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1,095일 동안
우성명헌) 우성이 떠난 후의 명헌과 산왕 이야기입니다
포스타입에 발행했던 글을 사알짝 다듬어 재발행합니다
산의 여름은 강렬하지만 짧다. 인터하이의 흔적을 뒤로 하기 무섭게 새벽 공기가 서늘해졌다.
정우성이라는 희대의 난 놈을 배웅한 후, 산왕공업고등학교 농구부의 3학년들은 은퇴를 미루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낙수도 윈터컵까지 부 활동을 계속할 거라 약속했다. 전국최강의 타이틀을 잃어버린 후배들이 풀 죽어 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정우성의 부재를 어색해하는 동급생들이 신경 쓰였던 걸 수도 있었다.
전국구의 대회를 앞둔 여름이 아니라면 단체 연습은 오후에만 있었다. 그렇더라도 종일 연습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산왕공고는 전국 구석구석의 농구 에이스, 연습벌레들이 모인 곳이었다. 잘난 놈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 주전으로 뛰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이명헌이 1학년일 때 3학년이었던 주전 선배들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어린 후배들을 데리고 학교 근처를 조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바로 위의 학년들은 주전 선배들보다 30여분 일찍 일어나 먼저 운동하고 부실로 갔다. 전날 정리해놓은 농구공 카트를 꺼내어 개인 연습할 준비를 마치면 3학년 뒤에서 비몽사몽으로 뛰었던 1학년이 우르르 돌아와 제각기 페어를 짜고 스트레칭을 했다.
어제부터 명헌은 2학년과 같이 뛰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의 기상 시각에 맞춰 일어나는 것뿐이었는데 눈 뜨는 것이 더럽게 힘들었다. 고작 30분이 뭐라고. 어제는 조깅하러 이동하는 2학년 무리 끄트머리에 간신히 끼어들었는데 오늘은 그래도 선두에 섰다.
후배들은 명헌이 왜 저들과 같이 뛰고 개인 연습 준비를 돕는지 묻지 않았다. 눈알을 도르륵 굴리기는 하는데 제각기 이유를 가늠하는 눈치였다. 2학년보다 365일 가량 더 살았다고 더 뻔뻔한 3학년들이 뭐 하러 사서 고생하느냐 캐물었으나 명헌은 딴소리만 했다.
“우성이 빈자리에 대신 들어가는 건데용.”
“그럼 주장 자리는 누가 채우고?”
“그거야 부주장이.”
“그럼 부주장의 빈자리는?”
“거야…….”
명헌은 얼버무리고 도망쳤다. 제일 집요하게 추궁했던 현철은 자리를 피하는 명헌을 쫓지 않았다. 친우의 속내를 어림짐작하여, 조금 측은해했을 뿐이다.
산왕공고 농구부의 2학년 중에 우두머리는 명실 공히 정우성이었다. 새벽 조깅에서는 가장 앞에서 달리고 아침 연습 때에는 가장 먼저 농구공을 만졌다. 가끔, 명헌은 씩씩하게 구령을 붙이는 우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동급생들을 두들겨 깨워 2/3학년 합동으로 조깅을 하고는 했다. 습한 안개 속에 맑게 깔리는 목소리에는 어리광이나 투정 같은 건 담겨있지 않았다. 그게 참 어른스럽고 마음에 들었더랬다. 하지만 떠난 사람을 대신하게 된 2학년은 변성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절도 있는 구령의 끝이 이따금 살짝 갈라졌다. 그에 흘끗거리면 후배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책망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명헌은 적당한 선후배 사이로만 지냈던 한 학년 아래 부원의 새로운 면모―부끄러움이 많다는 걸 머릿속에 체크해놓았다.
1학년보다 더 늦게 일어나는 해가 드디어 잿빛 이부자리에서 벗어났다. 2학년 일동과 3학년 한 명으로 구성된 농구부 일동이 체육관 앞에 다다라 서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뿅.”
