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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통합 온리전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기념 무료배포본

00

실재하는 것의 존재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면 인식하지 못할 관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01

녹음이 산뜻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우거진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눈에 들어가 눈물이 핑 돌았다. 기본적으로 그는 호오(好惡)가 강하진 않았지만 이 여름날은 호보다는 오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성싶다. 몸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불쾌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운동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나. 이를 반증하듯 길 위에는 사람 머리털 한 자락 보이지 않는다. 윤대협은 턱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탁 내뱉었다. 응. 조금은 시원한 거 같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에 한치도 가리우지 않은 볕이 정수리 위로 내리쬔다. 왠지 모르게 가렵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기껏 시간을 들여 매만진 머리가 망가지는 게 탐탁치 않아 그는 자신의 원초적인 욕구를 꾹 억누르기로 했다.

그 원초적인 욕구라는 게, 참 모호했지만 말이다.

가려운 곳을 긁고 싶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 쓰다듬어 주길 바란 건지.

기껏 비워놓은 머리가 다시 한 사람으로 꽉 채워지자 손등으로 턱을 훔쳤다. 미처 닦여나가지 못한 땀이 팍 튀었다. 이내 대협은 허리를 푹 수그리다 번쩍 고개를 들곤 힘껏 내달렸다.

운동을 업으로 삼으면 이게 좋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부터 움직여서.

*

사랑의 존재를 믿어?

선배, 형은 가끔 뜬금없는 질문을 툭툭 던졌다. 저도 엉뚱하기로는 어딜 가서 빠지진 않았으나 — 놀랍게도 알고는 있다 — 이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워낙 무게감 있게 태어난 사람이라 입을 다물고 표정을 지우고 있으면 어렵게 느껴져서 그렇지 입을 여는 순간 예의 첫인상은 흐려지고 또 다른 색이 덕지덕지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게요.

그래서 저와 형은 죽이 잘 맞았다. 엉뚱한 질문에도 진지하게 고민해주기 때문에. 가끔은 생각을 이루는 기저의 차이로 인해 한 번씩 치열한 언쟁을 벌였어도 그건 둘에게 있어 지극히 사소한 문제였다. 한 사람은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릇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름을 기꺼이 감내할 정도로 애정이 컸기 때문이다. 제조사는 다르더라도 톱니바퀴의 수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면 어떻게든 굴러가듯이.

사랑의 존재보다는 저 자신의 존재를 더 믿어요.

그거 재미있네.

형은 본인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저는 두루뭉술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반면, 형의 사전에는 ‘어중간함’이라는 단어가 없는 듯했다. 조금 — 사실은 아주 유심히 — 지켜본 결과 그건 그의 태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매분 매초 매순간 전력을 다해 승부에 임하는 사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다. 저는 꽤 요령이 좋아 적당히 에너지를 분산시킬 줄 알았기에 그런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비효율적이니까. 다행스럽게도 운도 머리도 따라주어 적당히 해도 남들 이상으로 무언갈 해낼 수 있었던 윤대협에게 있어 그 형의 방식이란 하나같이 낯선 것이었다. 형이 이를 알았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형은 단 한 번도 제 삶의 방식이라던가 사고의 틀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이견 한 점 없는 다정한 눈에 저가 담겼던 순간 윤대협은 쿵쿵 고동치는 저의 가슴을 인지했다.

02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본다면 자신은 꽤 정신 나갔던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정환의 행동 양식도 사고방식도 모두 꿰뚫고 있던 주제에 그런 대답을 내놓았으니 말이다. 윤대협은 언제든지 이정환 입안의 혀처럼 굴 수 있었다. 그의 사고방식과 철학에 맞는 대답을 내놓음으로써 그는 이정환의 공감도 긍정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윤대협은 그러기 싫었다. 그건 그때의 자신이 꽤 멍청했다고 생각하는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청개구리 심보? 옛 동료의 질문이 뇌리에 꽂힌다. 아니. 그보다는 말이야….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하기 힘들다면 실없이 웃으면서 유들하게 넘어가면 될걸. 그건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인데도 — 어렵다.

“너는 누구한테 복잡하게 생각한다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닌 거 같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이며 툭 내던지는 말이 아프게 박힌다. 끄응. 강아지가 낼법한 소리를 내며 대협이 머리를 감쌌다. 얼씨구. 그 와중에도 아침부터 정성을 들인 머리를 망가뜨리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손이 슬쩍 떠있다. 묘하게 한심한 눈으로 수그린 대협을 바라보던 동창은 야무지게 얼음까지 와작 씹어먹곤 휴지통을 향해 3점 슛을 날렸다. 오, 클리어.

