섭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지. 주장 — 정환 선배는 바운더리 내의 사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싫어하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한다는 건 불쾌한 일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건 유쾌한 일이다. 그나마 자기니까 아는 척할 때를 기다리는 거지 1년 아래의 후배였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정환 선배!'하면서 있는 대로 애교를 부렸을 것이다. 준섭은 두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려는 의지를 살짝 조절해 본인의 호기심을 약간 충족시키고자 했다.

"어— 연애는 아직까지 생각이 없어서요. 특별히 하고 싶은 상대도 없고요."

…결과적으로 그게 악수(惡手)로 통할 줄 몰랐지만. 

*

꽤 충격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준섭도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깨졌나 몰라. 직원이 달려와 엉망이 되었을 테이블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 다쳤어요? 걱정이 묻어나오는 다정한 말로 상대의 안위를 확인한다. 어쩐다. 지금 컵이 깨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깨졌을 텐데. 준섭은 입에 주스를 머금었다. 남의 연애에는 참견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신준섭은 1여년 간 누구보다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뼈에 새겨 넣은 채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정환 선배가 안쓰러워져 진지하게 위로를 해줘야 하나를 잠깐 고민했다. 무색하게도 선배는 뭐라 말하더니 곧장 짐을 챙겨 나간다. 신준섭은 슬쩍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렸다. 아침에 같이 연습하자고 호장이를 부를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부르지 않길 천만다행이다. 일단 이 사태를 설명해주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준섭은 농구 이외 다른 것에 그다지 힘을 쏟고 싶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다소 '천둥벌거숭이 같은 면이 있는 후배를 진정시킨다'와 '저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미션을 한 번에 성공시킬 재간이 없다. 그러니 신준섭은 아주아주 현명하게 처신하기로 했다. 이 일은 평생 함구한다. 우리 주장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부활동을 위해서. 뒤이어 상대도 길을 나선다. 저 특이한 머리 스타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선배와 (준섭의 눈 앞에서) 이리저리 잘 엮이는 탓에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능남의 윤대협이다.

그렇다. 지금 막 해남대 부속고의 이정환이 능남고의 윤대협에게 차였다. 다만 여기에는 약간 문제가 있다.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정환은 짝남 윤대협에게 차였다.

2. 그러나 윤대협은 이정환이 자신을 열렬하게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모른다.

3. 그러니 그는 저 대단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자기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차버렸다..는 사실을 모른다.

4. 하지만 이정환의 1년 후배인 신준섭은 저 사실을 안다.

5. 그리고 추측하건대 둘은 맞관이다.

준섭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말짱한 얼굴로 다잡았다. 하지만 그에겐 '눈치가 빠르고 남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어쩌다 보니) 들었다.'라는 죄목이 있었고 그 죗값을 다 치르기 전까지는 이들의 연애(삽질)사에 (강제로) 관여될 운명이었다. 


충격적인 발언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준섭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혼자 덩그라니 남았다. 기분은 기분이고 주스에는 죄가 없으니 최선을 다해서 음미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 만약에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아마 꽤 즐거워했을 거다. 그러나 정환의 오랜 순정을 (우연히) 알아차린 준섭으로서는 이 일을 마냥 가십으로 여기기엔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저 무신경한 사람에게 먼저 코 꿰인 이정환이 조금 불쌍하다는 감상 정도는 내놓아도 괜찮을 거 같다. 신준섭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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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농구부에 들어오고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남진모 감독 뒤편에 열을 맞추어 정렬한 선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까무잡잡한 피부와 근육이 꽉찬 몸, 그리고 같은 고등학생이라 믿어지지 않는 남성미가 물씬 흐르는 외모를 가진 이정환이었다. 이정환은 입학부터 그 해남부속고의 주전 자리를 꿰찼고 전국대회로 직행해 그 이름을 휘날렸다. 그러니 갓 입학한 새내기 입장에서 그는 감히 올려다 보기 힘든 선배이다. 그가 후배들을 훑자 준섭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모두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신준섭입니다. 센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중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키가 큰 지라 센터를 맡아왔고, 그렇기에 여기서도 당연히 센터를 맡을 거라 생각했다. 선배들도 그리 생각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한두어명이 보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남진모 감독님과 정환은 그리 동의하지 않았는지 묘한 표정으로 신준섭에게 눈을 떼었다. 

완전 초짜는 아닌지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전 2학년들과 같이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한 학년 위 선배인 고민구와 센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피지컬을 가진 이정환이 이 도와주었다. 한 학년 차이라 당연히 밀릴 줄 알았다. 그러나 밀리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신준섭은 짙은 굴욕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그 둘은 그를 툭툭 치며 나름대로의 위로를 보냈지만 그들은 발 밑이 까마득하게 무너지는 감각을 과연 알고 있을까. 곧이어 남 감독은 준섭에게 센터는 무리라는 판결을 내려주었다. 그 때 준섭의 표정이 어땠는지 남 감독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고스란히 준섭의 몫이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 첫 번째 선택지는 농구를 그만두는 것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해남 부속고 농구부에 남아있되 주전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포지션을 변경하여 당당히 주전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길은 세 가지이지만 사실상 해답은 하나였다. 신준섭은 에너지를 허튼 일에 쓰고 싶지 않은 거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일에 2인자로 남아있고 싶지 않다. 그건 싫다. 명확하게 보이지 않다고 해서 호불호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마음이 시키고 (그때까진 몰랐던) 탁월함을 발휘할 세 번째 선택지가 낙점되었다. 

포지션 변경. 말은 쉽다. 그러나 농구든, 하다못해 다른 일이라도 한 가지에 정통한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여태까지 해오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볼 수 있겠냐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준섭이 남 감독에게 포지션을 변경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그랬듯 말이다. 아무리 짧은 기간이었을지라도 체화된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아예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는 건 더욱 무리다. 하지만 한 쪽에서 드리블을 연습하던 이정환은 조용히 웃었고 신준섭은 물러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준섭은 정환에게 물어보았다. 자신의 무엇을 보고 그리 웃었느냐고. 그 때 이정환은 멋쩍은 기색으로 답했다.