한낮에도 감당하기 힘든 주장의 말장난에 2학년이 우왕좌왕했다. 명헌은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으나 2학년에게는 어떤 신호가 된 것 같았다. 실내에 들어가기 위해 질서 있게 한 줄 서기를 한 이들이 꾸벅꾸벅 명헌을 향해 인사를 거듭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장.”
“너희 어제는 인사 안 했잖아용.”
“수고하셨습니다!”
개인 연습 준비로 마음이 급해진 2학년은 정우성이라는 이빨이 빠진 주장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인사를 전부 받아 준 명헌이 피로 가득한 얼굴로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갈아 신었다.
우성의 유학은 인터하이 시즌을 앞선 계절부터 정해져 있었다. 명헌의 첫사랑도 그렇게 유통기한이 정해졌다.
명헌은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무뚝뚝한 소년이었지만, 선배랑 농구하는 게 재미있다고 활짝 웃으며 쫓아다니는 소년에게는 별 수가 없었다. 예뻐하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으니 굴복하는 수밖에. 그래서 귀여워해줬다. 응석도 받아줬다. 그걸 1년 정도 반복하고 나니 어린 후배는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와 제 집처럼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헌은 가급적이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어떤 남자애들은 같은 남자애에게서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역겨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티를 내야할 정도로 대단한 일 같지 않았다. 그는 그냥, 우성이 좋았다. 선배에게 건방지게 귀엽다고 해도 웃어넘겼다. 땀 흘리고 불쾌하게 닿는 끈적한 살갗도 우성의 것이라면 괜찮았다. 명헌이 일찌감치 깨달은 사랑이란 급식 같은 거였다. 아침부터 생각나는 것. 매일 때가 되면 꼬박꼬박 섭취해야 하는 것. 먹고 나면 아쉽고 다음이 기다려지는 것.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면 다시 엮일 일이 없는 것…….
산왕공고에서 학생식당은 두 집단에게만 무료로 개방되었다. 교직원과 농구부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 올 리 없으니 학교에서 특별히 배려해준 거였다. 산왕공고 OB들은 농구부 생활을 회고할 때 무료 급식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농담 삼아 얘기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만 해도, 명헌은 우성을 향한 콩닥콩닥한 마음 역시 그렇게 될 거라 여겼다. 그만한 얼굴에 그만한 몸, 그 같이 애교 많은 성격에 뛰어난 운동 실력을 갖춘 이상형이 둘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 이거.”
오늘 급식줄 1등은 현철이었다. 2등과 3등은 성구와 명헌이 차지했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칼같이 식당으로 달려왔는데도 이랬다. 명헌은 현철이 종치기 전에 교실을 박차고 나온 게 아닌지 의심했으나 배고픈 고등학생에게 그런 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밥, 많이. 반찬, 많이. 여하튼 많이 받는 게 중요했다.
기계처럼 딱딱 배급받아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첫 번째로 줄을 선 현철이 반찬을 받다 말고 멈칫했다. 아, 뭐야. 명헌의 다음으로 줄을 선 동오가 고개를 내밀고 야유했다. 그러나 현철은 자신보다 느린 패배자의 야유는 신경도 안 썼다.
점심팟―이른 바 점심을 같이 먹는 농구부 주전들이 제각기 자리에 앉고 나서야 현철이 운을 띄웠다.
“이거 햄볶음 말이야.”
맞은편에 앉은 명헌은 입이 바빠 눈으로 물었다. 그게 뭐용.
“우성이가 좋아했던 건데.”
제 덩치에 맞게 밥을 퍼먹던 이들이 하나같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현철 진짜.”
“누가 들으면 정우성 죽은 줄 알겠다.”
“미국에 햄볶음이 있겠냐, 어? 그렇다고 걔가 만들어먹을 줄 알기를 해, 만드는 식당 찾아갈 주변머리가 있기를 해?”
“하긴.”
“갑자기 생각날 수도 있잖냐.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서러워지는데.”