“야… 내가 커피까지 쐈는데 그러고 가기냐?”

“더는 들을 필요도 없어서.”

그러니까. 하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지. 연신 혼잣말로 제 머리통을 꽉 채운 말들을 웅얼거린다. 그러니까 그래서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데. 이리저리 지적하고 싶은 점은 많았지만 46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의리를 생각하니 마음이 찜찜하여 동창은 다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창 해가 중천에 있는 시간. 짙푸른 하늘을 장악한 태양이 만들어 낸 그늘 아래 두 남정네가 나란히 쭈그려 앉아있는 모습도 나름대로 장관이라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여기는 자신들의 모교 근처라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골라도 왜 이런 곳을 고른 건지. 동창은 못마땅한 눈으로 대협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옆선을 타고 쭉 흘러내리자 대협은 손등으로 땀을 훔쳐낸다. 한 대 칠까? 원체 더위에 약했던 그에게 남은 아메리카노의 자비가 끝나갈 때 즈음, 대협이 입을 열었다.

“너는 사랑의 존재를 믿어?”

“….”

불러놓고 10분간 가만히 끙끙거리기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퍽 양심이 없는지라 동창은 짜게 식다 못해 썩창난 표정으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응. 그래. 미안. 저도 양심이란 게 아직은 살아있던 모양인지 대협이 금방 꼬리를 내렸다.

“너 더위 먹은 거 아니지?”

“아니야. 아마도.”

“그래야지. 니가 양심이 있다면.”

난데없이 고민 상담에 끌려 나와 심기가 있는대로 불편해진 터라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튀어 나가지 않았다. 얘는 왜 이러고 사냐. 고교 때의 인연을 끝으로 이제는 그저 그런 동창이 되어버릴 거라 생각한 때도 있었고, 그래서 내심 서운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사양이다. 길가다 우연히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뙤약볕에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영 성미에 맞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놈은 사람을 붙잡아두고는 별스러운 말도 안하다 갑자기 사랑 타령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가출할 지경이다.

“뭐가 문제인데?”

드디어 그의 입에서 해결의 실마리, 와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대협이 눈만 도륵 굴려 그를 쳐다본다. 저건 좀 무섭네. 시답잖은 생각을 미뤄두곤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이상하다며. 그러면 그냥 확 고백해버리면 되잖아.”

“이게 사랑인지 잘 모르겠어. 사랑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착각이면 어떻게 해? 사슴과도 같은 눈망울을 마주한 동창은 노성을 한 번 내지르곤 자리를 떴다.

이 새끼 진짜 뭐하는 놈이냐. 동창은 기필코 다시는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

형. 바빠요?

아니야. 들어와.

그럼 실례할게요.

찬 바람이 얼굴을 확 스쳤다. 바깥에서 달고 들어온 땀방울이 급격하게 식자 대협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환이 급히 제 겉옷을 벗어주었다.

미안. 생각을 못했네.

괜찮아요. 다음에는 겉옷이라도 갖다 둘게요.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는 대협의 말에 정환이 씩 웃었다. 방금 부러 던진 말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공간에 사람을 잘 들이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정환의 품 넓은 가디건을 두른 채 대협은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창가에 늘어선 이름 모를 식물의 잎사귀를 유심히 쳐다보던 대협이 고개를 들었다.

아틀란티스 세덤이야. 예쁘지?

네. 되게 특이하네요.

연두색 잎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크림색이 앙증맞다. 대협이 손으로 톡톡 건드리자 덩달아 통통 튀어 오른다. 그 주변을 감싼 노란 별꽃을 매만지자 정환이 슬그머니 물잔을 건네주었다.

꽃말 알아요?

번영 그리고 성장.

잘 어울려요. 대협이 킥킥 웃었다. 선물한 사람도 알고 했을걸. 누군데요?

…전 여자친구

그 정적은 뭐였을까. 윤대협은 지금도 아리송하다. 전 여자친구와 좋지 않게 헤어진 데에 따른 죄책감? 아니면 친한 동성 후배에게 제 허물을 드러내는 데에 따른 부끄러움? 그것도 아니면,

03

“정환아. 네 후배 찾아왔다.”

“내 후배?”

“엉. 저쪽 정문에서 기다린대.”