"그런 표정을 보았는데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래서 신준섭은 그의 실력과 관계없이 다음 주장은 이정환이 될 거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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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500개씩 던진 3점 슛은 그를 풋내기 티는 나더라도 슈터라고 불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선수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전통 강호를 대표할만한 위치에 다다르지 못했다. 이 점을 알고 있기에 그는 1학년 인터하이에서 후보로 남았다. 해남부속고에게 거추장스러운 예선전은 없었다. 첫 번째 시드에서 예선 3차전을 모두 뚫고 올라온 학교와의 결승 리그 진출을 위한 경기. 그것이 해남부속고의 인터하이 첫 경기였다. 결과는 뻔했다. 상승(常勝)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해남부속고는 경기 내내 상승하였다. 단 한번의 주도권도 내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형세가 지속되자 종래에는 상대 팀의 사기가 꺾였다. 그들을 상대로 준섭은 경험을 쌓았고 그렇게 해남부속고는 더블 스코어로 결승 리그에 진출했다.

결승 리그 첫 상대는 능남고등학교였다. 해남부속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능남 또한 지역 내의 유구한 강호 고등학교이다. 15년 연속 우승했더라도 승부에 있어 100%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환은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저리 불타는 눈을 하고 있지. 준섭도 승부욕이라면 어딜 가든 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정환의 집념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한다. 그의 집념은, 1학년 때 그의 이름을 드높였고 2학년 때 그를 제왕이라 칭하기 부족함 없이 그를 단련시켰다. 준섭은 한 발 뒤에서 정환의 등을 응시했다. 같은 선수이기에 알 수 있다. 올해 그는 최고다.

능남고의 선수들이 나왔다. 준섭은 벤치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의 선배가 툭툭 치더니 한 사람을 가리킨다.

"저 선수 보이지?"

"네."

"쟤가 바로 유 감독님이 직접 데려온 선수야. 이름은 윤대협."

옆에 2m짜리 장신이 버티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긴 하지만 저 정도라면 적어도 키가 180 초중반은 될 것이다. 나보다 약간 큰 정도려나. 마른 사람도 아니지만 엄청 덩치가 좋은 사람도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날렵하다고 해야지. 저 사람이 한 시합에서 47점을 넣었다고? 그런데 저런 분위기라고? 능남의 에이스라 불리우는 사람이니 승부욕이 없을 리는 없는데. 이 분위기 속에서 저런 맑은 얼굴을 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별나네. 윤대협이라는 사람에 대한 신준섭의 첫 감상은 이랬다. 방금까지 불타오르던 라커룸에서 벗어나 저런 표정을 보니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준섭은 슬쩍 정환을 바라보았다. 

'어라'

준섭은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져 두 눈을 깜빡였다.

경기 결과는 89대 98로 해남부속고의 승리였다. 능남이 강호고이긴 하지만 해남부속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살짝 부족한 학교라는 평을 듣곤 했다. 그렇기에 남 감독은 완벽한 승리는 어려울지라도 버거울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1학년 스코어러 윤대협과 장신 센터 변덕규의 균형 잡힌 공수 매치로 인해 생각보다 경기진행은 박빙이었다. 남 감독은 경기 내내 침음했다. 윤대협씩이나 되는 인재를 남 감독이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 있나. 당연히 해남에서도 윤대협을 스카우트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윤대협은 넉살 좋게 웃으며 능남으로 진학하기로 했다는 말을 그에게 남겼고, 남 감독은 오랜만에 선배 유 감독에 대한 투쟁심을 불태웠었다. 그런 윤대협이 능남의 유니폼을 입고 해남을 괴롭히니 남 감독은 작년 말의 패배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투쟁심을 불태웠다. 이에 감화된(?) 선수들 또한 다른 때보다 더 고군분투했고 결과적으로는 왕자 해남답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한편 신준섭은 남 감독과는 다른 의미로 윤대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정환의 그 표정이 사고의 방아쇠를 당긴 탓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지.'

유리잔에 담긴 주스가 반정도 남았다. 남은 주스를 포장해 달라 부탁하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굳어진 몸을 풀었다.

성격상 자기 이야기를 먼저 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남의 이야기라면 — 그것도 추측이 8,90프로인 — 더더욱 하지 않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완벽하게 본인만의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준섭은 반박할 여지는 있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려 이 추측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 이정환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섭은 정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확신도 있다. 그는, 준섭의 일 때도 그랬지만, 퍽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다만 그것이 농구 선수로서의 자아에만 국한되었다면 좀 덜 힘들어 했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애정 관계에 있어서 먼저 코 꿰인 사람이 더 고통 받는 법이다. 

*

준섭은 고이 포장된 주스를 들고 길을 나섰다. 짭쪼름한 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준섭은 여름 바다보다는 겨울 바다를 더 좋아했음에도 쾌청한 날씨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약간의 변덕을 부리기로 결심했다. 바닷길을 따라 산책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 전국 대회에 진출한 학교들의 비디오를 돌려보며 개인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다. 하루 연습량도 채웠으니 이 정도의 변덕은 허용 범위이다. 

방파제를 지나 낚시터로 들어설 무렵 익숙한 인형이 보인다. 불과 한두어 시간 전에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이다. 신준섭은 아는 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신준섭을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으음 만나서 반갑긴 한데, 이름이?"

다행히 윤대협은 한번 붙어본 사람은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리고 신준섭은 윤대협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타격을 입을 정도로 그를 가깝게 여기지 않았다.

"신준섭. 너와 같은 2학년이야."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그러고는 다시 낚싯대를 드리운다. 준섭은 낚시 스팟을 열심히 찾아다니던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그에 대해 냉혹한 감상을 속으로 남겼다. 