입 안에 햄볶음이 한가득 있었던 명헌은 말을 얹지 않았지만, 솔직히 기가 찼다. 정우성을 좋아하는 명헌마저도 밥 먹을 때 떠나있는 놈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 현철은 못내 우성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누가 챙겨주는 거에 익숙해서 그렇지 제 앞가림은 야무지게 할 애였는데도.
우성은 농구 외의 일에 단호한 면이 있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였다. 괜한 거에 신경 쓰느니 농구 연습이나 하겠단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안 볼 사이라면 철부지처럼 굴건 말건 내버려뒀을 텐데 유독 현철은 에이스의 품격을 빙자한 귀차니즘을 많이도 혼냈다. 관절꺾기를 당한 우성이 시무룩하게 쳐다봐도 개의치 않았다. 명헌을 비롯한 3학년은 멀찍이서 현철의 오지랖을 구경했다. 다 후배 잘 되라고 그러는 거였다.
오전 내내 굶은 고등학생들의 식사 시간은 짧았다. 없는 사람 이야기하며 두런두런 식사할 여유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햄볶음이 사라지는 속도만큼 우성을 향한 걱정이 옅어졌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점심이 되면 현철은 습관처럼 우성을 생각할 거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걱정을 덜어 놓을지도 몰랐다. 정우성이라는 빈자리에게서 드디어 해방되는 거다.
명헌은 그런 현철이 부러웠다.
“어, 명헌아. 까먹을 뻔.”
식당을 나서는 명헌을 성구가 불렀다.
“매니저가 그러던데 오늘부터 문가에 의자들 다 치운다더라.”
“의자?”
“왜, 공개 연습 때 우성이 기다리던 여학생들 전용 의자 있잖아. 계속 서 있는 게 불편해 보인다고 감독님이 배려해주셨던.”
아, 그거. 명헌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이명헌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정확히는 정우성이 입학한 이래 농구부 연습을 보러 오는 여학생들이 많아졌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체육관을 개방하고 공개 연습하는 날이면 여학우들이 문가에 모여 실내를 훔쳐보고는 했다. 많을 때는 네다섯 명. 여학생 한 명이 외로이 있을 때면 그날 우성은 거의 99.99퍼센트의 확률로 러브레터를 받았다.
“그거용, 감독님 지시?”
성구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의자 빼라고 하신 건 아니고. 공개 연습을 줄인대. 이제 오는 애들도 없을 테니 의자는 치워놓겠다는 거지.”
“흐음.”
“우성이 없어도 구경하러 올 수 있는데. 안 그러냐?”
명헌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자 성구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동오도 그렇고 너 보러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거야 명헌도 알고 있었으나 관심이 없을 따름이었다. 성구의 등을 두드린 명헌이 후식 얘기를 꺼냈다.
“매점 아이스크림, 뿅.”
“뭐? 진작 얘기했어야지. 지금 가면 애들 바글거려.”
그래도 성구는 싫다고 안 했다. 명헌은 앞서가던 애들도 불러 모았다. 우성이 곁에 있었더라면 달콤한 걸 사먹었겠으나 떠난 자의 취향을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커피 맛도 좋다. 시큼한 샤베트도 좋았다. 어쨌거나 오늘은 단 건 별로였다.
산왕공고 농구부는 그럭저럭 공평하게 잡일을 배분했다. 2학년이 아침 일찍부터 개인 연습을 준비했다면 1학년은 오후 연습 후 마무리를 맡았다. 그럼 3학년은? 후배들에게 거들먹거리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라고 얼버무리기에는 젊은 도 감독이 깐깐했다. 3학년은 매일 잡일을 하지는 않았으나 당번을 정해 시설 관리를 맡았다. 락커룸을 청소하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기타 등등.
그날도 우성은 시답잖은 것으로 현철에게 혼쭐나 풀이 죽어 있었다. 아마 그랬을 거였다. 우성은 하소연할 곳이 필요해지면 명헌에게 오고는 했으므로, 연습이 끝나 체육관에 있을 필요도 없으면서 당연한 수순처럼 그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정우성 전용 만병통치약, 즉, 일대일을 해달라는 시위였다.