전해 듣기론 고교 시절의 어느 누구도 제가 있는 곳으로 진학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거기에는 제각기의 사정들이 있는 법이라 아쉽긴 했어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치기와 열정으로 불태우던 시절은 지나갔고 남은 건 저 자신과 사회와의 싸움이었던 만큼 모두의 축복을 빌어주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저와 함께했던 이들이라면 어디서든 잘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고. 여하튼 제 후배가 찾아왔다는 전언은 그로써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정환의 후배라는 타이틀을 내걸만한 사람이 없는 와중에 당당하게 그의 후배를 자청하며 찾아온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정환은 머릿속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소거법으로 지워나갔다.

따스한 봄 햇살이 물가에 드리워져 반짝 빛을 발하고 그것을 둘러싼 이름 모를 풀에 초록빛이 어른거린다. 옆에서 새내기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나간다. 여자의 옷 플라워 패턴이 주욱 늘어선 걸 보면 봄은 봄이구나, 싶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호기심과 즐거움에 살짝 들뜬 마음을 안고 정환은 목적지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문으로 가니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한두개는 더 큰 사람. 저 익숙한 뾰족 머리. 정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경보는 점차 달음박질이 되고 그 소리를 들은 후배가 고개를 돌린다. 둘의 미소가 똑 닮아있다.

정환이 형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정환의 귓가가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의 얼굴에도 초록빛이 어른거린다.

04

“인식하는 순간 곧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열매, 꽃, 잎사귀, 가지와 같은 사물은 당신이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학적인 말이 어지러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대협은 꿋꿋하게 고개를 들어 교수를 쳐다(노려)보았다. 수강신청을 대차게 말아먹은 나머지 억지로 듣게 된 교양 철학 수업은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생각보다는 몸을 먼저 움직이는 게 체화된 — 심지어 이것도 몸으로 하는 거다 — 그에게 있어 이건 신종 고문이었지만 그래도 이 수업에서 F는 면해야 다음 학기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결국 그에게 남은 방법이란 혼신의 힘을 다해 수업을 듣고 뭐라도 써서 내야 하는 거다. 몽롱하다 못해 어지러운 머리를 깨우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인식하지 않았다고 혹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당연한 이야기지만 철학에는 정답이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엎치락뒤치락할 뿐이죠. 그게 철학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글쎄요. 보통은 진입장벽이죠?”

교수의 농담 아닌 농담에 몇몇 이들이 슬그머니 웃었으나 대협은 그 무리에 끼지는 못했다. 이윽고 교수가 수업의 종료를 알리자 대협은 뻣뻣한 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강의실 바로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고 고개를 돌리자 늙은 교수가 안경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 실례를 저지를 뻔했다.

“윤대협 군, 맞나요?”

“네에. 맞습니다.”

눈에 확 띄어서 바로 알아봤어요. 제 아들이 농구팬이거든요. 교수가 웃으며 아는 체를 하자 대협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렇군요.

“원래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교양이라 해도 이 수업에 안 들어오는데 무슨 사정이 있나보죠?”

“예… 뭐. 그렇죠.”

“그래요. 편안하진 않겠지만 한 학기 잘 지내봅시다.”

말이라는 건 힘이 있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했건만. 교수가 말한 ‘편안’이라는 단어가 힘을 발휘한 나머지 대협은 편안하게 물었다.

“교수님. 제가 만약 사라진다면 제 사랑도 사라지는 건가요?”

교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윤대협이 입을 텁 막았다. 아무 생각도 거치지 않고 불쑥 치고 올라온 질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 몇 주 전에 들었던 형의 엉뚱한 질문에 골몰하던 탓이다. 면구스러웠던 나머지 대협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 아니에요. 방금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어요. 아까 수업 때 하지 그랬어요? 호호.”

그랬다가는 강의실 내의 모두가 저를 죽이려 들었을 거예요. 대협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안경 너머로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지레 찔려 눈을 슬쩍 내려 제 신발의 앞코를 바라보았다.

“사랑, 아름다운 울림이네요. 사랑을 하고 있나 보죠?”

“….”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인식론과 존재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식, 그러니까 지각과 감각이 핵심이에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대상, 실존하는 것에 한정되어 말할 수밖에 없죠. 학생이 말한 운명과 사랑. 그건 지각이나 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는 걸 먼저 이야기해야겠네요. 이해되었나요?”

요컨대 철학이 논할 범위가 아니라는 소리다. 단호한 대답에 대협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실존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냐만 가닥이라도 잡히면 제 다음 행동을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가 느낀 이 기묘한 고동과 간질거림이 감각의 혼선인지 아닌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불확실한 감각만으로 일을 벌리기에는 그는 정환의 일에 관해서라면 두려운 게 많았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어요.”