"혼자서 낚시?"

"원래는 일행이 있었는데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먼저 가버렸어."

덤덤하게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무룩한 어조다. 뜻밖의 반응에 준섭은 입을 오므렸다.

‘여러모로 노력한 모양이네.’

준섭은 적당한 말로 위로를 건네며 짧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직접 붙어보니 윤대협이라는 선수는 어때요?"

"윤대협?"

정환이 씨익 웃었다. “아직 어리지.” “그렇구나.” 

"그렇지만 꽤 발칙한 구석이 있어."

"오. 어떤 면에서요?"

"그 녀석, 나중에는 내 플레이를 따라하더라고. 마치 내가 할 수 있다면 자기도 할 수 있다는 듯 말이야. "

"꽤 재미있었나 보네요."

"나중에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돼."

공을 퉁퉁 튕기며 정환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라이벌 김수겸 선수도 있지만 그 선수 이외에도 그를 뛰어넘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점이 못내 흥분되는 모양이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그에게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처음 봤을 때 특유의 분위기와 ……때문에 같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저리 만개한 미소를 보면 어느 정도 나잇대가 맞춰지는 듯 하다. 준섭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3점 슛을 던졌다. 클린이다.

"그런데 정환 선배."

"응?"

"경기 끝나고 그 사람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아.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했어."

 

삐끗. 공이 림 위를 뱅그르르 돌다 들어간다.

"전에 만났을 때는 되게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코트 위에서 만나보니 그냥 남남으로 지내기 좀 아쉬워서."

"…언제 만났는데요?"

"새학기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즈음? 쟤가 그 윤대협이구나 싶어서, 그냥."

"그 때 통성명도 한 거에요?"

"응. 그런데 경기 직전에 말 걸어보니까 내 이름을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더 열 냈던거 같기도 해. 나는 쟤 이름을 기억하는 데 쟤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조금 열 받잖아."

누군가 준섭을 봤으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가 말을 이어나간다. 

"인맥은 쌓을수록 나쁠 건 없고. 게다가 나를 따라 잡을지도 모르는 루키인데 친하게 지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알죠. 잘 알죠. 선배 인맥이 좋다는 건.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스타일이지 먼저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쪽에서 다가와 안면을 트면 모를까. 그 정도의 특혜를 받으려면 긴밀한 접점이 있지 않는 한 그런 경우는 전무했다. 그래서 가끔 농구부원들끼리 정환을 두고 타고난 제왕의 재목이라는 이야기를 쑥덕거리곤 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그에게는 사람이 저절로 꼬였고 그는 그들에게 호감을 받는 데 아주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그를 데려와 지도자로 추대한다. 그리고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척척 업적을 쌓아 올리는 사람. 그러니 제왕이라는 별명은 과장된 건 아니다. 조금 재수 없긴 해도. 

그런데 그런 인간이 먼저 움직였다? 보통 때라면 '변덕이네'하고 넘겼겠지만 경기 시작 직전의 그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바람에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선배 진짜 왜 그랬어요. 보기와는 다르게 호기심이 충만한 준섭은 정환을 붙잡고 짤짤이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저 표정을 보아하니 물어봐도 속 시원한 답을 얻기는 글렀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다. 물어본다 해도 "나도 사람인데 가끔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넘길 것이다. 저봐라. 지금 옆에서 "그런데 너 오늘 유난히 집중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 그게 다 누구 탓인데. 잠깐 사이 수많은 말이 스쳐지나갔지만 하나같이 입 밖에 내기 곤란한 나머지 준섭은 연습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왕께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려 하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나저나 윤대협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저런 사람 까먹기 쉽지 않을텐데.

 


집에 돌아와 가볍게 몸을 씻었다. 바닷바람의 습한 기운이 물을 타고 흘러내린다. 적당한 비디오를 골라 TV와 연결하였다. 예상보다는 늦어지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비디오를 보며 움직임을 연구할 생각이다. 오늘 중으로 눈에 익히고 내일 연습 때 정환 선배나 민구 선배에게 도와달라 하자. 야무지게 내일의 계획까지 머릿속으로 착착 정리하고는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 떄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네— 신준섭입니다."

"마침 집에 있었구나."

"선배?"

"휴일인데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지금 시간이 되는지 묻고 싶어서."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그러는데 1대 1 상대를 부탁해도 될까?"

준섭은 입을 다물었다.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간 예감과 함께 등줄기가 차가워진다 - 다른 사안일 수도 있었지만 이미 그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준섭은 확신하고 있었다. 응.. 머리가 복잡하겠지. 충격도 많이 받았겠고. '준섭이라면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어디 가서 말하지도 않을 거고 객관적인 의견을 내줄 거야.' 이런 사고의 흐름이 눈 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자신을 높게 평가해주는 건 고맙고 쑥스럽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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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농구 코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예상보다 5분 가량 늦어져 초조해진 나머지 약간 무리해서 달렸다. 코트에 도착하니 정환은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가슴께까지 차오른 숨을 삼키고 준섭은 정환에게 다가간다. 그가 반갑게 맞이한다.

"왜 그렇게 서둘렀어. 천천히 오라니까."

"생각보다 준비하는 데 좀 걸려서요. 마음이 급해서 달려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사과할 사람은 나지. 네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불러낸 건데 응해줘서 오히려 감사해야 하고."

적으로 만나기는 정말 싫지만 우리팀 주장일 때는 이렇게나 상냥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인데 어쩌다. '잔 잡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준섭도 그 속담에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정환은 준섭에게 공을 넘기고 몸을 낮추었다. 덩달아 준섭도 공을 쥔 채로 정환의 눈을 응시한다.

*

땀에 흠뻑 젖어 움직임이 거추장스러울 때 즈음 가로등 불빛이 들어왔다. 이 이상은 어두워서 위험하다. 그도 그리 생각했는지 허리를 세운다. 휴우. 누구랄 것도 없는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 나온다. 정환이 물을 건네자 준섭은 반가로이 마신다. 정환은 한 살 어린 후배를 묵묵히 바라보다 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휴일인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마침 집에 있었고, 딱히 일정도 없었어요."