명헌은 부원들에게 엄격한 주장이었지만, 우성이 선배들에게 기어오르려 하지만 않는다면 웬만한 건 봐 줬다. 지금도 락커룸 앞 복도를 대걸레질하는데 쫓아다녀 발자국 내는 몰염치한 놈을 봐 주고 있었다(사랑이었다). 하지만 저보다 덩치 큰 애가 청소를 방해하는 건 역시 성가셨다. 명헌이 대걸레질을 하느라 구부정하게 굽힌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우성을 돌아보았다.
“일대일?”
해줄 테니까 구석에 찌그러져 기다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우성이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뭐용?”
“나는 분위기도 간보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려 했는데 현철이 형이 옆에서 보기 짜증난다고 일단 질러보라고 했거든요. 진짜 이건 내 탓은 아니고요. 결심한 거 까먹지 않게 오늘.”
“잠깐, 우성.”
“어, 네.”
“긴 이야기야?”
우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요?”
명헌이 턱 끝으로 복도 저 끝을 가리켰다.
“그럼 의자 가져와서 저기, 소화전 옆에 앉아서 얘기해용.”
“에?”
“청소하면서 들어준다고.”
우성은 황당해했으나 명헌이 다시 대걸레질에 열중하자 별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여학생들 전용으로 가져다놓은 의자는 학교 당직실에 굴러다니던 캠핑용이라 엄청나게 작았다. 의자에 엉덩이 한쪽만 걸친 꼴이 된 우성이 제 앞을 오락가락하는 명헌에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명헌이 형.”
“어어.”
“나 형 좋아하거든요?”
어어, 뿅. 무성의한 대꾸를 뱉은 명헌이 5초 뒤에 우성을 휙 돌아보았다. 우성은 귀 끝과 목이 빨개져서 심통이 난 건지 부끄러움을 타는 건지 모를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봐주네.”
전자였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예요. 그러니까, 그런, 음, 그런 의미로.”
명헌은 의자를 더 가져와야 하나 갈등에 휩싸였다. 냄새나는 대걸레를 옆에 끼고 무릎 맞대어 앉아 좋아하는 후배에게서 고백 듣기, 라는 상황은 여태 꿈꿔보지 못했었다. 현실감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멍했다.
우성은 깊은 고뇌에 잠긴 명헌이 딴생각을 한다 생각했는지, 살짝 울컥한 얼굴로 주절주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건 형 탓도 있어요. 자꾸 사람 오해하게 잘해주고. 주장이 에이스 챙기는 건 당연하긴, 개뿔이. 주전 형들은 다 알아요. 형이 날 예뻐하고 특별취급한대요. 농구를 잘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러면 나 농구할 때만 보고 있었어야죠. 새벽에 같이 조깅할 때, 오후에 옷 갈아입을 때, 저녁에 숙제 봐줄 때, 틈만 나면 날 쳐다봤잖아요. 길게. 어, 그렇다고 엄청 긴 건 아니고 10초 정도.”
“…….”
“5초, 6초? 그 정도?”
대걸레 손잡이를 겨드랑이 아래에 끼운 명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티 났어용?”
우성이 뒷목 잡으며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형, 솔직하게 말해 봐요. 나 좋아하죠?”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네용.”
“아, 왜요!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싫다는 건데요?”
“싫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금세 우성의 안색이 밝아지기에 명헌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용. 너 어차피 이번 여름 지나면 미국 갈 거면서.”
“상관있죠, 당연히. 적어도 손 한 번은 잡아보고 갈 수 있잖아요.”
명헌이 픽 웃었다. 저도 어렸지만 우성의 발언이 너무 앳되었다. 키스나 섹스도 아니고 손을 잡아본 댄다. 그것도 한 번만. 그런 애라는 건 알고 있었어도 새삼스럽게 귀여웠다.
“그래용, 뭐. 나도 너 좋아하긴 하는데.”
“진짜요?”
“사귀고 그런 건 잘 모르겠어.”