“뭔가요?”

교수가 안경을 슬쩍 치켜 올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꼭 사고뭉치 개구쟁이의 웃음과 똑 닮아있다.

“사랑을 철학의 원리로서 고찰해 본 사람은 생각보다 거의 없다는 점이죠. 그건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니까. 달리 말하자면, 그것의 실존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에요. 운명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사랑을 너무 의심하지 말도록 해요. 그건 우리의 인식의 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실존하고 있으니까. 교수는 담백하게 덧붙이곤 슬쩍 웃었다.

그 미소가 제 눈에는 자신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정환이 형이 보고 싶은 걸 보면.

05

아주 드물게도 정환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 잠에서 깨었다. 제법 무던한 성격이었던 만큼이나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일이다. 어스름한 빛이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와 세덤의 반쪽을 비춰준다. 정환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빛이 머문 잎을 천천히 매만졌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 아니면 운명인지 그 잎사귀는 윤대협이 장난스레 가지고 논 것이었다. 정환의 눈동자가 흐려진다.

*

그분은 형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알았네요.

그러기야 하겠지. 그 말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정환은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대협이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운하다. 갑작스레 치고 올라온 생각에 정환은 숨을 멈췄다. 왜? 뭐가 서운한데?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어렵지만 그 원인을 찾는 데에는 탁월했던 그다. 전 여자친구를 칭찬해줘서? 아니. 말이 안 된다.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서?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아니면.

저 이만 가볼게요.

더 안 있고?

잠깐 물건 하나 빌리러 온 건데요, 뭘.

대협이는 제 서랍 속에서 새 아대를 하나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알려주지 않아도 물건을 잘 찾았다는 거에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대협이를 배웅하러 나왔다.

다음에 학교에서 봐요 형.

뭐라 답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아마 적당히 대답했을 거다. 그 녀석에게는 늘 그래왔듯이.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윤대협이고 저를 불타오르게 하는 것도 윤대협이다. 그러니까 이건 수없이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다. 정환은 입가를 쓸어내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구나.

그런데 내 가디건은?

*

때 아닌 초인종 소리에 정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15분 전이다. 어렴풋하게 잠이 깨었을 시점이지만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집주인의 잠을 과격하게 깨우질 않았으니. 정환은 침대맡에 걸려놓은 얇은 티셔츠를 입곤 현관으로 향했다. 불청객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약간의 짜증을 품은 표정으로 문을 덜컥 열었다. 바깥의 사람이 타이밍 좋게 문을 턱 잡았다.

“…윤대협?”

“후우. 다행이다… 깨어 있었네요?”

“너, 왜.”

“옷 돌려주게요.”

옷을 돌려주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그의 한 손에 제 가디건이 걸려있다.

“…왜?”

저가 던져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왜 지금 가디건을 돌려주러 온 거야? 왜 너는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있어?

왜 너는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요.”

무슨 기회? 정환은 묻지 못했다. 그러나 윤대협은 이정환의 행동양식도 사고 방식도 모두 꿰뚫은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대협이 숨을 한 번 탁 내뱉었다.

“저는 여전히 사랑의 존재보다 저를 믿어요.”

대협은 정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달려오느라 팔에 맺힌 이슬과 땀방울이 옷 위로 선연하게 느껴진다. 정환이 숨을 멈췄다.

“사랑이 저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 그런 건 몰라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대협이 정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을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격정을 누를 길이 없다.

“형이 내 인식을 모두 다 가져갔어요. 그러니까… 책임져요.”

뒷말은 잘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의 떨림은 분명히 전해졌다. 정환 또한 그 격정을 달랠 길이 없어 대협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떨림이 잦아드는 묵직한 몸을 느끼며 정환은 눈을 감았다.

*

대협은 그날 바로 자신의 기숙사 짐을 정환의 자취방으로 옮겼다. 정환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했으면 몰라도. 넓디넓은 공간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남자의 어깨에 정환이 턱을 올렸다. 손에는 에어컨 리모콘을 든 채로.

“냉방은 26도 정도로 맞춰둘게. 원하면 언제든지 올려도 돼.”

띡. 바람이 잦아들고 대협은 몸을 돌려 정환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부드러운 입술이 살며시 그에게 내려앉는다.

사랑은 실존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실존한다. 그러니 저들의 감각이 서로에게 얽혀있는 한 사랑의 실존은 의심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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