1대 1이 아니더라도 준섭은 이미 3점슛 500개를 하고 온 지라 완벽한 휴일도 아니었고 정환도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미안했던 모양인지 눈썹을 늘어뜨리곤 준섭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맥락 없이 왜 자신을 불러내었고 미친 듯이 농구를 하였는지 짐작은 가는 터라 준섭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기대 받은 후배로서 아예 모르는 척하는 것도 영 예의는 아닌 지라 그는 나직히 물었다.

"그래서 머리 복잡한 건 좀 나아졌어요?"

"…음?"

"아까 전화로 그랬잖아요. 그래서 좀 괜찮아졌어요?"

망설이는 눈치를 보니 아직 마음을 굳히진 못한 모양이다. 준섭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지금이 기회다. 재빨리 아무 말도 안했다는 듯 정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았다.

"준섭아."

"네?"

"잠깐 이야기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이럴 때만 재빠르지. 무언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선배만 아니었으면 붙잡고 한소리 하였을 것이다. 아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정환이 사랑의 열병을 1여년 간 앓고 있지만 않았어도 당장 뭐라고 했을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간단하게 몸만 풀고 말하면 되지 왜 몇 시간 동안 사람을 붙잡고 미친 짓— 호장이도 어울려주지 못할 수준이다 — 을 한 것이며 세상에는 호기심에서 그쳐야 할 이야기가 분명히 있는데 대체 왜 나에게 못 알려줘서 안달인데. 목젖까지 올라오는 억울함과 울분을 창백한 낯빛으로 삭이며 준섭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훗날 이정환은 신준섭의 저런 미소는 쉽사리 볼 수 없으며 저 표정 앞에서는 한마디의 헛소리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건 바야흐로 몇 년 뒤, 이정환과 윤대협이 롱디(장거리 연애)로 인해 잠시 애정 전선이 평탄하지 않을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신준섭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이었다. 


주체가 본인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이건 본인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준섭은 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태를 지적할까 하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껏 굳은 결심을 했는데 거기에 초를 치는 것도 영 모양새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의 체면도 좀 살려줄 겸해서.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게 되네요. J에게 신경 쓰이던 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J는 D와 잘해보려고 이리저리 노력했고 그 결실을 보아 J와 D는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척이 없어 J는 D를 떠보았더니 D에게 있어 J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맞아요?"

"응. 잘 정리했네. 그런데 왜 A, B도 아니고 J와 D야?"

"그냥 생각나는 알파벳 아무거나 넣은 거에요."

정환은 해명이 석연치 않았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섭 나름대로 이미 당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신호이자 동시에 약간의 심술이었으나 저쪽에서 특별한 반응이 없으니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그리고 기왕 자비로워지기로 한 거,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처음부터 따져봐요. 그 J라는 사람은 왜 D라는 사람을 신경 썼나요?"

"J는 어떤 일을 아주 잘하는데 그 일과 관련해서 J 못지않게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어. 그래서 J는 D를 궁금해한, 그런 이야기지."

"라이벌 의식 같은 걸까요?"

"글쎄. 100퍼센트는 아니다만 아마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었…, 을지도 모르지."

음. 방금 전에 생각한 거 취소. 준섭은 방금까지 하해와 같았던 인내심을 갖다 버리기로 했다.

한편으로 자꾸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신기했다. 인내심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지만, 여기서는 그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이정환 입장에서는 좀 서운할 수도 있는 소리지만…… 나름대로 신준섭 입장에서 할말은 있다. 먼저 (이정환은 몰랐으나) 신준섭은 이 지지부진한 연애사를 1년 정도 지켜본 사람인지라 당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답답해 돌아버릴거 같은 심정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누가 되었든 간 이런 내밀한 영역을 침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정환이 티를 너어무 잘내는 바람에 반강제적으로 알아차렸고 오늘 하필 쉬러 간 타이밍에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짜증이 안날래야 안날 수 없다. 더 억울한 건 이걸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점이다. 이정환 본인이 먼저 이야길 하지 않는데 제3자인 준섭이 이야기 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이정환이 무고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기 에너지를 못이겨서 남에게 미친듯이 풀어버리는거나, 일면식 없는 사람이 들어도 본인 이야기인데 그걸 애써 추측이라는 식으로 말을 바꾸는 건 상대를 열받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 다음은요?"

"다음?"

"관심은 성애적인 호감의 시작이지만 모든 관심이 다 그렇게 발전하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까지는 모르지."

"……그래요. 제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네요." 

정환은 슬쩍 후배를 바라보았다. 여상한 어조지만 그의 초점 나간 눈을 응시하고 있으니 어쩐지 놀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준섭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저는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

"뭐?"

"선배가 알려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누구 이야기인 줄 알고?"

"지금은 모르죠. 그런데 정환 선배랑 가까운 사람들께 여쭤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지 않을까요? 이 정도로 선배가 상세하게 알고 있다면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겠고요."

"다른 학교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그쪽도 가능성은 있는데 그리 크진 않아 보여서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민구 선배께 여쭤보죠."

정환의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준섭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 3점슛 500개를 매일 하는 사람이다 — (생긴 것과 다르게) 눈치가 빠르고 3년 동안 몸을 맞부딪혔던 고민구라면 이것이 곧 이정환 본인 이야기임을 금방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 — 이정환이 짝사랑 하던 상대에게 차였다 — 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위인이다. 적어도 농구부 안의 모두는 알게 될 것이다. 계산을 마친 이정환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코트 위에서 처음 맞붙었을 때"

고민 상담을 원했으면 진즉 이렇게 나올 것이지. 신준섭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떠오른 반면 이정환은 낭패감에 스포츠 타올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래서 좀 진정되었어요?"

"…."