솔직함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만, 우성에게는 달랐다. 꾸밈없는 날것 그대로의 속마음에 우성이 오히려 안심한 듯 웃었다.
“형은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형도 날 좋아한다고 하면 부탁하려 그랬거든요.”
“뭐를?”
“나 미국 간 다음에요. 스물쯤 되면 다시 형한테 고백하러 올게요. 그때까지 아무도 사귀지 말고, 딴 사람에게 한 눈 팔지 말고 나만 생각해줄 수 있어요?”
“그때까지 혼자 있으라고용. 꿈도 크네용.”
“나한테 삼 년만 투자해요. 그럼 삼십년 동안 형을 사랑해줄게요.”
단칼에 거절한 게 튕기는 줄 알았나보다. 명헌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당당하게 늘어놓는 우성에게서 관심을 껐다. 싱그럽게 재잘대는 얼굴에 홀려 멈춰 서 있었더니 대걸레가 그새 말라 있었다. 고개를 내저은 명헌이 대걸레를 질질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일어나 황급히 의자를 접은 우성이 아예 의자를 끌어안고 명헌을 졸졸 따라왔다. 형! 약속한 거죠, 그렇죠?
명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이 스물이면 명헌은 스물 하나다. 그때부터 삼십년이면 오십 살 즈음에는 우성과 헤어져야 했다. 그는 백 살이 되어도 우성과 헤어진다는 가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추억의 간의 의자를 치운 날에는 오후 연습이 일찍 끝났다. 감독에게 손님이 온 덕분이었다. 정확히는 손님이 둘이었다. 한 명은 매서운 눈매를 안경으로 가렸고, 다른 한 명은 익숙한 모양새의 간이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습관처럼 눈을 마주친 성구와 명헌이 시선을 교환했다. 기자네. 기자가 왔어용.
무패가도를 달리던 산왕은 올해 우승컵을 지키지 못했다. 악랄하게도 그걸 기삿감으로 여겨 찾아온 건가 싶었지만, 심부름으로 감독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매니저가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정우성 취재?”
“그럼 우성이 있을 때 왔어야 하는 거 아냐?”
“유학 간 학생 특집인가?”
농구하다 이르게 유학을 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취재를 나올 정도인가? 머리를 굴리던 명헌은 몇 초 지나지 않아 호기심을 털어버렸다. 하긴, 정우성이니까. 명헌은 나중에 잡지에 나올 기사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연습이 이르게 끝나 자유 시간을 덤으로 얻은 농구부원들은 신이 났다. 그러나 외출증 없이는 시내에 나갈 수 없고 공부하기는 싫었던 고등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고는 축구, 족구, 야구 따위의 공놀이밖에 없었다. 현철을 비롯한 3학년은 텅 빈 운동장에 모여 팀을 갈랐다. 종목은 축구였다. 1학년과 2학년은 합심하여 실내에서 피구를 한다고 했다.
명헌과 동오는 인터하이 때문에 제 때 제출하지 못한 과제의 피드백을 받고 왁자지껄 소운동회에 불참했다. 과제를 못해서가 아니라, 잘했기 때문에 문제였다. 청소년 기술대회인지 뭔지에 출품해보자고 부장 선생이 난리였다. 너희 인터하이 성적이 부진했으니 대학 진학을 위해 보험 삼아 해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윈터컵 걱정에 잠도 설칠 지경인데 됐다고 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인터하이’, ‘성적 부진’에 버튼 눌린 동오가 하겠다고 한 바람에 같이 피드백을 받으러 갔던 명헌도 덤탱이를 써 버렸다.
노을로 새빨갛게 물든 실습실에서 미남과 단둘이 납땜하는 건 제법 분위기가 있었다. 청춘의 앨범 한 장을 장식하는 그런, 운치? 그만큼 기분은 끝내줬다. 명헌은 이따금 급발진 해버리는 못된 버릇이 있는 동급생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의 눈치를 보던 동오도 될 대로 되라 싶었는지 태도가 당당해졌다.