"시간 더 필요하면 말해요."

"…괜찮아. 진짜로."

후배의 배려심 넘치는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어이없게 들켜버린 짝사랑이 부끄러웠던 건지 정환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귀가 발갛게 익어 있다.

이정환은 딱히 선배라고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거나 터무니없는 주문을 넣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농구부에 들어와 1학년 때부터 그를 지켜본 민구 선배나 익현 선배는 별의별 모습들을 다 봐온지라 그가 점잔을 빼는 모습에 대해 피실피실 웃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짝 굳은 후배들을 위한 맘에서였지 정환 선배의 위신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 따윈 없었다. 그러니 그가 지닌 농구부 주장으로서의 — 혹은 전국구 유명인사로서 — 위상은 정환 선배의 타고난 성정과 더불어 오랜 동료들의 배려 넘치는 서포트가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짝사랑 좀 들통난다고 해서 여태 쌓아온 위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이정환의 이야기지 '제왕' 이정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길고 긴 짝사랑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건 아주 많이 민망한 일이었다. 기실 꼭 이정환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준섭은 자신이 파악한 정환이라면 이 부분은, (자신의 사례처럼)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이상, 누구보다 철저하게 감추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가 너무 잘난 탓에 생긴 일종의 강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해보자. 이정환은 인간으로서도, 선수로서도, 선배로서도, 주장으로서도, 그리고 남자로서도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이 아니다. 준섭 또한 자신이 앞으로 살면서 이정환 이상의 남자를 마주치기 어려울 거라 내심 여기고 있었다. 농구 실력? 말해 무엇하나. (비록 고교생이지만) 농구 선수로서의 커리어?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다. 17년 우승 신화에 제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 누가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인간성? 공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누구보다 타인으로부터 신임을 얻는 데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다. 그와 (공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사적으로는 어떠한가. 그의 3년 중 2년을 함께한 준섭이 아는 한, 그는 단 한번도 분란을 일으킨 적 없다 — 여기에는 애정사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해 그가 마음을 먹었다면 한번에 여러 명 사귀는 것도 가능했을 거다. 그가 연애에 관심이 없고 지나치게 성실하고 건실한 사람이라 안한 거 뿐이지. 듣기로는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번은 신발장에 러브레터가 들어와 있고 특정 기념일이 되면 책상에는 상자 따위가 잔뜩 쌓여있다고 한다 (몇번 나눠먹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겸손한 성정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아마 이정환 선배 본인은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에 가까운 판단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관심이 있다 못해 좋아 죽으려는 사람은 연애 할 생각도 없고 연애 할 만한 사람도 없다 해버렸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충격이 큰 건 알겠는데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어요?"

물론 신준섭에게 있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기에 이정환은 누구보다 빨리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

"이제 좀 솔직해져 봐요. 상대는 윤대협 맞죠?"

"…맞아. 언제부터 알았어?"

"음.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데. 거의 처음부터?"

"네가 생각하는 처음이 언제인데?"

"작년 인터하이 결승 리그요."

이정환은 입을 떡 벌렸다. 

"작년 인터하이?"

"네."

"나는 그거 나중에 돌이켜보고 알았는데."

"정확히는 그 때 선배 표정 보고 조금 묘하다 생각했어요."

"너 되게 눈치가 좋구나."

"칭찬 고마워요."

정환은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너.. 그러면 내가 연습 끝나고 대충 뭘 했는지 알았겠네."

"어— 체육관 뒤편 공중전화에서 통화한 거요?"

"…진짜 다 아는구나."

"그래서 호장이가 선배 따라가려고 하는 거 몇 번 말렸죠. 저는 괜찮은데 걔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요." 

“나는 대체 왜 그런 헛된 시간을 보낸 거지.” 정환의 망연자실한 넋두리를 들으며 준섭은 영혼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툭 터놓고 말해 남자끼리라 약간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신준섭은 아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준섭은 이정환이 누굴 좋아하든 간에 해남부속 농구부원들은 약간의 소란은 있을지언정 응원해주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가 센터에서 슈터로 포지션을 바꾼다고 했을 때 그 가능성을 의심하긴 했어도 무모한 도전을 깔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습이 끝난 이후 그의 특훈 때 공을 던져준 사람들도, 자세를 봐준 사람들도, 허덕이던 그를 부축해 준 사람들도 모두 농구부원들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법을 잘 알고, 그것에 닿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는 이들이 저 애틋한 마음을 짓밟을 리 없다. 신준섭이 바라본 해남의 농구부원들은 모두 상냥한 사람들이다. 그 상냥함에 자신이 도움을 받았으니 확언할 수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봐요. J가, 아니 선배가 윤대협 선수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나중에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언제부터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된 거에요?"

"……너 되게 직설적이구나."

"내숭 떨지 말고요."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물음에 이정환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쿡 찌르면 터질거 같다.

"그냥, 처음은 관심이 맞아. 그런데 맞붙어보니까 알겠더라고. 나는 무엇이 되었든간 얘를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걸."

역시 타고난 로맨티스트. 생각보다 본격적인 고백에 준섭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여기서부터는 외줄타기다. 자칫 잘못된 리액션이 나갔다가는 다시 내숭 모드로 돌아갈거다. 원래도 신중한 면이 있지만 더욱 신중을 기해 준섭은 두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었다. 손 아래 땀이 차오른다.  

"평소에는 느긋한 녀석이 농구 코트 위에서 타오르는 게 눈에 선하게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 승리에 대한 탐욕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얘 나랑 동류구나 싶어 반갑기도 했는데…"

"그랬는데요?"

"코트 위에서 당할대로 당했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다는 집념에 가슴이 선득했어. 아무리 눌러도 꿋꿋하게 일어나는 모습이 기특하고, 그리고."

"그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지. 그거면 된 거 아니겠어?"

그러곤 씩 웃는다. 준섭은 공감하긴 어렵지만 (일단 취향이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정환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준섭도 농구에 한해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만큼 그가 말하는 '사랑스러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하게 짐작된 터이다.

저보다 못한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저를 증명하고자 고군분투하는 걸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나보다 늦게 진입한 사람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나, 결국은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있기에 내가 올라온 위치까지 그가 올라오길 바라고, 나와 같은 지평을 내다보길 희망한다. 그것은 비단 농구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승부와 도전으로 점칠된 이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한 법이었다. 이정환은 이미 올라올대로 올라와 있는만큼 같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남달랐다. 그러니 윤대협이 예쁘지 않을 리가 있었을까. 거기에다 경기 도중에 윤대협은 이정환을 비롯해 그곳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증명해보였다. 이정환이 선보인 플레이를 저의 것으로 소화해 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때 끝나고 나에게 뭐라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다음 번에는 제왕을 뛰어넘을거에요. 기필코.' 맹랑하게도 말이야."

"그렇네요."

압도적인 패배를 겪었음에도 제왕에게 자신은 여전히 당신의 도전자임을 선언했다. 이정환이 그 배짱과 자신감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배길만 하다. 그러곤 윤대협은 윈터컵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 제왕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왕의 자리를 탈취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렇다보니 걔가 선수가 아닌 순간들이 궁금했어. 농구를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도쿄에서 왔다는 데 어디서 누구랑 지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중에는 내가 없는 시간의 그 녀석이 궁금해지기까지 했어."

계속 듣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여전히 붉어져 있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시작부터 끝까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지켜보는 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닌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많이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이정환이 이런 사람이라 좋았다. 지극히 부끄러워서 이리저리 숨기는 노력은 해도 막상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진지하게 물어오면 결코 피하는 법이 없다. 이정환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었을까. 신준섭은 결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정환이라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사람이다. 저 사람의 어떤 모습에 제가 반한 것인지 언어로써 내뱉을 수 있다는 게 그 증거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저편에 잠든 감각이 갑작스레 깨어나 생동하고 의식은 그것에 속절없이 이끌려 단 한 사람만을 쫓게 된다. 얄궃게도 그것은 제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어 이리저리 휘둘린다. 그렇기에 가끔은 터무니 없는 짜증이 치밀기 마련이라 결국은 후회할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정환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 물살에 기꺼이 제 몸을 내준 것이다. 윤대협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 혹은 그 이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저에게 스며들게 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신준섭은 이정환이라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 깨졌음에도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뚱맞게도 윤대협에 대한 호감도 약간 깎여나갔다.

'우리' 주장이 뭐가 부족해서. 안 그래도 준섭은 그다지 공명정대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그의 편애가 누구에게로 쏠렸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

"그러면 선배가 직접 고백하는 게 어때요?"

"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야. 그런 말을 들으니까 영 어렵네."

“그럴 수 있죠.” 준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예 공감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 쪽은 아예 모를걸요. 애초에 그 사람이 그렇게 섬세한 쪽도 아닌거 같고."

'남자답게 눈 딱 감고 고백해라!'는 준섭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걸 둘째치고더라도 상대방한테 그런 말을 들었다고 저리 전전긍긍하는 섬세한 남자에게 그렇게 막무가내식 고백을 강요하는 것도 영 별로다. 기왕이면 서로에게 부담이 덜 되는 방향으로 풀어가는 게 낫다 — 사실 윤대협의 부담은 신준섭이 알 바 아니었지만. 내 사람도 아니고 살짝 미운털이 박힌 탓이다.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정환의 뒷말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진짜 혹시나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선배 연애 처음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연애가 아니라 고백이 처음인가?” 준섭의 혼잣말에 정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 더 앓았던거군.

“그렇지만 선배는 연애 처음은 아니잖아요”

“뭐?”

“저 몇 명 들었던거 같은데.”

“누구에게?”

“민구 선배에게요.”

“…걔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냐.”

준섭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저런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좀 아깝지.

“이런 상황에서 하기에는 좀 미안한 소리이긴 한데. 해도 되요?”

“뭔데?”

“선배 팔자를 선배가 스스로 꼬았다는 생각이요.”

“오늘 너 되게 신선하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밀어 붙일 수 있을 때 밀어 붙여야 한다. 준섭이 말을 이었다.

“난생 처음 고백을 하는데 상대가 되게 어려운 사람이잖아요.”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냐.”

“선배 취향 독특하네요.”

“막나가기로 한거야?”

“1년 정도 쌓인 후배의 원한이니까 받아들여요.”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네가 눈치가 빠른 탓인데.”

“선배가 티내고 다녔다는 생각은 안들어요?”

“농구부에서 너만 아니까 그건 아니지. 다들 바보게?”

하마터면 “네. 그런거 같아요.” 라고 할 뻔했다. ‘진짜 한마디를 안지네.’ 이러다가는 밤을 새울 거 같아서 준섭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요. 일단 제 의견은 선배가 고백하는 게 낫다는 거에요.”

“그건 나도 동의해.”

아는 사람이 차일피일 미뤄? 다시 한번 성질이 올라왔지만 애써 온화한 낯으로 내리 눌렀다.

“문제는 우리쪽이 상대방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거죠. 선배는 진작에 다 잡은 물고기처럼 즐겁게 줄다리기 하다가 갑자기 한 방 먹은거고.”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한 적 없어.”

‘진짜로?’ 다시 한번 준섭이 초점 나간 눈으로 정환을 응시하자 정환은 슬슬 엉덩이를 내뺐다.

“지금 도망치면 안 도와줄거에요.”

“알았어.”

“지금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두 개로 좁혀지는데. 하나는 그 사람이 진짜로 정환 선배를 연애 상대로 안보고 있다는거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환이 신음을 내뱉었다. 어휴 진짜.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대.

“다른 하나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뭔데?”

“그 사람이 본인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거나 혹은 자각했어도 자기부정을 반복하는 경우요.”

“그게 가능해?”