“이거 내서 진짜 상 타면 같은 대학갈 수도 있겠다, 우리.”
“징그러운 소리하지 말고용.”
“왜? 그럼 윈터컵은 부담 없이 출전할 수 있잖아.”
“최동오. 윈터컵을 감히 부담가지지 않고 뛰려 했어?”
짐짓 엄하게 되물은 명헌이 인상을 찡그렸다. 납땜 냄새가 거슬렸던 탓이다. 똑같이 미간을 구긴 동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돌아왔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으면 제 실력이 안 나오니까.”
“순 핑계, 뿅.”
“빈자리를 채우려면 내가 더 노력해야지. 네 에이스는 언제나 정우성이겠지만, 침착하게 실수 안 하고 잘 뛰면 땜빵 정도는 할 수 있어.”
명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튼 소리 말고용. 널 우성이처럼 쓰겠다고 해도 감독님이 허락 안 해주면 말짱 꽝이에용.”
“그런가?”
“그리고 땜빵 소리는 당분간 금지에용. 납땜 지긋지긋하다.”
동오가 펼쳐놓은 도면에 코를 박았다. 저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모양새였다.
“근데, 오늘 안에 이거 다 못하잖아.”
“내 말이!”
창문을 열어놓은 실습실로 모처럼 풀어진 농구부원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급격히 집중력을 잃어버린 둘은 그 날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도면과 인두를 챙겼다.
저녁 식사 시간의 화제는 단연 피구와 축구였다. 현철은 자신이 상대팀 낙수를 제치고 얼마나 재빠르게 발을 놀렸는지, 골키퍼 성구가 얼마나 골대를 지키지 못했는지를 그럴싸하게 들려주었다. 명헌은 그날 저녁으로 나온 카레를 퍼먹으며 경청하다 두 마디 했다. 근데 졌다며용. 코트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동료에게도 가차 없는 지적질에 크게 감명 받은 낙수가 명헌에게 제 몫의 요구르트를 줬다.
“아오, 잊고 있었네. 원래 이명헌한테 암바걸려고 기술 배워놨던 거였는데.”
현철이 짜증을 냈지만, 명헌은 알았다. 길게 가봐야 반나절짜리였다. 짧게 가면 1시간.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이 지나 예습할 교과서를 가지고 공용 공간으로 온 현철이 먼저 자리 잡은 명헌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도 새벽에 2학년이랑 뛰지?”
“같이 뛰게용?”
“2학년 애들 부담되려나? 이명헌, 어땠냐. 막 싫어하는 눈치였어?”
“딱히?”
명헌은 옆에서 뛰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후배들을 떠올렸다. 명헌이 어깨를 으쓱이자 동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나도 할래. 성구와 낙수는 생각해 보겠다 했지만 둘은 이번 주 내로 30분 아침잠을 반납하게 될 터였다.
우리 농구부에는 마조히스트만 모여 있는 게 틀림없어용. 주장의 특권인 독방으로 돌아온 명헌은 오늘 했던 농구 연습을 복기하고 내일 할 연습을 구상해보았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면, 저나 다른 농구부원들이나 농구공에 미친 인간들이 분명했다. 명헌은 책상 옆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돌아보았다. 정우성이 모델이 된 인터하이 농구 포스터다. 포스터 속 우성은 지금보다 더, 더욱 더 농구에 미치라고 훈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친 채로 삼 년을 기다리라고?’
그러고 보니 왜 하필 삼 년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눈앞에 우성이 있었다면 머리 뚜껑을 열어보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불가능했다. 명헌은 한참동안 포스터의 에이스와 눈싸움을 하다 내일 수업을 위한 교과서를 착실하게 챙겼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삼 년.
윈터컵과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반년은 거저먹는 거였다. 그리고 우성은 별나라가 아니라 고작 미국에 간 거였으니, 정 궁금하면 편지나 전화로 이유를 물어보면 되었다. 그 핑계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았고 말이다.
우성이 없는 1,095일 중 하루가 저물어갔다. 명헌은 함께 뛸 2학년에게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다독여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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