“선배가 느끼기에는 돈독한 사이인데 다른쪽은 말이 다르니까요. 왜 로맨스 소설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아 나 저 사람 좋아하는구나.’ 라고 깨닫고 나서도 계속 부정하는 거.”

“왜 부정을 하지? 좋은 것만 해주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제 앞의 분은 왜 그럴까요. 왜 저렇게 초월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걸 왜 다른 사람이 못하는지 저에게 묻나요.’ 준섭의 초점이 다시금 흐려졌다. 그리고 내심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올렸다. 까딱하다간 험한 소리가 나올 거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어떠한 가능성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자. 정환 선배는 자기 감정에 확신을 가지고 윤대협을 잠재적 연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고는 통수를 맞았다. 안타까워라) 그런데 윤대협은 그렇게 될 생각이 없다. 명백하게 갈리는 부분이 생겼다. 과연 누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나. 이정환? 아니면 윤대협?

준섭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윤대협 쪽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렇게까지 정환 선배를 확신에 차게끔 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번의 고민도 길지 않았다. 다만 그건 정교하게 짜여진 논법이 아니다. 준섭은 절반 가량을 제 충동에 맡겼다.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아주 많이 사적인 질문인데.”

“말해봐.”

“둘이, 그러니까, 연인 사이에 하는 스킨십 같은거 한 적 있어요?”

다시 정환의 귀뿌리가 발갛게 달아 오른다. 

“미안해요. 말하지마요. …제발.”

준섭의 단호한 거절에 정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준섭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런 종류의 스킨십을 한 쪽이나 받아준 쪽이나 끼리끼리 잘 만났다. 아니. 애초에 그거 이전에 대체 둘이 언제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럴 시간은 있었나. 지난 인터하이랑 윈터컵 때 능남에게 고전했다는 이유만으로 훈련 강도는 이전과 비교도 못할 정도로 빡세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바이트를 하러 뛰쳐 나가는 이들이 속출했고 자신조차 3점슛 500개를 잠시 포기할까를 고민했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랬단 말이지??

“배신감 장난 아니네요.”

“갑자기 여기서?”

“누구 때문에 그렇게 구른건데 그 누구 씨와 주장이 눈 맞았다는게요.”

“……아직 눈 맞은 거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해요?”

“….”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선배 졸업할 때까지는 이 이야기 감춰두는 게 좋겠어요. 안 그러면 폭동날 거 같아요.” 

높은 확률로 내가 주도하게 되겠지. 부장(副長)으로는 민구 선배가 낙점이다.

“그래놓고는 연애할 생각도 없고 연애할 상대도 없다라……….”

다 때려치울까. 내가 무슨 영광을 얻으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분명 혼잣말이지만 급격하게 음산해진 어조에 정환은 연신 팔을 쓸어내렸다. 장담하는데 아직 차가운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지금의 밤바람보다 제 눈앞에 있는 후배의 텐션이 더 낮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 했는데 보통이라면 고백만 안 한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지인이라고 생각은 안하니까요. 선배가 정상이에요.”

중얼거림이 이렇게까지 소름끼친 적이 있던가. 입이 저절로 말라버린 나머지 정환은 급하게 스포츠 드링크를 꺼냈다.

“듣기 좋은 말을 해줄까요 아니면 조금 아프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이야기를 해줄까요?”

“……후자로 부탁해.”

“그 정도쯤 되면 다른 사람들은 선배 어장 관리 당했다고 할걸요.”

정환이 머금었던 음료를 뿜었다. 콜록거리는 정환의 등을 무성의하게 쓸어내리며 준섭은 말을 이었다.

“너는 무슨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든가요.”

눈에 충격이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긴 채 정환은 준섭을 바라보았다. 이정환은 몰랐겠지만 폭탄선언이 떨어진 직후보다 그의 동공이 더 흔들리고 있었다. 동공은 흔들리다 못해 손까지 떨고 있으니 말해 뭐할까만은.

한편 솔직히 말해 준섭은 100% 진심이었다. 그리고 꼭 그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준섭은 공명정대한 사람이 아닐 뿐이지 이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럴수록 그의 관찰력은 빛을 발한다.

준섭은 정환이 대협에게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던 때처럼 지금도 확신한다. 이정환은 어장 관리 당한게 아니고 둘은 서로에 대해 적당한 호감은 있지만 확인을 못했을 뿐이라는 걸. 첫번째로 이정환은 로맨티스트이지 호구가 아니다. 준섭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이정환이다. 아무리 이지가 흐려졌다 하더라도 상대가 자신을 이용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충분히 판단하고도 남는다. 두번째로는 서로에게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정환이 그와 이렇고 저런 무언가를(말하기도 싫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정환은 무언가를 강요할 사람도 아니다. 그러기엔 그가 너무 신사적인 사람이고 무엇보다 상대는 키 190의 신체 건장한 남정네이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정환은 사람이라면 타고났을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하는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고 판단한 뒤 일을 벌였을 것이다. 승부사 치고는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속한 이정환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근거는, 이정환이니까. 기본적으로 온화하지만 승부욕은 확실한 사람. 제가 얻고자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정환 선배는 윤대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지만 신준섭은 조금 다르다. 

윤대협 또한 이정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네요.”

“무슨 뜻이야?”

“아까 말했잖아요.”

“대협이가 본인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부정하고 있던가.”

“어느 쪽이든 좋은 거 아니에요? 호감이 있다는 거잖아요. 물론 이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본 거지만."

“그렇지만 저는 정환 선배의 판단을 믿어요.” 준섭이 씩 웃었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왕이라는 호칭은 비단 농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감히 단언컨대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그 칭호를 내려두지 못할거다.


“그런데 선배.”

“음?”

“선배는 만약에 윤대협에게 재능이 없었다 해도 같은 마음일까요?”

“준섭아.”

“네.”

이정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해남의 정신은 뭐지?”

“해남에는 천재가 없지만 최강이다, 요. 아하……”

“내가 너를 재능이 없다고 등한시하든?”

“아뇨. 전혀.”

“그런데 왜 애정사에 있어서 그 녀석의 재능 유무가 중요하지?” 그가 진심으로 되물었다.

“그렇네요.” 준섭이 선선히 인정했다. 우문현답이다.

“덧붙이자면… 너 능남에 가본적 없지?”

“그쵸.”

“내가 2학년일 때 밤늦게 간 적이 있었거든. 감독님 심부름으로 말야.”

“그런데요?”

“여기 언제 와보겠어 하는 심정으로 체육관에 가봤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야. 그치만 그 녀석은 누가 봐도 재능이 넘치는 선수였거든. 나보다도 더. 그래서 반반이였어. 내심 있었으면…하고 바랬는지도 몰라. 하지만 없다고 해서 비난할 마음도 없었어.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잖아. 알다시피.”

“어떻게 되었나요?”

“그때도 연습하고 있더라고. 그러다 제 풀에 지쳐서 고꾸라졌고.”

“….”

“돕지는 못했어. 인터하이에서 한번 본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것도 우습잖아. 그러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거 같아. 꼭 해남에만 천재가 없는건 아니더라고. 능남에도 천재는 없어. 그저 농구가 좋아 미치려고 하는 사람들만 있지. 그래서 결론을 내렸어. 난 걔가 나를 뛰어넘을만한 능력이 없다 해도 좋아했을 거야. 맑디 맑은 얼굴 아래에 감춰진 호승심도, 더 아래에 감춰진 집요함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열의까지 모조리."

“선배라면 그러고도 남을거라 생각했어요.”

“그래?” 이정환 선배가 선선히 웃는다.

“나 그렇게까지 무른 사람은 아닌데.”

“선배는 바운더리에 들어온 사람한테는 좀 무르긴 해요.”

“그래서 섭섭해?”

“어— 조금?”

준섭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가 재혼하겠다고 새 어머니를 데리고 왔을 때 자식들이 느끼는 거랑 비슷하겠네요.”

“부담스러운데.”

“부담가지라고 한 소리에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본인의 선택이니 견뎌요. 그리고… 선배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저 좋으라고 한 일이에요."

"잘된다면 가장 먼저 알릴게."

"기대할게요."

정환은 오늘 본 모습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준섭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것만으로도 준섭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

"슈팅 가드 부문, … 해남부속고 2학년 신준섭."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서 있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것도 숨죽여 도약만을 기다려온 사람이라면. 신준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뭐라해도 스포츠맨이고 스포츠맨이라면 응당 가질 투쟁심과 향상심을 잔뜩 끌어안은 사람이었으니까. 지역 내 No.1 슈팅 가드로 호명되었을 때 준섭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전진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연습은 버거웠고 한계까지 몰아붙인 육체는 아팠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끊임없이 마음을 갉아먹는 의심이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필수였지. 그러기에 준섭은 버텼다. 

그리고 해냈다. 그거면 된다.

앞에서 밝은 얼굴로 열의를 다해 박수치는 정환 선배가 보였다. 그의 성취를 순수하게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지나치게 들떴던 탓인지. 정환 선배 옆에 있는 또다른 MVP를 못 본 건 그의 실책이었다.

.

“형. 정환이 형 못봤어요?”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아까까지는 같이 있었는데 잠깐 어디 간다고 급하게 나갔는데 지금까지 안왔어요.”

“화장실이라도 갔나보지.”

“너무 오래 걸려서요.”

“오래 걸릴 일인가보지.”

“아, 형!”

호장이의 비명을 한귀로 흘려듣고는 준섭은 발을 옮겼다. 후배가 아주 약간 정환 선배와의 분리 불안이 있긴 해도 이 정도로 보채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례적으로 자리를 오래 비운거긴 하다. 곧 나가야하니 슬슬 찾기는 해야할 거 같아 준섭은 잰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살면서 신준섭은 한번도 운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정환의 연애사와 관련해서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거 같다.

누가 알았을까. 전호장이 그토록 찾아다닌 이정환을 단 5분만에 찾아낼 줄은. 그리고 하필이면 요주의 인물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할 줄은.

그리고 신준섭은 그저, 아는 사람 둘이 입맞춤 하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혀라도 깨물고 싶다. 

그래도 잘 풀린 걸로 보이니 그걸로 되었다. 최소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테니까.

.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준섭은 생각했다.

정환 선배. 한턱 낼 사람이 더 늘었네요.

준섭은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댔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떠는 중학 친구를 꼭 붙잡고 뒷걸음질쳤다.

태산이가 정환 선배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후기]

언젠가는 합본으로 만들어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안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해봤습니다. 덕질 초반에 썼던 이야기라 지금과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네요. 그렇지만 역시 원작 기반의 이야기가 재밌긴 합니다. 아마도 저 자신이 만든 이야기니 더 재밌는 걸지도요.

이 이야기의 목적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신준섭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고찰, 다른 하나는 ‘할 거 다했으면서 연인만 못 된 정환대협’. 덧붙이자면 비록 선후배 관계지만 준섭이라면 정환 군에게 서슴없이 말을 내뱉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소위 말해 ‘기존세’군요. 말을 아끼곤 있지만 가차없이 평가하고 욕하고… 후배 앞에서 작아지는 이정환이라니. 생각만 해도 즐겁네요.

올리면서 퇴고를 많이 거쳤습니다. 상편은 이미 한 번 손을 봤는데 하편은 손을 안보고 있다가 합본으로 만들면서 한 번 수정했습니다. 중간중간에 비어있는 부분도 채웠고요. 빠른 시일 내에 포스타입에 수정본을 올리도록 할게요.

이 글에 애정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그렇지만) 유달리 서툴고 매끄럽지 않은 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애정 어린 댓글과 하트를 찍어주신 분들… 제가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른 (새) 글로 찾아뵐게요!

추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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